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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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 ||<colbgcolor=#fecd21> 최종직위 | 유주자사(幽州刺史) |
성 | 원(袁) |
명 | 희(熙) |
자 | 현혁(顯奕), 혹은 현옹(顯雍) |
아버지 | 원소(袁紹) |
생몰연도 | 177년 이전? ~ 207년 |
고향 |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
사망지 |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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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차남으로 자는 현혁(顯奕), 혹은 현옹(顯雍).[1]2. 생애
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190년 무렵 원소의 '장성한 두 아들'을 언급하는 기록으로 등장한다. 이를 볼때 190년 시점에서는 이미 성인으로 취급받던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2]이를 감안하면 원소가 176년 무렵부터 6년 간의 복상을 했기에, 복상 시작 이전에 원소의 처가 임신 중이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177년보다 늦게 태어났을 가능성은 없다.
나이를 감안했을 때 196년 무렵에 견씨와 혼인한 것으로 보이며[3], 빠르면 같은 해인 196년, 늦어도 199년 무렵에 원소에게 유주자사로 임명되었다.
원소 사후에는 원상을 지지했으며, 원상이 조조에게 패하고 달아나자 고안현에서 이를 맞아들이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부장인 장남, 초촉 등에게 습격을 받아 원상과 함께 오환으로 망명하게 된다.
초촉은 유주자사를 자칭하며 원희가 없는 유주를 장악한 뒤 조조에게 투항하지만, 이후 원상이 사주한 반란에 휘말려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조조가 오환을 공격했을 때 원상과 함께 맞서지만, 오환왕 답돈이 어이없이 죽어버리자, 오환군은 허무하게 궤멸. 원희는 원상을 따라 요동의 공손강에게로 망명한다.
당시 요동의 공손씨 정권은 조정과 거리가 멀리 있는 것을 믿고 조조와 적대하고 있었는데, 조조는 원상을 쫓아 요동까지 가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고, 원소의 후광을 입고 있던 원상의 존재는 공손강 자신에게도 위험했다. "나는 요동의 왕인데 무슨 영녕향후냐!"라며 조조가 보낸 인수를 집어던지고, 조조가 업을 함락시키자 "그냥 내가 조조 밀고 중원 진출해도 괜찮을듯?" 같은 말을 할 정도로 패기만은 항우급이던 아버지 공손도와는 달리 공손강은 대외적으론 장군, 태수라 불리며 요동 안에서 소소하게 왕 노릇하는 것에 만족하는 현실적인 면이 강했다. 또한 중원 진출을 꾀하고 있던 공손도라면 그들의 존재가 어느정도 가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만 중원 진출에 별 관심이 없고 요동땅에서 왕 놀이 하는 것에 만족하던 공손강의 성향상 원씨 형제의 정치적, 전략적 가치는 없다고 봐도 좋았으며, 가치는 고사하고 오히려 내부적으로 위험 요소만 가득했다. 조조는 공손강이 원상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자신이 요동으로 가면 공손강은 원상을 받아들여 함께 대적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원상을 죽여 그 머리를 바쳐 올 것이라고 판단하며 군사를 물렸고, 과연 공손강은 원상을 죽여 그 머리를 바쳐 왔다. 이때 원상을 따랐던 원희와 삼군오환의 선우들도 같이 죽어서 원상과 나란히 머리가 조조에게 보내졌다.
한편 원상은 요동에 도착하기 이전부터 원희에게, 요동에 도착하면 공손강과는 반드시 접견하는 자리가 있을 것인데, 거기서 그대로 공손강을 죽인 뒤 요동을 장악해 기반으로 삼을 계책을 설명했으나 원희는 이에 부정적이었는지 접견장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주저했고 원상은 원희를 강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공손강은 원상 일행이 자리에 들어와 앉기도 전에 복병을 불러들였고, 이때 원씨 형제는 죽지는 않았지만 생포되었다.
