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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8b0000><colcolor=#ece5b6> 손오 강릉후 승상 육손 陸遜 | |
| | |
| 성씨 | 육(陸) |
| 휘 | 손(遜) |
| 자 | 백언(伯言)[1] |
| 출생 | 183년 |
| 후한 양주(揚州) 오군(吳郡) 오현(吳縣) | |
| 사망 | 245년 2월 (향년 63세)[2] |
| 손오 | |
| 재임 기간 | 손오 승상 |
| 244년 ~ 245년 2월 | |
| 시호 | 소후(昭侯) |
| 작호 | 화정후(華亭侯) → 누후(婁侯) → 강릉후(江陵侯)[3] |
| 최종 직위 | 승상(丞相) |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이자 정치가. 강동의 대족인 오군 육씨 출신으로 손책의 사위이며, 손권에게는 조카사위가 된다. 이릉대전에서 유비를, 석정 전투에서 조휴를 크게 격파했고, 형주목과 상대장군을 거쳐 244년 승상에 올랐다. 그러나 후계 분쟁에서 태자 손화를 지키려다 손권의 거듭된 문책을 받고 이듬해 분사했다. 그럼에도 아들 육항과 그 자손들은 이후에도 오나라에 충성을 다했다.본명은 육의(陸議)다.[4] 자는 백언(伯言). 아내는 손씨, 아들은 육연과 육항, 동생은 육모.
송나라 때 저술된 『십칠사백장전』, 명나라 때 저술된 『광명장전』에서 아들 육항과 함께 중요한 명장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육씨는 오의 사성으로 꼽히는 강동의 대족이다.[5] 《육씨세송》에 따르면 조부 육우(陸紆)는 학문에 힘써 성문교위를 지냈고, 아버지 육준(陸駿)은 인품이 순후해 고향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벼슬은 구강도위에 이르렀다.[6]육손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종조부인 여강태수 육강의 임지에서 자랐다. 원술이 육강과 사이가 틀어져 공격하려 하자, 육강은 육손과 친척들을 오군으로 돌려보냈다. 육손은 육강의 아들 육적보다 몇 살 위였으므로 어린 육적을 대신해 집안을 이끌었다.[7]
원술이 군수품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육강은 원술을 역적으로 여겨 거절했고, 원술은 손책을 보내 여강을 치게 했다. 육강은 2년을 버텼으나 성이 함락되었고, 그 뒤 한 달 남짓 지나 70세로 병사했다. 육씨 종족 백여 명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굶주림과 난리 속에 죽었다.[8] 육손으로서는 종가를 무너뜨린 장본인이 손책이었던 셈인데, 육손은 뒷날 그 손책의 딸과 혼인하게 된다.
203년, 21세의 육손은 장군 손권의 막부에 처음으로 출사했다. 동조·서조의 영사를 거쳐 해창(海昌)의 둔전도위가 되어 현의 일까지 함께 맡았다. 해창현에 여러 해 가뭄이 들자 육손은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했으며, 백성들은 그 덕을 입었다.[9]
당시 오군, 회계군, 단양군에는 산속에 숨어 사는 무리가 많았다. 육손은 이들을 모집하게 해 달라고 청했고, 손수 모은 병력으로 회계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산적 두목 반림을 토벌했다. 이로써 육손이 거느린 부곡은 2천여 명이 되었다. 이어 파양의 도적 우돌(尤突)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정위교위(定威校尉)가 되어 이포(利浦)에 주둔했다.[10]
〈하제전〉에 따르면 이 일은 216년의 일이다. 파양 사람 우돌이 조조의 인수를 받고 백성을 꾀어 도적으로 만들자 능양·시안·경현이 모두 이에 호응했다. 하제와 육손은 우돌을 격파해 수천 명을 베었고, 단양의 세 현이 항복해 정예병 8천 명을 얻었다. 하제는 이 공으로 안동장군이 되고 산음후에 봉해졌다.[11]
2.2. 손씨와의 혼인과 산월 토벌
손권은 형 손책의 딸을 육손에게 시집보내고 자주 세상일을 물었다.[12] 손책에게 몰락한 오군 육씨를 끌어안으려는 혼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3]이때 육손은 산월을 토벌해 그 무리를 병력으로 흡수하자고 건의했다.
지금 영웅들이 바둑돌처럼 맞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가 틈을 엿보고 있으니, 적을 이기고 난리를 평정하려면 많은 병력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산적들이 오랜 악행을 일삼으며 깊은 땅에 기대어 있습니다. 배와 가슴이 평정되지 않으면 멀리 도모하기 어려우니, 크게 부대를 편성해 그 정예를 뽑아야 합니다.
方今英雄棊跱,豺狼闚望,克敵寧亂,非眾不濟。而山寇舊惡,依阻深地。夫腹心未平,難以圖遠,可大部伍,取其精銳。
《삼국지》 〈오서 육손전〉
方今英雄棊跱,豺狼闚望,克敵寧亂,非眾不濟。而山寇舊惡,依阻深地。夫腹心未平,難以圖遠,可大部伍,取其精銳。
《삼국지》 〈오서 육손전〉
손권은 이를 받아들여 육손을 장하우부독(帳下右部督)으로 삼았다. 마침 단양의 도적 두목 비잔(費棧)이 조조의 인수를 받고 산월을 선동해 내응하려 하자, 손권은 육손을 보내 토벌하게 했다. 비잔의 무리는 많고 육손의 병력은 적었다. 육손은 깃발을 늘리고 북과 나팔을 곳곳에 배치한 뒤 밤에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나아갔고, 비잔의 무리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흩어졌다.[14]
이어 육손은 동쪽 세 군에서 부대를 편성해 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약한 자는 민호에 편입시켜 정예병 수만 명을 얻었다. 오랜 도적이 소탕되어 군대가 지나간 곳마다 안정되었고, 육손은 돌아와 무호(蕪湖)에 주둔했다.[15]
회계태수 순우식이 육손이 백성을 함부로 데려가 고을을 소란스럽게 한다고 표를 올렸다. 그런데 육손은 뒤에 도성에 가서 손권과 이야기하던 중 순우식을 훌륭한 관리라고 칭찬했다. 손권이 "순우식이 그대를 고발했는데 그대는 그를 천거하니 어째서인가?" 하고 묻자 육손은 이렇게 답했다.
순우식은 백성을 기르려는 뜻에서 저를 고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순우식을 헐뜯어 성상의 귀를 어지럽힌다면, 이는 키워서는 안 될 풍조입니다.
式意欲養民,是以白遜。若遜復毀式以亂聖聽,不可長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式意欲養民,是以白遜。若遜復毀式以亂聖聽,不可長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손권은 "이는 참으로 덕 있는 사람이나 할 일이니, 남들은 하지 못한다(此誠長者之事,顧人不能為耳)"고 감탄했다.
2.3. 형주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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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번성 공방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219년, 여몽이 관우를 방심하게 하려고 병을 핑계로 건업으로 내려오자 육손이 찾아가 "관우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데 어찌 멀리 내려오셨습니까? 뒷일이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여몽이 "말씀대로지만 병이 깊습니다"라고 하자 육손은 이렇게 말했다.
관우는 제 용맹을 믿고 남을 업신여깁니다. 처음으로 큰 공을 세워 뜻이 교만하고 방자해져 북쪽으로 나아가는 데만 힘쓰고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데, 장군이 병들었다는 소식까지 들으면 더욱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그 뜻하지 않은 곳을 치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지존을 뵙거든 잘 계책을 세우십시오.
羽矜其驍氣,陵轢於人。始有大功,意驕志逸,但務北進,未嫌於我,有相聞病,必益無備。今出其不意,自可禽制。下見至尊,宜好為計。
《삼국지》 〈오서 육손전〉
羽矜其驍氣,陵轢於人。始有大功,意驕志逸,但務北進,未嫌於我,有相聞病,必益無備。今出其不意,自可禽制。下見至尊,宜好為計。
《삼국지》 〈오서 육손전〉
여몽도 같은 계책을 품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관우는 본래 용맹해 상대하기 어렵고, 이미 형주를 차지해 은혜와 신의가 널리 퍼진 데다 막 공을 세워 기세가 더욱 성하니 쉽게 도모할 수 없습니다"라고만 답했다.[16]
도성에 이른 여몽에게 손권이 그대를 대신할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여몽은 육손을 추천했다.
육손은 생각이 깊고 길며 중임을 감당할 재목입니다. 그 헤아림을 보면 끝내 큰일을 맡길 만합니다. 게다가 아직 이름이 멀리 알려지지 않아 관우가 꺼리는 인물이 아니니, 이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를 쓰신다면 밖으로는 스스로를 감추고 안으로는 형세를 살피게 하셔야 이길 수 있습니다.
陸遜意思深長,才堪負重,觀其規慮,終可大任。而未有遠名,非羽所忌,無復是過。若用之,當令外自韜隱,內察形便,然後可克。
《삼국지》 〈오서 육손전〉
陸遜意思深長,才堪負重,觀其規慮,終可大任。而未有遠名,非羽所忌,無復是過。若用之,當令外自韜隱,內察形便,然後可克。
《삼국지》 〈오서 육손전〉
손권은 육손을 불러 편장군 우부독으로 삼아 여몽을 대신하게 했다. 〈여몽전〉에 따르면 손권은 여몽을 불러들이는 격문을 일부러 드러내 놓고 몰래 함께 계책을 세웠다.[17]
육구에 도착한 육손은 관우에게 편지를 보냈다.
앞서 장군께서 틈을 보아 움직이고 법도에 따라 군사를 부려, 작은 거병으로 크게 이기셨으니 어찌 그리 높으십니까! 적국이 패한 것은 동맹에 이로운 일이라, 경사를 듣고 손뼉을 쳤습니다. 이대로 석권해 함께 왕실의 기강을 받드시리라 생각합니다. 근래 제가 재주 없이 명을 받아 서쪽으로 왔으니, 장군의 풍채를 우러르며 좋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前承觀釁而動,以律行師,小舉大克,一何巍巍!敵國敗績,利在同盟,聞慶拊節,想遂席卷,共獎王綱。近以不敏,受任來西,延慕光塵,思稟良規。
《삼국지》 〈오서 육손전〉
前承觀釁而動,以律行師,小舉大克,一何巍巍!敵國敗績,利在同盟,聞慶拊節,想遂席卷,共獎王綱。近以不敏,受任來西,延慕光塵,思稟良規。
《삼국지》 〈오서 육손전〉
또 이렇게 썼다.
우금 등이 사로잡히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기뻐하고 탄복하며, 장군의 공훈은 길이 전해지기에 족하다고 여깁니다. 옛날 진문공의 성복 싸움이나 회음후(한신)가 조나라를 쳐 빼앗은 계략도 이보다 낫지는 않습니다. 듣자니 서황 등이 적은 기병을 거느리고 진을 쳐 장군의 깃발을 엿보고 있다고 합니다. 조조는 교활한 적이라 분한 마음에 어려움을 헤아리지 않고 몰래 병력을 늘려 뜻을 이루려 할까 두렵습니다. 비록 군대가 지쳤다고는 하나 아직 사나운 장수들이 있습니다. 또 싸움에 이긴 뒤에는 늘 적을 가볍게 보는 병폐가 있으니, 옛사람들은 병법에 따라 이길수록 더욱 경계했습니다. 장군께서 널리 계책을 세워 홀로 거둔 승리를 온전히 지키시기 바랍니다. 저는 서생이라 엉성하고 굼떠 감당하지 못할 자리를 욕되이 맡았는데, 위엄과 덕망을 갖춘 분과 이웃하게 되어 기쁜 마음에 제 뜻을 다 기울이고자 합니다. 비록 장군의 계책에 맞지 않더라도 마음만은 헤아려 주십시오. 밝게 살펴 주신다면 제 뜻을 아실 것입니다.
