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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21:16:50

사로병진책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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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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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작전 전개4. 결과

1. 개요

임진왜란(정유재란기) 조선 - 명나라 연합군이 일본군에게 펼친 총공세, 성공했다면 조선 주둔 일본군을 끝장 낼 수 있는 작전이었다.

파일:attachment/사로병진 작전/Example.jpg

2. 배경

1598년 8월 18일(양력으로는 9월 18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직후에 5봉행(奉行)과 5대로(大老)는 일본군의 철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침략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3. 작전 전개

1598년 7월 경략(經略)[1][2][3][4] 형개(邢驚)[5][6]가 한성으로 당도하면서,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군을 공격 목표로 한 동로군과, 사천 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군을 공격 목표로 한 중로군,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목표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동시에 남진하였다. 이와 아울러, 진린의 명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의 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세웠다. 9월부터는 일본군의 상호간의 구원 전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 남해안 일대의 적군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개시하였다.

특히 연이은 승리 후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까지 승리하면서 그 사기가 높아지고, 울산성 전투에서도 승리할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실패했다.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가 버티고 있던 사천성 전투 같은 경우, 조, 명 연합군 모두 큰 피해를 입으면서 패배했다.

이 때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8월에 들어와 대군을 거느리고 한성을 출발하여 수원을 경유, 전주로 내려온 다음, 순천 왜교성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그는 9월 19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 병사 이병악 등이 이끄는 조선군 1만여 명 등 병력 3만 6천으로 왜교성 공격을 서둘렀다.

수로군은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 명나라의 진린이 이끄는 수군이 합세하면서 편성된다. 그리고 7월 24일 조명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흥양의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에서 승리 후, 9월 하순에 이르러 마침내 서로군의 유정이 이끄는 육상군과 조 - 명 연합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최후의 총력전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음력 10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결국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했다(왜교성 전투).이 전투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왜군 3천 명을 무찔렀다. (장도 해전) 일본에 의하면 조명 수군 8백 명에게 사상을 입혔으며 조선 기록에 의해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휘하의 조선군 130명도 전사했다. 뒤이어 펼쳐진 노량 해전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투입된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는 전멸했지만, 정작 목표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놓쳤고, 여기에 조선 측도 이순신 본인이 전사한 것을 포함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4. 결과

삼로의 군사가 패전하다
이때 동로(東路)의 중국 군사는 2만 4천 명이고 우리 군사는 5천 5백 14명이며, 중로(中路)의 중국 군사는 2만 6천 8백 명이고 우리 군사는 2천 2백 15명이며, 서로(西路)의 중국 군사는 2만 1천 9백명이고 우리 군사는 5천 9백 28명이며, 수로(水路)의 중국 군사는 1만 9천 4백명이고 우리 군사는 7천 3백 28명이었으니, 모두 합하면 10여만 명이었다. 군량과 무기도 이에 비등했는데, 삼로(三路)의 군대가 흔적도 없이 무너지니, 인심이 흉흉하여 보따리를 싸 가지고 있었다.
(是時, 東路天兵二萬四千, 我兵五千五百十四名; 中路天兵二萬六千八百, 我兵二千二百十五名; 西路天兵二萬一千九百, 我兵五千九百二十八名; 水路天兵一萬九千四百, 我兵七千三百二十八名, 共計十餘萬。 資糧、器械稱是, 而三路之兵, 蕩然俱潰, 人心恟懼, 荷擔而立)
{{{#!wiki style="text-align:right"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5권, 선조 31년 10월 12일 갑자 7번째기사}}}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이 펼친 사상 최대의 공세로 성공했다면 바그라티온 작전처럼 일본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다수의 포로를 확보하여 일본 측을 압박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손발이 맞지 않거나 보급과 불운까지 겹쳐 실패하고 말았으며, 전투 중에 전사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일본군 대부분이 무사히 철수함으로써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이후 강화 협상 과정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노량 해전에 관한 기록들 중에는 명나라군의 장수들이 일본군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일본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만일 명나라군이 조선군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만세불공지수(萬世不共之讐)로 여기고 이를 갈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고니시 유키나가이순신에게 뇌물을 바치고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명나라군의 입장에서는 이미 순망치한의 논리로 조선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성공했으니 구태여 자신들이 더 피를 흘려가며 일본군을 죽여줄 이유가 없었고 이것이 사로병진책의 결정적 실패의 원인인 것이다.
[형(邢)]개(玠)가 참군(參軍)[註742] 이응시(李應試)[註743]를 불러 계책을 묻자, [이(李)]응시(應試)는 조정의 기본 방침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개(玠)가 말하기를, “겉으로는 싸우면서 안으로는 화의(和議)하고자 하고, 평면으로는 토벌하되 이면으로는 초무(招撫)한다(양전음화陽戰陰和, 양초음무陽剿陰撫)[註744]는 방침이니, 정부(政府)의 여덟 글자로 된 비밀 계획은 누설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명사, [만력(萬曆) 25년(1597)] 8월}}}

