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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02:32:33

채모


蔡瑁
채모
작위 한양정후(漢陽亭侯)
최종직위 장수교위(長水校尉)
성씨(蔡)
(瑁))
덕규(德珪)
아버지 채풍(蔡諷)
생몰연도 ? ~ ?
고향 형주(荊州) 양양군(襄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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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유표)
강하태수(江夏太守)→남군태수(南郡太守)→장릉태수(章陵太守)→진남장군군사(鎭南將軍 軍師)[1]
조조 진남장군군사(鎭南將軍 軍師)[2]→종사중랑(從事中郞)→사마(司馬)→장수교위(長水校尉) }}}}}}}}}

1. 개요2. 가족 관계3. 정사4. 연의5. 평가6. 기타 창작물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유표 휘하의 호족이자 무장. 형주 양양군 사람으로 는 덕규(德珪).

조조와 절친한 관계이다.

2. 가족 관계

양양기구기에 따르면 채모는 형주의 유력 호족 채풍(蔡諷)의 아들로 인맥이 어마어마했다. 채풍의 누나[3]는 후한의 태위 장온의 아내, 채풍의 장녀[4]황승언[5]의 아내, 채풍의 차녀[6]유표의 후처인 채부인이었다. 또한 채모와 채부인의 질녀는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시집을 갔다.

채씨 집안은 매우 번성하였다. 채찬은 언국(鄢國)의 상(相)이 되었고 채염(蔡琰)은 파서태수(巴西太守)가 되었는데 이 둘은 채모와 할아버지가 같았다.

채모의 집은 채주(蔡洲)[7] 위에 있었는데 집이 매우 좋았고 네 담장에는 모두 푸른 돌로 각우(角隅)를 지었으며 비첩(婢妾)이 수백 명이었고 별장이 4~50곳에 있었다고 한다.

훗날 채씨 집안의 자손들은 더욱 부유하고 종족들은 매우 강성하여 채주(蔡洲)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영가의 난 때 유민 반란군을 이끌던 왕여가 채주로 쳐들어왔다. 이 때 일족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고 이로써 가문이 멸족당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습착치가 양양기구기를 쓴 당시에까지 채(蔡)씨 성을 회복한 이가 없었다고 한다.

3. 정사

성품이 호방하고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자긍(自矜)하였는데 일찍이 동향 사람인 괴월과 함께 군사로서 형주 자사인 유표를 섬겼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권60에 따르면 괴월과 함께 유표의 모주(謀主)가 되었는데 응변(應變)하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채모는 유표 때에 강하, 남군, 장릉태수로 있었다. 또한 조조와도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실제로 유표가 형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채모의 공적이라고 한다.[8] 이런 탓에 형주 자사는 유표였지만 형주의 실권은 채모를 비롯한 호족들이 쥐고 있었다는 시각이 많다. 단, 유표가 살아 있을 적에는 유표도 허수아비 수준으로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분명히 아니었던 만큼 형주에서 유표의 통치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단지 유표의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기에 호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조조를 치지 못했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정사 삼국지 촉서 선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진세어에 따르면 괴월과 채모가 유비의 목숨을 노렸다. 눈치챈 유비가 화장실에 간다며 연회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유비는 적로를 타고 달아나다 물에 빠졌는데 적로를 날게 하여 무사히 도망쳤다. 연의에도 나오는 에피소드지만 정작 이 내용을 적은 손성은 영 이상하다면서 미심쩍어 했다.

조비의 전론에 따르면 유표는 처음에 맏아들 유기를 아끼기를 제 몸처럼 하였는데 오랜 후에 어린 아들 유종에게 후처 채씨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하니 마침내 유종을 아끼고 유기를 미워하게 되었다. 채모와 외조카 장윤 등은 아울러 유표에게 총애를 받았고 또한 유종과 화목하였다. 이들은 유종이 잘한 것이 있으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소문냈고 잘못이 있으면 비록 크더라도 반드시 덮어주었다. 채부인이 안에서 유종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장윤과 채모가 밖에서 유종의 덕을 칭송하니 아끼고 미워하는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유기와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에 유기는 성을 나와 강하태수(江夏太守)가 되었고 밖에서 군사에 관한 일을 감독하였다. 채모와 장윤은 은밀히 유기가 잘못하는 것을 엿보고는 헐뜯었다. 이리하여 유기가 잘한 것은 매우 크다 해도 가려지지 않는 것이 없었고 잘못은 사소한 것이라도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유표는 화를 내는 일이 날로 늘어났고 유기를 책망하는 글이 날마다 날아들었다고 한다. 결국 유표는 유종을 정식 후계자로 삼았다. 이후 유기가 중병에 걸린 유표를 문병가지만 채모와 장윤은 그가 유표를 뵙게 되면 부자간에 서로 감동하여 다시 뒷일을 맡길 생각이 들까 두려워 하면서 유기에게 일러 말하기를
장군[9]께서 군(君)[10]에게 명하시어 강하를 다스리게 하시고 나라를 위해 동쪽을 지키게 하셨으니 그 책임이 지극히 무겁습니다. 이제 군사들을 버려두고 오신 것을 보시면 반드시 노하실 것입니다. 부친의 즐거운 마음을 상심토록 함은 그 병환이 더 심해지게 하는 것이니 이는 효도가 아닙니다.