于禁等見獲,遐邇欣歎,以為將軍之勳足以長世,雖昔晉文城濮之師,淮陰拔趙之略,蔑以尚茲。聞徐晃等少騎駐旌,闚望麾葆。操猾虜也,忿不思難,恐潛增眾,以逞其心。雖云師老,猶有驍悍。且戰捷之後,常苦輕敵,古人杖術,軍勝彌警,願將軍廣為方計,以全獨克。僕書生疏遲,忝所不堪,喜鄰威德,樂自傾盡,雖未合策,猶可懷也。儻明注仰,有以察之。
《삼국지》 〈오서 육손전〉
于禁等見獲,遐邇欣歎,以為將軍之勳足以長世,雖昔晉文城濮之師,淮陰拔趙之略,蔑以尚茲。聞徐晃等少騎駐旌,闚望麾葆。操猾虜也,忿不思難,恐潛增眾,以逞其心。雖云師老,猶有驍悍。且戰捷之後,常苦輕敵,古人杖術,軍勝彌警,願將軍廣為方計,以全獨克。僕書生疏遲,忝所不堪,喜鄰威德,樂自傾盡,雖未合策,猶可懷也。儻明注仰,有以察之。
《삼국지》 〈오서 육손전〉
관우는 육손의 편지를 보고 몸을 낮춰 의탁하려는 뜻이 있다고 여겨 크게 안심하고 더는 경계하지 않았다. 〈여몽전〉에 따르면 관우는 차츰 병력을 빼서 번성으로 보냈다.[18] 육손은 이런 형세를 자세히 보고하고 관우를 사로잡을 요점을 진술했다. 손권은 몰래 군대를 거슬러 올려 보내며 육손과 여몽을 선봉으로 삼았고,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공안과 남군을 손에 넣었다.[19]
육손은 곧장 나아가 의도태수를 겸하고 무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화정후에 봉해졌다. 유비가 둔 의도태수 번우(樊友)가 군을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성의 관리와 만이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항복했고, 육손은 금·은·동 인장을 청해 새로 귀부한 이들에게 임시로 내려 주었다. 이때가 219년 11월이다.[20] 〈오주전〉에 따르면 육손은 따로 의도를 취하고 자귀·지강·이도를 얻은 뒤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며 협구를 지켜 촉에 대비했다.[21]
육손은 장군 이이와 사정에게 3천 명을 주어 촉의 장수 첨안(詹晏)과 진봉(陳鳳)을 치게 했다. 이이는 수군을, 사정은 보병을 이끌고 험한 요충을 끊어 첨안 등을 격파하고 진봉을 사로잡았다. 이어 방릉태수 등보와 남향태수 곽목을 공격해 크게 이겼다. 자귀의 대성 문포와 등개 등이 만이 병사 수천 명을 모아 촉과 손을 잡자, 육손은 다시 사정을 보내 이들을 격파했다. 문포와 등개가 달아나자 촉은 이들을 장수로 삼았는데, 육손이 사람을 보내 회유하자 문포는 무리를 이끌고 돌아와 항복했다. 앞뒤로 베거나 사로잡고 불러들여 받아들인 자가 수만에 이르렀고, 손권은 육손을 우호군·진서장군으로 삼고 누후로 올려 봉했다.[22]
《오서》에 따르면 손권은 육손의 공덕을 기려 특별히 드러내고자 했다. 육손은 이미 상장군이자 열후였지만, 손권은 그래도 본주(本州)의 벽소와 천거를 거치게 하고 싶어서 양주목 여범에게 육손을 별가종사로 벽소하고 무재로 천거하게 했다.[23]
당시 형주의 선비들이 새로 오나라에 들어왔지만 벼슬길을 얻지 못한 이도 있었다. 육손은 "지금 형주가 막 평정되어 인물들이 아직 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널리 은혜를 베풀어 모두 스스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사해가 목을 빼고 귀의하려 할 것"이라고 상소했고, 손권은 이를 공손히 받아들였다.[24]
2.4. 이릉대전
221년 7월, 황제를 칭한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내세워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선주전〉에 따르면 손권이 편지를 보내 화친을 청했지만 유비는 크게 노해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육의(육손)·이이·유아 등이 무현과 자귀에 주둔했는데, 오반과 풍습이 무현에서 이이 등을 격파하고 자귀까지 진출했다.[25]222년,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고 가절을 주어 주연, 반장, 송겸, 한당, 서성, 선우단(鮮于丹), 손환 등 5만 명을 지휘해 유비를 막게 했다. 유비는 무협과 건평에서 이릉 경계까지 수십 개의 둔영을 잇달아 세우고, 금과 비단과 작위로 여러 만이를 회유했다. 장군 풍습을 대독으로, 장남을 선봉으로 삼고 보광·조융·요순·부동 등을 별독으로 두었다.[26]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정월에 오반·진식의 수군을 이릉의 장강 양안에 주둔시키고, 2월에 직접 자귀를 떠나 이도의 효정에 진영을 쳤다.[27]
유비는 먼저 오반에게 수천 명을 주어 평지에 진영을 세우고 싸움을 걸게 했다. 장수들이 모두 치려 하자 육손은 "이는 반드시 속임수가 있으니 잠시 지켜보자"고 했다. 《오서》에 따르면 육손은 이렇게 설명했다.
유비는 군대를 일으켜 동쪽으로 내려와 날카로운 기세가 이제 막 성하고, 또 높은 곳을 타고 험한 곳을 지키니 갑자기 치기 어렵소. 친다 해도 다 이기기는 어렵고, 만약 불리하면 우리의 큰 형세를 해치니 작은 일이 아니오. 지금은 장병들을 격려하고 널리 방략을 펴면서 변화를 지켜보아야 하오. 이곳이 평원이었다면 엎치락뒤치락 쫓고 쫓기는 근심이 있었겠지만, 지금 저들은 산을 따라 행군해 형세를 펴지 못하니 나무와 바위 사이에서 저절로 지칠 것이오. 천천히 그 피폐함을 제압하면 될 뿐이오.
備舉軍東下,銳氣始盛,且乘高守險,難可卒攻,攻之縱下,猶難盡克,若有不利,損我大勢,非小故也。今但且獎厲將士,廣施方略,以觀其變。若此閒是平原曠野,當恐有顛沛交馳之憂,今緣山行軍,勢不得展,自當罷於木石之閒,徐制其弊耳。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인용 《오서》
備舉軍東下,銳氣始盛,且乘高守險,難可卒攻,攻之縱下,猶難盡克,若有不利,損我大勢,非小故也。今但且獎厲將士,廣施方略,以觀其變。若此閒是平原曠野,當恐有顛沛交馳之憂,今緣山行軍,勢不得展,自當罷於木石之閒,徐制其弊耳。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인용 《오서》
장수들은 육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육손이 겁을 낸다고 여겨 저마다 분한 마음을 품었다. 유비는 계책이 먹히지 않자 골짜기에 숨겨 두었던 복병 8천 명을 이끌고 나왔다. 육손은 "그대들이 오반을 치자는 청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반드시 꾀가 있으리라고 헤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28]
앞서 손환이 따로 이도에서 유비의 선봉을 치다가 포위되어 육손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육손은 아직 안 된다고 했다. 장수들이 "안동(손환)은 공족인데 포위되어 곤경에 빠졌으니 어찌 구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육손은 이렇게 답했다.
안동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고 성은 튼튼하며 식량도 넉넉하니 걱정할 것이 없소. 내 계책이 펼쳐지기를 기다리면, 안동을 구하려 하지 않아도 안동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이오.
安東得士眾心,城牢糧足,無可憂也。待吾計展,欲不救安東,安東自解。
《삼국지》 〈오서 육손전〉
安東得士眾心,城牢糧足,無可憂也。待吾計展,欲不救安東,安東自解。
《삼국지》 〈오서 육손전〉
〈문제기〉에 따르면 조비는 유비가 목책을 세워 7백여 리에 걸쳐 진영을 잇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어찌 7백 리에 걸친 진영으로 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평원과 습지와 험한 곳을 감싸 진을 치는 자는 적에게 사로잡힌다'고 했으니, 이는 병가에서 꺼리는 것이다. 손권의 보고가 곧 이를 것이다.
備不曉兵,豈有七百里營可以拒敵者乎!「苞原隰險阻而為軍者為敵所禽」,此兵忌也。孫權上事今至矣。
《삼국지》 〈위서 문제기〉
備不曉兵,豈有七百里營可以拒敵者乎!「苞原隰險阻而為軍者為敵所禽」,此兵忌也。孫權上事今至矣。
《삼국지》 〈위서 문제기〉
이레 뒤 유비를 격파했다는 손권의 글이 도착했다.[29]
육손은 손권에게 이렇게 상소했다.
이릉은 요충이자 나라의 관문이니 얻기도 쉽지만 잃기도 쉽습니다. 이곳을 잃으면 한 군의 땅을 잃는 데 그치지 않고 형주 전체가 위태로워집니다. 오늘 이곳을 다투는 데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유비는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거스르고 제 소굴을 지키지 않은 채 감히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신은 비록 재주가 없으나 폐하의 위엄에 기대어 순리로 역적을 치니, 격파할 날이 가깝습니다. 유비가 앞뒤로 군사를 부린 것을 살펴보면 실패는 많고 성공은 적었으니, 이로 미루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신은 처음에 그가 수륙으로 함께 나아올까 걱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배를 버리고 걸어서 곳곳에 진영을 쳤습니다. 그 배치를 살펴보니 다른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지존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시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夷陵要害,國之關限,雖為易得,亦復易失。失之非徒損一郡之地,荊州可憂。今日爭之,當令必諧。備干天常,不守窟穴,而敢自送。臣雖不材,憑奉威靈,以順討逆,破壞在近。尋備前後行軍,多敗少成,推此論之,不足為戚。臣初嫌之,水陸俱進,今反舍船就步,處處結營,察其布置,必無他變。伏願至尊高枕,不以為念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夷陵要害,國之關限,雖為易得,亦復易失。失之非徒損一郡之地,荊州可憂。今日爭之,當令必諧。備干天常,不守窟穴,而敢自送。臣雖不材,憑奉威靈,以順討逆,破壞在近。尋備前後行軍,多敗少成,推此論之,不足為戚。臣初嫌之,水陸俱進,今反舍船就步,處處結營,察其布置,必無他變。伏願至尊高枕,不以為念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장수들은 "유비를 치려면 처음에 쳤어야 했습니다. 이제 5~6백 리나 들어오게 해 서로 맞선 지 7~8개월이 지났고, 요충지마다 굳게 지키고 있으니 쳐 봐야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육손은 이렇게 답했다.
유비는 교활한 적이고 겪은 일도 많소. 그 군대가 처음 모였을 때는 생각이 치밀하고 한결같아 건드릴 수 없었소. 지금은 머문 지 오래되었는데도 우리의 틈을 얻지 못해 병사는 지치고 사기는 꺾였으며 새 계책도 나오지 않소. 이 적을 앞뒤로 몰아칠 때가 바로 오늘이오.
備是猾虜,更嘗事多,其軍始集,思慮精專,未可干也。今住已久,不得我便,兵疲意沮,計不復生,掎角此寇,正在今日。
《삼국지》 〈오서 육손전〉
備是猾虜,更嘗事多,其軍始集,思慮精專,未可干也。今住已久,不得我便,兵疲意沮,計不復生,掎角此寇,正在今日。
《삼국지》 〈오서 육손전〉
육손은 먼저 진영 하나를 쳤지만 이기지 못했다. 장수들이 "공연히 병사만 죽였다"고 하자 육손은 "나는 이미 깨뜨릴 방법을 알았다(吾已曉破之之術)"라고 하고는 병사마다 띠풀 한 줌씩을 들게 해 화공으로 진영을 함락시켰다. 한번 형세가 이루어지자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일제히 공격해 장남, 풍습, 호왕(胡王) 사마가 등의 목을 베고 40여 개의 진영을 깨뜨렸다. 유비의 장수 두로와 유녕 등은 궁지에 몰려 항복을 청했다. 유비는 마안산에 올라 병사들을 둘러 진을 쳤으나, 육손이 군대를 독려해 사방에서 조여 들자 흙더미가 무너지듯 와해되어 죽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유비는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역참 사람들이 징과 갑옷을 짊어지고 와 불태워 뒤를 끊은 덕에 겨우 백제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배와 병기, 수군과 보병의 물자를 한꺼번에 거의 다 잃었고, 시체가 떠내려가 강을 메웠다. 유비는 크게 부끄러워하고 분해하며 말했다.
내가 육손에게 꺾이고 욕을 당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吾乃為遜所折辱,豈非天邪!
《삼국지》 〈오서 육손전〉
吾乃為遜所折辱,豈非天邪!
