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20:46:27

오타니 요시츠구

<colbgcolor=white,#222> 파일:1280px-Ōtani_Yoshitsugu.jpg

1. 개요2. 생애
2.1. 오다 정권 시기2.2. 도요토미 정권 시기2.3. 히데요시 사후2.4. 세키가하라 전투와 최후
3. 여담
3.1. 의리의 무장?3.2. 야사
4. 창작물에서

1. 개요

大谷 吉継(おおたに よしつぐ)(대곡길계)

1559년 ~ 1600년 10월 21일, 음력 9월 15일 (향년 41세)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이자, 다이묘사나다 노부시게와 함께 에도 시대 때부터 이상적인 무장으로 인기를 얻고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코쇼[1]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했다. 가족 사항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없다.

히데요시는 신분이 미천한 아시가루 출신이었던 탓에 윗대부터의 가신이라든가 하는 튼튼한 지지 기반이 없었기에, 요시츠구도 그렇게 대단한 출신 배경은 아니었을 것이라는게 정설이다. 오타니 성이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니 몇몇 후보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던 것은 명확하다. 게다가 절친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도 하급무사 아시가루 출신이라 더욱더 그러하다.

히데요시가 오미국(近江国)(지금의 시가현) 영주가 된 후, 이시다 미츠나리처럼 인재 발굴 프로젝트로 뽑힌 인물이다. 미츠나리와 함께 히데요시의 엘리트 행정 관료로 활약했다.

2. 생애

2.1. 오다 정권 시기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코쇼로 히데요시의 곁에 붙어다녔는데 능력은 물론 외모도 출중했다고 한다.

이 때 히데요시의 곁에 붙어서 전장에도 다녔지만 딱히 전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요시츠구의 역할은 히데요시의 경호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요시츠구에 대해서는 공식 기록이 거의 없어서 딱히 알 수 있는 일이 없다.

2.2. 도요토미 정권 시기

오다 노부나가혼노지의 변으로 횡사하자 그 후계자 다툼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은 요시츠구의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였고 이에 따라 요시츠구의 운명도 덩달아서 피게 된다.

원래 자기 기반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히데요시는 자기보다 신분이 높았던 다른 다이묘들이나 사무라이들에 대해서 꽤 의심이 많았고 그래서 자기 사람에 집착했고, 그 때문에 유력 인재의 육성이나 스카웃에 치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무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고 불리는 7명의 인재로 히데요시는 여기에 더해서 세 자루의 타치에 비견될 만한 인재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요시츠구였다. 즉, 이런 호칭들에는 히데요시의 인정을 받은 도요토미 정권의 엘리트로 차후 중진을 맡게 될 것이 분명한 인물들이라는 측면이 존재했다.

히데요시가 후일 사무라이 출신으로는 유례가 없이 중국의 삼공에 해당하는 칸파쿠의 자리에 오르자 이에 따라 그 측근인 요시츠구도 종5위를 서품받게 된다.

1589년 25살 때 쓰루가[2] 지역 5만 7천 석의 영지를 받고 자신의 성(城)을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당시 후호죠씨는 급격히 세력을 불리는 히데요시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비 증강을 진행하고 있었고 히데요시도 후호죠 씨를 무력으로 꺾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측근인 요시츠구에게 힘을 보태어준다는 의미가 강했다.

후의 역사를 다룬 매체에서는 이 오다와라 정벌을 마치 히데요시가 대군으로 후호죠 씨를 압살한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꽤 변수가 많고 정치적인 상황이 안정되지 않아서 히데요시로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후호죠 씨와 다테 마사무네는 동맹 관계였고 이들의 군세를 다 합쳐도 히데요시보다는 못했지만 당시 히데요시의 군은 여러 다이묘의 군이 섞인 연합군이었고 이중 일부가 이들에게 호응이라도 한다면 단숨에 와해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히데요시의 밑에 있던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군사력이 두려워 굴복한 것뿐이었지 신뢰 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믿을만한 측근 중 한 명이었던 요시츠구에게 힘을 실어주는, 친위 세력 강화의 일환으로서 영지를 하사한 것이다.

실제로 요시츠구는 영지를 받고 나서 오다와라 정벌에도 동참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홋카이도 다이묘의 이명으로 알려진 카키자키 씨가 히데요시 밑에 줄을 대기 위하여 요시츠구와 접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당시 홋카이도와 그 인근 지역은 아이누 등의 소수 민족의 세력이 강력했던 곳이라 일본의 조정과 막부의 영향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홋카이도에 터를 잡은 카키자키 씨는 사실상 야인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도 아이누와 군사적인 갈등을 통해 가문이 거의 멸문 직전까지 몰린 적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 카키자키 씨가 히데요시에게 접촉했다는 건 첫번째로 사실상 일본이 거의 히데요시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뜻이고 두번째로는 요시츠구가 히데요시의 측근이라는 사실이 그런 변두리까지 알려졌다는 점이다.

