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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고류 무술과 현대 무도를 나누는 기준점은 메이지 유신(1868)으로 여겨지나, 창시가 그 기간에 걸쳐있거나 그 이후지만 고류의 형식으로 수련되고 있는 경우 여기에 넣었다. ※ 일본 고류 무술의 유파들의 경우 창시 세기별로 분류해 외래어 표기법/일본어 기준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였다. | }}}}}}}}} |
정식명칭은 구귀신전 천진병법(九鬼神傳 天眞兵法:구키신덴 텐진헤이호), 대외적으로는 구귀신류 봉술로 알려져 있으며 종합무술 유파이다. 인술의 부진칸 계통에서는 구귀신전류라고 부르며 독자적으로 전수한다.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일본측 장수인 구키 요시타카[1]의 집안인 구키 가문에서 전수되는 구키집안의 독자적인 병법이다. 의외로 3대 원류 중 하나인 가토리신토류보다 일찍 만들어졌다.
1. 역사
구귀신류의 시조 야쿠시마루 류신(薬師丸隆真)은 1318년 정월 기슈 구마노의 별당(別堂)[2] 시로 호겐 도유(四郎法眼道有)의 아들로써, 모토미야에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별당직을 계승하는 후지와라씨(藤原氏)의 방계로써, 수군을 끌고 겐페이 전쟁에도 활약한 구마노의 호족이었다. 어머니는 히노 다이나곤 스케토모(日野大納言資朝)의 여동생인 치구사히메(千草姫)로써,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을 히에이잔 엔라쿠지의 한본중당 약사여래보살에게 기원하여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약사환, 즉 야쿠시마루로 지은 것이었다.(성은 후지와라)어렸을 때부터 조부인 법인별당 도지츠(法印別当 道實)와 신관별당 유케(新宮別当 有家)에게서 가전무술인 신전후지와라무쌍류(神伝藤原無双流)와 군사학을, 또 아버지 도유로부터 슈겐도[3]를 배운 류신은, 더욱이 교토에 올라가 삼막원의 주지 슈카이를 따라 진언비밀주술을 배움과 함께 승마와 병법을 수행하며 구자밀법(九字秘法)[4]과 음양술에도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성장해서 성인식을 치른 후인 1335년, 아직 앳된 모습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스카웃된 류신은 처음으로 북조에 가세하여 싸웠으며, 1336년 6월 히에이잔 공격에 참여하여 별당 키카의 구마노 여덟장사를 이끌고 적진을 격파하였으나, 승리한 이후 고다이고 천황을 비롯해 남조의 충신들에게 행한 다카우지의 만행은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을 본 류신은 다카우지 형제의 폭정은 천황을 능멸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계획을 세워 구출해야만 한다며 결국 1336년 8월 28일 (이설에는 12월 21일) 카잔인(花山院)의 고궁에 잠입하여 고다이고 천황을 데리고 요시노(吉野)로 탈출한다.
이것을 알아차린 다카우지의 동생 타다요시가 보낸 추격대 1만 기병대에게 쿠라가리 고개에서 따라잡혀 교전이 발생하여 동료들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수적 차이가 너무 심해 고전을 거듭했고 류신의 나기나타도 자루를 잘려버렸다. 류신은 이때 남은 나기나타의 자루를 사용하여 싸웠으며, 접근하는 적은 때려눕히고 멀리 있는 적은 허공에 구자(九字)를 그려 제압했다고 한다.[5] 이때 나기나타의 자루를 사용했던 경험에 의거하여 나중에 류신이 고안했던 것이, 구귀신류 육척봉술이다.
