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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8:05:39

노숙(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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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肅
노숙
파일:attachment/Lusu2.jpg
최종직위 도독(都督) 겸 분무교위(奮武校尉)
성씨 (魯)
이름 (肅)
자경(子敬)
생몰기간 172년 ~ 217년
고향 서주(徐州) 하비국(下邳國) 동성현(東城縣)[1]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손권에게 임관2.3. 적벽대전2.4. 익양대치2.5. 죽음2.6. 사후
3. 삼국지연의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손권 휘하의 장수는 자경(子敬)이며 서주 하비국 동성현 사람.
노씨네 무서운 아이 계책에 가장 뛰어나고 魯家狂兒策最長,
이끌고 조화롭게 한 자로는 주랑이 있었네 倡而和者有周郎
공평중(孔平仲),「자염장군(紫髥將軍)」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부유한 호족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사망하여, 할머니와 생활하게 되었다. 집안의 재산이 부유했지만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천하난세이니 가업을 그만두고 재산을 정리해 농토를 공개적으로 판매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지방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어 고향 사람들의 인망을 얻었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노숙은 체구가 사내답고 훌륭하였으며 젊어서부터 대업을 이루기 위한 뜻을 지니고 기략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난세가 이어지자 격검, 기마술, 궁술을 익혔다. 또한 젊은이들을 구제하여 사병을 모았고 사냥을 하고 무술과 병법을 가르쳐 군사 훈련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행동을 보고 가문의 어른들은 "노씨 가문은 대를 거듭하면서 쇠퇴하여졌는데, 이렇듯 기백이 우리들과는 다른 아이가 태어났구나!"라고 말했다.

노숙은 고향에서 재산이 많은 유력자였다. 주유가 거소현의 장이었을 때, 일부러 노숙을 방문해 자금과 군량미 지원을 요청하자 노숙은 각각 쌀이 3000곡씩 있는 집의 2개의 창고 중 한쪽 창고를 개방하여 전부 주었다. 한 번에 자신이 갖고 있던 쌀의 절반을 증여한 것으로 이러한 일화는 훗날 '친구에게 분연히 돈을 빌려준다.'라는 뜻을 가진 지균상증(指囷相贈)이라는 사자성어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주유는 노숙의 비범함을 안 뒤 이를 계기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노숙의 명성이 높아지자 원술의 요청에 의해 그의 부하가 되어 동성현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노숙은 원술은 기강이 없고 함께 큰 일을 하기엔 마땅치 않다고 여겨 그로부터 도망치기로 한다.

노숙은 중원이 혼란하다며 일족을 설득하여 안전한 강동으로 이사한다. 남녀 삼백여 명이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는데 주의 관청에서 기마무사들이 쫓아오자 노숙이 그들에게 말한다.
경들은 장부이니 천하의 정세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오늘 날, 천하에는 병란이 일어났으니, 공적이 있더라도 이를 포상 받지 못하고, 추적하더라도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우리를 쫓는 것인가!
노숙이 방패를 세워 놓고 활을 쏘자 화살이 전부 방패를 관통했다. 기마무사들은 노숙의 언변에 감동도 했고 노숙의 무예를 보자 포기하고 돌아갔다.

노숙은 남쪽 거소현까지 가서 주유에게 의탁했고 이윽고 주유와 함께 장강을 건너 곡아(曲阿)에 머무르며 손책을 만나니 손책도 그를 훌륭한 인물이라 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할머니가 사망하자, 노숙은 다시 고향인 동성현으로 돌아와 할머니를 안장시켰다.

2.2. 손권에게 임관

유엽 역시 노숙과 친구였는데 거소(소호)에 웅거하여 1만의 병사를 모으고 있다는 정보(鄭寶)[2]라는 사람을 섬기자고 권유한다.[3] 노숙은 유엽에게 동의했고 곡아로 돌아왔다. 마침 주유가 노숙의 어머니를 오군에 이주시켜 놓았는데 당시 손책이 죽어 손권이 뒤를 이은 상황이었다. 노숙은 사정을 주유에게 설명하니, 주유는 복파장군 마원의 말을 인용하여 신하가 주인을 선택할 때라며 손권의 후계자로서의 자질강남의 천운의 존재를 들며 거꾸로 손권을 섬기라고 노숙을 설득하였다.