유기는 유표를 만나기는 커녕 성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부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임지로 돌아갔다. 선비들과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 아파하였다. 유표가 죽으니 유종은 마침내 형주목이 되었고 성무후(成武侯)의 인수(印綬)를 유기에게 주었다. 유기는 노하여 이를 땅에 던지고는 분상한다 속이고 채모와 장윤을 토벌할 뜻을 두었으나 조조의 침공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강남으로 갔다. 조조가 침략하자 유종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고 채모는 조조의 밑으로 갔다. 조조는 채모와 친했었기에 그의 집에 방문했다. 채모의 침실로 곧장 들어가서 그의 처자(妻子)를 불러 만나고는 채모에게 말하기를
덕규, 예전에 함께 양맹성(梁孟星)[11]을 보러 갔는데, 맹성이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던 때가 기억나지 않는가? 지금 이곳에 있다 들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자네를 보겠다는 것인가.

라고 했다.[12]

조조의 밑에서 채모는 진남대장군군사, 종사중랑과 사마를 거쳐 장수교위를 역임하였으며 이윽고 한양정후에 봉해지는 등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채모가 유종을 돕고 유기를 모함했던 까닭에 이를 책망하며 그를 천시, 경멸하였고 오직 조조만 그를 벗으로서 대하였다.

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반동탁 연맹이 해산되고 손견이 임지로 돌아가던 중에 그를 기습했던 것 때문[13]에 이 후에 손견이 형주를 공격하여 전쟁을 치르게 된다. 손견군이 유표가 있는 양양성까지 밀고 들어오자 괴량은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채모는 "문관들이 전쟁을 어떻게 알겠냐, 겁쟁이 문관들 대신에 내가 직접 나가서 싸우겠소."이라며 나가서 싸운다. 그러나 손견의 부하인 정보의 공격을 당하지 못해서 결국 크게 패해 도망쳐오고, 이에 괴량은 "이래서 제가 반대한건데 채모가 적을 과소평가하고 자기 멋대로 공격을 나서다가 패하고 사기를 떨어트렸으니 본보기로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자신을 공개석상에서 겁쟁이라고 업신여긴 채모에 대한 악감정도 섞였다. 그러나 유표는 채모가 유표의 아내 채부인의 남동생인데다가 모두 농성하자는데 그래도 혼자서 직접 용감하게 직접 야전을 시도한점이 기특해서 승패는 병가지상가 경우를 들면서 채모를 변호했고, 괴량 역시 그 대인관계와 현재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따지지는 못하고 그 정도에서 보복성 면박만 주고 그냥 넘어갔다.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하러 손건을 보냈을 때는 "유비는 여포, 조조, 원소와 따르다가 갈라선 인물이라 믿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사자로 온 손건을 목베어 조조에게 보내면 조조의 환심도 사고 조조가 형주도 공격하지 않을겁니다."라고 악의적으로 유표에게 말하나 손건이 "이 손건은 죽음이 절대 두렵지 않소.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그들과는 생존과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잠시 연합했다 갈라섰던 것이지 배신한게 아니요. 왜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우리 유현덕 주군을 비겁한 소인이라고 모함하시오!?"하고 채모를 꾸짖으며 유표에게는 언성을 높여 대단히 죄송하며 자신의 주군이 의리 없고 기회주의적이기만 한 사람이었으면 자신도 진작에 따르지 않았을 거라며 말을 마친다. 여기에 유표는 어차피 유비와의 악감정도 없는데다가 유비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유표가 "맞다. 여포는 오히려 거둬준 유비를 배신했고 가는곳마다 수시로 배신을 하는 배신자로 악명높은 인간이고 조조는 교활하고 탐욕스럽기로 악명높으며 황제를 인질로 잡은 역적이고 원소도 마찬가지로 야심가인 인물이니 유비가 그들을 떠난건 당연하다. 내가 이미 유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니 너는 더 이상 유비에 대해 아무말도 말라"고 채모를 꾸짖어 물리치고 유비를 받아들인다. 사실 채모는 유표가 죽은 후에 형주를 가로채고 권력을 독점하려고 했었는데, 유표와 같은 한실의 종친인 유비가 방해가 되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나쁘게 거짓말 한 것이다.