사력을 다해 분전하는 중 요시노에서 원군이 도착하여 무사히 금봉산(金峯山) 장왕당(蔵王堂)의 행재소에 고다이고 천황을 데려다준 류신은, 1337년 2월 히에이잔 황하의 불경보관소에 몰래 안치된 진짜 삼종의 신기를 회수하는 데에도 성공하여 천황의 신임을 크게 얻게 된다. 공적을 치하받는 자리에서 그 비법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류신은 "선조 대대로 전해오는 밀법의 덕으로 구자비문(九字秘文)에 비법이 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대의 충심 신(神)이 나타내는 것임에, 그대 오늘부터 후지와라의 성을 바꾸어 구귀(九鬼)로 개명하라"고 명을 받았다. 즉 구귀의 구(九)는 구자비문(九字秘文)의 구(九)이며, 귀(鬼)란 귀신(鬼神:오니가미)[6]이라는 뜻으로써 신(神:가미)라고 읽으며, 鬼자의 위의 점이 없는 독특한 문자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쿠가미"라고 읽어야 하지만, 도쿠가와 이래의 관행에 따라 구키라고 읽고 있다.[7]
이 사건이 있기 전 남조의 편을 들었던 히노 가문 출신이었던 어머니 치구사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밑으로 들어간 류신의 행동을 비관하여 히노씨와는 지연이 있던 무사시(武蔵)땅으로 떠났으며, 가던 도중 사망했다. 그후 고다이고 천황을 데리고 남조에 투항한 류신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와 회한의 마음을 한 자루의 봉의 카타(形)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극의 십자육법구자막기(十字六法九字止:쥬지롯뽀쿠지도메)이다.아명이었던 야쿠시마루를 쿠란도로 개명한 류신은 그 후 아들 우마노스케 타카요시(右馬允 隆良)외 벳소 시로자에몬 타다아키, 벳소 하리마노카미 미츠히사, 오우치 타미타케 요시카네, 기쿠키 타다미츠 등에게 구귀신류를 전수했으며, 특히 구귀신류 종가에서는 제9대 구키 오오쿠마 요시타카(통칭 구키 요시타카)가 유명하며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구마노 해적단을 이끌고 구귀신류 함상전법과 수전법으로 수군대장으로 해전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바람에 희대의 먼치킨에게 개박살이 나는 참담한 처지를 겪기도 했다.
이후 구귀신류가 금지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649년 1월 15일 아야베 번 성내에 구키가문이 봉제(奉際)하는 구키미타마(九鬼霊)신사의 신전에서 가중봉납시합이 행해졌다. 그때, 죠슈번과 타테바야시번의 가신이자 검술사범을 맡고 있는 타치바나 사겐타 키요사다(橘佐源太清定)라는 사람이 영주의 명을 받아 교토에 체류중이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시합을 청해 왔다. 타치바나는 안바류 검술을 배워 당시 상당한 숙달자로도 알려졌으므로 아야베번에서도 구귀신류의 사범이던 호소야 신파치로(細谷新八郎)를 내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중역들과 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도로 시합이 시작되어, 서로 실력을 겨루어 승패가 나지 않겠다 싶을 만큼 호소야의 목도가 상단에서 내려치는 듯이 보이는가 싶더니 모두 "앗" 하는 순간 사겐타는 머리 위에서부터 가슴에 걸쳐 두조각으로 베여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고 한다. 진검으로도 머리부터 가슴까지 두조각을 내는 달인이 적은데 목도로 그리 했다는 것을 모두 기이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타치바나 사겐타 키요사다는 다른 번의 사범이고, 번주인 사카키바라 가문은 도쿠가와의 측근인 후다이 다이묘인지라 막부로부터 마츠다이라의 성씨를 하사받을 정도의 가문인지라 즉시 전후관계를 고한 서신을 사카키 가문에게 보냈으나, 사카키바라 가문에서는 "그런 가신은 우리에게는 없다."라는 답변이 돌아와 호소야의 목숨은 살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구귀신류는 훈련정지(稽古停止)를 당하여 막부 말에 이르기까지 결코 외부에 공개되는 일은 없었다.[8][9]
이 사건 이전에도 사범들이 탈번한 적이 있던 구귀신류는 몇대에 걸쳐 가문을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인 적도 있었고, 유파의 활동이 사실상 금지당했기 때문에 1649년 이후에는 당연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구귀신류의 부흥을 꾀하고 스스로 무술의 연마와 구귀신류의 체득에 힘썼던 사람이 제9대 번주이자 24대 종가인 구키 타카히로(九鬼隆都)와 그 이후 3명의 당주들이었다.
구키 타카히로는 내정을 잘해 훌륭한 영주로도 알려졌다. 1822년부터 인재를 등용하고 직접 번내를 시찰하여 이때의 기록을 순찰기(巡察記)3권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는 야마카 소스이(山鹿素水)를 초빙하여 야마카류 병학을 배우고 가신들에게 퍼트렸으며 1855년 2월 5일에는 마침내 막부의 군사교육기관인 강무소의 2대 총재로 취임하기도 했다.