《삼국지》 〈오서 육손전〉
〈조운전〉 배송지 주에 인용된 《조운별전》에 따르면 유비는 동정에 나서며 조운을 강주에 남겨 감독하게 했는데, 유비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이 군사를 이끌고 영안까지 나아갔으나 오군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30]
유비가 무너지자 손환은 뒤에 육손을 만나 "전에는 구해 주지 않은 것을 참으로 원망했는데, 오늘에 와서야 지휘에 법도가 있었음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31]
이릉에서 유비와 맞설 때, 장군들 가운데는 손책 시절부터의 옛 장수도 있고 공실의 귀척도 있어서 저마다 자부심이 강해 육손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육손은 칼자루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유비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고 조조도 꺼리던 자인데, 지금 우리 경내에 있으니 이는 강적이오. 그대들은 모두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서로 화목하게 힘을 합쳐 이 적을 무찔러 받은 은혜에 보답해야 하거늘, 서로 따르지 않으니 이는 도리가 아니오. 나는 비록 서생이지만 주상께 명을 받았소. 나라가 그대들을 굽혀 나를 받들게 한 것은 내게 조금이나마 내세울 만한 것이 있어서이니, 치욕을 참고 무거운 짐을 질 수 있기 때문(能忍辱負重)이오. 각자 맡은 일이 있으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소! 군령에는 정해진 법도가 있으니 범해서는 안 되오.
劉備天下知名,曹操所憚,今在境界,此彊對也。諸君並荷國恩,當相輯睦,共翦此虜,上報所受,而不相順,非所謂也。僕雖書生,受命主上。國家所以屈諸君使相承望者,以僕有尺寸可稱,能忍辱負重故也。各任其事,豈復得辭!軍令有常,不可犯矣。
《삼국지》 〈오서 육손전〉
劉備天下知名,曹操所憚,今在境界,此彊對也。諸君並荷國恩,當相輯睦,共翦此虜,上報所受,而不相順,非所謂也。僕雖書生,受命主上。國家所以屈諸君使相承望者,以僕有尺寸可稱,能忍辱負重故也。各任其事,豈復得辭!軍令有常,不可犯矣。
《삼국지》 〈오서 육손전〉
유비를 깨뜨린 계책이 대부분 육손에게서 나오자 장수들은 그제야 복종했다. 이를 들은 손권이 "그대는 어찌하여 처음에 장수들이 지휘를 어긴 것을 알리지 않았소?" 하고 묻자 육손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은혜를 깊고 무겁게 입어 재주에 넘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또 이 장수들은 심복이거나 조아(爪牙)로 쓸 만하거나 공신이니, 모두 나라가 함께 대사를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신은 비록 둔하고 나약하지만 인상여와 구순이 서로 몸을 낮춘 의리를 본받아 나랏일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受恩深重,任過其才。又此諸將或任腹心,或堪爪牙,或是功臣,皆國家所當與共克定大事者。臣雖駑懦,竊慕相如、寇恂相下之義,以濟國事。
《삼국지》 〈오서 육손전〉
受恩深重,任過其才。又此諸將或任腹心,或堪爪牙,或是功臣,皆國家所當與共克定大事者。臣雖駑懦,竊慕相如、寇恂相下之義,以濟國事。
《삼국지》 〈오서 육손전〉
손권은 크게 웃으며 칭찬하고, 육손에게 보국장군을 더해 형주목을 겸하게 하고 곧바로 강릉후로 고쳐 봉했다.[32]
유비가 백제성에 머물자 서성, 반장, 송겸 등은 유비를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다며 다투어 표를 올려 다시 치기를 청했다. 손권이 육손에게 묻자, 육손은 주연·낙통과 함께 조비가 대군을 모으면서 겉으로는 오나라를 도와 유비를 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고 있으니 군대를 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위나라 군대가 출동해 오나라는 세 방면에서 적을 맞게 되었다.[33]
《오록》에 따르면 유비는 위군이 대거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떠보았다.
적이 지금 이미 강릉에 와 있소. 내가 다시 동쪽으로 내려가려 하는데, 장군은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보시오?
賊今已在江陵,吾將復東,將軍謂其能然不?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인용 《오록》
賊今已在江陵,吾將復東,將軍謂其能然不?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인용 《오록》
육손은 이렇게 답했다.
다만 귀국의 군대가 막 패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이제 막 화친을 구하기 시작했으니 스스로를 추스르기에도 바빠 군사를 다 쓸 겨를은 없을까 걱정입니다. 만약 헤아리지 않고 무너진 끝에 남은 군사를 다시 멀리 보내온다면, 목숨을 부지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但恐軍新破,創痍未復,始求通親,且當自補,未暇窮兵耳。若不惟算,欲復以傾覆之餘,遠送以來者,無所逃命。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인용 《오록》
但恐軍新破,創痍未復,始求通親,且當自補,未暇窮兵耳。若不惟算,欲復以傾覆之餘,遠送以來者,無所逃命。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인용 《오록》
오나라는 전역에 걸쳐 위군의 침공에 대비했고, 위군은 별 소득 없이 물러났다.[34]
2.5. 외교와 내정
223년 유비가 죽고 아들 유선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제갈량은 다시 오나라와 화친했다. 손권은 시무에 관한 일이면 늘 육손을 시켜 제갈량에게 말하게 했고, 자신의 인장을 따로 새겨 육손에게 맡겨 두었다. 손권이 유선이나 제갈량에게 보내는 글은 반드시 육손에게 먼저 보여 주었고, 내용의 경중과 가부를 살펴 타당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고친 뒤 그 인장으로 봉해 보내게 했다.[35]〈오주전〉에 따르면 226년 봄, 손권은 오랜 전쟁으로 백성이 농토를 떠났으니 너그럽게 쉬게 하라는 영을 내렸다. 이때 육손은 각지에 곡식이 부족하다며 장수들에게 농지를 넓히게 하자고 표를 올렸고, 손권은 이를 칭찬하며 자신과 아들들도 직접 밭을 받아 갈겠다고 답했다.[36]
같은 해 겨울 10월, 육손은 덕을 베풀고 형벌을 늦추며 부세를 너그럽게 하고 징발을 멈추라고 건의했다.[37] 손권은 긴 답서에서 법령은 악을 막고 사전에 경계하려는 것이니 형벌이 없을 수 없다고 해명하면서, 징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징발하는 것은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일을 여러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야 하기 때문일 뿐이오. 만약 강동만 지키며 너그러운 정치를 닦는다면 병력은 저절로 충분할 것이니 어찌 많이 쓰겠소? 다만 앉아서 지키기만 하는 것은 비루한 일이오. 미리 징발해 두지 않으면 때가 닥쳤을 때 곧바로 쓰지 못할까 두렵소.
至於發調者,徒以天下未定,事以眾濟。若徒守江東,修崇寬政,兵自足用,復用多為?顧坐自守可陋耳。若不豫調,恐臨時未可便用也。
《삼국지》 〈오서 오주전〉
至於發調者,徒以天下未定,事以眾濟。若徒守江東,修崇寬政,兵自足用,復用多為?顧坐自守可陋耳。若不豫調,恐臨時未可便用也。
《삼국지》 〈오서 오주전〉
그러면서도 손권은 담당 관리에게 법령 조문을 모두 베끼게 해 낭중 저봉(褚逢)을 시켜 육손과 제갈근에게 보내고,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곳은 빼거나 보태게 했다.[38]
2.6. 석정 전투
228년, 손권은 파양태수 주방에게 거짓 항복으로 위나라 대사마 조휴를 꾀어내게 했다. 조휴가 과연 대군을 이끌고 환현으로 들어오자, 손권은 육손에게 황월을 주고 대도독으로 삼아 맞서게 했다. 조휴는 속은 것을 알아차렸지만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부끄러운 데다 병마가 정예이고 많은 것을 믿고 그대로 싸움에 나섰다. 육손은 스스로 중군을 맡고 주환과 전종을 좌우익으로 삼아 세 갈래로 나아가 조휴의 복병을 들이쳤고, 달아나는 적을 협석까지 추격했다. 이 싸움에서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만여 명이었고, 소·말·노새·나귀가 끄는 수레 1만 대와 군수 물자와 기계를 거의 다 빼앗았다. 조휴는 돌아간 뒤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다.[39]군대를 정돈해 무창을 지날 때, 손권은 좌우에게 명해 자신의 일산으로 육손을 가리고 궁궐 문을 드나들게 했다. 내린 물건은 모두 어용의 진귀한 것이어서 당시 육손과 견줄 사람이 없었다. 이후 육손은 서릉으로 돌아갔다.[40]
2.7. 황제 즉위 이후
229년 손권이 황제에 즉위하자 육손은 상대장군·우도호가 되었다. 그해 손권은 동쪽 건업으로 옮겨 가면서 태자와 황자, 상서 구관(九官)을 무창에 남겨 두었고, 육손을 불러 태자 손등을 보좌하게 하는 한편 형주와 예장 등 세 군의 일을 맡겨 군국의 일을 감독하게 했다.[41]이 무렵 건창후 손려가 전당 앞에 투압란(鬬鴨欄, 오리 싸움을 시키는 우리)을 만들어 꽤 정교하게 꾸몄다. 육손이 정색하고 "군후께서는 경전을 부지런히 읽어 스스로를 새롭게 하셔야지, 이런 것을 무엇에 쓰십니까?"라고 하자 손려는 즉시 이를 부수어 치웠다.[42] 공자들 가운데 손권이 가장 아끼던 사성교위(射聲校尉) 손송이 병사들을 놀이 삼아 다루며 기강을 세우지 않자, 육손은 손송이 보는 앞에서 담당 관리의 머리를 깎는 벌을 내렸다.[43] 또 남양 사람 사경(謝景)이 유이의 '형벌을 앞세우고 예를 뒤로 한다'는 논리를 칭찬하자, 육손은 "예가 형벌보다 앞선 지 오래되었다. 그대는 지금 동궁을 모시고 있으니 마땅히 인의를 따라 덕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꾸짖었다.[44]
육손은 몸은 밖에 있어도 마음은 늘 나라에 두었다. 그는 법이 너무 엄해 죄를 짓는 사람이 많다며,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으니 허물이 있는 장수와 관리라도 너그럽게 용서해 다시 쓰자고 상소했다.
신은 법령이 엄하고 가혹해 아래에서 범하는 자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근래 장수와 관리가 죄에 걸리는 일이 잦은데, 삼가지 않은 것은 꾸짖을 만하지만 천하가 아직 하나가 되지 않아 나아가 도모해야 할 때이니 조금은 은혜를 베풀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 옛날 한 고조는 진평의 허물을 덮어 두고 그 기략을 써서 끝내 공업을 세웠고, 그 공이 천 년에 드리워졌습니다. 엄한 법과 가혹한 형벌은 제왕의 큰 업이 아니며, 벌만 있고 용서가 없는 것은 먼 곳을 품는 큰 계책이 아닙니다.
臣以為科法嚴峻,下犯者多。頃年以來,將吏罹罪,雖不慎可責,然天下未一,當圖進取,小宜恩貸,以安下情。…昔漢高舍陳平之愆,用其奇略,終建勳祚,功垂千載。夫峻法嚴刑,非帝王之隆業,有罰無恕,非懷遠之弘規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臣以為科法嚴峻,下犯者多。頃年以來,將吏罹罪,雖不慎可責,然天下未一,當圖進取,小宜恩貸,以安下情。…昔漢高舍陳平之愆,用其奇略,終建勳祚,功垂千載。夫峻法嚴刑,非帝王之隆業,有罰無恕,非懷遠之弘規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230년, 손권이 일부 군대를 보내 이주(夷州)와 주애(珠崖)를 취하려 하면서 육손에게 의견을 물었다. 〈전종전〉에 따르면 전종도 먼 이역은 바다로 막혀 있고 풍토에 독기가 있어 병사가 드나들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손권은 듣지 않았다.[45] 육손도 이렇게 상소했다.
신은 사해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백성의 힘으로 시무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지 여러 해라 군사가 줄어들었습니다. … 만 리 밖을 습격해 취하는 일은 풍파를 헤아리기 어렵고, 백성이 물과 풍토가 바뀌면 반드시 질병에 걸릴 것입니다. 지금 있는 군사를 몰아 불모의 땅을 건너게 하면 보태려다 오히려 덜고 이롭게 하려다 오히려 해치게 됩니다. … 지금 강동의 군사로도 일을 도모하기에 충분하니, 다만 힘을 기른 뒤에 움직여야 합니다.