주유에게 설득당하여 유엽의 요청을 묵살한 노숙은 북쪽으로 가는 것을 단념하고 주유의 추천을 받아 손권을 처음 알현한다. 손권은 즉시 노숙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하고 매우 기뻐했다. 다른 손님들이 돌아가자 노숙도 인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손권이 노숙만을 데리고 돌아와 앉아서 술을 마시며 노숙에게 어떻게 나를 보좌할 것이냐고 묻는다. 노숙은 '조조라는 항우가 있기 때문에 손권은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될 수 없다.'며 우선은 가만히 정세를 살피다가 북방의 소란을 틈타 황조유표를 쳐서 장강 유역(강동형주 강남)을 차지해 제왕을 칭하고 천하통일을 꾀하는 한고조의 사업을 하라고 한다. 이것이 노숙의 천하이분지계 초기 구상인데 갓 계승하여 형세도 위태로운 손권에게 황제가 되라는 대담한 제안을 한 것이다. 손권은 한왕실을 보좌하기만을 원한다면서 이를 합당하지 않다고 물리쳤지만, 내심 기뻐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중신인 장소는 노숙이 불손하고 나이가 어려 임용할 수 없다며 자주 비난했다. 그러나 손권은 개의치 않고 점점 더 노숙을 존중하고 후대하였기 때문에 노숙의 모친은 손권이 하사한 옷과 휘장, 생필품 덕분에 과거처럼 부유해졌다.

2.3. 적벽대전

노숙은 손권 진영의 대표적인 친유비파였다. 정사에선 더 적극적으로 아예 유표 사후 형세를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조문을 핑계로[4] 유비조조에게 격파된 장판파까지 가서 동맹을 논했다. 사실상 유표가 죽을 때부터 빠르게 손을 써 유비와 손을 잡은 것도 그의 공로.

형주유기, 유종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형주자사 유표가 사망한다. 노숙은 손권에게 앞서 말했던 천하이분지계에 대해서 자세한 전략을 말한다.

노숙은 이 결맹이 만일 성공하면 천하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니 조조가 기회를 잡기 전에 지금 즉시 가야한다고 재촉했다.

손권은 노숙을 사자로 보냈으나, 노숙은 하구(夏口)까지 온 곳에서 이미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군을 일으킨 것을 알게되자 즉각 남군(南郡)으로 급행했다. 노숙이 남군까지 왔을 때, 유표의 아들 유종이 이미 조조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두려워 강하(江夏)로 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노숙은 당양의 장판파까지 가서 유비와 대면한다.

노숙은 강동이 강대하고 견고하다며 손권의 의향을 전하고 유비와 동맹을 맺어 조조와 대치할 것을 진언했고 유비는 크게 기뻐했다. 또한 유비와 동행한 제갈량에게 자신이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의 친구임을 밝히며 친교를 맺었다. 유비가 하구에 이르자 제갈량은 사자를 자청했고 유비는 제갈량을 사자로 삼아 노숙에게 동행시켜 손권에게 보낸다.

노숙은 제갈량과 동행하여 손권에게 귀환한다. 우선 제갈량이 일부러 손권을 도발해 손권의 마음을 격동시킨 이후 강노지말의 고사를 들어 실은 조조군이 별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조조를 물리치면 형주와 의 땅이 정족의 형세를 이루게 된다는 말로 손권의 전의를 돋구었다.[5] 이후 손권은 조조가 강동으로 침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 장수들과 상의를 했는데 이미 항전으로 결정된 손권의 마음과 달리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자고만 한다. 노숙은 혼자 침묵하고 있다가 손권이 옷을 갈아입으러 뒷간으로 가자 처마 아래까지 쫓아 갔다. 노숙의 마음을 눈치챈 손권은 노숙의 손을 잡고 생각을 물었더니, 노숙은 손권은 자신과 달리 조조에게 항복해도 몸 둘 곳이 없다고 말하고 항복론에는 손권에게 이익이 남지 않음을 논하였다.[6] 손권은 사실은 항복론에 실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털어놓고 노숙의 존재를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칭하게 된다.[7][8]

주유는 사자로 파양에 있었으나, 노숙은 손권에게 진언하여 주유를 불러들이도록 권하였다.[9] 파양에서 귀환한 주유도 항전을 주장했고 마침내 주유의 의견을 통해 오나라의 의중은 전쟁으로 결정난다.[10] 어쨌거나 손권은 주유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노숙을 찬군교위(贊軍校尉)로 임명하여 보좌하도록 했다.