뒤이어 아야베번의 마지막 번주였던 구키 타카토모는 1858년쯤 귀족 나카야마가문의 소바요닌이었던 오오구치 이즈모노카미(옛 이름은 오오쿠니 키겐타 타다요시)에 사사하여 오오쿠니 가문 전래의 구귀신류를 배웠으며, 그때까지 구귀신류의 기술이 아테코미(當込:치고 들어가는 것)나 갸쿠와자(逆技:반격기)등을 많이 포함하여 초보자에게는 위험이 따르는 점을 감안하여 1862년에 기본형 9본을 제정했다. 또한 이 오오구치 이즈모노카미는, 근왕사상이 깊어 타카토모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각 번이 근왕과 막부의 2파로 갈라져 논쟁이 심했음에도 아야베번이 곧바로 근왕유신을 지지하였음은 구키가문이 본디 남조였던 것과 더불어, 번주 타카토모에 대한 이즈모노카미의 영향이 컸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26대 구키 타카하루(九鬼隆治)대에 이르러서는 가문 전래의 무술의 부흥과 국풍의 재기를 위해 황도선양회(皇道宣揚会)를 1921년 1월 설립하였다. 다만 이곳에서는 주로 가문 전래의 신도를 주로 강의했고, 구귀신류 무술은 시텐노지 서문 앞의 융무관을 중심으로 오사카의 각 도장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무술을 담당하던 황도선양회 상무국(尚武局)은 이미 2년전인 1919년 봄에 나라의 우네비산에서 성대하게 발족식을 가졌으며 이와미 난가쿠(岩見南学)와 타카마츠 쵸스이 토시츠구(高松澄水寿嗣)[10] 두 사범이 기념 봉술연무를 시연하기도 했다. 발족 당시의 명부에는 시게마츠 마타타로를 초대 국장(이사 겸임)으로 하고, 타카마츠 토시츠구를 심사위원장, 심판위원장에 이와미 난가쿠, 무도위원장에 아키야마 후미히데(토시츠구의 제자)가 있었으며, 이들이 초대 상무국 간부였다. 그러나 이후 타카마츠 시범이 조직을 이탈하면서 난가쿠 사범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이후 2대 상무국 국장이 된 난가쿠 사범은 교토의 무덕회에서 봉술을 연무하는 등 정열적으로 전면에서 활약하였지만, 1934년 봄에 병을 얻어 뇌졸중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죽기 직전 타카마츠 사범에세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의 병세를 토로하며 부디 상무국의 일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타카마츠 사범은 응하지 않았고 결국 마츠바라 카헤이 사범이 3대 국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4대 국장을 맡은 키바 쿄시로(木葉幸四郎)사범은 기획에 재능을 보여 보급용으로 고전에 기반을 둔 상무국 제정카타(尚武局制定形)를 만들어 1936년에 <대일본호신술 제1편 봉술>을 출판하여 구귀신류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키바 사범은 또 타카마츠 토시츠구 사범에게도 배워 체술과 봉술 이외의 구귀신류의 모든 기술에 통달했다고 한다.
세계 제2차대전 이후의 구귀신류는 미군정 휘하의 무도금지에 직면했으나 곧 키바 쿄시로 사범을 중심으로 일본체육국(日本體育局)을 결성하여 재결속을 꽤한다. 키바 사범 이후에는 수제자인 다츠다 야스이치로(辰田安一郎)가 체육국 국장을 이어 전후의 힘든 시기를 이겨나갔다. 1946년에는 미군들 앞에서 봉술연무를 하기도 했으며, 이후 다양한 무술을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단봉술을 정립하여 다츠다류 단봉술로 명명하고 함께 가르치기도 했다. 1977년에는 종가인 구키 타카하루를 명예총재로 일본강무소(日本講武所)를 새롭게 발족시키고 다츠다 사범 아래 구귀무술 촬영의 대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곧 종가인 구키 타카하루가 몸져 눕는 바람에 그만두게 된다.
