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05 14:10:13

칠거지악

1. 개요2. 원문 내용3. 사유4. 삼불거5. 현실6. 여담

1. 개요

아내를 내쫓는 이유가 되는 7가지 사항.

공자의 직계 후손들이 공자의 어록을 보관해 놓은 〈공자가어〉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삼종지도가 나오는 《본명해》편에 같이 나온다. 칠거지악은 유교적 질서가 강했던 조선에서 이혼 제도에 바로 적용되었다. 사대부의 남편 혹은 시가(媤家)에서 아내를 내칠 수 있었던 근거였으며 출가외인과 함께 조선시대 여성의 인권이 낮았다는 예시로 많이 거론된다. 만약 칠거지악을 저지른 아내를 내치지 않은 경우에는 남편이 곤장 80대 형에 처해지게 되니 어느 정도 강제력이 있는 법률이었다. 다만 평민들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2. 원문 내용

女有五不取
여자로서 다섯 가지 취하지 말아야 할 남자가 있습니다.

逆家子者 亂家子者 世有刑人子者 世有惡疾子者 喪父長子者
반역자 집안의 아들, (인륜을) 어지럽힌 집안[1]의 아들, 대대로 형벌을 받은 집안의 아들, 대대로 악질을 앓은 집안의 아들, 아비의 상(喪)을 치르는 맏아들입니다.

婦有七出 三不去
부인으로서는 일곱가지 쫓겨남(칠출:七出)과 세가지 쫓겨날 수 없음(삼불거:三不去)이 있습니다.

七出者
일곱가지의 내쫓음인 칠출(七出)이란,

不順父母出者 無子者 淫僻者 嫉妬者 惡疾者 多口舌[2]者 竊盜者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모를) 쫓아내는 자,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 음란함에 빠진 자, 질투를 하는 자, 악질이 있는 자, 시비 걸거나 비방하는 것이 많은 자, 도둑질하는 자입니다.

三不去者
그리고 내쫓지 못하는 삼불거(三不去)란 것은,

謂有所取無所歸 與共更三年之喪 先貧賤後富貴
돌아갈 곳이 없는 여자이며, 자기와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른 여자이며, 먼저는 가난하였으나 뒤에 부유함을 이루게 되었을 때 (그 고난을) 같이한 여자입니다.
《공자가어》 <본명해> 中

