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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광해군의 후궁 귀인 홍씨 | 貴人 洪氏 | |||
출생 | 1601년[출처] | ||
조선 충청도 홍주목 (現 충청남도 홍성군) | |||
사망 | 연대 미상 | ||
조선 충청도 보령군 유배지 사저 (現 충청남도 보령시 일대)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조선 숙의 | ||
1617년 9월 7일 ~ 1618년 8월 27일 | |||
조선 소의 | |||
1618년 8월 27일 ~ 1622년 이전 | |||
조선 귀인 | |||
1622년 이전 ~ 1623년 4월 1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풍산 홍씨 | |
부모 | 부친 홍매(洪邁) 모친 이천 서씨 | ||
배우자 | 광해군 | ||
봉작 | 숙의(淑儀) → 소의(昭儀) → 귀인(貴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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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광해군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홍주 목사[2]를 지낸 홍매(洪邁)이며, 어머니는 이천 서씨 서극홍(徐克弘)[3]의 딸이다.광해군의 후궁이 되면서 집안이 혜택을 누렸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출되어 보령에 유배되었다. 그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2. 생애
1617년(광해 9) 후궁 간택에서 윤홍업의 딸과 함께 선발되어 숙의(淑儀)로 봉작되었다.본래 내명부의 예법에 따르면 숙의는 세 명만을 둘 수 있는데, 광해군은 홍씨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나 두어서 비판받았다. 또한 여러 후궁의 일족들이 관직에 제수되고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 홍씨는 이듬해인 1618년(광해군 10년)에 소의(昭儀)로 품계가 올랐으며, 이후 귀인(貴人)으로 한 단계 더 승격되었다.[A][5]
한편, 귀인 홍씨의 아버지 홍매는 고양군수였다가 딸이 후궁이 되자 연안부사가 되었고, 홍주목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1619년(광해 11년) 황연도(黃延道)[6] 순안 어사 한명욱(韓明勖)이 홍매가 가렴주구를 일삼는다 하여 탄핵하였으나 광해군은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홍매가 세력을 믿고 재물을 탐하여 가는 곳마다 고을을 텅 비게 만들었다고 한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홍매는 강릉에, 귀인 홍씨는 보령에 유배되는 처분을 받았다.
[출처] 서치상. (2020).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건축역사연구, 29(1), 65-76.[2] 홍주는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이다. 조선시대에는 홍주목(洪州牧)이라고 하였다.[3] 서희의 직계 후손(16대손)이다.[A] 서치상. (2020).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건축역사연구, 29(1), 65-76.[5] 정확한 진급 시기는 미상이나 1622년(광해군 14년)에 귀인으로 칭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 이전에 귀인에 봉작된 것으로 보인다.[6] 1616년(광해군 8년) 황해도를 황연도(黃延道)로 고쳤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도로 황해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