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1542 ~ 1600) |
구키가의 상징 일곱 별(七曜) 칠요 가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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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2. 생애
원래는 시마의 해적 출신. 시마는 오늘날의 세토내해 지역으로 좁은 바다에 먹잇감이 될 배들도 많이 다니고 해안선도 복잡해서 여러 해적들이 난립한 지역이었는데, 구키 가문은 시마의 다른 가문들을 공격해 멸망시키는 등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의 18세의 요시타카가 가독을 상속하자마자 시마의 다른 가문들이 구키 가문을 연합해 공격했다. 이때 카이에서 추방되어 유랑하던 다케다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도 연합군을 돕기도 했다. 이에 요시타카는 오와리로 탈출하였다.오와리에서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중개로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갔다고 하며 키타바타케 가문 공략에 큰 공을 세워 시마국의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그 유명한 모리의 무라카미 수군을 상대로도 직접 건조한 철갑함을 이용해 펼친 활약으로 센고쿠 시대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이름을 날린다. 이 전투가 바로 제 2차 키즈가와구치 해전인데 이 때 구키는 단 6척의 철갑함(대형 안택선에 철갑을 두른 형태)으로 무라카미 600척을 박살내버리고 만다.[2][3] 이후 혼노지의 변 때는 사카이에 주둔해 있었고, 이후 오다 노부카츠를 따르다가 카즈마스의 설득으로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가담했다.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 일본 내에서 영지는 작을지언정 바다에 대한 지식이 많았기에 수군 총 책임자로써 후방에 있으면서 임진왜란 발발 직후 토바성을 건설하고 대형 함선인 니혼마루를 건조하였다. 니혼마루는 함포 3문[4]을 장비하고 있어 당시 일본의 배 중에서도 큰 편에 속했다. 그러나 수군력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판단했던 일본군이었고 도도 다카도라 등 일본에서 그나마 수군 경력이 있던 장수들 앞에 하필 상대가 이순신이 나타났고 이순신에 의해 다 괴멸당하는 피해를 입은데다가 일본 수군이 연전연패하자 부산포로 파견된다. 와키자카의 단독 출정에서도 이순신의 유인을 통한 조선군의 함정에 당하면서 실패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안골포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본인마저 안골포에 40여 척의 왜선이 있다는 첩보를 얻고 쳐들어온 이순신의 함대에게 함대의 절반이 전멸하는 궤멸적인 피해[5]를 입고 참패한다. 이것이 안골포 해전인데, 조선군 측 피해는 전사자 19명과 부상자 114명이었다.
안골포의 주둔지, 즉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안고도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깨진 피해라 14년 전에 키즈가와구치 해전에서 6척으로 신화를 쓴 그 사람 맞나 싶을 정도이다.[6][7] 이 과정에서 기함인 니혼마루를 방벽으로 삼아 부하들을 구조하는 중에 기함이 조선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에 피격당했고 구키는 그 대장군전을 기념품 삼아 챙기고 육로로 도주하였다.[8] 안골포에서 패한 뒤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의 정면승부보다는 육군과 공조를 중시하였고, 구키 본인은 쓰시마에서 군선의 공급을 지휘한다. 이후 정유재란에서 해군 지휘관 자리에서 빠진 것을 계기로 아들 구키 모리타카에게 가독을 상속시키고 은거하였다.
그 이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들 모리타카는 동군, 자신은 간 미치나가 등과 함께 서군 편을 들어 부자가 서로 대립하였고 이 전투는 아들이 속한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아들 모리타카는 자신의 주군 이에야스에게 아버지의 구명을 탄원하여 결국 승낙받아 서둘러 아버지에게 사자를 보내 탄원이 성공했으니 무사할 거라고 전하지만, 아버지 구키 요시타카는 자신의 가신 도요타 고로에몬(豊田五郎右衛門)의 권고로 이미 1600년 10월 12월 향년 59세로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모리타카는 격분하여 자신의 아버지한테 자살을 권고한 고로에몬을 노코기리비키[9]로 처형하고 효수했다고 한다.
대장군전 말고도 나무위키에서 남아있는 이 사람의 자료로는 일본 고류 무술 중 하나인 구키 가문의 구귀신류가 있다.
