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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3:14:17

조선/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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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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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
2.1. 외부 기록의 과장 및 잘못된 정보들
2.1.1. 일본 제국
2.2. 조선에 대한 무관심과 인터넷의 국뽕몰이2.3. 지배층의 기록을 조선 전체로 일반화2.4. 내외적인 정치 극단주의
3. 문화적 오해
3.1. 조선의 문화만이 전통문화다?3.2. 한복은 한푸의 짝퉁이다?3.3. 조선은 가난해서 염색도, 무늬도 없었다?3.4. 한복은 짧고 튀어나온 임산부 옷이다?3.5. 한복은 노출, 수준낮은 문화다?
3.5.1. 노출은 수준낮은가?
3.6. 조선의 건축은 모두 작은 편이다?
3.6.1. 가옥은 초가삼간(3평, 3칸)이 기본이다?3.6.2. 한옥은 2층 건물이 없었다?
3.7. 조선시대의 초가집은 허접한 흙덩이?3.8. 조선에서는 한글을 천시했다?
4. 여성 관련 오해들
4.1. 여성은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
4.1.1. 이름은 최대한 나쁘고 더럽게?
4.2. 여성은 배우지 못한다?4.3. 여성은 평생 이혼, 재혼, 연애를 할 수 없다?
4.3.1. 과부는 자결하는 게 옳다?4.3.2. 이혼/재혼의 피해는 여성만?
4.4. 여성은 외출할 수 없었다?4.5. 여성은 자신을 철저히 감춰야 한다?
5. 생활적 오해
5.1. 남자는 게으름뱅이? 여자는 노예?5.2. 남자가 먹고 남은 음식을 여성이 먹었다?5.3. 간통한 남자는 무죄, 여자는 유죄?
6. 사회적 오해
6.1. 백성들은 가혹하게 고통받았다?6.2. 평민, 천민들은 배울 수 없다?6.3. 조선 백성의 대부분은 노비다?6.4. 조선은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린 유일한 국가다?6.5. 노비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6.6. 재산권이 없었기에 사유재산도 없었다?
7. 정치적 오해
7.1. 조선은 종속국? 자주국?7.2. 부산은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조계지?7.3. 군사적 오해
7.3.1. 조선에선 갑옷 없이 포졸복을 입고 싸운다?7.3.2. 조선은 화약무기를 경시하였는가?7.3.3. 조선은 수백년간 침략만 당해온 국가이다?
7.4. 조선은 군약신강의 나라이며 그래서 국가가 허약했다?7.5. 모든 계층에서 성리학적 예법과 사상을 따랐다?
7.5.1. 성리학은 양반만의 것?7.5.2. 계층마다의 삶
7.5.2.1. 평민사회7.5.2.2. 양반사회7.5.2.3. 평민과 양반의 차이
8. 조선의 사회
8.1. 조선은 보수적 태도 때문에 교통이 엉망이었다?8.2. 조선은 전적인 폐쇄 사회?8.3. 존재하지 않던 악습8.4. 북한과의 비교?8.5. 조선은 반일 국가였으며 그것 때문에 망했다?
9. 결론

[clearfix]

1. 개요

조선시대에 대해 온·오프라인에서 떠도는 여러 오해들을 근거와 함께 설명하는 문서.

참고로 조선시대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이나 국력, 역사적 평가 등에 대해선 오늘날까지도 여러가지 학설과 주장이 오가고 있으며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명확히 규정된 것은 없다. 따라서 이 문서에서는 20세기 이전, 조선 민중의 풍속이나 생활사 또는 사회·문화의 발전 양상이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왜곡되고 잘못 전해진 것들을 주로 기술한다.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서 현대까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인간들이 존재했다. 여기에서 서술하는 것들은 평균적인 것이지 이것 또한 절대적인 진실 같은 것이 될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어디를 가더라도 존재했다.

유교 질서와 관련되어 생긴 오해들이나 정치, 군사, 외교적인 내용들은 변질된 유교적 전통조선/평가 문서에서 설명한다.

2. 원인

2.1. 외부 기록의 과장 및 잘못된 정보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오리엔탈리즘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전통시대에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 관한 이미지가 생겨났다면, 개항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진행된 서구와의 접촉과 이들에 의한 우리나라 관찰기를 통해 조선이 구체적으로 서양에 알려졌다. 전통시대에 중국이 화이론에 입각하여 조선을 보았다면, 19세기 후반 이래 서양인은 자신의 문명관(文明觀)을 투영하여 조선을 바라보았다. 특히 서구의 강대국이 제국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문명적인 서양에 대비된 야만적인 동양이란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의 논의가 반복 재생산되었다. 문명과 야만의 대비는 유럽인이 우월하다는 ‘인종주의’와 결합하였고, 이른바 ‘비문명적’인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은 유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정당하거나 합리적이라는 논리를 낳았다. 이러한 서양의 동양에 관한 사고-지배 방식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하는데, 개항기 조선을 방문하였던 서양인의 글쓰기는 이에 의거하여 조선에 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물론 긍정적인 이해 역시 함께 기록하였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금강산을 비롯하여 조선의 산수는 아름다우며, 조선인은 체격도 좋고 잘생겼으며, 심성은 착하고 친절하며, 예술적 재능이 풍부하여 음악과 미술에 소질이 풍부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아울러 지적 능력이 뛰어나며 연장자를 공경하는 풍속도 서양인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착한 미개인’의 이미지가 컸다. 그들의 시선에서 조선인의 ‘야만’을 상징하는 것은 위생 문제, 여성의 낮은 사회적 위상, 게으름, 정치의 후진성에서 비롯한 부패한 관리의 모습 등으로 정형화되었다. ‘은둔국’ 혹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등은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조선을 가리키는 이미지가 되었다.

서양인의 ‘문명 대 야만’의 시선은 한말 일제 강점기에도 스테레오 타입처럼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한말 시기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조선은 세계열강의 각축장(角逐場)이면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지배권이 확대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국가 사이의 경쟁에서 뒤처진 대한제국은 서구인의 시선에서 보면, ‘문명화’된 서양과 대비되거나 심지어 정체된 공간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기독교 선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초반 조선은 여전히 ‘미신의 나라’였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조선인에게 ‘애정’을 지닌 서양인은 조선인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반면 일본인의 기록은 조선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더욱 강조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조선의 사정은 식민지 지배자인 일본인에 의해 가공되어 서양 세계에 전달되었다. 일본은 ‘야만’의 조선을 ‘문명화’한다고 강조하였고, 일제와 일제의 선전에 속은 서양인은 “한국인은 열등 민족이어서 독립, 자치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라고 이해하였다.
- 류시현,[1] <한국문화사>, 30. 이방인이 본 우리, 2009년 10월
조선시대의 생활상, 문화생활 등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 외국인의 기록이 많이 인용된다. 이런 기록물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전해듣지 못했던 과거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조선을 조사하면서 이들이 남긴 정보들을 찾아보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쓰이는 자료 대부분이 전문 민속학자의 조사 기록이나 조선에 오래 머무르며 교류한 사람이 아니라 여행객의 단순한 견문록 혹은 그 자료를 모아서 작성한 수준이라서 객관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당시 서양인은 조선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자신들과 오래 교류한 일본 쪽 의견을 반영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신분적, 시간적, 생활적, 문화적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대로 기술하니 일부의 이야기가 전체로, 전체의 이야기가 일부로 변형되어지는 경우도 많으며, 다양한 양상이 있음에도 한두 가지의 정보만 기술하여 정보의 다양성이 부족하다. 예로 윌리엄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조선처럼 통신사에 대한 왜곡으로 조선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거나 부산이 대마도의 소유권이 있다는 잘못된 기록은 흔히 발견되며 한복의 양식과 관련되어 아래의 9번과 같은 입장이 대부분이지, 다른 양식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미약하다.

이러한 기술 방식은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문제들을 만들었는데,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이 이러한 정보를 접하고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해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 항목에서 소개되는 오해 대부분이 외국인의 견문록에서 태어났고, 인터넷에 퍼진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의 중심에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1. 왕궁은 작고 초라하다.
2. 공원도 여관도 없다.[2]
3. 조선인들은 게으르다.[3]
4. 거리는 좁고 더럽다.[4]
5. 땅바닥에서 잡동사니나 판다.[5]
6. 염색이나 무늬없이 흰 옷만 입는다.[6]
7. 여성들의 옷은 소년 옷처럼 짧고 초라하며 노출하기가 일반적이다.[7]
8. 여인들은 온 몸을 두꺼운 옷들로 꽁꽁 싸매서 눈 외에는 아예 보이지도 않게끔 감추어야 된다. 때문에 외출도 할 수 없고 장옷으로 얼굴만 내밀고 다닌다.[8]
9. 여성은 이름이 없다.[9]
10. 창고가 없어 식량을 저장하지 못해 썩기 전에 많이 먹어치운다.[10]
11. 조선인들은 양초를 먹기를 좋아한다.[11]
다양한 견문록에서 보이는 과장과 오류들

이런 식으로 아예 틀렸거나, 반만 맞거나,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서 생겨난 오해들이 수두룩해서 100% 믿을 수 없는 것이 외국인의 견문록이다. 당시 민족주의 등이 유행하던 시기기도 하였고, 동양의 문화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해 수박 겉핥기 해석도 많고, 이들이 조사단처럼 다양한 정보를 하나하나 다 정리하지도 않았었으니 이러한 오해가 생기고 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기록을 남긴 외국인 중에는 조선에 잠깐 지나가는 정도거나, 심지어 아예 조선에 방문한 적도 없으면서 소문에 의존하여 적은 기록들도 꽤 많다. 당시 많은 해외 인사가 떠도는 이야기 혹은 일본에 머물며 들은 이야기를 자신들이 직접 그곳에 가서 몇 달 여행하고 겪은 이야기처럼 꾸며 기록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자기 공적을 띄우고자 여행의 고됨을 과장하고 왜곡하는 등의 부풀리기까지 하니까 조선 땅은 밟아보지도 않은 티가 나는 기록도 많다. 그만큼 이 기록이 묘사하는 조선의 모습이 100% 사실이라고 맹신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관찰이 아닌 조선에 대한 왜곡이 되어버린다.

열강 국민에 의한 편견과 왜곡은 비단 조선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으며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다. 19세기 말의 영국 문인이었던 조지프 콘래드는 실제 콩고 식민지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각색해 저술한 소설 "어둠의 심연"에서 벨기에군 부사관 레옹 롬(Léon Auguste Théophile Rom)을[12] 비롯한 수많은 식민지 유럽인들을 바탕으로 만든 커츠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들의 이 위선적인 행태를 고발했다. 콘래드가 보았을 때, 유럽 문명의 첨병으로서 식민지와 '야만'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식민 개척의 환상에 빠진 한심한 인간들이거나 한몫 챙기겠다는 사업가, 한탕주의 사회부적응자, 기둥서방, 그리고 폭력적인 부사관 등 인간 쓰레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문명'은 그 의미를 잃고 그들이 행하는 차별과 폭정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사담을 나누는 가운데 알게 된 분명한 사실은, 내가 고위 인사의 부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능 있고 비범한 사람으로, 회사에서는 복덩어리 같은 존재로, 언제고 원할 때 쉽게 고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었네. 맙소사! 한 푼짜리 경적이 달린 두 푼 반짜리 증기선을 모는 주제에! 그럼에도 나는 일꾼 중 한 사람으로 - 알잖은가, 하느님의 일꾼으로 말이야 - 여겨졌나 보더군. 빛의 사자나 하급 사도(使徒) 같은 존재 말이야. 그 당시에는 그런 헛소리가 지천으로 인쇄되고 회자되었는데, 그런 사기가 넘쳐흐르는 가운데 사시다 보니, 아주머니께서도 그만 정신을 빼앗기신 게지. '수백만의 무지몽매한 무리들이 끔찍한 관습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런 말을 듣다 보니 정말이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네.
- 조지프 콘래드, "어둠의 심연", 이석구 역, 을유문화사, 28p

콘래드는 이 유럽인 관료와 여행자들을 두고 '(가장 고귀한 문명의) 순례자'라며 반어적으로 비꼬거나 '종이로 만든 메피스토펠레스(Papier-mâché Mephistopheles)'[13]라고 대놓고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들 역시 현지의 야만인 못지않은, 어쩌면 본인들은 그보다 더한 폭력성과 야만성을 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부여한 몇 장의 문서와 우월한 과학 기술 몇 가지만 믿고 식민지 주민들의 '미개함'을 지적한다. 그런 주제에, 이들은 머나먼 유럽 사회에 보내는 보고서와 서적들에서는 스스로를 숭고한 기독교와 유럽 문명의 전파자로 묘사한다. 이는 자신의 성과를 과도하게 부풀리곤 본국에 돌아간 후 한 자리 얻어내겠다는 심보에서 우러나는 일이었다. 콘래드는 이에 대해 "그 잘난 싸구려 증기선 모는 게 유럽에서는 고귀한 사명이랜다"라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현지의 실상을 모르는 유럽 본토의 시민들은 왜곡된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그들을 칭송하며 온갖 지원을 보낸다.

콘래드가 까발린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미개국'을 방문하고 탐험하며 기록을 남겼던 벨 에포크 시대 대부분의 열강 국민들의 현실이다. 그들의 여행기에는 제국주의인종주의가 짙게 깔렸고,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에 대한 찬양과 비유럽권 국가들에 대한 비방이 그 위에 덧씌워져 있다. 이미 이 여행기들이 쓰이던 19세기 말에조차 이런 모순이 서서히 지적받고 있었다. 이미 백삼십 년 전, 직접 식민지 일선을 누비며 유럽인들의 민낯을 목도했던 콘래드는 탐험기와 여행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에 대해서 '현실을 모른다', '순진해 빠졌다'라는 식으로 이죽거렸다. 심지어 이렇게 유럽인들의 모순을 지적했던 콘래드의 작품들조차, 현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인종차별적이므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콘래드조차도 이럴진대 그가 비판했던 당대의 다른 유럽인 여행자들이 남긴 기행문들을 그대로 신뢰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기록의 글쓴이와 주제들은 다양해서 이들의 기록이 무조건 부정적인 요소들만 있는 것이 아니나, 기존의 사실을 부풀려 과장하거나, 사실 속에 거짓을 숨기거나, 의도적이든 문화에 대한 무지였든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혹은 아예 악의를 품고 폄하하는 등 앞서 말한 요소들로 인해 일반인의 입장으로서 생겨나는 잘못된 정보들도 더러 있으니 보통 역사학자나 문서 수집가들은 사료를 살펴볼 때 이 부분을 고려해서 본다.

2.1.1.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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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쓰레기로 묘사하다1 일본 최초의 혐한서적2
과거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교육 확대를 위해서 다양한 사진이나 정보들을 이용하여 조선의 미개함을 강조하고, 없던 사실을 당연한 일인 것처럼 왜곡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내용이 길어져 오리엔탈리즘/일본 문서에서 서술한다.

2.2. 조선에 대한 무관심과 인터넷의 국뽕몰이

조선에 대한 정보 대다수가 역사와 문화 예술을 향하고 있으며[14], 조선의 풍속과 생활사에는 큰 관심을 두는 사람이 적기에 정보가 한정되어있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신분이나 환경처럼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구분하지 않고,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서 후려치는 모습이 자주 발생하여 오해가 심화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예로부터 조금씩 있어오다가 2010년대 초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더니 20년대 초에 이르러 수많은 정보 채널들이 생겨나며 본격화되었으나 그 반동으로 2022년 기준 반박과 정정 자료가 많이 드러나 꽤 줄어든 추세이다. 그럼에도 어딘가엔 꼭 존재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특히 만쭈리라는 블로거가 외국인들이 기록한 조선의 나쁜 모습과 단편적인 내용을 모아 가공한 것이 바로 대표적이다. 조선/오해에서 다루는 대다수의 주제들이 이 만쭈리라는 블로그에서 소개하고 퍼뜨린 이야기들에 대한 반박일 정도로 이미 예전부터 인터넷을 통한 조선에 대한 혐오는 시나브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조선에 대한 풍속과 사상에 따른 행동들의 경우가 마이너한 분야니 대중의 관심이 적어서 정보 또한 그 질이 떨어지고 편파적인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15] 지금과 다른 그 당시의 생각과 믿음, 다양한 양상, 생활 습관 등 행위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배척한 채 겉으로 비치는 모습만을 보는 기초적인 실수이다. 그 요소를 다뤄도 유교적인 꼰대 문화라거나 여성차별적인 남성우월주의의 산물 등 그 행위의 원인을 부정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조선에서 그 사람들이 무슨 입장인지, 어떤 계층이 그랬는지, 어떠한 문화적 요소들이 있었는지 모르고 단순히 하나로 묶어서 판단하니, 인터넷에서는 왜곡되어 전해지는 정보들이 꽤 많다. 더욱이 교과서의 내용만으로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하므로 정보 전달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실제로 위의 견문록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인터넷에서 조선을 다루는 몇몇 블로그와 유튜브, 그리고 밑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조선에 대해 알아보는 것보단 남들이 말하는 것에 편승하는 것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정보의 일반화와 왜곡, 오류를 아는 사람이 있기에 유튜브 등 관련 내용에서 정정을 시도하거나 관련 자료를 통해 반박하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국뽕이다." 또는 "왜곡한다."라며 무시당하거나 "잘못된 걸 인정해야지 피하기만 하면 발전할 수 없다."라며 잘못된 정보와 왜곡을 정정하려는 사람을 조선을 미화하려는 국뽕으로 몰아가는 걸 자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기록에서 묘사되는 더러운 위생, 허접한 의복, 여성 차별 등에 집중되어 있고 조선에 대한 정보가 거의 외국의 기록에 의존하기에 조금만 조사하고 찾아보아도 그것과 달랐다는 증거물과 관련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그 기록들 이외의 정보에는 일체 관시없이 그저 부정적인 성향의 정보만 갖고 욕하기 바쁜 모습을 보인다. 자국 혐오 문서에 나오듯이, 자신들의 행동 및 주장에 대한 비판을 국뽕으로 몰아가는 형태이다. 사실 전근대 자국 역사를 재평가하는 경우는 외국에서도 많지만, 이를 두고 국뽕 혹은 민족주의라고 비난하는 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한국의 이런 현상은 특이하다.

특히 첫 번째는 언뜻 보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교훈적인 말 같겠지만 정작 그 과거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부정하고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지 않은 채 사실로 인정해버리자는 점에서 이는 정보의 시비를 무시한, 심히 잘못된 오류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저 안하무인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태도에는 진심으로 이러한 정보들이 있는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는 사고 방식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에 대한 정보를 쉽게 이해하려는 편의주의나 선입견도 문제가 된다. 당장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등은 접근성이나 이해도가 떨어지니 그나마 쉽게 알 수 있는 근대소설이나 역사소설 등으로만 유추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정보는 반골사상이 기본으로 깔려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임꺽정, 장길산이나 각종 반란에 대한 미화를 보면 그 당시 생활이 극도로 절박하기에 사회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고, 그들의 행동에 정당성이나 동질감을 심어주기 위해선 당시의 상황을 개막장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극빈층이나 범죄자들이 처한 현실을 보고서 100~200년 후의 후손들이 "아, 대한민국 시절에는 저렇게밖에 못 살았구나."라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어느 시대나 문화에든 계급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며[16] 조선시대에도 현재와 같이 잘사는 평민, 못 사는 소작농 등의 구분은 분명히 있었지만 비참하게 살아가는 계급을 모두 그렇게 살았다고 일반화하는 건 무리가 있다.

