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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1:48:23

곽가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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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嘉
곽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uoJia.jpg
시호 정후(貞侯)
최종직위 사공 군좨주(司空 軍祭酒)
성씨(郭)
(嘉)
봉효(奉孝)
생몰기간 170년 ~ 207년
고향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양책현(陽翟縣)
사망지 유주(幽州)[1]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조조에게 임관2.3. 서주에서2.4. 관도대전2.5. 하북 평정2.6. 죽음2.7. 사후
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연의의 수혜자
3.2.1. 별 볼 일 없는 전공3.2.2. 적벽대전에서 곽가만 있었다면 이겼다?
3.3. 조조군의 첩보공작전문가?
4.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조조 휘하의 책사는 봉효(奉孝). 예주 영천군 양책현 사람.[2][3]

군략 쪽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예측의 적중률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4]

미청년으로 보여지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술과 고기를 좋아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또 실제로는 외모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부자에 따르면 곽가는 어려서부터 원대한 기량이 있었다. 한나라 말 장차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자 약관의 나이 때부터 이름과 행적을 숨기고 은밀히 영걸들과 교제하며 속세와 접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그를 알지 못하고 오직 식견이 높고 사물의 이치에 밝은 이들만이 그를 높게 여겼다. 나이 27세에 사도부(司徒府)에 벽소(관부에서 자체적으로 일할 관원을 충원하는 제도)되었다. [5]

당초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만나보고는 원소의 모신인 신평곽도에게 말했다.
원공(원소)은 사람을 씀의 중요한 점을 알지 못하오. 두서는 많으나 요령은 부족하며 모책을 좋아하나 결단력은 없으니 그와 더불어서 함께 천하의 대난을 구제하고 패왕의 업(業)을 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오!”
그리하여 마침내 그를 떠났다.

2.2. 조조에게 임관

이보다 앞서 영천 사람인 희지재는 계책을 세우는 선비로서 조조가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겼었는데 일찍 죽었다. 조조가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희지재가 죽은 뒤로는 더불어서 함께 일을 헤아리며 의논할 자가 없소. 여남군 영천군에는 빼어난 선비가 많으니 누가 그를 뒤이을 만하오?[6]
순욱이 곽가를 추천하니 그를 불러서 만나 천하의 일을 논하였다. 조조가 말했다.
내가 대업을 이루도록 해 줄 사람은 필히 이 사람이다.
곽가가 밖으로 나온 뒤에 또한 기뻐하며 말했다.
실로 내 주인이시다.
표문을 올려 곽가를 사공 군좨주[7]로 삼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순욱정욱을 천거하고, 정욱이 곽가를 추천하고. 그리고 곽가 자신은 유엽을 추천하는 형태로 조조에게 임관한다. 참고로 정사에서 곽가의 첫 번째 관직이 사공 군좨주인데 조조가 사공이 된 이후에 임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외로 조조군 합류 시기가 늦다.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곽가에게 말했다.
본초(원소)는 기주, 청주, 병주 땅은 넓고 병사는 강한데 여러 차례 오만불손한 짓을 하였소. 내가 그를 치고자 하는데 역량상 대적할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소?
곽가가 대답하였다.
원소에게는 패배할 열 가지 요인이 있고 공에게는 승리할 수 있는 열 가지 요인이 있으니 비록 원소가 병사가 강하나 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곽가가 저 평가를 내리자 그 직후 순욱이 동조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사에서는 순욱이 따로 저중 네개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경이 말한 바와 같은 것들을 내가 무슨 덕으로 감당할 수 있겠소!
곽가가 또 말했다.
원소는 바야흐로 북쪽으로 공손찬을 공격하니 그가 원정하는 것을 틈타 동쪽으로 가서 여포를 취하십시오. 먼저 여포를 취하지 않았는데 원소가 우리를 침범한다면 여포가 그의 외원(外援)이 될 것입니다.
조조가 옳은 말이라고 말했다.

2.3. 서주에서

《위서》에 따르면 유비가 도망오자 그를 예주으로 삼았다. 어떤 이(정욱)가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영웅의 뜻이 있으니 이제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우환이 될 것입니다.
조조가 이에 관하여 곽가에게 묻자 곽가가 말했다.
지금 유비에게 영웅의 명성이 있는데 궁박한 처지가 되어 자신에게 귀부한 이를 해친다면 이로 인해 현명한 이를 해쳤다는 이름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지혜로운 선비들이 장차 스스로 의심을 품어 마음을 바꿔먹고 주인을 택할 것이니 공은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하시겠습니까?
조조가 웃으며 그대의 말이 옳다고 말했다.

이걸 보면 곽가가 유비를 별로 위험하게 여기지 않은 것 같은데, 그와 상반되는 사료도 있다. 부자에 따르면 당초 유비가 항복해왔을 때 조조가 그를 손님을 대하는 예의로 대우하고 예주목으로 임명하였다. 곽가가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웅재가 있고 뭇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장비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그를 위하여 사력을 다합니다. 저 곽가가 보건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며 그가 꾀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의당 일찍이 조치하셔야 합니다.
이때에 조조가 영웅을 불러 모아 품어서 큰 신의를 밝히려 하니 곽가의 모책을 따르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선 상반되는 이 두 사료를 절충해서 유비를 살리라는 진언은 그대로 곽가가 하고 유비를 죽이라는 진언은 순욱이 한 것으로 나온다.

여포를 쳐서 세 번 싸워 모두 격파하니 여포가 물러나서 굳게 지켰다.

순유전에 따르면 조조의 군은 하비까지 이르렀는데 여포가 퇴각하여 굳게 지키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연이어 싸우다 보니 병사들은 피로해져 조조는 돌아가려 했다. 순유와 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데, 지금 세 번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니 그 예기(銳氣)가 쇠퇴하였습니다. 무릇 진궁에겐 지모가 있으나 더디니, 지금 여포의 기세가 다시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의 지략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면 여포군을 가히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기수와 사수를 끌어 성쪽으로 물을 대니, 성에서 물이 넘쳐나 여포를 사로잡았다.