현재는 29대 종가 구키 이에타카(九鬼家隆)가 종가를 맡으며, 구귀신전 보존현창회(九鬼神伝保存顕彰会)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스포츠센타 등지에서 전습회(傳習會)등을 열어 가르치고 있다.[11]
1.1. 타카기 요신류와의 관계
타카기 요신류(高木楊心流) 유술과는 굉장히 사이가 좋고, 유파를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카기 요신류의 정식 명칭은 본체(本體)타카기 요신류. 시조는 타카기 오리에몬(高木折右衛門)이라는 설과, 그의 아들 타카기 우마노스케 시게사다(高木馬之輔重貞)라는 설이 있다. 타카기 요신류는 구귀신류의 봉술, 검술, 나기나타술을 함께 전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일화는 시게사다의 아들 겐노신 히데시게(源之進英重)와 구귀신류의 오오쿠니 키헤이 시게노부(大国鬼平重信)가 현피를 뜨게 됐는데, 둘이 겨루어 유술은 겐노신 히데시게가 앞서고, 봉술은 키헤이 시게노부가 앞서는 것을 인정하고 이후 둘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의 유파의 오의를 공유하여 두 유파를 함께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타카마츠 토시츠구 사범이 전한 이야기이고,구키가문의 기록에는 1602년 2월 2일 타카기 오리에몬 시게미츠의 이름과 화인을 기록한 <기증문전서:起證文前書>라는 에도시대의 문서가 현존하고, 다른 자료에서는 1617년 3월 7일에 구귀신류의 무문의 두루마리(武門之一巻)를 전수했다고 하니 오오쿠니 키헤이 시절보다 이전, 타카기류 창시자의 시절부터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근대에 걸쳐 이 두 유파가 더욱 강한 접점을 가지게 된 계기는 2차대전 전후에 걸쳐 일시적으로 이와미 난가쿠 사범과 함게 구귀종가를 떠받친 타카마츠 토시츠구의 스승 이시타니 마츠타로(石谷松太郎) 사범이 이 두 유파를 배웠던 것에 의거한다. 이시타니 사범은 타카기 요신류의 이시타니 타케마 마사츠구(石谷武甥正次)의 아들이지만, 일찍이 집을 나와 이바 도다이타로에게 사사해 구키가문의 무술을 배웠다. 물론 아버지로부터도 타카키 요신류를 배웠으며, 이것은 타카마츠 토시츠구 사범에게도 이어져 도쿄의 사토 킨베에 사범에게 전해졌고, 현재 타네무라 쇼토 사범에 의해 타카기류 이시타니덴(高木流石谷伝)으로 전해지고 있다.
1.2. 현대 인술과의 관계와 구귀신전류(九鬼神傳流)
현대 인술관련 단체 중 가장 거대한 것은 명실 상부하게 하츠미 마사아키가 이끄는 부진칸(Bujinkan武神館)이다. 인술항목에서도 설명하듯이 현대 닌자를 자처하는 존재들은 모두 그 계보가 검증이 불가능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츠미 마사아키 역시 부진칸의 메인 커리큘럼으로 삼고 있는 토가쿠레류 인법은 그의 스승 타카마츠 토시츠구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으며, 타카마츠가 설명한 토가쿠레류를 전수한 자신의 스승인 토다 신류켄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역시 그 계보를 확인할 수 없다.타카마츠 토시츠구는 전후 황도선양회 상무국이 일본체육국으로써 재결속하는 것과는 반대로, 1950년 아키모토 후미오, 키무라 마사지 두 제자과 함께 나라현의 카시하라에서 카시하라 상무국을 조직하여 구키 종가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다만 이때에 구키 종가에 전후사정을 자세히 적어 해명하는 편지를 구키 종가에 보내어 사정을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구키 종가와 척을 지는 것은 최대한 피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또한 타카마츠 토시츠구는 구키 종가에서 독립하기 이전에 이미 면허개전을 받았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때 고전(古傳)구귀신류를 배웠음이 확실하다. 그는 면허개전을 증명하는 비전 두루마리도 소지하고 있으니, 구귀신류만큼은 확실히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제자로 하츠미 마사아키가 있었다. 하츠미 마사아키는 타카마츠의 총애를 받으며 그에게서 성실하게 무술을 배웠고, 이때 확인된 바에 의하면 하츠미는 타카마츠에게 토가쿠레류 인법 외에 타카기 요신류와 구귀신류를 배운 것이 확실하다. 