유표에게 의지한 유비가 자신의 누이 채부인아들유종보다 장남인 유기를 집안의 평안을 위해 장남을 후계자로 정하시는게 올바르다고 지지하는 생각을 말하자 자기 권력 독점에 방해가 된다고 그를 미워하게 되었고 채모는 누나인 채부인과 공모해 유비를 죽일 계획을 짰다. 그는 유표에게 나아가 풍년이 들었으니 형주의 호족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열자고 했고, 유비에게 관리자 역할을 맡겼다. 이 때 유표가 몸이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두 공자(유기와 유종)가 어려서 손님접대가 어려울 테니 꼭 참석해야 한다고 바람을 넣었고, 유표가 당황하자 "그러면 유현덕이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해서 별 문제 없이 끌어들인다.

채중, 채화, 채훈이라는 종제들이 있는데 이들은 유비 암살 작전에서 양양의 남문, 동문, 북문을 각각 맡는다. 서문은 단계라는 물살이 센 계곡이 있어 배가 없는 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 여겨 군사를 전혀 배치하지 않았다.

이에 유비가 조운을 데리고 도착해 잔치를 주관하자, 괴월의 계책을 듣고 왕위문빙을 시켜 조운을 따로 불러낸 뒤 죽일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이적의 도움으로 유비가 달아나자 그를 쫓아 물가까지 가지만, 유비가 적로 덕분에 그 물가를 뛰어넘자 놓쳤다고 생각하고 포기한다.[14]

얼마 후에 손건이 유비의 편지를 유표에게 전하자 유표에게 끌려가서 "네가 진작부터 유비를 싫어하고 죽이려고 하는걸 알고 있었으나 물증이 없어 보고만 있었다."라며 엄청나게 강력한 꾸중을 들었고, 유표는 채부인에게까지 유비를 죽이기 위해 채모와 결탁한 것을 진작에 다 알고 있으니 채모를 변호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고 당장 물러가라고 질책했다. 채모는 유표의 엄명에 정말로 목이 잘릴 뻔 하지만 손건이 유현덕 공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이지 채모 장군을 죽여달라는 게 아니라고 만류했다. 이에 유표에게 자기와 뜻이 달라서 마음에 안든다고 유비를 죽이려 하면 그때는 유비가 직접 와서 말려도 정말로 죽을 줄 알라고 채부인과 같이 엄중경고를 듣고 목숨만 겨우 건졌다. 이후에 유표가 사망할 때까지 채모는 마음은 있어도 함부로 유비를 죽이는 행동을 취하기 어려웠다. 이후에 유비를 죽이려는 자가 있으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이 채모이기 때문이다.

유표 사후 누이 채부인과 함께 유서를 조작해 유종이 형주의 주인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런데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유종에게 투항하는 것을 권하면서 함께 조조에게 투항한다.

조조에게 항복하는 부분에서 모종강본 기준으로 순유가 "저 놈들은 아첨이나 하는 간사한 무리들인데 왜 그렇게 챙기십니까?"라고 묻자 조조가 "나도 아는데, 우리는 수군이 약해서 그걸 보완하려고 챙기는 거다."라고 자기도 진심이 아님을 드러내기도 한다.

투항한 이후에는 채모가 수상전에 능하다는 점을 높이 사 장윤과 함께 조조군의 수군도독으로 임명된다. 이후 조조가 손오를 공격할 때 주유가 세객으로 온 장간을 이용한 반간계에 조조가 속아 넘어가고, 채모는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가 씌워진 채 조조의 명령으로 장윤과 함께 죽는다.

정사에서는 조조가 직접 찾아갈 정도의 대접을 할 정도인데 반간계로 조조에게 죽임을 당할 리가 없다. 즉 조조가 그를 죽였다는 내용은 연의의 창작이다. 애초에 연의에서 그런 철저한 면모를 보이는 조조가 고작 적의 서찰 하나로 잘만 쓰던 수군제독 둘을 무작정 처형하는 것이 말이 안된다. 어리석음으로 치면 원소 그 이상을 달리는 행위이다. 그냥 유비를 부당하게 괴롭히던 채모가 보기 싫었던 나관중의 처리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사에서는 채모가 조조의 절친인데 연의에서는 이런 것도 없다.

