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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선호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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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
2.1. 인류학적 측면2.2. 생물학적 측면2.3. 사회학적 측면
3. 종교의 남아 선호 사상4. 한국의 남아 선호 사상
4.1. 역사적, 문화적 배경4.2. 2000년대 이후
5. 외국의 남아 선호 사상6. 부작용
6.1. 여아낙태6.2. 결혼대란, 인구감소6.3. 범죄율 증가
7. 관련 인물
7.1. 실존 인물7.2. 가상 인물
8. 서브컬처9. 관련 문서

1. 개요

Son preference

남아 선호 사상은 동·서양에서 동시에 존재하던 말 그대로 여아보다 남아를 선호하는 경향이다.

인류가 문명을 세우기 이전부터 언제나 존재했던 관념이다. 남아 선호 사상은 농경 민족의 역사에서 고대 이집트와 같은 몇몇 극소수의 문명을 제외하고는 예외를 찾기 힘들다. 이러한 인식은 대체로 노동력에 더 도움을 주던 남성의 신체적 특성이 영향을 주었다.

물론 일반 백성들은 오해와 달리 사대부처럼 예법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성차별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남아선호사상은, 특히 양반과 같은 고위층들이 훨씬 심각했다. 민간에선 단순히 노동력을 중시해서 생겨난 인식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선 집안의 를 이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남존여비라는 심화된 사상을 가지고 여러 예법이란 이름으로 성차별을 정당화했다.

2. 원인

2.1. 인류학적 측면

전통적으로 인류학적 관점에서는 원시의 수렵 기반 사회 구조에서 농경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부각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근대까지 남았거나 현대에도 남아있는 원시적인 수렵 생활을 유지하는 민족들의 경우에는 모계 사회인 경우가 있다. 물론 모계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여아선호사상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1]

농업 혁명이 인간 사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데, 실질적으로 이 시점부터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었으며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한 곳에 무리지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인구 증가도 빠르게 일어났다.

농업혁명은 '''남녀 간의 직업을 고도로 분업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그 이전 시대에도 남자는 수렵을 주로 담당하고 여성은 채집이나 육아를 맡는 정도의 분업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이전의 사회를 수렵 채집 사회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으며, 남성이 어쩌다 성공하는 큰 크기의 동물 사냥과 여성이 늘상 채집하는 식량의 양이 크게 차이나지 않았기에 남성과 여성의 생산력은 동등했고, 따라서 남녀가 평등한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남녀의 일일 이동 반경은 별 차이 없던 시절이 지나고 농경 사회에 들어서면서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넓은 이동 반경과 사회의 안전 보장에 관련된 일을 맡게 되자, 그 지위가 더욱 증대되었다.

쉽게 말해서, 남자들이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무기를 들고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사회와 가정을 지키는 동안 여자들은 집에서 육아 및 안생활에 집중하는 분업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2.2. 생물학적 측면

남아 선호 관념이 보편적으로 퍼진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물학적인 학설들도 존재한다. 우선 종족의 보전을 위해 자연적으로 성비가 조절된다는 설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다른데, 이로 인해 손실율이 높은 남성 인구 수를 채우기 위해 남성을 더 많이 낳기를 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성은 남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모험심이 강해 사고를 자초하기도 쉽고, Y 염색체로 인해 상대적으로 여성보다 항산화력, 면역력, 각종 저항 능력이 낮다 보니 질병에 따른 사망률이 높으며, 환경 적응에 따른 사망률도 높다. 1개밖에 없는 X 염색체 때문에 유전병도 더 많이 걸리고 활발한 외적 활동(전쟁, 사냥) 등의 요인으로 타고난 신체 및 사회 활등 특성상 여성보다 빨리 죽는 일이 많다보니 성비가 안 맞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의학이 최첨단으로 발달한 현대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나라에서 여성의 기대 수명이 남성보다 몇 년 더 길다. 특히 과거 남성의 수명이 짧아 소모율이 높던 아랍에서는 일부다처제형사취수제를 통해 이런 문제점을 보완해야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남성은 많아도 인구가 늘어나지 않지만 여성의 인구가 늘면 인구 증가와 직결된다. 가임기 여성의 인구수가 곧 인구 증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아이를 배에 직접적으로 임신할 수 있는 성별이기 때문에 남자가 많은 것보다 여자가 많은 것이 인구 증가에는 훨씬 유리하다. 가축의 경우만 보더라도 번식을 위해 많은 숫자의 암컷이 필요한 것에 비해 수컷은 씨를 뿌려줄 우월한 종자로 열 마리 안팎만 있으면 된다.

Y 염색체를 통해 남성 쪽이 자손에 대한 유전적인 동질성을 확인하기 쉬워서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조상이 갖고 있던 염색체들이 꾸준히 흩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Y 염색체는 남성에게만 있으므로) 오로지 부계로만 유전되는 Y 염색체는 후세에 계속해서 아들이 태어나는 한 보존된다. 즉, 남자는 집안 대대로 아들이 태어날 경우 그를 통해 최소한의 유전적 정체성을 대대로 물려줄 수 있다.