臣愚以為四海未定,當須民力,以濟時務。今兵興歷年,見眾損減,…萬里襲取,風波難測,民易水土,必致疾疫,今驅見眾,經涉不毛,欲益更損,欲利反害。…今江東見眾,自足圖事,但當畜力而後動耳。
《삼국지》 〈오서 육손전〉
臣愚以為四海未定,當須民力,以濟時務。今兵興歷年,見眾損減,…萬里襲取,風波難測,民易水土,必致疾疫,今驅見眾,經涉不毛,欲益更損,欲利反害。…今江東見眾,自足圖事,但當畜力而後動耳。
《삼국지》 〈오서 육손전〉
손권은 끝내 이주를 쳤지만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메우지 못했다.[46] 〈전종전〉에 따르면 출병한 지 1년이 지나자 병사 가운데 열에 여덟아홉이 병으로 죽었고, 손권은 깊이 후회했다. 뒤에 손권이 이 일을 꺼내자 전종은 "그때 신하들 가운데 간하지 않은 자가 있었다면 신은 그를 불충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47]
233년, 공손연이 맹약을 어기자 손권은 친히 정벌하려 했다. 육손은 이렇게 상소했다.
강한 적이 경계에 있고 먼 변방은 아직 귀순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뗏목을 타고 멀리 원정하신다면 반드시 적이 엿볼 틈을 주게 되어, 근심이 닥친 뒤에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대사를 때맞춰 이룬다면 공손연은 치지 않아도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 지금 요동의 군사와 말을 아까워하시면서, 어찌 강동의 만세토록 안전한 본업은 버리려 하시며 아까워하지 않으십니까?
彊寇在境,荒服未庭,陛下乘桴遠征,必致闚䦨,慼至而憂,悔之無及。若使大事時捷,則淵不討自服;今乃遠惜遼東眾之與馬,柰何獨欲捐江東萬安之本業而不惜乎?
《삼국지》 〈오서 육손전〉
彊寇在境,荒服未庭,陛下乘桴遠征,必致闚䦨,慼至而憂,悔之無及。若使大事時捷,則淵不討自服;今乃遠惜遼東眾之與馬,柰何獨欲捐江東萬安之本業而不惜乎?
《삼국지》 〈오서 육손전〉
손권은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2.8. 234년 북벌과 양양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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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합비 전투(234년)#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합비 전투(234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오주전〉에 따르면 234년 여름 5월,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 등을 강하와 면구에 주둔시키고 손소와 장승 등을 광릉·회양으로 보낸 뒤,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합비 신성을 포위했다. 마침 촉의 제갈량이 마지막 북벌에 나서 무공으로 나왔기 때문에, 손권은 위 명제가 멀리 나오지 못하리라 여겼다.[48] 그러나 조예는 직접 수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왔고, 만총이 결사대를 모아 불을 놓아 오군의 공성 기구를 태우고 손권의 조카 손태를 활로 쏘아 죽였다. 조예의 군대가 합비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까지 오자 손권은 물러났고, 육의(육손)와 손소 등도 퇴각했다.[49]
육손은 측근 한편(韓扁)을 보내 손권에게 표를 올렸는데, 돌아오던 한편이 면수 가운데서 위나라 순찰병에게 붙잡혔다.[50] 제갈근은 크게 두려워하며 육손에게 편지를 보냈다.
주상의 수레는 이미 돌아갔고, 적은 한편을 붙잡아 우리 사정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강물이 말랐으니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大駕已旋,賊得韓扁,具知吾闊狹。且水乾,宜當急去。
《삼국지》 〈오서 육손전〉
大駕已旋,賊得韓扁,具知吾闊狹。且水乾,宜當急去。
《삼국지》 〈오서 육손전〉
육손은 답장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재촉해 순무와 콩을 심게 하며 장수들과 평소처럼 바둑을 두고 활쏘기 놀이를 했다. 제갈근이 "백언은 지략이 많으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라며 직접 찾아오자 육손은 이렇게 말했다.
적은 주상의 수레가 돌아간 것을 알고 더는 걱정할 것이 없으니 우리에게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소. 게다가 이미 요충지를 지키고 있고 우리 장병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소. 우선 스스로 침착하게 장병을 안정시키고 변화무쌍한 술책을 펼친 뒤에 빠져나가야 하오. 지금 곧바로 물러나는 기색을 보이면 적은 우리가 겁을 먹었다고 여겨 바짝 쫓아올 것이니, 이는 반드시 패하는 형세요.
賊知大駕以旋,無所復慼,得專力於吾。又已守要害之處,兵將意動,且當自定以安之,施設變術,然後出耳。今便示退,賊當謂吾怖,仍來相蹙,必敗之勢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賊知大駕以旋,無所復慼,得專力於吾。又已守要害之處,兵將意動,且當自定以安之,施設變術,然後出耳。今便示退,賊當謂吾怖,仍來相蹙,必敗之勢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그러고는 제갈근과 은밀히 계책을 세워, 제갈근에게 배를 맡기고 자신은 병마를 모두 이끌고 양양성으로 향했다. 위군은 본래 육손을 꺼렸으므로 황급히 성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제갈근은 배를 이끌고 나왔고, 육손은 천천히 대오를 정돈하며 기세를 부풀려 보이고는 걸어서 배로 향했는데, 위군은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51]
군대가 백위(白圍)에 이르자 육손은 사냥을 하러 머문다고 둘러대고, 몰래 장군 주준(周峻)과 장량(張梁) 등을 보내 강하군의 신시·안육·석양을 치게 했다. 석양의 저자가 한창 북적일 때 주준 등이 들이닥치자 사람들은 물건을 버리고 성으로 몰려들었다. 성문이 사람들로 막혀 닫히지 않자 위군은 자기 백성을 베어 죽이고서야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오군이 베거나 사로잡은 자는 천여 명이었다.[52] 사로잡은 사람들은 모두 보살피게 하고 병사들이 괴롭히거나 업신여기지 못하게 했다. 가족을 데리고 온 자는 돌봐 주었고, 처자를 잃은 자에게는 옷과 식량을 주고 후하게 위로해 돌려보냈으므로, 감복해 서로 손을 잡고 돌아오는 자도 있었다. 이웃 지역 사람들도 이를 마음에 품어, 강하의 공조 조탁(趙濯), 익양의 비장 배생(裴生), 이민족의 왕 매이(梅頤) 등이 모두 무리를 이끌고 육손에게 귀부했다. 육손은 재물과 비단을 아끼지 않고 이들을 보살폈다.[53]
다만 배송지는 이 기습을 강하게 비판했다.
육손은 손권이 이미 물러나 위나라가 자기에게 힘을 쏟을 수 있음을 걱정했고, 기세를 부풀려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하게 했으니 배를 나란히 하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더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몰래 장수들을 보내 작은 고을을 기습하게 해, 저자의 사람들이 놀라 달아나다 서로 다치게 만들었는가? 천 명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은 위나라에 손실이라 하기에도 부족하고, 아무 죄 없는 백성들만 혹독한 화를 당하게 했으니 제갈량이 위수 가에 머물던 군대와는 얼마나 다른가! … 그 복이 3대를 넘기지 못하고 손자 대에 멸족된 것이 어찌 이 일의 남은 재앙이 아니겠는가?
臣松之以為遜慮孫權已退,魏得專力於己,既能張拓形勢,使敵不敢犯,方舟順流,無復怵惕矣,何為復潛遣諸將,奄襲小縣,致令市人駭奔,自相傷害?俘馘千人,未足損魏,徒使無事之民橫罹荼酷,與諸葛渭濱之師,何其殊哉!…其祚無三世,及孫而滅,豈此之餘殃哉!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臣松之以為遜慮孫權已退,魏得專力於己,既能張拓形勢,使敵不敢犯,方舟順流,無復怵惕矣,何為復潛遣諸將,奄襲小縣,致令市人駭奔,自相傷害?俘馘千人,未足損魏,徒使無事之民橫罹荼酷,與諸葛渭濱之師,何其殊哉!…其祚無三世,及孫而滅,豈此之餘殃哉!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배송지는 이어서 포로를 돌봐 준 일도 "숲을 짓밟고 둥지를 엎은 뒤 남은 것을 살려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작은 은혜와 작은 어짊으로 어찌 큰 포학을 메우겠는가(此無異殘林覆巢而全其遺,曲惠小仁,何補大虐)"라고 평했다.
또 위나라의 강하태수 녹식(逯式)이 병마까지 거느리며 자주 오나라 변경을 괴롭혔는데, 위나라 옛 장수 문빙의 아들 문휴(文休)와 오래 사이가 나빴다. 이를 안 육손은 녹식의 편지에 답하는 척하는 거짓 편지를 썼다.
보내 준 간곡한 글을 받아, 그대가 문휴와 오래 원한을 맺어 둘이 함께 살 수 없는 형세라 귀부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소. 곧 그대의 편지를 몰래 조정에 올려 아뢰고 군사를 모아 맞이하겠소. 그대는 몰래 서둘러 채비를 갖추고 다시 날짜를 정해 알려 주시오.
得報懇惻,知與休久結嫌隙,勢不兩存,欲來歸附,輒以密呈來書表聞,撰眾相迎。宜潛速嚴,更示定期。
《삼국지》 〈오서 육손전〉
得報懇惻,知與休久結嫌隙,勢不兩存,欲來歸附,輒以密呈來書表聞,撰眾相迎。宜潛速嚴,更示定期。
《삼국지》 〈오서 육손전〉
육손은 이 편지를 경계에 놓아두게 했다. 녹식의 병사가 편지를 주워 녹식에게 보이자 녹식은 두려워 스스로 처자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 일로 관리와 병사들이 더는 녹식을 따르지 않아 녹식은 결국 면직되었다.[54]
2.9. 산월 평정과 여일 사건
〈오주전〉에 따르면 236년 겨울 10월 파양의 도적 팽단 등이 난을 일으켰고, 육손은 이듬해 2월 이들을 토벌해 그해 안에 모두 격파했다.[55]237년 정월, 손권은 관리가 부모상을 당해 임지를 무단으로 떠나는 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했다. 고담은 사형은 지나치다고 했지만, 호종은 "충신은 효자가 될 수 없다"며 사형으로 다스리자고 했고, 승상 고옹이 이를 따르자고 주청해 사형이 정해졌다. 그 뒤 오현령 맹종이 모친상을 당해 달려갔다가 스스로 무창에 와서 옥에 갇혀 처분을 기다렸다. 육손이 맹종의 평소 행실을 아뢰며 선처를 청하자 손권은 맹종의 형을 한 등급 감해 주었다. 다만 이를 전례로 삼지 못하게 했고, 이로써 무단으로 분상하는 일은 끊어졌다.[56]
같은 해 중랑장 주지(周祗)가 파양에서 병사를 모집하겠다고 청했다. 손권이 이 일을 육손에게 묻자, 육손은 이 군의 백성은 쉽게 동요하고 안정시키기 어려우니 모병해서는 안 되며 도적이 생길까 두렵다고 했다. 그러나 주지가 굳이 모병을 고집하자 파양 사람 오거(吳遽) 등이 과연 도적이 되어 주지를 죽이고 여러 현을 함락시켰고, 예장과 여릉의 오랜 무뢰배들도 이에 호응했다. 육손은 소식을 듣자 곧바로 토벌해 격파했고, 오거 등이 잇달아 항복하자 정예병 8천여 명을 얻어 세 군을 평정했다.[57] 〈진무전〉에 따르면 이때 진표가 경계를 넘어가 오거를 쳐서 항복시켰고, 육손은 진표를 편장군으로 삼고 도향후로 올려 봉해 북쪽의 장갱(章阬)에 주둔시켰다.[58]
이 무렵 손권은 교사(校事) 여일을 신임했다. 여일은 성품이 가혹하고 법을 각박하게 적용했는데, 태자 손등이 여러 번 간해도 손권이 듣지 않자 대신들은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59] 〈육손전〉은 중서전교(中書典校) 여일이 권세를 훔쳐 마음대로 위세와 복을 부렸고, 육손이 태상 반준과 함께 이를 걱정하며 말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다.[60]
여일이 문서를 감찰하며 많은 사람을 적발하자 보즐은 상소를 올려 대신들을 감쌌다.