히데요시의 일본 천하통일 후 시작한 임진왜란에서는, 후방에서 4천척의 선박과 병사와 군수품을 보내는 보급을 맡았다. 요시츠구가 이런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당연히 그가 히데요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이었기 때문이다. 요시츠구가 다스리는 쓰루가(현재 후쿠이현 쓰루가 시)는 대륙을 마주보는 지역에 위치해서 해외 무역과 국내 각지에서 물류들이 모여드는 거점이자 이 물류들을 수도인 교토부와 히데요시의 거점 오사카부로 보내는 물류센터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지역이였고 그렇기에 군사 보급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런 중요도 덕에 쓰루가는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영지가 아니라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는 최측근이나 되야 맡을 수 있는 영지였고 그걸 맡았던게 요시츠구인 만큼 그에 대한 히데요시의 신뢰를 엿볼수 있는 영지와 임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임진왜란 당시 보급만 한 것은 아니고 조선에 직접 출병하여 행주대첩 등에서 싸우기도 하였다.

2.3. 히데요시 사후

요시츠구는 병을 앓아서 회복에 집중하느라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흔히들 이때 걸린 병이 한센병이라 보는 이들도 있으나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후에 병을 고치고 다시 집무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이 때는 한센병에 걸리지 않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 시기에 요시츠구의 주목할 만한 행보는 권력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태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친하게 지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가 이에야스와 친하게 된 계기는 뜻밖에도 가토 기요마사가 제공해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들 간 파벌 대립이 극심해졌는데 그 과정에서 히데요시 사후 6개월이 지났을때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한 무단파가 이시다 미츠나리 를 습격해, 미츠나리가 칩거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 터지자 요시츠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사건 수습과 중재를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이에야스에게 신뢰를 얻게 된 것이다.

거기에 미츠나리가 칩거하고 6개월 후인 1599년 9월 오대로의 한 명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들 토시나가가 이에야스 암살을 계획했던 것이 발각된 사건이 일어나고(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모략이라는 설도 있다), 두 세력간에 전투가 일어나는 것은 시간의 문제였을 때도 요시츠구는 중재에 나서 토시나가의 어머니 마츠를 에도로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이 일을 통해 이에야스의 존재감은 커져갔기에 이에야스는 더더욱 요시츠구를 신뢰하게 되었다. [3]

그 덕분에 1600년 경에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있을 때도, 도쿠가와와 우에스기 가문의 중재 담당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중재시도는 실패했고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게 되며 요시츠구도 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참전한다.[4] 이때 요시츠구는 칩거하고 있던 미츠나리와 만나 거병 계획을 듣게 되었고 요시츠구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츠나리는 듣지 않았다.

2.4. 세키가하라 전투와 최후

요시츠구는 처음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계획을 반대했으나 반대한지 열흘 후, 요시츠구는 돌연 그 계획에 합류하기로 결심한다.[5] 그가 갑자기 생각을 바꾼 계기로 지목되는 것은 요시츠구도 처음에는 생각이 없었지만 같은 도요토미 가의 충신인 미츠나리의 계획(지금은 오대로로 충성하는 척 하지만, 언젠가는 도요토미 집안을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는, 그리고 결국 실제로 그렇게 한 이에야스를 제거하자는)을 듣고 도쿠가와 가문의 위험성을 깨달은 뒤 도요토미가의 충신으로서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기 위해 미츠나리의 계획에 찬성했을 것이라고 분석된다.

그렇게 세워진 '타도 이에야스 계획'에서 요시츠구는 각본가 포지션으로서 이시다 미츠나리를 보좌한다. 인망도 없고 석고도 겨우 19만 석의 작은 규모의 다이묘라 대장이 되긴 뭐했던 미츠나리를 대신해서 서쪽의 모리 가문을 총대장으로 내세운 것도, 다른 다이묘들을 끌어들인 것도 전부다 요시츠구가 쓴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 전략은 요시츠구가 질 것을 알면서도 참여했다는 오해의 충분한 반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것이었다. 다만, 그가 계산에 넣지 못한 연쇄적인 배신 등 여러 변수가 발생해서 비참한 결과가 나왔긴 했지만 그래도 성공했으면 도쿠가와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을 정도로 잘 짠 시나리오였던 건 사실이다.