친형제들은 물론 사촌 형제와 조카, 종질까지도 남자라면 모두 같은 Y 염색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동질성을 보유하게 된다. 이러한 혈연적 유대에 자연적으로 끌린다는 것이다. 반대로 모계 유전인 미토콘드리아는 염색체가 아니므로 형질 발현에 별 영향을 끼치지는 않기 때문. Y 염색체의 돌연변이 발생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족끼리나 수십 세대 내에서는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돌연변이로 특질을 갖으면 더더욱 해당 씨족의 개성이 확립되기 때문.

2.3. 사회학적 측면

산업 혁명과 때를 같이하여 비료의 발명을 통해 인구가 폭증하였고 차츰 자녀계획도 다자녀에서 소자녀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남아 선호 사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자녀이기 때문에 가뜩이나 남아를 선호하던 풍조에 더해지는 바람에 이왕 1명만 낳는 아이라면 아들만 낳자는 방식으로 더욱 남성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 대해 사회학적인 분석이 동원된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대부분의 사회구조는 남성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급격히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서구 사회에서 남성의 위치는 여성보다 매우 높아졌으며 상류층의 사교계에선 여성은 남성들을 장식하기 위한 꽃으로 취급받곤 했다. 이러한 경향은 여성들의 사회 활동과 여권 신장 운동으로 성적 분업의 격차가 상당히 개선된 현대에서도 남성스러움, 여성스러움 같은 고정관념으로 여전히 큰 위력을 떨치고 있다. 예를 들어 CEO 같은 상위 직업은 'old boy club'으로 불리는 나이 많은 남성들이 독식하다시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성적 격차는 남아에 대한 높은 기대치와 여아에 대한 점진적인 기대치 감소로 이어진다.

육아 차원에서의 관점으로 보자면, 딸이 아들에 비해 양육상 훨씬 조심스럽다는 문제점도 있다. 물론 성범죄는 남자든 여자든 당하고 나서 나타나는 후유증과 트라우마는 같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성범죄가 수적으로 그 반대에 비해 완전히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수준으로 많기 때문이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딸을 가진 부모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신경이 많이 가며 마음을 놓기가 힘들다. 또한 결혼을 하고 나면 어찌 되었든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말로 남의 집안 식구로 보내는 것이 되며 아들은 집안의 인구를 하나 더 늘려주는 기능을 할 수 있으므로 훨씬 유리했다.

군국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군인을 생산해야 하므로 아들 선호도가 높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는 남편-아버지가 한 가정을 지배하는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다. 로마의 가정에서 남편-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들을 자기 마음대로 죽이거나 벌할 권한을 가졌다.[2] 고대 로마라는 국가 자체가 건국부터 멸망까지 전쟁으로 점철되있었고 로마의 상무정신은 유별날 정도였으므로 가부장적인게 사회풍조였던 것은 당시엔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3. 종교의 남아 선호 사상

이슬람에서는 여성이 음욕을 자극하는 것을 철저히 금기시하여 히잡[3]을 강제하는 등 있지도 않은 색기를 최대한 줄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자연히 여성이 사회적으로 받는 제약이 많고 남성의 가부장적 지위가 높은 편이다. 간통은 말할 것도 없이 사형감이며, 교리상으로는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실제로는 여성 쪽이 음욕을 일으켰다고 간주되는지라 더 잔혹한 꼴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여아가 강간을 당해도 보통은 아무 죄 없는 아이가 음욕을 일으켰다 하여 피해자인 아이를 처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쿠란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다 보니 간통의 경우 증인으로 4명이 필요한데, 여성은 1명이 아닌 0.5명으로 간주하여 여성들로 증인을 채우기가 힘들단 이유도 있다.

물론 이는 이슬람 국가들의 이슬람과는 별개로 상당수가 그냥 원래부터 남성 중심 사회였으며 본래 쿠란에서는 만들어진 당대를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여성을 배려하는 얘기가 들어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남자는 아내를 4명까지 두어도 된다"라는 교리는, 원래 그 이전에는 제한없이 수십 명이고 들이는 경우가 많아서 많아도 4명까지만 두라고 제한을 건 것이다.[4] 문제라면 이슬람권에서도 보수적이거나[5] 후진적인 곳에선 이 조항들을 악용해 되려 여성 인권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아니지만 유대교를 기반으로 한 하레디 역시 남존여비가 매우 심하다. 하레디/문제점 문서 참고.

그래도 의외로 이슬람권은 사정이 양호한 편이다. 이슬람권은 여아 낙태 문제가 없지만[6] 힌두교권인 인도는 그 이슬람보다 상황이 나빠서[7] 아예 여성의 가치를 재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취급하는 예가 다반사였다. 한 가지 예로 인도에서는 결혼할 때 신부 측이 신랑 측에 거액의 지참금을 보내는데, 얼마나 많으냐면 인도 노동자 8년치 임금에 해당되며, 지참금을 마련하려고 신부 측에서는 집도 파는 일이 많을 정도다. 지참금이 없어 죽은 여성만 1년에 8천 명이고 많은 여아들이 생매장 당하거나 아예 태어나기 전에 여아라는 이유로 낙태당하는 일도 잦다.