이렇게 보면 원희가 평소처럼 지레 겁을 먹고 트롤링을 한 것 같지만, 그건 아니고 사실 원희의 주저에도 나름의 일리는 있었다.어찌저찌 공손강 개인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한들, 원상 형제는 기병 수천 기가 가진 전력의 전부였고, 그마저도 삼군오환의 선우들과 제각기 지분을 공유하던 상황이었으니 공손씨 정권을 적으로 돌리며 군세가 수만에 이르는 공손강의 잔당들을 합병하는 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물론 원상도 생각없이 이런 짓을 계획한 건 당연히 아니고 원상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었는데,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원상은 원소의 후계자로서 당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국적인 유명인이었고, 이미 본인들은 하북에서의 기반은 물론 앙숙이었던 원담과 원소의 사위였던 답돈과 심배까지 싸그리 죽어서 계속 도망을 치고 있던 상황이라 동오나 익주로 망명을 가네 같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면 어차피 별다른 선택지도 없었고, 만약 먼저 선수를 쳐서 공손강을 죽인 뒤 치소를 장악하고 요동 지배를 선포한다면 공손씨의 철권 통치에 눌려 있던 호족들 중 일부의 협조를 기대할 수는 있었을 것이며, 이 시점까지도 원상을 따랐던 군사들이 문자 그대로 원씨에 모든 명운을 걸었을 정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숫적 열세를 감안하더라도 지휘부가 몰살된 채 분열된 공손씨 잔당들과의 군사적 승부에서 우위를 기대할 수 있었으므로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긴 했다.물론 공손강은 애초부터 원상 형제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고, 원씨 형제에게 정면대결은 전혀 승산이 없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먼저 선수를 쳐야 된다는 원상의 판단이 맞았음이 드러났다. 당연히 공손강도 원상과 마찬가지로 첫 회견 자리에서 원씨 형제를 그대로 죽일 계획을 세우고 먼저 실행에 옮겼다.
당시 날씨가 무척 추웠는데, 원상이 공손강에게 심문받으면서, "죽지 않는 동안의 추위를 참기 어려우니 자리를 마련해줌이 옳다." 고 말하자 이에 공손강은 "경의 머리가 만리 길을 떠날 텐데 무슨 자리가 필요하겠는가." 라고 화내며 원상을 죽였다.
《후한서》에 기록된 원씨 형제의 최후는 이렇지만,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된 《전략》에서는 "머리가 만리길 여행.." 운운한 것이 공손강이 아닌 원희의 말로 되어 있다. 원상이 자리를 구했다고만 서술될 뿐 정확히 어떻게 말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원상이 곧 죽는다는 상황 자체를 인지하지 못해서 이렇게 나무랐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후한서에서 묘사된 원상의 발언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곤 공손강을 비웃으며 최후의 허세를 부리는 장면이라 후한서의 묘사와 이어서 보면 원희는 원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이제 곧 죽을 텐데 뭔솔?" 하는 고문관포스 쩌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정황상 사실은 아닐 것으로 보는 분위기이다.
유주에 부임할 당시 아내는 업에 그대로 남겨두어 시부모를 모셨다. 원희의 아내는 조조의 군대가 업을 함락했을 때 조비가 가로채 자신의 아내로 삼았고 후에 문소황후 견씨가 된다. 한마디로 네토라레를 당한 셈이다.
3. 평가
원소의 차남으로써 나름대로 유주에 세력을 가졌던 것 치곤 안쓰러울 정도로 원소의 아들들 중 가장 기록이 적고, 실제적인 비중도, 능력도 없다. 원상, 원담은 물론 원소의 조카인 고간에게도 확연히 밀릴 정도. 서술상으로도 밀리는데, 형제의 이름이 나란히 병기될 경우 웬만하면 형-동생 순으로 써주는 게 보통인데 원희와 원상이 같이 언급될 경우 원상, 원희 순으로 병기된다. '원소의 후계자가 원상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것이, 원상이 원담과 같이 언급될 경우 나이순에 따라 원담, 원상으로 병기되기 때문.유일하게 원희, 원상 순으로 원희가 앞에 표기된 것은 초촉이 배신해서 원희를 쫓아내는 기록에 한정되는데, 이는 초촉이 비록 원상 세력에 속했으나 직접적으론 원희의 부장이었던 만큼 주도적인 배신 대상이 원희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형의 위엄을 세웠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사례.
