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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09:33:48

신종(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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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申鍾
생몰연도 불명

후조의 인물. 자는 도시(道時). 기주(冀州) 위군(魏郡) 출신. 《태평어람》과 《십육국춘추》는 신록(申錄)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신종은 후조에 임관하여 광창현(廣昌縣)령을 지냈는데, 그가 재임 중에 흰 새가 날아와 그의 정원에 둥지를 틀었고, 관창 앞에는 감로가 내렸다고 한다.

연희 원년(334년) 11월, 승상 석호가 황제 석홍을 폐위시킨 후 거섭천왕을 칭하자, 신종은 중앙으로 들어가 시중에 임명되었고, 거듭 승진하여 사도에 올랐다.

건무 6년(340년) 10월, 천왕 석호가 진공(秦公) 석도(石韜)를 태위로 삼아 그 형인 태자 석선(石宣)과 함께 포상과 형벌을 관장케 하니, 신종이 이에 대해 간하였으나 석호는 듣지 않았다.

건무 13년(347년) 8월, 석호가 상서 장군(張羣)에게 명해, 인근 지역에서 남녀 백성 160,000여 명을 징집하고 수레 100,000승을 징발하여 대규모 토목공사에 동원하였다. 신종은 석박, 조람(趙攬)과 더불어 석호에게 간언하였으나, 석호는 오히려 공사를 감독하는 장군을 더욱 독촉하였다.

영녕 원년(350년) 정월, 대장군 석민이 정변을 일으켜 황제 석감을 살해하자, 신종은 사공 낭개(郎闓) 등과 함께 염민에게 존호를 올렸다. 이에 석민은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한 뒤, 석씨를 버리고 원래 성씨인 염씨(冉氏)로 고쳤다. 이때 신종은 태위에 임명되었다.

영흥 3년(352년) 8월, 황제 염민이 전연에게 패해 용성(龍城)에서 참수당하고, 장수교위 마원(馬願) 등은 업의 성문을 열어 전연에 투항하였다. 업에 입성한 보필장군 모용평(慕容評)은 염민의 황후 동씨(董氏)와 태자 염지를 비롯한 염위의 왕공들과 태위 신종, 사공 조매(條枚) 등 조정의 중신들을 사로잡아 계(薊)로 보냈다. 연왕 모용준은 신종을 대장군 우장사로 삼았고, 이후의 행적은 나오지 않는다. 훗날 그의 손자인 신선(申宣)과 증손자 신념동진에 귀순해 남쪽에 정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