이후 조조는 원소와 일촉즉발의 상황에 있게 되는데 갑자기 원술이 북상하여 청주의 원담과 서주에서 합류하려 하였다.

《부자》에 따르면 때마침 조조가 유비를 시켜 원술을 요격하게 하니 곽가가 정욱과 함께 수레를 타고 가서 조조에게 간했다.
유비를 놓아주면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당시 유비는 이미 떠난 뒤였고 마침내 거병하여 반역하니 조조가 곽가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유비를 신속히 치려 하니, 의논하는 자들은 군이 유비를 치기 위해 출병하면 원소가 그 배후를 습격하여 진격해도 싸울 수 없고 물러서도 근거지를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할까 봐 우려하였다. 조조가 이에 관해 의심하며 곽가에게 물었다. 곽가가 조조에게 권하며 말했다.
원소는 그 성정이 더디고 의심이 많으므로 설령 쳐들어오더라도 필시 빨리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비는 이제 막 거병하여 뭇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그에게 완전히 귀부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급히 공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동쪽으로 유비를 치니 유비는 패하여 원소에게로 달아났으며 원소는 과연 출병하지 않았다.

원소전에 따르면 전풍이 원소에게 조조의 배후를 습격하라고 설득했으나, 원소가 자식의 병 때문에 사양하고 허락지 않으니, 전풍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며 말했다.
무릇 만나기 힘든 기회를 만났는데 어린 자식의 병 때문에 그 기회를 그르치다니, 애석하도다!

2.4. 관도대전

손책이 천리 땅을 전투하여 강동을 모두 차지하고는, 조조가 원소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대치한다는 것을 듣고 장차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서 허도를 습격하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우려하니 곽가가 그를 헤아리며 말했다.
손책이 이제 막 강동을 아우르며 죽인 자들은 모두 영웅호걸들로 능히 남으로 하여금 사력을 다하게 만드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손책은 경박하고 이를 방비하지 않으니 비록 백만의 무리를 거느린다 한들 중원을 홀로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로는 그는 필시 필부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손책이 장강에 임하였다가 미처 장강을 건너기 전에 과연 허공의 식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배송지는 곽가의 예측이 맞은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라고 했다. 손책이 비록 경솔하긴 하였으나 이 경솔함이 실제로 암살까지 연결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선견지명이지만 결국 운좋게 맞아떨어진 것일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조조는 원소와 손책의 협공을 받아 끝장났을 것이다. 이를 곽가가 순전히 운에 맡겨 진언하고 조조가 받아들였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심하면 곽가가 손책을 암살했다는 급진적인 주장도 있지만 어떠한 증거도 없다.

오히려 실제로 손책 암살 시도를 한 것은 진등이었고 건강실록과 조합하여 진등이 회유한 엄백호의 잔당 허소와 손책을 암살한 허소가 동일인물(마침 한자도 같다)이라면 손책 암살에 성공한건 오히려 진등이라고 할 수 있다.

2.5. 하북 평정

원소가 병으로 죽은 후 원소의 두 아들 원담과 원상이 원가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다투었다. 조조는 내분을 틈타 원담과 원상과 싸운다. 정사에는 여양 전투에서 조조군이 이긴 듯하게 적혀 있는데 정황상 조조군은 여양에서 패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장들이 승세를 타서 나아가 공격하자고 하니 곽가가 말했다.
우리가 급히 공격하면 원담과 원상은 서로 도울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뒷날의 다툼이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남쪽으로 형주를 향하여 마치 유표를 칠 것처럼 하면서 변화가 생긴 뒤에 그들을 공격한다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남정(南征)하여 군이 서평에 당도했을 때 과연 내분이 일어나 원담과 원상이 기주를 다투었다. 원담이 원상군에게 패하고는 달아나서 평원에 의지하고 신비를 조조에게 보내 항복을 청했다.

신비전에 따르면 신비가 조조를 만나 원담의 뜻을 전하자 조조는 매우 기뻐했다. 며칠이 지난 후, 조조는 또 먼저 형주를 평정하고 원담과 원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서로를 피폐시키도록 하려고 했다. 어느 날, 연회석에서 신비는 조조의 안색을 살피고 변화가 있음을 알았으며, 이 일을 곽가에게 말했다. 곽가가 신비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자, 조조는 신비에게 질문을 했다.

조조가 돌아가 원담을 구원하고는 마침내 조조를 뒤따라 업을 평정하였다. 또 조조를 뒤따라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하고 기주를 평정하였다. 곽가를 유양정후에 봉했다.

부자에 따르면 하북이 평정된 뒤에 조조가 청주, 기주, 유주의 이름난 선비들을 많이 벽소하여 점차 신하로 삼아 부리고 그들을 성사연속(省事掾屬)으로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곽가의 모책이었다.