여기에 시대상에 대한 현상학적인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일조하는데, 근대 이전에 존재했던 국가마다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부정적인 측면을 세계사 전체적으로 이해하기보단 조선의 부정적인 측면에만 집중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각은 조선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특수화하고 현재의 도덕적인 관점에서만 평가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의 부정적인 측면[17]에 대해선 무지하거나 도덕적 잣대를 피하는 이중성을 보이는 시각들이 꽤 있다.

2.3. 지배층의 기록을 조선 전체로 일반화

조선 이전의 한반도 왕조의 기록도 그렇고 또 동시기 다른 지역들도 그랬듯이 조선 역시 대부분의 기록이 왕실과 조정, 법, 양반 측 기록 등이 대부분이다. 고위층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만큼 유교적이고 억압적인 모습들이 자주 보이곤 한다. 평민들의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포상을 받거나 사건 사고의 기록이라서 파악하기 어렵다. 그나마 지방 수령의 기록, 몇몇 선교사들의 기록과 사진, 견문록, 선비의 일기, 얼마 없는 풍속기록 등을 통해 평민들의 삶을 얼추 파악할 수 있겠지만 양반과 평민의 정보는 질과 양에서 큰 격차가 있다.

특히 여성의 지조와 절개, 제사, 유교적 사상, 수절 등 조선에 대한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모습은 조선의 모습들이 맞지만, 엄밀하게는 조선의 사대부와 고위층들의 모습에 가깝다는 게 더 적합하다.

조선을 설명함에 있어 양반들의 정보가 더 풍부하고 정리되었기에 조선의 모습을 표현함에 있어 이들의 기록이 자주 인용된다. 그만큼 교과서, 방송, 인터넷에서는 대부분 이들의 기록을 인용하여 과거를 평가하고 소개한다. 그러니 조선에 대한 평가 요소가 고위층으로 한정되는 것이고 그만큼 부정적인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평민과 양반의 문화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서양에 비유하면 "서양의 여성들은 코르셋을 하고 드높은 머리장식을 하면서 특유의 사교문화와 가혹하고 복잡한 예절을 강요받았다."라고 정리하는 것과 같다. 서양의 이야기라는 점은 사실이더라도 서양의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오류인 것과 동일한 것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고위층들의 삶과 형식적인 모습들은 어느 정도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환경이다. 그만큼 부조리도 많아서 여러모로 불편한 계층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재들과 과거의 과오들을 거짓이라며 회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이 그 나라의 전부를 상징하고 평가되게 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멀쩡하게 있던 애꿎은 다른 사람들도 싸잡아 욕하는,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다.

2.4. 내외적인 정치 극단주의

“자기를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던 조건에서 자신의 전제권을 강화하는 한편 새 정권의 대외적 지위를 높일 목적 밑에 명나라에 사대하는 비굴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통치계급은 오히려 자기들끼리 내부 싸움을 되풀이하면서 사치하고 안일한 생활에 빠져 국고를 탕진하고 국방력을 약화시켜 인민들의 반침략 투쟁을 어렵게 만들었다”
“봉건군주로서 세종의 활동과 그 결과는 봉건 지배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인민 대중에 대한 봉건적 압박과 착취는 보다 째여지고 강화되었다”
북한의 조선 역사 인식, 연합뉴스 기자 정연식## 출처# 출처2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과거 한국이 약해서 침략을 당했다며 강한 정치를 폈다. 일제강점기의 피해의식을 이용한 군부 정치였다. 결국 한국은 일본의 식민사관에 발목이 붙잡혀 역사적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크 피터슨 교수#

한반도의 극단주의 사상가들은 식민지 수혜론, 김일성 우상화, 군사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최대한 조선에 있었던 사건이나 일들을 침소봉대해서 망해야 했을 나라라고 선동하며 그 반대급부로 김일성과 군사정권을 찬양하며 타국에서는 일본[18]과 중국의 국가주의자[19]들 또한 자국 우월주의를 위해 다른 한반도 국가들과 함께 조선사를 왜곡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단순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다 못해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기만 해도 전 정권에 대한 악의적 흑색선전으로 자신의 치부를 숨기거나, 이익을 추구하려는 집단들이 전세계적으로 써먹는 수법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그냥 역사에 흔하디 흔하게 기록된 구 정권의 소멸과 신 정권의 탄생일 뿐이다. 즉, 조선에 대해 극단적인 저주와도 같은 폄하와 평가절하는 한반도 국가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닌 정치를 하는 인간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자, 목적은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정치병을 자극해 자기 이익을 꾀하거나 자기 치부를 숨기는 정치행위일 뿐이다.[20]

2010년대 이후 우파 유튜버를 중심으로 조선을 폄하하는 영상들이 제법 올라오는데, 이런 류의 영상을 올린 이들은 대부분 반일 종족주의 등을 서술한 이영훈 등 뉴라이트 부류이다. 이들은 노비종모법 하나를 확대 해석 및 왜곡하여 세종을 암군으로 만들거나 조선은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린 유일한 나라라고 선동하며 은근히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수법으로 자신들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정치관을 주입한다. 이러한 유튜버의 대표격으로는 우리가 만약 손을 잡는다면이 있다. 단, 이덕일 사관처럼 극우와 상관 없이 조선시대의 문제점을 과장 해석하는 사례도 있다. 선동 당한 사람들은 숭례문 경복궁 등, 조선시대의 건축물과 관련 기념물들이 봉건 왕조의 상징이라며 없애야 한다고 말하는데[21], 마치 자국의 전통 문화를 봉건주의의 잔재라며 파괴했던 마오쩌둥의 홍위병을 연상하게 만든다. 사실 뉴라이트 세력은 전향한 운동권, NL 출신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유사점을 보이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조선일보의 박종인 기자처럼 '광화문 괴담', '대한민국 징비록'처럼 조선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에 기반하여 조선을 왜곡하는 서적들을 출판하는 기자들도 이에 대한 정서를 부채질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조선보다 더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한 제국주의, 일제강점기, 군사정권의 인권 침해와 권위주의, 조선로동당과 중국 공산당의 실책들은 두둔하거나 도리어 신격화하고 옹호하는 모순과 이중잣대를 보이기도 한다.[22] 한 예로 조선을 극단적으로 비하하면서 이승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성향이 있는 뉴라이트는 조선의 노비나 기생 문제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정작 이승만 정부 시절에 있었던 엄청난 인권 유린 사례들인 제주 4.3 사건이나 보도연맹 학살사건 및 국민방위군 사건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사소하다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일본의 우익들도 조선시대는 비난하면서 에도 시대나 일본제국 시기의 부정적인 기록들은 시대의 한계로 치부하면서 회피하고, 아예 현 정권에 대한 비판 자체가 용인되지 않는 북한,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전근대 국가를 현대적 인권 개념으로 비판하면서, 진짜 근현대 국가들에서 벌어진 일은 전근대적 논리로 옹호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3. 문화적 오해

3.1. 조선의 문화만이 전통문화다?

직접적인 오해보다는 은연중에 깔린 편견의 형태. 하지만 이게 의외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조선은 현대 한국과 시기적으로 가장 가까운 시대이고, 그 문화 유산도 양적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 탓인지 '전통'하면 조선시대, 그 중에서도 조선 후기~일제강점기까지의 문화들만을 주로 전통이라며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한복만 하더라도 서구식 한복을 주로 고집하면서, 그 이전의 조선한복 양식들은 물론 고려, 삼국시대의 문화들은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현대식 한복은 한복이 아니라거나, 분명 전통적인 양식임에도 왜색이라며 모함받는 경우도 많다.

전통 문화의 영역을 주로 조선 말기에만 국한짓는 이유는 각종 침략전쟁들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역사, 유적 파괴 및 변화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고려시대에 거란군의 고려 침략으로 인하여 당대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여몽전쟁으로 인해 고려가 몽골제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각종 유적, 탑, 유물, 문화재, 역사서 등이 모두 파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그 이전부터 있던 문화재들을 포함하여 각종 철강 기술이나 예술 등 문명 대부분이 일본군이 강탈해가거나 파괴되거나 소실되었고[23] 당장 역사서만 봐도 몽골제국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삼국시대 전쟁서나 역사서가 모조리 파괴되어 현존하는 것이 없고[24] 문화재 대부분도 현대에 발굴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이렇게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의 문화정보는 대부분이 몽골제국의 고려 침략에 의해 파괴되면서 없어지거나 묻히고 말았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통한 대대적인 문화말살정책, 근대 문명의 유입을 통한 기존 문화의 변화 등 다양한 사회적 변동과 혼란기를 거치며 대한민국에서 '전통'이라고 하면 삼국시대, 고려, 조선 초기를 모두 제외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상 가장 전통과는 거리가 멀고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조선 말기~일제강점기'라는 매우 한정적인 문화적 양상이 주도하게 되었다. 즉, 한국의 역사가 반만 년이라는 유구하다는 인식과는 다르게 실질적으로는 기록만 내려오는 것이지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는 온전히 내려오는 문화재가 몽골제국에 의해 전부 파괴되어 전무하다시피해서 발굴을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자료가 적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고려 시대, 조선 시대의 문화만이 남게 되었다. 그마저도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에 비해서도 턱없이 부족하다.[25]

한편, 이 부분은 본 문서에 나오는 모든 잘못된 정보나 존재하지 않는 악습 등의 근원이 되기도 하며 모든 항목의 내용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구한말~일제강점기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바뀌는 매우 극심한 과도기였고 이 과정에서 사회와 문화가 격변하면서 이전에는 보기 힘든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다양한 특수 사례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중에는 한국사 전체는커녕 조선의 문화와도 전혀 맞지 않는 이질적인 면모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례들을 조선, 더 나아가 한국의 '전통'으로 여기게 된 게 만악의 근원이다.

3.2. 한복은 한푸의 짝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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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웨이보에서 퍼뜨리는 역사 왜곡 일러스트. 헐벗고 모자라보이게 그려진 한국 여인이 중국인에게 옷을 훔쳐갔다고 말하고 있고, 우측의 일본인이 옷을 제대로 입으라고 핀잔을 주고 있다. 일본 극우들이 퍼뜨리는 왜곡된 한복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한 친일 혐한 성향을 드러내며, 중국인이 입은 한푸는 실제로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펼치기 · 접기(전통의상 동북공정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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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중국의 한복 왜곡 논란,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로 인해 탄생한 것으로, 한국의 한복이 "명나라의 한푸 중 하나의 양식이다." 또는 "영향을 받은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생겨난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펴는 데는 크게 3가지 근거를 두고 말한다.
• 한복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의상이기에 자신들의 의복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선이 관복, 갑옷 등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으로, 한복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화이다.
• 명나라 초기의 복식과 한복은 유사한 구조를 가졌기에, 조선의 옷은 곧 한푸의 표절이다.

1번의 경우 조선족이 중국에 속할 수는 있어도 그 문화의 근간은 결국 한반도이므로 그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식이면 세계 많은 문화권의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동화됐으므로 전세계 문화는 미국 문화라는 결론도 낼 수 있다.

2번의 경우 조선에서 국가적으로 쓰이는 관복과 갑옷이 명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적인 한복까지 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한 천 년 전이면 모를까, 한중일이 서로 각방 쓰던 수백 년 간 각자의 방식대로 진화한 시점에서 영향력은 Y자 깃 외에는 많이 떨어져나갔다.[27]

특히 3번이 중요한데, 한족들이 한푸, 특히 자신들의 마지막 왕조인 명의 한푸를 보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명나라 초창기의 양식을 보면 한복의 구조와 형식이 닮았지만 실제로는 수입이 아닌 수출의 사례로서 고려양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의 옷이었다. 즉, 자기들의 옷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수입한 옷을 자기 옷이라고 뒤집어서 우기는 것. 일부 커뮤니티에서 중국인들이 조선의 한복이 명나라 복식에서 왔다는 말을 퍼트리지만 이는 전혀 맞지 않다. 한국은 고려양을, 명은 관복을 수출함으로써 서로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한다.

당시 고려에선 원나라 말기 궁녀들을 자주 올려보냈는데, 이때 궁녀가 입고있던 한복이 중국 북부의 몽골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나중엔 명나라가 세워지고, 수도가 남부에서 북부로 옮겨지면서, 고려양은 한족들에게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어 기존의 한푸보다 더 유행하게 된다. 이대로 중화 문명에 완전히 정착하나 싶었지만 홍치제는 '위대한 한족이 동쪽 오랑캐의 옷에 홀렸다'면서 그만 금지령을 선포해버리고[28], 약 100년 간 중화의 사랑을 누린 고려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여진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며 한푸와 함께 고려양도 잠들어있다가, 21세기에 들어 한족의 한푸 입기 운동이 퍼지면서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문제는 이게 옆 동네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에서 비롯됐다. 이때 한족들은 "어? 명나라의 초창기 옷이 한복이랑 거의 똑같네?" → "명나라는 한족의 나라니까 이것도 한족의 옷이겠네?" → "우리가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모든 문화의 기반이니까..." → "아하! 한복의 원류는 사실 명나라의 한푸로서, 한국에서 이를 따라한 거구나!"라고 계산을 때려버린다. 따라서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혹시 중국인이거나 뭘 잘 모르는 사람이 '한복은 한푸의 모조품' 소리를 한다면 밑의 내용으로 반박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말해줘도 일방적으로 무시해버리거나 "우리가 속국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리가 없다!"라며 사실을 부정하겠지만.
• 정말 한복이 명나라의 것이었다면 어째서 그들 스스로가 한복을 고려양이라 부르고, 오랑캐의 옷이라며 금지령을 내렸겠는가?
• 수백 년동안 유지되던 대륙의 의복 양식이 아무 이유없이 하루아침에 180도 달라질 수 있는가? 또 이후에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간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이러한 말들은 한복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도 중국은 한복만이 아닌 여러나라의 전통 문화에 간섭하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모노와 베트남의 아오자이를 각각 당나라, 송나라 옷을 따라했다고 주장하며, 기타 여러 소수민족들의 옷도 자신들이 전수해준 거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굳이 반박을 하면, 그냥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옛날부터 동북아시아에서 부대껴서 공존해왔기에 문화적으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긴 했을 것이고, 사는 환경도 비슷하니 전통 의상이 얼추 비슷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3. 조선은 가난해서 염색도, 무늬도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흰색이다. 즉 인공적인 염색을 해야 나온다. 게다가 흰색은 비싼 고급 염료였다.

실제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조선의 사대부들도 흰 옷을 즐겨 입었고, 고려시대의 임금들도 평상복으로 흰 옷을 즐겨 입었다. 고려사의 1253년 기록에는 백은(白銀) 1근을 갖고도 20승(升: 피륙의 날을 세는 단위) 백저포(白紵袍) 1필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비록 이 기록이 특별한 상황을 전한 것이지만, 흰 옷 가운데 값비싼 옷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흰 옷이라고 해서 저렴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천민이나 노비들은 황색, 청색 등 염색한 옷을 입었다. 즉, 가난해서 흰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아해서 입은 것이다.

목화로 만든 옷은 흰색을 띄는데 무슨 염색이냐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옷감의 흰색과 염색의 흰색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 말기의 사진을 보면 같은 흰색인데도 어떤 것은 평범하게 옷고름이나 소매 등 옷의 부분들이 각각 잘 구별되어 보이는데 반해, 어떤 것은 조명처럼 하얗게 빛나서 그 형상이 보이지 않고 마치 사진에서 옷 부분을 도려내고 아무런 무늬가 없는 종이로 때운 것마냥 보이는 사진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색과 무색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일반적으로 생산한 흰색 모직물은 우리가 흔히 흰색을 떠올릴 때의 그 밝고 빛나는 흰색이 아니라 누런색, 상아색(아이보리) 등 다른 색이 얼추 섞여있는 느낌의 탁하고 칙칙한 흰색을 보인다. 여기서 만족하기도 하지만 따로 흰색 염료를 이용하여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깨끗한 흰색으로 만들어 입었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백색을 숭상하고 백의를 즐겨 입는 백의호상(白衣好尙) 전통을 이어왔다. 이슬람과 힌두권, 기독교권을 비롯한 세계의 다양한 종교문화권과 다양한 민족에서도 백색을 신성하고 고귀한 색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어 왔으나, 한국의 백색선호 사상은 매우 뚜렷하여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백색 선호사상은 고대부터 이어져온 태양숭배 사상과 동양종교의 금채색사상,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주의 사상 등을 바탕으로 하여 흰색을 순수하고 고귀하며 청렴한 색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태어나자마자 흰옷을 입고, 평생 흰 옷을 입다가 죽어서도 흰 옷을 입는다’고 할 정도로 백의를 호상하였으며, 백의의 착용을 제한하는 백의금령(白衣禁令)이 수차례 있어왔음에도 이러한 전통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져왔다.
- 현대 한국 전통복식에 나타난 백색의 저항성에 관한 연구

염색한 흰색은 빛깔이 매우 강해서 일반적인 흰색과 달리, 빛나고 깨끗해서 뚜렷이 구분되어지는 강렬함을 가졌다. 마치 신성한 태양처럼 빛나는 흰색의 성질은 조선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는데, 조선에서 '흰색'은 곧 신성하고 빛나는 자연의 색깔로 인식되었다.[29] 이러한 흰색숭상은 부여 시절부터 찾아 볼 수 있으며, 외부의 다른 국가와 민족들에서도 종종 보이는 사상이다. 이러한 문화적 요소가 반영되었기에 조선은 흰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기존의 흰색과 혼동하여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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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전통 백의는 종교복식과 의례복은 물론 무속복, 제례복, 상복, 평민복, 양반들의 평거복, 학자복 등으로 다양하다. 이는 신성함, 비애미, 절제미, 소박미, 인격미, 자연미 등으로 범주화 할 수 있다.
- 현대 한국 전통복식에 나타난 백색의 저항성에 관한 연구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기생이나 광대같은 예술인, 공무원, 군인, 의사, 무당 등 다양한 곳에서 염색 옷을 입었다. 심지어 부유한 양반들조차 흰색 옷을 자주 입었을 정도였다. 또한 어린이들의 사진에서는 비교적 싸게 물들인 유색 한복들을 주로 입힌 모습을 쉬이 찾아볼 수 있다. 한때는 황토색이 유행하기도 했었으니, 조선은 염색문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신분에 상관없이 흰색 옷이 좋아서 자주 입는 것이었다.
일명 백민(白民)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19세기에 한국을 다녀간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인이 남녀를 막론하고 다 흰옷을 입고 있다는 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오페르트(Oppert,E.J.)는 그의 ≪조선기행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Korea≫에서 “옷감 빛깔은 남자나 여자나 다 희다.”고 말하고 있으며, 라게리(Laguerie,V.de)도 “천천히 그리고 육중하게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1895년 전국에 변복령(變服令)과 단발령이 내리자 이에 항의하는 의병전쟁이 일어난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는 백의를 숭상하는 한국인의 집착이 남달리 강했던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뒤 일제하인 1920년대에도 백의의 습속은 여전하여 사람들이 운집하는 시장은 마치 솜밭 같이 희다고 외국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로부터 그러한 것으로서 수천년 전의 부여 사람과 그뒤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대 왕조에서도 한결같이 흰옷을 입었다.”고 그 유래의 오래됨을 강조하였다.

중략...