이후 적벽대전의 대승으로 손권은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노숙을 영접하게 했다. 노숙이 궁전으로 돌아와 손권을 알현하려고 하자 손권은 일어나 그에게 예의를 다하며 "장졸과 군신들 앞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직접 말에서 내리도록 하면 그대의 공에 보답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아닙니다. 전하께서 천하를 얻으시고 천자의 신분으로 절 맞이하여 죽백[11]에 기록하게 해 주신다면 그때 만족하겠습니다."라고 천하포무의 뜻을 펼치며 함께 웃는다.

유비는 형주 남부의 4군인 무릉, 장사, 계양, 영릉을 조조로부터 빼앗았고, 공안(公安)도 손에 넣었다. 후에 유비가 경구로 와서 손권을 보고, 형주를 관할하기를 구했을 때 주유와 여범은 손권에게 유비를 묶어두라고 권한다. 그러나 오직 노숙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손권에게 권유했다. 손권은 노숙의 말을 들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 위나라에도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소식이 들어가는데 이런 엄청난 사실을 들은 조조는 편지를 쓰고 있다가 들고 있던 붓을 떨어트리기까지 했다.[12]

서천유장의 기강이 쇠퇴해지자 주유와 감녕은 손권에게 을 취하도록 권했다. 손권은 유비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유비는 속으론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하려고 엿보고 있어서 서천 정벌을 반대한다.
"저와 유장은 똑같이 한종실이며, 선조의 영령에 기대어 한왕조를 보좌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지금 유장은 당신들에게 죄를 지었고, 저는 매우 두렵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관대하게 용서 해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만일 저의 청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저는 관직을 버리고 산림 속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주유는 손유와 함께 서천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병에 걸려 실행하지 못한다.

2.4. 익양대치

병으로 사망한 주유는 유언으로 노숙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손권은 노숙을 분무교위로 임명하고 주유의 병사 4천 명과 영지로 4현을 노숙에게 줬다. 정보(程普)가 남군태수로 임명되는 한편, 노숙은 강릉(江陵)에 주둔했으나 이윽고 육구로 주둔지를 옮겼다.

<여몽전>에 따르면 노숙이 육구로 진지를 옮기는 도중에 평소 어리석다고 경시하던 여몽을 방문했는데 이전과 다르게 똑똑해진 여몽에게 거꾸로 계략 지도를 받게 되어 감탄했다. 그리곤 여몽의 어머니에게 절하고 우호를 맺었다. 지방에서도 노숙의 훌륭한 정치로 병사는 1만 명 정도로 증강되었고 노숙은 한창태수, 편장군이 되었다.

214년엔 손권을 따라 환성 전투에도 참전했고 횡강장군이 되었다.

이후 유비유장의 익주를 침공하고 형주에는 관우를 남겨 지키게 했다. 종친이라서 공격하지 못한다는 이전의 말과 다르니 손권은 노해서 말한다.
교활한 늙은이가 감히 속이다니.
형주에선 노숙과 관우가 경계를 인접하게 되자 경계 지역에서 종종 분쟁이 일어났는데 노숙은 항상 우호적으로 분쟁을 가라 앉혔다.

<여대전>에 따르면 안성현의 장 오탕과 중랑장 원룡이 관우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손권이 파견한 노숙이 유현의 오탕을 격파하고 여대는 예릉의 원룡을 참수시켜 반란을 평정한다.

유비가 익주를 얻자 손권은 제갈근을 사자로 보내 형주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유비는 거절했다. 그러자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무력으로 삼군을 빼앗게 했고 장사와 계양이 함락된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자 직접 공안으로 돌아왔고 관우를 익양에 파견한다. 노숙군은 관우군과 대치하는데 <감녕전>에 따르면 노숙은 감녕의 건의를 받아들여 감녕으로 하여금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다.