싸움에서 패한 원상은 유주의 원희를 의지했으나, 유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패한 원상 등은 과거 원가와 결탁했던 오환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장차 원상 및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치려 하니, 수하들 다수는 유표가 유비를 시켜 허도를 습격하며 조조를 공격할까 봐 우려하였다. 곽가가 말했다.
오환은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 있으니 필시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는 앉아서 담소하기나 좋아하는 인물일 뿐이라 자신의 재능이 유비를 부리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그를 제어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니 공이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이에 조조가 실행에 옮겼다. 역현에 도착하니 곽가가 말했다.
병(兵)에서는 신속을 귀하게 여깁니다. 짐수레로 인해 진군이 늦어져 저들이 우리가 온다는 것을 듣게 되면 필시 방비를 할 것입니다. 짐수레는 남겨두고 가볍고 날랜 차림의 군대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서 출군함으로써 적이 뜻하지 못할 때에 엄습하느니만 못합니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병귀신속(兵貴神速). 이에 조조가 은밀히 노룡새를 나가 선우정으로 곧바로 향했다. 오환이 조조가 갑자기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어울려 싸웠다. 조조가 이를 대파하고 답돈 및 명왕(名王) 이하 여러 명을 베었다. 원상 및 원상의 형 원희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곽가가 유언으로 공손강이 원상 형제의 목을 보내올 것을 예상했다고 나오지만 사실 정사에서는 조조가 예상한 것인데 이를 곽가의 예측으로 바꾼 것이다.
당초 요동태수 공손강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공(조조)이 오환을 격파하자 어떤 이가 공을 설득하기를, 끝까지 정벌하면 원상 형제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공이 말했다.
"나는 바야흐로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오게 할 것이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소."
9월, 공이 군을 이끌고 유성으로부터 돌아오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와 속복환 등을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다.
무제기

2.6. 죽음

당초 진군이 곽가가 바르게 몸가짐을 닦지 않는다고 하며 여러 차례 조정에서 곽가를 고발하였으나 곽가의 뜻은 태연자약하였다. 조조가 그를 더욱 중히 여겼으나 진군이 정도를 지킨다 하여 또한 기쁘게 여겼다.

곽가는 매우 통달한 이로 모략과 책략을 갖추었고 사정에 밝아서 조조가 오직 봉효만이 자기 뜻을 잘 안다고 할 정도로 중히 여겼다. 그런데 그런 곽가가 37세의 한창 나이로 유성으로부터 돌아온 뒤 병이 위독해지니 조조가 병문안하는 이를 번갈아 계속 보내 끊이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결국 곽가가 죽으니 그의 상(喪)에 임하여 매우 슬퍼하며 순유 등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나이가 모두 나와 동년배인데 오직 봉효만이 가장 젊었소. 천하의 일이 끝나면 뒷일을 그에게 맡기려고 하였는데 중년의 나이에 요절하니 이것이 운명인가 보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군좨주 곽가는 정벌에 뒤따른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 데에 있어 그가 도모한 공이 높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명이 짧아 사업을 다 끝내지 못했습니다. 식읍 8백 호를 늘려 예전과 합쳐 모두 1천 호가 되게 해 주십시오.

2.7. 사후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곽가를 그리워하고 애도하며 말했다.
곽봉효는 나이 40세를 채우지 못했으나 나와 더불어 11년을 함께 겪었소. 그에게 뒷일을 맡기려고 하였는데 어찌 이처럼 갑작스럽게 그를 잃게 될 줄 짐작했겠소. 게다가 봉효는 바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었소. 천하인 중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는 이가 적은 법이니 몹시 애석하고 아깝소.
또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남방에는 역병이 있어 항상 자신이 남방으로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당 먼저 형주를 평정해야 한다고 말하였소. 이는 필히 공업을 세우고자 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이오.

시호를 내려 정후(貞侯)라고 했다. 시법에서 정(貞)은 청렴결백(?)하게 절개를 지키는 것, 큰 생각을 품고 성공을 이루는 것, 벼슬을 하면서도 만사에 굴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인 곽혁이 후사를 이었다.

조조가 역병과 화공으로 인하여 적벽대전에서 패배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곽봉효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또 말했다.
슬프구나, 봉효여! 애통하구나, 봉효여! 아깝구나, 봉효여!

조환전에 따르면 262년, 조서를 내려 조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고인이 된 군좨주 곽가를 제사지내도록 했다.

3. 평가

긍정적으로 평하는 사람이나 부정적으로 평하는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라면 주군 조조와의 궁합.

옳은 판단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주군과의 궁합이 좋다면 시시콜콜한 부분에서 분쟁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어지기에, 결국 유능함만큼이나 주군과의 궁합도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당장 삼국지 내에서만 해도 모사와 주군의 궁합이 중요하다는 사례는 많이 나온다. 원소의 경우 특출난 모사인 전풍, 저수를 끝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패망했다.[8] 진궁도 조조를 떠나 여포를 따랐는데,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지만 결국 여포가 워낙 막나가며 진궁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을 그르쳤다. 이렇게 모든 판단은 전적으로 군주에게 있고 그 군주의 판단력이 정확할수록 승리에 가까워지는데 온갖 잡다하고 별의별 난입 상황이 벌어지는 난세에서 그것도 중원 한가운데 사방의 적들이 언제 치고 빠질지 모르는 조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웠던 시기에 오로지 판단력 하나만으로 조조에게 인정받은 곽가는 분명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훗날 조조와 갈라서게 되는 순욱의 생애를 살펴보더라도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군주에게 버림받아 기회를 펼칠 장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랄 수도 있겠다.

즉, 이는 출사 시점에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주군은 어떠한 인간인지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는 말이며 둘 사이 상성까지 파악했다는 의미다. 곽가는 조조에게 임관하기 전 당대 자타공인 최고의 군벌로 인정받던 원소에게 먼저 의탁하려 했었지만, 직접 원소와 대면해보고는 군주로서의 자질이 자기 성에 차지 않아 그 자리에서 떠나버렸다.[9]

여담으로 곽가가 원소 대신 조조를 섬긴 이유 중 하나가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이끄니 그 이치에 있어 순하다.'라는 이유였는데 즉 곽가 또한 순욱을 비롯한 여러 모사들처럼 한나라를 위해 조조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곽가가 죽을 때까지는 조조가 순욱과 대립을 할 정도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즉 조조가 한나라를 위한 인물이라 평가한 곽가 또한 순욱이 조조와 대립했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 또한 순욱과 비슷한 포지션을 택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 설령 곽가가 이에 반대한다 할지언정, 기록상 막무가내 같아 보여도 조조의 눈치를 보며 선은 넘지 않는 곽가의 특성상 가만히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한때 동탁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충의 넘쳤던 순유[10]가 조조의 구석에 찬성했던 것처럼 나중에는 한나라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꺾고 주인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 보면 곽가는 대립할 때가 오기 전에 죽었고, 순욱은 대립할 때까지 살아 같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곽가가 선택의 순간에 어찌 행동했을지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이상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여간 이것도 위빠들 사이에선 소소한 떡밥 가운데 하나.

