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ecd21> 최종직위 | 병주자사(幷州刺史) |
성 | 고(高) |
명 | 간(幹) |
자 | 원재(元才) |
아버지 | 고궁(高躬) |
생몰연도 | 174년 이전[1] ~ 206년 음력 3월 |
고향 |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 어현(圉縣) |
사망지 | 옹주(雍州) 경조윤(京兆尹)[2] 상락현(上洛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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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원소의 외조카로 원소의 누이의 아들이라고 한다.[3] 자는 원재(元才), 출신지는 연주 진류군 어현.(현 허난성 카이펑시 치현(杞县))진수의 삼국지에는 별도의 열전이 없고, 사승의 《후한서》에 고간의 열전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배송지가 《삼국지》 <고유전>의 주석으로 《후한서》 <고간 열전>의 첫 부분을 인용한 것만 남아 전해진다.[4] 때문에 현재로서는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모아 행적을 추측할 수 밖에 없다.[5]
당시 정황상 그 나름대로 관도대전 시기 한 주(州)를 차지하고 원소 사후 패업을 꿈꾼 군웅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기록이 부실한 탓에 그다지 부각되지 못하며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여러 창작물에서는 고간의 병주 세력은 무시당하거나 원소의 일족이자 일개 부장 정도로 격하된 위치를 가지게 된다.
2. 정사 삼국지
2.1. 원소 휘하
사승의 《후한서》에 따르면 고간은 진류군 어현 사람이며 자는 원재. 할아버지 고사는 사예교위, 아버지 고궁은 촉군태수를 지낸 명문 출신으로, 문무 양면에 탁월한 두각을 나타냈으며 원대한 재능과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6]《영웅기》에 따르면 191년, 원소가 한복에게서 기주를 빼앗을 당시 고간은 곽도, 순심 등과 같이 원소에게서 파견된 논객으로 한복을 회유, 협박해 원소에게 기주를 양도하도록 했다.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후 고간은 원소에게서 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7] 역시 연도는 불분명하나 원상이 원소를 계승했을 무렵에는 병주목으로 승격해 있었다.
2.2. 원상에 대한 반란
원소 사후의 공백을 틈탄 조조가 북상해오자 원상은 직접 여양에서 조조 본대와 대치하는 한편, 흉노선우 호주천을 사주해 평양에서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하였으며, 곽원을 하동으로 파견해 호주천을 구원하며 조조의 측방을 공격했다. 이때 고간은 곽원에게 합류했고, 고간과 곽원은 지나는 성읍마다 모조리 함락시키며 위세를 떨쳤다.하지만 평양에서 호주천과 합류하기 위해 분수를 건널 무렵 원상과 동맹관계에 있던 마등이 조조 측의 회유에 넘어가 원상을 배신하면서 마초와 방덕은 분수를 도하하던 곽원군을 공격했다. 곽원의 군대는 몰살당했으며 곽원 또한 전사하자 고간은 달아났으며, 포위된 호주천은 항복했다. 고간과 곽원을 통한 원상의 반격은 실패로 끝났으나 본대 싸움에서 조조를 격퇴하는 데 성공하면서 간신히 위기를 넘긴다.
이후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조조가 재차 북상해 오자 원상은 심배에게 업을 지키게 하는 한편 자신은 원담과 대결했고 견초를 병주로 파견해 고간이 업을 지원하는 것을 감독하게 했다. 당시 고간은 무장병 5만을 거느린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으나[8] 심배가 업성에서 포위당해 고전하는 것을 뻔히 파악하면서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등 상황을 관망하는 태도로 일관했으며, 보다못한 원상이 회군해 업을 구원하다가 패하고 중산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자 아예 구원군을 보내 원상을 돕자고 건의하는 견초를 내쫓아 버리는 등[9] 원상의 뒤통수를 제대로 쳤고 조조가 업을 함락시키자 그대로 조조에게 항복해 버린다.
이미 원가분열이 많이 진행된 상황이었기에 고간이 처음부터 원씨를 이용할 생각이었다기 보단, 원담과 원상의 진흙탕 싸움을 보고 '원씨들이 저리 내분을 일으킨다면 원소의 친족인 나도 할 수 있다.' 라고 회의감과 야망을 품었을 가능성도 있다.