승상 고옹, 상대장군 육손, 태상 반준은 근심이 깊고 책임이 무거워 정성을 다하는 데 뜻을 두고, 밤낮으로 조심하며 자고 먹는 것도 편치 않은 채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이롭게 할 오랜 계책을 세우려 합니다. 그야말로 심복이자 팔다리 같은 사직의 신하라 할 만합니다. 마땅히 각자에게 일을 맡기되 다른 관리가 그 소관을 감독하게 하지 말고, 그 성과를 책임 지우고 허물을 따지시면 됩니다. 이 세 신하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어찌 감히 위세와 복을 제멋대로 부려 하늘처럼 받드는 임금을 속이고 저버리겠습니까?
丞相顧雍、上大將軍陸遜、太常潘濬,憂深責重,志在竭誠,夙夜兢兢,寢食不寧,念欲安國利民,建久長之計,可謂心膂股肱,社稷之臣矣。宜各委任,不使他官監其所司,責其成效,課其負殿。此三臣者,思慮不到則已,豈敢專擅威福欺負所天乎?
《삼국지》 〈오서 보즐전〉
丞相顧雍、上大將軍陸遜、太常潘濬,憂深責重,志在竭誠,夙夜兢兢,寢食不寧,念欲安國利民,建久長之計,可謂心膂股肱,社稷之臣矣。宜各委任,不使他官監其所司,責其成效,課其負殿。此三臣者,思慮不到則已,豈敢專擅威福欺負所天乎?
《삼국지》 〈오서 보즐전〉
여일의 감찰이 승상과 상대장군에게까지 미쳤다는 점에서, 손권이 이 무렵부터 중신들을 견제하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여일은 결국 주거를 무고한 일이 드러나는 등 죄상이 밝혀져 처형되었다.[61] 손권은 스스로 허물을 인정하고 자책했으며, 중서랑 원례(袁禮)를 보내 여러 대장에게 사과하고 바로잡아야 할 일을 물었다.[62]
이때 사연(謝淵)과 사굉(謝厷) 등이 저마다 재정을 늘릴 새 방안을 올리자, 손권은 이를 육손에게 심의하게 했다. 육손은 이렇게 답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니, 강함은 백성의 힘에서 나오고 재물도 백성에게서 나옵니다. 백성이 넉넉한데 나라가 약하거나 백성이 메말랐는데 나라가 강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얻으면 다스려지고 잃으면 어지러워집니다. … 바라건대 성은을 베풀어 백성을 편안히 구제하시고, 몇 년 사이 나라 살림이 조금 넉넉해진 뒤에 다시 도모하십시오.
國以民為本,彊由民力,財由民出。夫民殷國弱,民瘠國彊者,未之有也。故為國者,得民則治,失之則亂。…乞垂聖恩,寧濟百姓,數年之閒,國用少豐,然後更圖。
《삼국지》 〈오서 육손전〉
國以民為本,彊由民力,財由民出。夫民殷國弱,民瘠國彊者,未之有也。故為國者,得民則治,失之則亂。…乞垂聖恩,寧濟百姓,數年之閒,國用少豐,然後更圖。
《삼국지》 〈오서 육손전〉
〈오주전〉에 따르면 241년 가을 8월, 육손은 주(邾)에 성을 쌓았다.
2.10. 이궁지쟁과 최후
241년 태자 손등이 죽자, 손권은 이듬해 정월 손화를 태자로 세우고 8월 손패를 노왕으로 봉했다. 이때 백관이 황후를 세우자고 주청했으나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63] 처음에 손화와 손패는 같은 궁에서 지내며 예우에 차등이 없었는데, 뒤에 궁을 나누고 속관을 따로 두면서 신하들이 두 편으로 갈라졌다.[64] 이것이 이궁지쟁이다. 은기의 《통어》는 육손을 제갈각, 고담, 주거, 등윤, 시적, 정밀(丁密) 등과 함께 "예법에 따라 태자를 받든" 쪽으로 꼽았다.[65]244년, 육손은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다. 임명 조서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밝은 덕이 환히 드러나, 상장으로서 나라를 바로잡고 난리를 그치게 했다. 세상을 뛰어넘는 공을 세운 이는 반드시 크고 빛나는 총애를 받아야 하고, 문무의 재주를 품은 이는 반드시 사직의 중임을 져야 한다. 옛날 이윤이 탕을 융성하게 하고 여상이 주를 도왔듯, 안팎의 임무를 그대가 실로 겸하고 있다. … 아아, 삼공의 일을 총괄해 뭇 관료를 가르쳐야 하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힘쓰라. 주목·도호로서 무창의 일을 맡던 것은 예전과 같이 하라.
惟君天資聰叡,明德顯融,統任上將,匡國弭難。夫有超世之功者,必膺光大之寵;懷文武之才者,必荷社稷之重。昔伊尹隆湯,呂尚翼周,內外之任,君實兼之。…於乎總司三事,以訓羣寮,可不敬與!君其勖之。其州牧都護領武昌事如故。
《삼국지》 〈오서 육손전〉
惟君天資聰叡,明德顯融,統任上將,匡國弭難。夫有超世之功者,必膺光大之寵;懷文武之才者,必荷社稷之重。昔伊尹隆湯,呂尚翼周,內外之任,君實兼之。…於乎總司三事,以訓羣寮,可不敬與!君其勖之。其州牧都護領武昌事如故。
《삼국지》 〈오서 육손전〉
즉 육손은 승상이 된 뒤에도 도성 건업이 아니라 형주의 무창에 머물며 주목과 도호를 겸했다.
이보다 앞서 두 궁이 나란히 서자 안팎의 관리들이 자제들을 보내 두 궁을 시중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전종이 이 일을 알려 오자 육손은 이렇게 답했다.
자제가 정말 재능이 있다면 쓰이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없으니, 사사로이 내보내 영화와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재능이 없다면 끝내 화를 부를 것입니다. 게다가 듣자니 두 궁의 세력이 맞서고 있다니 반드시 이쪽저쪽이 생길 것인데, 이는 옛사람들이 크게 꺼린 일입니다.
子弟苟有才,不憂不用,不宜私出以要榮利;若其不佳,終為取禍。且聞二宮勢敵,必有彼此,此古人之厚忌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子弟苟有才,不憂不用,不宜私出以要榮利;若其不佳,終為取禍。且聞二宮勢敵,必有彼此,此古人之厚忌也。
《삼국지》 〈오서 육손전〉
과연 전종의 아들 전기가 노왕에게 붙어 경솔하게 이간질을 일삼자, 육손은 전종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전종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는 틀어졌다.[66]
태자의 지위가 불안하다는 논의가 일자 육손은 상소를 올렸다.
태자는 정통이니 반석처럼 굳건해야 하고, 노왕은 번신이니 총애와 녹봉에 차등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차 제자리를 얻고 위아래가 편안해집니다. 삼가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며 아룁니다.
太子正統,宜有盤石之固,魯王藩臣,當使寵秩有差,彼此得所,上下獲安。謹叩頭流血以聞。
《삼국지》 〈오서 육손전〉
太子正統,宜有盤石之固,魯王藩臣,當使寵秩有差,彼此得所,上下獲安。謹叩頭流血以聞。
《삼국지》 〈오서 육손전〉
육손은 이런 글을 서너 차례 올렸고, 도성에 가서 적서(嫡庶)의 구분을 직접 아뢰어 잘잘못을 바로잡겠다고까지 청했지만 손권은 허락하지 않았다.[67]
《오록》은 이 무렵의 일로 다음 이야기를 전한다. 손권이 주위를 물리고 양축과 손패의 재능을 논했는데, 양축이 손패에게 문무의 자질이 있으니 후계로 삼을 만하다고 하자 손권이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평상 밑에 숨어 있던 시종이 이 말을 다 듣고 태자에게 알렸다. 마침 육윤이 무창으로 가게 되어 태자에게 하직하러 오자, 태자는 만나 주지 않는 척하고는 몰래 미복 차림으로 육윤의 수레에 올라 함께 의논했고, 육손에게 표를 올려 간하게 하려 했다. 육손이 표를 올려 극간하자 손권은 양축이 말을 흘렸다고 의심했다. 양축이 부인하자 손권은 양축에게 그 경로를 찾게 했고, 양축은 근래 서쪽으로 간 사람은 육윤뿐이니 그가 말했을 것이라고 아뢰었다. 이어지는 대목은 이렇다.
손권은 다시 사람을 보내 육손에게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고, 육손은 육윤이 말해 주었다고 했다. 육윤을 불러 심문하자 육윤은 태자를 감추려고 "양축이 신에게 말했습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을 함께 옥에 가두고 심문했는데, 양축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가 말했다고 자백했다. 손권은 처음부터 양축이 누설했다고 의심했는데 자백까지 받자 과연 그렇다고 여겨 양축을 참했다.
又遣問遜何由知之,遜言胤所述。召胤考問,胤為太子隱曰:「楊竺向臣道之。」遂共為獄。竺不勝痛毒,服是所道。初權疑竺泄之,及服,以為果然,乃斬竺。
《삼국지》 〈오서 육개전〉 부 육윤, 배송지 주 인용 《오록》
又遣問遜何由知之,遜言胤所述。召胤考問,胤為太子隱曰:「楊竺向臣道之。」遂共為獄。竺不勝痛毒,服是所道。初權疑竺泄之,及服,以為果然,乃斬竺。
《삼국지》 〈오서 육개전〉 부 육윤, 배송지 주 인용 《오록》
즉 이 이야기에서 손권의 말을 엿들은 사람은 태자 쪽 시종이었고, 그 말은 태자와 육윤을 거쳐 육손에게 전해졌다. 손권이 출처를 묻자 육손은 육윤에게서 들었다고 숨기지 않고 답했다. 육윤은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68] 살아남아 248년 손권에게서 교주자사·안남교위에 임명되었다.[69]
육손의 외조카 고담, 고승, 요신은 태자 편에 섰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유배되었다.[70] 태자태부 오찬은 노왕을 하구로 내보내고 양축을 도성에서 내쫓자고 주장하며 여러 차례 궁중의 소식을 육손에게 전했는데, 이 때문에 손패와 양축 등의 참소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다.[71] 양축은 육손에 대해서도 20가지 일을 들어 고발했다.[72]
손권은 거듭 궁중의 사자를 보내 육손을 책망했고, 육손은 분하고 원통한 끝에 세상을 떠났다. 245년 2월, 63세였다.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73]
진수는 육손이 앞일을 내다본 일들도 함께 기록했다. 육손은 일찍이 기염이 관리들을 대거 걸러 내려 할 때 반드시 화를 부를 것이라며 말렸고, 제갈각에게는 "그대의 기세는 윗사람을 능멸하고 뜻은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니, 덕을 편안히 하는 기틀이 아니다"라고 경계했다. 또 젊어서 명성을 얻은 광릉의 양축이 끝내 실패할 것이라 보고, 그 형 양목에게 집안을 따로 하라고 권했다.[74]
2.11. 사후
장남 육연은 일찍 죽어 차남 육항이 작위를 이었다. 육손이 죽었을 때 20세였던 육항은 건무교위가 되어 아버지의 군사 5천 명을 거느렸다. 아버지의 영구를 모시고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성에 들러 은혜에 감사를 표했는데, 손권은 양축이 고발한 육손의 20가지 일을 들어 육항을 따져 물었다. 빈객의 출입을 막고 궁중의 사자를 보내 힐문했지만, 육항이 아무것도 꺼리지 않고 일마다 조목조목 답하자 손권의 의심은 차츰 풀렸다.[75]251년, 육항이 도성에 와서 병을 치료하고 나아 돌아가려 하자, 손권은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전에 참언을 듣고 그대의 아버지와 군신의 대의를 두텁게 하지 못해 그대를 저버렸소. 앞뒤로 따져 물은 글은 모두 태워 없애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시오.
吾前聽用讒言,與汝父大義不篤,以此負汝。前後所問,一焚滅之,莫令人見也。
《삼국지》 〈오서 육항전〉
吾前聽用讒言,與汝父大義不篤,以此負汝。前後所問,一焚滅之,莫令人見也。
《삼국지》 〈오서 육항전〉
손휴 때 육손에게 소후(昭侯)라는 시호를 추증했다.[76]
육항은 손호 대까지 오나라 서쪽 방면을 지키며 대사마에 올랐다. 육항의 아들 육안과 육경은 280년 진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싸우다 죽었다.[77] 다른 아들 육기는 육조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오나라가 망한 뒤 동생 육운과 함께 서진에 출사해 중용되었다. 그러나 팔왕의 난 때 참소를 받아 동생 육운·육탐과 함께 처형되었고, 육기의 두 아들도 함께 죽었다. 《기운별전》은 이때 "삼족이 남김없이 죽었다(三族無遺)"고 적었다.[78] 한편 육손의 동생 육모의 가계는 이어져, 손자 육엽과 육완 형제가 동진의 중신이 되었다.