연의에서 신묘한 계책을 내는 책사로 묘사함에 따라 여기서 팬들과 안티가 갈리는 편이다. 연의의 이미지에 반해 곽가를 찬양하고, 반대로 정사에 근거해 군공이 없는 존재라 욕하는 것.

3.1. 긍정적 평가

곽가는 조조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참모였고, 매우 결정적인 판단에 있어 관여했다. 단순히 어떤 발상을 떠올리는 것보다는 최종판단에 가까운 언행들이 많다. 연의에서는 신묘한 계책을 떠올리는 군사처럼 묘사되지만, 정사기록으로 보면 병법가보다는 정세를 잘 파악하여 조언을 하는 역할이 더 큰 인물 쪽에 가까워 보인다. 곽가는 몇 번이나 조조에게 자신감을 북돋는 말을 해 주었고, 예언에 가까운 조언들이 많았다. 요점은 곽가의 이러한 예측들이 대부분 들어맞았고, 조조는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를 신뢰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곽가가 어떻게 추천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럴 듯한데, 조조는 항상 순욱과 크고 작은 일을 논하였고 순욱이 본진을 맡은 후로도 편지를 통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전화기도 아니고 편지로 모든걸 빠르게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이니 대신해 옆에 둘 인재가 필요했는데 그게 희지재였고 희지재가 죽은 후 그를 대신해 일을 헤아릴 자를 부탁하자 이 때 추천한게 곽가다. 이 또한 정황상 특정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라기보다는 전체적인 식견으로 일을 끌어가는 역할이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포지션을 대신할 인물로 희지재 곽가를 추천한 순욱 본인도 그러한 쪽으로 뛰어났다 평가받는 편이기 때문이며, 또한 희지재도 조조가 희지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일을 논의할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으나 정작 곽가의 전임자였던 희지재의 활약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은 없다. 아무리 요절했다지만 만약 전술로 저렇게 크게 평가될 정도면 어느 전장에서 어떤 식으로 활약했다 정도의 일화 정도는 언급될 만한데 그런 게 없다. 함께 일을 논의할 사람이라 칭할 정도로 크게 평가하면서 정작 군략 부분에서는 구체적인 공적이 없다는 점에서 곽가와 같다. 물론 참모로 뽑힌 만큼 병법적인 것에도 안목이 있겠으나, 기록상 구체적인 군공보다는 두루뭉술한 평가나 다른 사람과 함께 추진한게 눈에 띄고 선임들도 그쪽 계열로 보이는 점에서 전체적인 방향성을 잡는데 탁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본인이 주체적으로 무언갈 구상하는 것보다도 다방면의 정보들을 수집 취합해 분석하고, 그 중 최적의 선택지를 정해 전체적인 비전과 방향성을 판단하고 이를 추천하는 것이 곽가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것. 요즘으로 치면 아끼던 비서, 분석가같은 존재로 보면 된다.

조조는 곽가를 매우 극찬했다. 조조는 정사에서 기록도 적벽대전에서 일년 전 죽은 곽가가 있었다면 자신이 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또한 조조는 정사에서 기록도 곽가만이 자신의 뜻을 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곽가가 죽었을 때, 순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천하에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려운데 곽가가 죽어서 애석하다 등을 말할 정도로 곽가와 교감이 깊었다.[11]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3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인해 천재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적벽에서 패배 이후 조조가 탄식한 것 등 때문에, 조조처럼 '만약'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곽가의 능력을 추측해보고 있다.

조조군 참모들도 그렇지만 곽가 역시 일반적인 상식과 동떨어진 조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12] 특히 곽가는 야사의 기록이긴 하지만 조조가 자신의 진언을 들어주지 않자 조조의 성질머리를 잘 알면서도 조조가 보는 앞에서 침을 뱉으며 제 말을 무시하시면 어차피 대패해서 망할 거니 이래죽나 저래죽나 똑같다고 말하며 적한테 질질 끌려다니다 죽기는 더 싫으니 불만있으면 그냥 지금 죽이라고 아예 선언하며 좌중을 당황케 하는 파격적인 언행을 보인 적도 있다. 물론 이때도 결국 곽가의 말이 맞았고 조조는 자기 목숨까지 걸 정도로 깡다구도 있다며 곽가를 더욱 신뢰했다고 한다.

하비성 공략에 실패하여 조조가 돌아갈 것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군량은 거의 떨어졌고 피해도 막심한 상황이었고 군주인 조조는 철군쪽으로 마음이 기운 상태. 그렇지만 순유와 함께 곽가는 반대한다.