3. 대중매체에서
- 슈팅 게임 <바사라 2>에서는 4면에서 등장. 맨 처음에 나오는 중간보스로 부전자전 아니랄까봐 전작의 추남 이미지인 구키 모리타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때까지 적장을 착실히 물리쳤다면 요시타카 대신 모리타카가 등장.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B급 무장인데 해적 다이묘답게 수군 적성치가 최고치이다. 수군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수군 적성 S에 철포적성도 높은 편이라 수군을 이끌기 좋았지만 수군이 없어진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는 그냥 부장이나 후방 수비용 정도로 쓰게 된다. 노부나가의 야망 DS2에서는 전투력 84에 철포적성이 B라서 철포적성인 오다가문이나, 스즈키가문, 미요시가문에서 쓰기에 준수한 무장이다.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 <태합입지전 5>에서는 비중이 있는 편인데 맨 처음부터 플레이 가능한 인물로 해적 플레이의 기본 무장이다.[10] 그답게 여러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으며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중재로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 들어가는 것과 모리 수군과의 싸움 등이 묘사되었다. 초기 시나리오인 1560년 일륜의 장 시나리오에서는 해적의 일원 중 하나지만 게임을 진행하면서 두목이 될 수 있으며 1560년 이후의 시나리오나 그 이전의 시나리오로 진행하면 이미 해적 두목인 상태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서영진이 연기했다. 해적 다이묘(海賊大名)라는 이명답게 일본 수군 장수 4인방 중 최선임 겸 수군 총대장으로 나온다. 도도 다카토라가 이순신의 수군과 몇 번 상대해 전부 패하며 그들의 무서움을 온몸으로 느낀터라 "조선 수군을 깔보면 안 된다"는 신중론을 펴고 구키 역시 이에 동참하여 압도적인 병력차로 깔아뭉개려고 차근차근 준비한다. 그러나 용인 전투로 조선군을 박살내고 내려온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당장 조선군을 때려부실 생각으로만 가득 찬 상태. 이런 상황에서 수군 총사령관이 구키로 확정되자 삐진 와키자카가 단독으로 싸우러 나가지만 개박살이 나는데 구키 역시 와키자카의 단독 행동에 분노하고, 도도에게서 와키자카의 함대가 전멸했다고 보고받자 와키자카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펄펄 뛴다.[11] 그러나 자신도 안골포 해전에서 탈탈 털리며 위신을 있는대로 깎아먹으며 이후 부산포 해전에서도 와키자카, 도도와 같이 발리는 등 호구 일본군의 대표주자로 자리하는데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대파하며 설욕을 한다. 95회까지 출연하고 그 이후로 담당 배우의 폐렴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하차했으며 종영 후 이듬해 향년 4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KBS한정으로 이 드라마가 마지막 작품이었다.
- 2022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등장했다. 배우는 김강일. 가토 요시아키와 같이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지원하기 위해 철갑선 같이 온다.[12] 가토 요시아키가 와키자카에게 기습당할때 같이 끌려오며, 가토에게 배들을 넘길 것을 권유하는 와키자카에게 내 함대는 무사하겠군이라는 식으로 한마디 던지고 철수한다. 확장판에선 이후 가토의 제안대로 안골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와키자카가 한산에서 조선 수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패전의 책임을 와키자카에게 돌리면 되겠다고 가토에게 한 마디 했다가, 자신의 자랑이었던 철갑선을 비롯해 자신의 함대를 다 잃어버리고 멘붕한 가토에게 한 소리 듣는다. 이후엔 이순신의 함대가 찾아오고...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는 A급 전투 항해사로 등장하며, 금쇄봉 비슷한 무기를 들고 다닌다. 연대기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의 연대기에서 도쿠가와의 명을 받은 모치즈키 치요메의 사주로 마사무네를 제거하려 따라다니는데, 일기토에서 금쇄봉으로 마사무네를 일격에 대자로 뻗게 만든다.
