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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22:36:14

시마즈 요시히사

파일:Yoshihisa_shimadzu.jpg

島津義久, 은거후는 島津龍伯(시마즈 류하쿠)
1533년 ~ 1611년

1. 개요2. 생애3.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시마즈 4형제 중 첫째로, 사츠마 시마즈가 16대 당주.

2. 생애

어렸을 때는 조용한 성격으로, 세 동생들에 비해 과소평가되곤 하였다. 하지만 친자식, 친형제라도 뒷치기가 횡행한 전국시대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동생들이 온 힘을 다하여 형을 보좌한걸로 봐서는 보통인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부인 시마즈 타다요시는 요시히사를 두고 총대장으로서 사람들을 지휘할 재능과 덕을 갖추고 있어서 장차 큰 일을 할 것이라 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요시히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후에 요시히사의 조카인 토요히사를 초대하여 미미가와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하게 된다. 다 듣고 난 후에 '듣던 것보다도 무서운 대장이로다. 저 남북조 시대의 명장 쿠스노키 마사시게에 비견될 정도의 지휘다!' 라고 감탄하였다 한다. 또한 나중에 요시히사를 직접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시히사가 '동생들과 가신들로 하여금 싸움에 승리하였을 뿐,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라고 하자, 이에야스는 '자신이 나서지 않고서 이기는 것이야말로 대장의 귀감이다!'라며 감탄하였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이에야스가 요시히사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조부인 타다요시의 바람대로 요시히사 이하 4형제가 합심하여 1570년 사츠마, 1573년 오오스미, 1578년 휴가까지 병합함으로써 '삼주통일(三州統一)'(전통적으로 시마즈 씨가 이 세 주의 슈고를 지냈으나, 슈고 다이묘에서 센고쿠 다이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오오스미와 휴가를 영국화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을 이루게 되며, 이로써 전국 말기의 규슈 3강(시마즈, 오토모, 류조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578년에 규슈 북동부의 패자가 된 오토모 소린과의 싸움에서 대승하면서 오토모가 세력이 일단 빠지게된다. (미미가와 전투).

아무튼 한 방 먹이긴 했지만 북규슈에서 오토모 다음가는 양대 세력인 류조지 타카노부가 아직 건재해서 줄다리기만 하다가, 1584년 류조지와 결전을 벌이게 된다(오키타나와테 전투). 시마바라 반도를 지배하던 아리마 씨는 류조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는데 반란을 일으켜 시마즈 쪽에 붙었고, 이를 계기로 규슈 북부의 주변 호족들이 술렁거리게 되자, 다카노부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아리마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요시히사는 동생 시마즈 이에히사에게 군을 맡겼다.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8,000 정도로, 6만(실제로는 2만 정도라는 설도 있음)의 류조지군에 비해 수적 열세였으나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와 늪지대 사이의 좁은 길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 일단 한 번 전투를 걸었다 도망치는 척 하며 오키타나와테로 유인한 후, 갈대에 숨어있던 복병을 이용해 기습했다. 류조지군도 만약을 대비해 시마바라만 해안선과 산 쪽으로 별동대를 꾸렸지만 시마즈는 이것도 예상해 아리마 측 수군과 조총 부대를 이용해 격퇴했다. 이 전투로 류조지 가문이 바로 망하진 않았지만, 다카노부 본인을 위시한 류조지 사천왕 등, 류조지가의 우수한 무장 들이 다수 사망하면서 결국 향후의 세력판도를 순식간에 시마즈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시마즈가 규슈 전체를 통일해나가는 데 위기를 느낀 오토모 소린은 당시 혼슈 대부분을 제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접촉해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 사실을 안 시마즈 요시히사는 히데요시가 건너오기 전에 규슈를 제압해두고 맞아 싸울 심산으로 전 규슈의 병사 5만을 긁어모아 오토모를 밀어버리러 간다.