노숙은 관우와 일대일로 대면을 요구하였다. 관우도 그에 따라 각각의 병마를 100리 떨어지도록 하고 서로 호신용 검 한 자루씩만 지니고 회담에 임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칼 하나만 가지고 회장에 참석한다고 하여 단도부회라는 대장부의 패기(?)를 나타내는 고사성어가 생겼다.[13]

관우가 "오림의 전역에서는 좌장군(유비)은 군중에 몸을 두시고, 주무실 때에도 갑주를 풀지 않으셨으며, 협력하여 를 격파하였던 것이오. 어찌 우리가 고생한 것을 무로 돌려 한 뼘의 땅이라도 빼앗길 수 있겠으며, 족하는 무슨 연유로 토지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오?"라고 말하자 노숙이 다음과 같은 사항을 말했다.

관우는 이에 어떤말로 대꾸하지도 못했다. 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있던 한 이름이 없는 장수[14]가 "천하는 덕있는 사람의 땅인데 어찌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라고 말했다. 노숙이 절절하게 큰 소리로 질타하니 관우는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어찌 알겠소!"라며 눈빛으로 이 사람을 쫓아버린다. 회의가 파탄 난 후 조조가 장로한중을 얻자 둘은 어쩔 수 없이 화친하고 상수로 형주를 분할한다. 결국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 형주 3군을 손오에 할양해주고 남군, 무릉, 영릉을 완전히 소유하에 두었다.

2.5. 죽음

《오서》에 따르면 노숙의 사람됨은 근엄하여 겉을 꾸미지 않았고, 공사에 걸쳐서 검약에 힘썼고, 저속한 취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군세를 통솔하는 때에도 질서있고 금령은 반드시 시행되게 하였고, 진중에서도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맨 위의 사진에도 군복을 입고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나와 있다) 또한 담론에 뛰어났고, 문장 솜씨도 뛰어났으며, 사려는 원대하여 다른 이의 배나 되는 총명함을 갖고 있었다. 주유 이후의 세대에서는 노숙이 제일가는 인물이었다.

노숙은 217년에 45세로 사망했다. 손권은 애도하고 장례식도 직접 참가하였다. 또 제갈량 역시 그의 죽음을 사흘 동안이나 슬퍼했다고 한다.

<엄준전>에 따르면 손권은 노숙의 후임으로 처음엔 학자인 엄준을 기용할 생각이었으나, 엄준이 학문에 열중한다며 사양해서 여몽을 후임으로 기용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여몽이 군권을 이어받음으로써 촉한과 손오의 관계는 형주를 쟁탈하며 파탄이 나 결국 양국의 존망을 걸고 대전쟁을 치르게 된다.

2.6. 사후

손권은 후에 황제가 된 뒤 "옛날 노자경(노숙)은 일찍이 내가 제위에 오를 것을 말했는데 그는 형세의 변화에 밝았다고 할 수 있소."라고 말하며 노숙은 이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하며 다시 경의를 표했다.

《유명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손권이 어느 날 병에 걸렸는데 무당이 와서 말하길 비단 두건을 쓴 장군 귀신이 나타났기에 물러나라고 소리쳤으나 궁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날 밤 손권은 죽은 노숙의 귀신을 봤는데 무당이 말한 옷차림 그대로였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의 대표적인 피해자. 제갈량이 육전은 노숙이 뛰어나다며 노숙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나 노숙이 도독이 되어 관우와 대치하는 등 상술했듯이 문사의 이미지로 오인되기도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제갈량을 죽이려 들 때마다 힘써 말리며 왠지 주유와 제갈량의 머리 싸움 사이에 끼인 다소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연의의 허구로 실제 노숙은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본격적인 나관중의 제갈량 원맨쇼가 시작되기 전에는 대부분의 행적이 정사와 부합된다. 연의에서도 정사와 같이 지균상증의 고사와 등장, 탑상책, 그가 먼저 유비 진영에 가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하고 제갈량이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15] 연의에선 손권과 주유를 설득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제갈량의 공로로 되어 있지만 실제론 제갈량, 노숙, 주유 이 삼인방이 동시에 손권을 설득했고 어쨌든 결정적으로 모두를 납득시킨 건 손오의 군권을 가진 주유였다.

