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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9 12:41:40

킷카와 히로이에

파일:Kikkawa_Hiroie2.jpg
吉川広家
1561-1625
1. 개요2. 생애

1. 개요

킷카와 히로이에는 킷카와 모토하루의 삼남으로 조슈번 이와쿠라령[1]의 초대 영주를 지냈다. 용장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지략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2. 생애

1561년 태어났다. 어린 시절 버릇이 없어서 잔을 받을 때 예절이 없다며 모토하루가 한탄했다는 이야기나 멋대로 오가사와라 가문의 양자가 되려고 했다는 일화들이 있다.

1570년 아마고군과 첫 전투를 치렀으며, 1583년에는 잠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다녀오기도 했다. 1586년과 1587년 아버지 모토하루와 형 모토나가가 잇따라 죽었기 때문에 킷카와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 1588년 삿사 나리마사의 영지 히고에서 일어난 코쿠진들의 잇키 진압, 1592년 임진왜란 등에 참전해 울산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기를 주장했으나 그와 사이가 나빴던 안코쿠지 에케이 등의 주장으로 모리 데루모토는 서군에 참여하였고 심지어는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동군의 승리를 확신하던 히로이에는 동군의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모리 가문의 영지 보존을 조건으로 동군에 내통했다. 본 전투에서도 도시락을 먹는다는 핑계를 대며 쵸소카베 모리치카, 안코쿠지 에케이, 나츠카 마사이에 등의 난구산의 군대가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때 '재상님의 빈 도시락'이라는 관용구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동군은 약속과는 반대로 모리 가문을 가이에키하려고 했고, 히로이에에게 모리 가문 영지의 스오, 나가토 37만석을 주겠다고 했으나 히로이에는 이를 거절하고 이에야스에게 서약서를 보내 모리 가문에게 이 두 쿠니를 남겨줄 것을 탄원했고, 결국 모리 가문은 가이에키를 피했다.

이 감봉으로 모리 가문에는 큰 혼란이 생겼고 이 일의 원흉으로 인식되던 히로이에도 가문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킷카와 가문은 배반자로써의 이미지로 심지어 에도 막부 말기까지도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후 조슈번정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모리 히데모토 와 대립하였으나 오사카의 진모리 테루모토가 가신들에게 비밀로 하고 나이토 모토모리를 오사카성에 파견한 일이 밝혀지자 이를 크게 비난하고 은거하였다. 이후 번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이와쿠니령의 통치에 매진하였으며 1625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 세키가하라 이후 킷카와 가문은 이와쿠니 3만석을 영지로 받았으나 다이묘 취급이 아닌 모리 가문의 가신 취급을 받아 지번이 아닌 이와쿠니령으로 존속하였다. 킷카와 가문이 영주로서 모리 가문의 간섭없이 독립적으로 정치를 행하여 사실상 지번이나 다름없었으나 지번과 동격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막말까지 가신으로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