3. 삼국지연의
연의에서의 행보는 전반기와 후반기의 활약이 잘린 것을 빼면 정사와 대체로 비슷하다. 정사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연의에서 육손은 키가 8척에 얼굴이 아름다운 옥 같은 미남으로 묘사된다. 정사에는 외모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나관중이 주유와 비슷한 이미지를 덧입힌 것으로 보인다.
연의에서는 이릉대전 때 촉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감택이 육손을 강력히 추천하고, 앞서 여몽도 육손을 천거했던 것을 떠올린 손권이 나라를 건 도박으로 말단 서생을 총대장에 앉히는 것으로 그려진다.[79] 장소, 고옹 등 대부분의 대신이 강동을 망하게 할 셈이냐며 반대하지만, 마음을 굳힌 손권이 밀어붙여 우여곡절 끝에 기용된다.[80]
그러나 조정 대신들의 불안을 반영하듯 육손은 현장에서도 무시당한다. 특히 아직 때가 아니라며 시간을 끌자, 한당을 필두로 한 장수들이 육손이 어리다고 깔보며 반목한다. 하지만 시간을 끄는 작전이 성공해 유비군의 전선이 길게 늘어지고 수비가 느슨해지자 육손은 단번에 몰아쳐 유비군을 불태워 버리고, 그제야 한당과 장수들은 육손의 계책에 감복하고 잘못을 뉘우친다.[81]
84회에서 육손은 패퇴하는 유비를 추격하다가 제갈량이 만든 팔진도에 갇혀 꼼짝 못 하게 되지만,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온다. 위기를 벗어난 육손은 추격을 포기하고 위군의 침입에 대비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다.[82]
이후 사마의가 다섯 갈래의 군대로 촉나라를 칠 계책을 내는데, 그 가운데 한 갈래가 오나라였다. 위나라는 사신을 보내 촉의 영토 절반을 주겠다며 동참을 청한다. 손권이 장소와 고옹 등에게 묻자 "육손이 식견이 높으니 그에게 물으십시오"라는 답을 듣고, 육손은 "위와 오에 제갈량을 당해 낼 사람이 없으니 적당히 응하는 척하다가 다른 네 갈래가 이기면 호응해 함께 치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의논하자"고 조언한다. 결국 다른 네 갈래의 군대는 제갈량의 계책에 막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났고, 손권은 육손의 조언 덕분에 촉한과 또다시 원수가 되는 일을 피했다고 말한다.
연의 후반부의 육손은 비중이 줄고 묘사도 들쭉날쭉하다는 평이 있다. 열세에서 촉나라의 총력을 박살 낸 장면과 달리, 뒤로 갈수록 활약이 짧게 처리되기 때문이다.
연의에서는 이궁지쟁을 다루지 않아 말년의 불화와 그로 인한 죽음이 그려지지 않는다. 육손은 조용히 퇴장하고 아들 육항이 뒤를 이어 등장할 뿐이다. 오나라 조정의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가 통째로 빠졌기 때문에, 연의를 주로 따르는 2차 매체에서 육손은 손권의 측근이자 조정의 거물 정치인보다는 명석한 신세대 참모이자 유능한 야전 지휘관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4. 평가
오나라가 형주를 차지하고 지켜 낸 과정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여몽과 함께 관우를 무너뜨려 형주를 얻었고, 이릉에서 유비를 대파해 형주 점령을 굳혔으며, 이후 형주목으로서 형주를 안정시켰다. 석정에서는 조휴를 크게 이겨 다시 한 번 오나라를 지켜 냈고, 이듬해 손권은 황제에 즉위했다. 오의 사성 출신으로 대도독과 승상에 오르며 손권에게 군사와 정치 양쪽에서 중용되었으나, 말년에는 손권의 문책 속에 분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비와 조휴를 패전 끝에 분사하게 만든 그 자신의 최후도 그들과 같았다. 정사 《삼국지》에서 신하의 신분으로 한 권 전체를 차지하는 열전을 받은 사람은 제갈량과 육손뿐이다.[83]진수는 이렇게 평했다.
유비는 천하에 영웅으로 일컬어져 한 시대가 꺼리던 인물이었는데, 육손은 한창 나이에 아직 위명이 드러나지 않았으면서도 그를 꺾어 이겼고,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나는 육손의 모략을 기이하게 여기고, 또 손권이 인재를 알아본 것에 감탄하니, 이것이 큰일을 이룬 까닭이다. 육손이 충성스럽고 정성이 지극해 나라를 걱정하다 몸을 잃은 데 이르러서는, 사직의 신하에 가깝다 하겠다.
劉備天下稱雄,一世所憚,陸遜春秋方壯,威名未著,摧而克之,罔不如志。予既奇遜之謀略,又歎權之識才,所以濟大事也。及遜忠誠懇至,憂國亡身,庶幾社稷之臣矣。
《삼국지》 〈오서 육손전〉 진수 평
劉備天下稱雄,一世所憚,陸遜春秋方壯,威名未著,摧而克之,罔不如志。予既奇遜之謀略,又歎權之識才,所以濟大事也。及遜忠誠懇至,憂國亡身,庶幾社稷之臣矣。
《삼국지》 〈오서 육손전〉 진수 평
대중매체에서는 주유의 비중이 가장 높지만, 정사에서 주유는 노숙·여몽과 한 권에 묶여 있고 오히려 육손이 단독 열전을 받았다. 대중매체에서도 육손이 지략과 카리스마는 주유에 약간 못 미치지만 침착함과 무력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면에서는 주유보다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4.1. 이궁지쟁과 말년의 불화를 둘러싼 해석
손권과 육손은 말년에 틀어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서로 잘 맞는 관계였다. 두 사람은 한 살 차이의 동년배였고, 육손은 손권이 막 강동을 이어받아 권위가 불안하던 203년에 출사했다. 당시 손권은 손책의 측근인 주유와 장소의 지지에 크게 기대고 있었고, 장소 등은 손책이 죽을 때 병권을 손권의 동생 손익에게 맡겨야 한다고 여기기도 했다.[84] 이런 처지에서, 형을 보고 따라온 신하들과 달리 처음부터 손권을 주군으로 섬긴 강동 대족 출신의 육손은 손권에게 큰 힘이 되었다. 물론 육손 역시 손씨 정권에 가문의 앞날을 걸었으니, 이 결합은 서로에게 이익이었다. 이런 신뢰가 없었다면 손권이 육손에게 형주의 군권과 승상 자리를 함께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말년의 육손은 오군 육씨를 대표하는 대족의 수장이자 손책의 사위였고, 상대장군·형주목·도호로서 형주의 군권을 쥔 채 승상까지 겸하고 있었다. 손권의 후계자가 이런 인물을 다루기는 쉽지 않았으므로, 손권이 육손의 영향력을 경계했다는 시각이 있다. 손권은 중신의 권위가 자신을 넘보는 것을 늘 신경 썼는데, 장소에게는 "오나라 선비들이 궁에 들어오면 내게 절하고 궁을 나가면 그대에게 절한다"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85] 이 시각에서 보면 손권으로서는 후계자가 즉위하기 전에 육손이 물러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86]
육손 쪽의 책임을 묻는 시각도 있다. 승상은 "삼공의 일을 총괄해 뭇 관료를 가르치는(總司三事,以訓羣寮)" 자리인데, 육손은 그 자리에서 후계 문제의 한쪽 편에 서서 서너 차례 상소하고 도성에 가서 직접 따지겠다고까지 청했다. 외조카 고담·고승·요신도 모두 태자 편이었다.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군주의 권한이고 손권이 황후를 세우지 않아 엄밀한 의미의 적서도 없었으니, 육손이 적서의 구분을 앞세운 것은 결국 자기가 지지하는 후계자를 밀어붙인 셈이라는 것이다. 또 《오록》의 이야기처럼 손권이 신하와 나눈 밀담이 태자와 육윤을 거쳐 무창의 육손에게까지 전해졌다면, 손권으로서는 육씨와 그 인척들이 황제보다 태자와 가문의 수장을 먼저 생각한다고 여길 만했다. 이런 시각에서는 치욕을 참고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다(能忍辱負重)는 육손 자신의 말처럼 손권이 육손을 중용한 것은 그 인내와 책임감 때문이었는데, 육손이 후계 문제에서만큼은 물러서지 않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을 맞았다고 본다.
다만 이 시각에도 한계가 있다. 《오록》에서 손권의 말을 엿들은 사람은 태자 쪽 시종이었고, 손권이 묻자 육손은 출처를 숨기지 않았으며, 손권이 누설자로 지목해 벌한 사람은 양축이었다. 이 이야기만으로 육씨 일족이 손권을 감시했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 또 이미 세운 태자를 지키고 번왕과의 차등을 분명히 하자는 것은 당시 신하로서 정론이었다. 같은 주장을 한 오찬과 주거에 대해 진수는 "바른 도리를 지키다 몸을 잃었다(以正喪身)"고 평했고,[87] 육손에게도 "나라를 걱정하다 몸을 잃었으니 사직의 신하에 가깝다"고 했다. 무엇보다 손권 자신이 251년 육항에게 "참언을 듣고 그대의 아버지를 저버렸다"며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도 손권이 오군 육씨와 아예 척을 지려 한 것은 아니었다. 육항은 아버지의 군사 5천 명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육손에게 소식을 전했던 육윤도 248년 교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손권이 육항에게 심문 기록을 태우라고 한 것도 훗날 그 기록이 육씨의 약점이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육항은 신하들을 마구 죽인 손호 때에도 숙청되거나 좌천되지 않았다.[88]
중국의 학자 이중톈은 이궁지쟁 당시 손권은 육손을 믿지 않고 적으로 여긴 반면 육손은 손권을 믿었고 손씨 정권과 강동 사족이 이미 한 식구가 되었다고 여겼다며, 육손이 너무 순진했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서는 전장과 정계를 두루 겪은 육손이 그만큼 순진했겠느냐는 반론도 있다. 결국 육손은 오나라의 충신이자 육씨 가문의 가주였지만 손권이 바란 '손권만의 사람'이 되기는 어려운 처지였고, 이것이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난 근본 원인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5. 기타
- 삼국지연의에서 백면서생처럼 그려진 것과 달리 이릉대전 때 이미 마흔 살 안팎이었고, 주유의 향년(36세)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183년생으로 182년생인 손권보다 한 살, 181년생인 제갈량보다 두 살 어릴 뿐이다. 다만 정사를 봐도 휘하 장수들에게 얕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나이보다는 대군을 지휘한 경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유는 육손보다 더 젊은 나이에 손권군을 지휘했지만, 육손보다 군무 경험과 세력 내의 입지[89] 면에서 훨씬 유리했기에 잡음 없이 군을 지휘할 수 있었다.
- 육손의 도독 후임이라 할 수 있는 주연의 무덤에서 승상의 모습을 그려 넣은 칠기가 나왔는데, 이것이 육손을 묘사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 포기의 준수(雋水)에 전하는 민간 전설이 있다. 강물이 불면 황룡이 여덟 마리의 새끼를 데리고 물놀이를 오는데, 그때마다 강물이 막히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포기에 부임한 육손은 이 화를 없애기로 하고, 철로 배를 만들어 용사 50명을 뽑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훈련시켰다. 여름에 강물이 불자 황룡이 새끼들을 데리고 준수에 파도를 일으켰고, 육손은 배를 타고 쫓아가 3척의 설화검(雪花劍)으로 새끼 용의 몸통을 베었다. 용사들도 칼과 창을 휘둘러 나머지 일곱 마리를 물리쳤다. 분노한 황룡이 덤벼들자 육손과 용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맞섰고, 황룡이 지친 틈을 타 육손이 그 등에 올라타 이마에 검을 찔러 넣었다. 황룡은 상처를 입고 달아났고, 육손은 병사들에게 물길을 정비하게 해 그 뒤로 강은 다시 범람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육손에게 감사하며 준수의 이름을 육수(陸水)로 바꾸었다고 한다.