하츠미는 타카마츠 사후 토가쿠레류 인법의 종가를 자처하며 60년대 닌자 붐을 타고 일본 내의 여러 영상 매체에 등장하고 인술 조언자로 활약했으나, 닌자 붐이 사그라들자 별다른 수입 없이 지냈으나, 점차 인술에 매력을 느낀 서양인들이 하츠미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런 그의 미국인 제자 스티븐 헤이즈가 미국에서 인술을 가르치며 인기를 끌자 하츠미는 이 상업적 성공에 주목하게 되고 직접 미국에 진출하여 부진칸이라는 단체명을 내세우며 인술 사업에 나서고 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90년대에 들어서는 갑자기 9개 유파의 계승자를 표방하며 토가쿠레류를 포함한 9개 유파 중에는 타카기 요신류와 구귀신전류(九鬼神傳流)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검증 결과 계보가 확실한 것은 타카기 요신류와 구귀신전류 뿐이었으며, 구귀신전류는 구귀신류를 그가 다르게 부르는 것이었다. 즉 구귀신류와 구귀신전류는 이름만 다르지 같은 유파이다. 그러나 하츠미는 세일즈를 위해 원래 구귀신류에는 남아있지 않은 갑주 격투술이나 가부토와리를 사용한 기술 등을 추가했기 때문에 둘을 완전히 같은 유파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하츠미는 다양한 유파를 타카마츠에게 전수받았다고 주장하고는 있으나, 그가 내세우는 다양한 검술, 창술, 나기나타술, 인법체술 등의 영상을 보면, 타카기 요신류 체술과 구귀신류 무술, 그중에서도 봉술을 중심으로 다른 유파들이나 무기술을 재구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츠미 마사아키의 부진칸의 구귀신전류는 구귀신류에서 나온 것이되 지금은 같다고 하기에는 어려울 만큼 변형추가된 것이 많고, 또 그나마도 완전히 배우지 못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12] 또 현대의 자칭 닌자들은 이 부진칸에서 갈라져나간 단체들이 매우 많고, 또 타카마츠에게서 배운 하츠미의 사형들이 따로 토가쿠레류의 종가를 자처하며 단체를 세웠기 때문에, 현대 인술에서 구귀신류가 끼친 영향은 매우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2. 구귀신류의 특징
구귀신류는 원래 과거에는 병법군학과 병볍무술로 나뉘었으며 전자는 "큰 병법:大の兵法" 즉 전쟁터의 법, 후자는 "작은 병법:小の兵法" 즉 전투기술로, 군학은 천문(점성술), 지세, 축성, 진영, 군략이 각각 전해졌고, 무술은 검법, 투검술, 창술, 나기나타술, 봉술(반봉술 포함), 체술, 화술, 수술(水術:해상전투술), 마술(기마궁시를 포함), 철판던지기(수리검술)의 10종목을 포함하고 있었다.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체술, 봉술(육척봉&반봉), 검법, 창술, 나기나타술, 투검술, 철판던지기 도합 7종만이 전해지고 있다.
아래는 7종의 개인무술에 대한 해설이다.
구귀신류 2010년 스위스 세미나를 앞두고 촬영된 홍보영상.[13]
2.1. 체술(體術)/철판던지기(鐵板投げ)
구귀신류의 체술은 7대 종가 구키 키요타카(九鬼浄隆)가 정비하고 그의 아들 스미타카 대에 이르러 정립되었다고 전해진다. 특징은 갑주격투술이었던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것이며, 특히 몸받음(當込)을 중시하고 손목잡기같은 기술에 연연하지 않는다. 전쟁터 실용무예였지만, 다른 유파들처럼 대략 에도시대 초기쯤 평복무술로 개량된 것으로 고찰하고 있다.[14] 이중 기본형 8본은 막부말~명치시대에 걸쳐 25대 종가 구키 타카모토가 옛 구귀신류가 반격기와 몸받음 중심으로 초심자에게 위험했기 때문에 고심을 거듭하여 고안한 것이다. 또 체술에 이른바 철판(鐵板)이라고 부르는 직경 75mm짜리 표창술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갑옷을 입은 무사에 대한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120mm짜리 철판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평시의 호신을 위한 철선(鉄扇)술도 포함하고 있다.2.2. 봉술(棒術)/반봉술(半棒術)
봉술은 류조 야쿠시마루 류신이 고다이고 천황에게서 구키의 성을 하사받은 계기가 된 구귀신류를 대표하는 무예이다. 그 모체가 된 기술로는 창술과 나기나타술 두가지의 설이 있는 것처럼 사용법도 나기나타처럼 돌리고, 양끝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기법에 더해, 때리기나 찌르기를 포함하는 등 두 무기술의 특징을 합친 특이한 봉술이다. 또 그 찌르기의 연장선상으로써 봉던지기가 더해져 있는 것도 큰 특색이다.연습에 사용하는 봉으로는 육척봉과 반봉, 단봉의 3종이 있지만, 보통 육척봉을 기본으로 하고, 반봉은 독립된 형태로 전수하고 있다. 또 단봉은 반봉의 개전(皆傳)형에 속하지만 체술에서는 철선술로 사용하며, 단봉은 8촌(24 cm), 철선술에서는 1척 2촌(36 cm)으로 양자를 구별한다.
또 봉의 형태는 6척(180 cm)과 반봉(90 cm)로 길이가 나뉘며, 직경은 7촌(21 mm)인 가시나무 재질의 곧은 봉을 사용한다. 더욱이 타카마츠 토시츠구 사범에 구키종가에서 직경 8분(24 mm)인 원형철판을 1촌(3 cm) 간격으로 한쪽 봉 끝에 5개, 다른 한쪽에 4개, 총 9개를 끼운 봉을 제작하도록 지시한 편지가 남아 전한다.