[1]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 명량 등 한국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 및 영화 등지에서도 자주 나온다.[2] 이 날 전투에서 구키 요시타카는 무라카미 선단을 단순히 몰아낸 게 아니라 무라카미 선단이 저돌적으로 계속 돌격해 오는 바람에 충파로 깨버리고 적은 숫자지만 대포도 실어서 적함들을 박살냈는데 무라카미 수군이 입은 피해가 무려 수백척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수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무라카미 수군의 함선들이 세키부네나 그 이하급으로 구성된 중, 소형선 함대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6척의 배로 600척을 상대해 대승을 거두었다면 단순히 수치상으로는 이순신 장군보다 더 뛰어난 수군제독이라는 소리가 된다.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순신과 조우했을 때는 승리는 커녕 단 한척의 판옥선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이순신에게 그야말로 모든 함선이 박살이 난다. 물론 일본 한정 해전 전문가라는 타이틀은 헛된게 아닌지 의외로 이순신에게 해전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히고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은게 구키 요시타카이긴 했다.[3] 그 유명한 명량대첩도 13척이 133척과 싸워서 이긴것이다.[4] 조선군이 사용하던 전장식 대포 구조를 가진 총통과는 다른 불랑기포였으나 포탄의 성능이나 승조원의 숙련도 면에서는 조선군의 총통보다 떨어졌다.[5] 조선군 측에서 얻은 수급만 250여 구나 되었고, 익사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는 조선왕조실록 상의 기록과 전선 20척을 격파(침몰)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요시타카가 이끌던 군대는 와키자카의 군대 못지않게 처참하게 깨졌다.[6] 전술목표 자체가 너무나 불리했던 점을 감안해야 하는 노량 해전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제외하면 이순신을 상대로 그나마 가장 분전했던 인물이다. 물론 키즈가와구치 해전에서 상대한 무라카미 수군의 중, 소선 함대와 판옥선의 전투력을 똑같이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렇지만....[7] 이는 일본 수군의 함정과 조선 수군의 함정의 화력차이를 봐야한다. 일본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통해 조총에 쓰이는 화약 제조법을 알게 되었지만 화포 제작을 하지 못하였고 함선에는 화포 또한 없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이미 조선은 고려시대부터 화약무기를 사용했고 조총보다 사거리가 월등히 길고 철포탄환을 발사하는 총통을 함선에 장착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최대한 근접하여 조총을 쏜 뒤 백병전으로 상대해야 했다. 당연히 조선 수군도 바보가 아닌지라 접근하기도 전에 화포에서 날아온 포탄에 침몰되기 일쑤였으며 일본 함정에서 최대 3문만 함포를 달았지만 조선의 판옥선은 무려 양측면 전부 합해서 24문에 가까운 함포가 있었기에 당연히 원거리 화력은 조선군의 압살이었다.[8] 이 대장군전은 이후 구키 가문에서 대대손손 보존하여 21세기에도 남아 현존하는 대장군전 중 원형이 잘 보존된 유일한 유물로 남았다. 이 대장군전은 1966년 10월 일본 규슈 사가(佐賀)현 가라쓰(唐津)성 천수각 개관 당시 일반에 처음 공개됐으나, 이후 수장고에 들어가 빛을 보지 못했다가 구키 가문후손인 후손인 구키 다카쿠니(九鬼隆訓) 씨의 협조로 2017년부터 한국 진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국내 커뮤니티에선 사실 패전의 책임을 물으려는 히데요시에게 '내가 이걸 처맞고도 살아 돌아왔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챙긴 거라는 개드립이 간간히 나온다. 노획한 해당 대장군전을 칭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군은 대들보를 대포에 달아 쏜다'라는 일본 측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날아오는 대들보[9] 죄인을 머리만 나오게 묻어두고 옆에 톱을 두어 행인들이 목을 썰어 죽이는 형벌로, 스기타니 젠쥬보도 이 형벌이 내려졌다.[10] 참고로 이 게임에서 각 직종의 기본 무장은 무사는 기노시타 도키치로(도요토미 히데요시), 검호는 야규 무네요시(세키슈사이), 닌자는 핫토리 한조, 상인은 나야 스케자에몬이다.[11] 극 중 표현에 의하면 "구키는 와키자카보다 모든 방면에서 한 수 아래"라고 하며 "와키자카 성격상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복종할지가 의문"이라고 와키자카의 단독 행동을 암시하는데 졸지에 와키자카 띄우기의 발판이 된 셈. 그래도 와키자카 역시 한산도 대첩에서 털린 이후에는 찌그러져서 구키를 총사령관으로 대우하고 다른 일본군 장수와 잘 협력한다.[12] 실제 역사에서도 구키 요시타카가 철갑선을 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