- 육손이 여몽 대신 형주로 부임했을 때의 민간 전설도 있다. 촉나라는 무명이던 육손을 경계하지 않았지만 마량만은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진언했고, 관우는 취임 축하 사절로 관평을 보내 육손이 어떤 인물인지 살피게 했다. 관평이 가 보니 병영 안은 지저분하고 칼과 창에는 녹이 슬어 있었다. 육손은 심심하다는 듯 옆의 큰 항아리에서 개구리를 꺼내 이마에 붉은 칠을 해 방에 풀어놓았고, 이마가 붉은 개구리들이 뛰어다니자 병사들은 박장대소했다. 연회가 시작되어서도 붉은 칠을 계속하던 육손은 관평에게 "당신 아버지는 전쟁밖에 몰라 이런 즐거움을 모르지요. 인생은 즐길 때 즐겨야 합니다. 이 개구리들 재미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형주로 돌아간 관평이 이를 전하자 관우는 안심했다. 지금도 그 지역에는 이마가 붉은 개구리가 있다고 한다.
- 무술에 얽힌 민간 전설도 있다. 육손은 14~15세 때 스승에게 권법을 배워 고향에서 견줄 자가 없는 솜씨가 되었고, 스승마저 가볍게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육씨 친족의 잔치에서 무술 이야기가 나오자 스승이 "강한 자는 얼마든지 있지만 진정한 달인이 되려면 늙을 때까지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고 했는데, 육손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승이 "이 나이까지 무술을 닦았지만 아직 남의 공격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육손은 몰래 스승의 뒤로 돌아가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스승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피하고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더는 늘지 않는다"고 타일렀다. 육손은 부끄러워 용서를 빌었고, 이 일로 겸손을 배워 실력이 더욱 늘었다고 한다.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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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을 진중히 한다는 의미다.[2] 〈육손전〉의 "時年六十三"에 따른 세는나이다. 출생 연도 183년도 이 기록에서 거꾸로 계산한 것이다.[3] 〈육손전〉에는 이릉대전 뒤 강릉후로 고쳐 봉했다는 기록까지만 있고, 다시 누후로 봉했다는 기록은 없다.[4] 《삼국지》 〈위서〉와 〈촉서〉는 234년 기사까지도 육의로 적었고, 〈오서〉 본문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육손으로 적었다. 언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遜 자에 孫 자가 들어 있다는 점을 들어 손씨와의 관계를 반영한 개명으로 보는 해석도 있으나 사서에 근거는 없다.[5] 《삼국지》 〈오서 육손전〉. "陸遜字伯言,吳郡吳人也。本名議,世江東大族。"[6]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인용 《육씨세송》. "遜祖紆,字叔盤,敏淑有思學,守城門校尉。父駿,字季才,淳懿信厚,為邦族所懷,官至九江都尉。"[7] 《삼국지》 〈오서 육손전〉. "遜少孤,隨從祖廬江太守康在官。袁術與康有隙,將攻康,康遣遜及親戚還吳。遜年長於康子績數歲,為之綱紀門戶。"[8] 《후한서》 〈육강전〉. "時袁術屯兵壽春,部曲飢餓,遣使求委輸兵甲。康以其叛逆,閉門不通,內修戰備,將以御之。術大怒,遣其將孫策攻康,圍城數重。…受敵二年,城陷。月餘,發病卒,年七十。宗族百餘人,遭離飢戹,死者將半。"[9] 《삼국지》 〈오서 육손전〉. "孫權為將軍,遜年二十一,始仕幕府,歷東西曹令史,出為海昌屯田都尉,并領縣事。縣連年亢旱,遜開倉穀以振貧民,勸督農桑,百姓蒙賴。"[10] 《삼국지》 〈오서 육손전〉. "時吳、會稽、丹楊多有伏匿,遜陳便宜,乞與募焉。會稽山賊大帥潘臨,舊為所在毒害,歷年不禽。遜以手下召兵,討治深險,所向皆服,部曲已有二千餘人。鄱陽賊帥尤突作亂,復往討之,拜定威校尉,軍屯利浦。"[11] 《삼국지》 〈오서 하제전〉. "建安二十一年,鄱陽民尤突受曹公印綬,化民為賊,陵陽、始安、涇縣皆與突相應。齊與陸遜討破突,斬首數千,餘黨震服,丹楊三縣皆降,料得精兵八千人。"[12] 《삼국지》 〈오서 육손전〉. "權以兄策女配遜,數訪世務。"[13] 육손과 손씨 사이에서는 장남 육연과 차남 육항이 났다. 육손이 첩을 들여 다른 자녀를 두었다는 기록은 없다.[14] 《삼국지》 〈오서 육손전〉. "會丹楊賊帥費棧受曹公印綬,扇動山越,為作內應,權遣遜討棧。棧支黨多而往兵少,遜乃益施牙幢,分布鼓角,夜潛山谷間,鼓譟而前,應時破散。"[15] 《삼국지》 〈오서 육손전〉. "遂部伍東三郡,彊者為兵,羸者補戶,得精卒數萬人,宿惡蕩除,所過肅清,還屯蕪湖。"[16] 《삼국지》 〈오서 육손전〉. "羽素勇猛,既難為敵,且已據荊州,恩信大行,兼始有功,膽勢益盛,未易圖也。"[17] 《삼국지》 〈오서 여몽전〉. "權乃露檄召蒙還,陰與圖計。"[18] 《삼국지》 〈오서 여몽전〉. "羽果信之,稍撤兵以赴樊。"[19] 《삼국지》 〈오서 육손전〉. "羽覽遜書,有謙下自託之意,意大安,無復所嫌。遜具啟形狀,陳其可禽之要。權乃潛軍而上,使遜與呂蒙為前部,至即克公安、南郡。"[20] 《삼국지》 〈오서 육손전〉. "遜徑進,領宜都太守,拜撫邊將軍,封華亭侯。備宜都太守樊友委郡走,諸城長吏及蠻夷君長皆降。遜請金銀銅印,以假授初附。是歲建安二十四年十一月也。"[21] 《삼국지》 〈오서 오주전〉. "陸遜別取宜都,獲秭歸、枝江、夷道,還屯夷陵,守峽口以備蜀。"[22] 《삼국지》 〈오서 육손전〉. "前後斬獲招納,凡數萬計。權以遜為右護軍、鎮西將軍,進封婁侯。"[23] 《삼국지》 〈오서 육손전〉 배송지 주 인용 《오서》. "權嘉遜功德,欲殊顯之,雖為上將軍列侯,猶欲令歷本州舉命,乃使揚州牧呂範就辟別駕從事,舉茂才。"[24] 《삼국지》 〈오서 육손전〉. "今荊州始定,人物未達,臣愚慺慺,乞普加覆載抽拔之恩,令並獲自進,然後四海延頸,思歸大化。權敬納其言。"[25] 《삼국지》 〈촉서 선주전〉. "孫權遣書請和,先主盛怒不許。吳將陸議、李異、劉阿等屯巫、秭歸;將軍吳班、馮習自巫攻破異等,軍次秭歸。"[26] 《삼국지》 〈오서 육손전〉. "黃武元年,劉備率大眾來向西界,權命遜為大都督、假節,督朱然、潘璋、宋謙、韓當、徐盛、鮮于丹、孫桓等五萬人拒之。備從巫峽、建平連圍至夷陵界,立數十屯,以金錦爵賞誘動諸夷,使將軍馮習為大督,張南為前部,輔匡、趙融、廖淳、傅肜等各為別督。"[27] 《삼국지》 〈촉서 선주전〉. "二年春正月,先主軍還秭歸,將軍吳班、陳式水軍屯夷陵,夾江東西岸。二月,先主自秭歸率諸將進軍,緣山截嶺,於夷道猇亭駐營。" 유비군의 규모는 손권이 위나라에 올린 보고에 "유비의 무리 4만 명과 말 2~3천 필이 자귀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서 문제기〉 배송지 주 인용 《위서》. "孫權上書說劉備支黨四萬人馬二三千匹出秭歸"[28] 《삼국지》 〈오서 육손전〉. "備知其計不可,乃引伏兵八千,從谷中出。遜曰:「所以不聽諸君擊班者,揣之必有巧故也。」"[29] 《삼국지》 〈위서 문제기〉. "後七日,破備書到。"[30] 《삼국지》 〈촉서 조운전〉 배송지 주 인용 《조운별전》. "先主不聽,遂東征,留雲督江州。先主失利於秭歸,雲進兵至永安,吳軍已退。"[31] 《삼국지》 〈오서 육손전〉. "桓後見遜曰:「前實怨不見救,定至今日,乃知調度自有方耳。」"[32] 정사에는 이릉에서 육손에게 불복한 장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손견 때부터 종군한 한당이 '옛 장수', 종실인 손환이 '귀척'에 해당했으리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33] 《삼국지》 〈오서 육손전〉. "遜與朱然、駱統以為曹丕大合士眾,外託助國討備,內實有姦心,謹決計輒還。無幾,魏軍果出,三方受敵也。" 당시 백제성에는 유비가 머물며 방비를 갖추고 있었고, 강주의 조운도 영안으로 나와 있었다. 추격했다면 성과를 내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위군의 배후 공격까지 받았을 것이므로, 육손 등의 판단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34] 이때 위군과 싸운 기록은 주연, 서성, 반장, 송겸, 낙통 등에게 남아 있지만 육손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유비와 서신을 주고받은 기록으로 보아 백제성의 유비를 견제하면서 화친 교섭을 주선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35] 《삼국지》 〈오서 육손전〉. "諸葛亮秉政,與權連和,時事所宜,權輒令遜語亮,並刻權印,以置遜所。權每與禪、亮書,常過示遜,輕重可否,有所不安,便令改定,以印封行之。"[36] 《삼국지》 〈오서 오주전〉. "是時陸遜以所在少穀,表令諸將增廣農畝。權報曰:「甚善!今孤父子親自受田,車中八牛以為四耦,雖未及古人,亦欲與眾均等其勞也。」"[37] 《삼국지》 〈오서 오주전〉. "冬十月,陸遜陳便宜,勸以施德緩刑,寬賦息調。"[38] 《삼국지》 〈오서 오주전〉. "於是令有司盡寫科條,使郎中褚逢齎以就遜及諸葛瑾,意所不安,令損益之。"[39] 《삼국지》 〈오서 육손전〉. "休既覺知,恥見欺誘,自恃兵馬精多,遂交戰。遜自為中部,令朱桓、全琮為左右翼,三道俱進,果衝休伏兵,因驅走之,追亡逐北,徑至夾石,斬獲萬餘,牛馬騾驢車乘萬兩,軍資器械略盡。休還,疽發背死。"[40] 《삼국지》 〈오서 육손전〉. "諸軍振旅過武昌,權令左右以御蓋覆遜,入出殿門。凡所賜遜,皆御物上珍,於時莫與為比。遣還西陵。"[41] 《삼국지》 〈오서 육손전〉. "黃龍元年,拜上大將軍、右都護。是歲,權東巡建業,留太子、皇子及尚書九官,徵遜輔太子,並掌荊州及豫章三郡事,董督軍國。"[42] 《삼국지》 〈오서 육손전〉. "遜正色曰:「君侯宜勤覽經典以自新益,用此何為?」慮即時毀徹之。"[43] 《삼국지》 〈오서 육손전〉. "射聲校尉松於公子中最親,戲兵不整,遜對之髡其職吏。"[44] 《삼국지》 〈오서 육손전〉. "禮之長於刑久矣,廙以細辯而詭先聖之教,皆非也。君今侍東宮,宜遵仁義以彰德音,若彼之談,不須講也。"[45] 《삼국지》 〈오서 전종전〉. "殊方異域,隔絕瘴海,水土氣毒,自古有之,兵入民出,必生疾病,轉相污染,往者懼不能反,所獲何可多致?…權不聽。"[46] 《삼국지》 〈오서 육손전〉. "權遂征夷州,得不補失。"[47] 《삼국지》 〈오서 전종전〉. "軍行經歲,士眾疾疫死者十有八九,權深悔之。