연의에서는 이미 유비가 패한 이후에 사자로 가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노숙이 연의에서는 강하에서 유비 일행을 만나는 게 그런 연유에서다.

즉 노숙의 경우 제갈량이 손오에 오고 적벽대전이 시작되면서 기이하게 캐릭터가 어수룩해지는 셈인데 이걸 교묘하게 은근히 캐릭터성을 조금씩 바꿔서 처음엔 정사 행적대로 행하는데도 나중가면 원래부터 어리숙한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관우가 손권의 관솔을 내쫒은 것은 동일하지만 익양대치 사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질 않는다. 단도회는 형주를 탈환하고 관우에 이에 응하지 않을 시 관우를 죽이려는 노숙의 책략으로 각색된다. 실제 정사에서도 단도회 자체는 일단 노숙 쪽이 먼저 제의하고 관우가 참여한 게 맞고 나눈 대화 자체도 의외로 연의에서도 비슷하다. 관우가 "오림의 전쟁은 좌장군께서 친히 시석을 무릅쓰시고 협력하여 적병을 깨부수었거늘 어찌 헛수고만 하고 한 척의 땅도 가질 수 없겠소? 이제 족하께서 다시 땅을 찾으러 오신 것이오?"라고 하자 노숙이 그에 대해서 정사와 비슷하게 "우리 주군께서 장판에서 격파된 유황숙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런식으로 말씀하십니까?"이라는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화답하지 못하는 사이 주창(정사에선 이름없는 장수)이 정사와 같은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호통을 쳐 물러나게 하는 것까지는 거의 같다.

다만 여기부터 나관중이 관우를 띄워주고 노숙을 비참하게 만드는 각색이 나오는데 원래 노숙이 연회장에 복병을 숨겨두었는데 회담 도중 끼어든 주창을 관우가 참견한다며 쫓아버리자 주창은 기회를 틈 타 연회장을 빠져나와 미리 대기시킨 관평 등에게 연락하여 배를 접응토록 한다. 관우는 술주정을 빙자, 노숙을 붙잡고 인질극[16]으로 빠져나오고 복병들은 노숙이 다칠까봐 감히 움직이지 못하여 계략은 실패하는데 이에 노숙과 여몽은 관우를 칠 것을 결의하고 손권 역시 격노하여 관우를 치려다가 조조의 침공으로 그만둔다. 이후 조조가 장로를 쳐서 한중을 점령하자 유비 측이 이를 두려워해 강하, 장사, 계양을 양도한다는 큰 줄기 자체는 정사와 같다.[17]

사실 여기나온 몇몇 각주나 내용을 보면 정사의 언행이 연의에 꽤 많이 반영되어 있는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내용들을 보여주고도 연의에선 어리숙한 인물로 보이게 된 것은 계교와 무력으로 작은 이익을 다투지 않고 손해보듯이 대국적으로는 대의를 취하는 것을 존중하였던 중국인들의 덕에 대한 관념이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온화하고 고매한 성품 덕분에 과거부터 손오의 명사 중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을 수 있었다.[18] 역사를 대체로 고증하면서도 촉한의 정당성에 더 비중을 쏠리게 부여하며 덤으로 노숙을 폄하시키지 않고 그의 캐릭터성까지 한편으로는 띄워주기까지 하면서 적절히 연출시킨 삼국지연의의 나름 명각색이라 할 수 있는데 다만 실리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되려 그러한 노숙이 영 어리숙하게 보이는 부작용이 커져버린 것.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관로의 예언의 희생양이 되었다. 조조좌자에게 농락당해 있을 때 관로가 그의 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조조가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손오와 촉한에 대해 점을 쳐 주시오."라고 하자 관로는 점을 치고는 "오나라는 장수 한 명을 잃을 것이며, 촉한에서는 경계를 침범해 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노숙 사망. 물론 이 사망 플래그 이야기는 연의의 허구다.[19]

4. 평가

<여몽전>에 따르면 훗날 손권육손에게 주유, 노숙, 여몽을 회고하며 평하길,
"공근(주유)은 웅렬(雄烈)하고 담력과 재략이 남들보다 뛰어나 마침내 맹덕을 격파하고 형주를 개척하여, 멀리 그를 잇기 어려웠는데, 그대가 지금 그의 뒤를 잇고 있소. 공근은 예전에 자경(노숙)이 동으로 오기를 기다려, 나에게 오도록 해서 내가 연회에서 얘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곧바로 대략 제왕의 기업에까지 미치었으니, 이것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이었소.