일제식민주의자들은 한국인이 흰옷을 입는 까닭을 여러 모로 왜곡하였는데, 가령 도리야마(鳥山喜一) 같은 자는 그의 <조선백의고 朝鮮白衣考>란 논문에서 고려가 몽고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망하자 망국의 슬픔 때문에 백의를 입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야나기(柳宗悅) 같은 자도 백의민족의 유래를 “이 민족이 겪은 고통, 많은 역사적 경험”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백의를 마치 상복(喪服)이라도 되는 듯이 착각하고 있다.

백의를 숭상하는 습속에 대해서는 3세기에 편찬된 중국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되어 있다. 즉 부여의 “재국의상백(在國衣尙白)”이라든지, 변진(弁辰)의 “의복정결(衣服淨潔)”이라든지, 고구려의 “기인결청(其人潔淸)” 따위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백의는 삼한·삼국시대 이래의 오랜 유습임을 알 수 있고,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은 것을 여러 차례 반포된 백의금지령(白衣禁止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13세기 후반 고려 충렬왕 때 백의금지령이 내렸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태조 7년, 태종 원년, 세종 7년, 연산군 11년과 12년, 인조 26년, 현종 11·12·17년, 숙종 2년과 17년, 그리고 영조 때 여러 차례 거듭 백의금지령이 내렸으나 똑같은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이같이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렸으나 시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백의의 습속이 끈질기게 우리의 의생활을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더욱이 갓난아이에게 흰옷을 입히고 죽을 때 또한 흰옷을 입히니 한국인은 요람에서부터 입관에 이르기까지 백의로 일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 백의민족 (白衣民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조’에는 “왕만이 오채(五彩)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으며, 백성들은 갈(褐)을 입는다” 하였고, ‘신라조’에는 “의복 등이 고구려·백제와 같고 조복(朝服)은 흰빛을 숭상하고 산신(山神)에 제사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민중들은 소색인 삼베나 무명옷을 입은 반면, 중국 복식을 받아들인 지배층은 채색옷을 입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흰옷 선호는 바뀌지 않았다. 명나라 사람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란 책에서 “옷은 흰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렁거리는데 주름 또한 성글다.”고 하였다.
- 현대 한국 전통복식에 나타난 백색의 저항성에 관한 연구
令朝官士人, 着黑色衣, 禁白色衣。 東方之人, 自古尙白, 國典雖有白色之禁, 而因仍成習, 莫之變, 上思以易之, 遂定是制。

조정의 관리와 사인(士人)으로 하여금 검은 옷을 입게 하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금하였다. 동방 사람은 예로부터 흰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국법에 흰색을 금하는 법이 있기는 하나 그대로 습속이 이루어져서 바꾸지 못하였는데, 상이 바꾸고자 하여 이에 제도를 정한 것이다.
- 현종실록 19권

이는 백의민족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한민족은 고대부터 흰색옷을 숭상하는 풍습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고 그 때문에 고려와 조선시대 내내 백의를 일부러 금지하려고 하였으나 모두 다 실패하였을 정도였다.

아무리 흰색이 신성하지만 사람의 손이 닿는만큼 쉽게 더러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라서, 위아래 모두 염색하는 경우도 많지만 상·하의 중 하나를 유색으로 염색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조건 흰색만을 입는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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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색의 한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점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다. 지금처럼 물감이나 화학재료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인데, 어떻게 저런 다양하고 화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색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무슨 재료를 이용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천을 염색하였던 것일까? 그리고 그 염색에는 어떠한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일까?

우리 조상들이 물감의 재료로 쓴 것은 주로 식물 염료이다. 그들은 자연에서 채취한 여러 가지 식물의 꽃, 열매, 뿌리, 풀 등에서 염료를 채취해서 옷감을 염색했다. 여러 문헌과 전통 염색 전승자에 의하면 색상별로 사용된 식물은 다양하다. 푸른 물을 들일 때는 쪽풀과 닭의 장풀, 노란 물을 들일 때는 치자나무와 황백나무, 울금, 황연, 신초, 회화나무, 홍화, 빨간 물을 들일 때는 홍화, 꼭두서니, 소방목, 자줏빛 물을 들일 때는 지치의 뿌리를 이용했다.

식물 염료는 염색이 잘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 우리 조상들은 매염제를 사용했다. 매염제는 섬유에 결합이 어려운 염료가 잘 염색되도록 작용하는 재료이다. 조상들은 매염제도 자연으로부터 얻어 사용했는데, 그 종류로는 잿물, 꼬막조가비나 굴껍질로 만든 석회, 명반, 식초 등이 있다. 잿물 중화나 염색 촉진을 위해서는 오미자, 매실 등을 사용했는데, 특히 오미자는 홍화 염료로 홍색염색을 할 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한복에 스며든 과학적 아름다움 (천연 염료와 매염제로 다양한 색깔 내)
우리 전통 오방색중 백색에 가까운 색을 표현하는 천연염료로는 뽕나무 뿌리가 있고 이 색상은 완벽한 하양이기보다는 오간색의 무색(無色), 소색(色)을 보여준다.

안료는 주로 발색에 사용되는 미세한 물질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채색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흰색안료였다. 빛의 표현과 밝고 어두운 차이도 흰색안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것 없이는 묘사할 수 없었다 한다. 천연의 흰색안료는 백토, 고령토(高嶺土, A1203*2SiO2 * 2H2O)와 같이 직접 흙에서 나온 안료와 석고,백악(白, CaCO3), 호분(胡), Oyster shell white,Caca3) 등과 같이 광물에서 나온 것이 대표적이다. 이 흰색 안료들을 시기별로 다시 분류해보면 선사시대 이후에는 백악, 고령토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그다음으로 연분, 합분이 사용되었는데 합분은 사용된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았다고 한다. 백악과 고령토는 고려 불화에서 흰색 표현에 사용 되었으며, 호분은 조선시대 불화에 주로 사용되었던 흰색 안료다.

'백의민족'인 우리나라는 조선을 예로 들더라도 백자와 횐색의 모시조각보, 일반인의 흰색 누비옷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백색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백색 사용은 조선시대 훨씬 이전 시대인 삼국 시대부터 애용되었는데 고대 중국 문헌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한민족이 흰옷을 일상복으로 입었고 <백의민족>이라 불려졌다”고 기술되었다. 또한 “신라인이 백색 옷을 숭상하였다"하고 흰빛을 白이라 하여곧 밝다는 것을 의미하고 흰색을 신성한 색으로 다루었다. 또 선비의 청렴과 결백의 이미지를 흰색으로 투영하여 사용하였다. 한국인은 상복으로 백색 옷을 입어가장 밝은 색으로 죽은 자의 영혼이 좋은 세계에서 영생하기를 바라는 주술적 믿음이 담겨 있었다
- 흰색의 의미와 적용에 대한 기초 연구

무엇보다 애초에 조선은 전통적인 염색 기술이 발전한 나라였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주로 식물 염료를 사용하여 간단하게 염색을 하였고 염색이 잘 안되는 경우에는 매염제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령 조선시대 궁궐건축단청에 주로 사용되었던 백색과 흑색계열은 진분(당분, 향분)·정분·진묵·당묵·송연 등이 확인되며 진분은 조선시대 건축단청뿐만 아니라 각종 채화제작에 사용된 백색계열 안료였다. #
지금 위로는 경대부(卿大夫 ; 높은 관직에 있는 벼슬아치)로부터 아래로는 천례(賤隷 ; 천민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자색(紫色)을 입기를 좋아하니, 이로 인하여 자색 한 필 염색하는 값이 또 베 한 필이나 듭니다. 옷의 안찝까지 모두 홍색의 염료를 쓰게 되니, 단목(丹木)과 홍화(紅花)의 값도 또한 헐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사치를 서로 숭상하여 등차(等次)의 분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물가가 뛰어 오르게 되니 또한 염려가 됩니다. 지금부터는 그 자색의 염료는 진상하는 의대(衣襨 ; 임금의 옷)와 대궐 안에서 소용되는 외에는 일체 엄격히 금하고, 홍색으로 물들인 옷의 안찝은 문무의 각 품관과 사대부의 자제 외에 각 관사의 이전(吏典)·외방(外方)의 향리(鄕吏)·공상(工商)·천례들은 또한 입는 것을 금하게 하고, 연월(年月)로써 기한하여 사치를 영구히 금단시키고 등차(等差)를 분변할 것입니다.”
- 1427년(세종 9) 2월 19일자 ‘세종실록’

실제로 세종실록을 보면 높은 관직의 벼슬아치와 천민들도 자색 옷을 입기를 좋아하니 물가 안정을 위해서 자색 옷을 금해 달라고 말한 기록이 남을 만큼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색상의 옷을 신분에 상관없이 자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무늬 문화가 없다는 말도 허구이다. 백 번 양보해서 조선이 타국에 비해 무늬의 사용 빈도가 떨어졌다고 할 수 있더라도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조선이 선호하는 무늬 방식도 있었다. 기존의 원단 색에서 약간 채도를 높이거나 그와 엇비슷한 색을 이용하여 최대한 튀지 않도록 무늬를 새기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무늬 문화는 있었지만 평민은 굳이 돈을 들여서 새길 필요성을 못 느꼈을 뿐더러, 무늬는 기생들이나 한다는 인식이 있기도 해서 그리 즐기지 않았을 뿐이다.

더욱이 흰색은 과거부터 비싸고 고급진 색상에 속했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흰색을 흔히 볼 수 있고, 공장에서 흰 옷이 대량으로 찍혀나오지만, 과거 염료제조기술과 표백기술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꽤 대접받는 색깔이었다. 특히 서양에서 흰색의 드레스는 부를 상징하는 고급의복이었다. 지금도 서구권 왕족들의 드레스나 공무 수행용 복장은 거의 다 흰색이다.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복장도 흰색인 게 많고, 그 며느리인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도, 살아생전에 입었던 옷도 하얀색인 게 많았다. 심지어 흰색이 교황의 옷 색깔로 사용된 탓에, 유럽 귀족들 중에서 바티칸 측의 허가를 받은 일부 유서깊은 가문에게만 교황을 알현할 때 흰색 옷을 입는 것이 허용되기도 했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종종 실록과 같은 기록에서는 "흰색이 사치이니 금해야 한다."라는 내용들이 적혔다. 이를 보고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설명했듯이 흰색은 사치스러운 색었다. 재료, 제작에서 더 높은 난이도를 필요로 했고, 더욱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기존의 칙칙한 흰색으로 보이기에 관리도 힘들고 수명도 짧았다. 그렇기에 흰색은 비싸게 불렸고 사람들은 아예 염색을 하지 않고 목화의 자연적인 흰색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현재도 흰색 옷을 깨끗하게 세탁하거나 관리하기 위해선 세탁시 별도의 표백제를 사용하거나, 삶거나, 이염을 막기 위해 다른 색깔의 옷과 같이 세탁하지 않는 등 신경 쓸 것이 꽤나 많은데 지금보다 염색기술도 표백기술도 부족했을 조선시대에는 흰색 옷의 제조, 관리 난이도가 어땠을지는 불보듯 뻔하다. 괜히 신분도 높고 돈도 많던 양반들이 흰색을 자주 입은 게 아니다.
태종1년- 백색의복을 입는 것을 금한다.
연산군 11년- 여인들이 머리수건과 치마를 희게 물들이는 것을 금한다.
현종12년- 조정에서 관리들이 흰옷을 입는것을 금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 조선 조정의 흰색 염색 금지령

조정에서도 이러한 사실들을 알았기에 다양한 색깔들로 염색하기를 장려하였다. 흰색을 아예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염색만 해도 사례를 내리든지, 온 백성의 옷을 파란색으로 염색하려고 시도하는 등 흰색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시도들을 해보았다. 구한말 개화 계몽 운동가들이 의생활의 개혁을 위해 주장한 것 중의 하나도 '흰 옷이 아닌 색깔 있는 옷을 입자'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이런 흰 옷이 사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비실용적이고 구태인 복식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3.4. 한복은 짧고 튀어나온 임산부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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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짧은 저고리와, 매우 긴 치마를 가진 한복 양식. 일명 "임산부복"
흔히 임산부복, 결혼식 한복이라 불리는 양식은 대중이 막연히 생각하는 '전통'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한말~일제강점기 시기에 들어온 서구문물이 전통과 만나 생겨난 현대양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복은 조선 전기엔 길고 넉넉한 반면 조선 후기 시절엔 짧고 좁은 양식으로 변화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는 '변화'가 아니라 '추가'된 것으로, 후기까지 그 다양성을 유지하며 전기~후기의 양식들이 한 시기에 존재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서구문물의 영향으로 가슴 부분을 다 덮어버리는 길이의 "어깨허리치마"가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구조와 형태에서 벗어난, 대한민국 초창기나 북한방송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통자형 한복 속칭 "임산부 한복"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30]

이렇게 만들어진 서구 양식은 6.25까지만 해도 민간에서 자주 입었고, 이후 한복이 예식용으로 바뀌면서 사용되는 한복은 최근의 서구 양식으로만 제한되었다. 이것이 방송과 행사에서 주로 쓰이니 이러한 양식이 전통이라는 생각이 퍼진 것이다. 덤으로 기존에 있던 다양한 양식들은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파일:한복삼총사.jpg 파일:한복이총사.png
서양식, 후기, 전기 대표양식 후기와 전기양식의 사진
위 사진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복의 특정 양식이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하여 굳이 그 양식을 고집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류 선택의 가짓수가 늘어나 다채롭게 입고 다녔다고 보아야 맞다.

문제는 한국인들도 조선 말기의 서구식 한복과 그 양상만을 '잘은 모르지만' 전통으로 여기고 따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막연한 전통에 대한 환상과 고집은 잘못된 정보의 재확산에 기여하고 한복의 대중화를 막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조선 말기에서 임산부 한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궁중의 여인이나 사대부 집안에서나 확인되며, 기생계급만 되어도 치마는 허리에서 끝나고 위로는 치마말기, 저고리로 가렸지 무식하게 가슴까지 치마로 가리는 건 없었다. 게다가 궁중의 궁녀들도 북한식 한복보다는 저고리의 길이가 더 길었고 예를 갖춘 복식은 저고리와 치마가 겹치는 영역이 넓어 임산부 한복 느낌이 아니다.

3.5. 한복은 노출, 수준낮은 문화다?

생각보다 자주 언급되는 요소이며, 혐한들이 주로 이 부분을 트집 잡아서 사진 자료를 들면서 한국과 전통문화를 폄하하는 데 이는 유튜브네이버에서도 쉬이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활발히(?) 쓰이는 선동이다.
파일:한복의 노출1.png 파일:한복의 노출2.png 파일:한복의 노출4.png
2000년대부터 인터넷에서 전통 한복을 찾다 보면 대부분의 정보들로서 질적으로 낮은 사진들을 자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당장 인터넷에서 조선에 대한 과거사진들을 찾다 보면 쉽고 빠르게 만나볼 수 있으며, 접하게 되는 사진들 대부분이 짧은 저고리에 가슴을 노출하는 여성들의 사진이다. 이외에도 헐벗은 남성들, 더럽고 수준 낮은 한복을 입은 사람들처럼 여러모로 불편한 모습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빌미삼아 한복이 수준 낮은 문화이며 일본의 도움 덕분에 성장했다는 일본우익자국혐오를 찾을 수 있다.
(일본)과도한 환상과 거짓말 (일본)치마저고리의 진실(저고리 착유)

이렇게 질 나쁜 것들만 잔뜩이니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조선과 한복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기 쉽고, 기존의 조선에 대한 부정적 입장들이나 (가난, 유교) 오해들을 밑받침 삼아 확신을 가지고 "조선에선 다 이렇게 입고 살았구나"라며 한복 문화 전반에 대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사 좀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실제론 대부분 잘 입었고 다양한 양식과 형태가 존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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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입은 사람과 노출한 사람
실제로 조선시대 사진들을 많이 보면 가슴을 까고 돌아다니는 모습은 극히 소수이며 상당수는 사진처럼 잘 챙겨 입었다. 더욱이 시장, 행사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단 한 번도 가슴 노출이 확인되지 않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선교사 영화에서는 한 여인이 노출을 하고 있으나 좋은 옷을 입었으며 그저 가슴가리개를 내린 채 동네의 밭길을 걷는 모습으로 나온다.

게다가 위 일본 사이트들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든, 현재 인터넷에서 대충 "조선노출사진"이라고 검색하든, 조선의 노출과 미개를 논할 때마다 똑같은 사진들이 똑같은 내용으로 수십 번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것만으로도 자료가 충분하다는 말도 되지만, 추가 자료가 더 이상 부족하기 때문에 같은 자료들을 계속 돌려쓰고 있다는 소리도 된다. 그만큼 제한적인 증거와 자료들을 가지고서 한복 문화를 폄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조금만 더 깊게 조사하면 금방 풀린다. 이러한 노출 사진의 정체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 평민여성들의 평범했던 문화적 생활
•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쓰인 정치적 선동

첫 번째로 아무리 조선이 유교 국가라지만 양반과 평민 사이의 격차는 컸다. 여성들의 노출도 이 중 하나로서 평민 여성이 지조와 절개를 지킬 의무는 없으므로 그저 편하려고 하면 속옷을 내려 노출을 하던 것이다. 여름철에 더위를 식히거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거나, 남자아이를 낳았다는 증표로서도 쓰였다. 말했듯이 지조와 절개는 평민여성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을 식민지 삼은 일본제국은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조선의 미개함, 무능함을 강조하며 식민지 통치에 대한 입장을 합리화하였고, 이를 위해서 다양한 정치적 활동들을 주도하였다. 그 중 위 같은 사진들 또한 평민여성들의 노출문화를 이용하여 조선의 미개함을 강조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해외로는 <조선처럼 열등한 국가를 우리 같은 선진국이 지배하여 그 수준을 높여줄 것이다.> 국내로는 <조선은 문화와 역사가 열등한 민족이니 우등한 민족에게 지배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며 내선일체 사상과, 식민통치의 합리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저런 류의 사진들을 자주 남겨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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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사진의 경우 일제가 조선 통치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일제의 의도대로 연출된 사진이다. 이 사진들은 사진첩과 엽서로 제작되어 전세계로 팔려 나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 이는 2007년 8월 19일에 방영된 SBS 스페셜 96회 일제사진, 그 비밀과 거짓말에 위 사진들과 함께 자세히 나온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사진들이 현대에도 유지되어 일본우익들과 자국혐오자들에게 힘이 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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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활기찬 여성이 가슴을 드러낸 채 시골길에서 짐을 나르고 있다. 시골 여성들은 이처럼 일하면서 몸을 흔히 노출시킨다. 남성들은 loincloth 만 두른다.[31] 이건 심지어 도시에서도 이렇다. 특히 노동자 농민 계층에서 그렇다. 서양인 여행자라면 이런 누드 풍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일본의 깊숙한 안쪽을 들어가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다른 여행서들에서는 이런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 남성들은 거의 아무 것도 입지 않았고, 여성 일부는 여기저기 뜯어진 짧은 속치마만 걸치고 위에는 헐렁한 옷을 걸쳤는데 허리까지 드러내고 끈으로 묶었다. 그렇게 입는 데는 무슨 성적인 의미는 없었다. 짧은 속치마는 매우 야만적이었다. 나의 '문명화된 일본'이란 선입견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사벨라 버드 번역 출처
백 번 양보해서 노출을 하고 다녔다고 해도 애초에 노출이 미개하다면 미니스커트, 배꼽티 등의 발원지이자 노출에 훨씬 관대한 서양이나 일부 노출도 아닌 전신 노출이 다수 존재한 일본은 더욱 미개하다는 말이 된다.