5. 평가

유력 호족인 가문의 후광과 더불어 성품 또한 담대하고 호탕하며 말재주가 뛰어나 형주내 유력 인사들을 잘 포섭했으며 조조가 천하의 대세라는 것을 파악하여 조조에게 형주를 양도하자고 한 판단 자체에는 틀리진 않았으나, 비난받는 이유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부귀영화나 보존하고 싶어 투항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채모는 조조의 친구이다. 한마디로 친구 덕 좀 보려고 조조에게 형주를 바친 것이다. 채모가 유비를 죽이려고 시도한 이유 역시 조조와 친구지간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애초에 채모의 유종 옹립은 핑계일 뿐이고 유표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표가 죽자마자 바로 자기 친구한테 형주를 줘버린 것이다. 다만 채모가 생각한 것과 달리 조조는 형주에 대해 강하게 지키고자 하질 않았다. 실제로 유파가 조조에게 형주 산하 남군을 복속시키라고 명을 받았는데, 유파가 이에 지금 유비의 기세가 등등한데 어찌 자기가 가겠냐고 따지자 이에 조조가 자신이 육군[15]을 이끌고 가겠다고 유파를 안심시켜 유파가 남군 방면으로 향하게 된다. 물론 조조는 끝내 오지 않았다. 핵심 장수인 조인서황 그 외에도 우금진교를 방어를 위해 남겼지만 오가 대대적으로 공세를 취한 만큼 중앙에서 원조해주지 않는다면 조만간 함락되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상황이였다.

조조 입장에서 할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적벽대전에서 대패하면서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형주를 직접 지킬 여력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마냥 형주를 방치한 것이 아니라 조씨 일족 에이스인 조인을 남군에 남기고, 유표 시절부터 형주 지리에 대해 잘 아는 명장인 문빙도 그대로 형주를 지키게 하면서 유비와 손권의 형주 침공에 대비했다. 조인은 1년을 버티며 분전하다가 결국 남군을 포기하고 형주 북부로 도주했지만, 형주 북부는 끝까지 지켜서 삼국지 끝날 때까지 위의 영토로 남았다.

인맥이 상당했는데 어마어마한 혈연 이외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조조, 원소, 허유 등과 전부 친구지간이었다.

6.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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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조 밑에서 진남장군군사를 지냈다고도 한다[2] 유표 밑에서 진남장군군사를 지냈다고도 한다[3] 채모의 고모다.[4] 채모의 큰 누나다.[5] 제갈량의 장인으로 제갈량이 이 인맥을 보고 황승언의 딸인 황부인과 결혼했다고 보기도 한다.[6] 채모의 작은 누나다.[7] 주(洲)는 물 가운데 있는 섬이다.[8] 유표의 군세는 사실 뒷날의 오나라와 마찬가지로 호족들의 사병이었기 때문에, 채모가 이들을 묶어준 덕분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유표가 원씨를 침공하던 조조의 뒤를 치지 못한 이유로 여겨지기도 한다.[9] 진남장군 유표를 말함[10] 유표의 장남 유기[11] 당대 유명한 서예가 양곡을 말한다. 양곡의 자는 맹황(孟皇)인데 오기로 보이며 조조와 예전 악연이 있었고 당시 난을 피해 형주로 내려왔다.[12]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조가 그의 글씨를 아꼈기 때문에 양곡이 예전 일을 사죄하자 군가사마로 임명되어 비서령에서 글씨를 쓰게 되었다. 조조는 양곡의 글씨를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면서 사의관보다 낫다고 여겼다.[13] 동탁 토벌전의 막바지 무렵에 낙양에서 옥새를 찾은 후 손오로 돌아갈 때 원소의 밀서를 받은 유표가 손견을 막은 적이 있었다.[14] 김홍신 평역판에 따르면, 유비가 물가를 뛰어넘자마자 길이 막힌 채모가 유비에게 "진행자 안 하고 어디가요?"라고 애타게 찾는 척을 하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유비가 도망가서 진짜로 쏘지는 못했다. 이후 조운이 달려와서 "우리 주군 어딨소?"하고 따졌지만 "나도 모르오."라며 거짓말을 했다.[15] 六軍, 천자가 이끄는 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