2.3. 조조에 대한 반란과 최후
막 업성을 접수했던 조조는 고간을 병주자사로 임명하는 등 그의 세력권을 여전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고간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조조가 오환으로 달아난 원상을 치기 위해 북방 원정을 계획하자 고간은 조조의 부재를 틈타 업을 기습 공격하려 했으나 거사를 벌이기 직전 순연의 활약으로 계획이 발각되어 내응자가 모조리 주살되자, 상당태수를 인질로 붙잡고[10] 호관을 봉쇄해 기주 방면에서의 접근을 차단한 뒤 사예주를 공격하면서 조조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사예주에서는 홍농, 하동, 하내의 3군이 호응하는 등 업성의 장악까지는 실패했으나 고간의 반란은 매우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었고, 조조에게도 상당한 위기였다. 조조는 우선 이전과 악진을 보내 호관을 공격하게 했고 사예주에서는 사예교위 종요가 반격에 나섰으나, 이전과 악진은 호관 공략에 실패했고 사예 3군은 고간의 후원을 받는 세력들이 군을 장악하게 되는 등 상황은 조조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이에 조조가 직접 호관의 공략에 나섰으며, 사예지역의 반란에는 순욱과 하후돈이 허도의 중앙군을 이끌고 종요와 합류했는데, 전황이 고착화될 것을 우려한[11] 순욱은 두기를 하동으로 파견해 하동의 탈환을 지시했다. 이것이 순욱의 신의 한 수로 여기서 두기는 맹활약을 펼쳤는데, 두기는 하동군을 중심으로 고간의 반란에 합류하긴 했으나 태도를 확실히 결정짓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을 교묘하게 모아 세력화하고 고간에게 반기를 들고 조조 측으로 돌아서도록 유도해 고간 진영을 내부에서 뒤흔들었다.
고간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하동으로 향해 자신의 지지세력들을 지원했으나 조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종요의 사예군과 하후돈의 중앙군의 개입을 허용했고, 여양전투 이후 조조의 편을 들고 있던 마등 또한 조조 측에 가세했다. 크게 패한 고간은 사예의 3군을 모두 잃었고, 조조의 본대도 호관에서 거세게 공략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일순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삼면에서 공격받는 상황이 된 고간은 크게 불리해진다.
고간이 실질적으로 잃을 것은 호관뿐이기 때문에 병주 내에서 고간의 세력 자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봐야겠지만 사예 장악에 실패하여 조조를 위협할 패가 사라진 것은 물론, 서쪽으론 마등, 남쪽으론 순욱, 동쪽으론 조조에게 공격을 받는 상황이었고, 흉노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도 실패한 시점에선 사실상 필패나 다름없었다. 도망가지 않았다면 조금 더 버틸 수는 있었겠지만 단지 그뿐, 휘하 세력들의 이탈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높은 확률로 조조나 부하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호관으로 돌아간 고간은 부장들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흉노에게로 가서 원군을 요청했으나 당시 흉노의 좌현왕이었던 유표에게 거절당했으며, 호관도 함락되자 심복 몇 명 만을 데리고 형주로 달아나 형주목 유표에게 망명하려 했다.[12]
그러나 형주로 가던 중 상락현 일대에서 일개 도위였던 왕염에게 붙잡혀 끔살당했다. 고간의 머리는 조조에게 보내졌고 왕염은 이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 왕염이 고간을 잡아 열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왕염의 처는 통곡했는데, 열후가 되어 부귀하게 되면 왕염이 첩을 들여 자신을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라 한다.
3. 삼국지연의
원상의 명령으로 호관을 지켜 나름대로 조조의 공격을 잘 막아내지만, 여광, 여상 형제의 거짓투항을 믿고 호관을 비운 채 조조에게 유인당해 참패하고 호관도 잃은 채 달아나다가 죽는다. 지극히 평범한 원씨의 부하4. 평가
4.1. 조조에게 위기를 겪게 한 인물
원소 사후 조조의 하북 평정 과정에서 원소의 아들들이 조조에게 위기를 겪게 한 준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대부분 국지적인 것에 그쳤을 뿐, 대체로 전략적인 차원의 견제 시도는 무산되고 조조에게 휘둘리며 수동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던 쪽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일시적이나마 유효타를 성공시키고, 세력균형과 판도를 완전히 뒤엎을 뻔 했던 고간의 임팩트는 크다.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원씨 세력 내부의 입지상 고간은 원소의 조카이며 기주 입성 당시부터 주요 공신으로 활약했던 만큼 고간의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어 업성 전복에 성공하고 사예를 장악하는 형세가 되었다면[13], 원소가 남긴 유산들을 날로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간 자신이 원담, 원상처럼 원소의 직계 가족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원소의 일족으로서 유표 휘하의 채모처럼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14] 조조 자신은 북방의 원상과 인접해 있으며 막 점령해 민심이 적대적이었던 기주 북부/유주 일대에 고립되어 고간의 추격을 받는 형세가 되고, 고간의 사예주 장악으로 고간과 유표 사이의 연대가 원활해져 중원까지 압박받게 되는 등 조조 세력에게도 최악의 구도가 된다. 조조는 그동안 원상, 원담과 몇 년 동안 싸워가며 고생 끝에 먹었던 걸 도로 다 뱉어내야 함은 최소한이고 그 자신의 생명도 위태로운 지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업성 전복이 아니라 최소한 호관 봉쇄와 사예 장악까지만 성공했더라도 조조에겐 치명타였다.
