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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벽제관 전투 碧蹄館 戰鬪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 벽제관 전투도 | ||
시기 | 1593년 (선조 26년) 2월 27일 | |
장소 | 벽제관 (現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 |
원인 | 일본의 내륙 침공 교두보 확보 | |
교전국 | <rowcolor=black> 일본 (공세) 승 | 조선-명 연합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킷카와 히로이에 모리 히데카네 스에쓰구 모토야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타치바나 무네시게 타치바나 나오츠구 이시다 미츠나리 오타니 요시츠구 호소카와 타다오키 쿠로다 나가마사 | 명 지휘관 이여송 (제독) 천만리 (조병영량사) 이여백 (좌협도독) 양원 (중협도독) 장세작 (우협도독) 사대수 (부총병) 조승훈 (부총병) 이여매 (참장) 이유승 (지휘사) † |
조선 지휘관 추수경 (총병 아장, 명부장) 고언백 | ||
병력 | 일본군: 20,000명 | 연합군: 43,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일본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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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기인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지금의 일본군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전투.이름과 달리 벽제관(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이 아닌, 그보다 남쪽인 여석령(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서 주로 이뤄졌다.
2. 배경
1593년 1월 8일(음력),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대공세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협상을 제시해 그날밤 3군 선봉장 쿠로다 나가마사의 호위를 받으며 성을 내어주고, 1월 9일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차지한다.1월 9일, 조명연합군은 반나절 간격을 두고 평양에서 일본군을 쫓아 남하한다. 개성의 6군 선봉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개성을 사수하자고 주장하지만,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를 묵살하고, 일본군은 모두 한성으로 집합하여, 한성 밖에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군을 두어 명나라와 접전을 준비하기로 한다.
1월 10일, 명나라 군이 빈 개성에 도달했다.
1월 25일, 명나라 군이 수색대로 보냈던 부총병 사대수(査大受)의 부대와, 가토 미츠야스, 마에노 나가야스가 거느린 일본군이 소규모 접전을 벌인다. 사대수의 부대가 60명의 목을 베면서 명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때문에 이여송은 일본군을 점점 더 얕보았고, 한성을 한 번에 수복하자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1월 26일, 명나라 본대가 개성에서 임진강을 건너 파주 땅에 이르렀다.
3. 전개
1월 27일, 부총병 사대수와 조승훈의 3천의 기병 선봉대가 여석령(礪石嶺)에 도착했다. 명군 선봉은 여석령에 주둔하고 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가신 토토키 츠레히사(十時連久)와 우치다 무네츠구(内田統続)가 이끄는 일본군과 격돌한다. 이때 일본군은 적은 수의 깃발로 명군을 속여 유인하였고, 타치바나 무네시게, 타카하시 나오츠구(高橋直次), 오노 시게유키(小野鎮幸), 네타비 시게히사(米多比鎮久)가 명군을 포위해 격파했다.곧이어 이여송이 이끄는 본대가 도착하여 타치바나군과 맹렬하게 싸웠다. 그러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깃카와 히로이에가 이끄는 일본군이 나타나 명군과 싸웠다. 이여송 본인도 타치바나 가신 안도 츠네히사(安東常久)와 싸우다 낙마해 죽을 뻔 했고, 동생인 이여매가 활을 쏘아 안도 츠네히사를 사살해 간신히 살았다. 이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가신인 이노우에 카게사다(井上景貞)가 낙마한 이여송을 죽이려 했는데, 이여송의 측근인 이유승이 희생하여 목숨을 또 다시 건진다. 이여매는 타치바나 가신인 토토키 츠레히사도 사살하였다. 전투는 중협도독 양원이 이끄는 명군이 도착하자 일본군이 추격을 단념하면서 끝난다.
