鍋島直茂 (なべしま なおしげ) 1538년 4월 12일 (음력 3월 13일) ~ 1618년 7월 24일 (음력 6월 3일) |
▲ 鍋島杏葉, なべしまぎょうよう 나베시마 행엽[1] |
히젠의 곰(肥前の熊)[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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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류조지 다카노부의 가신. 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의 외가 쪽 조상이다. 무사도 원리주의 서적 하가쿠레에 자주 등장한다.2. 생애
2.1. 류조지 가문의 가신 시대
1538년 나베시마 키요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41년 주군 류조지 이에카네의 명령으로 치바 타네츠라의 양자로 들어가지만 1545년 류조지 가의 주군인 쇼니 가에 의해 류조지 이에스미 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류조지가와 쇼니가가 적대하게 되자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류조지 이에카네 사망 이후 류조지 다카노부가 가독을 잇게 되었다. 류조지 다카노부의 생모가 나오시게의 아버지인 키요후사에게 재가하게 되면서 나오시게와 다카노부는 형제의 관계가 되었고, 다카노부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569년 규슈 동부를 지배하던 오토모 소린이 침공해 오자 농성을 진언함과 동시에, 바다 건너 주고쿠 아키의 모리 모토나리에게 오토모의 후방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1570년 이마야마 전투 때 오토모 군을 기습하여, 오토모 소린의 동생이자 오토모군의 총대장이던 오토모 치카사다를 격파함으로써 가문에서의 영향력은 크게 높아졌다.
1578년 시마바라 반도 일대를 지배하던 아리마, 오무라 등의 호족을 굴복시키는 전공을 올렸으며, 다카노부가 형식상 은거하고[3] 적남인 류조지 마사이에가 가독을 승계하자 그 후견인을 맡았다.
1581년 시마즈 가와 공모한 치쿠고 야나가와 성주인 가마치 시게나미를 히젠으로 유인해 모살하고 가마치 씨를 멸망시킨 이후 야나가와 성에 입성했다. 이후로는 주로 치쿠고에서 정무를 맡았다.
그러나 1584년 시마즈 가와의 오키타나와테 전투로 인해 류조지 다카노부 본인과 류조지 사천왕이 전부 전사해버리는 타격을 입었다. 이에 나오시게는 히젠으로 후퇴하여 마사이에와 합류했다.
직후에 시마즈 가로부터 류조지 다카노부의 수급이 보내져 오지만 나오시게는 이것의 수취를 거절함으로써 시마즈에 대한 강한 적대를 표명했다. 이것에 의하여 시마즈 가와 강화할 때 오키타나와테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보다 좋은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었다.
2.2. 히젠 사가 번주까지
류조지 가는 일단 시마즈 가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마즈의 요구에 따라 오토모 가의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지키는 타치바나성 포위에 참가했으나, 시마즈에 대한 복수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나오시게는 혼슈를 거의 다 통일한 강대 세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접촉하여 규슈 정벌을 재촉했다. 도요토미 군이 규슈로 진군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시마즈 가와 손을 끊고 타치바나 군과 같이 시마즈 가를 공격하였다.
시마즈가 굴복한 이후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협조하는 이러한 움직임을 매우 좋게 보고 류조지 마사이에를 대신하여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정무를 보도록 허락했다. 이에 나오시게는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실질적으로는 독립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젖먹이 형제 류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 가문과의 전투 중 전사하였기에 원수를 갚고자 이때 나오시게는 히데요시에게 선봉으로 설 것을 요청했고 선봉으로 서서 공을 세웠다. 다카노부가 죽고 나서도 장례를 지내지 않았는데, 이는 원수를 갚기 전에는 다카노부가 장례를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시마즈 가문에게 원수를 갚고난 이후에야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번대에 참가했다. 가토의 휘하이지만 병력은 카토보다도 많았다. 훗날 가토는 조선에서 나오시게가 공을 다투지 않고 자신에게 협력해주었다며 높이 평가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한 장수도 바로 나오시게이다.