불교는 먼 옛날에는 비구니의 출가에 있어 제한 사항을 두는 등 여성을 알게 모르게 차별했다. 다만, 이는 당시 인도에서 여성 수행자의 처지란 것이 상장히 위태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물론, 궁극적으론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기독교는 예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목사사제의 지위는 남성이 독식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까 여성 목사에 대한 의견이 나오면 보수적인 남성 목사가 "기저귀나 차는 여자가 무슨 목사 자격이 있느냐"는 망언을 하기도 하고, 다른 종교가 성차별이라며 비판하면서 들먹이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어느 목사가 "이슬람에는 여자 이맘[8]이 없으니 남녀 차별"이라고 한 개신교 신문에 이슬람교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다른 목사로부터 "한국 개신교에 여자 목사가 있는지 좀 알아보고 그런 소리나 지껄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에는 여자 목사가 존재하긴 하나 교파에 따라 다르며, 보수 교단에 속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이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의 경우에는 여성 목사 안수 허용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갖고 있어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4. 한국의 남아 선호 사상

4.1. 역사적, 문화적 배경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유교 전통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국식의 종법에서 비롯된 문제다. 중국은 3000년 전부터 집안의 상속이나 제사와 같은 중요한 집안일을 모두 아들, 특히 장남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데려와서라도 가계를 이어가게 했는데, 이런 중국의 문화가 한국으로 넘어와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이 박히게 되었다. 이는 조선 건국자들의 사상 때문인데, 조선의 국왕들은 중국의 문화를 좋다고 여겼고 각종 중국의 문화를 조선에 대입시키면서 중국에서 돌아가는 종법을 대입시켰다.

이는 고위층들 사이에서 교조화가 이루어져 남존여비의 관념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 결과, 고려까지만 해도 남녀 균분 상속이 존재했고 조선 초까지도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나[9],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림 세력이 득세하면서부터는 남아가 없을 경우 친자녀가 아닌 양아들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지독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10] 이는 중국의 계승 문화가 그대로 한국에 융화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교(특히 성리학)에서 아들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유교에서는 위아래를 구분하는 서열을 중시하며 그 윗 서열에 남성과 어른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자, 맹자, 주자 등이 제시한 이런 기준은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져 이의를 달 수 없었고, 여기에 반박하면 사문난적이라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다.

이러한 남아 선호 사상이 팽배한 조선에서 여성들은 사내아이를 낳지 못하면 소박맞기까지 했다.[11] 반면, 남성의 축첩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여성의 질투는 칠거지악이라 하여 중죄로 다스렸다. 추가로 아들을 못 낳는 것, 병에 걸려서 아들을 못 낳는 것도 칠거지악에 들어갔다.[12] 물론 보호장치[13]가 있긴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저 모양이면 하루하루가 눈치밥이니, 차라리 위자료 받고 이혼하거나 축첩을 묵인하며 사는 게 낫다. 이러한 분위기였으니 여자아이를 천대하는 풍조는 지극히 당연할 정도다.

다만 평민 가정에서는 몰라도 양반 가문에서는 여자아이를 낳았다고 버리는 경우는 없었고 키우기는 다 키웠다. 평민 가정에서 버리는 경우는 여자라서라기보다는 가난한 살림에 먹여살릴 입이 많아져서였다. 물론 버리는 순서에서 여자아이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여러 자식 중 한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다면 아들보다는 딸이 버릴 아이로 뽑히는 경우가 많았다.

유교 사회에서 가문(家門)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제사라는 종교 의식을 통한 단합에서 소외당하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문벌을 가진 가문은 누대에 걸친 족보와 조상을 자랑하였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 가문을 결속시키고 사회적 세력을 쌓았다. 문중은 제사를 지낸다는 명분 하에 농경지나 야산 등의 토지를 가문의 이름으로 집중하여 그 자체가 재산을 보유하도록 되었다. 이러한 문중 자산은 '종손'이 승계하였으나, 동시에 종손은 제사를 지낸다는 전제 하에 문중 자산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이는 일종의 '공동 자산'으로 취급되었다. 문중의 재산은 다른 친척에게 원조를 주고 받을 중심점이 되었다. 과거 민법에서는 문중회의의 권한을 매우 크게 인정하였다.

그때까지도 친족 사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에는 친족을 원조하는 행위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로 여겨졌으나, 다른 형태의 복지는 현대 사회 이전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결국 가문을 상실한다는 것은 사실상 사회복지 체계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회적 성공이나 최소한의 복지 등 모든 것을 가문에 의지했으며, 가문에서 이탈된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혼자 야생으로 들어가 Man vs. Wild를 찍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전근대 농업 경제 사회에서 이러한 단독 가구가 빈민층으로 전락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이 별로 없었고, 만약 야생에서 산다 해도 산적이나 호환 등에 맞서야 할 상황이다. 그러므로 가문과 문중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생존과 사회생활의 문제였다.

게다가 조선시대에 문중을 제외한 사적 결사체는 이런저런 명분 때문에 탄압받는 일이 많았다. 남자들이 모여서 뭐 해보려고 하면 당파나 역적 무리로 몰리기 쉽고, 불교는 조선시대에는 아예 전면에 나서지 않는 대신 그 세력을 인정받은 종교[14]이며, 상단은 애시당초 돈을 목적으로 이해관계를 갖고 모였기 때문에 그 결속력이 매우 낮았으므로 조정에서 문제삼지 않았다. 결국 유일하게 국가로부터 정당하게 인정받는 사회조직인 문중으로 관심이 편중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가문 의식에 기반을 둔 가부장제가 강화되고 그로 인해 남아선호사상이 두드러진 것은 임진왜란의 탓이 크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말로는 성리학을 외치긴 했지만 심지어는 사대부들조차도 그렇게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던 터라... 임진왜란 이전 사람인 신사임당의 경우만 하더라도 결혼하고 17년이나 자식들 데리고 강원도 강릉에 있는 친정에서 살면서 시어머니[15]와 따로 지냈다. 훗날 시어머니가 늙어 스스로 살림하기 곤란해진 후에야 한양에 있는 시가로 가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 조선 후기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전란 이후 사대부들은 전후 혼란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만큼 세력도 강화할 겸 가문을 중심으로 결속하게 되었고, 여성들조차 생존과 번영을 위해 이에 동조하면서 남아선호사상이 극도로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사회 혼란과 함께 심화되는 정치극단주의에 대한 예시기도 한다.