이와야 전투에서 오토모 측의 용장 타카하시 쇼운의 분전으로 시간을 너무 끄는 바람에, 결국 오오토모를 밀어버리지 못하고 규슈에 도착한 도요토미의 대군에게 압도당하자 항복하였다. 이후 시마즈는 도요토미에게 새로 얻은 대부분 땅을 토해내고 요시히사에게는 사쓰마 1국, 동생 요시히로에게 휴가 1국, 도요토미와의 협상을 이끌었던 가신 이주인 타다무네에게 오오스미 1국이 주어졌다. 결과적으로 시마즈 가문 자체는 남규슈의 3국을 영유하게 됐지만 규슈 전체를 손에 넣을 뻔했던 요시히사는 도요토미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로도 시마즈 가문은 요시히사가 이끌어갔지만, 임진왜란에 참전한 요시히로의 병력이 시마즈의 국력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을 의심한 히데요시는 시마즈 영지의 고쿠다카 재조사를 명한다. 그 결과 고쿠다카에 비해 터무니 없게 적은 병력이 참전한 것에 대한 히데요시의 추궁에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에게 당주 자리를 넘기고 은거한다. 이로 인해 시마즈 가문의 실질적인 수장 자리를 둘러싸고 시마즈 가문에 분쟁이 발생한다. 대외적으로 히데요시가 인정한 가문 수장은 요시히로였지만 가문 내부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각종 상징물도 다 요시히사가 가지고 있는 식으로 요시히사를 주군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작 시마즈 요시히로가 임진왜란에 참전해 전방에서 고생할 동안 막상 시마즈 요시히사는 명나라에서 파견한 간첩과 내통했고 명나라의 임진왜란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큰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가 일어났지만 일단 요시히사는 이에야스의 선심 공세에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당주는 동생인 시마즈 요시히로였고,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 전투 전야 상황에서 이에야스의 후시미성 원군 요청에 천여명의 병력을 데리고 갔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서군에서 싸우게 되었다. 어차피 서군 한복판에 떨어진 꼴이었고 요시히로 입장에서도 자신을 1국의 영주로 만들어 준 이시다 미츠나리를 그냥 못본척 할 수도 없었다. 너무 적은 병력으로 서군에 참전하게 된 요시히로는 사쓰마에 증원 병력을 요청했지만 내심 도요토미와 미츠나리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요시히사는 답장조차 하지 않고 무시했다.[1]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하고 요시히로는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규슈에 복귀했지만 그때도 요시히사는 물론이고 요시히로의 친아들 시마즈 타다츠네조차 마중 나오질 않았다. 게다가, 더욱 가관인 것은 이에야스는 동생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전한 책임을 추궁했는데, 이에 요시히사는 동생이 치매 걸려서 그랬다고, 독박씌워 버렸다.[2] 그래서 동생을 내친 막장 형이라고 조롱당하기도 한다. 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문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당주 직을 내려놓고 물러나는 조건으로 요시히로 개인에 대한 처벌도 불문에 부친다.[3] 요시히로 한 사람의 대외적 이미지를 포기하는 것으로 가문 전체와 요시히로의 목숨을 모두 지킬 수 있었으니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현명한 처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서군에 참여한 책임으로 동생 요시히로가 은거하고 요시히로의 아들인 타다츠네가 당주 자리를 이었고 요시히사가 그 후견인으로 시마즈 가문을 운영하는 형태가 되었다. 요시히사는 도요토미는 물론이고 도쿠가와에도 신종하지 않고 독립적인 세력이 되길 바랬지만 타다츠네는 요시히사 몰래 교토로 직접 가서 이에야스를 회견했고, 이름 한자를 받아 이에히사(家久)로 개명했다. 이로서 뒷방으로 물러난 전임 당주 요시히로, 요시히사 둘과 현직 당주 이에히사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세간에서는 "사쓰마에는 당주가 셋이고 가신도 셋인데, 이들이 한자리에서 만났을땐 제법 흉흉한 분위기였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정실이 두 명인데 둘 다 근친혼이다. 첫 번째 정실은 아버지의 여동생, 그러니까 고모이며 두 번째 정실도 고종 사촌이면서 할아버지의 양녀, 즉 고모였다. 요시히사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 카메쥬를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와 결혼시키고 가독을 물려줬다. 하지만 부부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아 카메쥬히메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3.1. 전국란스의 캐릭터

파일:attachment/시마즈 요시히사/0f.jpg

시마즈 4형제중 장남.