조조는 고간을 정벌하기 위해 태행산맥의 고개를 넘으며 고한행(苦寒行) 이라는 시를 남겼으며, 눈이 내리는 험난한 고개를 넘은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있다.
고한행(苦寒行) 北上太行山(북상태항산): 북으로 태항산에 오르니 艱哉何巍巍(간재하외외): 험하도다!. 어찌 이리도 드높은가?. 羊腸阪詰屈(양장판힐굴): 비탈길은 구비구비 굽어 車輪爲之摧(차륜위지최): 수레바퀴가 부서진다. 樹木何蕭瑟(수목하소슬): 나뭇가지 스산하게 흔드는 北風聲正悲(북풍성정비): 북풍 소리가 구슬프다. 熊羆對我蹲(웅비대아준): 큰 곰은 나를 향해 웅크리고 虎豹夾路啼(호표협로제): 호랑이 표범은 길에서 으르렁거린다. 溪谷少人民(계곡소인민): 골짜기에는 사는 사람 없고 雪落何霏霏(설락하비비): 눈은 펄펄 휘날리네. 延頸長嘆息(연경장탄식): 목을 늘여 탄식함이여!. 遠行多所懷(원행다소회): 길이 머니 생각도 많구나. 我心何怫郁(아심하불욱): 내 마음 어찌 이리 무겁고 울적한가?. 思欲一東歸(사욕일동귀): 마음은 오로지 동(東)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네. 水深橋梁絕(수심교량절): 물은 깊은데 다리는 끊어져 中路正徘徊(중로정배회): 길 가운데서 헤메인다. 迷惑失舊路(미혹실구로): 지나온 길 잃어버려 찾을 수 없고 薄暮無宿棲(박모무숙서): 날은 저무는데 쉴 곳이 없구나. 行行日已遠(행행일이원): 가고 또 가길 이미 여러 날 人馬同時飢(인마동시기): 사람과 말이 함께 굶주리네. 擔囊行取薪(담낭행취신): 망태를 매고 다니며 땔나무를 줍고 斧冰持作糜(부빙지작미): 도끼로 얼음을 깨어 죽을 쑨다. 悲彼東山詩(비피동산시): 슬프다 저 동산(東山)의 노래, 悠悠令我哀(유유령아애): 아득히 나를 슬픔에 젖게 하네. |
4.2. 기회주의자
하지만 일반적으로 원소 사후 조조의 하북 평정 과정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주제고, 고간의 세력이나 위세 자체는 대단했지만 결국 통수 2번 치고도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해 큰 틀에서 봤을 때는 "배신으로 패권을 노렸지만 역부족에 그친 기회주의자"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원소 사후 조조의 하북 평정 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맹달의 선배격 정도로 취급하는 정도인데, 어느 정도는 상황에 쫓긴 끝에 위기감 속에서 먼저 선수를 친 감이 있는 맹달의 배신과 달리 고간은 딱히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원상과 조조의 대립을 틈타 어부지리로 둘 다 박살내고 혼자서 다 날로 먹겠다는 심보였기에 맹달 이상으로 악질적이다. 좋게 보자면 원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패권 장악에 도전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4.3. 능력자
기회주의적인 행보와 별개로 능력 자체는 확실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사승은 고간이 문무 양면에 탁월하고 재능과 야망이 원대했다고 평가하고 있고, 범엽의 《후한서》 〈중장통전〉에 의하면 고간은 명성을 중시하며 병주를 다스리면서 유랑민을 받아들이고 선비들을 공경해 사대부들로부터 평판이 높았는데, 중장통이 고간을 만나보곤 "영웅다운 포부는 있으나, 영웅에 걸맞은 재주는 없으며 선비를 경애하나 사람을 잘 가리지 못한다." 고 평가하며 고간에게 이를 염려해 삼갈 것을 권했으나 고간은 스스로의 재주에 도취되어 이를 듣지 않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다고 한다.[15]범엽의 기록은 고간이 얕은 재주로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다 망할 것을 예견한 중장통의 선견지명을 돋보이게 하는 서술이지만, 당시 군벌 시대를 거치며 전국이 막장이 되어있던 상황에서 유랑민을 다수 받아들일 여건이 됐다는 것은 그만큼 고간의 통치기반이 튼튼했다는 얘기다. 유표, 장로 등과 마찬가지로 인접한 장안 일대에서 삼보의 난으로 대거 양산된 유랑민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고간이 다스리던 병주의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했던 흑산의 맹주 장연의 본거지였고 흉노족도 병주 일대에 살며 흑산적과 연합하고 있었다. 