당연히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했고 오전 중에는 도도 다카도라와 교전했다. 오후에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부근에 진을 쳤는데 당시 히데아키는 동군과 서군 모두에게 어느 쪽에 붙을지 알 수 없는 놈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6] 그나마 서군 입장에서 도요토미 사후 여러 내분들을 잘 중재했던 요시츠구라면 히데아키가 배신하지 않게는 할 것이라 판단돼서 거기에 배치된 것이었는데, 결국 히데아키는 배신하고 말았고, 히데아키가 배신하는 꼴을 본 다른 무장들도 더 이상 서군에게 가망은 없다고 보고 연달아 배신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 때문에 요시츠구는 조금 전까지 아군이었던 부대에게 집중 공격을 받는 꼴이 되었고 버티지 못한 요시츠구는 결국 자결했다. 이 후 요시츠구의 목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
육도의 갈림길에서 기다리리라, 언젠가 저승에서 우리 다시 함께 하리.
(契りあれば 六つのちまたに 待てしばし おくれ先立つ たがひありとも)
사세구

요시츠구의 사후 오타니 가문은 기반을 잃고 그 아들 오타니 요시하루는 로닌이 되어 오사카성에 입성했으나 결국 전장에서 죽고, 그 자손들은 사무라이를 때려치우고 귀농했으나 결국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참고로 같은 서군인 사나다 노부시게와는 친인척 관계로 요시츠구의 딸로 추정되는 치쿠린인이 노부시게의 정처다.

3. 여담

3.1. 의리의 무장?

여러 매체에서는 마치 이시다 미츠나리, 사나다 유키무라 등의 서군이 의리가 있어서 도요토미 측에 가담한 것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가문간의 싸움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어느 쪽이 이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기록에 많은 로닌들이 세키가하라 이후로도 구직을 위하여 도요토미 가문의 근거지인 오사카를 찾아 왔다고 나와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이 도요토미 측이 이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았다는 근거가 된다.

또한 전기한대로 요시츠구는 원래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에게 줄을 대는 등 꽤 현실적이고 이해 타산에 밝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파인 마에다 토시이에와 이에야스간에 정치적인 갈등이 있었는데 누가 먼저 죽느냐에 따라서 다음 정권을 쥐는게 누구냐가 결정된 판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도요토미파인 토시이에가 아니라 이에야스에게 줄을 댄 것은 요시츠구가 의리가 아니라 이해로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토시이에는 병치레 때문에 얼마 가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예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서군의 주요 가문들이었던 시마즈, 모리, 사나다, 우에스기 등은 무력으로 굴복한 것뿐이고 히데요시를 섬긴 기간은 그리 길지도 않기 때문에 굳이 보은을 위하여 몰락해가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가담했다는 발상 자체가 글러먹었다. 당장 몇십년 전의 전국 시대만해도 주인이 신하의 뒤통수를 치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다른 편으로 갈려서 싸우는게 일상이었던 전국시대인데 그 배신의 아이콘인 다이묘들이 히데요시 정권이 되었다고 갑자기 충의의 사무라이가 되었을 리가 없다.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우정도 유명하지만 대부분 후세에 창착을 통해서 강조된 것으로 그렇게까지 깊은 교분을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미츠나리하고는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입사동기인 셈이었기 때문에 평소부터 친하게 지냈다는 기록 자체는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3.2. 야사

그 군략을 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시츠구에 대해 "병사 백만을 지휘시켜보고 싶다."고 칭찬했다는 야사가 있다. 다만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고쳐도 원래 히데요시가 사람을 칭찬할 때는 오버해서 하는 편이라서 딱히 신경쓸 바는 못된다. 사실 요시츠구는 게임 등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술되었듯 행정관료로써 활약했지, 군사적인 면에서 크게 활약한 적은 없다.

유아사 고스케가 목을 묻으려 할 때 때마침 동군의 무사 도도 니에몬 타카노리[7]가 그를 발견했다. 고스케는 사정을 설명하고, 주군의 목을 묻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된다.

후에 이에야스가 니에몬에게 요시츠구의 목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알고는 있사오나, 사나이끼리의 약속이므로 죽어도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만약 말했더라면 큰 상을 받았을 터인데도 약속을 지키려는 그에게 이에야스는 크게 감동하여 더 큰 상을 내렸다고. 다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시츠구하면 유명한 것이 요시츠구가 한센병 환자라는 이야기지만 사실 여기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야기자체도 에도시대나 돼서 나돌기 시작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매독설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때는 가마에 탄 상태에서 지휘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전투 양상은 지휘관이 직접 말을 타고 야전 지휘를 할 일은 없었기 때문에 가마를 타고 지휘를 하는 일자체가 그렇게 드물었던 것은 아니다. 고로 이것만으로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었던 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당시 중병에 걸렸었는지 어땠는지도 불명.