3척(90 cm) 길이 반봉을 고안하여 구귀신류에 도입한 것은 아즈치모모야마시대의 쿠리야마 우콘이다. 쿠리야마는 가네자와의 마에다 토시이에 밑에서 일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출진하여 극의의 단창을 사용하여 싸웠지만, 타케다 측의 맹장 스즈키 단고노카미 카츠히사가 사용하는 3척 5촌(날 길이 105 cm)의 타치에 고전하여 창의 절반이 잘리고 말았다. 그러나 남은 자루로 더욱 분전하여 스즈키 단고노카미를 쳐부수는 데 이르렀으며, 이때 싸움에서 쿠리야마의 삼척봉은 검보다도 빠르고 강력하게 적을 두들겨 팼다고 한다.
반봉술의 등장에는 이설이 있다. 쿠리야마가 마에다를 따라 가네자와로 들어간 직후, 아직 평화로웠을 때 성 밖 마을에 도적이 출몰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1583년 7월 어느날 밤 거리에서 순찰을 돌던 쿠리야마는 도적과 우연히 마주쳐 육척봉을 가지고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때 도적 중에 쿄하치류(京八流)를 배워 실력이 대단한 야마다 텐류간(山田天龍軒)이라는 자가 5척(151.5 cm)짜리 대도를 사용하여 봉을 절반으로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쿠리야마는 남은 3척봉으로 결국 승리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반봉술을 창시했다고 한다. 다만 후자는 타카마츠 토시츠구 사범이 구키종가에 보낸 서신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15][16]
여하튼 이 반봉술이 정식으로 유파의 커리큘럼에 편입된 때는 에도시대 초기라고 보면 된다. 목록의 내용에는 일부 체술적인 색채를 띠기도 하지만, 실은 그 원형으로 여겨지는 창이나 육척봉 등 장병기의 요소는 표면적인 것이고, 진정한 가르침은 "변화하여 검이 된다." 하는 구전대로, 모든 동작에 검의 움직임을 담아 사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개전(皆傳) 등급에 위치하는 센스도리(扇子捕)란 8촌(24 cm)짜리 단봉을 말한다. 6척에서 들어가 3척으로 축약되어 더욱이 8촌의 짧은 길이로 귀착하는, 장-대- 강에서 단-소-유로 수렴되는 수행법은 구귀신류의 생명과도 같은 강(剛), 리(理), 법(法), 지(智), 신(神)의 가르침을 구현한 것이다.
2.3. 검법(劍法)/투검술(投剱術)
구귀신류에서는 고류에서 보통 검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검법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해서 독자적인 용어가 있다. 좌반신, 우반신이라는 단어가 타류와는 정반대를 나타내고 있는 점이, 그 한 예이다. 보통 좌반신이라고 하면 왼발이 앞으로 나가고 오른발이 뒤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귀신류에서는 장병기를 들었을 때의 뒤쪽 손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좌반신(히다리요코이치몬지(左横一文字)라고 한다)이라고 하면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고 왼발이 뒤로 나가게 된다.유파의 시조 이래로 구귀신류의 대표무술이라고 하면 단연 봉을 가리킬 만큼 그 비중이 컸지만 실은 원래 유파의 명칭이기도 한 천진병법의 출전이기도 한 천진병법심검활기론(天真兵法心剱活機論)그 자체가 다름아닌 검의 극의를 나타내었다는 것에 주목할수 있다. 따라서 에도시대가 되어 이 경향이 현저했기에 아야베번을 더나 에도로 나간 사범가는 대대로 모두 검으로 연무를 했을 정도였다. 카타(形)의 특징이랄 점은 아래부터 위로 베어올리는 키리아게(切上げ) 마키기리(巻切)가 많다는 점으로, 9대 종가인 구키 요시타카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을 때 울산만 해전에서 탄환에 갑옷이 관통당했음에도 용맹하게 적선에 뛰어들어 적장의 사타구니를 올려베어 승리한 일화는 구귀신류 검법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17]
또한 검법의 목록중에 투검술을 추가하여 전수하게 된 것은 흔히 말하는 수리검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모테(表)는 일반적인 타치와 단검을 쓰고, 우라(裏)에서는 고즈카(小柄)[18]를 사용한다. 봉술에서의 봉던지기와 마찬가지로 물건을 던지는 기술을 중시하는 것도 이 유파의 특징이다.