조선의 여인들이 노출이 있었다는 정보는 사실이지만 이를 악용하여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한복 문화 전체를 수준 낮은 문화로 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임을 인지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노출을 금기시하며 미개하게 여기는 사고부터 종교적 우파, 안티포르노 페미니즘, 성적 보수주의에서 볼 법한 매우 후진적, 비현대적인 사고방식이다.

3.5.1. 노출은 수준낮은가?

일본의 여성 노출 사진
아래에 훈도시만 입은 일본 남성 사진
훈도시만 입고 헐벗은 채 서양인을 가마에 태우는 일본 남성들
일본의 알몸 노출 축제
일본의 해녀들, 후방주의[32]
사진작가 와다 요시오가 촬영한 일본의 지역별 축제 사진을 모아놓은 웹 페이지
The men may be said to wear nothing. Few of the women wear anything but a short petticoat wound tightly round them, or blue cotton trousers very tight in the legs and baggy at the top, with a blue cotton garment open to the waist tucked into the band, and a blue cotton handkerchief knotted round the head. From the dress no notion of the sex of the wearer could be gained, nor from the faces, if it were not for the shaven eyebrows and black teeth. The short petticoat is truly barbarous-looking, and when a woman has a nude baby on her back or in her arms, and stands staring vacantly at the foreigner, I can hardly believe myself in “civilised” Japan.#

의복은 철저히 문화의 일부로서 환경에 종속적이다. 북극권에서는 따뜻하게 몇 겹씩 입는 게 당연하고 적도권에서는 적게 입는 노출이 당연하고 이성적인 것이다. 여러 계절이 있는 중위도의 지역에서는 계절에 따라 겨울에는 긴팔을 입고 여름에는 노출이 있는 옷을 입는다. 장소에 따라서도 다르다. 땀을 많이 흘리는 일을 할 때에는 웃통을 벗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고, 관혼상제 등 형식적인 행사에서는 잘 차려입는다. 현대의 나체주의자들도 집안의 손님을 맞거나, 공식 석상에서는 멀쩡히 옷을 차려입는다.

즉, 노출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힘들다. 현대에는 가슴 부위의 노출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만, 과거 조선은 물론 서양에서는 여성의 가슴골을 강조하는 패션이 많았고, 고대 로마와 그리스 지역에서는 여성의 상의노출은 남성의 상의노출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33] 그런데 현대와는 달리, 동서불문 남녀불문하고 발목 부위의 노출은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다. 요즘엔 발목노출에서 풍기문란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노출을 금지하는 수준과 영역은 그때그때 달라지기에 미개함을 특정하기란 어렵다.[34]

문화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노출의 정도로 수준을 논하는 건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애초에 일본도 훈도시나 끈팬티 수준의 옷만 입고서 활보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35]

3.6. 조선의 건축은 모두 작은 편이다?

당시 1층 건물들이 대다수이기도 했고, 왕권의 위엄을 보여주고자 하는 대규모 건설사업의 비중이 축소되기도 했으며, 여느 정보들이 그렇듯 외국인의 기록에도 나온다. 초가집은 3간=3평이 기본이라느니, 기와집은 99칸 이상은 지을 수 없다느니, 기술력이 없어서 2층을 못 만들었다느니 하는 말들도 많다.

조선시대의 1층은 요즘의 기준과는 달리 봐줘야 하는 것이, 현재의 1층과 과거의 1층은 꽤 차이가 난다. 핵심부터 말하면 당시의 1층은 현대의 2층과 맞먹는 크기를 보여줬다. 어떤 것은 드높고 어떤 것은 납작한 제각각의 높낮이를 보이지만 초가집들은 그 높이가 대체적으로는 현대의 2층까지의 크기를 지녔고 돈 많은 양반들의 기와집들은 더 높고 크게 지어졌다. 만약 정부 관련 건축물의 경우엔 담벼락과 문만 해도 성인의 2~3배 길이를 훌쩍 넘어가기도 한다. 물론 수십 층에 이르는 건축물들을 우후죽순 세우던 서양의 눈높이와 기술력에 비해서는 초라한 게 사실이나 무작정 작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일단 조선시대의 건축물들이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가장 건축물과 토목공사의 비중이 가장 작았던 시기임은 틀림없다. 고려시대 이후로 거목들의 고갈로 인해 큰 목재가 부족해져 다른 나라들의 건축물들에 비해 그 크기들이 작은 탓에 시선을 끄는 압도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일부 있다. 그 이전 시대에는 거목들이 부족하지 않았다. 불교와 귀족 문화의 영향으로 금입택·황룡사·흥왕사·안학궁 등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도 있었다. 안압지에서는 각종 금동 건축자재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소빙하기로 인한 온돌의 보편화가 결정적이었다. 당장 태종 시절에 처음 지어진 경회루의 구조가 복층 전각이었던 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에 지어진 건물들에는 복층 건물이 종종 존재했다. 그러나 소빙하기 이후 온돌을 쓰게 되니 온돌의 열을 전달할 구들장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실용적이었고, 이것이 건물의 높이를 높이는 대신 면적을 넓히는 방향으로 조선 건축의 방향이 바뀐 셈이다. 또한 온돌이 쓰이면서 산림이 민둥산이 된 것이 목재를 구하기 어려운 점도 한몫 했다. 녹화사업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목재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 채로 이어지다 보니 고층 건물을 지을 만한 거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축물의 단일 크기는 거목 고갈로 인해 계속 작아졌지만 그와 반대로 총 건축면적(建築面積)[36]은 훨씬 더 커졌는데 경복궁의 전체 건축면적[37]고구려안학궁보다 더 크며 신라의 궁궐인 경주 월성 보다도 훨씬 더 넓고 일본교토고쇼[38] 보다는 약 5.7배 그리고 천황궁인 메이지 궁전(明治宮殿)[39] 보다는 약 8.4배 이후 새로 만들어진 고쿄[40] 보다는 약 10.2배 이상 더 큰 건축면적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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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자금성과 비교해도 그렇게 큰 차이는 안 느껴질 정도이다. 아예 목재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수원화성 또한 그 크기를 보면 굉장히 웅장하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쪽이 더 많으므로 최상류층[41]의 가옥이나, 왕궁, 사찰은 그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졌다.

당장 임진왜란 직후만 해도 미륵전, 팔상전, 각황전 등 양반과 왕실의 지원으로 대규모의 불교 건축물들을 지은 바 있다. 다만 목재의 부족으로 작은 나무를 짜맞추거나 울퉁불퉁한 나무를 그대로 쓴 흔적이 보인다.

참고로 거목 고갈로 인한 건축물의 크기 축소는 한국만 아니라 일본중국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사례만 봐도 당나라 시절 대명궁이 수백 년 뒤인 명나라 시절 자금성보다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기후와 나무 품종상 한반도에 비해 목재 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했지만 한반도의 경우 소나무가 빨리 자라는 품종이 아니고 이미 고려시대부터 삼림자원 고갈로 거목들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단일 건축물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단일 건축면적이 고려시대 이후로 작아졌다는 것도 오해인 게, 실제로 현재는 사라진 조선의 거대 건축물들을 보면 단일 건축면적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산군 시절 만들어졌던 서총대는 무려 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최소 수십미터 이상의 크기를 자랑했으며 서총대 1 서총대 2 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진 흥천사의 5층 사리각 또한 굉장히 큰 크기를 자랑했다. 흥천사 사리각 1 흥천사 사리각 2

거대함이나 화려함만으로 한 시대를 단정내릴 수는 없다. 건축의 경우 동서양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 건축의 수요는 필요가 없어지니 점차 줄어든 경향이 있다. 중, 근세에 피라미드 같은 건물을 짓지 못했다고 중, 근세와 르네상스 시대가 퇴보한 시대인 게 아니며, 삼국시대 신라의 왕릉이 통일신라의 왕릉보다 더 크다고 해서 삼국시대 신라가 더 찬란하고 위대한 시대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특히 왕궁, 종교, 선전용 건축을 제외하면 건축 기술이 발전하면서 커다란 건축 수요는 점차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철저한 실용적인 건축을 선호하여 적을 막을 성이나 행정에 필요한 관청 그리고 교육을 위한 향교나 서원을 제외하면 국가차원에서 백성들 고생시키면서까지 큰 건축을 짓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였다.

3.6.1. 가옥은 초가삼간(3평, 3칸)이 기본이다?

초가삼간의 용어를 갖고 "초가집은 3칸, 즉, 방 3개가 기본이다."라거나 "초가집은 3간, 즉, 3평 정도가 기본이다." 등 이 '간'이라는 것을 이용해 여러 말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둘 다 용어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며 벌어진 오해이다.

초가삼간이란 말의 의미는 겉뜻과 속뜻이 있는데, 겉으로는 "초가집의 기본형"이 아닌 "가장 작은 초가집"을 의미하는 것이며 "몸을 쭉 뻗고 잘 수 있는 정도의 집"을 의미한다. 속으로는 "겨우 살 수 있을 정도의 상황" 즉 가난을 상징하는 의미의 단어였다. 그러니 요즘은 사용 빈도가 줄었지만 과거만 해도 가난한 삶과 소소한 형편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데에 초가삼간이란 용어가 신문과 자주 사용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지점부터 이 초가삼간의 의미가 가난의 상징에서 초가집의 평균형으로 전달되어서 인터넷 상에서 간간이 조선에 대한 빈곤함을 묘사하는 식으로 목격된다. 따진다면 문장이 가지고 있던 의미대로 적절히 쓰고 있지만 그걸 평균의 의미로 사용한다는 부분에서 이미 어긋나있다.

이렇듯이 초가삼간은 당시 가옥에 대한 평균치, 기본값이 아닌 최소한의 아주 작은 집을 말하는 단어이다. 과거 사진자료 속 가옥들을 겉으로만 봐도 3평은 넘고 실제 민속자료로 남은 초가집들의 크기를 재면 기본 10평이 넘어가며 실제로 과거 조선시대 말기 한양 가옥에 대한 자료를 참고해서 초가집들의 평균크기가 7칸=12평 정도임을 계산해내기도 했다. 현대처럼 한 집에 뭉쳐있지 않고 퍼져 있는 창고, 변소와 같은 부속건물까지 합하면 그 표면적은 더욱 넓어진다. 즉, 방 1개가 3평이면 얼추 맞겠지만, 초가집 1개가 3평이라는 건 오류이다.

저 2가지 해석에 대하여 설명하면, 첫째로 초가삼간의 '간'은 방을 셀 때 쓰는 한 칸, 두 칸의 칸이 아니라 과거 동아시아에서 쓰던 거리 계산 단위의 간을 말한다. 현대적으로 계산하면 1간에 1.8m정도 되는 전통적인 기호에 속하는 경우이지, 방 3개가 기본형이 되는 건 아니다. 물론 당시에 3개짜리 집이 많기도 했지만 초가집은 평균적으로 3칸이라 말한 게 아닌 초가삼간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 간은 그 칸과는 다르므로 오류이다.

둘째로 초가삼간이 3간은 3평이라는 말은 사실이다. 실재로 면적을 계산해보면 1간=1.8m, 1평=3.3m이고 계산했을 때 대략 3평=10m 정도로 아주 작은 초가집이 나온다. 그러므로 저 3간=3평의 해석은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설명했듯이 이 3평의 정도를 갖고 초가집의 전체적인 평균치로 확대 해석하여 잘못된 정보를 양산시킨 데 있다. 초가삼간 문서에 가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어디까지나 "찢어지게 가난한 것의 상징" 정도로 보아야지, "초가집의 전체적인 평균치"라고 보는 것은 완전히 틀려먹은 해석법이다.

여담으로 "기와집은 99칸 이상 지을 수 없다."라는 말로 조선은 건축물을 크게 지을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기와집 99칸이라는 표현도 초가삼간과 동일하게 부유함과 가난함을 나타내는 용어이지, 건축 기준의 최대치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다. 앞의 링크를 타고 보아도 재력만 된다면 100칸이 넘어가는 건축물들에 대한 기록들이 상당하다.

3.6.2. 한옥은 2층 건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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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2층 가옥이 흔했다.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세종대왕이 침실로 쓰는 2층 이상의 집을 의미하는 침루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으며 심지어 2층에서 잠자다가 세종대왕이 감기에 걸렸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고려시대로 가면 이러한 루가 보편적이었다는 기록이 많다. 2층 건물의 규모를 늘려 찻집이나 술집 등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말~조선전기에만 등장하는 침루(寢樓)와 누방(樓房)기록

그런데 소빙하기 이후 온돌이 보급되고 난 이후에는 난방에 취약하고 온돌설치가 어려운 2층 가옥보다 1층 가옥이 더 선호되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기술적으로 2층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고궁 내 건축물들 중에는 다층건물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으며[42], 일부 사찰이나[43] 수원 화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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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주합루의 모습. 원래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나, 현재는 주로 건물 전체를 주합루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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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 소재의 유형문화재인 방초정. 가운데 온돌방이 있는 2층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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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어당. 역시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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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종성읍성의 수항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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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만경루. 비탈길에 지어 앞에서 보면 2층 건물이란 게 보이지만,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가운데 길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밖의 2층 건물들 사진 링크 경복궁 향원정, 구례 운조루, 남산골 한옥마을, 안동김씨 태장재사 이상루, 용주사 천보루, 의성김씨 서지재사

그리고 누각의 구조는 대부분 바닥에서 들어올려진 형태인데,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벽만 쌓으면 사실상 2층이다. 또한 법주사 팔상전 등을 보면 기술이 부족해서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 또한 조선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에 의해서 법적으로 주택을 장식하거나 크게 짓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서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에 따라서 조선 태종 이후 생긴 경향을 세종이 이어받는 것이다.[44] 여러 기록들을 보면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2층 살림집도 많이 있었다.

즉, 이러한 말은 절반 정도만 맞는 사실로서 특히 "주거식 한옥"에 한하여서만 해당되는 내용이다. 흔히 알듯이 조선 후기, 온돌의 대중화가 진행되며 비싼 가격 + 구조적 불안감[45] + 존재 이유의 퇴색 등 다양한 이유 때문에 2층 가옥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만 주거용으로서의 2층 건물은 그 역할이 퇴색된 반면, 주거 이외의 상업, 공업, 특수시설 등 다양한 용도로서 2층 건물은 버젓이 존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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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 지어진 이문설렁탕의 전신 '이문옥'

어느 날부터인가 조선은 주거식 2층가옥이 없었다는 사실이 "조선에는 2층 건물이 없었다."로 그 개념이 확장되었고 옆의 링크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 모든 2층 한옥이 역사왜곡(!)이라는 왜곡의 왜곡이 이루어지기도 한 것이다. 즉 모든 한옥이 2층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주거지에 한해 사라진 것을 전체로 확장한 것에서 나온 오해다.

결국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반도에도 복층 건물이 많았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여몽전쟁 전까지는 고려시대에 귀족 문화를 꽃피우면서 여러 화려한 누각이 기록으로 남아있고 그림 또한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던 건물들이 버젓이 존재해왔었고 익히 알려진 황룡사 9층 목탑 또한 남아있다. 전쟁 후 파괴된 건축물의 복원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당시 경제 상황이 몽골의 착취 + 전쟁 후유증이 극에 달해서 복원이 많이 힘들었다.

조선 초가 되어서나 국력을 회복하고 여러 누각이나 복층 건물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이 귀족 문화와 불교를 죄악시 해 백성을 힘들고 궁핍하게 한다고 인식하여 조선 이전에 파괴된 불교 사찰 건물을 복원하지 않았거니와 새로운 건물을 건축한다고 해도 높게 쌓지 않았고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오해인 게 현재는 사라진 조선의 거대 건축물들을 보면 복층 구조의 건물들이 은근히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산군 시절 만들어졌던 서총대 같은 경우 무려 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최소 수십미터 이상의 크기를 자랑했으며 서총대 1 서총대 2 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진 흥천사의 5층 사리각 또한 굉장히 큰 크기를 자랑했다. 흥천사 사리각 1 흥천사 사리각 2

단지 이후에 복층 양식이 점차 사라진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토가 파괴되면서 그 이전까지 남아있던 여러 고층 건축물들이 대부분 소실돼버렸고 무엇보다 경신대기근 시기 유럽과 동아시아의 각국의 산림이 거의 고갈되었다. 더군다나 한반도의 경우 이미 고려시대부터 목조 건축의 필수요소인 산림자원들의 고갈이 나타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소빙하기로 평균 기온이 크게 낮아지자 온돌을 통해서 난방을 하기 위해 건물들을 단층으로 낮게 짓는 기조가 더욱 보편화되었고[46] 한반도 기후가 애초에 추워서 상징적인 건물이 아닌 이상 건물을 높게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서양도 백악관이나 다우닝 가 10번지 건물같은 관공서, 티칼피라미드 사원이나 성 베드로 대성당같은 종교시설 및 , 궁전 등의 중요 시설들을 제외하면 전근대 시대 건물들 중에서 고층 건물은 그리 많지 않으며, 산업 혁명으로 인해 석탄이 난방용으로 널리 쓰이기 전까지는 조선과 같은 이유로 주거용 건물을 다층으로 짓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스칸디나비아 반도캐나다미국온대우림 지대같은 우수한 목재 조달처가 있어서, 아시아와는 달리 복층 양식이 얼추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이다.

3.7. 조선시대의 초가집은 허접한 흙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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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떠오르는 초가집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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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가장 간단하고 서민적인 초가집 중 한 양식만 떼다가 침소봉대한 것이다. 토벽 뿐이라고 해도 그저 흙을 올리는 것이 아닌 나무 또는 돌 중 하나라도 섞어서 벽의 기틀을 잡았지, 그냥 흙덩이를 쌓아 올리는 것은 금방 무너져내릴 뿐더러 취약점들이 많아서 사진과 같은 경우는 꽤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현재 남아있는 초가집 중에서 위와 같이 돌무더기에 흙덩이 바른 수준으로 단순한 구조도 있으나 교과서 전통가옥 양식에 흔히 나오는 제대로 된 초가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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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 지어져 보존된 초가집

3.8. 조선에서는 한글을 천시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훈민정음)을 언문으로 부르며 천대했다는 오해가 있다. 일단 조선시대에 한글을 언문으로 호칭한 것은 맞지만, 이것이 의도적인 폄하, 천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한글을 언문이라 표기한 것은 세종대왕 본인부터 행한 것이었다. 원래 언(諺)은 한문(고문, 문어)과 대비되는 '구어'를 말한다. 즉 조선시대엔 기존의 한문을 문어체로, 한글을 구어체로 여긴 형태에 가깝다.[47] 문어체와 구어체의 구분은 현대에도 엄연히 존재하며, 당시 이것이 한글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로 이어졌는지는 근거가 부족하다.

무엇보다 일상적인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조선 왕조에서 공식적으론 한글을 비하한다는 건 중대한 범죄였다. 엄연히 임금, 그것도 조선 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한 문자이므로, 이를 비하하는 행위는 곧 조선 왕실 전체를 모욕하고 정통성을 훼손하는 행위와 같았다. 한 예로, 연산군은 한글로 쓰여진 비방글이 발견되자 홧김에 사용을 금지하려 했으나 곧 유야무야 철회한 사례가 있다. 즉, 연산군과 같은 폭군조차 차마 건드릴 수 없는 성역에 가까운 것이 당시 한글의 위상이었다.

