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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0:08:54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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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 安治
파일:Wakisaka_Yasuharu.jpg
생년월일 1554년 ~ 1626년 9월 26일 (향년 72세)
초명 다무라 진나이
田付甚內[1]
부모 양아버지 와키자카 야스아키
친어머니 다무라씨
파일:와키자카 가문 문장.svg
와치가이몬
輪違い紋
[2]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4. 여담

[clearfix]

1. 개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 다이묘. 아와지국 스모토번주, 이요국 오즈번 초대 번주이며 다쓰노번 와키자카씨의 시조[3]다.

2. 생애

덴분 23년(1554년) 오우미국 출신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장남이다. 정확히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양자가 된 것이며 본래 이름은 다무라 진나이(田付甚內)였다. 본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는데 1573년 아자이가가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장이 되어 단바 공략전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모시던 아케치 미츠히데를 떠나고 하시바 히데요시를 찾아가 그 밑에서 히데요시의 쥬고쿠 평정전에서 활약했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의 통일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영지를 하사받았다. 이런 실전 등을 보면 와키자카는 육전에서 다양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후 해적 집단이 주둔 중이던 영지를 받고[4] 1585년 무렵부터 수군 지휘관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관직이 바뀐 후 규슈 시마즈 정벌 당시 분고 우스키 성의 오토모 소린 앞으로 군량미를 수송했고 사쓰마 히라사 성 공략에 있어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공격해 함락했으며 호죠가의 오다와라 성 공략전에서 수군을 이끌고 성을 봉쇄하는 활약을 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까지 수군 담당으로 전직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와키자카가 원래부터 수군 담당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래 해적 출신이던 구키 요시타카를 제외한 다이묘들 중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처럼 해적이 있는 영지의 다이묘가 되며 전직하게 된 케이스가 있다.[5][6]

임진왜란에서 수군으로 참전해 육군을 따라 도성까지 진격했으며 도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던 경상, 충청, 전라 연합군 7~8만의 조선군을 공격해 패퇴시켰다. 용인 전투는 임란 초기 조선군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인데 전시상황에 태평하게 아침밥을 먹고 있던 오합지졸 7~8만 군대가 와키자카군의 기습에 지휘권이 무너지고 겨우 모은 대군이 서로 넘어뜨리고 짓밟고 난리법석이 나면서 하루아침에 해산해 버린 참변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포위전이 아닌 기습을 당해 와르르 달아난 전투라 조선군 전사자는 10%도 안 되는 1천 명이라는 소수였고 일본 측 기록에서도 조선군이 '궤주'[7]라고 기술하기도 했다.[8] 그래도 자신보다 훨씬 많은 적을 맞아 이들을 패퇴한 공적을 세운건 확실하며 조선의 도성 탈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상당한 전공을 세우긴 했다. 다만 용인 전투는 왜란에서 칠천량 해전에 맞먹는 졸전이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그러하듯 이런 졸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대중매체나 미디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총애하고 밀어주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일원임을 강조하여 과하게 밀어주는 경향도 있다. 당대에도 그랬지만 현대에도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시즈카타케의 칠본창의 일원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같은 칠본창의 멤버였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후쿠시마 마사노리(5군 대장)과 가토 기요마사(선봉대장)에는 못 미쳤지만 그들의 가문이 몰락할 때도 가문을 보전하여 끝까지 5만 3,500석을 보유한 가문의 영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9]

이후 활약은 그다지 없었는데, 용인 전투 직후에 의병장 원연[10]에게 경기도 평택 진위면에서 패퇴했고 얼마 후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하고 만다.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한 와키자카는 조선의 추격 선단을 피해 달아나다가 어떤 무인도에 고립되어 버렸는데 거기서 10일 간 표류하며 섬에서 나는 미역을 먹으며 조선 수군이 수색을 포기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이후 조선 수군이 철수하자 나타난 구조선을 통해 간신히 탈출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와키자카는 이때의 일을 과장이나 축소 없이 그대로 기록했고, 이후 와키자카 가문은 지금까지도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7월 8일에는 집안 전체가 미역만 먹는 풍습이 생겨났다. 현대의 후손들조차 한산도 대첩 하면 집에서 미역만 먹는 날이라고 언급할 만큼 치욕적인 대패였던 건 확실하다. 그 후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와 함께 칠천량 해전에 참가,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명량 해전에서 또 다시 이순신에게 대패한다.