3. 사유

☆자는 삼불거 상태라도 내칠 수 있는 조항.
  1.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당시 시집살이라는 것은 양반에게도 꽤 고된 일이었다. 기본적인 가사는 하인들이 처리해 준다지만 삶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가지 성리학적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거나, 육아와 의류관리 등 남편을 재대로 보조하지 못하거나, 시부모의 수발을 드는데 심기를 거슬릴 만한 짓을 했다면 이 모든 책임은 그 며느리에게로 돌아갔다. 잠깐의 외출도 시부모에게 구박을 당했을 정도였다. 이 항목은 기본적으로는 노인 학대 방지나 노인의 복지후생 개념을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다소 여자에게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시대적인 한계에 가까운 조목이다.
  2.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한 사대부의 특성상 이는 당연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질투와 같이 허영이나 사치로 대체하는 곳도 있었으나 형법대전에선 그냥 빼 버리고 오출사불거가 된다.[3][4][5] 당연하지만 임신 시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는 건 불가능하고 불임은 남성 측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책임만 추궁받았기 때문에 부당할 수밖에 없는 조목이다. 당시엔 그런 걸 몰랐긴 했지만. 실제로 현대 한국은 여아 낙태 문제로 인한 후폭풍을 겪기도 했고 임신 시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식으로 자리잡은 후에는 아들 못 낳았다고 며느리를 내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3. 문란하고 편벽함 ☆: 여성이 저지른 간통은 이혼사유였지만, 남성의 간통은 이혼사유가 아니었다. 혼인관계와는 별개로 간통 행위 자체는 조선시대의 법률[6]에 의하면 남녀 모두 처벌을 받았지만 중종 이후로는 아예 양반가문에서 여자가 간통을 벌인 경우 족보에 그 사실을 기록하여 친자의 출세에 영향이 가게 함으로써 여자의 간통을 가중처벌하였다. 강간 등 일방적인 성범죄는 더욱 강하게 처벌해서 상대가 비록 기녀라고 하여도 동의가 없었다면 강간으로 보았으며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매우 강력하게 응징했다.[7]
  4. 시기와 질투: 여자의 시기와 질투를 매우 좋지 않게 보았다. 조선 말에는 허영이나 사치로 대체하기도 하였고 형법대전에선 시기와 질투는 빠지고 오출사불거가 된다. 말이 좋아 "질투를 이유로 아내를 쫓아낼 수 있다"였지,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봐줬다. 당장 폐비 윤씨의 사례를 보면 성종이 투기를 이유로 폐비 윤씨를 내치려고 하자[8] 임사홍이 "예로부터 투기하지 않은 부인은 드물었습니다."라고 만류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첩에 빠져 처를 내버렸다가 패가망신한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희빈 장씨의 오라비였던 장희재로 본처인 자근아기를 박대하고 첩인 숙정을 본처처럼 취급했는데 이후 자근아기는 남인이 몰락할 때 남인에게 불리한 증언들을 하여[9] 장희재, 숙정 등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본인도 처형당했는데 추정상 본인은 어차피 장희재의 본처라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동안의 설움에 대한 보복을 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5. 유전병: 후세와 집안의 존속이 중요하던 상황에서 유전병은 자녀들에게 끝없이 대물림되어 평생을 위협하는 꽤 중요한 문제인지라 매우 신경썼으며 반대로 신부 측에서도 신랑을 고를 때 이를 따졌다. 위의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처럼 현대 한국에서는 결혼 문화의 변화 및 의학의 발달로 많이 줄었다.
  6. 구설: 구설이란 시비를 걸거나 비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多口舌'이란 시비나 비방이 많은 자를 뜻한다.
  7. 도벽☆: 절도죄. 위의 간통과 더불어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그나마 납득이 갈 만한 경우다. 물론 이것도 여자 쪽에게 적용되는 것이 부당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4. 삼불거

아무리 칠거지악을 범했어도 내칠 수 없는 경우에 대한 규정도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처가가 부차적인 연유로 전멸하여 아내를 내칠 경우 그 아내가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일종의 인도적인 조치로 보인다. 과거에는 가정이 곧 사회복지적인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2. 남편 또는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렀을 때: 각각 정절 또는 효를 증명했으므로 이에 대해 인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2번은 매우 중요시했는데 1처럼 아예 잃을 게 없다고 막나갈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3처럼 유세 부릴 여지도 없기 때문에 2번의 사유가 있는데 칠거지악으로 내친다고 할 경우에는 간통이나 절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시부모와 남편이 벌을 받았다. 당연하지만 간통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효 혹은 정절을 증명하는 것처럼 속여서 시댁을 우롱하고 기만했기 때문에 더 큰 처벌을 받았다. 같이 3년상을 치른 부인은 남편에게 "내가 당신 부모 삼년상까지 치렀는데 당신은 염치없게 기생이랑 노냐? 제정신임?"이라는 편지까지 보내면서 바가지를 긁는다.
  3. 결혼 당시에는 가난했으나 결혼 이후 집안이 부귀해졌을 때: '조강지처'라고 불리며 유교 사회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어려웠을 때 함께한 아내를 성공 후에 버리는 자는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5. 현실

악명(?)과는 달리 조선 초기에는 칠거지악이 그렇게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데 양반이 결혼하는 상대는 대부분 비슷한 격의 다른 양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남아 선호 사상이 존재한들 딸을 자식 취급도 안 한 것은 아니며 이혼당하면 재혼도 못 하는 시대상 딸의 앞길이 그렇게 턱 막히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 리는 없다. 설령 딸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더라도 "저 집은 뭘 했길래 이혼까지 당하냐?" 소리를 들으면서 가문의 위신에 흠집이 가는 게 싫어서라도 반발하였을 것이고 그걸 알기 때문에 칠거지악 운운하며 이혼하자는 말은 절대로 쉽게 꺼낼 수 없었다.[10] 그러니까 칠거지악에 해당한다고 칼같이 이혼당하고 그런 사회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런 법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한 성차별과 사회적 억압에 해당했으며 이를 근거로 여자를 구속하려고 했다는 시대적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써 놓으니 처가 쪽 눈치만 없었으면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조선시대 하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으나 여성의 지위가 극단적으로 낮은 것은 아니었고 양반들은 갈등을 되도록 대화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지성인이 대다수였다. 주먹다짐이며 범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짓을 하면 망나니 취급을 받았다. 칠거지악도 법에 있다며 무작정 따르진 않았고 상황에 따라 되도록이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위에서도 설명했듯 아들을 못 낳는 경우는 명백한 칠거지악 중 하나였지만 보통 그런 상황이 되면 우선적으로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방법을 썼다.