공손찬 역시 이 지역에 자사를 파견해 일부를 다스리는 등 여러 세력권이 겹치고 있었으나, 고간은 유랑민을 흡수하며 내치를 안정화시켰으며 그 사이 흑산적은 패하여 무리가 뿔뿔히 흩어졌고, 공손찬 세력 또한 망했으며 흉노는 원소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등 병주는 완전히 원소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고 원소 사후에도 정예병력만 5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정도로 병주 자체의 실력도 강성했다.
종합하자면 일개 주 자사이자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유력자로서는 충분히 유능하다고 볼 수 있으나, 원소나 조조처럼 거대한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패업을 노릴 정도의 영웅엔 못 미쳤다고 볼 수 있다.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고간(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고간은 고유의 사촌 형 또는 7촌 족숙으로 기록되는데, 고유가 174년생이므로 적어도 174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며, 191년에 한복을 협박하는 사자로 등장하는 활동 기록을 감안해도 그렇다.[2] 220년에 경조군으로 변경된다[3] 여러 말이 있지만 원소는 노비첩의 자식인 얼자인 데다 요절한 백부 원성의 뒤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고간의 어머니는 원성의 친딸이며 원소와는 사촌관계이자 호적상의 남매관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때문에 원소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4] 《위서》 <고유전>에 의하면 고유는 고간의 사촌 동생이다. 이 때문에 연좌제로 처형되어야 했지만 고유는 점령지를 위무하기 위한 조조의 정책의 일환으로 목숨을 건진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고유 역시 본디는 원소의 수하였다.[5] 194년의 대대적인 토벌 이후 원소가 병주에서 직접 움직이지 않고 물러난 이후부터는 실제적으로 고간의 활약이 주요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열전이 유실되어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6] 고간의 출신지와 자. 조상의 이력과 고간 본인의 대략적인 사람됨과 성격을 소개하는 전형적인 열전 도입부 형식이다. 이후 시간 진행에 따른 고간의 구체적인 행적이 밝혀져야 하는데 배송지는 사족이라 여겼는지 도입부만 인용했고, 원본은 유실됐다.[7] 이르면 194년 이후, 늦어도 199년 이전의 일이다.[8] 견초전에서 확인했다.[9] 원래는 죽이려고 했지만 견초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도망갔다.[10] 조조가 파견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1] 원소 세력을 평정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치가 길어지면 호응세력이 추가될 가능성이 있으며 반란 세력들도 처벌을 두려워해 더욱 적극적으로 조조에게 대항할 수 있다.[12] 고간은 원소의 노선을 이어받아 유표와는 우호적인 관계였고 고간이 후원하던 사예 반란군들 또한 유표와 별도로 연계하고 있었다. 유표에게 망명하려 했던 것은 이런 연고에서 비롯됐다.[13] 비록 고간이 원상, 조조를 차례로 배신하며 신의가 없음을 인증했지만[14] 실제로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한 이후에 원담, 원희, 원상과 나란히 언급되며 엄청난 군세를 가지고 원소를 도우러 합류한다. 실질적으로 원소의 아들들에 뒤쳐지는 권력이 아니었던 것이다.[15] 영웅의 재주가 없다는 게 꼭 능력이 형편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지만 초일류급은 아니다라고 보는 게 올바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