순유전에서는 순유가 곽가와 함께 조조를 설득을 한다. 또한 성 안에 물을 들여보내 성에 물이 차게 하는 방법을 조조에게 건의하여 정면대결이 아닌 방법으로 하비성을 함락시킨다. 물론 수공에 곽가가 관여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조조를 설득하는데 순유의 옆에서 보탠 것 역시 수공에 기여했다고 볼 수는 있다. 정사도 이런 뉘앙스가 보인다. 당장 조조가 마음을 돌려서 철군하려는데 순유와 곽가가 각각 이렇게 설득했다.[13]
순유:"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데, 지금 세 번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니 그 예기(銳氣)가 쇠퇴하였습니다. 삼군(三軍)에서 장수를 주(主)로 하여 그 쇠미한 곳에 주력하면 군대는 싸울 뜻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진궁(陳宮)에겐 지모가 있으나 더디니, 지금 여포의 기세가 다시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의 지략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면 여포군을 가히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곽가:“옛날에 항적(項籍)은 70여 번을 싸우며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으나 하루아침에 세력을 잃고 자신의 몸은 죽고 나라가 망한 것은 용맹만을 믿고 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포는 매번 싸울 때마다 번번이 격파당하니 기(氣)는 쇠하고 힘은 다하여 안팎으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포의 위력(威力)은 항적(項籍)에 미치지 못하는 데다 곤패(困敗)함 또한 항적보다 더하니 만약 승세를 타고 공격한다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나온 곽가의 말을 정리해 보면 하나같이 결정적인 판단과 결부되는 일에 가깝다. 단순히 미래 예측 고스톱내기가 아니라, 목숨이 달린 정세 판단이다. 관도대전 당시 손책이 여러 곳에서 원한을 쌓아놓고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니 필부의 손에 죽을 거라 예측한 것 역시 그렇다.

적벽에서 곽가가 있었다면 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울부짖는 정사의 기록이나, 곽가만이 자신의 뜻을 안다는 정사의 기록이나, 곽가 사망 후 그가 자신의 뜻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발언했던 정사의 기록을 볼 때 조조가 곽가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일부나마 볼 수 있다.

후대를 맡길 의사가 있었다는 뜻을 보았을 때 조조는 곽가의 최종판단이 자신과 유사하다고 생각했거나, 여러 진언들을 듣고 최종판단을 내리는 능력이 자신과 동급이거나 유사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정세나 상대국가들의 움직임, 시대의 흐름을 예측하는 능력이나 시야가 자신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수준이라고 여긴 것으로 보여진다.

내정이나 군사부문에서 구체적인 기록이 거의 없는 반면, 조조가 상당한 공헌이 곽가로부터 비롯되었다며 높은 평가를 내렸다는 발언이 기록되어 있는 점이 흥미롭다. 단순히 지나가는 칭찬 정도로는 정사에 기록되지 않는 데다가 이런 경우 조조가 그러한 찬사를 한 이유로 적절한 기록들을 편찬자가 언급하기 마련인데, 유독 곽가에 대해서는 조조가 대체 어떤 점 때문에 그런 최고의 찬사를 했던 건지 주석이 없다.

나온 것은 조조가 곽가와 마음이 잘 통하는 것을 아쉬워했다는 것과 곽가를 총애하고, 곽가의 말이면 거의 대부분 들어주려고 했다는 것이며 자신의 모든 책사들 중 으뜸을 순욱이라고 치켜세우고 가장 큰 공로를 지녔다고 하지만[14] 그런 2인자인 순욱에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천하에서 찾기 어렵고, 곽가가 죽어서 애석하다며 곽가 외에는 곽가만큼 마음이 통하는 이가 없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번뜩이는 기책을 스스로 제안해 전황을 뒤집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능력이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항상 모든 전황을 고려해 목숨이 달린 다자택일의 최종판단에 있어 군주와 마음이 잘 맞고, 그리고 심사숙고한 그 판단을 거의 100%에 가깝게 분석하고 옳은 방향을 선택하는 데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까? 하는 군주의 질문의 신뢰도 높은 예언에 가까운 판단을 하는 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위험요소를 최소화하고 앞으로의 전황에서 한발짝 앞서 생각할수 있는, 결국에 곽가는 조심성 많고 의심이 많고 불안감이 많은 조조에게 있어 불안감을 해소하고 결정의 확신을 심어 주는 꼭 필요한 인재였기에 조조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즉 곽가는 초한지에서의 장량 포지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전장에서의 일은 한신이, 본진에서의 일은 소하가 도맡아 처리했지만 늘 주군을 보좌하며 장량처럼 순간순간의 중대한 의사결정에 지대한 공헌을 해주는 역할이라 볼 수 있겠다. 순욱이 큰틀을 짜내고 중대한 일들을 시행한다면[15] 곽가는 순욱이 없는 멀리 떨어진 현장에서 갈팡질팡하는 조조의 마음을 정리해주거나 다른 책사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어 조조의 결심을 서게 해주는 역할이었다.[16]

한편 이중톈 교수의 경우 곽가를 높게 평가하는데, 심지어 조조가 곽가를 잃고 유비가 제갈량을 얻은 것이 유비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며 곽가는 제갈량과 동급의 천재라고 격찬했다.이걸로 이중톈의 삼국지 보는 식견을 알 수 있다. 애당초 이중톈은 역사학자가 아니며 삼국지 강의도 오류가 만만찮게 많으니(국내에선 중국판 김운회 소리도 듣는다) 적절하게 필터링하며 듣는 게 좋다.

3.2. 부정적 평가: 연의의 수혜자

한국의 삼국지 팬덤에서는 곽가의 안티가 꽤 있는 편이다. 안티의 대다수는 곽가가 싫어서라기보다는 곽가빠들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연의는 예전부터 한국에서 인기 소설이긴 했지만 오늘날 의미에서의 "팬덤"이 형성된 것은 코에이 삼국지 게임의 등장 및 PC통신/인터넷의 여명기부터인데, 그 시점까지는 아직 오늘날처럼 정사 번역을 찾아볼 수 있다던가, 원문을 체크하거나 정사 외의 사서들도 교차검증할 수 있을 만한 정보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팬덤의 지식"이라는 것은 연의에 기술된 내용과 게임을 통해 묘사된 모습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안정적인 정치/통치능력, 민생 및 치안을 담당하는 행정가 자질, 대전략을 수립하고 이루어나가는 전략가적 면모 등을 보이는 중요한 책사들이 하나같이 평가절하 당하는 경향이 있었고, 반면에 (연의상으로) 전쟁과 전투에서 계책을 내는 전술가적 소양의 책사들은 종종 과대평가가 되었던 것.