즉, 한글을 쓰는 사람을 천대했는지는 몰라도, 한글 자체를 천대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한글 창제에 대해 일부 양반들이 반대했지만 그 입장이 조선 500년 동안 유지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양반들 스스로도 한글을 가끔 썼는데, 일반적으로는 한문을 모르거나 기초만 아는 평민[48]이나 노비, 천민들과의 교류를 위해서 사용했다.

그밖에도 노걸대 같은 외국어 학습교재나 해동제국기 같은 언어학 연구서적에서 중국어 등의 외국어의 발음을 표기하는 용도로 한글이 쓰이기도 했고[49], 소학언해처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지은 교과서나 두시언해처럼 민중들에 대한 계몽을 목적으로 한문으로 된 인문 고전이나 고전 시가들을 한글을 이용해 한국어로 번역해놓은 것도 당대의 유학자들의 작품이다. 그 이외에도 훈몽자회처럼 한글 자체를 연구하고 실생활에 맞게 정리한 서적도 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등, 양반들도 한글을 잘만 사용해왔다. 그러니 평상시에 본인들도 자주 사용하는 글자를 고의로 천시할 리는 없는 것이다.

조정에서도 다양한 경전과 한문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조 교재나 한자 학습에 활용했다. 한글로 한자의 음을 표기하고 구결을 대체하게 했으며 성균관의 학생들도 경전의 한글 번역본을 보조 교재로 사용했다. 상급 기관에서 하급 기관으로 보내는 명령문인 '전령'의 경우에도 일반 백성들에게 알려야 하는 내용이 있다면, 반드시 한글로도 공문을 작성해 한자 명령문과 함께 송달했다.

다만, 이 오해가 널리 퍼진데는 당대에 실제로 있었던 한문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던 것의 영향이 있기는 했다. 조선시대에서의 한문의 위상은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영어의 위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대학이나 논어, 맹자 등의 유교 경전들은 원문이 한문으로 되어있었고, 당대의 중요한 공문서 역시 전부 한문으로 작성되었던 데다가, 그 이외에도 명나라, 청나라 같은 중국 왕조들과의 교류를 위해 한문을 이용한 필담도 필요했기 때문에, 한문 해독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현대로 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공무원 시험에서의 영어 영역 고득점을 위해 국어 영역 공부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할 정도로만 유지하고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갖는 것과 같다. 말하면, 당시에 중요도가 높은 한문이 특별히 더 우대된 것이지, 한글이 특별나게 천대받은 건 아니라는 얘기이다.[50]

다만, 성균관 학생들이 어려운 한자 경전은 학습하지 않고, 알기 쉬운 한글 보조 교재만 읽고 경전의 내용을 암기하는 통에 조정에서 성균관 학생들의 경전 이해도를 문제 삼아 한글 번역본이 없는 경전을 성균관 시험에 출제하는 일도 발생하는 등, 한글이 한자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을지언정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사례도 있다. 이 역시도 대학생들의 영어 논문이나 칼럼의 독해능력을 키우기 위해 각 대학들이 영어로 된 강의를 하거나, 영어로 된 원서를 교재로 사용하고, 영어로 시험문제를 출시하지만, 기본적으로 대학생들끼리 돌려보는 족보는 십중팔구 한국어로 되어있는 것과 같다.

4. 여성 관련 오해들

4.1. 여성은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

조선초 여자이름 10%는 '소사'였다.
조선초기 여성들의 이름
조선여성에게 이름이 없었다고? 헛웃음만
조선 여성노비, 기생도 소송을 했다.

2:00 ~ 2:20 부분과 14:40 ~ 15:30에 주목할 것.[51]
“이번에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뿐입니다. 1921년, 조선여성들은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엘리제 셰핑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대신 별명이나 성씨로만 불렸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외국인의 견문록에서도 종종 나타나며, 호적과 같은 기록물에서 이름이 아닌 본관으로 기록하는 경우가 있어 내용에 신빙성을 더한다. 관련 내용들이 인터넷은 물론, 위와 같은 어린이 교육 방송에서도 표현될 만큼 어느정도 퍼져 있다.

그러나 정말 쉽게 논파할 수 있는 오해인 것이, 만약에 정말 여성들이 이름을 가질 수가 없었다면, 지금껏 우리가 들어왔던 조선 여성들의 이름들은 다 무엇인가? 이 오해에 대해 제시되는 근거는 이하와 같다.
• 족보, 실록과 같은 기록 문서에 여성의 이름이 쓰여지지 못했다.
• 이름 대신에 "~댁, ~엄마, ~아기" 등의 호칭과 별명들로 불렸다.
• 정상적이지 않은 "년, 똥, 막"처럼 부정적인 단어들로 부르거나 다른 단어와 섞어서 불렀다.

등이 외부의 시선에서 쓰여진 정보들과 이를 믿고 퍼뜨려서 여성혐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명하기에 앞서서, 우선 3줄 요약부터 해보면 다음과 같다.
• 1번의 경우, 사대부들의 관습 개념이지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다. 위의 2번째 링크에서 보이는 이름들은 모두 양반집 규수들의 이름이다.
• 2번의 경우, 동아시아에선 이름보단 호칭-별명 등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였다. 남/녀의 차이점은 여성이 호칭인 가 잘 없어서 별명을 대신 사용했다는 것이다.
• 3번의 경우, 오래 살라고 쓰던 미신이 반영된 부적 및 주술의 영향이다. 남성도 그랬으므로 여성혐오는 아니다.

엘리제 셰핑만이 아니라 수많은 견문록에서 나오는 여성이 이름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들은 대부분 닮았으며 그 원인 또한 동아시아권 문화의 무지함이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엘리제 셰핑의 기록을 기준으로 볼 때, 2~3번 근거와 더불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널리 쓰이는 아명 문화의 존재를 모른 채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큰 년, 작은 년은 아명이거나 부정적인 이름의 뜻풀이를 그대로 나열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부정적인 의미의 존재 이유 또한 부적으로의 용도로 이용한 경우가 많다.

족보처럼 한국사에서 높은 귀족, 왕족층의 여성 이름이 거의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어 일본사서양사에 비하면 매우 적기는 하다. 이는 여성이 군주로 즉위하거나, 권력의 전반에 나설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 크다. 당장 일본이나 서양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름있는 여성도 전부 특정 지역의 영주나 군주들이고[52], 일반인은 웬만해서는 이름조차 언급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53] 그러나 그것의 이유가 이름이 없어서가 되기는 힘들다. 위의 2번째 링크를 읽으면 알겠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육신의 계획이 실패하자 관련자들을 처벌하면서 사노비가 된 172명의 여성들의 이름들이 줄줄이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편지와 상소문 등의 기록문서들을 통해 여러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여성의 이름이 없어서 기록되지 못했다는 주장은 힘을 잃는다.

허난설헌을 주제로 한 영상에선 "조선 여성들은 이름을 가질 수 없고 이에 따라 그녀도 이름을 가질 수 없다."라고 묘사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얘기다. 엄밀히는 여성이 은 받을 수 있어도 는 받기가 어려웠다. 즉 이름은 있으되 호칭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자를 남성들에게 자주 붙였으며, 허난설헌은 여성임에도 경번(景樊)이라는 자를 얻었다. 아마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서 "자(칭호)를 받지 못한다." 라는 것이 "명(이름)을 받지 못한다." 라고 확대해석한 결과로 보인다. 물론 격식 있는 이름이 없을 뿐, 여성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저 방송은 어린이 교육용이라서 그런지 다양한 오류가 나타난다. 여성은 이름도 없고 책을 읽지도 못한다든지, 문익점이 붓뚜껑에 목화를 숨겨왔다는 창작된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하는 등, 정보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름 대신 누군가의 자식-아내-엄마로 불리는 것, 출신지역과 가문으로 불리고 기록되는 것은 여성들이 이름이 없어서 그것을 대체한다는 개념이 아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예법의 개념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동양문화권에서 본명은 윗사람일 경우에만 불렀고, 와 호칭은 같은 위치의 사람끼리 부르는 것이었다. 만약 친구임에도 상대의 본명을 말한다면 그건 친구라는 같은 위치가 아닌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부르는 것이므로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여기에 같은 문화권이었던 조선도 사람을 부를 때는 이름 대신 자, 벼슬과 같은 호칭들을 주로 불렀다. 이는 여성도 마찬가지라서 이름 대신 댁, 실, 집, 어미 등의 호칭으로서 자주 불렸다. 남자와 달리 가 잘 없던 여성들 사이에서는 위와 같은 호칭들이 주로 쓰인 것이다. 즉 이름은 있지만 예의에 따라 달리 불렀던 것이다. 심지어 본명 역시 '아명'과 '관명'이 별도로 존재했다. 즉 관례를 치르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본명부터 바꾸었고 족보 등 각종 문서에 기재되는 이름은 이 관명을 기준으로 했다. 당대 여성들은 별도의 외부 사회 활동을 영위하지 않았으니 관명을 지을 필요도 없었고 그렇다고 격이 떨어지는 아명을 문서에 기록해주는 것도 무례한 일이었다.

약간 결은 다르지만, 현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상대방의 실명을 안다는 이유로 닉네임 대신에 본명으로 불러댄다면 어지간히 좆목화되지 않고서야 해당 인원은 즉각 좆목질이니 비매너니 하며 제재를 받을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본명을 부르는 것은 이와 비슷한 레벨로 터부시되었던 것이다.

특히 '~댁'이라는 호칭은 그 여성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로, 네덜란드에서 출신지에 따라 '판 XX'(van XX)[54]이라는 성씨를 붙인 것과 유사한 개념이다.[55] 이는 전근대 시대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던 풍습이었다. 서구권에서는 주로 특정인 본인이나 그 조상의 출신지나[56] 별명[57], 가족관계[58] 및 직업[59]을 가지고 이름이나 성을 지었다면, 동양권에서는 출신국[60]이나 거주지의 지리적 특징[61] 및 기타 미신적인 요소에 따라 대충 지은 아명[62]인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현대에도 영어권에서는 'Mrs. 남편 이름' 형식으로 여성의 호칭이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제외해도 김만덕, 정난정 등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여러 기록물들로 확인되는 이름만 대충 나열하면, 장순왕후 한냉이와 공혜왕후 한송이, 정현왕후 윤창년, 허난설헌의 본명 허초희[63],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인(정경부인) 방수진, 어우동보다 앞서 간통 스캔들을 터트린 유감동, 곱단, 덕금, 말금, 곤생, 정조이, 양순,[64] 삼덕,[65] 금춘, 애춘 그리고 대한제국 시절 고종의 황후였던 명성황후의 본명인 민자영(민아영) 등 여럿 보인다. 심지어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그리고 문성군부인의 자매들[66]이나 장렬왕후의 언니들[67]처럼 돌림자를 넣어 제법 격식을 갖춘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만큼 다양한 여성의 이름들이 조선 초~후기에 아울러 항상 존재했다는 소리다. 과연 이것들이 후세에 창작된 이름들일까? 그저 그들만이 특별한 경우였을까? 당연히 아니다.

4.1.1. 이름은 최대한 나쁘고 더럽게?

위에서 언급한 4번 이유를 중심으로 한다. 엘리제 셰핑의 기록에서 보이듯 정상적인 이름은 소수이고 대부분이 부정적인 멸칭으로 불렸다는 정보는 다른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여성 이름의 유무와 함께 종종 보이는 정보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호칭들은 여성에게 직접 그런 식으로 붙였다기보다 아명이거나 여성 이름의 뜻풀이일 가능성이 크다. 각자 이유는 다르겠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이름짓기는 일반적으로 사회·문화적인 미신에 따라 영향을 받아서 지은 것들이 많다.

조선시대의 영아사망율은 지금보다 꽤 높았다.[68] 그래서 당시 어른들은 귀신이 아이들을 저승으로 못 데려가게끔 일부러 이름을 나쁘고 더럽게, 대충대충 짓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깨끗하고 예쁘게 지으면 귀신이 샘나서 빨리 데려가려고 한다고 믿었으므로, 어느정도 클 때까진 부정적인 의미로 만든 아명을 쓰다가 원래 지으려던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다. 물론 제대로 된 이름에도 부정적인 요소를 넣는 경우도 많았지만 아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제발 죽지 말아달라며 일종의 부적처럼 아명을 부여했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예쁜 이름들도 많았고 이러한 부정적인 이름짓기 문화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기에 여성에 대한 차별요소도 아니었고 그저 옛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조선 고종의 아명도 '개똥이'였다.

아명을 넘어서 정식이름을 지을 때도 년, 똥, 개, 득 같은 한글들, 비(非), 막(莫), 무(無), 배(背), 물(勿), 미(未), 종(終) 같은 한자들을 섞어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조선의 이름짓기였다. 이런 식의 이름짓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의 개국공신인 민제의 아들들의 이름인데, 咎(허물 고), 疾(병 질), 恤(가여울 휼), 悔(후회할 회)에 (없을 무)를 붙여서 각각 무고(허물이 없음), 무병(병이 없음), 무휼(가여움이 없음), 무회(후회가 없음)라고 지은 것이다.[69]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엘리제 셰핑이 언급한 "큰년이, 작은년이" 또한 아명, 별명, 조선시대식 이름일 뿐이지만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서 이름이 아닌 멸칭으로나 불린다고 기록했을 확률이 높다.

사실 이러한 이름짓기는 한국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반에 널리 퍼진 문화다. 전근대시대까지 아이누족들의 전통적인 이름은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멋이 없는 이름이 많고[70], 일본의 경우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자기 아들 삼형제에게 각각 아명으로 키묘마루(奇妙丸), 차센마루(茶筅丸), 산시치마루(三七丸)라고 지었고[71],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끔찍이 여겼던 아들 히데요리에게 '주워온 아이'라는 뜻의 히로이마루(拾丸)라는 아명을 붙였다. 오키나와류큐 시절에 미미치리보지를 피하기 위해서 남자아이에게 여자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사례도 있었다. 이 때문에 동북아시아권 전반에는 이런 성명법의 흔적으로 인해, 病(병 병)이나 惡(악 악) 등 부정적인 뜻의 한자가 인명용으로 행정기관에 등록되어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것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름이 악마인 아이 사례까지 나왔다.

오늘날에 노인들 사이에서 언년이, 끝순이, 만득이처럼 부정적인 뜻이 담겨진 이름들이 보이는 건 이러한 풍습의 흔적이다. 일례로, 유명 유튜버박막례 할머니의 이름은 '막내'라는 단어를 한자음차한 것이지만, 집안에서는 주로 '박애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4.2. 여성은 배우지 못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주장이다.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 내용을 확대·왜곡한 경향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배움이란 "학교에서 배우는 전문교육"을 의미한다.

사대부들의 주장을 보면 여성은 교육을 받아선 안 된다는 말들이 여럿 보이지만, 이는 조선에서 사대부 남성만이 전문교육을 배우고 관직에 나가던 사회적 구조가 원인이었다. 그렇기에 사대부 여성은 배움의 까닭이 딱히 없었으므로 굳이 전문교육을 가르치지는 않았다.[72]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빡세게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여성의 경우 배우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니 굳이 하지 않았다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반면에 평민들은 남녀가 기초적인 초등교육(소학, 간단한 한문)을 받을 뿐, 과거에 나갈 것이 아니라면 고등교육(성리학, 경전)을 배울 기회, 명분, 경제력이 전무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이 실질적인 기술들을 배워서 먹고 살았다. 동시에 조선에서 세워진 초창기 학교들은 대다수가 서양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갈수록 서구 열강에 의한 사건들이 여럿 발생하면서 부정적인 인식이 형성되었고 이와 관련해 서양인이 세운 학교가 엮이면서, 사대부들 사이에선 반발심으로 학교 교육에 대한 반대를 외치기도 했다.

당시 여성도 한글은 배웠다. 사대부 남자들은 한문을 사용했지만 여성들은 주로 언문을 사용했다. 증거로 당시 여성이 쓴 언문 편지나 문학 작품들이 확인된다. 또한 한글 소설의 주 소비층이 여성이었단 것을 생각하면 여성들도 일단 한문은 아니더라도 문자를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다. 당장 김만중구운몽을 쓴 이유가 '어머니가 적적해 하실까봐'였다. 또한 원한다면 상업, 공업, 예체능처럼 다양한 분야를 배울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상업에 능통했던 김만덕, 사당패의 바우덕이 같은 인물들이 있다. 19세기 땐 신재효에게 여성들이 판소리를 배우기도 했었고, 풍속화를 보면 남성과 함께 돗자리, 망건 등을 만들며 수공업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더러 보인다.

그러면 고위층의 여성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교육이 증가하면서 남편을 가르치는 여성인 현처가 등장했으며 임윤지당, 강정일당처럼 성리학을 자기화하는 여성 성리학자들이 나타났다.[73] 이들은 남성 양반들에게도 자신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대접받았다. 참고로 임윤지당은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차별에 두지 않고 음양오행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한 사람이며, 역사 인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논리가 탄탄하여 모두들 수긍했다고 한다. 즉 여성의 말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폄하하지는 않았다.[74] 왕족의 경우에도 인수대비, 문정왕후, 명성황후는 한문을 알던 걸 넘어서 유교 경전에도 나름 통달했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여성 전용 유교 교과서 격인 <내훈>의 저자이기까지 하다.[75]

더욱이 일반적으로는 성리학 교조화에 한몫 했다고 하는 그 송시열부터가 여성의 교육을 강조하며 자기 집안의 며느리나 딸 등에게 '계녀서'를 손수 적어주기도 했으니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전반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는 교육 면에서 떨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못 배웠다고는 할 수 없다.

조선과 동시기에 다른 지역이라고 해도 딱히 여성에게 전문교육을 찬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각 국가마다 저마다 이유는 달랐겠지만 비단 조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장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저자 요한나 슈피리는 자신이 여성임에도 여성의 대학 교육에 반대했는데, 19세기 후반임에도 여전히 여성 교육에 대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어땠는지 잘 드러나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결국 이같은 현상은 "여성이 교육받는 것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기존 체계의 붕괴에 대한 지도층들의 반발" 그리고 "서구열강에 대한 견제"에 가까웠다. 심지어 그 서구열강도 여성의 교육에 대해 100% 긍정적인 건 아니어서, 괜히 영국미국을 중심으로 최초의 근대적 페미니즘 운동인 서프러제트 운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며[76], 동 시대의 캐나다 소설인 빨강머리 앤에서 주인공 앤을 친부모처럼 양육했던 커스버트 남매가 앤의 미래를 위해 평생 지지해오던 보수당 대신, 여성 교육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자유당을 지지하기로 바꿨다는 묘사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4.3. 여성은 평생 이혼, 재혼, 연애를 할 수 없다?

고려와 비교해서 조선에서는 자유 연애와 이혼/재혼에 사회적 제약이 존재했음은 사실이지만 고려시대에도 중매는 흔한 일이었고, 무분별한 이혼과 재혼에는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계급사회였기에 각 계층마다의 사정들이 다 달랐다. 양반가의 경우 흔히 생각하는 내용들이 맞지만 평민들의 경우는 꽤 달랐다. 거기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여성 이혼 금지나 정조, 제사 금지, 남성 중심의 혈통 주의는 조선 후기에 정착된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없었을뿐더러 조선 전기까지도 실질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중매도 많았지만 연애도 많아서 현대의 발렌타인·화이트데이처럼 특정 시기에 서로의 은행알을 맞바꾸는 문화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철종의 평민 시절 양순이란 처자와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귀었다고 하니, 당시 중매결혼이 많았지만 연애결혼도 충분히 가능하던 시절임을 보여준다.