칠거지악을 악용하려다가 역관광을 당한 사례도 기록에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이미'라는 문신이 있었는데 칠거지악 중 2번(아들을 못 낳음)을 가지고 늙은 처를 내치려다 오히려 본인이 곤장을 맞고 관직에서 파직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삼불거를 통해 집안에 헌신하는 사람은 부정을 할 여지도 적다고 판단하는 인식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삼불거에 해당하는 사람이 꽤 많아서 칠거지악이 있어도 내쳐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양반들 사이에 꽤 있었다.[11]

6. 여담


[1] 예를 들어 남매끼리 결혼한다든지[2] 口舌(구설): 시비(是非)하고 비방(誹謗)하는 말을 뜻한다.[3] 다만 칠거지악 중 하나긴 해도 사실 이걸 이유로 본처를 내치고 후처를 맞이하는 것보다 가까운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집안의 갈등을 줄이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수월하였기 때문이다.[4] 대체로 번듯한 집안에서는 딸을 으로 시집보낼 일도 없거니와 씨받이 등으로 인해 많이 왜곡된 개념이지만 당시 양반들의 첩은 대부분 눈이 맞아 데리고 사는 여자였지 대를 이으려고 들이는 경우가 아니었다. 서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생각해 보자. 일반 서민들의 가정에는 첩을 들이는 것보다 조카 등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덜 부담스러웠기도 했다.[5] 다만 아무리 장손 집에 대가 끊길 상황이라도 생으로 자식을 뺏거나 동생 집의 대를 끊으면서까지 양자를 데려올 순 없었다. 그럴 만한 나이 대의 아이가 친척 내에서 없는 경우나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아하는 경우도 있었고 자식이 여럿이라도 아들은 하나뿐이라 보낼 수 없는 경우 등이 있었기 때문에 서민 가정에서는 대를 이을 목적으로 첩을 들이는 경우도 분명히 있었다. 아직도 노인 세대 중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게 남아있는데 이를 그린 다큐 영화로 춘희막이가 있다.[6] 형벌의 기준인 대명률과 간통, 강간을 다스리는 법률인 범간률 기준.[7] 간통과 강간은 대체로 장형 80~100대가 기준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성인 남성이라도 곤장 10대 이상이면 생명에 위협이 오는 것으로 본다. 다 맞기 전에 격통으로 쇼크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하루에 10대씩 끊어서 때리는 식으로 할 수도 있고 그냥 한 번에 때려서 죽일 수도 있다.[8] 이 위기는 2번 있었는데 첫 번째 때에는 무산되었지만 2번째 때에는 결국 폐비가 되었다.[9]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동평군이 "원자의 모후를 중전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장희빈에게 보낸 일, 근래에 남인들이 모여 모의한 일, 인현왕후 사후 오시복을 통해 궁 안의 동태를 살펴봐달라고 한 일, 장희재 아버지의 묘비 훼손 자작극 전말 등등을 전부 얘기했으며 심지어 동평군과 장희재가 잡아떼자 그 때 있었던 일을 생생히 증언하여 반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10] 그래서 처가 쪽의 입김이 세다면 오히려 칠거지악을 범해도 어떻게든 은폐하고 무마하며 그냥 계속 살라고 종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리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정말 어지간히 큰 잘못을 저질러 소문이 다 나는 경우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경우는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11] 단, 위에 설명한 것처럼 간통과 도벽은 그 자체로 이미 범죄였기 때문에 삼불거라고 하여도 내쳤으며 시부모를 해하려 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마 살인 등 더 큰 범죄가 있는데 칠거지악이나 삼불거에서 논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죄는 (남녀불문하고) 다른 법으로 이미 엄중히 처벌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12] 그린 사람은 배금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