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성어 | |||
出 | 嫁 | 外 | 人 |
나갈 출 | 시집갈 가 | 바깥 외 | 사람 인 |
1. 개요
"딸은 맹 출가외인(出嫁外人)이고 참 자식이 아이다 말이래."
「딸보다 나은 양며느리의 효성」
「딸보다 나은 양며느리의 효성」
"이번 족보 등재가 종중 재산 등에서 여성의 권리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출가외인으로 배척했던 여자 후손들에게 소속감을 불어넣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일 뿐"
「효령대군파 종친회 족보편찬위원회」, 2002년 #
「효령대군파 종친회 족보편찬위원회」, 2002년 #
"딸이 시집을 가면 그때부턴 남이다."라는 한자성어로서, 과거 조선에서 부모가 딸을 떠나보내며 쓰던 말이다.
조선시대는 과부에게 자결을 권장하였으며,[1] 과부 사망 시[2] 열녀가 된 것을 축하하여 열녀문을 세우는 시대인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전기와 달리 후기부터는 족보에 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고, 딸을 족보에 올렸더라도 결혼해서 출가하면 빼버렸는데, 이는 아들은 대를 이을 수 있지만 딸은 대를 이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3] 이후 1960년대에는 비석에 딸이면 무남독녀라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었다. 족보가 양반의 전유물에서 구한말 누구나 쓰는 것이 되다 보니 의미도 모르면서 자행하던 일종의 악습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주로 양반층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그나마 외출이 가능하던 평민들과는 달리, 정조를 지켜야 하는 양반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외출에 관해 엄격했었고, 친정 방문에도 어려움이 있었기에 출가외인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표현이다. 대신 비슷한 표현인 출가종부(出嫁从夫)를 쓴다.
2. 해석
문장의 직역만을 보면 매우 부정적인 성차별적 대사이다. 당시 예법을 통해 여성의 권리를 규제하던 유교 사회의 영향이 드러나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맥락을 무시한 수박 겉핥기식 해석이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출가외인은 차별이 담긴 대사일 수도 있지만 우리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일종의 모진 말에 더 가깝다.
- 체면과 예법에 따른 양반 여성의 외출제약
- 당시 교통수단의 미비로 인한 시공간적 한계
- 직설보단 은유적 화법을 지향하는 동아시아문화권의 영향
성리학이 강화된 17세기 이후, 조선의 양반 여성들은 '집안사람'이란 개념하에 바깥활동과 관련된 브레이크가 많았고, 현실적으로 친정을 찾아뵙는 것도 법적인 제제가 있었다. 때문에 친정 가족들은 딸이 가족을 그리워하며 걱정할까봐 그러지 말라며 출가외인을 말했다. "넌 이제 시가로 떠나니 우리는 서로 남이다. 그러니 넌 너희 식구에게 집중하고 우리에겐 신경쓰지 말거라", 즉 딸을 떠나보내며 본인의 역할에 집중하라는 의미였다. 이후 구한말, 신분제의 혼란 때문에 이 말이 민간으로 흘러들어가 쓰이게 된 것. 단, 친정 부모가 아닌 시부모가 쓸 경우는 뜻이 약간씩 달라질 수 있다.#[4]
조선 후기의 기록을 보면 시집간 딸이 남편의 횡포를 못이겨 친정으로 돌아오거나, 부모가 앞장서서 관아에 딸의 이혼에 대한 입장을 대변해 주거나, 심지어 딸이 파혼당하자 죄책감에 자살한 아버지도 있었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영조도 끔찍하게 편애하던 딸인 화평옹주가 혼인했음에도 그 과도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그렇기에 말처럼 진짜로 남이 되는 건 아니다.
이러한 말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또 어느 특정 계층에게만 쓰이던 말이었는지, 같은 상세한 출처는 알 수 없으나 한자성어에다가 은유적인 기법 또한 포함되어있기에 사대부들 사이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3. 친정으로의 휴가
사대부 기혼 여성은 친부모의 집에 갈 수 있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覲親(근친): 며느리가 명절, 친정부모 제사일 때 시부모에게 휴가를 낼 수 있는 날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물론 시부모가 100% 휴가를 허락해 준다는 보장은 없어서, 이 날은 특히 며느리가 시부모 비위를 잘 맞추어야한다.