시마즈가 마군에게 점령당하면 란스에게 특공을 걸었다가 순살당한다. 4명이서 특공을 걸다가 란스가 이를 물리치고, 다른 형제를 도망치게 한 후 도핑 약먹고 자살 공격.

우에스기 루트의 경우 산 속에 숨어 지내다가 란스가 찾아내어 켄신과 결투를 치른다. 겐신이 이긴 경우 수도에 집을 마련해주고 숨어 지내는듯. 무장 등용은 할 수 없다.

마군이 등장하지 않는 루트라면 쿠로히메가 오다에 납치당했을때 냉큼 항복. 군주인 주제에 4째 동생 이에히사랑 3째 동생 토시히사가 가버린다고 하자, 제일 어벙한 2번째 동생 카즈히사에게 나라를 맡기고 가버리려고 한다. 당연 둘째도 같이 오지만...

성능은 모리 테루의 상위 호환. 행동수 6은 물론 6 / 6 / 7 / 7에 가드 개, 약탈, 반격율 업 2까지 달려있다. 모리 테루를 동료로 만들고 시마즈 4형제가 오다에 항복했을때 모리테루가 캐릭터 클리어가 안되어있으면, 요시히사의 호감도를 올리다보면 모리 테루와 결혼해버리며 이 경우 모리 테루의 모든 병력이 그대로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흡수된다. 이때에 장군 호위대를 모리테루에게 장비해 주는것은 당연한 센스. 7천 이상의 병력으로 몰아붙일수 있다.

하지만 란스가 모리 테루의 캐릭터 클리어를 해버렸을 경우에 테루한테 차이면서 요시히사의 캐릭터 클리어가 된다. 이때 테루의 선택 이유는 란스가 더 재밌다고.

3.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파일:島津義久.jpg 파일:島津義久2.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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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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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요시히사 본인은 무력 빼고 A급 무장이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중 영지가 남서쪽 끝에 있어서, 혁신에서는 간토 쪽 다이묘로 시작하다 보면 자주 마지막에 남게 되다 보니까 국내 노부나가의 야망 유저들에게는 최종 보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장수진도 막강하고 남서쪽 끝에 있어서 배후의 염려가 없다 보니 초보 유저가 플레이하기도 쉽고[4], 컴퓨터에게 맡겨 놓아도 금세 규슈를 장악하고 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로 치면 왠지 유장과 비슷한 느낌. 차이점은 요시히사 본인은 능력치가 A급이고, A급 ~ S급 장수들이 일족이고, 유장은 본인이 D급이고, 일족들은 C급 ~ B급인데가 S급 장수가 법정 혼자 뿐이고, 나머지 장수들은 -A급과 +B급의 무장들이다. 난이도는 둘다 초보자에 하기 쉬운 세력이지만, 유장은 영웅집결이 아니라면 옆에 적수가 없는 편이고, 요시히사는 옆에 강력한 세력인 류조지와 오토모가 있는게 약간 어려운 편이다. 시리즈마다 우수한 철포대 양성이 가능해서 동생들과 함께 순식간에 남규슈를 장악할 수 있다.

