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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200><colcolor=#670000> 고려의 제후왕 고려 태조의 왕자(?) 필영대왕 | 弼榮大王 | |
생몰 | ? ~ ? |
본관 | 개성 왕씨 (추정) |
휘 | 미상 |
부모 | 부왕 태조 (추정) 모후 불명 |
봉호 | 불명 |
시호 |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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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초기의 금석문인 〈징효대사탑비〉에서 확인되는 인물이다.2. 상세
위의 〈징효대사탑비〉는 혜종 2년인 944년에 만들어졌고, 한동안 잊혀지다가 1997년에 발견되었다.
비석의 뒷부분에 적힌 음기에는 징효대사의 제자 목록이 발견되는데, 징효대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승려들과 당시 흥녕사(興寧寺)의 실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던 여러 유력자의 명단이다.
여기에는 정종이 '왕요군(王堯君)', 광종이 '왕소군(王昭君)'으로 지칭되어 있으며, ▨▨대왕과 필영대왕, 태조 후궁인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의 아버지 영장(英章), 태조 후궁인 정목부인의 아버지 왕경(王景), 태조의 왕녀 또는 후궁으로 보이는 청단궁주(淸端宮主), 경순왕의 장남인 김일(金鎰), 유긍달, 왕규 등이 적혀있다.
▨▨대왕과 필영대왕은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태조의 왕자가 문원대왕으로 봉작된 사례가 있어서, 필영대왕은 광종과 ▨▨대왕보다 항렬이 낮은 태조의 아들로 파악된다. 이에 따르면 광종보다도 항렬이 낮은 필영대왕이 '대왕'으로 명기되어 있는 점은 〈징효대사탑비〉가 만들어진 시점에는 이미 죽어서 왕작이 추봉된 상태로 추측된다. 다만 '필영(弼榮)'은 시호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고, 같은 비문에 적힌 '왕요군'과 '왕소군'의 사례를 통해 보면, 자(字) 또는 별명이 적힌 사례로 짐작된다.
최근에는 ▨▨대왕과 필영대왕 부분의 '大王'이 원래는 '대광(大匡)'이었으며 '匚'획이 마모된 것이라는 의견이 등장했다. 왕족 인물로 확인되는 정종(왕요군), 광종(왕소군), 청단궁주 등이 다른 인물들과 달리 대두(擡頭) 표기되어 있지만 ▨▨대왕과 필영대왕은 그렇지 않기에 왕족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논지이다. 이 의견에 따를 경우 대광 ▨▨과 대광 필영은 같은 행에서 언급되는 영장·왕경과 함께 태조의 장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필영은 태조의 후궁 중에 아버지가 확인되지 않는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의 부친이자 박질영과 형제 관계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