그런데, 건강한 사람을 병자로 몰고 간 창작 설화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요시타니가 자신의 병세를 기록한 직필 기록이 남아 있어서, 병에 걸렸다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것이 매독에 의한 후유증인지, 나병인지는 현대에 와서도 여러 설이 있을 뿐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와는 평생에 걸친 우정이 유명하다. 어릴 적부터 히데요리의 가신으로 일하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히데요시가 보너스(2천석 현재 가치로 2억엔)를 주려고 하니 그 대신 오타니 요시츠구를 추천해서 등용하게 했다는 이야기나, 오사카 성에서 열린 다회(茶會)에서 오타니가 돌린 차[8]를 모두가 마시는 시늉만 하고 입에 대지는 않았으나 오직 미츠나리 만이 주저 없이 차를 들이켰고[9] 이후 오타니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친구와의 의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참전 장렬하게 싸우다 패하고 자결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의 창작이고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히데요시하고 있었던 일이라고도 한다. 다만 전기한대로 요시츠구가 한센병에 걸렸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한 야사에 불과하다.

할복하기 전에 배신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군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인면수심이로다. 삼 년 사이에 재앙을 내리리라(人面獣心なり。三年の間に祟りをなさん)라고 저주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이후로 흉흉한 일이 끊이지 않았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불과 2년만에 당사자인 히데아키 또한 후사 없이 사망하여 대가 끊겨버리고 말았지만 당연히 야사.

원래 가문이 딱히 큰 가문도 아니었고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은 것때문에 히데요시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역시 근거는 없다. 오히려 오타니가는 그 뿌리를 명확하게는 알 수 없더라도 정황상 몇몇 후보가 있기 때문에 출신 배경으로만 보면 요시츠구 쪽의 격이 히데요시보다 더 높았던 것 같다.

4. 창작물에서

전국 시대 관련 창작물에서는 병에 걸려 얼굴이 흉측하게 변하고 신체에 장애를 가졌다는 점에서 장애 캐릭터 모에의 속성을 보유한 캐릭터로 나오며, 창작물에서는 거의 천연두 때문에 얼굴을 모자나 천으로 가린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한 이시다 미츠나리와 친분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거의 이시다 미츠나리와는 베스트 프렌드로 묘사되며, 가끔씩 브로맨스를 찍는 묘사가 있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오타니 요시츠구/기타 창작물 참고.


[1] 시종 겸 인질 겸 경호원. 도노 소리를 듣는 상급 무사가 자신의 가신의 아들들 중에서 쓸만한 인재를 골라서 코쇼로 삼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죽는 역할이긴 했지만 그 만큼 출세의 기회도 많았다. 당시에는 중도라고 해서 사무라이들의 남색이 일반적이었고 코쇼가 주군의 남색 상대가 되었는데 당시 사회 풍속상 이건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류층 무사 계급의 풍습이었고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올라간 히데요시는 여색만 밝혔기 때문에 요시츠구가 히데요시와 잠자리를 같이 할 일은 없었다.[2] 도쿠가와의 영지인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의 그 스루가와는 다른 지역으로 한국의 동해 쪽인 에치젠과 와카사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3] 도쿠가와 가문을 상대로 유일하게 맞상대를 할수 있었던, 마에다 가문이 토시이에의 사망에 이어, 아들까지 이렇게 되며 인질을 보내게 됐다는건, 마에다 가문이 더이상 도쿠가와 가문과 동급이 아님을 의미한다.[4] 이 틈을 타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타도 이에야스"를 외치고 거병해서 일으킨 전투가 훗날 일본 역사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로 불리는 세키가하라 전투다.[5] 이 이유에 대해서는 전투에서 뻔히 질 줄 알면서도 미츠나리와의 우정 때문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퍼져있다.[6] 사실 이에야스가 포섭을 위해 히데아키와 접촉하고 있다는 건 서군 측에서도 다들 알고 있었으나 괜히 그걸가지고 뭐라고 했다간 되려 그걸 빌미로 동군에 붙어버릴 우려가 있어 달래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7] 도도 다카토라의 조카이다.[8] 다회에서는 한 그릇의 차를 돌려서 마신다.[9] 한센병으로 인한 고름 한 방울이 차에 떨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