조선 멸망 후 일제강점기에도 남아 선호는 당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더욱 심해졌으며, 심지어 2000년대 중반까지도 노년층을 중심으로 남아 선호 사상이 건재했다. 남아 선호가 매우 심한 집안은 아들을 못 낳는다고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16]나 아들(손자)에게는 잘해주면서 딸(손녀)에게는 박대하는 어머니나 할머니의 모습[17]은 비단 드라마나 소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며[18] 아들을 못 낳는다고 이혼을 요구하거나 아들을 잘 낳는다고 소문난 씨받이를 들인 사례가 무려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있었다. 사실상 남아 선호 사상이 본격적으로 잠잠해진 것은 기껏해야 2000년대 후반부터였다.

참고로 장녀는 그래도 넘어가졌는데 "큰 딸은 살림 밑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성차별을 볼 수 있는 게, 첫째딸로 태어나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부터 공부 대신 일을 하여 돈을 벌어서 부모와 동생들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음을 이런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같은 첫째라도 아들로 태어났으면 이런 일은 매우 드물었고, 전술했듯 모든 지원을 몰빵 받아 장남 혼자서만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일이 많았다. 물론 이러한 일은 적어도 1990년대 이전 얘기다.

2000년대 초중반 MBC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 타임머신에서 딸만 셋을 낳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고 세쌍둥이 손자들이 놀러오자 손녀가 갖고 있던 크레파스를 뺏어서(!) 손자에게 주는 막장 행각을 보여준다. 아들만 셋보다 딸만 셋이 더 흔했던 것도 그 탓이다. 게다가 그 후 며느리는 기어이 아들을 낳고 사망하는 안타까운 스토리. 참고로 타임머신은 신문에 나온 사실만 재연극을 만들기 때문에 해당 내용은 실화이다. 게다가 1983년에 당시 35살인 현종순도 시어머니가 아들을 낳으려고 해서 딸만 4명을 낳았다고 한다. 아직도… 딸 낳았다며 24년간 며느리 구박한 시어머니

8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다음 번에 아들을 낳는다는 기대로 딸 이름에 , 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19] 딸을 그만 낳고 싶다는 의미로 딸 이름을 후남(後男; 다음에는 제발 남자아이), 후자(後子; 다음에는 아들), 말자(末子), 종순[20], 말순, 끝순, 막녀, 섭섭, 서운 등으로 짓거나, 다음에 아들을 낳는 이름이라며 꼭지라고 짓거나, 아예 딸로 태어난 게 맘에 안 든다고 욕설[21]이나 부정적인 단어를 이름으로 붙여주는 일도 있었다. 이는 보통 1970년대 중반까지의 이야기이며 197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출생 딸들은 이미 딸 둘, 셋을 낳았는데 뒤에 아들을 낳고 싶은 마음에 셋째 이상의 딸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짓는 가정도 드물게 있었다.

물론 그 이전 출생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영훈, 정훈, 인호, 민호와 같이 남성적 느낌이 나는 이름이다. 당장 한국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선수의 이름이 박봉식(육상 창던지기 출전)이었는데, 봉식이라는 이름은 딱 봐도 남자 이름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중성적인 이름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남성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라면 놀림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22] 확실히 남자 이름인데 여자가 쓴다면 그런 경우가 대다수다. 무엇보다 본인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것이다. 2007년 개명신청 허가사례

오진희 작가의 경우 부모는 딸 넷에 막내아들 쌍둥이 둘이었는데 첫째와 둘째(작가 본인)은 진숙, 진희로 여자 이름이었으나 셋째와 넷째는 진욱, 진형으로 남자 이름이었다. 심지어 2010년대 초반에도 이런 집안이 아직 있어 2010년대 초반생(개명 당시 만 5~8살, 현재 [age(2013-12-31)]~[age(2010-01-01)]살) 여자아이의 개명 신청 사례 중 후남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남동생이 태어나서 정상적인 이름으로 바꾸는 것 같은데 아무리 이름을 바꾼다고 해도 그런 이름을 지어줬던 집안에 태어났으니 앞으로의 인생이 험난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23]

우즈베키스탄 출신 여성이 한국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진상으로부터 "아들을 낳아달라"는 남아 선호 사상이 함축된 성희롱을 들었다는 것이 진상월드를 통해 밝혀졌다.