심지어는 토탈워: 쇼군2에서도 천하통일이 가장 쉬운 세력이다
10 창천록과 11 천하창세에서는 기타큐슈의 경제력이 남 규슈를 웃돌기 때문에 일단 남 규슈를 장악하고도 기타큐슈의 패자를 겨루는 오토모 소린이나 류조지 타카노부를 뚫어내기가 상당히 버거웠으나, 12 혁신에서 기타큐슈의 경제력이 약화되고 기술 혁신 개념이 도입되면서 기술 면에서나 무장 적성 면에서나 모두 철포 기술에 특화된 시마즈 씨가 엄청난 수혜를 누렸다. 오토모 가는 기술은 효율이 낮은 병기 기술에 특화되어 있고 장수들의 적성이 죄다 엇맞아 기술 개발의 효용이 떨어졌고, 류조지가는 특화된 기술 자체가 없었다. 13 천도에서는 기타큐슈의 경제력이 다시 강화되고, 시마즈 요시히사 자신이 적성을 D, C로 도배하는 등 미묘한 하향을 받아서 오토모 소린과 관서 최종 보스를 겨루는 상황.

세키가하라 전투 시나리오에서 호소카와 후지타카, 구로다 간베에와 같이 신분이 은거으로 나온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85 / 74 / 86 / 93에 철포,축성은 A이고, 내정은 S. 전법들은 창금1, 철포 1, 2, 고무, 위압을 가지고있다. 고유 전법인 사태간를 습득이 가능하고, 수명도 길고하니 어디에 쓰든 만능형이다. 능력치들은 승려나 남만인으로 통해 아이템을 얻도록 하자.

창조에서는 통솔 83, 무용 63, 지략 84, 정치 92로 역시 좋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4형제가 합류하기 전의 시마즈 가는 약한 편이지만 합류하면 역시 규슈 최강으로 성장한다. 군단이 필수인 창조의 특성상 영토가 커지면 후방 군단의 도움을 받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지만 그래도 거의 서쪽의 최종 보스로 성장하는 편이다.

스토리 모드인 전국전에서도 상당히 대접받는 편으로 삼주통일부터 다카조카와 전투(미미가와 전투)와 오키타나와테 전투, 규슈 통일이 있고 PK에서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과 시마즈의 퇴각까지 6개의 전국전이 있다. 다른 유력 가문에 비해 많은 건 아니지만 삼주, 규슈 통일 외의 전국전에 동영상이 있는데 이는 주인공 오다가와 PK에서 세키가하라로 버프받은 도쿠가와 다음으로 많은 수다. 다만 동영상의 주인공은 동생 이에히사와 요시히로로 본인은 한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형제들간의 우애가 강조되는데, 심지어 실제로는 요시히로와 사이가 나빴을 때도 훈훈하게 나온다. 토리이 모토타다가 요시히로를 거부해서 서군 사이에 포위됐기에 서군이 된 것을 이에야스의 계략으로 보고 병력을 보내지 않은 것도 거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식.

별개지만 노야의 일러스트는 어째 시마즈 4형제 중에서 장남인데 젊게 나온다.

3.3. 임진왜란 1592

3화에서 등장하며 히데요시가 대군으로 몰아붙이자 항복하며 딸을 인질로 잡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1] 다만 요시히사의 의도를 떠나서 어차피 증원할 수 있는 병력 자체가 없다는 해석도 있다. 당시 영지인 사쓰마의 병력은 임진왜란, 특히 노량 해전 때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2]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이 승리했고, 요시히로가 서군에 가담했던 이상 어떻게든 해명을 하긴 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시히로는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고 시마즈 가문 역시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3] 요시히사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가 젊은 시절 초상화라 그렇지, 세키가하라 전투 시점에서 요시히로는 이미 65세의 노인이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요시히사와 시마즈 가 사람들의 변명이 아주 허황되지는 않았다. 또한 요시히로는 더 나이가 들어서는 정말로 치매에 걸려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4] 천하창세에서는 오토모씨를 섬기는 규슈 유일의 군신 타치바나 도세츠 때문에 피눈물을 흘린 유저가 많다. 다만 오토모 씨만 멸하면 천하 통일은 일사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