이 사료에도 나오듯이 작전의 입안자인 병부상서 형개조차 일본군을 제거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으며 그 휘하 장수들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명군 역시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어 일본군을 압도하지 못했다. 앞서서 불운이 겹쳐 아쉽게 졌다는 투로 서술되어 있기는 하나 그것이 실패의 온전한 이유는 될 수 없다. 명-조선 연합군은 일본군을 궤멸시킬만한 자원과 전력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울산성 전투, 사천성 전투, 왜교성 전투가 모두 명나라군의 패배로 끝났기에 사로병진책은 달성하기 어려운 전략이 됐다.

물론 명나라 입장에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임진왜란은 원래 명나라의 전쟁이 아니었다. 원래는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었고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인해 조선에서 왜군을 물러나게 하기 위하여 파병을 한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명나라는 7년동안 막대한 군량을 소모하고 많은 병사를 희생시켰지만 일본군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고 승전의 가능성은 요원하기만 했다("無勝算").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나서 일본군이 스스로 철군하게 되어 명나라는 전략적 목표를 비로소 이루었는데 그런 명나라가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싸워 추가적인 희생을 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 철군 당시 기록된 명나라 사서 내용을 봐도 7년간의 전쟁에 지쳤던 당시 명나라가 느꼈을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왜(倭)가 조선(朝鮮)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는데도 중국(中國)과 조선(朝鮮)이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는데, 관백(關白)(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죽고서야 화란(禍亂)이 비로소 종식되었다.
(自倭亂朝鮮七載, 喪師數十萬, 糜餉數百萬, 中朝與屬國迄無勝算, 至關白死而禍始息)
{{{#!wiki style="text-align:right"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 [萬曆] 26년(A.D.1598; 朝鮮 宣祖 31) 11월에}}}


[1] 병부상서 겸 도찰원우부도어사 총독계료보정군무겸리양향경략어왜.[2] 석성의 후임으로 병부상서 직위가 있었는데 이는 현지에서의 지휘 체계 및 예우상의 확실한 보장을 위한 것으로 북경의 병부청사에서 업무를 보던 진짜 병부상서는 따로 존재했다. 명, 청 시대에는 국가적 위기 사태에서 황제가 신임했던 인물에게 실제 관직과 더불어 명예 관직이나 보직을 수여한 사례가 많았다. 수여받은 인물이 확실한 전권을 발휘할 수 있게끔 황제가 힘을 실어주었다고 추측한다.[3] 감찰을 맡는 도찰원의 우부도어사로 임진왜란 이전에 각지에서 어사직을 수행했었다.[4] 조선으로 파견되면서 총독으로 임명되는데 관할지는 명나라의 수도권인 계, 요, 보정이고 군무, 양향(보급)을 담당하며 왜군을 토벌하는 경략의 임무이다.[5] 형개는 정유재란 개전 직전 병부 좌시랑(국방부 제1차관)이었는데 기존의 병부 상서 석성은 심유경의 외교 사기 행위에 연루되어 파면되어 옥에 갇히고 후임으로 상서가 되었으나 만력제가 바로 전쟁터로 보냈다.[6] 명군의 최고 감독관 및 총사령관으로 직급상으로 당시 경략 군문이었던 양호(후에 천진 순무였던 만세덕이 후임으로 보직됨)보다도 상급자였다. 다만 주 역할상 조선에 오지 않고 요동에 있던 사령부에서 전구를 총괄하고 양호, 만세덕으로 대표되는 경략 급(임진왜란의 발발로 신설된 ㅇㅇ군문식의 이런 해외 파병용 전시 보직의 예우는 최소한 명나라 중앙직제로는 각부의 시랑 급, 지방직제로는 순무, 포정사 급에 준했는데 경략 군문을 맡았던 인물들의 커리어를 보면 동급 보직을 이미 지내고 온 상태였다.) 인물들이 실질적으로 조선 전장을 책임지면서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형개가 조선으로 온 것은 양호가 경질된 후 후임자였던 만세덕이 아직 조선으로 부임하지 않아서 임시로 일선 지휘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