과부의 재혼 금지를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법으로 규정하였고 이 법이 조선 후기까지 작용한 건 맞지만, 문제는 과거 금지가 관직과 거리가 멀던 양민들 입장에선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조선 말기까지 민간에서의 이혼과 재혼은 자유롭게 일어났다. 그것도 그냥 헤어지는 게 아닌 "섶자르기"라는 고유의 이혼 문화를 통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었다. 지금의 이혼증서처럼 옷이 맞물리는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추후 바람을 폈다느니 고발하는 뒤탈이 없도록 하는 예방책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20세기의 기록들에서도 민간에서는 재혼이 성행한다는 기록들이 있으니, 일각에선 성종이 양반들의 권력과 머릿수를 통제하고자 실시했다는 주장도 있다.[77] 애초에 어느 나라, 어느 정권이든지 전근대에는 지배층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결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일반이었다. 동시대 일본에도 막부다이묘와 그 산하의 가신들의 혼인은 반드시 쇼군의 허가가 있어야 성사되도록 규정했고, 중세 유럽가톨릭 문화권에서는 교회 측의 동의가 없이 하는 귀족들의 결혼과 이혼을 무효로 간주한 바 있다. 지배층 간의 정략결혼이 곧 권력이 오가는 과정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이를 통제하려든 것은 당연한 얘기다. 이의 연장선에서 지배층의 머릿수를 줄이려는 시도도 함께 이루어진 만큼,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는 20세기 중후반까지도 귀천상혼이라 하여 자기들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혼인한 사람의 작위 계승권을 박탈하거나 그 사람의 작위 등급을 강등시키기도 했다. 조선의 서얼금고법과 재가금지법이 이런 식으로 양반들의 머릿수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시행한 법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근거가 이것이다[78].

그리고 아무리 양반이라도 자기 딸이 평생 과부로 지내는 꼴은 그냥 둘 수 없기에 보쌈이라는 납치 겸 계약결혼 겸 허례허식을 이용하여 재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과부의 재혼율이 어느 정도였는지 파악하는 건 자료가 남아있는 게 많지 않아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호적자료를 통해 대략적으로 그 양상을 파악해 볼 수 있다. 1678년 단성호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과부가 호주로 등록되어 있는 호가 183호인데 이 중 과부가 된 지 3년 이상이 된 호는 34호에 불과하다.[79] 또한 18세기 단성현의 호적에서 홀아비의 재혼율을 분석해보면 홀아비 중 3년 내로 재혼한 비율이 50.3%임이 확인되는데 이들 재혼 대상의 65%가 25세 이상의 여성임이 확인된다. 당시 초혼연령을 감안해보면 18세기에 홀아비와 재혼한 여성 대부분이 과부, 또는 이미 결혼했다가 이혼한 경험이 있는 여성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19세기 단성현 호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8세기에 비해 홀아비의 재혼율[80]과 홀아비와 재혼하는 여성의 평균 나이가 감소해[81] 과부들의 재혼이 조선 말기로 갈수록 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이혼/재혼이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다.[82][83]

평민에게서 과부를 향한 수절이 강해진 것은 혼란기인 일제 강점기 중~후반의 이야기로 20세기 외국인의 기록들에 이혼과 재혼이 흔했다는 얘기가 나왔던 만큼, 평민수절의 역사는 길다고 보긴 어렵다.

4.3.1. 과부는 자결하는 게 옳다?

열녀비와 같이 조선은 유교 사상에 따라 과부가 자신의 수절을 지키고자 자결하는 것을 이상적이고 높게 평가했다. 실제로 한 남자만 생각하고 바라보는 행위는 지구적으로도 과거부터 현대에서도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서 환영했다. 유교의 발상지였던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절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과부가 목을 메어 자결하면 사람들이 단체로 칭찬과 미담으로 명예롭게 받들었다. 인도의 경우에도 사티라는 행위를 통해 과부의 수절을 강요하기도 했다.[84] 물론 이러한 행위들은 마녀사냥처럼 주된 목적은 피해자의 재산에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조선은 유교에 근거하여 수절을 이상적으로 보고 상을 내린 거지, 국가적으로 강요하거나 옳다고 확정한 적이 없다.[85] 자결을 부추겼다고는 할 수 있어도 여성의 의지가 아닌 강요나 범죄와 연관되었을 경우 열녀를 취소하고 관련자를 벌하는 기초적인 융통성은 있었다. 일례로, 영조의 서차녀였던[86] 화순옹주는 남편이 죽자 곡기를 끊어 자살했는데, 딸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영조가 금식을 중단하라고 간곡히 권유했음에도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열녀로 인정하여 정려문을 내리자는 신하들의 제안에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았으니 불효요, 임금의 명을 거역했으니 불충이다."라며 거부하여 정려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영조 사후에 옹주의 조카인 정조에 의해 정려되었다. 그나마도 화순옹주의 자살은 유교적인 논리에 따른 게 아니라, 어린 시절에 어머니 정빈 이씨와 자신의 동복형제들을 모두 잃고 아버지와 중전인 정성왕후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서 가족의 정을 많이 느끼지 못하였는데, 그런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의지할 유일한 대상인 남편이 사망하자 삶의 의지를 잃은 탓이라고 보인다. 그런 만큼, 적어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과부의 수절이 마냥 강요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87]

이에 관련해서 은장도에 대한 오해도 첨가되어있는데, 은장도가 여성이 수절을 위해 쓰는 자결용 칼로 왜곡되어 전해진 것이다. 은장도는 실제로 신라 시대부터 여성들 사이에서 애용된 장식용 맥가이버칼로[88], 위험하거나 뭔가를 자르고 다듬을 때 칼을 뽑아 쓸 수 있고, 칼집의 장식용 보석은 갈아서 상처약으로 써 먹을 수 있었다. 수절을 위한 자결용으로 안 쓰인 건 아닌데, 이건 외적의 침입이나 도적들의 습격으로 인해 도망갈 수조차 없을 때, 강간 등의 모욕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나 그렇게 쓴 것이다.[89] 그리스인 남성들은 전통 복장인 푸스타넬라를 입을 때 장식용으로 단검을 차고 다니는데[90], 조선의 여성들이 들고 다닌 은장도 또한 그런 용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남아있는 은장도 유물들도 대부분 비싼 거라서, 서민 여성들은 노리개나 복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사실, 치안이 극도로 열악했던 전근대에는 호신용과 장식용을 겸하는 칼을 차고 다니는 풍습이 매우 흔했으므로,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이든지 여성들이 이런 다용도 칼을 많이 갖고 다녔다. 가령, 일본아이누족 여성들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 작은 칼인 마키리[91]를 소지하고 다녔고, 이것이 연인들끼리 선물하는 물건으로도 쓰일 만큼, 필수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간주되었다. 중세에서 근대시대의 유럽에서도 귀족 여성들은 호신용으로 단검이나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는데, 이 역시도 수절하려고 자살하는 용도는 당연히 아니다.[92]

4.3.2. 이혼/재혼의 피해는 여성만?

대표적으로 나혜석이 있다. 나혜석과 최린, 김우영 모두 사회적 실추를 겪었다. 또 조선 사회가 철저한 유교 사회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남녀 모두에게 이혼이나 재혼이 망측한 일로 간주되는 일이 잦았으며, 상처(喪妻)한 남성이 새로 첩을 들이는 것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에 딱 좋았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부인인 신사임당과 사별한 지 고작 1년 만에 첩을 들였다가 아들과 의절하다시피 한 일화가 대표적이다.

4.4. 여성은 외출할 수 없었다?

야간통행금지(夜間通行禁止)
여성들의 밤외출을 보장하던 풍습

조선에서는 여성의 지조와 절개를 중요시하였고 그 영향으로 여성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것조차 하나의 덕목으로서 자리잡았다. 때문에 단순 예법으로뿐만 아닌 법적으로도 남성과의 접촉을 막고자 여성의 외출을 금지하고 밤에만 잠시 가능하도록 자유를 억압했다는 주장이다. 이 또한 외국인의 기록들에서 발견되며[93], 조선에서는 실제로도 초경(初更) 제도라는 법을 만들어 여성의 외출을 철저히 제한하기도 했다. 다만 그 법의 실질적인 적용 대상은 양반, 사대부 같은 유교적 예법을 따르는 고위층들이 중심이었다.

아무리 조선이 유교 국가이고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긴 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외출조차 막지는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를 중시하는 양반과 상인 계급의 여성들은 법과 예법에 따라 낮의 외출을 삼가고서 주로 밤에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평민들의 경우에는 낮에도 자유로이 외출이 허용되었다. 심지어 고위층의 경우에도 낮에 외출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통해 세세한 부분들을 알 수는 없지만 예법에 묶인 고위층 여성들도 낮에 외출을 했다는걸 알 수 있다.

1895년 통행금지 제도가 폐지되기 이전의 흑백사진에서 낮에 외출하는 평민여성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그 이전부터 일반 평민들은 남녀불문 외출이 가능했었음을 알 수 있다.

4.5. 여성은 자신을 철저히 감춰야 한다?

파일:장옷입은 모습.png 파일:장옷입은 모습2.png
외출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조선에선 유교에 따라 여성들은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감추어야 했으며, 그 영향으로 외출을 할 때에도 최대한 접촉을 피하기 위해 장옷이란 수단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조선의 장옷을 이슬람의 부르카와 동일시하게 보며 여성 인권 탄압의 상징처럼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의상은 용도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사뭇 달랐는데, 이슬람부르카는 "종교와 환경에 따른 여성들의 필수품"이라면[94], 조선의 장옷은 "선택에 따라 쓰고 벗는 외투"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본인이 어떤 신분이냐에 따라 착용의 의무가 나뉘어졌다. 무엇보다, 온전히 여성용 의복이었던 이슬람권의 부르카와는 달리 장옷은 남녀 모두 착용했다는 게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장옷은 일반적으로 여성용 쓰개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18세기까지는 두루마기처럼 직접 몸에 착용했던 옷이었다. 즉, 18세기 이후부터 입기도 하고 머리에 쓰기도 하는 옷이 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소매가 달려있는 이유가 원래는 직접 몸에 착용하였던 옷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장옷은 부르카와는 외견상 차이가 있다. 일단 장옷을 묘사한 그림들이나 사진을 보면 대개 얼굴은 안 가린다. 즉, 부르카보다는 히잡이나 차도르와 더 유사한 옷이다.
파일:장옷과 옷2.png 파일:장옷과 옷.png
실제로도 조선의 여성들은 장옷을 간단한 외출복으로서 자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율법이나 지리적 환경처럼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서 얼마든지 탈착용이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형태로 온몸을 감싸기도 하지만, 머리에 걸치기만 하거나, 머릿수건처럼 둘러매거나, 아예 옷처럼 입거나 하는 등 본인 편할 대로 활용했다. 양반 계층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겠지만, 평민이라면 자유롭게 입었고 장옷 없이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외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아가 장옷은 다양하게 이용되었는데, 더울 때는 싸매서 히잡, 추울 때는 둘러서 바람막이, 비올 때는 기름 먹여서 우산 등 넓은 면적을 매우 다양하게 썼기에 부르카와 동일시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세조 2년(1456년) 3월 28일

“복요服妖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의 제도는 남녀와 귀천貴賤을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하민下民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나, 장의를 의상의 사이에 입어 3층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 따서 온 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史文에 이른바 ‘복요’라는 것입니다……”
(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丁酉)

이렇듯 조선시대 초기에 조정에서 논의가 있을 정도로 이미 여자들의 복식에서 장옷이 유행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장옷은 남자 장옷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95] 따라서 장옷은 원래 남성 복장에서 기원한 스타일이며, 점차 여성의 외부 나들이 출입 용도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강제적인 유교문화보다는 아닌 유행에 따라 자연스래 생겨난 형태라는 것이다.

5. 생활적 오해

5.1. 남자는 게으름뱅이? 여자는 노예?

외국인의 견문록을 보면 남자들이 일은 안 하고 게으르게 살아서 여성들만 고생하여 노예와 같다는 말들이 있는데, 이는 당시 조선의 생활 패턴을 잘 몰라서 생긴 말들이다. 당시 조선인들의 기상시간은 보통 4~5시 정도로 9~10시까지 하루의 대다수 업무를 끝내곤 휴식을 취했다. 일반 서양인들이 활동할 시간쯤에는 농사일에 지친 남자들이 뻗어 있고 식사 준비와 빨래를 하는 여성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96] 남녀가 함께 일하는 것이 보편적이던 평민 사회에서 어느 하나만 속 편히 살았다면 바로 섶이 잘렸을 것이다.

보통 조선인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했다. 땅만 있는 농사꾼이면 몰라도, 또 다른 직업이 있는 경우엔 낮에 기본적인 농사를 짓고, 오후엔 제2의 직업을 가지고 다른 일들을 하며 먹고 살았다.[97]

이는 한반도 기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데, 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농번기는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을 받아 높은 기온과 습도를 띠게 된다. 농업이 중심인 국가에서 대낮에 일하는 건 매우 고된 일이며 자칫하면 목숨의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가급적 해가 완전히 뜨기 전후부터 일을 했던 것.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로, 터널(비닐하우스) 시설은 실외 온도와 실내 온도가 최대 20도씨까지 차이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낮에 일을 하는 것은 진짜 목숨이 걸리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군대에서 폭염주의보를 내려서 일과시간임에도 작업을 쉬게 하는 게 이 때문이다. 실제로 경험이 적은 신임 소대장이 대대에서 작업해놓으라고 해서 그거 일찍 끝내겠다고 병사들 데려갔다가 뙤약볕에서 몇 시간씩 일하던 일, 이병들이 더위에 지쳐서 뻗어버리는 사례들이 간간이 나오기도 한다.

아무리 더운 날씨에 익숙한 동남아시아 사람과 아프리카 사람이라도 한여름에 뙤약볕에 들어가 일하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싱가포르리콴유 총리가 에어컨을 보고 괜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칭송한 게 아니다. 그리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는 농약이나 비료, 퇴비마저도 약해가 발생할 위험성이 높아지므로, 한여름에는 비교적 선선한 새벽에 살포를 하고 한낮에 쉰 뒤 온도가 차츰 낮아지는 저녁 때쯤 다시 살포해서 오후 10시나 다음날 새벽에 일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 시간대에 도시민들이 시골에 갈 일이 없으니 알지 못하고 당시의 서양 사람들과 같은 선입견을 가진다.

당장 유럽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여름이 무척이나 무더운 남유럽에는[98] 시에스타라고 하여 오후 2시 경에서 4시 경까지 모든 직장들이 일정하게 휴식을 취하는 풍습이 있는데, 산업 혁명 이후로 영국이나 독일 등의 북유럽 국가에서 남유럽인들을 멸시하는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우위에 있는 나라들이 그렇지 못한 나라들을 게으르다고 멸시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흔하다.[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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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채널e-조선을 가지고 놀다.
당시 서양이 이미 산업혁명으로 산업화 사회에 들어간 것과 달리, 당시 조선은 아직 농업 사회였다. 사회적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서양인들의 잘못된 시선 탓에 이러한 오해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이런 오해들을 갖고 위의 사진과 같은 보드게임을 만들어 식민사관에까지 이용해 먹었다. 웃기게도 일본도 대도시가 아닌 이상, 지역마다 농업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농어촌 지역에서는 날씨가 무더운 날이면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는 일이 잦았다.[101] 그야말로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다.

5.2. 남자가 먹고 남은 음식을 여성이 먹었다?

남녀가 따로 앉아 먹는다, 남자는 상, 여자는 바닥에서 먹는다와 더불어 간혹 보이는 조선시대의 식사문화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해선 대표적으로 제이콥 로버트 무스의 기록이 있다.
부인은 남편이 식사하는 동안 부엌에 서서 항상 남편이 부르면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다..... 남편이 식사를 끝내고 다시 소리를 쳐 여인네를 부르면 밥상을 가지고 나간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음식으로 부엌에서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제이콥 로버트 무스<1900, 조선에 살다.>

당시 조선을 비롯한 여러 문명권에선 내림상 문화가 있었다.[102] 각국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조선의 경우, 식사는 어느 정도 남기고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통 손님[103] → 웃어른 → 부모 → 자녀 순서로 밥을 먹었다. 집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평민들은 특정 제재없이 남녀가 서로 겸상도 하고, 자식과 부모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여성은 남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섣부르고 과장된 판단이다. 양반의 경우에 대해서는 식사 예절을 참고.[104]

여담으로 양반과 평민의 내림상의 성격이 다른 데 평민들이 한 번에 크게 뜨고 나눠 먹는다면, 양반들은 독상을 받고 남은 반찬을 아랫사람(웃어른 → 자녀·손주들, 양반 → 솔거노비)에게 전달하는 성격이다.

파일:조선 밥그릇1.jpg
조선시대의 밥그릇 사진을 보았다면 어마무시하게 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많은 식사량의 증명과 동시에 내림상 문화의 산물이다. 수저는 따로 쓰더라도, 거대한 그릇에 가족들의 한끼 식사를 몽땅 떠놓아 각자의 순서에 맞추어 먹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남은 것이 아닌, 각자의 선택에 따라 적절한 양을 떠먹는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조선에서는 음식은 남기는 것이 예의였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먹을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곳이 제주특별자치도나 어항 주변 도시이다. 커다란 양푼에 밥을 퍼 먼저 일(뱃일)을 나가야하는 남자들이 서둘러 먹고 나가면 여성들[105]이 남은 밥으로 식사를 하고 밭일을 나가는 것이다.

순서에 차별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형태의 식사법이 성리학을 통한 차별적 식사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비교적 성리학이 약하던 조선 전기에도 이러한 식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역으로 여성이 먼저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결혼식이다. 이 경우엔 신부와 신부의 가족들이 먼저 식사를 즐기고,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면 그 다음부터 남편과 하객들이 식사를 했다.

5.3. 간통한 남자는 무죄, 여자는 유죄?

어느 시대가 그러듯 하층민들은 일부일처인데 반해 상류층들은 일부에 처첩제가 있었다. 조선시대 또한 마찬가지라 집안의 대를 잇든, 단순 여자가 좋아서든 조선의 사대부들은 축첩을 흔히 벌였다. 지배층의 영향과 당시의 시대상에 영향을 받아 법도 이에 걸맞게 구성되었고 이에 따라 남성이 간통을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여성이 간통을 저질렀을 경우 남성 때와는 달리 죄를 물어 처벌하는 이야기들이 전해지면서 "조선은 남성의 불륜은 봐주고 여성의 불륜만 처벌한다." 라는 정보가 퍼지기도 했다.[106][107][108]

여기서 정확히 짚고 가야할 것은 "남성도 간통죄의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여성도 간통죄의 처벌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에야 간통죄가 성립되어 처벌을 받고, 어떠한 경우에야 간통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이를 구분하기 위해선 간통죄의 발동조건을 건들였느냐의 유무에 달려있었다. 다름아닌 "유부녀"라는 발동조건을 말이다.

당시 간통죄의 적용범위를 단순히 정리하자면 "유부녀와 간통남의 간통은 유죄" 즉 남성이 유부남이든 미혼남이든 일단 임자있는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순간 남녀 모두 사이좋게 간통죄를 적용받고 처벌을 받았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피할 수는 없다는 소리다.

반대로 간통죄의 적용범위를 벗어난 형태는 바로 "미혼녀와 간통남의 간통은 무죄" 즉 앞서 언급한 유부녀라는 간통 발동조건을 건들이지 않았음으로 이때는 남성과 여성 모두 간통죄의 처벌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받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정리하자면 간통죄의 처벌은 유부녀라는 조건 하에 남녀 모두에게 차별없이 적용되었다.