물론 한국의 남아 선호 사상이 무조건 성리학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다. 여권이 높다던 고려시대에도 중혼의 폐해는 심각했고[24] 원나라공녀를 바칠 시절의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쳐 이웃 사람도 볼 수 없게 하고, 딸의 머리를 깎는 등 공녀 선발을 면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이전부터 위에서 언급한 인류학적, 생물학적, 사회학적 이유 때문에 남아 선호 사상은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다만 성리학의 교조화 이전에는 남아 선호 사상의 목적이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었지만, 교조화된 성리학이 단순한 생존 문제만이 아닌 사상 문제까지 끌어들였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4.2. 2000년대 이후

한국응 2000년대 후반 들어 남녀 신생아 성비는 거의 자연상태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며 관련 기사 남아 선호 사상은 사실상 사라졌다.

사위며느리, 그리고 손주를 볼 50~60대들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사회에서 성장해 왔고, 이제 결혼하여 남편과 자녀를 가질 20~30대들은 여자가 집안일만 한다는 것은 웬만큼 보수적이지 않은 이상[25] 사회 의식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히 아들이 딸보다 굳이 우선적으로 대우 받아야 할 이유가 많이 사라진 셈이다. 젊은 층 남성이 맞벌이를 선호하는 비중이 전에 비해 매우 커져가며 2010년대 이후에는 사실상 어느 성별이든 이와 연관된 잔재만 남아 있을 뿐 남아 선호 그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봐도 무방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9년부터 대한민국 인구 자체가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아진다고 한다.

5. 외국의 남아 선호 사상

유교의 영향이 없는 곳에도 남아 선호가 있으며, 남존여비가 심해도 여아에게 경제적 이익이 있으면 낙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

캅카스 3국, 유교 문화권, 인도 문화권, 알바니아 일대는 성비 불균형이 일어날 정도로 심하고 남아프리카 일대는 오히려 여아가 다른 대륙보다 많다.#

6. 부작용

6.1. 여아낙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성별 선택 낙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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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반대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이자 낙태는 여성의 권리이며 여성해방의 상징이라는 찬성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단골로 나오는 멘트다. 찬성론자들은 여아 낙태는 그 주위에 구시대적인 남아 선호 사상이 깔려있다는 점이 문제라서 그렇지, 사실 낙태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담이지만 딸로 태어났어야 할 아이를 낙태하지 않고 낳아도 양육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여자를 천시하는 사상을 가졌던 사람이 낙태를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낳고 나서 제대로 키운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상당수가 아동 학대 및 성차별 문제에 직면한다.

자세한 내용은 성별 선택 낙태 문서 참고.

6.2. 결혼대란, 인구감소

여성의 인구가 남성의 인구보다 많다면 인구감소라는 치명적인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아를 낙태하게 되면서 남성의 인구가 여성 인구 수보다 과할 정도로 많아진다면 당연히 얘기가 달라진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간이 짧은데, 주로 50대 초반 정도에 폐경이 오게 되므로 그 나이가 되면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다.[27][28]

때문에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20~30대라는 소린데 결혼 적령기에 도달한 30대의 남성은 아이를 갖기 위해선 자신과 동시대에 태어난 또래의 여성 혹은 자신보다 어린 여성과 결혼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결혼 적령기가 된 남성의 인구가 4,000명[29]인데 여성의 인구가 3,000명이라면? 그럼 약 1/4(1,000명)의 남성은 당연히 결혼을 못 하게 되는 것이고, 그만큼 인구도 감소한다는 것이다. 다만 실제 상황에서는 여아 낙태로 인한 성비 붕괴와 무관하게 결혼 경쟁이 이어지는데, 원래 남성의 하위 10% 정도는 어느 시대든지 결혼시장에서 도태되는 재원들이라[30] 실질적인 성비는 125:100 같이 극단적인 수준인 인도의 몇몇 지역 정도가 아니면 맞는 편이고, 결혼 기피와 결혼 포기 현상이 극도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극심한 성비 불균형은 여성이 이성을 보는 눈만 높아지는 부작용도 속출하는 문제점도 있는데 수요와 공급의 법칙만 알아도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면 공급자가 갑이듯이 남성이 많으면 당연히 여성이 슈퍼 갑이 될 수밖에 없으며, 예전이었으면 무난하게 결혼했을 수준의 외모, 경제력, 사회성을 나름 잘 갖춘 인싸 계열 남성들도 현재 연애, 결혼시장에서 도태되고 마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는 인구감소의 부스터가 되는 기현상이 속출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성비 불균형은 아랫세대 남성들에게도 피해를 주기도 한다. 동년배 여성보다 동년배 남자가 많은 상태에서 구혼 경쟁을 하게 되면 여기에서 경쟁에서 도태되는 집단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순순히 결혼을 포기하진 않는다. 결국 자신보다 10살 차이나는 어린 여성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어린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대상이 윗세대만 있는게 아니라는 게 또 문제인 것이다. 당연히 어린 여성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들도 그 어린 여자들을 타겟으로 할텐데 이런과정에서 또 필연적으로 구혼 경쟁이 일어나게 된다. 문제는 윗세대 남성들은 아랫세대보다 경제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여자들은 윗세대 남성들을 선택하게 되고, 그 외 선택받지 못한 아랫세대 남성들은 다시 아랫세대 여성을 눈을 돌리게 되는 악순환이 생기게 된다.