後言次及之,琮對曰:「當是時,羣臣有不諫者,臣以為不忠。」"[48] 《삼국지》 〈오서 오주전〉. "夏五月,權遣陸遜、諸葛瑾等屯江夏、沔口,孫韶、張承等向廣陵、淮陽,權率大眾圍合肥新城。是時蜀相諸葛亮出武功,權謂魏明帝不能遠出。"[49] 《삼국지》 〈위서 만총전〉. "權自將號十萬,至合肥新城。寵馳往赴,募壯士數十人,折松為炬,灌以麻油,從上風放火,燒賊攻具,射殺權弟子孫泰。賊於是引退。" 《삼국지》 〈위서 명제기〉. "帝軍未至數百里,權遁走,議、韶等亦退。"[50] 〈육손전〉은 이 일을 236년(가화 5년)의 일로 적었다. 그러나 〈오주전〉의 236년 조에는 북벌 기사가 없고, 《자치통감》은 234년 합비 출병 때의 일로 보았다.[51] 《삼국지》 〈오서 육손전〉. "乃密與瑾立計,令瑾督舟船,遜悉上兵馬,以向襄陽城。敵素憚遜,遽還赴城。瑾便引船出,遜徐整部伍,張拓聲勢,步趨船,敵不敢干。"[52] 《삼국지》 〈오서 육손전〉. "石陽市盛,峻等奄至,人皆捐物入城。城門噎不得關,敵乃自斫殺己民,然後得闔。斬首獲生,凡千餘人。"[53] 《삼국지》 〈오서 육손전〉. "其所生得,皆加營護,不令兵士干擾侵侮。將家屬來者,使就料視。若亡其妻子者,即給衣糧,厚加慰勞,發遣令還,或有感慕相攜而歸者。鄰境懷之,江夏功曹趙濯、弋陽備將裴生及夷王梅頤等,並帥支黨來附遜。遜傾財帛,周贍經恤。"[54] 《삼국지》 〈오서 육손전〉. "以書置界上,式兵得書以見式,式惶懼,遂自送妻子還洛。由是吏士不復親附,遂以免罷。" 배송지는 이 일도 "변경의 장수가 해를 끼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라, 녹식이 죄를 얻어도 후임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큰 우환이 될 것도 아닌데 굳이 작은 속임수를 써서 고상한 생각을 깎을 까닭이 있는가(邊將為害,蓋其常事,使逯式得罪,代者亦復如之,自非狡焉思肆,將成大患,何足虧損雅慮,尚為小詐哉)"라며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55] 《삼국지》 〈오서 오주전〉. "鄱陽賊彭旦等為亂。…二月,陸遜討彭旦等,其年,皆破之。"[56] 《삼국지》 〈오서 오주전〉. "將軍胡綜議以為…故為忠臣不得為孝子,宜定科文,示以大辟。…丞相雍奏從大辟。其後吳令孟宗喪母奔赴,已而自拘於武昌以聽刑。陸遜陳其素行,因為之請,權乃減宗一等,後不得以為比,因此遂絕。"[57] 《삼국지》 〈오서 육손전〉. "中郎將周祗乞於鄱陽召募,事下問遜。遜以為此郡民易動難安,不可與召,恐致賊寇。而祗固陳取之,郡民吳遽等果作賊殺祗,攻沒諸縣。豫章、廬陵宿惡民,並應遽為寇。遜自聞,輒討即破,遽等相率降,遜料得精兵八千餘人,三郡平。"[58] 《삼국지》 〈오서 진무전〉 부 진표. "鄱陽民吳遽等為亂,攻沒城郭,屬縣搖動,表便越界赴討,遽以破敗,遂降。陸遜拜表偏將軍,進封都鄉侯,北屯章阬。"[59] 《삼국지》 〈오서 오주전〉. "初,權信任校事呂壹,壹性苛慘,用法深刻。太子登數諫,權不納,大臣由是莫敢言。"[60] 《삼국지》 〈오서 육손전〉. "時中書典校呂壹,竊弄權柄,擅作威福,遜與太常潘濬同心憂之,言至流涕。"[61] 여일은 주거의 부하가 돈을 가로챘다고 의심해 담당자를 매질하다 죽게 했고, 주거마저 부하를 감싼다고 무고했다. 주거는 스스로 해명하지 못해 처분을 기다렸는데, 몇 달 뒤 전군리(典軍吏) 유조(劉助)가 진상을 밝히자 손권은 "주거조차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 하물며 관리와 백성이랴" 하며 여일의 죄를 끝까지 다스렸다. 《삼국지》 〈오서 주거전〉. "權大感寤曰:「朱據見枉,況吏民乎?」乃窮治壹罪,賞助百萬。"[62] 《삼국지》 〈오서 오주전〉. "後壹姦罪發露伏誅,權引咎責躬,乃使中書郎袁禮告謝諸大將,因問時事所當損益。" 〈육손전〉도 "손권은 뒤에 여일을 죽이고 깊이 자책했다(後權誅壹,深以自責)"고 적었다.[63] 《삼국지》 〈오서 오주전〉. "百官奏立皇后及四王,詔曰:…孤甚不取,其釋此議。" 손권은 251년에야 반씨를 황후로 세웠다.[64] 《삼국지》 〈오서 손화전〉 배송지 주 인용 은기 《통어》. "初拜猶同宮室,禮秩未分。羣公之議,以為太子、國王上下有序,禮秩宜異,於是分宮別僚,而隙端開矣。"[65] "丞相陸遜、大將軍諸葛恪、太常顧譚、驃騎將軍朱據、會稽太守滕胤、大都督施績、尚書丁密等奉禮而行,宗事太子". 직함은 뒷날의 것을 기준으로 적었다.[66] 김일제는 전한 무제 때의 대신으로, 맏아들이 궁녀와 희롱하는 것을 보고 그 아들을 죽였다. 전기는 250년 손패가 사사된 뒤 처형되었고, 257년에는 수춘에서 전역(全懌)·전단(全端) 등 전씨 일족 다수가 위나라에 투항했다. 전종 자신은 그 전에 세상을 떠났다.[67] 《삼국지》 〈오서 육손전〉. "書三四上,及求詣都,欲口論適庶之分,以匡得失。既不聽許". 손권이 황후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손화와 손패는 모두 황후 소생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적서는 이미 세운 태자와 번왕 사이의 위계를 가리킨다.[68] 《삼국지》 〈오서 육개전〉 부 육윤. "坐收下獄,楚毒備至,終無他辭。"[69] 양축이 실제로 처형된 것은 250년 손패가 사사될 때이며, 시신은 강에 버려졌다. 《삼국지》 〈오서 손패전〉. "霸亦賜死,流竺尸於江。" 따라서 《오록》의 이 대목은 여러 해에 걸친 일을 한데 묶어 적은 것으로 보인다.[70] 《삼국지》 〈오서 육손전〉. "而遜外生顧譚、顧承、姚信,並以親附太子,枉見流徙。"[71] 《삼국지》 〈오서 오찬전〉. "遭二宮之變,抗言執正,明嫡庶之分,欲使魯王霸出駐夏口,遣楊竺不得令在都邑。又數以消息語陸遜,遜時駐武昌,連表諫爭,由此為霸、竺等所譖害,下獄誅。" 〈육손전〉은 "육손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은 일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죽었다(坐數與遜交書,下獄死)"고 적었다.[72] 이 고발은 〈육항전〉에 손권이 "양축이 아뢴 육손의 20가지 일(楊竺所白遜二十事)"로 육항을 힐문했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73] 《삼국지》 〈오서 육손전〉. "權累遣中使責讓遜,遜憤恚致卒,時年六十三,家無餘財。" 〈오주전〉. "八年春二月,丞相陸遜卒。" 진수는 이궁지쟁에서 실제로 자결을 명한 경우는 손패의 '사사(賜死)', 주거의 '추사사(追賜死)'처럼 그대로 적었다. 육손에게는 그런 기록이 없다.[74] 《삼국지》 〈오서 육손전〉. "初暨豔造營府之論,遜諫戒之,以為必禍。又謂諸葛恪曰:「在我前者,吾必奉之同升,在我下者,則扶持之。今觀君氣陵其上,意蔑乎下,非安德之基也。」又廣陵楊竺少獲聲名,而遜謂之終敗,勸竺兄穆令與別族。其先覩如此。" 기염은 결국 자살했고, 제갈각은 253년 일족과 함께 주살되었으며, 양축은 250년 처형되었다. 양목은 여러 번 양축을 말린 덕에 사형을 면하고 남쪽으로 유배되는 데 그쳤다(〈손패전〉).[75] 《삼국지》 〈오서 육항전〉. "遜卒時,年二十,拜建武校尉,領遜眾五千人,送葬東還,詣都謝恩。孫權以楊竺所白遜二十事問抗,禁絕賓客,中使臨詰,抗無所顧問,事事條答,權意漸解。"[76] 《삼국지》 〈오서 육손전〉. "孫休時追謚遜曰昭侯。"[77] 《삼국지》 〈오서 육항전〉. "二月壬戌,晏為王濬別軍所殺,癸亥,景亦遇害"[78] 《삼국지》 〈오서 육항전〉 배송지 주 인용 《기운별전》. 같은 글은 육항이 보천을 쳐서 이겼을 때 어린아이까지 죽이자 식자들이 후세에 반드시 재앙을 받으리라 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初抗之克步闡也,誅及嬰孩,識道者尤之曰:「後世必受其殃。」及機之誅,三族無遺。"[79] 연의는 이릉대전 때의 육손을 젊은 서생으로 그리지만, 정사에서 이때 육손은 마흔 살 안팎이었다. 여몽보다 다섯 살, 제갈량보다 두 살 아래일 뿐이다. 손씨 휘하의 숙장들을 제치고 지휘관이 되기에는 젊은 편이었지만, 정사에 그가 어렸다는 서술은 없다.[80] 정사에는 이런 반대가 없다. 정사의 육손은 이미 20년 가까이 군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고, 오의 사성 출신에 손책의 사위였으므로 무시당할 처지도 아니었다. 실제로 유비가 쳐들어오자 육손은 가장 먼저 최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연의는 이 부분을 빼고 육손을 이릉대전 후반에 비장의 카드처럼 등장시킨다.[81] 정사에는 이릉에서 육손에게 불복한 장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한당은 손견 때부터의 노장이라는 이유로 악역을 떠맡은 셈이다.[82] 예상대로 위군이 강동을 침공하려 했지만 육손이 미리 손을 써 둔 덕분에 막을 수 있었다고 지나가듯 언급된다. 실제 역사에서 이릉대전 직후 위군의 침공을 막아 낸 것은 주연과 반장 등의 몫이었지만, 연의에서는 이 둘이 이릉에서 죽기 때문에 그 공이 육손에게 돌아간 셈이다. 이런 이야기를 넣은 것은 주연과 반장이 실제 역사와 달리 조운과 관흥의 손에 죽은 탓에 위군의 침공을 막을 사람이 필요했고, 그러면서도 육손이 제갈량보다 한 수 아래라는 설정을 넣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83] 다만 육손의 경우는 아들 육항의 열전이 같이 실려 있다. 제갈량의 경우는 외아들인 제갈첨의 단독 열전이 없어서 배송지가 실어 놓은 주석으로 실려 있다.[84] 《삼국지》 〈오서 손익전〉 배송지 주 인용 《전략》. "策臨卒,張昭等謂策當以兵屬儼,而策呼權,佩以印綬。"[85] 《삼국지》 〈오서 장소전〉. "吳國士人入宮則拜孤,出宮則拜君,孤之敬君,亦為至矣,而數於眾中折孤,孤嘗恐失計。" 장소는 서주에서 내려온 팽성 장씨로, 강동의 오군 장씨와는 다른 집안이다.[86] 비슷한 예로 조선 태종이 개국공신 정도전을 제거하고 즉위한 뒤 외척 민씨 형제를 숙청한 일을 드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런 비교는 권력 구조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87] 《삼국지》 〈오서 우육장낙육오주전〉 진수 평. "吾粲、朱據遭罹屯蹇,以正喪身,悲夫!"[88] 다만 손호는 육항이 죽은 뒤 육손의 족자(族子) 육개의 가족을 건안으로 옮기는 등 육씨를 마냥 우대하지는 않았다. 《삼국지》 〈오서 육개전〉. "皓常銜凱數犯顏忤旨…抗卒後,竟徙凱家於建安。"[89] 손책과는 동서이자 거병 동지였으니 손견 이래의 숙장들과도 교분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