한때는 원희의 개인적인 인물됨이나 유주 통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오환이 원상의 망명을 받아들이며 재기를 후원했음을 들며 현지 책임자였던 원희가 오환족과의 우호관계를 잘 유지했기 때문일 테니 골육상쟁이나 일삼던 원상, 원담과 달리 상당히 뛰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능력적으로 상당히 비판받는 추세인데, 원희를 비판하는 주장에 따르면 공손찬 멸망 이전까지 원소와 동맹관계였던 선우보는 원소가 유주를 떠난 직후의 시점에서 조조와 연합했고, 원소의 총애가 대단했다는 염유 또한 관도대전 중반 즈음 누가 봐도 원소가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조조에게 투항했다.이게 원소의 문제일 가능성은 당연히 없고, 유주자사였던 원희가 현지 유력자들과의 관계를 개판으로 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업성 공방전 당시에도 기주와 유주의 경계지역인 고안에 주둔하고 있었던 원희는 업성을 심복인 심배에게 맡기고 원담을 치러 떠난 원상을 지원하는 포지션이었는데, 원희는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원상이 회군하는 동안 원담의 세력 회복과 기주 동부 장악을 방치했을 뿐만 아니라, 조조에게 패하고 업을 뺏긴 원상이 원희의 주둔지와 인접해 있던 중산국에 거점을 잡은[4] 시점까지도 전혀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기에 원상이 그나마 수습한 병력까지 원담의 공격을 받아 모두 날려먹게 되었다는 것. 최소한 이렇게까지 말아먹었으면 그나마 유주만큼이라도 제대로 보전했어야 했는데, 그조차도 제대로 못해서 초촉의 반란 한 번에 털리고 쫓겨났으니 무능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분석인데,비슷하게 원상을 방치했던 고간의 경우 애초부터 배신할 작정으로 계산된 움직임이었으나, 원희는 그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구멍 취급을 받고 있다.
애초에 오환을 포섭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다름아닌 아버지 원소였고, 원희가 유주에 부임했을 당시 이미 원소는 답돈을 꾸준히 후원하고 후대하고 있었으며, 원소 덕분에 오환선우로 임명되고,원소의 사위였을 정도로 원씨와 오환의 우호관계는 확고한 상황이었기에 상술된 모든 분야에서 실패하면서 오환과의 우호관계만 간신히 지켜냈다는 것이 그렇게 그렇게 고평가 될 원인도 못 되며 이 우호관계를 지켜낸 것도 결국 아버지 원소가 공을 들인 것이지 원희가 실질적으로 무언가 한 것은 없기에 사실상 지켜낸 것조차 아니고 아버지가 일구어놓은 관계에 숟가락만 얹은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원소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방탕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최염의 발언이나, 헌제의 칙사로 온 유송이 원소의 비위를 거슬렀다가 조조의 보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원소의 아들들과 밤낮으로 술을 마셔댔다는 데서 하삭음이라는 고사가 유래된 것을 보면 원희 개인적으로는 원담과 마찬가지로 놀기 좋아하고 방탕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소가 원상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 또한 원담과 원희가 이렇게 칠칠맞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원소의 '아들들'이 방종했다고 하지만 원상은 원담, 원희와 나이차가 크기 때문에 비슷한 선에서 비교되기 어렵고, 심배의 발언이긴 하지만 원상은 매사에 청렴하고 솔선수범하는 성품을 칭찬받고 있으며, 딱 주색잡기에 눈뜰 나이쯤 원소가 급사하고 후계자가 되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친정을 뛰는 등 격무에 시달렸기 때문에 사치방종할 정도로 노는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
비록 원담은 원소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삽질을 거듭했고 청주 자체도 방만하게 통치하면서 비판받았지만, 몇개 현만 간신히 장악하던 상태에서 눈부신 군공을 세우며 청주 전역을 재패한 것은 원담이 독자적으로 세운 공적이었고, 원상은 어린 나이에 권력 기반이 전무했고 원소의 급사로 내외적 상황이 개판이었다는 핸디캡 등으로 무너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전략적인 판단력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그 움직임 또한 나이를 감안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담하고 적극적이었다.[5] 이에 반해 원희는 원소가 직접 유주 평정을 완수한 후 근거지로 돌아가면서 남겨진 낙하산에 가깝고, 이후 행보도 딱히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앞뒤 정황근거상 유주를 개판으로 다스렸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기에 원소의 아들들 중 가장 무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소에게서 전혀 후계자로 기대되지 않았고, 원소가 죽었을 때도 원담이나 원상과 달리 전혀 파벌을 이루지 못했던 것도 무능함이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공공연히 원상에게 불복하며 끝없이 내분을 일으켜 원가 멸망의 원인중 하나가 된 원담이나, 일단 원상을 지지하면서도 속으론 딴생각만 하고 있던 고간그리고 원소 사후 배신을 때리며 원상의 통수를 친 이들과는 달리 마지막까지 순순히 원상을 따르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던 점에서 능력과는 별개로 인성은 그나마 나았던 듯 보이기도 한다만 형제끼리 치열하게 다투며 내분이 벌어질 때도 별다른 중재도 못하고 가만 있었던 걸 보면[6] 그 이상의 고평가는 힘들 듯 하고 잘 쳐줘봤자 본인을 따르는 지지 세력도 없고 원상의 지배권과 정통성이 확고하니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거기에 순응한 것에 가깝다.