"그럼 이혼 경력이 있는 돌싱녀나 자식이 있지만 배우자는 없는 미혼모와 결혼하면 해결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자식이 있는 사람들은 가정폭력 등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고서야 배우자와 좀 안 맞아도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이혼을 하지 않고 가정을 지키려는 경우가 많아서다.[31]

이혼 후에는 대개 아이를 여자가 맡아 키우는데[32] 재혼하면 양육비 문제로 전남편과 트러블이 생길 수 있다. 참고로 양자 입양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새 남편이 돈이 많아도, 자녀가 새아버지에게 입양된다 해도 생부의 양육비 지급 의무는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소멸되지 않는다. 기사[33] 면접교섭 의무로 인해 아이들이 친아빠를 만나러 갈 때마다 집안에 불편한 기류가 흐를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혼 경력 있고 자식 딸린 사람과 결혼하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몇몇 짐승 같은 새아빠[34]가 딸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뉴스가 워낙 많아서, 자식 중에 딸이 있는 엄마들에게 재혼을 꺼리게 한다.

한편, 페미니즘 갈등이 본격화된 2010년대 중반 시점에 2030 연령층 대다수를 이루는 세대이자 남아선호사상의 직접적 피해자이기도 한 1990년대생 출생자들이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기성세대의 위선성을 비판할 때 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남아 선호 사상이기도 하다. 1990년대생들 모두가 기성세대가 아이를 가질 시점에 유행했던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받은 당사자일 뿐인데, 정작 이런 문제를 일으킨 기성세대는 오로지 여성들에게만 죄책감을 가지며 착한 사람인 척 위선을 떤다는 것. 특히 인셀 문제가 유독 크다.

6.3. 범죄율 증가

남아 선호 사상이 만연한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는 나라보다 범죄율와 인신매매가 높다는 통계가 있다. 결혼, 연애시장에서 도태된 남성들이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및 성매매로 이어지며,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여아를 선호하지 않고 아들을 더더욱 선호할 수 있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위에 말한 대로 성비불균형이 심하면 여성의 경제적 가치가 증가하게 된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여성에게 선택받게 하기 위해 경제력 과시를 하게 된다. 실제로 중국에서 성비 불균형으로 신부감이 부족해지면서 아들을 둔 부모는 필사적으로 저축을 늘렸는데 그 이유가 부모가 물려줄 자산이 클수록 아들이 연애 시장에서 살아남을 확률도 올라가기 때문이였다. 이렇게 성비불균형이 심하게 되면 남성의 연애, 결혼 진입장벽이 올라가게 되는데 여기서 좌절되면 결국 범죄로 이어지게 되는것이다.

7. 관련 인물

7.1. 실존 인물

가해자 - 피해자 형태로 정리

7.2. 가상 인물

작품: 가해자 - 피해자 순서로 정리, 작품명 가나다순

8. 서브컬처

서브컬처에서는 남아 선호 사상이 그래도 남아있는 일본에서도 장르에 따라 여아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하드한 성인물에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이 낳은 여아를 좋아하는 건 아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44] 성적으로 괴롭힐 여자가 더 많아져서 그렇다[45]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2010년대 이전 로맨스로맨스 판타지 장르는 여성들이 주로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더 선호하는 묘사가 있었다.[46] 사극 로맨스나 중세 로맨스 판타지 장르는 과거를 모티브로 했기 때문에 남아를 선호하는 묘사가 있을 수도 있지만 2000년대 중반의 한국의 다른 장르를 다룬 매체처럼 묘사를 상세하게 했다면 사람들이 댓글 등으로 당시 시기를 욕하기도 하고 그 표현을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어서 묘사가 상세하지는 않고 간접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

남아 선호 사상이 팽배한 데다가 과학이 발전하지 않아 남성의 정자가 자녀의 성별을 결정한다는 것을 몰랐던 시절을 다룬 작품에서는 현대처럼 진통을 줄여주는 경막외마취 등이 없어서 산모가 매우 힘들게 아이를 낳았는데 성별이 여아라 실망하는 묘사가 나온다. 특히 후사가 중요한 왕실을 다룬 사극에서 많이 나오며 악역이 주로 자신의 자리 보전 때문에 주인공의 자녀가 딸이기를 원한다. 영상 한굳에서도 현대를 다룰 때 2000년대 중반 작품까지는 자주 나왔지만 후반 들어서 점차 사라지다가 2010년대가 되어서야 거의 없어졌다. 단, 시녀 이야기 같이 여성 인권을 다루는 작품에서는 남아 선호 사상을 타파하기 전 배경 묘사를 위해 일부러 표현하기도 한다.

왕실 말고도 귀족 등 가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현실에서처럼 남아 선호 사상이 왕실 못지 않다. 해리 포터 시리즈 중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레스트레인지 가문의 족보 중에는 여자는 얼굴을 그리지 않고 그저 꽃송이로 그려놓아 남성우월주의 가문이라는 것[47]을 알 수 있다.

가문 중 특히 군인 집안도 마찬가지이다. 딸을 아예 아들처럼 키운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딸의 이름을 줄줄이 이상한 이름으로 지은 소문난 칠공주가 대표적이다.

