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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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乙逸생몰연도 미상
전연의 인물. 자는 불명. 기주(冀州) 평원군(平原郡) 출신.
2. 생애
함화 8년(333년) 11월, 동이호군을 지내던 중 손기(孫機)와 양평현령 왕영(王永)이 요동성을 들어 모용인에게 호응하자, 동이교위 봉추(封抽), 요동상 한교(韓矯)와 함께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모용황이 모용인으로부터 요동성을 탈환한 이후에는 다시 돌아와서 현도태수로 부임하였다.원새 원년(352년) 11월, 경소제 모용준이 황제로 즉위하여 용성(龍城)에 유대(留臺)를 건립하고, 을일을 상서로 삼아 유대에서 상서성의 업무를 처리케 하였다. 이후 유주(幽州)자사로 옮겨졌다.
원새 6년(357년) 정월,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좌광록대부에 임명되어 부부가 함께 작은 수레에 올라 도읍으로 향하였다. 을일 부부가 가는 길에 아들 을장(乙璋)이 수십 기의 기병을 대동하고 복식을 화려하게 하여 길가에서 부모를 영접하니, 을일은 크게 분노하여 마차 문을 닫아걸은 채 아들과 말을 섞지 않고 계속 이동하였다. 이윽고 도성에 도착하자 을일은 그제서야 아들에게 책망하는 말을 하였는데, 을장은 들은 체 만 체 하면서 행동거지를 고치지 않았다. 오히려 을장이 여러 차례 승진하여 중서령, 어사중승을 역임하자, 을일은 한탄하며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수양하고 욕심을 이겨냈기에, 가까스로 도리를 지켜 죄를 면할 수 있었다. 하나, 을장은 절약과 검소함에 힘쓰기는 커녕 사치스럽게 지내고 방종하면서도 더욱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어찌 을장의 행운이 오늘날의 능이(陵夷)[1]라 이를 수 없겠는가!"
다만 을일이나 을장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1] 처음에는 성하다가 점점 쇠퇴할 것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