- 마산만날제 : 추석을 앞뒤로 해서 시가에서 며느리에게 친정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하루 정도 외출을 허가해주는 날. 행사 이름은 딸과 친정부모가 만나는 장소였던 옛 마산 월영동의 '만날고개'에서 따온 것이다.
칠거지악의 삼불거처럼, 출가외인에도 약간의 완충제를 둠으로서 어느 정도 현실을 추구했었다. 물론 이 같은 처사가 여성의 권리를 완전히 보장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그나마 그들도 융통성을 지녔다는 예시라 볼 수 있다.
4. 현대
(유교가) 고집만 자꾸 부리면 안 됩니다. 퇴계 선생께서도 '시종(時從: 시류에 따르다)'을 따라라. 세상을 사는대로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근필(89살)/퇴계 종손[5]
20세기 여자 이름에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항렬자를 넣는다는 것은 부정적이었다.[6] 호주제가 있던 시절, "여자는 결혼하면 호적에서 파인다"는 농담이 있었는데, 결혼 후 여성의 호적을 남편과 시가에 올리기 때문이다. 유림들은 "호주제가 폐지되면 개족보 된다"고 반대했었다.[7]이근필(89살)/퇴계 종손[5]
2000년대를 기준으로 부모~조부모까지의 사람들은 출가외인을 단순히 "딸을 넘긴다"의 개념으로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가끔 어르신들께서 이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사회변동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결혼할 때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보니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다.[8]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알아도 쓰지 않지만, 그중에 뜻도 모르면서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제 21세기 전까지만 해도 출가외인은 여러 사회적 악순환의 기초로 쓰였다. 특히 현대에선 역으로 여성이 더욱 대우받아야 한다는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남고여저 참조.
사실 출가외인 그 자체보다는, 시부모와 남편이 아내에게는 출가외인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의 딸/누이들에게는 출가외인을 적용하지 않아 부부간의 신뢰가 파탄나는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자식들마저 부친을 이기적이고 자기 혈육들만 편애하는 성격으로 여겨서, 부친을 존중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므로 양육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5. 관련 문서
[1] 아이를 갖지 못한 여성 한정. 아이가 있다면 양육을 해서 집안을 지켜나가는 것이 권장되었다. 특히 그 아이가 남아인 경우, 집안의 웃어른으로서 가문의 대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2] 타살인 경우도 있다.[3] 그러나 족보에 며느리의 이름을 적는 관습이 있었다. 또한 족보에서 지웠다 하여 진짜로 쫓아내는 것이 아닌 일종의 관례 같은 것이었다. 출가한 딸이라도 장인어른 가문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서양처럼 남편 성씨로 바꾸지는 않았다.[4] 이러니저러니 해도, 글을 읽어봤다면 알겠지만 "시가에 집중해라"라는 속뜻만큼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있다.[5]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은 2002년 서원 최초로 사당의 위패에 절을 하는 '알묘'를 여성에게도 허용했고, 2020년 우리나라 서원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초헌관을 맡았다.@[6] 현재는 아들 이름에도 항렬자를 쓰길 꺼린다. 핵가족화되면서 가문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7] 다만 이는 그들 중에서도 남성우월주의에 극보수적인 이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서도 "아무리 그래도 예의없게 자식이 엄마보다 위라니?" 라며 호주제에 반대하던 이들도 있었다.[8] 예를 들어 간혹 어르신들이 성숙한 아이에게 "부모 밑에서 자랐니? 할머니 밑에서 자랐니?"라고 질문할 때가 있다. 이는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보니 쓴 순수한 질문이지 패드립이 목적이 아니다. 다만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른데, 부모 없는 고아인 것을 확인하기 위함도 있다. 고아 출신 남자는 결혼기피대상 2위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