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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4:05:27

쇼니씨

1. 개요2. 설명3. 한국과의 관계

1. 개요

쇼니씨(少弐氏, 구자체 少貳氏)는 일본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까지 규슈 북부의 다자이후를 근거로 자리잡은 다이묘 가문이다.

2. 설명

무토(武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무토 스케요리(武藤資頼)가 시조로, 헤이케에서 겐지로 전향 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서 다자이후의 2급 차관 다자이노쇼니(太宰少弐)에 임명되고 규슈 제국의 슈고를 맡았다. 스케요리의 자손은 대대로 다자이노쇼니를 세습했고, 이에서 쇼니라는 씨족명이 만들어졌다. 원나라의 일본원정 방어에서 활약해 전통적으로 지쿠젠·부젠·히젠·쓰시마의 슈고직을 맡았다.

고다이고 덴노가 반 막부 봉기를 일으키자 이에 가담했고, 겐무의 신정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에게 쫓겨나자 아시카가 가문의 편에 섰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가 되면서 아시카가 막부에서 설치한 규슈의 통치자 규슈탄다이 자리를 얻기를 희망해, 규슈탄다이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와 대립했다. 규슈에서 남조가 잠시 우세를 점하면서 가문도 남조와 북조편으로 갈렸는데, 아시카가 막부에서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규슈탄다이에 임명하고 규슈 정복을 꾀하면서 교토로 도망갔던 북조측 쇼니씨도 규슈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규슈탄다이를 원하여 이마가와 료슌과도 대립했고 결국 이마가와 료슌이 쇼니 후유스케(少弐冬資)를 불러들여 살해, 이후는 일치 단결하여 남조측에서 이마가와 료슌과 싸웠다. 규슈의 남북조 전쟁이 결국 이마가와 료슌이 이끄는 북조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쇼니씨도 이마가와 료슌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이마가와 료슌 은퇴 후 규슈탄다이가 아시카가 일족인 시부카와씨의 직책이 되자, 분고 슈고 오토모씨와 손을 잡고 시부카와씨와 대립했다. 열세에 처한 시부카와씨가 스오·나가토의 슈고 오우치씨를 끌어들이면서 규슈 북부는 점차 오우치씨의 영토가 되었고, 시부카와씨는 오우치씨의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쇼니씨도 오우치씨에게 점차 밀려나, 오우치씨는 오우치 모리하루(大内盛見)만이 죽었으나 쇼니씨는 미쓰사다·스케쓰구·노리요리 등이 전사했다. 지쿠젠·부젠 슈고직도 오우치씨의 것이 되었다. 이때 몇 차례 쓰시마 섬으로 달아나 옛 신하였던 대마도 도주 소씨에게 의지해 권토중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전국시대가 되면 쇼니씨의 열세는 더 심해져, 마침내 지쿠젠을 오우치씨에게 헌납하고 히젠으로 물러났다. 오우치씨가 중앙 정계에 개입하는 동안 쇼니 마사스케(少弐政資)는 히젠의 시부카와씨와 지바씨를 굴복시키고 세력을 회복했고, 지쿠젠과 부젠까지 다시 진출했다. 그러나 오우치씨가 다시 돌아와 공격하자 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마사스케가 자결해 일시적으로 멸망하기까지 했다. 마사스케의 아들 스케모토(資元)는 오토모씨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부활하고, 가신 류조지 이에카네[1]의 활약으로 다시 공격해 온 오우치씨를 다테나와테 전투에서 일시적으로 격퇴하기까지 했으나, 오우치 요시타카가 아예 쇼니씨의 상관에 해당하는 다자이노다이니(太宰大弐) 자리를 황금 2천 냥을 조정에 갖다 바치는 돈지랄로 획득하고 쇼니씨를 재공격해 스케모토도 자결했다. 스케모토의 아들 후유히사(冬尚)는 겨우 세력을 추스르고 오우치씨와 내통 의심이 있는 류조지씨를 숙청했으나, 류조지씨가 오토모씨 산하의 지쿠고 호족 카마치씨의 당주 가마치 아키모리의 지원으로 재기하고[2][3] 진짜로 쇼니씨를 배반하고 오우치씨에게 붙어 쇼니씨를 공격해 후유히사는 죽고 쇼니씨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히젠 사가 번의 번주가 되는 나베시마 씨는 부계로는 쇼니씨의 후손이나, 모계로 얻은 나베시마 성을 사용했다. 이 나베시마 가문이 이방자의 외가이고, 이방자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과 결혼한다. 왜구의 배후로 여겨지는 집안의 후손이 그 왜구를 진압하고 인심을 얻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집안과 혼인하게 된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3. 한국과의 관계

한국 학계에서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1294-1372, 스케요리의 5세손)를 1350년 경인년 왜구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는 등 전기 왜구의 스폰서로 의심받는 가문이며, 규슈 북부에서 조선과 자주 통교했기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소이전'(小二殿, 少二殿, 少貳殿 - 일본어로는 쇼니도노)이라는 이름으로 가끔 출현한다. 대내전(오우치씨)와의 전쟁 상황도 실록에 적혀있다. #

[1]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류조지 가문 시조이다. 류조지 다카노부의 증조부.[2] 후일 세력이 훨씬 커진 류조지 다카노부가 당주인 가마치 시게나미를 모략으로 살해하고 야나가와 성을 낙성시켜 가마치 종가가 멸망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카노부 본인도 오토모의 맹공으로 영지를 잃었을 때 가마치 아키모리에게 도움을 받아 재기했었다.[3] 참고로 마츠다 세이코가 이 가마치 가문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