불멸의 이순신징비록(드라마)[11]에서는 노량 해전에 참전하는 것으로 등장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노량 해전은 시마즈 요시히로타치바나 무네시게의 군대가 주력이었고 와키자카 본인은 노량해전이 발발하기 전에 다른 일본군과 함께 돌아갔다.

왜란이 종결되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본래 서군이었으나,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리 동군으로 갈 의사를 밝혔고 세키가하라 도중에 배신,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패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사실 이를 본다면 와키자카는 배신을 때리고 천수를 누린 배신자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원래 와키자카는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는 입장이었다. 그런 만큼 이 전투에서도 동군 진영에 가담해서 싸우는 장군A가 될 뻔했지만 하필 이시다 미츠나리가 다스리던 오사카의 성에 있었기 때문에 진실이든 거짓이든 서군에 합류 안 한다고 말하는 순간 지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은 동군인데 진영은 서군에 있게 된 것으로 의도가 그러니 만큼 대부분의 전투도 설렁설렁 넘기고 있었고, 기회가 오자,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패퇴시키는 활약을 하면서 동군으로 이적한 것으로 이는 어디까지나 이전 행적만 봐도 그가 도쿠가와 파라는 걸 알 수 있던 와키자카를 억지로 품었던 미츠나리의 실책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도쿠가와의 동군으로 이적한 후 1609년 원래 본거지였던 아와지 스모토 번 대신 시코쿠의 이요 오즈 번 5만 3천석을 새 영지로 받았다. 60세가 되던 1614년에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차남이자 적자인 와키자카 야스모토를 대신 보냈다.[13] 이듬해인 1615년 야스모토에게 가문을 물려준 뒤, 교토로 떠나 은거 생활을 했으며, 1626년 음력 8월 6일 교토의 자택에서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후 중앙에서 다이묘를 견제하려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일부러 세력 확장을 억제하여 와키자카 가문은 에도 막부까지도 무사히 존속했으며, 오히려 에도 중기에는 후다이 다이묘로 오히려 중앙 측에서 치켜세워주기까지 했고 이후에도 온당하게 처신하여 메이지 유신을 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들 야스모토는 야스하루의 뒤를 이어 이요 오즈 번을 다스리다가 곧 시나노 이이다 번으로 전봉되었고 홋타 가문에서 양자로 와키자카 야스마사를 들였다. 야스마사는 하리마 타츠노 번 5만 석으로 전봉되어 에도 막부가 끝날 때까지 야스마사의 후손이 타츠노 번을 다스렸다. 홋타 가문이 후다이 다이묘였기 때문에 야스마사는 와키자카 가문의 대우를 도자마에서 후다이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한편 타츠노 와키자카 가문의 마지막 다이묘인 와키자카 야스아야는 도도 다카토라로부터 이어지는 츠 번 도도 가문 출신 양자였다.

3. 창작물에서

함께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 비하면 일본 창작물에서는 존재감이 부족한 인물이다. 센고쿠 시대를 다루는 대하드라마에서는 엑스트라로도 간신히 나올까 말까 하는 정도고 노부나가의 야망 같이 등장인물이 많은 게임 같은 곳에서도 평균 이하의 지나가는 인물 중 하나로 나온다. 오히려 한국의 창작물에서는 임진왜란이순신을 다루는 작품에서 비중도 많고 상당히 입체적인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적군의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일본보다 한국에서 취급이 좋은 특이한 인물이다.

워낙 이곳저곳의 전투에 참전한 탓에 임진왜란을 다루는 사극이나 영화에 안 나올 수가 없는 인물이며 특히 한산도 대첩명량 해전에 모두 참전했기 때문에 한국 매체에서는 더욱 유명하다. 작품성을 위해서도 이순신의 실질적인 맞상대였던 와키자카가 그저 그런 인물로 연출되면 긴장감 있는 전쟁을 연출할 수가 없으므로 "와키자카 역시 적군이지만, 훌륭한 장수다."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면도 있다. 물론 실제로 와키자카는 당시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장수 중에서는 상당히 유능한 장수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기에 한국 매체들이 와키자카를 좋게 묘사해도 딱히 논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와키자카를 유능하게 묘사할수록 원균의 무능한 행태를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된다.