2.4. 나기나타(薙刀)
구귀신류에서 나기나타는 유파의 시조 야쿠시마루 류신이 이것을 가지고 아시카가측의 추격대와 싸워 봉술을 창안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귀신류의 원조인 신전후지와라무쌍류(神伝藤原無双流)에서는 제1의 무기였다고 한다. 현재 전승되는 기법중에는 우라기리(裏切), 갸쿠기리(逆切)등의 특수한 용법 외에도 칼날 끝부분의 휨을 이용하여 적의 목을 감거나, 또는 손목에 걸어서 끌어당겨 쓰러트리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볼 수 있으며, 종합무술다운 교묘함을 발휘하고 있다.또 구귀신류의 나기나타는 길이는 7척5촌(225cm)이며, 센단마키(千段巻, 칼날의 슴베가 들어간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자루에 등나무 껍데기나 기타 강화를 한 부분)을 9개의 쇠고리로 감아 구륜형(九輪形)으로 제조하고, 칼끝에서 8촌(21cm)정도는 양날로 만들어놓는것이 예로부터의 제식이다.
2.5. 창술(鎗術)
구귀신류의 창술은 자루로 적의 무기를 견제하는 시바키(志波岐)나 마키코미(巻込)등의 기본조작법 이외에도, 칼날끝의 날로 몸통을 후려치고, 손목을 베어내며, 또는 검처럼 머리 위를 치고, 혹은 허공에 회전시켜 목을 듯는 등, 목록에 본(本)숫자 이상으로 다양한 기술이 전개된다. 더욱이 창을 들어올려 위에서부터 내리찌른 다음 즉시 땅에 엎드려 목 보호대를 찔러올리는 등, 다른 유파에서는 볼 수 없는 용법도 있어, 구귀신류의 깊은 수준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센단마키에 9개의 쇠고리를 끼워 만드는 것은 나기나타와 동일하며, 창날끝은 단면이 정삼각형에 혈조가 파여저 있다. 창날길이는 1척 2촌(36cm), 전체길이는 9척(270cm)의 보통 창(直鎗)이다.
2.6. 목록으로만 남아있는 실전된 내용들
고전 고귀신류에서는 구귀종가에 전해지는 사천의 두루마리(四天の巻)라고 불리는 4권의 고사본(에도시대의 사본), 즉 천진병법천문지문편(天真兵法天門地門遍), 천진병법축성진영전략편(天真兵法城築陣営戦略遍), 천진병법심검활기론(天真兵法心剱活機論), 천진병법체술활법론(天真兵法體術活法論)이 남아 있으나, 앞의 두권은 전략군사학 서적이고, 뒤의 두권이 개인무술에 해당한다.개인무술 중에서도 수술(水術)이나 수마술(水馬術)은 구마노 해적으로 활약하던 시절 정립된 것으로 보이며, 신풍비술(神風秘術)과 적은의 술(敵隠之術), 화중풍진편(火中風陣遍)은 척후와 비밀신호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쉽게도 극히 일부만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또 이 내용을 소상히 기록한 문서도 남아 있으나 그 실제 이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3. 관련 문서
[1] 물에 빠진 부하들을 구조 중에 대장군전을 맞고 그걸 들고와 21세기에도 남아있게한 그 장군이다.[2] 요즘으로 치자면 행정부 산하조직의 수장 쯤 되는 직책이다. 특히 겸직하는 경우 별당이라고 불렀다.[3] 修驗道. 불교 신비주의의 하나로써 고행을 통해 수행을 싾는 수련이다. 이러한 종류의 수련은 세계적으로도 많아서 이슬람교에서도 수피즘이라는 신비주의 고행종파가 존재하고, 인도에서는 지금도 매우 많다고 한다.[4] 중국 도교에서 유래한, 잡귀를 쫓는 주술. 요즘에는 닌자 관련매체에서 자주 쓰는 바람에 마치 닌자들의 주술인 양 인식되지만, 가토리신토류에서도 가르치는 평범한 주술이다.[5] 구자인법, 즉 구자호신법에서는 약식으로 허공에 가로 세로로 마치 바둑판처럼 손으로 9번 선을 그리기도 하는데, 이렇게 했단 소리이다.[6] 우리나라에서는 귀신이라고 하면 유령이나 혼백을 뜻하지 실제 살아있는 괴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오니(鬼)는 숲의 정령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는 산의 괴물을 일컫는 단어이며, 혼령만 있는 한국의 귀와는 달리 실체를 가진 괴물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오니가미란 괴물신이라는 뉘앙스가 보다 정확하다.[7] 구귀신류 측에서는 도쿠가와 가문이 북조의 편을 들었었기 때문에 남조의 충신인 구귀가문의 실체를 숨겨야만 다이묘로써 존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고 하며, 이때 공식 계보상에서 후지와라노 야쿠시마루 류신의 이름도 지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쿠가미라고 읽지 않고 구키라고 읽었다는 것.[8] 이 일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원전인 天津蹈鞴秘文解読遍』奥書-天津蹈鞴秘文・十八巻之秘에서는 죠슈 타테바야시 십만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가신이라고 되어 있으나 야스마사는 1606년, 즉 이 사건이 일어나기 43년전 사람이다. 