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髙彦伯, ?~1608조선 중기의 무장이다. 본관은 제주로 자는 국필(國弼), 호는 해장(海藏)이다.
2. 생애
생년 미상으로, 강화도 교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교동의 향리로서 무과에 급제하였고, 군관(軍官)·변장(邊將)을 역임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원군수로서 대동강 등지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패배하고, 계속 분전하여 그 해 9월 왜군을 산간으로 유인, 지형을 이용하여 62명의 목을 베었다.
그 이듬해 양주에서 왜군 42명을 참살한 공으로 왕은 특별히 당상관으로 올리고 양주목사로 삼아 능침(陵寢)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양주에서는 장사를 모집하여 산속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복병하였다가 왜병을 공격하여 전과를 크게 올렸다. 태릉이 한때 왜군의 침범을 받았으나 고언백의 수비로 여러 능이 잘 보호될 수 있었다. 선조가 이를 칭찬하고 관급을 더 올려 경기도방어사로 임명하였다.
노원평[1]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한양 수복에 기여했다. 행주대첩 이후 일본군이 양주로 대규모 수송 작전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관군 2,000명과 의병, 승병 3,000명을 매복시켜 적들을 섬멸한다. 이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된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경기도방어사로 임명되어 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4년에는 선무공신 3등, 제흥군(濟興君)으로 봉해졌다.
1608년 선조 사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해군의 당원이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사망한다.
3. 사후 기념
-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 포항시 성강서사에서 그를 기리고 있다.
[1] 현재의 노원구와 중랑천 일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