임진록 2》,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과의 라이벌로 나오는 것만 해도 엄청난 특례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두 작품보다 취급이 안 좋아진 《명량》이나 《징비록》에서 나오는 와키자카의 모습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 조이온에서 제작한 《임진록 시리즈》와 《천하제일상 거상》에서의 와키자카가 사용하는 무기가 총인데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및 명나라 장수들을 《임진록 시리즈》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은 와키자카가 실제로도 조총을 주로 사용하는 일본 제일의 명사수 정도로 인식한다. 이렇듯 일본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여러 매체를 통해 이순신과 이곳저곳에서 맞붙었던 장수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서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수군 전문가가 구키 요시타카 정도였고[14]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순신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 띄워지는 이유는 용인 전투에서 수십 배나 규모가 큰 적을 맞아 승리해 굉장한 인물로 손쉽게 포장할 수 있고 3대 대첩 중 으뜸이며 제일 유명한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군의 총사령관으로 종군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창작물의 흥행을 위해서는 부각시킬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게 일본 수군 최고의 명장으로 끼워넣기에 좋은 이유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한산도 대첩만이 가지는 특징도 있다. 창작물로서 바라볼 때 이순신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이나 칠천량 해전 이후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승리한 명량 해전과는 달리 한산도 대첩은 고증대로 묘사할 경우 극적 긴장감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옥포 해전부터 시작된 연전연승, 신무기인 거북선의 완전 배치, 전라도-경상도 수군 연합 함대의 결성 등으로 전력이 제대로 갖춰지고 장졸들의 사기 또한 최고 수준이었다. 창작물에서는 주인공이 불리한 상황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재미를 이끌어낼 수 있을텐데 한산도 대첩은 배경이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극적 긴장감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한산도 대첩 역시 '흔해빠진' 일방적인 승리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러면 왜 한산도 해전이 '대첩'인지, 왜 임진왜란의 해전 중 최고의 승전으로 꼽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어려워지며 흥미도 떨어지게 된다.[15][16]

이 때문에 극적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바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실력과 그의 함대 전력을 최대한 버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조선 측은 '이번 전투에서 만날 적장인 와키자카란 자는 지금까지 싸웠던 왜적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다', '이번 싸움에서 지면 지금까지의 승리들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고 비장하게 표현하고 일본 입장에서는 '전황은 조선 측으로 기울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칠본창의 일원이자 일본 수군 최고의 장수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투입한다'는 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긴장감을 유발시키게 된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그 긴장감을 화끈하게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17] 한국에서는 사상 최악의 패배와 가장 큰 대첩들에 모조리 참전해 조선에서 유명한 전투에서 뛴 무장이라는 점도 있다.

일본에서는 유명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일원이라는 점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배신했다는[18] 점만 제외하면 같은 칠본창의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에 비해 명성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센고쿠 시절의 활약상과 세키가하라에서의 활약상도 미미하였고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노망나 실책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인지도도 안 높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특성을 고려하면 그곳에서 공적을 세웠다고 높게 평가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와키자카는 임진왜란 당시에 함께 참전한 24만석의 영지를 가진 가토 기요마사, 약 20만 석의 고니시 유키나가, 11만 3000석의 후쿠시마 마사노리, 약 10만석의 시마즈 요시히로[19]보다 부족한 3만석의 영지를 가졌었다.[20] 다만, 최후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더 좋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후쿠시마와 가토가 몰락할 때도 와키자카는 영지를 5만석으로 늘리며 가문을 보존했다.

대중매체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구키 요시타카도도 다카토라에게 겁 먹었냐는 등 도발성 발언을 한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당연히 극중 연출로 진짜로 이런 태도로 나섰다가는 큰일난다.[21]