물론 여성이 유부녀가 아닌 미혼녀라면 간통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는 미혼녀와의 간통을 축첩의 일환으로 해석하면서 일어난 경우로, 당시 법률이라는 것은 다른 곳들처럼 고위층인 사대부들의 축첩에 영항을 받았다. 이 축첩을 할 때 당연하게도 이미 결혼한 유부녀를 첩으로 두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오직 미혼녀만을 첩으로 만들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법 또한 남성과 미혼녀와의 관계에 대한 법적책임을 물지 않는 방향으로 적용된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시대적인 불편함과 부족함이란 점은 틀림없다. 허나 남성은 얼마든지 간통을 저질러도 무조건 무죄라는 말은 명백한 오류이니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좋다.

6. 사회적 오해

6.1. 백성들은 가혹하게 고통받았다?

그들이 우리나라의 토질이 기름지고 기름지고 의식이 풍족한 것과 제 나라의 법령이 각박하고 전쟁이 끊임없이 잇닿는 것을 비교해보고서 항상 말하기를 "조선은 진실로 낙국이요, 일본은 진실로 더러운 나라다." 하였습니다.
-간양록

세도정치기와 구한말 시절이 워낙 개판이니 좌우를 막론하고 조선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파탄국가였다는 인식이 꽤 많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세도정치로 나라가 미쳐돌아가던 조선 후기, 즉 순조 치세부터의 이야기지[109], 초~중기의 조선은 건국 배경이 유교식 민본주의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백성들을 최대한 안 괴롭히고자 했다.

당장 조선의 세율은 동시대 중국, 일본보다 상당히 낮았고, 세입이 적었으니 조정도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대신에[110] 몇 안 되는 엘리트 관료들을 죽어라 굴렸다.[111] 심지어 서양인의 기록을 보면 산업 혁명 당시 유럽에서도 아이들을 버리는데, 조선인들은 그러지 않는다며 칭찬하기도 했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도 그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기기도 했으며[112], 각 보육원들이 왕실에서 제공하는 복지 예산을 착복하기 위해 수용 가능한 인원 수를 넘겨서 아이들을 받았다가, 일정 나이가 되면 강제노동 현장에 투입해서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했다.[113] 《사회계약론》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의 학술적 기반을 마련했던 장 자크 루소조차 자식들을 이런 보육원에 맡겨서 양육 문제를 방기했다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을 만큼, 당대 유럽의 아동 인권 수준은 동 시대의 조선에 비해 딱히 나은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기근이나 재앙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는 조선에서도 아이를 버리거나 죽이기도 했지만[114], 일시적일 뿐 당시의 일본처럼 거대해지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하도 역사가 오래된 풍습이라 1930년 금 해금 때조차 부모가 딸 아이 모두를 공창에 팔아 적십자 단체가 구조한 일도 있었다.[115] 왜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아동 유기나 인신매매가 하나의 풍습이 될 정도로 성행했느냐면, 조선에 비해 중앙집권화가 잘 안 되어서 그런 것이다. 막부에서 농민들을 위한 구휼 대책이나 복지 정책을 마련하려고 해도, 전국 각지가 독자적인 행정권과 사법권을 가진 다이묘와 그 가신들의 개인 영지로 나뉘어서, 정책이 효율적으로 진행되지 못해 백성들의 기근이 만성화된 탓이 크다.[116] 일본 역사상 최악의 기근으로 불리는 텐메이 대기근의 수습이 대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국가 막장 테크로 이어진 이유도, 지역 영주들에게로 권력이 분산되어 대책을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없던 탓이 크다.[117] 조선은 전국의 모든 지방관을 조정에서 직접 임명할 정도로 철저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고 있었기에[118], 유사시에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서 신속하게 필요한 대책을 세우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영양 수준도 알고 보면 주변국들보다 더 좋았다. 이는 동시대 주변국과의 영양상태 비교로도 확인된다. # 그 때문에 조선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던 사람들이 조선인들이 대식가였다는 주변 국가들과 기록에 의한 평가를 보고 벙찌기도 한다. 대식도 먹을 게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식사량 참조. 반면에 동시대 일본은 키가 세대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사극에서는 툭하면 역모 사건이 일어나서 비상시국 하에 두들겨 패는 것이고, 전국시대 3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대결하던 타 영주와 그 가족들을 법도 아니고 학살로 조졌으며 때에 따라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히데요시의 경우 자신의 물건을 훔쳤다는 이유로 그 도둑을 도둑의 10살 난 아들과 함께 팽형에 처하게도 했다. 일본 제국이 건국되고 메이지 유신이 된 후 8년이 지나서야 고문을 금지시켰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인들조차 재수없으면 잡혀가서 코로 미소국을 시식했다.#

조선은 백성들을 위해서 신문고를 만들거나[119], 농민들을 위한 복지 정책[120] 장애인 등용, 사형에 대한 3심제 시행, 노비 학대에 대한 처벌 등 시스템이나 이념은 오히려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보다 나았다.[121]

문제는 후기로 가면, 시스템의 운영이 점차 변질되고 삼정으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민란을 가혹하게 진압하는 경향이 생겨나긴 했지만, 이념과 현실의 괴리[122]가 문제였지, 조선이 다른 나라들보다 가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조정은 진압에 앞서서 다른 지방관을 파견하는 식으로 협상을 먼저 하려고 했고,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의 주민들의 자치를 인정해주는 등의 유화책을 벌이기도 했다.

당장 비슷한 시기인 산업 혁명 시기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 같은 여러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학살극까지 벌이면서 잔혹하게 진압했고, 훨씬 이후인 1930년대에도 식민지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총독부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하던 암리차르의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레지널드 다이어 장군이 당시 국왕인 조지 5세로부터 바스 훈장 3등급을 수여받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123] 전근대적인 인권침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딱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6.2. 평민, 천민들은 배울 수 없다?

위의 4.2 항목이랑 유사하다. 공식적인 전문 교육 시스템은 없었지만 본인이 글을 배우는데 어떠한 반대나 제재는 없었다. 도리어 교육에 대한 제재가 가해졌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이다. 애초에 과거시험을 신분에 관계없이 치를 수 있었다는 것과 양반이 되려면 과거 급제자 및 그 직계 가족일 것이라는 부분, 그리고 이 때문에 조선 말기에 양반의 수가 급증하여 신분제에 동요가 일어났다는 것[124]은 모두 평민들에게 교육의 자유가 주어져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전통적인 장례법에서 집집마다 지방을 작성할 때 '현고학생부군신위 ○○○'라고 쓰는 것도 이와 관련된 풍습이다.[125]

6.3. 조선 백성의 대부분은 노비다?

일단 노비의 비율이 50%였느니 90%였느니 말이 많은데 최고조에 다다른 17세기에도 30~40%였으며 이 또한 정상적인 상승세가 아닌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 등으로 인구 파악이 힘들어지고, 생계가 어려워져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기를 희망하니 일시적으로 비정상적인 급상승을 해버린 경우였다. 게다가 이마저도 과장된 수치로 보는 경우가 많다. 흔히 한명회가 세조 시기에 도망 노비가 100만 명이라고 말해서 이 수를 액면 그대로 주장하는데, 100, 10000 같은 숫자는 많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과장한 표현이지, 정말 그만큼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기록에서는 조선의 군사가 100만 명[126]이라거나, 백정의 수가 조선 전체 인구의 1/4이라거나 승려의 수가 40만 명에 이른다[127]는 등,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허무맹랑해지는 표현들도 있다. 애초에 신료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를 과장해서 말하는 게 비일비재하던 시기였는데 그 과장된 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과장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일단 외국상의 연구는 평상시 10%로 보았다.[128] 그나마 인프라가 잘 발달한 현대조차 통계의 함정이라고 해서 통계 자료의 대부분이 신뢰성을 의심받는 판국인데, 하물며 전근대 시절에 통계라고 내놓은 근거자료들은 100% 믿을 것이 못 된다. 게다가 양반 등 사회적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호적에 자신을 제외하려 했으며, 평민 등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노비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아서 실제 비율은 더 낮다.

게다가 노비가 그렇게 많았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국방의 문제다. 조선은 노비에게 병역의 의무가 없어서 요즘으로 치면 민방위 개념인 잡색군으로 편성되었으며, 설사 있어도 자원병인 데다가 그 수도 얼마 없었다. 그런데 병역의무가 있는 일반 백성들도 군포를 내면서 빠지는 판에 노비가 그렇게 많았다면 병력도 국방비도 없으니 당장 국방력이 주변에 비해 굉장히 허약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조선이 아무리 군사력을 미천하게 여겼어도 나라가 당장에 침략 받을 정도로 방치하진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이 대대적인 침공을 받은 후로는 국방에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약간 엇나가는 얘기지만 조선시대 병역 체계를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군역에서 빠지는 계층들이 매우 많아서, 만약 노비가 대부분이었다면 군역을 수행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노비 외에 군역에서 빠지는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수를 살펴보면 일단 양반 대부분은 유학호로 분류되어 호적에서 제외되었는데 17세기 초 기준으로 이들의 수는 40,000명에 달했으며 이런 식으로 군역이 면제되는 사람들의 수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늘어났다. 여기에 아전들도 군역에서 빠졌는데 경국대전 기준으로 보면 이들의 정원은 30,000명을 넘어가는 수준이였고[129] 실제로는 정원을 한참 초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장 이 법전이 쓰여진 성종 때의 기록만 봐도 평양의 아전이 규정을 한참 초과해 천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 이러다 보니 아전이라는 이유로 군역에서 빠지는 사람들의 수도 엄청났다.

그리고 도첩을 받은 승려들도 군역에서 제외됐는데 이들의 수도 상당했다. 세조 말에 도첩을 받아 군역을 면제받은 승려의 수만 6만 명이 넘어갈 정도였다.# 또 율생, 의생, 목자, 장인, 빙부, 수부 등도 군역에서 빠져 요즘으로 치면 민방위 개념인 잡색군에 소속되었다.# 만약 여기에 호적상으로 노비까지 평균적으로 50% 수준이었다면 호적에 군역을 수행할 사람이 얼마나 남아있었을까? 얼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종 시기 기록을 보면 군역을 지는 사람들로 편성된 정군과 군역을 지지 않는 사람들로 편성된 잡색군의 비는 대략 6:4 정도였다.# 정군 한 명당 붙는 보이는 수가 평균적으로 잡색군 한 명당 붙는 수보다 많았다는 점, 그리고 노비에게 보인을 붙여줄 경우 아예 보인을 원래 규정의 반으로 감해서 편성하라는 규정[130]까지 경국대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군역을 행할 의무가 있는 양인 장정은 16세기 기준으로 호적에 등록된 장정 중 최소 60% 이상은 됐다고 봐야한다. 이랬던 비율이 임진왜란의 타격 때문에 양민층이 몰락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아져 호적상의 노비 비율이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17세기 호적 자료는 거의 다 경상도 지역의 호적자료인데, 임진왜란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 이 지역이었으니 다른 지역들에 비해 양민층의 몰락이 심각하게 일어나서 다른 지역에 비해 노비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 군적상에만 이름이 올라오고 실제로는 훈련도 안 받은 사람들이 많기는 했지만, 일단 이들도 호적에 군역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 분류되었으니 군적에 이름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호적에 등재된 노비 비율은 실제보다 과장되었을 거라는 의견이 주류인 점까지 감안하면 실제 노비 비율은 더 낮았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조선 조정도 결코 바보가 아니다. 이들도 노비를 줄이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다. 앞에서 말한 군역의 문제도 있지만, 노비 비중이 너무 높으면 조세가 제대로 안 걷히니 어떻게든 세금을 걷을 양민을 많이 만들기 위해 노비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구한말 쯤 되면 지주들도 노비가 아닌 소작농을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삼기에 노비가 문제가 아니게 된다.

또한 고려시대의 지방 촌락의 양민들은 지방 향리(호족)에게 예속당한 존재였으며 분명 법적으로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양인이어야겠지만, 고려는 지방에 조선에 비해 크게 간섭하지 않았으며 분명히 법제적으로는 자유로운 양민들이 향리(호족)의 통치하에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만했기에 단순히 노비 비율만 갖고 신라, 고려가 조선보다 낫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131][132][133][134]

6.4. 조선은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린 유일한 국가다?

#위키피디아에서 19세기 이후에 농노, 노예제를 폐지한 국가 목록 항목

애초에 민족이라는 개념에도 논란이 있으며, 자민족 노예가 더 야만적이라는 주장도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이 대목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기 나름대로 살고 있던 타민족을 낮선 나라에 끌고 와 노예로 삼는 노예무역이야말로 더 야만적이라는 주장으로 반문이 가능하다.

윗 문단과 합쳐저서 조선은 같은 민족을 반 이상 노예로 부렸다는 주장도 있는데 노비 비율이 높은 나라는 조선 외에도 있었으며, 타국도 자민족을 노예로 부렸기에 동족 의식은 사실상 동급이다.[135] 또한 조선의 자민족 노비 비율이 높아진 이유는 악랄해서가 아닌 정복전쟁으로 노예를 수급할 수 없는 사회였기 때문이었고 타국이 그나마 동족의식이 있어서 자민족 비율이 적었다는 자료조차 없다. 따라서 노예에 자민족 타민족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136]

로마 제국, 중화제국, 짜끄리 왕조의 시암 왕국, 일본[137], 러시아, 서유럽, 티베트 등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아 부린 사례는 역사를 통틀어 조선 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으며, 범위를 근대까지 줄인다고 하더라도 짜끄리 왕조의 타이와 제정러시아, 티베트가 조선과 같이 해당 조건에 부합된다. 또한 프랑스도 같은 동족들을 갤리선 노예로 보낸 일이 있었고 영국 속국 시절의 미국도 형식상 영국인이던 식민지인들을 연한계약하인'이라는 이름의 노예로 사고 팔며 부린 일이 있었다.#[138] 일본제국 또한 자국민을 1920년대에까지 규슈 지역의 가난한 여인들 30만 명을 가라유키상으로 만들어 팔아버리고, 1930년 쇼와 대공황 때 자식을 공창에 팔아버려 이런 이유로 분노한 일본 군인들이 5.15 사건2.26 사건 같은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 정부를 뒤엎으려 했었다. 당시 일본 군인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농촌 출신인데, 자신들과 같은 고향의 여성들이 성노예로 팔려가는 현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6.5. 노비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주인고소금지법[139] 때문에 노비가 주인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전혀 호소할 길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주인을 다른 노비나 양민 친족들이 대신 고소하는 경우로 대체 가능했다. 또한 같은 주인을 둔 노비 친족의 경우 주인고소금지법이 적용되었으나 주인과 노비 친족이 같이 벌을 받았다. 게다가 주인고소금지법은 재산과 관련된 소송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노비를 학대한 양반들이 벌을 아예 안 받은 것도 아니다. 실제로 타 양반들의 반대에도 노비에 대한 학대 탓에 유배 이상의 엄벌을 받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노비들이 주인의 학대에 대해 모든 저항이 금지된 것도 아니었다.[140] 그리고 노비가 많은 집안의 경우 잘 대해 주는 집안도 적지 않았다. 이는 노비가 집안 사람들보다 머릿수가 더 많으니, 노비들을 개차반으로 대해 반란을 일으키면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41]. 부정적이거나 극단적인 사례만 놓고 이것이 조선의 전부라고 주장한다면 근현대 한국에서 재벌 2세 폭행 사건이나 성범죄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만 가져오고서 한국은 고대적부터 아무것도 발전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외에도 노비는 재산과 가족을 가질 권리가 있었으며, 몇몇 노비들의 경우는 주인보다 재산이 많거나, 다른 노비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정충신의 경우처럼 국가유공자라면 아예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다만, 이 경우는 조선이 특이하다기보다는, 웬만한 전근대 국가에서는 노예에게 이런 권리를 보장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만 아니라, 로마 제국이나 중국, 아즈텍 제국도 이를 노예의 기본권리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나라에서는 노예가 돈을 주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자유를 사는 것도 얼마든지 허용했다.

가령, 고대 로마 제국 시기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중 한 명인 에픽테토스가 이렇게 해서 자유를 얻은 해방 노예 출신이었고, 아즈텍 제국에서도 노예 계급인 틀라코틴이 일정량의 돈을 지불하거나,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경우, 혹여는 주인의 학대를 피해 달아난 사람 한정으로 인근의 신전으로 도망가기만 해도 바로 자유민 계급인 마세우알틴으로 승급할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도 삼국시대 당시에 신라에 거진이라는 화랑과 그 아들인 비련이 백제군과의 전투 중에 전사하자, 이를 보고 분노한 거진, 비련 부자의 노비인 합절이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가 똑같이 전사하였는데, 당시 신라의 국왕이었던 선덕여왕이 이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벼슬을 추서하고 합절의 가족들도 면천시켜주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비슷한 시기에 이 정도의 권리조차 보장해주지 않은 나라는 남북 전쟁 이전의 미국이나, 전국시대 당시의 일본, 전근대시대의 아라비아 반도 지역 등 얼마 없었다.

또한 백정 같은 경우에는 나라에서 명백하게 양민으로 인정했으며, 이들이 받았다는 사회적 차별은 엄연히 비공식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게다가 백정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백정 집단이 가진 유랑민의 속성 및 범죄가 원인이 된 측면도 있다[142]. 본래 조선 사회의 백정들은 조선 초기에 귀화여진족이나 일본인, 위구르족 등의 소수민족들이 조선인들에게 동화되는 과정에서, 현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범죄자나 부랑자가 된 이들의 후손들이고[143], 이 때문에 백정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하거나, 이들 인구의 태반이 범죄자였던 것이다[144]. 물론 일부 범죄를 저지른 백정 인원에 대한 법치를 제대로 적용하는 것 이상의 무차별적인 혐오는 엄연히 조선 사회의 문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들이 무조건 미개하고 야만적이라서 차별을 했다는 건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현재 외국인 노동자들의 범죄가 문제라며 제노포비아적인 성향을 지니는 극우 네티즌들, 집시 등 유랑민들을 차별하고 학살했던 유럽인들은 조선인들보다도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가 된다.

여담으로 조선에서는 노비가 홀대를 받거나 노비에게 옷을 제대로 입히지 않으면 노비를 소유한 주인과 관청에서 법적으로 처벌받았다. 이 덕분에 실제로는 관청에 고용된 노비들이 품위유지를 위해서 받는 비용이 평민보다 많았다. 이는 관노비 또한 마찬가지라 포졸 이상의 관원들, 심지어 노비일지라도 국가가 고용한 인력인만큼 평민보다 훨씬 깔끔한 옷을 입었다.

결론적으로 노비들의 사회적 대우는 분명 낮고 불공평한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2천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신분제가 폐지된 것은 엄연히 조선 말의 일이다. 사실 정말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체제였으면 오래 유지되지 않고 진작 붕괴되었어야 한다.

또한 조선에서는 노비 역시 엄연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여성 노비가 죽은 남편으로부터 상속받은 땅을 지키고자 관아에 정식으로 소송을 하여 토지소유권을 인정받은 일도 있었다.#

6.6. 재산권이 없었기에 사유재산도 없었다?