9. 관련 문서


[1] 모계 사회라고 해도 점박이하이에나처럼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식의 사회는 아니며, 일반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이 가지는 지위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 대부분의 원시 모계사회에서 씨족 내 가장 큰 발언력을 지니는 사람은 어머니의 남자 형제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원시 수렵 공동체 중에는 예외적으로 남미의 야노마모족처럼 여성을 폭력의 대상, 성적 대상화 혹은 아이 출산의 용도 이상으로는 대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편이다. 이런 원시 사회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인류 초창기에는 모계 사회가 있었다는 이론은 폐기되었다.[2] 출처: 어메이징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63쪽[3] 우즈베키스탄, 모로코, 보스니아, 알바니아 같은 세속적인 곳들은 안 쓰는 경우도 많다.[4] 아내 개개인을 모두 평등하게 대해야 하며 부양할 능력도 있어야 할 수 있는거라 엥간한 부자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경우에는 아내는 보통 1명인 경우가 많다.[5] 대표적으로 탈레반 등.[6] 그래도 여아 살해 문제는 있다(...).[7] 그래도 이슬람에서는 명목상 남녀는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다만 그 평등의 잣대가 우리 식과는 달라서 문제로 인식되는 것. 우덜식 평등[8] 사실 정통 이슬람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성직자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무슬림이 '이맘'을 맡을 수 있으며 여성 이맘도 존재한다.[9] 조선 초기에 제도를 정비하면서 법적으로는 여권이 더욱 상승한 상태였다.[10] 이 관습으로 인하여 2000년대 이전에 3대 독자 집안의 아들이면 징병검사 시 6개월간의 방위병, 4대 이상이면 군면제가 가능했다. 당시에는 군대에 입대하면 군내에서 사망할 확률이 1% 이상으로 높았다. 즉, "아들이 죽으면 대가 끊긴다."라는 관습으로 이러한 조건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4대 독자여서 군면제를 받은 배우 정준하가 있다. 다만, 선택이기 때문에 독자 중에서 자원입대를 희망하면 현역병으로 입대는 가능했다.[11] 남아 선호 사상도 모자라 모체가 자녀의 성별을 결정한다는 잘못된 믿음까지 겹친 건데 사실 자녀의 성별은 정자가 결정한다.(다만 모체가 중증 혈우병 등 X염색체 열성 유전병 인자를 가지고 있어 딸만 정상적으로 태어나고 아들은 매우 높은 확률로 유산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다.) 실제로 이 사실이 알려진 뒤로 아들 못 낳는다고 소박하는 일이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경우는 없어졌다.[12] 다만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진짜 중죄로 다뤄지는 경우는 정말 심하게 하거나 질투로 인해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한했다. 대표적인 예로 성종의 2번째 왕비였던 폐비 윤씨의 경우에는 왕비가 되고 8개월 만에 폐비 논의가 있었는데, 이때 임사홍이 "예로부터 질투를 하지 않은 왕비들이 없으니,부디 폐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해서 1차 폐비 소동을 종식시켰다. 따지고 보면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피는데 질투하는 건 당연하니 어찌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도 이 점은 유의한 듯하다. 오히려 너무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문제시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질투도 관심이 있으니까 하는 거다. 그런데 남편이 첩을 두든 말든 예스맨처럼 굴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시선을 받았다. 사씨남정기의 사정옥 역시도 현모양처의 표본처럼 보이겠지만, 당대 유학자들조차 "아오 뭐 이렇게 답답한 여자가 다 있어!"라고 반응했다고 한다.[13] 삼불거라 해서 갈 데가 없거나, 부모의 상을 같이 치렀거나, 가난할 때 같이 고생하다가 후에 부귀하게 된 때는 내칠 수 없었다. 물론 이딴 거 다 무시하고 내쳐도 여자 쪽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남자 집에 여자가 얹혀 사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14] 임진왜란 이후에는 불교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은 없어졌지만 무시는 여전했다.[15] 시아버지는 신사임당이 결혼하기 전에 사망했다.[16] 시어머니는 "여성인데 왜 같은 여성인 며느리를 괴롭히냐"는 말이 있는데 시집살이 문서에서 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시어머니(할머니)가 될 나이 정도의 여성은 대부분 50대 이상이라 폐경기 이후로 남성호르몬이 늘어나 적극적이고, 주체적이고, 단호해지기 때문이다.(물론 40대에 되는 경우도 있지만.)[17] 심지어 사망했는데 골칫거리가 사라졌다고 좋아하거나 장례도 안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18] 레진코믹스의 웹툰 단지도 바로 이런 차별을 받은 여자(작가 본인)의 이야기이다.[19] 다만 여자 이름에 를 붙이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의 영향이 크다. 사족으로 일본 여성 이름 말미의 子는 흔히 들을 수 있는 ''다.[20] 사실 이건 마칠 종을 넣은 거다. 사람 이름에 을 넣는 것은 보통 기피되는 행위다.[21] 언년 같이 '년'으로 끝나는 이름 등.[22] 위에 그 예시들도 그렇다.[23] 셋째, 넷째가 딸일 경우 남자 이름을 지어줬더라도 남동생이 태어나면 예쁜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24] 그런데 고려시대는 이미 유교가 들어온 상태였다.[25] 인터넷 여론에 한정하여 시진핑의 집으로 가서 애를 낳으라는 주장을 두고 환호하는 주장이 있고, '남편만이 먹여살리지 못하는' 가정을 바람직하지 못하게 여기는 부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경향이 심해 보수적인 기업의 여성들은 출산을 하면 지금도 일터에서 쫓겨날 걱정을 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현실에서는 매우 극단적인 주장으로 여겨지고, 남편이 가장이라면서 온갖 부담을 짊어지게 하고 여성은 남성이 다 해줘야 하는 존재로 여기던 과거에 불만을 가지기도 하며, 아내도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의 도입을 주장한다. 