후에 맹덕유종의 세력을 얻을 것을 기회로 막 수십만의 보병과 수병이 함께 (동오로) 내려온다고 과장해 말했소. 내가 널리 여러 장수들을 청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자문했는데, 먼저 대책을 적절히 말하는 자가 없었고, 자포(장소)와 문표(진송)에 이르러선 의당 사신을 보내 격문을 받아 영접해야 한다고 같이 말했으나, 자경은 불가하다고 반박하며 나에게 급히 공근을 불러 대임을 맡겨 거꾸로 쳐야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유쾌한 일이었소.

또 그 결정한 계책은 장의소진을 멀리 넘는 것이었소. 훗날 비록 나에게 현덕(유비)에게 땅을 빌려주라고 권했으나, 이것은 한 가지 단점 일뿐, 그의 두 가지 장점을 훼손하기엔 부족했소. 주공(周公)은 한사람에게서 완비함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내가 그 단점을 잊고 장점을 귀히 여겼고, 항상 (노숙을) 지금의 등우(鄧禹)[20]에 비견했소.

또 자명(여몽)이 젊을 때, 나는 (그가) 아주 힘든 일도 사양치 않고, 과감하여 담력이 있을 뿐이라 생각했소. 나중에 장성하니 학문은 더욱 열리고 늘어나 지략이 기이한데까지 이르렀으니, 공근에 다음간다고 할 수 있고, 다만 언변의 뛰어남이 (공근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오. 관우를 취하는 것을 도모함은 자경보다 나았소. 자경은 나에게 답서를 보내길 제왕이 흥기함에 모두 구제(驅除)함이 있었으니, 관우는 꺼릴 바가 못됩니다라 했는데, 이것은 자경이 안으로는 능히 갖출 수 없었으면서 밖으로 큰소리 친 것일 뿐이며, 나 또한 용서하고 책망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가 군영을 지음에는 둔영에는 실수가 없고, 군령은 금지사항들이 실행되고, 부대 경계에서는 군령을 폐하는 자가 없고, 길에 떨어진 것조차 줍지 않게 했으니, 그의 법 또한 아름다웠소."
여몽전
라고 평했다.

<여범전>에 주석으로 달린《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황제가 된 이후 연회에서 엄준에게 자신이 이전에 노숙을 등우에 비교하고 여범을 오한에 견주었던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엄준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신(臣)은 아직 그 취지를 이해할 수 없는데, 노숙과 여범이 총애를 받는 것은 두터우며, 실질 이상의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손권은 "등우는 광무제에게 의 대업을 회복시키도록 부하 중에서 처음으로 권해서 제왕의 뜻이 없던 광무제가 황제까지 되었다. 노숙은 능력도 있었던 데다가 노숙이 맨 처음 말했던 나에게 제왕이 되라했던 것이 이루어져 내가 황제까지 되었으니 등우랑 닮은 것이다. 그리고 여범은 비록 사치스러웠지만 충성스럽고 곧고 형(손책) 휘하에서 열심히 일했으니 오한과 견준 것이다. 그들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호하자 엄준이 알겠다고 따른다.