3.1. 드라마

3.2. 영화

3.3. 게임

3.4. 소설

4. 여담


[1] 친어머니와 재혼한 양아버지 성에 따른 개명[2]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 명량 등 한국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 및 영화 등지에서도 자주 나온다. 정도전 1화 초반부에도 등장하는데, 이쪽은 당시 일본이 무로마치 시대초기였던 1380년대 이므로 틀린 고증이다. #[3] 와키자카에 와치가이몬은 무로마치 막부 시절 하타케야마 가문에 가몬으로 결혼을 통해 가문의 영지를 받아들였다고 한다.[4] 와키자카의 무가 관위는 아와지노카미(淡路守)로 아와지는 지금의 효고 현 아와지 섬과 누시마 섬 일대.[5] 이 시대까지도 일본의 수군이라는 개념은 다른 외국들 대부분과는 판이하게 달랐는데 애초에 기록을 살펴보면 수군(水軍)이란 표현 자체가 없다시피하다. 대신 그 자리를 대신하던 표현으로는 海賊衆(해적중/카이조쿠슈), 船手衆(선수중/후나테슈)으로 이 당시 일본의 수군이라는 건 사실상 해적이며 동시에 해적이 수군 역할을 하는 것.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바다 전용 지방 향토군이나 해전 특화 용병에 가까운 존재였다.[6] 사실 판이하다고는 하지만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같은 국가들이 함대를 설립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도 일본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당장 중세 최강의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정작 해군은 알제바르바리 해적들에게 크게 의존했고 영국도 무적함대를 깨뜨리기 전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같은 해적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오히려 조선의 수군이 당시로서는 꽤나 특이한 형태였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국가에서 육성한 전투 전문 수군과 해적질을 중시하는 수군의 차이였다고 할 수 있으며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과 왜군 주력 함선인 세키부네의 차이도 여기서 기원하고 있다.[7] 패배하여 무작정 도망침[8] 특히 권율은 피해 없이 병력을 온전히 보존해 후퇴하는 데 성공해 이후 이치 전투 등에서 유용한 병력으로 쓰인다.[9]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경우 몰락 타임라인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587년 히데요시 큐슈정벌 - 이요(伊予)11만석 다이묘, 1595년 임진왜란 - 오와리 24만석 다이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 아키 및 빙고 49만 8,200석 다이묘(이후 51만 5,800석까지 증가), 1619년 히로시마성 무단수리 - 시나노 4만5천석 감봉, 1620년 아들 타다카츠 사망, 2만5천석 막부에 헌납(2만석), 1624년 사망, 막부의 허락없이 시신을 화장한 죄로 나머지 2만석 몰수, 아들 마사토시, 3,000석짜리 하타모토로 몰락.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도 아들인 타다히로가 마루오카번에서 낳은 서자들이 5천석 규모의 역직을 계승하는 등 후손들이 무사 신분은 유지했지만 영지를 몰수당하고 다이묘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몰락을 겪었다.[10] 임진왜란, 정유재란 최악의 똥별 원균의 동생이다. 그런데 졸장의 대명사인 형과는 비교 불가 수준의 뛰어나고 용맹한 장수였다.[11] 임진왜란 1592에서는 노량 해전 장면에 와키자카가 나오지 않고 역사적 사실에 맞게 후술할 시마즈 요시히로가 나온다.[12]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사실상 서군의 에이스급 장수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실질적인 서군의 지휘관) 중 하나였다.[13] 원래 야스타다(安忠)라는 장남이 있었으나 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둘째인 야스모토가 후계자가 되었다.[14] 구키는 구키 가문 자체가 해적에서 시작된 가문이라 수익을 올리기 위해 해적단 규모를 높여야했고 자연스럽게 수군이 되어 수군을 전문적으로 육성했다. 사실 해군의 시작은 해적을 맞서기 위한 조직이었고 해적과 해군의 차이는 목적만 다르지 똑같은 부류였으며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처럼 해적서 시작해 국가에서 인정받은 사략선장이 되어 해군 제독이 된 경우도 있는만큼 이상한 현상은 아니었다.[15] 한산도에서의 승리는 사실상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군의 승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의 승리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이치 전투에서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에 의해 패배하였고(이 상황은 이후 제1차 진주성 전투로 완전히 굳어진다.) 전라도 점령이 물건너가고 이후 평안도함경도까지 올라간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에게 보급을 하기 위해서는 서해안을 통하는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쪽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기 때문에 결국 기세좋게 처들어간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주린 배를 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로는 한반도 남쪽 울산성이나 부산진에 짱박혀 다시는 한반도 중부를 넘을 수 없게 되었고 이대로 전선이 고착화되어 버렸다. 