실제 전투에서 일본군은 주로 오오타치를 휘두르며 근접전 위주로 싸운 것으로 보이는데, 징비록과 주로 이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선조수정실록, 신흠의 상촌집 등에서는 일본군이 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왔다고 적었고, 선조실록에서도 무기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일본군이 사격했다는 명시적인 기록은 없는 반면 돌격해왔다는 기록은 보인다. 일본군의 장창은 거의 보병 상대 둔기류에 가까운 물건이라 기병전에서는 써먹을 수 없었고, 조총은 재장전속도와 명중률에 한계가 있으니[1][2] 결국 오오타치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4. 결과 및 영향
명사 신종 실록에서 이 전투를 자군의 승전이라고 기록했으나, 실상은 명군의 패배였다. 일본의 기록인 태합기에서도 평양, 개성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명군 10만을 적은 병력으로 격파했다고 기록했다.구체적인 데이터가 편린으로 남아있어 근거와 함께 저술한다. 전체적 병력 규모는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지 않고 1924년 일제강점기시절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편찬된 '일본 전쟁의 역사 조선편' 에 기록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조명 연합군 5만 중 선봉대 2만이 일본군 4만 중 선봉대 2만과 벽제관에서 맞붙었다.명군은 2만 중 5천이 전사하였다. - 일본 전쟁의 역사 조선편(일본주장)
일본군은 120명이 전사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5일(조선주장)
조명과 일본군 모두 500명씩 전사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19일(조선주장)
명군은 이유승을 비롯한 지휘관 14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타치바나군의 피해가 심각했는데, 선봉대장 오노 나리유키(小野成幸), 요리키슈를 이끌었던 오쿠시 나리시게(小串成重), 일문인 베츠키 시게토키(戸次鎮林) 등 여럿 가신들이 전사했다. 코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군도 큰 피해를 입어 가로인 요코야마 카게요시(横山景義), 부장인 카츠라 고자에몬(桂五左衛門) 등 여럿 가신들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조명 연합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이여송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 조선에 눌러앉게 되었다.[3] 또한 큰 피해에 놀란 명이 일본측에 휴전을 제안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북방에서 내려오던 조명 연합군과의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의 조선군에 대해 명군을 패퇴시킨 여세를 몰아 강공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5. 대중 매체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29회 초반에 다루었다. 역사와는 전혀 다르게 실제로는 벽제관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고니시 유키나가[4]와 가토 기요마사[5]가 합세해서 이여송의 명군을 함정으로 유인해서 격파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존재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진주 대첩에서 바로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으로 넘어가는 관계로 대충 배경 설명을 위한 해설로 때웠다. 그나마 아예 화면상으로 연출조차 되지 않은 평양성 전투와 행주 대첩과는 달리 이여송이 처절하게 패배하면서 퇴각 명령을 내리는 장면으로 살짝 연출되긴 하였다.
징비록에서는 31회 후반에 다룬다.
- 일본군이 한양에서 지치기를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공격을 미루던 명군에게 광해군의 요청을 받아들인 송응창의 출전 명령서가 도착한다. 이여송은 진퇴양난에 빠지는데 척후 부대로부터 일본군이 성을 빠져나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에 이여송은 급히 조승훈의 선발 부대를 먼저 보내어 확인하도록 한다. 조승훈은 숨어서 일본군의 척후 부대로 추측되는 소규모 부대를 발견하지만 공을 세울 목적으로 이들을 공격하여 추격을 한다. 조승훈의 소식을 들은 이여송은 급히 진군 준비를 서두르고 낙상지는 적의 함정일 수 있다는 걱정과 화포 부대가 있는 남군의 준비 부족을 예로 들며 말리지만 이여송은 오히려 일본군은 조승훈을 기습하려 할 것이라며 기병 중심의 북군만 데리고 급히 출발한다. 그러나 벽제관에서는 이여송에게 평양성에서 대패한 고니시 유키나카가 복수를 하고자 매복하고 있었다. 급히 달려오는 이여송의 명군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대패를 한다.
북군의 기병만이 동원되었다는 사실 등 당시 벽제관 전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더 나은 고증을 선보였지만 역시 코바야카와와 타치바나는 언급하지 않았고 기병 중심의 명 북군을 보병 중심의 군대로 묘사하고[6] 당시 명군의 사정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던 문제도 보였다.