여러 사서에 기술된 정보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다면 조조에게는 순욱이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쪽이 압도적이지만,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는 순욱이니 순유니, 유엽이니, 정욱이니 하는 사람들은 걍 (삼국지 게임처럼) 내치나 하는 문관 쩌리들이고, 종요니 진군이니 하는 사람들은 그냥 듣보잡 B급 인재들이며, 손가의 주유, 유비의 제갈량과 겨뤄볼 만한 조조의 브레인은 오직 곽가(+후일에는 사마의)라는 식의 생각을 가진 곽빠들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곽가를 까는 사람들은 바로 위와 같은 경향을 까는 것.

이들은 곽가가 거품이 많다며 곽푸치노(...), 혹은 자기는 뭐 한게 없는데 뒤에서 훈수만 둔다면서 훈수충[17]라고 부르며 깐다. 젊은 나이에 병사한 탓에 얻은 요절한 천재 이미지 및 조조의 적벽대전 패전 후 멘트 때문에 살아서 보여준 모습에 비해서 일부 팬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과대평가 받는다는 것이 까임의 대표적인 이유이다.[18] 특히 젊은 나이에 병사해서 조조군에 얼마 있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는데 11년이라는 세월 동안 조조군에 있었으며 정세판단이나 조조와 성격적 궁합을 토대로 설득하는 것 외에는 이름을 내세울 만한 공적이 없다. 참고로 순유 역시도 곽가와 비슷한 시기에 조조에게 임관했었다.

즉, 판읽기와 훈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나. 실제적으로 본인이 직접 나서서 이룬 건 전무하다. 말하자면 '실전에 나서지 않고 책사로만 머문, 그렇게 해서 실패도 없는 마속'에 가깝다.

정사를 보면 연의에서 곽가의 활약이라는 것 중 실제로 다른 모사의 진언인 것이 어느 정도 보이고, 거의 맵핵을 켜놓고 있는 듯한 예측도 실제 사료에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좀 생각해 봐야 하는 일이다. 정사 기록에 기대어 볼 때 개인의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기보다는 주변의 진언을 잘 통합하여 좋은 타이밍과 어법으로 조조에게 올리는 것이 잘 맞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조의 스타일에 꼭 맞아 잘 통하는 맞춤형 인재였던 셈이다.

3.2.1. 별 볼 일 없는 전공

의외로, 정사에는 곽가가 병법을 쓰는 기록이 사실 거의 없다. 군공만 따지면 배송지가 동렬에 놓은 정욱보다 아래다. 하비성 수공 말고는 특기할 만한게 없으며 그조차도 순유가 수공을 주장하는 것에 옆에서 찬성표를 던져준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사실상 특기할 것이 전혀 없는 셈이다.[19] 조조의 모사들 중 병법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은 순유다. 그러나 캐릭터성이 없다는 이유로 순유의 활약은 창작물 대부분에서 순욱과 곽가에게 양분되어 흡수되는 실정.

촉 진영의 제갈량이 곽가처럼 유비에게 예언에 가까운 형세판단 및 조언을 하면서도, 병법마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는 점을 비교하면, 곽가의 모습은 까딱 잘못하면 그냥 '말만 앞세우는 천재 아닌 천재'가 되는 셈이다. 쉽게 말해 '위나라판 마속'이 될 위험성이 있었던 인물.

가끔 관도대전에서 가장 활약한 모사로 곽가를 꼽는 사람들이 있지만, 곽가는 관도대전에서 이름을 남길 만한 공훈을 세운 적이 전혀 없다. 기전체의 특성상 인물의 공적은 작은 것까지 일일이 찾아서 기록해주는 편이지만, 곽가의 경우엔 크고 작은 공이라며 두루뭉술 넘어가 이름을 올릴 만한 공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관도에서 가장 활약한 것은 순유였으며 순유전에 따르면 허유가 투항을 해 와 오소를 공격하는 관도대전의 승리를 가른 중요한 전투를 찬성한 것은 순유와 가후뿐이라고 되어있다. 즉 곽가는 찬성하지 않고 반대측의 입장에 섰다고도 볼 수 있다.
이때 허유(許攸)가 귀순하여 원소가 순우경(淳于琼) 등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군량미를 운반하도록 했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순우경의 부대는 장수는 교만하고 군사들은 나태하기 때문에 공격을 한다면 반드시 깨뜨릴 수가 있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의 허유를 의심했지만 순유와 가후(賈詡)는 조조를 설득했다. 조조는 순유와 조홍에게 수비를 맡기고 순우경을 요격하여 죽였다.
조조는 곧 서황과 사환을 보내 습격하여 달아나게 하고 치중을 불태웠다.
때마침 허유가 항복해 와서, 원소는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식량을 운반하는 것을 영접하도록 하였지만, 장수는 교만하고 병사들은 나태하므로 가히 공격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조의 모사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의심을 품었으나, 오직 순유와 가후만은 조조에게 허유의 계책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조조는 곧 순유와 조홍을 남겨 본부 진영을 지키게 하였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순우경 등을 모두 베어버렸다.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투항하자, 원소는 마침내 군대를 버리고 도주했다. 장합이 항복해 오자, 조홍은 의심하며 과감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순유는 조홍에게 말했다.
삼국지 순유전.
실질적으로 조조가 전성기를 구가하기까지 가장 많은 역할을 한 모사나 내정 계열 인물들은 곽가가 아니라 순욱과 순유라고 보면 된다. 곽가도 어느 정도 공헌을 했다지만 그가 순욱과 순유를 능가한 건 아니었다. 배송지는 곽가와 정욱을 같은 선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대체로 적절한 평가로 보인다.

3.2.2. 적벽대전에서 곽가만 있었다면 이겼다?