4. 고자설
동양대 교수인 김운회는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는데, 김운회가 워낙 백지원과 더불어 사이비 서적들을 내는 사이비 저술가로 악명이 높아서 당연하겠지만 이 역시 두고두고 까이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조예 문서로. 삼갤 등에서는 그에 대한 반론격인 개그 병맛 이론으로 사실 원희가 고자였을 것이란 주장도 나왔다.원희가 고자였을 것이라 추측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원소는 어린 아들 원상을 후계자로 하기 위해 미리 원담을 장자에서 폐출시키며 배제했다. 하지만 원소가 원희를 폐출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만약 원희가 고자였다면 대를 이을 수 없다. 당연히 후계자로서도 실격이므로 구태여 번거롭게 폐출시킬 필요도 없다.
- 실제로 (심배의 발언에 의하면) 원상은 형인 원희가 눈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원소의 직계로 족보에 그 이름에 적혔다.
- 원소의 정통 후계자로써 지지세력과 파벌을 형성한 원상은 말할 것도 없고,심지어 폐출된 자식인 원담도 곽도, 신평과 연계해 파벌을 형성하며 원상의 승계에 불복했지만 원희는 가신들 사이에 아무런 파벌도 없었다. 원희가 배제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데, 이는 자신의 기량 부족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고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 당시에는 사회적 편견도 있고 해서 고자라면 아무래도 엄청나게 치명적이었다.
- 원희는 절세의 미인이어서 조조와 조비가 동시에 탐을 냈다는 견씨를 처를 뒀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견씨 쪽은 문제가 없는 게 확실한데, 조비 소생의 딸인 동향공주를 낳았고 일단 조예가 견씨의 아들인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자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원희는 고자였으므로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실제로 원희는 유주자사가 되자 아내를 떼어두고 유주로 떠났다. 가끔 인사차 업에 방문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최소 5년 이상 홀아비 생활을 자처한 것이다. 대를 이을 수 없는 고자인 원희로서는 임지에 부인이 있어 봤자 방해만 되었을 것이다.
- 조비는 남의 부인이었던 견씨를 맞아들였다. 그것도 첩도 아닌 '정실'로 맞았다. 사실 원희가 고자였다면 견씨는 사실상 처녀이므로 정실로 삼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자설에 따르면 이뿐만 아니라 약 1년만에 곧바로 조예가 태어난 것은 어찌 보면 원가에 대한 엄청난 도발일지도 모른다.
이라고 해서 한동안 삼국지덕후들 사이에서는 뭔가 병신같지만 굉장히 그럴 듯한 떡밥으로 여겨졌었으나 한 삼갤러가 신당서 재상세계표에서 원희의 후손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찾아냄으로서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신당서 재상세계표에 따르면 원소의 중간아들은 원희인데 그의 후손들은 낙릉 동광에서 살았다. 원희의 후손으로 원령희(袁令喜)이다. 그 아들들로 원이홍(袁異弘), 원이도(袁異度), 원이식(袁異式) 형제가 기록되어 있고 형제들의 자손인 원이식의 자손 원척(倜), 원사검(師儉)부자도 기록되어 있으며 원이홍(袁異弘)의 아들 원서기(袁恕己)는 신룡정변의 공신 중 한 명이다. 원령희가 문소황후가 낳은 자식의 후손이었는지는 불명이지만 본처 외 첩을 두는 게 당연한 시대였던만큼 원희에게 첩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고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뭔가 후사를 잇기에 명백한 결함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말은 종종 나온다. 원상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원소가 생전 폐출시켰던 원담도 지지를 받았던 마당에, 아무리 무능했다고 해도 한참 어렸던 원상과 비교하자면 압도적인 경력과 기반을 가진 데다, 원담 폐출 이후 호적상으로는 원소의 장남이었음에도 이 정도 취급이었다는 건...