임진록 2에서는 일본군 미션으로 등장한다. 상기한 대로 사실상 왜군의 승리로 보고 있다는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코바야카와와 타치바나는 언급되지 않았고 고니시와 가토가 등장하는데 이는 게임 시스템상 장수가 진영당 5명 ~ 6명으로 고정되어 한두 번만 쓰고 말 인물을 따로 만들기도 뭐해서 그냥 게임에 나오는 고니시와 가토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7] 진행상 무승부로 끝난 실제 전투를 그대로 재현하기엔 뭐했는지 왜군이 명군을 섬멸하는 섬멸전으로 꾸려져 있고, 그냥 단순히 섬멸전으로 만들면 심심할 것을 우려한건지 맵 구석에 위치한 소규모 조선군의 방해를 뚫고 명군 기지 후방에 위치한 군량 창고를 먼저 공략해 사기를 꺾은 다음 섬멸한다는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했다.[8][9][10][11]
게임으로 벽제관 전투를 재현한 영상
[1] 일각에서는 보급 문제로 임진강 전투 시점부터 일본군이 창칼과 장궁을 중심으로 하는 왜구식 전투로 회귀하다시피 한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펼치는데, 당장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도 모란봉에 배치한 철포대만 2천명에 달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증원군 도착 이전에 명군 기병대를 패퇴시킨 것은 철포대의 사격이었다.[2] 사실은 애당초 일본군은 조총을 주력으로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일본군의 조총병 비중은 높게 잡아도 20%가 채 안 되며 이는 최소 30% 이상으로 여겨지는 일본 궁사보다도 적은 것이다. 참고로 정유재란 시점의 조선군은 무려 3만 정 이상의 조총을 확보해(이순신이 생산한 정철총통, 명으로부터 공급받은 오스만식 화승총, 김충선이 알려 준 제작기술을 통해 확보한 조총, 노획분 등) 일본군과 대등하거나 더 많은 조총을 갖고 있었다.[3] 이후 명군은 민폐만 되었다는 시각이 많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유재란 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 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 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 부대를 경주에, 곽재우 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 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 부대를 추풍령 등에만 각각 배치하는 한계가 있었으나 명군은 대략 10만으로 그 전력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따지고보면 17만이나 되던 조선군이 저 정도로 축소된게 명나라가 강화협상을 질질 끌어서이다.[4] 고니시 유키나가는 막 평양성 전투에서 대패하여 패주해 온 관계로 벽제관 전투 당시에는 그냥 한양에 머물러 있었다.[5]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끈 왜군 제2군은 아직 함경도에 주둔해 있었기에 벽제관 전투와 행주대첩 모두 참전한 적이 없다.[6] 다만 이건 예산의 한계와 연출상의 문제도 있다.[7] 이 게임에서 이런 식으로 인물을 땜질(...)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후속작 천년의 신화에서는 아예 기존 영웅을 이름만 바꿔 돌려먹는 식으로 진화했다. 확장팩 조선의 반격까지 포함해서 임진록 2 시리즈에서 한 번만 쓰고 말 존재를 만든 건 조선군 미션 2의 선조의 어가 유닛이 유일하다. 물론 이 회사의 게임만 그런 건 아니고, 스타크래프트만 해도 인물 돌려쓰기가 빈번했던 걸 보면 90년대 특유의 용량 압박과 개발 환경의 한계 때문이라 할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참작이 된다.[8] 실제 벽제관 전투에서 왜군이 명군의 군량을 공략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명군이 임란 내내 보급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이 게임에 등장한 명군 미션 중에도 "군량을 확보하라"라는 미션까지 있었을 정도.[9] 실제 역사에서 명군은 원래 늘 하던 대로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고 자국 화폐인 은전으로 값을 지불하려 했지만(당시 명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 - 심지어 유럽에서도 은을 화폐로 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화폐 경제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아무도 은전을 받으려 하지 않아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할 길이 막혀버렸고, 조선 조정이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준비해 줘도 일단 전쟁터가 된 국가라 나오는 것도 시원찮아 대군인 명군 입장에서는 턱도 없었던 지라, 결국 약탈로 눈을 돌리는 최악의 삽질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와중에 명군을 전쟁터로 내몬 당사자인 만력제는 조선 백성들을 구원한다고 자기 비자금까지 탈탈 털어 대량의 식량을 사다 날라주는 은혜[12]를 베풀어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에서 그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를 지어준다.[10] 다만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대 조선인들도 만력제가 나라 망친 암군이라는 건 인지했고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판했다.[11] 물론 후기에 들어서면 조선 시장에서도 은의 유통이 이뤄졌으나 이는 전시 한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