이 당시 류조지 마사이에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며, 1596년에 마사이에 독살의 소문에 관해서 소문을 부정하는 기청문을 제출했다.
한편 임진왜란 중에는 시마즈 요시히사와 같이 조선의 도자기 제조 기술에 눈독을 들이던 규슈 다이묘로 유명하였다. 규슈의 호족들은 예전부터 조선과 지속적으로 도자기 무역을 해왔기 때문에 조선의 백자와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시마즈 가와 나베시마 가의 군대들이 특히 조선의 도공들을 많이 납치하여 본거지 사가로 돌아왔다. 그 중에는 일본 3대 도기 중 하나인 아리타야키의 시조로 추앙받는 이삼평도 있었으며, 당시 히젠 이마리성(伊万里城) 근처의 산에서 조선의 그것과 비슷한 양질의 토양을 발견하고 공방을 연다. 나베시마는 이런 이삼평을 지원하여 많은 조선 도공들을 보내 주었으며, 그들은 하나의 마을을 형성(사가현 이마리시 오카와치야마)하여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마리시 도자기 마을에 남아있는 고려인 무덤이 그 증거이며, 오늘날 안타깝게도 관리는 잘 안되고 있는 듯하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이삼평을 후원하였기에 아리타야키는 나베시마야키라 불리기도 하며, 실제로 이삼평과 함께 스에야마 신사(陶山神社)에 합사되어 모셔지고 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아들인 나베시마 카츠시게가 서군으로 참전했으나 나오시게는 동군의 승리를 예측하고 카츠시게를 직접적인 전선에서 이탈시켰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순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서군으로 출병한 고바야카와 히데카네의 쿠루미 성,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성 등을 공략했다. 또한 규슈의 동군 제장들과 같이 시마즈 공격을 준비했으나 중지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하여 아들인 카츠시게의 서군 참여를 사죄했으며 전후의 행동을 인정받아 사가 35만 7천석이 안도되었다.
류조지 마사이에의 아들인 류조지 다카후사는 류조지 가의 실권을 찾으려고 했으나 에도 막부는 나오시게 & 카츠시게 부자에의 선양을 인정하는 태세를 취했고 류조지 다카노부의 동생인 류조지 노부치카, 류조지 나가노부 등도 나베시마에의 양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607년 다카후사는 나오시게를 원망하여 나오시게의 양녀였던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로 끝났다. 이러한 다카후사의 원한이 후대의 괴담 "나베시마 귀신 고양이 소동"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1618년 8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명한 명언으로 "의리만큼 감동적인 것도 없다."가 있다.
3. 일화
류조지 가문의 가신 시절 같은 가신인 이시이 타다츠네의 딸에게 반해 매일 밀회를 하다 하인들에게 수상한 자로 의심을 받아 부상을 당하는 일도 있었으나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고. 센고쿠 시대의 몇 안되는 자유연애 결혼중 하나이다.그는 전투 전에 절대로 군사 회의를 가지는 일이 없었는데,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4. 대중매체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등장. 최신작 신생 기준으로도 통솔 88, 무용 82, 지략 93, 정치 83을 마크하는 만능형의 준수한 무장. 큐슈 제일의 지략수치를 가지고 있으며 통솔, 무용은 오토모가의 타치바나 도세츠, 타카하시 쇼운, 시마즈가의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이에히사에 밀리나 그 대신 정치가 90이라 내정에서도 강한 면모를 보인다. 류조지가로 플레이한다면 자연스럽게 주력으로 쓰일 무장이므로 능력치가 성장하는 건 금방이다. 세키가하라 이전 시나리오면 류조지 가신으로 등장하며 세키가하라 시나리오 및 가상 시나리오에서는 독립 다이묘로 플레이할 수 있다. 전법은 경계의 상위 호환으로서 속도 약화 대신 수비가 대폭 상향되는 고유 전법 '인왕문'.
[1] 이마야마 전투의 승전 기념으로 상대 오토모 가문의 가몬인 교요문을 가져와 사용했다.[2] 히젠국의 히젠노카미였다.[3] 물론 그 뒤에도 오키타나와테 전투까지 다카노부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