사실 이러쿵 저러쿵 깊게 생각할 거 없이 그냥 원희의 능력이 폐급이었다고 보면 모든 게 설명된다. 실제 행적을 봐도 원상을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하고 기껏 아버지가 쌓아놓은 이민족과 관계도 제대로 이용 못하고, 부하에게 배신이나 당하면서 근거지를 잃고 쫓겨나는 신세였다. 형 원담은 장수로서는 사실상 청주를 점령해 갖다 바친 수준의 공을 갖고 있으니, 아무리 원소 눈 밖에 났다고 해도 후계 구도에서 절대 무시 못 할 존재고. 청주건을 제외하고 봐도 군재는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원상보다 나은 게 나이 하나밖에 없는 원희에게 누가 줄을 대겠으며, 당연히 원소 입장에서도 장남으로 대우할 이유도, 후계자로 고려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견씨를 조비가 정실로 맞이한 것도 이상할 게 없는 게, 촉한의 초대 황제인 유비 역시 정실인 목황후 오씨가 과부였다. 당시는 재혼한 여성이란 게 그리 결정적인 결함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유비가 오씨와 결혼을 고민한 이유는 그녀와 사별한 남편이 자신과 동족이어서고, 조운이 조범의 형수 번씨를 처로 맞지 않은 것도 조범이(당연히 조범의 형도) 자신과 같은 성이기 때문이었지, 과부여서가 아니었다. 사실상 처녀 운운은 드립에 불과하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위의 2대 황제(실질적으로는 3대 황제) 조예가 실은 조비의 자식이 아닌 원희의 자식이라는 떡밥이 꾸준히 돌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5년이나 별거했으니 더더욱.
여담이지만 구글에서 원희를 검색하면 뜬금없이 대표 이미지로 왕원희의 삼국지 12, 13 일러스트가 뜬다.[8] 이걸 보고 사실 원희는 남장한 딸이어서 아이가 없었다는 드립을 치는 삼덕들도 있다.[9]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원희(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6. 관련 항목
[1] 원상의 형의 아들 또는 원상의 동생인 원매의 자라고 추측되기도 하는데, 왕찬이 원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귀한 동생 현옹이라 보냈기에 혜동은 원매의 자라 추측했지만 반미는 희(熙)와 옹(雍) 글자의 의미가 누그러뜨린다는 뜻으로 같기에 원희의 자라 했지만 혁(奕)과 옹(雍) 글자의 의미가 광대하는 뜻으로 같고 두 설 모두 확신할 수 없다.[2] 다만 후한 시대에는 늦어도 보통 15세 무렵이면 성인 취급받을 정도로 관례가 앞당겨져 있었고, 불과 13세에 요절한 조충도 자를 가진 어엿한 성인이었다.[3] 196년 당시 원희가 20세, 견씨는 15세이니 시기상으로는 이 무렵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4] 중산국은 유주에서의 접근은 수월하지만 업의 조조나 평원의 원담이 진입하기에는 지리가 험하다. 기본적인 전략은 중산국의 산세에 의지해 조조와 원담을 막아내며 시간을 벌고, 인접한 원희의 지원을 통해 반격을 준비하는 구도로 볼 수 있다.[5] 자신이 직접 조조 본대와 대치하며 적의 주력을 묶어두는 사이 곽원에게 주력군을 맡겨 사예를 공략한다던가, 업성 공방전 당시의 대치 구도, 오환 망명 시절의 변경 교란 움직임과 적극적인 반란 사주 등. 요동에 도착하면 공손강부터 잡아야 된다는 판단도 결과적으로 당한 것은 자신이 되었지만 정세 자체는 제대로 읽고 있었다. 전략안은 나름대로 있었고 능력도 있어서 조조를 위기로 몰고 가기도 했지만 의도치 않게 원상 본인만 열심히 구르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6] 그나마 중재 비슷한걸 시도한건 편지를 보내 화해할것을 종용한 유표나 심배 정도였고 그외에 왕수가 간신들을 죽이고 형제끼리 화해하라고 권한 정도고 이 과정에서 원희가 한건 아무것도 없다.[7] 창천항로에서 조비가 견씨를 보쌈한 뒤에 조조가 수고했다고 격려하면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조비를 쏘아보는 장면도 있다.[8] 왕원희를 검색하면 진삼국무쌍 6의 교복 복장이 뜬다.[9] 왕원희는 217년생으로 몰년이 207년인 원희와 세대 차이가 난다. 원희의 이름 한자인 熙는 중국어로 Xi로 발음하며 왕원희의 이름한자인 元姬는 Yuanji로 읽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 단지 한국어 이름 발음 '원희'가 같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