주유와 함께 손오의 창업에 가장 많이 기여한 인물로 노숙이 도독이 되어 관우와 대치하는 등의 무관의 모습이 조금 나오긴 하지만, 그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모습은 없는 반면에 촉한와의 외교와 관련된 일에서 주로 활약하기 때문에 문사(文士)의 이미지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숙은 군무와 관련된 관직에 종사했었고, 주유 사후 도독이 되어 전군을 통솔한 문무겸비의 장군이다. 자신의 무용을 보여주기 위해 활을 쏘아 방패를 관통시켜 추격군들을 물러나게 한 일화도 있는데 여포원문사극이 정확도를 과시한 일화라면 노숙이 방패를 관통시킨 것은 용력을 과시하는 일화라 할 수 있다.[21]

즉 부자에다가 성품 좋고 활 잘쏘고 외교도 잘하고 주유와 더불어 의 대전략을 세운 인물로, 중국에서는 노숙의 진언을 탑상책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침대 위에서의 계책. 노숙이 손권에게 침대맡에서 진언을 했다는 데에서 유래.

주군짐승으로 비하한 동맹 세력의 대강경파를 말로써 제압하는 기개와 언변을 갖춘 대전략가. 주적을 그 누구보다 선명히 알고 대세를 꿰뚫었던 통찰력과 동맹국과의 분쟁을 미연에 차단하는 외교적 방침을 설계하는 기획력은 역대 대도독들을 압도했다. 적벽대전의 주유, 번성 공방전의 여몽, 이릉대전의 육손의 비하면 포스가 조금은 떨어져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무릇 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사전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게 하면서도 전략적으로 국익을 도모하는 것이 최상책이다.[22] 노숙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유비와 강동의 우호를 주도하여 늘 우위를 점했으며 관우조차 어찌할 수 없는 능력과 권위와 강동의 강경파를 제어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다.

정사에서 관우가 보였던 행보를 생각해보자면, 이미 노숙 시기에 익양대치처럼 전쟁 직전까지 갔던 일도 있었고 관우는 파견된 손권의 관리를 내쫒을 정도로 손오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사실 손권의 말마따나 노숙은 관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익양대치 때 노숙과 관우의 문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숙은 관우를 눌러 유손동맹이 흔들리지 않게 할 정도의 권위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단도회에서 노숙이 든 명분으로 사실관계를 명확히 따졌을때, 관우가 별 말 없이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건 노숙이 말한 것을 반박이 불가능했기 때문인 것도 있으나, 관우가 평소 손오 인사들에게 오만무례 했을것을 감안해보면 그간 양측의 관계를 꾸준히 제어해 온 노숙이 가진 권위가 그만큼 컸고 이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다만 손권은 노숙이 형주를 제대로 도모하지 못하고 형주를 다시 되돌려 받지 못했음은 아쉬운 점이라고 솔직하게 평가했다.

