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蜀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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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乾
? ~ 214년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공우(公祐)로 청주 북해국 사람.유비와 함께 하여 촉한의 개국공신 중 한 명으로 외교를 담당했다.
2. 정사 삼국지
유비가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자사가 되었을 때 초빙을 받아 종사(從史)가 되었다. <정현전>에 따르면 동향인 정현이 주에 천거했다고 한다. 이후 쭉 유비를 섬기며 두루 돌아다닌다.유비가 조조를 배신하고 손건을 외교 사자로 보내 원소와 관계를 맺게 하였는데 손건이 이 외교를 성취했다. 또한 유비가 원소에게서 벗어날 때 미축과 함께 유표에게 사자로서 향했고 이 외교 또한 성취했다.
유비가 형주에 이르자 간옹, 미축과 함께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유표는 원상과 원담의 항쟁에 대해서 유비, 손건 등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편지를 원상에게 보냈다. 그만큼 유표는 손건을 중요하게 대우했다.
유비가 입촉하여 익주를 얻어 조조에 대항할 만한 큰 세력이 되었을 때, 손건은 병충장군이 되어 그의 대접은 "미축에 다음 가고 간옹과 동등하였다"고 한다.[1] 그야말로 고생고생하다가 팔자가 조금 펴질 듯 했는데 오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나버렸다. 자손에 대한 기록은 없다.
3. 삼국지연의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원소에게 구원을 청할 때 원소가 자기 동생을 죽게 했다며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나 손건은 당황하지 않고 일단 조조를 비난한 뒤, 이후 그가 갖고 온 정현이 쓴 중매자로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하여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2] 그 이후는 원소의 모사들[3]이 알아서 원소를 설득하게 유도했다.위의 외교 능력에 첩보원 능력까지 추가되었다. 유비가 원소 휘하에 있을 때 관우를 만나러 국경을 몰래 넘어 조조의 영지로 가고, 가는 길에 장비도 발견한다.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 때도 사신으로 보내지는데 채모가 반대하자 "나를 비난하는 것은 용인한다. 그런데 우리 주군은 욕하지 말라. 조조는 좋은 사람인가? 여포가 똑바른 사람이었는가? 어떻게 그 둘과 우리 주군을 같은 비교할 수 있는가?"라며 반문했고, 유표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채모를 꾸짖어 물리친 뒤 곧바로 유비를 받아들였다.
유비의 결혼에서도 조운과 함께 오나라에 보내지기도 하며, 실제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듯하다.
4. 평가
유비 세력이 앞서 조조와 연대해 여포를 잡고 그 다음에는 원술을 잡았으면서도, 곧 이어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해 원소와 동맹하는 외교 행보를 보일 때, 다시 원소를 떠나 혈혈단신으로 유표에게 투항할 때, 대체로 그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손건이 가진 변설이나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은 무척 뛰어났을 것이라 추측된다.유비 세력이 인재 기반이 미비하여 불리한 위치에서 외교에 임했다는 점에서 유비 세력의 외교 성사에 공헌한 점은 높이 평가해 줄 부분이다. 삼국지 무대의 초반부터 유비가 촉을 얻은 때까지는 '상대의 사자는 베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개념도 없었고[4] 길가다가 도적이나 적대 세력과 조우하는 일이 없을 리도 없었다. 때문에 그렇게 이리저리 사자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고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는 증거이다. 거기다 그가 설득한 인물들 주변에는 당대의 일류라는 참모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는 이익으로써 그들을 홀리든가 혹은 그들의 반대 의견을 논파하여 목적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수완가이자 외교 실무자.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처럼 화려한 공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손건이 없었다면 초기에 미미한 세력을 지닌 유비가 생존하기는 힘들었다. 오로지 손건 한 사람의 공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수 있으나, 유비의 세력이 이를 보호해줄 수 있는 세력들에 위탁될 수 있었던 것은 손건의 덕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