당장 과거에도 한산모시 등의 수공업, 해녀가 결부되는 산업은 여성이 하고는 했으나 사대부인 남편이 가정을 먹여 살리는 모습과 유교적 질서라는 명분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보는 것이 상류층의 문화로 인식되면서 그런 잔재가 있던 것이다.[26] 이는 일본이 유교의 영향이 적고 불교가 득세한 데다가 데릴사위 문화로 딸만 있으면 남자가 여자쪽으로 성을 바꾸고 들어와서 대를 이을 수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27] 남성은 걱정할 것이 없는게 60대에 또 자식을 얻은 사례는 꽤 흔하게 나온다. 아니, 나이에 관계 없이 성관계가 가능하거나, 그게 안 되어도 정자만 얻을 수 있다면 아이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여자가 60대에 아이를 낳은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일이다.[28] 만약 가능은 하다고 해도 그 나이대에는 아이를 키울 체력이나 성인까지 키워낼 양육비와 교육비를 감당하기가 힘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29] 물론 현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터무니 없이 적은 숫자다.[30] 통상적으로 극빈층, 장애인, (흉악) 범죄자 등 현실적으로 결혼이 물 건너간 경우에 해당된다.[31] 이혼 가정의 자녀들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상처주는 말과 차별로 인해 살면서 상처받는 일이 많다. 그나마 취업은 능력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투라 문제가 되지 않으나, 결혼 시장에서 이혼 가정 자녀의 결혼은 쉽지 않다. 특히 남성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하는데, "편모가정에서 자란 남성은 양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자식 하나만 바라보고 산 홀시어머니는 아들한테 집착해서 며느리한테 지독하게 시집살이를 시킨다더라"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사실, 단순한 편견이 아니다. 이는 가정 내 권력과 관계가 있다. 시집살이 문서 참고.) 게다가 이혼한 부부가 각각 재혼까지 했다면 시월드가 2배가 된다. 어지간한 문제가 아니고서야 본인 탓으로 자식에게 이런 페널티를 주고 싶은 부모가 몇이나 될까?[32] 양육비이행관리원에 전 배우자가 아이를 맡아 키우고 있는 자신에게 양육비를 안 준다며 상담하는 사람들의 86%가 여성이다. 물론 남성이 아이를 키우면 여성이 양육비를 보내주지만, 여성이 안 준다며 상담하는 경우는 단 14%뿐이라고. 2019년 법 개정 추진 중.[33] 전 배우자가 재혼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친자식 양육비를 안 주려고 온갖 추태와 발악을 하며 패악질을 부리는(모든 재산 명의를 가족 것으로 다 바꿔놓기, 연락처 바꾸고 집까지 이사해 잠적하기, 직장까지 그만둬 버리기 등) 양육비 안 주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으니, 재혼했는데 왜 내가 돈을 줘야 하냐며 버팅기는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34] 새아빠 쪽의 피 안 섞인 친척들, 의붓형제, 새아버지의 친구 포함.[35] 사실 이 쪽은 아들을 못 낳았다는 것도 있었지만 저거 외에도 불륜근친상간, 반역의 죄도 있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앤을 내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아들이 못 낳았다는 게 결정적이였고, 앤에게 씌어진 불륜과 근친상간 혐의는 누명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36] 당시 딸만 셋이었다.[37] 일본 황실 최고령 출산이었다. 키코 비는 1966년생, 히사히토 친왕은 2006년생. 일본 황실 최초의 제왕절개이기도 하다.[38] 사실 일본 황실이 어째서인지 아들이 귀해져서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기 전까지 41년 동안이나 왕자가 태어나지 않고 공주만 줄줄이 9명이 태어났다. (1969년 사야코 공주, 1981년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공주, 1983년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 1986년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 1988년 센게 노리코, 1990년 모리야 아야코, 1991년 코무로 마코, 1994년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 2001년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문제는 덴노 계승과 관련된 황실전범은 여자 계승, 여계 계승 모두 부정하는지라 일본 황실은 어떻게든 남자아이 하나는 얻어야 간당간당하게나마 대를 이을 수 있는 처지였다. 문제는 그 불똥이 아들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명백히 밝혀진 시대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인 일본에서 엉뚱하게 며느리 탓으로 돌려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전히 일본에서는 여성 인권이 약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39] 이는 자신이 딸인 것이 싫은 게 아니라 남자의 삶도 살아보면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40] 이 아들에게는 석철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지지 않았다.[41] 여자다. 이름부터 학대 수준.[42] 그녀도 딸부잣집 막내였지만 강도의 습격으로 언니들을 모두 잃고 오빠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43] 서인숙의 시어머니[44] 특히 호색한 캐릭터 다수가 본인이 남자임에도 남성혐오증을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45] 남존여비는 여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여주인공이 딸을 낳기를 원하면서도 여주인공에게 여성혐오 발언을 일삼으며 강간을 하거나 성관계를 난폭하게 하는 클리셰가 흔하다.[46] 단 2010년대 이후에는 남아 선호 사상이 옅어지면서 딸이 태어났어도 등장인물이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47] 블랙 가문은 여자도 이름과 얼굴을 그려놓는 걸로 언급된다.[48] 베트남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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