즉, 임진왜란은 첫 1년은 다사다난했지만 그 뒤로는 정유재란 직후를 제외하면 왜군은 경상도 지역에 붙어 있었다.[16] 사실 한산도 대첩 자체는 말 그대로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지만 한산도 전투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이순신 휘하 전라 좌수영의 승리는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군은 함선이 70여 척으로 숫자가 조선 수군에 비해 많긴 했지만 이순신의 조선 수군도 50여 척으로 숫자상으로 크게 꿇리지 않았고 더구나 조선 수군의 함선인 판옥선은 크기도 크고 단단한 소나무로 만들어져서 일본산 삼나무로 만든 세키부네에 비해 훨씬 튼튼했다. 거기다 일본군에게 악명높은 거북선도 있었고 학익진 전법이라는 뛰어난 전술도 사용했던 만큼 명량 대첩과는 달리 한산도 대첩은 그 명성에 비해 큰 위기 상황은 없었던 것. 실제로 칠천량 해전 전까지 이순신 휘하의 수군은 사상자 수가 매우 적었다. 사실 명량 대첩도 사상자 수는 굉장히 적은 편이긴 했지만.[17] 이는 한산도 대첩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도 자주 있었던 패턴 중 하나이다. '상대를 무지막지하게 띄워줌으로써 그런 대단한 존재를 우리가 이겼다!'고 홍보할 목적으로 고의로 상대를 대단하게 묘사하는 것. 또는 반대로 '우리가 못난게 아니라 상대가 너무 강해서 이길 수가 없었다'며 자신들의 패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상대를 띄우는 경우 또한 있었다. 이후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시대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긍정적 재평가를 하던 도중에 이순신을 폄하하면 히데요시를 비롯한 이름난 장수들이 폄하되는 거라서 이순신의 무력과 지략을 더더욱 과장시켰다.[18] 와키자카 1명만의 배신도 아니어서 더욱 부각되기가 어렵다.[19] 시마즈 가문 전체 영지는 약 60만 석[20] 칠본창 창설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가토 기요마사보다 입지가 더 좋았으나 임진왜란 직전부터 칠본창 중 가장 고쿠다카가 높았던 사람은 가토 기요마사(24만석)였기에 임진왜란의 선봉대장을 맡지는 못하였다. 당시 후쿠시마는 11만 3천석으로 2위였다. 결국 칠본창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은 가토 기요마사로 52만 석이 되었다. 물론 후쿠시마는 본인이, 가토는 아들이 개역 당해서 군소 다이묘로 전락해 버렸다. 칠본창 중 최후의 승자는 5만 3,500석을 받고 가문을 잘 유지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와키자카가 "이 따위 놈들이랑 동급이라니"라는 소리를 들으며 후쿠시마에게 까인 것을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결과가 된 셈이다. 원래 와카자카는 친(親) 도쿠가와 성향이었으므로 많은 다이묘들이 개역당하는 상황에서도 다이묘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후쿠시마는 비록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했지만 이후로는 친(親) 도요토미 편에 섰다가 크게 대였다. 가토는 후쿠시마만큼은 아니었어도 친(親) 도요토미 성향이라 당대에는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결국 아들 대에는 꼬투리를 잡혀 개역당했다.[21] 구키 요시타카는 임진왜란 이전 공식으로 적힌 고쿠타카는 3만 5천으로 소규모 다이묘 수준이나 해적단을 운용하여 양성된 수준 높은 수군을 지니고 수군 특화 장수였기에 여러 정권에서도 수군 총지휘관을 맡을 정도의 위상을 지녔다. 도도 다카토라 또한 고쿠타카도 와키자카보다 높았으며 센고쿠 시대에서도 여럿 뛴 베테랑인 장수였다. 더욱이 고쿠타카가 높을 수록 영지가 넓고 가용인원도 많으며 식량을 비롯한 세금도 많이 걷힌다는 의미이기에 고쿠타카가 높은 다이묘일수록 위상이 높아졌기에 고쿠타카 수치는 다이묘간의 서열을 뜻하기도 하였다. 중세 유럽으로 비유하면 영지를 막 가진 신참 기사작위 귀족이 남작 작위를 지닌 고참 귀족에게 도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22] 형 와키자카 야스요시가 허도주 상단과 밀거래를 하던 일본인들의 일원이었다. 이순신이 난입해 밀거래가 파탄나고 야스요시까지 살해당하자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다.[23] 이후 와키자카는 마지막회까지 쭉 얼굴에 흉터가 있는 채로 등장한다.[24] 명량 해전에서는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기분이 불쾌해지면 집어던지는 등의 기행을 보여준다. 해전에 고양이가 등장한 이유는 고양이는 시간에 따라서 의 동공이 변하는데 시간에 따라 물살이 급변하는 울돌목에서 일본군 측이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25] 실제로 이런 최후를 맞은 왜장이 있기는 했는데 한산도 대첩 당시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장으로 출전했던 마나베 사마노조이다. 본래 한산에서의 패전으로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고 할복한 인물이지만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패전에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와키자카 야스하루 대신 강제 할복당한다.