분명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봉효만 있었더라면.....!!!"이라고 부르짖는 부분은 정사에도 적힌 사실이지만, 적벽대전 당시 곽가가 살아있었다고 반드시 승리로 이끌었으리라 장담하긴 힘들다. 우선 원론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대체역사같은 이야기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정사에서 조조와 곽가가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 서로에 대해 감탄하고 후에 조조가 봉효만이 나의 뜻을 확실히 안다고 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조조와 곽가는 서로 죽이 잘 맞았다. 조조가 적벽대전 이후 내뱉은 말은 이런 곽가에 대한 조조의 개인적 신뢰와 함께, 다른 책사들을 향한 질책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20] 그러니까 그냥 곽가 타령을 하면서 주변 책사들을 무안주려고 했다는 평가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적벽대전의 패배는 책사들보다도 조조에게 불리한 여건이 상당 부분 있었고 손권과 유비가 그 틈을 잘 파고들었기에 가능했다.[21]

설령 곽가가 살아있었다 해도 적벽대전을 승리하기엔 여건이 많이 좋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위군 자체가 북방 출신이라 수상 전투 경험이 너무 적은 반면 오군은 병사 대부분이 수상에서 노략질을 일삼은 적이 있거나 수상전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유비군도 오나라와 손을 잡고 있었다.

사실 이 점은 연의가 대체로 한 두 명의 장수나 모사의 유능함에 크게 의존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니 연의로 먼저 접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곽가 한 사람만 있었어도 적의 계책을 간파해서 이겼을 거라는 것.

조조도 곽가가 번뜩이는 계략을 내는 인물이 아닌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빨리 분석해 그릇된 판단을 하지 않고 때로는 자신을 막아서라도 최악의 길을 벗어나게 하는 그 능력을 봤을 때, 조조가 "곽가가 있었더라면...!"이라고 울부짖었다 해도 그건 곽가가 있었으면 적어도 진군을 반대하거나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이기라도 해주었을 것이라 여겼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22] 정사든 연의든 조조가 곽가를 찾으며 차마 뒤에 말을 잊지 못하며 쓰러지며 후회했다는 대목만 있지, 조조 본인조차 이겼을 것이라고 말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조조의 모사들도 다들 생각이 있어서 침공을 말리기는 했다. 정욱이 화공의 위험성을 제시하기까지도 했는데 조조가 지금은 서북풍이 부니 괜찮다고 씹었고, 그러다가 당일에 동남풍이 부니 주의하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조는 며칠 전의 얘기를 잊었는지 동남풍이 부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라며 신경쓰지 않았다. 연의를 제외하고 정사적 맥락에서 본다고 해도, 정사에서 이미 처음에 가후가 여러 불리한 여건을 들어 손오 정벌을 반대한 바가 있기 때문에 결국 조조의 자만심이 문제였다. 다만 저 첨언을 한 가후보다는 조조가 훨씬 총애했던 곽가가 같은 말을 했다면 좀 더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될 뿐이다. 애초에 처세술의 달인인 가후는 항장 + 조조세력의 후계자를 죽였다는 입장상 아주 강하게 나오기가 힘든 반면, 곽가는 오히려 조조가 신뢰하는 인물인데다가 성격도 강해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좀 과격하게 주장하기도 하였다. 가후와 곽가가 똑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그 강도의 차이가 당연히 클 것이고,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천하의 조조도 한수접고 귀를 귀울여 그런 처참한 패배까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23]

3.3. 조조군의 첩보공작전문가?

조조의 곽가에 대한 높은 신임에 비해 드러나지 않는 전공, 적 세력에 대한 거의 예언에 가까운 상황 판단 능력 등등을 미루어 일각에서는 그가 조조군의 모사들 가운데서 정보전 내지 첩보에 가장 뛰어난 인물로 분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부에 대입하면 국가정보원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첩보가 얼핏 보면 직접적인 병략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데다가,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비겁한 분야라고 보기 쉬운데, 사실 국가 간의 대치 상황에서 정보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유명한 엠스 전보 사건 같은 사례를 보더라도 타국에 흘러들어가는 정보 조작을 가지고 사실상 전쟁의 발발을 결정할 정도로 첩보전은 매우 중요하다.

곽가가 관도대전이 벌어지기 전에 원소군에 대한 내부사정을 이야기하며 결전을 주장한 것과, 원소 사후 후계자들 행보, 그리고 손책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에 대해 예측한 것을 보면 그가 타세력에 대해 매우 풍부한 정보들을 수집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제갈량도 북벌 때 마속 등을 시켜 사마의를 실각하도록 공작활동을 한 사례 등을 보면 다른 세력의 뛰어난 모사들도 첩보공작활동을 매우 중시하였다.