그의 친구인 제갈근이 240년대까지 살았고 노숙과 뜻을 같이해 그의 사후 촉한-손오 동맹을 재건한 제갈량도 234년까지는 살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감이 없지 않아 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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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帝燭曹奸(부제촉조간) : 황제를 도와 조조가 간웅임을 밝혔으니,
所見在荀彧上(소견재순욱상) : 그것을 보면 순욱의 모습이 있으며
侍吳亲漢胄(시오친한주) : 오를 받들어 한의 혈통과 친하게 지내니,
此心與武侯同(차심여무후동) : 이 마음은 무후(제갈량)와 같도다.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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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후이성 추저우시 딩위안현[2] 손가 3대를 섬긴 정보(程普)와는 동명이인.[3] 정작 유엽은 훗날 이 정보를 베어 죽인다.[4] 애초에 유표 시절에 원술의 부탁 때문에 손견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 때문에 손책이 요절했을 때도 문상객을 보내지 않았다. 제갈량은 이 점을 지적하며 '대대로 원수관계인데 조문은 무슨, 탐색이 뻔하다'라며 꿰뚫어본다.[5] 흥미로운 건 제갈량이 이때 이미 천하삼분지계를 손권에게 말했다는 것인데 노숙 역시 오나라가 형주의 인심을 얻지 못해 소유하긴 어렵다고 보고 이후에 유비에게 형주 남군땅을 대여해서 조조와 맞서게 하자는 말을 손권에게 한다. 여러모로 대전략 부분에서 생각이 같았던 노숙과 제갈량 두 사람의 말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6] 유종은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했으나 사실 전국시대에서 진나라에 항복한 제나라의 왕건과 조유목왕의 말로를 보면 항복은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7] 참고로 위서와 구주춘추에는 노숙이 손권에게 일부러 항복을 권하며 도발했고 손권이 자신을 베려고 했다는 것을 갈파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지만 배송지는 이를 부정했다. 아마도 제갈량이 손권을 도발한 기록하고 헷갈린 듯.[8] 이것도 정사와 연의랑 거의 비슷한 대목이다. 단 연의에선 노숙이 제갈량보다 먼저 말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심지어 노숙의 존재를 하늘이 내려준 거라고 손권이 응대하는 부분까지 그대로 따왔다.[9]삼국지연의》에서는 오국태언니의 말을 손권에게 상기시켜서 주유를 부르게 한다.[10] 주유가 정사에서 했던 말은 연의에서 쓰인 대사와 거의 동일하다.[11] 대나무와 비단으로 종이 이전의 기록물. 즉 사서. 손권이 천하통일의 군주가 되어 노숙 자신을 통일 중화제국 개국군주개국공신로써 역사에 길이 전하게 해달라는 의미로 노숙의 웅지, 그리고 나름 손권을 고무 격려하는 커다란 포부이다.[12]삼국지연의》에서 정욱은 유비를 형주에 놓고 조조를 막게 하는 것뿐이지 실제로 유비와 손권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것을 간파해내지만 연의의 허구다.[13] 《오서》에 따르면 노숙의 부하들이 노숙에게 위험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만류했지만 노숙은 유비가 나라의 일을 맡았으면서 시비도 제대로 못가렸는데 어찌 관우가 이 명령을 어기겠냐며, 서로 뱃속의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무시한다. 노숙의 대범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14]삼국지연의》에서는 주창이 말한다.[15] 의외로 이 대목에서 정사와 연의를 비교하면 노숙이 실제 역사상 장판파로 가는 거 빼곤 정사와 연의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노숙이 제갈량에게 형과 친구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유비가 오거(연의에선 오신)한테 의탁하려 한다고 말하는 부분도 비슷하다. 왜 오나라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 노숙이 설파하는 논리도 정사 내용과 거의 비슷한 편. 물론 제갈량이 손오로 건너간 이후로는 거의 제갈량 원맨쇼다.[16] 상황 자체가 일부러 노숙에게 접근해서 술주정을 빙자해 끌고 나오는데 관우가 대놓고 큰 칼의 손잡이를 손에 쥐고 노숙을 해할 거 같으니 여몽과 감녕이 나서지 못했다.[17] 연의에서 역시 노숙의 논리가 관우의 그것보다 더 이치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연의에서 유비군은 적벽, 남군공방전에서 한 거 별로 없고 순전히 날로 먹었기 때문에 연의에서 관우의 논리는 그냥 말도 안 되는 개드립에 가깝다. 당장 연의에선 유비가 오림은커녕 강하 번구에서 제갈량이랑 신선놀음 하고 있었고 실제 오림에 있던 건 조운인데 그냥 관우가 완전 헛소리한 것. 아마도 정사에 있는 말을 복사 붙여넣기 그대로 옮기다보니까 연의의 바뀐 정세와 설정충돌로 오류가 생겨 관우가 하는 말이 영 이상해진 듯하다.[18] 실재로 지금까지도 노숙이 다소 어수룩하다고 평을 할지언정 절대로 사람 됨됨이가 나쁘다고 비난 받지는 않는다.[19] 관로는 이 당시 아예 어린아이였다.[20] 후한 광무제를 도와 후한 창업을 도운 인물.[21] 화살로 방패를 꿰뚫는 건 웬만한 장력의 활로는 힘들며 그만큼 장력이 강한 강궁을 당겼다는 말이니 그 정도로 노숙의 용력이 굉장했음을 보여준다. 후임인 여몽과 비견할 수 있겠다.[22] 다만 아무래도 화려한 공적에 비하면 노숙의 그 공이 중요하지만 영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음을 주장할 때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정황뿐인데, 이는 일어난 일을 수습한 결과물에 비하면 변동성이 크고 입증하기도 어렵다.[23] 웨양현에는 태사자 묘라든지 여러 삼국지 유적이 남아있다.[24] 뛰어난 인물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세운 일종의 문짝 없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