[26]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김경손 역,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권근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사갈현 역을 맡았다.[27] "참수해 버리자"는 의견도 나왔다.[28] 적장 이름이나 어떤 전투인지는 정확히 안 나왔지만 안골포 운운하는 걸 보면 한산도 해전 이후 벌어진 안골포 해전을 의미하는 듯.[29] 명불허전에서는 김충선을 연기했다.[30] 사실 상술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실제 역사에 비하면 나름대로 버프를 받은 편이다. 불멸의 이순신의 명량 해전 후반부 장면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이순신과 서로 대등하게 칼싸움을 벌이기까지 한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실제 역사에 비해 구루지마의 위치가 상당히 버프된 것이다. 실제론 와키자카는 3만석의 영주이고 구루지마는 1만 5천석의 영주라 영주로서 세력의 격이 다른데 실제로 영화에서처럼 와키자카를 함부로 도발했다가는 구루지마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31]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직접 맞붙을 것이 아니라 진도 외해 쪽을 돌아서 곧장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 조선 국왕부터 사로잡은 다음에 조선 수군이 항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가 재빨리 한양을 버리고 빤스런을 해서 그렇지 당시 와키자카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32] 당연히 전작은 한산(1592년) 5년 후의 명량(1597년)을 다뤘다. 거기에 본인이 대패까지 했으니...[33] 물론 이순신이 화살을 쏘아 맞췄다는 것은 영화의 창작이지만 화살을 맞은 건 역사적 사실이다. 그 화살을 이순신이 쏜 게 아닐 뿐. 또한 와키자카는 대장선을 무사히 빠져나와 표류했으며, 이후 공개된 미공개 영상에도 묘사되었다.[34] 음성의 경우 정확히는 미션에서만 교정된 것이다.[35] 무려 두 자루를 양 손으로 들고 쏜다.[36] 결정적으로 이순신은 철력궁을 끼워주면 일격필살 + 화전 연구로 공격업도 적용되지만 와키자카는 철갑탄 업글 외에는 그런거 없다.[37] 이 때의 목소리는 이순신이나 와키자카나 둘 다 성우가 동일하므로 자문자답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임진록 2>의 음성을 그대로 채택하는 바람에 선택시 대사에서는 여전히 자기 이름을 '와카자키'로 부른다.[38] 쌍권총을 쏜 상태에서 몬스터 1마리를 사살하면 그 다음 공격에도 쌍권총으로 6발을 쏘는게 특징.[39]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 B급으로 승격되었다.[40]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 수군 적성이 S인데다가 나머지 시리즈에서 내정관으로는 쓸만한 편이다.[41] 단 피가 이어진 후손은 아니다. 중간에 막부의 가신인 홋타가에서 양자를 들였기 때문.[42] '호코카마이'라고 해서 자신이 섬기는 가문에서 무단 탈주한 무사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제도가 히데요시에 의해 정식으로 법제화되어 있었다.[43] 정말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적고 기록을 하는 사관이 개인적인 견해 등을 전혀 적지 않은 조선왕조실록이 왜 학술적으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 생각해보면 이 회고록은 일본 타츠노시가 아니라 일본 중앙정부서 관리하는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야 한다.[44] 일부 국뽕 유튜브 자료에서는 마이니치 신문의 '脇坂安治家が毎年桜まつりで繰り広げる 李舜臣将軍講演'이라는 기사를 들먹이는데 정작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검색해보면 아무런 검색 내용도 없다. 기사가 삭제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표할수 있으나 정작 옛날 인물이자 전범인 쇼와 천황을 검색하면 1990년대 기사 자료까지 다 나온다. 애초에 국뽕 유튜버들이 내세운 기사에서 후손들 지칭법도 좀 이상한데 보통 일본은 역사적 인물의 직계 가문을 표시할때 (성씨)家나 성씨 가문을 표기한다. 단, 센고쿠 시대에서 유명한 사나다 가문만 해도 나가노현에 자리잡은 사나다 노부유키의 후손하고 도호쿠로 넘어간 사나다 노부시게 후손 등으로 분파가 있어 나뉘는 경우가 존재하고 이런 다이묘 출신 가문들은 소수이지만 씨족가문의 대표자인 당주 임명식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옛 인물의 직계 후손이라면 다른 분파 성씨랑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옛 인물 성명)の子孫이라고 표기한다. 이 외에도 일본의 영화.com 기사도 장면을 보여주며 신빙성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구글이나 해당 사이트에 뒤져보면 나오지가 않고 날짜가 적혀있으나 정작 어느 년도인지 적혀있지 않다. 즉, 이는 그럴싸하게 합성해 조작한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45] 위에 언급된 것처럼 피가 이어진 후손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 야스마사가 막부의 중신 홋타 가문에서 온 양자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