즉, 곽가는 자신이 대치 중인 세력으로 수많은 밀정을 파견하여 조사를 시킨 후에, 그렇게 수집된 대량의 정보들을 검토하여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선택하여 헌책으로 올리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정보수집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얻어낸 정보들 중에서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하려면 당연히 현제 국가의 방향성과 전략적 목표를 숙지하고 전체 판세를 읽는 대국적인 안목이 반드시 필요하다. 더욱이 다양한 분야에도 대략적인 식견도 두루 갖추어 그것이 쓸 만한 정보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설령 자신이 그러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보좌할 수 있는 인재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유달리 감이 빠르고, 민첩한 상황판단력에 풍부한 지식까지 갖춘 곽가는 이러한 임무에 최적이었던 셈이다. 그가 제공하는 정보는 사실에 매우 근접한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총사령관인 조조에게 있어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한 전략안으로서 채택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런 첩보업무는 국가의 중요 기밀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해야 했고, 조조에게 심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개인적으로도 친밀했던 곽가가 여기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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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성(柳城)에서 회군하던 중 풍토병으로 죽었다고 한다[2]쉬창시 위저우시. 순욱과는 동향이다. 엄밀히 따지면 곽가는 양책현, 순욱을 위시한 순가의 고향은 영천군 영음현이다. 즉 옆동네[3] 한자로 陽翟이라 쓰는데, 보통 翟 이 글자는 '적'으로 읽지만 고을이름으로 쓸 때는 '책'으로 읽는다. 따라서 양책현이 올바른 표기.[4] 관도대전에서 예측이 틀렸던 정황을 보였다.[5] 제갈량유비에게 등용된 것도 27세였다.[6] 본래 순욱은 조조의 원정에 종군하였으나 조조 세력이 어느정도 성장하며 본진을 맡게 되었다. 조조는 순욱과 편지를 나누며 상의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렇다곤 해도 전화기가 없던 시절에 먼 거리에서 빠르게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으므로 순욱을 대신할 인재가 필요했고 그가 바로 희지재였으며 희지재 사후 곽가로 이어진다.[7] 원래 명칭은 군사좨주로 사마사가 황제로 추존된 이후로는 '사'를 빼고 군좨주로 칭했다. 사마사의 이름과 같은 글자였기 때문에 피휘한 것이다.[8] 사실 저 둘 말고도 인재가 워낙 많다 보니 정치질과 내부견제 같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해서 제대로 활용을 못한 거지만.[9] 반대로 조조와의 첫 만남에선 "실로 내 주인이시다"라며 서로 아주 흡족했었다.[10] 심지어 그 시도가 발각되어서 하옥돼 사형 집행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보다 더 먼저 동탁이 진짜로 왕윤여포에게 암살당해서 흐지부지된 것. 그야말로 신이 도운 수준의 천운 타이밍이었다.[11] 의외로 곽가의 능력을 아쉬워하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잘 안다느니 마음이 맞는다느니 등 궁합이 맞는 것을 중점으로 두고 있다. 순욱을 으뜸이라고 평가한 것이나 군략 쪽에서 순유를 극찬한 것과 달리 곽가는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내세울 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특이점.[12] 물론 순유만큼은 아니다. 관도대전 당시 아래에서처럼 곽가를 비롯한 다른 현장에 있던 모사들이 모두 허유를 의심하던 것과 달리 허유의 계책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은 순유와 가후였고, 심지어 장합의 투항을 의심하던 조홍을 설득한 것도 순유였다. 상식과 동떨어진 조언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것은 관도대전에서는 순유가 독보적이었다.[13] 사실상 순유의 계책이 실행될 수 있도록 조조가 철군하려는 것을 순유와 같이 반대했다. 거기다가 순유가 수공을 제안할 때 옆에서 같이 설득했으니 다른 책사의 진언이 조조에게 받들여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보여준다.[14] 내정만이 아니라 온갖 계략, 책략 등을 다 짰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욱은 군략 부분 쪽에서 자신이 직접 현장에 가서 한 것이 없으니 최고 공로자가 아니라고 사양했으나,즉 자기 조카 순유가 킹왕짱이나 조조는 짠 계략과 책략 등이 얼마인데라며 순욱이 으뜸이라고 말한다.[15] 기록 대다수가 순욱이 스스로 없애버린 것도 있는 탓에 조조와 순욱이 머리를 맞대고 여러 책략, 계략들을 수없이 펼친 것은 조조의 발언에서나 알 수 있다. 그나마 관도대전에서 전쟁에 나가서도 순욱의 조언을 구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순욱의 예측대로 심배와의 불화로 인해 허유가 배신해 와서 승리한다.[16] 대표적인 예로 여포 토벌 때 철군하려는 조조를 순유와 함께 뜯어말린 것이 있다. 또한 순유가 책략을 낼 때, 곽가도 힘을 보태듯이 반드시 이길 거라고 얘기해서 조조가 철군하려는 뜻을 접고 순유의 계략대로 수공을 펼쳐서 여포를 몰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단 관도대전 때 보면 순욱에게 여전히 서신을 보내서 조언을 구하고는 했는데, 순욱과 서신을 주고 받기도 어려울 때를 대비한 보험 정도로 보인다.[17] 물론 곽가의 훈수는 틀린적이 거의 없었으며, 조조가 봐주지 않았다면 목이 달아났을정도로 리스크를 걸고 말한거라 마냥 폄하하긴 힘들다.[18] 특히 곽가빠들은 예를 들면 제갈량이 연의에서 거품이라고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헐뜯고서는 곽가가 연의에서 포장된 것은 대답을 피하거나 적반하장으로 나온다.[19] 하비성 수공 성공 후 조조가 순유를 미친 듯이 극찬하고 순유를 띄워주지만 곽가는 전혀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공도 순유만 이야기하지 곽가는 수공 관련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그냥 하비성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만 할 뿐이었다.[20] 모종강은 "간웅의 눈물은 곤장처럼 훈계의 역할도 한다."고 평가한다.[21] 적벽대전에 임하며 조조가 실책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싸울 수도 없었다. 교전을 회피하고 눌러앉았다간 갓 점령되어 불안정한 형주로 유비와 손권이 나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22] 미디어 믹스중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이 조조의 발언을 차용해, 곽가를 살릴 수 있는 대체역사가 포함되어 있는 작품인데, 곽가가 살아있다면 적벽대전 출군 직전에 등장해 적들의 책략을 간파하여 긴급히 배를 풀어 조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히려 역공을 취해 손권군의 공세를 가까스로 방어해내고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하게 후퇴해 무승부정도로 끝내게 된다.[23] 즉 '봉효가 있었더라면'을 "곽가란 천재가 있어 계책을 짜줬더라면!"이 아니라 "필요하면 내 멱살까지 잡고 전쟁하지 말라고 할 그녀석이 있었더라면!"이라고 본다면 충분히 그럴듯한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