그의 아들 사카키바라 타다츠구는 1644년 오슈 시라카와로 영지 변경을 당하니, 사건 5년전이므로 역시 연대가 맞지 않다. 다만 타테바야시번은 1651년까지는 공지(空地)로 남아있었으므로 그때까지 사카키바라 가문이 주재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타다츠구 시절이어야만 아귀가 맞는다.[9] 다만 훈련정지를 당한 것은 사실이며, 이후 유파를 보전하기 위해 녹봉은 나왔다고 한다.[10] 이 양반은 나중에 구귀신류에서 이탈해 따로 놀기 시작하는데, 그의 제자 중 한명이 하츠미 마사아키였고, 이 하츠미 마사아키는 현대인술 중 가장 세력이 대단한 부진칸(武神館)을 창설하게 된다.[11] 변변한 도장도 없이 스포츠센타라니 명색이 고류무술이나 되면서...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본에서는 검도를 비롯한 현대무술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고류조차도 도장이 없는 경우가 많다. 무술 인구도 많이 줄어들은 일본의 사정도 있고, 고류는 제법 알려진 유파라도 생각보다는 수련생이 없다시피한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덕택에 대부분 고류의 경제사정은 그다지 좋지는 않은 편이고, 보존회나 진흥회 등을 설립하여 이러한 현대적인 단체를 통해 유파를 지역 스포츠시설을 빌려 강습회를 열어 활동해나가는 실정이다.[12] 구귀신류에는 검술, 나기나타술, 창술 등의 무기술이 따로 존재하며, 각각의 이치가 다르다. 봉술은 단지 구귀신류의 대표적인 종목일 뿐이다. 만일 하츠미가 구귀신류를 완전하게 배웠다면 나기나타술 등의 영상물에서 구귀신류의 특징이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나 하츠미는 부진칸 검술 DVD에서 양날검, 타치, 우치가타나를 사용하는 법이 각각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셋 다 똑같이 쓰는가 하면, 상대를 베었는데 체술의 원리로 굳이 넘어트리는 등 체술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의문투성이의 동작을 선보인다. 또 부진칸 창술 DVD에서는 마치 봉술을 연상케 하는 동작을 하는가 하면, 나기나타술 DVD에서는 매우 어설프고 구귀신류와 동일하지 않은 동작을 보인다. 그가 구귀신류의 모든 종목을 다 배우지 못했을 것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다.[13] 유튜브 등에서 구귀신류라고 치면 구귀신전류(Kukishindenryu)가 더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하츠미가 재창조한 것이다. 이 영상은 보기 드문 원조 구귀신류의 영상. 보통 봉술만 내세우기 때문에 이렇게 종합 무술을 다 내놓은 영상은 보기 힘들다. 구귀신류 검법 특유의 올려베기나 주저앉으며 목을 올려찌르는 동작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14] 그래서 하츠미 마사아키의 구귀신전류 갑주격투술은 구귀신류 체술에 기반을 둔 창작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구귀신류 어디에도 갑주격투술 자체는 남아있지 않다.[15] 현대인술의 토가쿠레류도 그렇지만, 타카마츠는 개인적으로 허풍을 많이 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그에게서 나오는 전래나 일화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16] 이 일례에서도 쿄하치류 같은 명문 중의 명문인 유파를 익힌 자가 성 밖에서 도적질이나 하고 있다던가, 게다가 그 도적이 어디서 보기도 희귀한 5척짜리 오오다치를 사용했다는 내용의 현실성은 거의 0에 가깝다. 현대적으로 예를 들면 사법고시 합격생이 최신 수입 스포츠 오토바이를 타고 오토바이 날치기를 하더라는 이야기 급으로 웃기는 소리다.[17] 울산만 해전이라는 것을 국내에서 어떻게 부르는지 알 수 없으나, 구귀신류 종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화의 하나이다. 실제 일본수군은 적선으로 건너타는 보딩전법에 능했고, 조선수군이 가장 처하고 싶지 않는 상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 점을 잘 파악하여 포격전으로 승부를 걸었으며 구귀신류를 참살했다. 더불어 이때 적장을 벤 타치는 츠리마타(釣股)의 명검이라 부르며 가보로 소장했었다고 한다.[18] 우치가타나의 칼집 양쪽에 끼우는 일상용 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