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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30 06:22:15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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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국조 의조 세조
대종 안종
비정통
안경공 승화후 덕흥군
성격 불명
문원대왕 ▨▨대왕 필영대왕
정간왕 양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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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추존왕(?)
▨▨대왕 | ▨▨大王
출생 ?[1]
사망 ?
본관 개성 왕씨 (추정)
미상
부모 부왕 태조 (추정)
모후 불명
봉호 불명
시호 불명

1. 개요2. 상세3. 둘러보기

1. 개요

고려 초기의 금석문인 〈징효대사탑비〉에서 확인되는 인물이다.

2. 상세

파일:▨▨대왕.png
[04] 王堯君
[05] 王昭君
[06]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07] 淸端宮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08]   權悅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의 음기(陰記) 중 ▨▨大王 부분 탁본 및 판독문 일부. 판독문은 세로로 써진 비문을 편의상 가로로 고쳐 적은 것이다.

위의 〈징효대사탑비〉는 924년(태조 7)에 지은 비문을 944년(혜종 1)에 새긴 것으로, 1994년부터 학술적인 검토가 이뤄졌다.

비석의 뒷부분에 적힌 음기에는 징효대사의 제자 목록이 발견되는데, 징효대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승려들과 당시 흥녕사(興寧寺)의 실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던 여러 유력자의 명단이다.

여기에는 정종이 '왕요군(王堯君)', 광종이 '왕소군(王昭君)'으로 지칭되어 있으며, ▨▨대왕과 필영대왕, 태조 후궁인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2]의 아버지 영장(英章), 태조 후궁인 정목부인(貞穆夫人)[3]의 아버지 왕경(王景), 태조의 후궁이나 왕녀로 추정되는 청단궁주(淸端宮主)[4], 소판 김일(金鎰)[5], 유긍달(劉兢達)[6], 왕규(王規)[7] 등이 적혀 있다.

923년생인 정종과 925년생인 광종이 언급되고 있는 점에서, 음기 부분의 후원자 명단은 924년에 작성된 비문과 별개로 비석이 세워진 944년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혜종 즉위 무렵의 정치 세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대왕과 필영대왕은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태조의 왕자가 문원대왕으로 봉작된 사례가 있어서, ▨▨대왕은 정종과 광종보다 항렬이 낮은 태조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광종보다도 항렬이 낮은 필영대왕이 '대왕'으로 명기되어 있는 이유는 〈징효대사탑비〉가 만들어진 시점에는 이미 죽어서 왕작이 추봉된 상태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대왕은 비문이 마모되어 정확한 봉호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인데, 남아있는 자획을 통해 보면 '文元'과는 다른 형태의 글자임을 확인할 수 있기에, ▨▨대왕은 문원대왕과 별개의 인물로 파악된다.

학계에서도 ▨▨대왕과 필영대왕을 막연하게 태조의 왕자나 혈족으로 추측해 왔다.[8] 그러나 〈징효대사탑비〉의 ▨▨대왕과 필영대왕 부분의 판독을 '▨▨大匡' 및 '弼榮大匡'으로 정정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9] 이에 따라 ▨▨과 필영의 칭호에 관한 부분은 판단을 유보[10]하거나 대광(大匡)으로 정정하는 판독을 지지[11]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대광으로 정정하는 의견에 따를 경우, ▨▨과 필영은 같은 행에서 언급되는 영장 및 왕경과 함께 태조의 장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청단궁주와 같은 행에 있는 긍달도 태조의 장인으로 왕요군, 왕소군의 외조부이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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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상보 상보 낙랑군왕 실직군왕 문원대왕
견훤 김부 김위옹 왕정
<rowcolor=#670000> 정간왕 양헌왕 (성격 불명)
왕기 왕도 ▨▨대왕 필영대왕
<rowcolor=#670000> 탐라국왕 우산국왕
}}}}}}}}}

[1] 944년에 건립된 <징효대사탑비> 비문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9~10세기 출생으로 추정된다. 태조의 아들이 맞다면 10세기 출생으로 한정된다.[2] 태조의 제23부인.[3] 태조의 제8부인.[4] 청단(淸端)은 산예(狻猊; 개성)에서 안서(安西; 해주)로 가는 역로망에 위치한 역 중 하나로,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에선 조선시대의 청단(靑丹)과 동일한 역으로 추정하여 현재 북한의 청단군과 같은 곳으로 보았다. 하지만 고려 초기에 궁원(宮院)의 이름으로 지명을 활용하는 사례들은 해당 궁주(宮主)의 출신 고을에서 따온 경우가 많았던 점에서, 정식 고을의 이름이 아닌 역참의 지명을 활용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청단은 지명이 아니라 단순한 미칭일 가능성도 있다.[5] 890~897년에 찬술된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朗慧和尙塔碑)에 나오는 소판 김일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연대상 897년생으로 추정되는 경순왕보다 연배가 위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순왕의 태자가 김일이라는 주장(경주 김씨 등 신라계 김씨 족보)에 의하더라도 태자와 징효대사탑비에 나오는 소판 김일은 동명이인이다.[6] 태조의 제3왕후 신명왕후(神明王后)의 아버지.[7] 태조의 제15부인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제16부인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및 혜종의 제2부인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의 아버지.[8] 노용필, 2007, 『신라고려초정치사연구(新羅高麗初政治史硏究)』, 한국사학.[9] 이인재, 2008, 「충주 정토사 玄暉와 영월 흥녕사 折中: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49, 한국고대사연구회, 315쪽의 각주 70. 해당 논고에서 어떠한 경위에서 '大王'을 '大匡'으로 정정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匡'자에서 '匚' 획이 결락(缺落)된 탁본이거나 비문 자체의 오기(誤記)로 판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 김창현, 2009,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한국고대사연구』 55, 한국고대사연구회.[11] 황향주, 2022, 『10~13세기 고려(高麗) 왕실(王室)의 구조(構造)와 편제(編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후 해당 학위논문을 보강한 논문(「고려 태조~목종대 왕실의 편제 -왕실 남성의 ‘태자(太子)’·‘군(君)’ 칭호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71, 한국중세사학회.)에서도 동일한 견해를 피력했다. 정종(왕요군), 광종(왕소군), 청단궁주 등 왕족으로 확인되는 인물들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대두(擡頭) 표기되어 있으나 ▨▨과 필영은 그렇지 않기에 왕족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논거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