노비의 재산 상속

재산권이 근대적인 개념으로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경국대전 등 성문법적으로 사유재산은 존재했으며 재산권을 인정받기 위해 재판을 하는 일도 있었다. 사실 조선을 포함한 전근대 국가에도 엄연히 계급을 막론하고 사유재산은 존재했다. 그것이 현대적인 개념으로 정립된 것이 근대였을 뿐이다. 물론 신분제, 전근대 사회에서의 재산권은 현재보다 존중받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조선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가령, 조선보다 상업이 발전됐다는 일본조차 신분 질서를 유지한다는 핑계로 상인들이 재산을 빼았기는 일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중세 초기의 유럽에선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유대인들의 재산을 유사시에 징발하고자, 각국에서 법으로 유대인들의 재산을 공식적으로 국가의 소유라고 규정해놓은 바 있다. 심지어 헌법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도 재산권이 침해를 받는 사례도 있다. 19세기의 미국에서도 한때는 켄터키 주 최대의 부농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아버지가 토지 등기가 제대로 안되어있다는 이유로, 보유한 토지들을 죄다 주 정부에 압류당하고 떠돌이 빈농으로 전락한 사례도 있으며, 일본 제국의 경우 국가총동원법 등 전시체제 유지를 위해 국민들의 재산을 공출하는 사례도 있다. 군사정권 당시의 한국에서도 군사독재 하에서 기업이 보복에 의해 해체되거나 개인이 자유재산을 탈취당하는 등의 재산권 침해가 있었다. 그리고 전체주의 정권인 중국과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국가가 개인의 재산권을 제대로 보장해주지않은 사례는 20세기 이전만해도 동서를 막론하고 매우 흔했다.

7. 정치적 오해

7.1. 조선은 종속국? 자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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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조공국은 맞지만, 중국에게 '지배당하는' 속국은 아니었다. 이것은 속국의 정의를 헷갈려 해서 싸움이 일어나거나, 중국자국에서 동북공정, 중화사상, 혐한의 요소로 쓰이는 상황이다.

우선 속국, 종속관계라는 요소의 이미지를 살짝 바꾸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종속관계라고 하면 "타국에 의해 지배당하며 사회적 권리들이 압박, 박탈 당하고 휘둘리는 나라"라는 게 대부분이다. 이는 제국주의 이후 생겨난 인식이며, 틀린 말까진 아니나 종속관계의 핵심 요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는 나라"이다. 즉 사회적인 관계 양상이 중요한 거지 일반적인 지배관계만으로 속국이자 종속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역사적인 위치나 형태를 보면 종속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고려원 간섭기일제강점기처럼 말 그대로 휘둘리고 지배받는 입장의 종속관계가 아니라[145], 이라는 거대한 국제질서에서 영향을 받는 종속관계인지라 자주적인 부분이 컸다.

원 간섭기 고려시대의 경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속국의 이미지에 부합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동아시아 질서에 영향을 받는 조공국으로서 종속과 자주가 동시에 존재해왔기에 훨씬 나은 입장이었다.

이를테면 조선국왕 책봉에 있어서 보다 친명, 친청 성향의 인물인지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고, 즉위에 절차적 정당성이 있느냐가 더 큰 관심사였다. 그것도 해당 국가의 제도나 관습에 비춰서였지 중국 관습 기준이 아니었다. 반정으로 등극한 국왕의 경우 책봉 전 어떤 논평 수준의 의견을 개진하긴 하지만 결국엔 책봉을 다 해줬다. 정말 말 그대로 형식적 절차였던 것이다. 오히려 조선 국내에서 중국에서의 책봉여부를 두고 정치질로 써먹었다. 이런 점을 보아 책봉을 명, 청나라에서 조선을 실질적인 지배의 수단으로 써먹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각각의 요소들을 나누어 보자면 아래와 같은 요소들이 나온다.
·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사회·문화적 질서에 영향을 받는 종속관계가 이루어졌다.
· 정치적 활동을 진행함에 있어 중국이 일정 부분 견제하였다.
· 사대의 예와 조공을 바치고 신하국이자 제후국으로서 명목상 을(乙)의 입장에 있었다.
종속적인 요소들
· 외교, 법, 화폐 등 국가적인 운영과 제정에서 큰 방해 없이 조선 스스로 이루어냈다.
· 기본적인 의식주에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때론 고려양처럼 역수입이 되기도 했다.
· 국가의 지배층이 외부의 압력이나 요구에 의해 바뀌거나 휘둘리지 않는다.[146]
· 사회적으로 대륙의 식민지나 구성국이 아닌 자체적인 국가로서 독립성을 가졌다.
자주적인 요소들

정리하면 "대륙에 지배받는 속국이 아닌, 동아시아라는 영향력의 아래에 있던 종속관계로서의 조공국이자, 동시에 스스로가 주체인 국가권리들을 행사하는 국가였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종속관계의 입장은 조선뿐만이 아닌 동아시아에 속한 대다수의 국가들이 조선과 같은 입장에 놓여 있었음으로 딱히 부정적으로 생각할 요소는 아니다. 사회적·문화적 규모가 큰 나라에게서 주변국들이 직·간접적 영향을 받는 일은 동서양 어느 시대에서나 자주 일어나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같은 논리로 중국의 조공국에 해당되는 나라는 조선뿐만이 아니었다. 조공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의 몽골, 카자흐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일대, 베트남이나 시암 같은 동남아[147], 오키나와, 무로마치 막부 등 일본의 옛 국가나 정권 그리고 몽골족, 여진족들 또한 중국에 조공했다. 봉건제도의 영향으로 국가 간 위계질서가 훨씬 심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더 해괴한 상하관계가 넘쳐나기도 했는데, 가령 명목상 프랑스 왕국의 속국인 노르망디 공국, 아키텐 공국, 브르타뉴 공국, 가스코뉴 공국 등의 공작위를 모조리 한 가문이 상속받아 프랑스 영토 절반 이상의 영지를 차지하고 프랑스와 동격의 왕국인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겸한다든지, 스페인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한다든지 등등[148].

무엇보다 해당 조공국의 구조는 중국 직속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대월은 참파 등 중국의 손이 닿지 않는 더 남쪽에 있는 국가의 조공을 받았고, 조선은 대마도, 류큐, 큐슈, (중국보다 조선에 가까웠던) 여진족 일부, 무로마치 막부의 조공을 받았다. 구조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조선 통신사의 경우도 칙사를 조공국에 보내는 형태이기 때문에, 에도 막부 또한 조선의 조공국으로 취급하는 것이 가능하다.[149]

문제는 위에서 말했듯 속국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나빠졌다보니 현대에선 속국의 의미가 "영향력"이 아닌 "지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조선이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며 반발하고, 말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조선은 중국에게 지배당했다!"하며 싸움을 부추기고 왜곡하는 일들을 자주 벌이고 다니는 것이다. 다만, 이는 중화사상과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중국인들의 무지한 발언과 도발이 본질적으로 주된 원인이다.[150]

7.2. 부산은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조계지?

그리피스가 쓴 은자의 나라 조선에서 나왔던 오류이다. 당연히 부산은 일본과 관련없는 조선의 영토였다. 부산에 몇몇 일본인들이 교류를 위해 거주한 적은 있으나 이것을 가지고 일본이라는 국가가 부산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조선족 거주지역을 가지고 한국이 중국 지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다고 해석하게 될 수도 있다.

7.3. 군사적 오해

7.3.1. 조선에선 갑옷 없이 포졸복을 입고 싸운다?

파일:namhansan-1.jpg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이다. 말단병사들이 기장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협수 위에, 가죽 또는 섬유로 만들어진 엄심갑(흉갑)을 착용하여 개인별로 방호력의 편차를 잘 묘사하였고, 벙거지가 아닌 첨주형 투구를 쓰고 조총 탄약이 든 죽관을 두른 모습까지 잘 재현되었다. 실제 갑옷의 모양에 대해서는 한국 갑옷 참조.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계산해봤을 때, 당시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 등은 말이 많지만 상식적으로 전투 시에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갑옷을 착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151]

정규군이 아닌, 의병들조차도 군사용 갑옷(두정갑, 가죽갑옷, 지갑)은 구비할 수 없더라도, 심지어 솥뚜껑 같은 거라도 방호구로 쓰거나 나무껍질과 두꺼운 섬유 같은 걸로 어떻게든 챙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28년(1446년) 평안도 도내에 도적들이 창궐해 대성산성을 거점으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백성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있다. 일개 도적도 갑옷으로 무장하였는데 아무리 말단에 불과하더라도 정규군에 속하는 포졸들이 포졸복만을 입고 싸웠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갑옷을 입고 싸운 자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고증이 미비했던 과거의 영향으로 인해 왜곡된 형태가 미디어를 타고 퍼져나가 생겨난 것이다. 관련된 내용은 포졸복 참고
파일:포졸의 구성.png
조총수의 기본군장
(조선의)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병력은 출동 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
19일(무신) 맑음. 품방(品防)에 해자 파고 쇠사슬 구멍 뚫는 일로 아침에 군관을 정 해 보내고, 나도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직접 독려했 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奔赴軍) 7 백 명이 역사에 점고를 맞았다.

6일(병인) 맑음. 아침 먹은 뒤에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 갑옷, 투구, 전 통, 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 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色吏)와 궁장 (弓匠), 감고(監考) 등을 처벌했다.
이순신 <난중일기 임진년 2월~3월 6일>

이러한 기록들이 말해주는 것은 조선군이 전투 중에 갑옷을 입었다는 소리고 이것 외에도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나 장비의 상태를 점검하는 기록들이 종종 나오니 임진왜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병사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 숫자를 이순신장군은 구체적으로 특정 군을 700명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점고를 할 시 한 곳의 700명의 병사가 검사를 받고 잘 안 된 것을 처벌했다고 적어놓고 있으니 이것은 조선군이 갑옷을 대부분 입었다는 증거이다.

왜란 초기 부산진성의 기록을 보면 병사 500명과 전선 3척이 있었다고 적혀 있고, 그 3척을 불사르고 500명이 성을 수비하다 모두 죽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진성을 점검한 것으로 보이고 그 500명이 갑옷을 안 입었다고 어느 사료에도 적혀있지 않으며 특히 부산진성은 20,000명의 적군을 상대로 하루를 버틴 곳이다. 과연 갑옷이 없었으면 그것이 가능할까 상식적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국립진주박물관을 통해서 드러난 사실로 왜란 시기 해전은 대부분 1~2백보 안에서 이뤄졌는데,그 해전들 대부분을 이순신 장군은 10여 명의 사상자만을 내고 승리로 이끌었다. 갑옷이 없다면 이러한 사상자는 나올수가 없다.

동시기 타 국가들은 1명에게만 무기류를 구비하도록 하여 그 무장이 상당히 빈약하였다고 주장하나, 조선은 애초에 땅을 가진 농민, 즉 정민을 군사로 모았고 그 정민도 다른 농민 3명이 경제적으로 보조하여 무장하게 하였으므로 그건 말도 안 된다.

애초에 경국대전으로 조선 초기 국법부터 병사들이 갑옷 을 다 갖춰입게 하게끔 하는게 조선이었다. 그 이유는 타 국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하여 병사의 무구나 질적우위를 통해서 이를 보완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왜란 전 왜구 1,000여명을 70명 조선군이 학살한 을묘왜변을 보면 조선군이 갑옷을 안 입었다면 저게 가능하긴 할지 의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것들의 주장으로는 아래의 사료를 인용하는 것으로 보면 비변사 등록인데.
효종 1년(1650) 4월 17일 『비변사등록』 .
" 甲冑所以用於馬上. 使船上列楯蔽身之卒, 皆着甲冑, 實非制勝之急務, 徒貽水軍難支之弊端. 況戰船本體已大, 上設樓櫓, 已患其質重難運, 而又載被甲之卒, 添一倍之重. 海上習兵者多言其不便. 昔者舟師用兵之智, 製器之精, 莫如故統制使臣李舜臣, 橫海功烈, 至今稱之. 其時亦無擁甲登船之制, 豈其智不及今人而然哉? "

갑주는 마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배 위에 방패를 둘려놓고 몸을 숨긴 병졸로 하여금 모두 갑주까지 입게 하면 (중략) 단지 수군이 자신의 몸을 가누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전쟁터의 배는 선체가 크고 위에 누로(적을 망보는 높은 전망대)를 설치하므로 바탕이 무거워 움직이기 어려움이 걱정되는데, 이에 또 갑주를 입힌 군졸들을 태우면 곱이나 되는 무게가 배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군졸을 훈련시켜 본 자는 대부분 불편함을 토로합니다. 옛날(임진왜란 시절) 수군을 용병하는 지략과 기계 제조의 정밀함은 통제사 이순신 만한 자가 없어 그 공적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도 갑옷을 입고 배에 승선하는 제도가 없었으니, 어찌 그 당시의 지혜가 지금(효종시절) 사람들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했겠습니까?
비변사등록, 효종 1년 4월

임진왜란시기 가장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다 고 공인받는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의 갑옷을 점검하였다고 적어놓았다. 더욱이 그러한 점검이 많았으며 한 진의 갑옷 수를 구체적으로 적어놓아 거의 모든 병사가 갑옷을 입었음을 증명한다.이것으로 해당 비변사 등록을 인용하며 조선군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라는 주장하는 것은 바로 반박된다. 또한 역사의 기본은 교차검증인데,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인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도 분명히 조선군은 갑옷을 입고있다 고 적혀있다.

이는 실록에서도 적혀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810029_001
지금 마땅히 민간에 있는 장인(匠人)을 널리 모아 방어가 요긴한 곳에 나누어 보내어 화살을 만들도록 하고 또 호남에 있는 전죽(箭竹)을 많이 베어 배에 실어 운반하여 시일을 정해 놓고 일을 하되 새로 만드는 갑주나 창칼은 정예롭게 만들도록 하여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데에 민첩하고 옮기고 실어나르는 데에 편리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를 보면 왜란시기에도 갑옷을 계속적으로 만들고 병사들에게 입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면 저 비변사 등록에서 적어놓은 것은, 제도가 없었다는 말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제도가 없어도 병사들은 경국대전을 따라 갑옷을 입었음이 증명된다.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bb_014_001_04_0360
또한 해당 비변사등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50년이 지난 다음 적은 글이다. 제도가 없었으나 제도를 만든것을 불만사항을 적어 적은 글이다. 흉년이 들어서 생산을 감해달라는 글을 적은 글이다.

그리고 왕은 이것이 일시적인가 아니면 흉년일때만 경감시키는것인가 라고 물었다.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bb_014_001_04_0340
효종 1년 1650년 04월17일(음)
啓曰, 昨因全南右道水使尹昌耉各浦甲冑量減事狀啓, 本司粘目, 各官與鎭浦, 殘盛有異, 依狀啓量減宜當, 大鎭則十二部內減四部, 中鎭則減六部, 殘鎭則減九部, 自本營參酌, 分等減定後啓聞事, 入啓蒙允矣, 慶尙·洪淸道及全南, 左道各鎭, 亦當一體施行, 以此竝爲知會于三道監司及水使處何如, 答曰, 依啓。

아뢰기를
"어제 전남 우도수사 윤창구(尹昌耉)가 각포(各浦) 갑주(甲胄)의 경감문제에 관해 올린 장계의 본사 점목(粘目)에 '각 고을은 진·포(鎭浦)와 형편이 다르므로 장계에 의하여 경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진(大鎭)은 12부(部) 안에서 4부를 경감하고 중진(中鎭)은 6부를 경감하며 잔진(殘鎭)은 9부를 경감하는 문제는 본영에서 참작하여 등급을 나누어 경감할 것을 결정한 뒤 아뢰어야 합니다'라고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경상·홍청도 및 전남 좌도의 각진도 다같이 시행하라고 아울러 3도 감사 및 수사에게 통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각 도의 형편에 따라 경감을 시켜주었다고 하였지 생산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08&totalCount=408&itemId=bb&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r&searchSubjectClass=&position=20&levelId=bb_013r_001_03_024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6%B0%B4%E8%BB%8D&searchKeywordConjunction=AND

의 사료를 보면 마찬가지로 비변사 등록이나 여기에는 수군 모두에게 갑옷을 지급하는게 현 제도라고 적고있다.
謂感矣, 且頃因統制使狀啓, 戰船軍卒, 皆令着甲, 今又申明, 使之造作而一船, 例載九十人則當造鐵甲九十領
또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전선(戰船)의 군졸에게 모두 갑옷과 투구를 입히게 하였으며, 지금 또 거듭 밝혀 제조하도록 하였습니다. 배 1척에 90 사람이 승선하는 것이 예이니, 철갑(鐵甲) 90벌이 제조되어야 합니다.

조선군이 갑옷을 입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1007006_010
○備邊司啓曰: "戰用之具, 莫切於甲冑, 而武庫所儲, 其數不敷, 西北邊上留置之數, 亦甚零星。 當此調兵守禦之日, 許多軍士, 不可赤身赴戰。 頃間各道兵、水營及各官, 有月課措備之令, 想已准數措備, 今依別定差使員, 及今月晦日內, 沒數上送, 以備軍前之用, 爲當。" 傳曰: "依啓。"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쟁의 용구는 갑주(甲胄)보다 절실한 것이 없는데 무고(武庫)에 저장된 것이 그 수가 많지 않고 서북 변방에 남겨 놓은 것도 심히 적습니다. 군사를 조련하고 지키고 방어하는 때를 당하여 허다한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각도 병영·수영 및 각 고을에 월과(月課)로 조치하여 갖추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미 수효대로 맞추어 조치하여 갖추었을 것이니, 지금 별정 차사원(別定差使員)을 보내서 이달 그믐 안에 전부를 올려와서 군용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를 보면 확실하게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다고 적혀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709001_004
○兵曹啓: "近因凶荒, 諸道民生可慮。 今考雜色軍丁甲冑兵仗, 一時盡點, 非徒騷擾, 盡賣田産, 必致失業, 姑令每一戶備冑一、甲一、劍一, 其弓箭及槍, 不必皆備。 每一牌內五分之三備弓箭, 五分之二備槍, 以爲定數, 漸次而備。 每隔一年, 加備一物, 隨備隨點, 勿令監司都節制使差使員巡, 行點考, 只使其官守令點考, 以待都巡檢使下界。" 從之。

병조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흉년으로 인하여 여러 도(道)의 백성의 생계가 염려스러우니, 지금 잡색 군정(雜色軍丁)의 갑주(甲胄)와 병장기(兵仗器)를 상고하되, 한꺼번에 다 점검(點檢)한다면 소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토지와 재산을 다 팔아서 반드시 직업을 잃게 될 것이니, 잠정적으로 매 1호(戶)마다 투구 한 개, 갑옷 한 벌, 칼 한 자루만 준비하도록 하고, 그 활·화살과 창은 반드시 다 준비하지 아니하여도 되며, 매 1패(牌)내에 5분의 3은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5분의 2는 창을 준비하게 하여 정수(定數)로 삼아 점차 준비하도록 하되, 매양 1년씩 걸러 한 가지 물건을 더 준비하게 하고 준비하면 곧 점검하도록 하되, 감사·도절제사·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순행 점고(點考)하지 말도록 하고, 다만 그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점고하도록 하여 도순검사(都巡檢使)가 지경에 내려가기를 기다리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를 보면 흉년이라도 갑옷과 투구, 칼은 반드시 준비하도록 한 것이 조선이다.

7.3.2. 조선은 화약무기를 경시하였는가?

조선 초기, 세종대왕대의 조선은 세계 최초로 탄피 개념을 적용한 권총형 총통인 세총통과 화포인 천자총통, 지자총통을 개발했다. 또한 세종은 총통위를 설치해 화약과, 화약 무기의 생산을 확대했으며 천 · 지자총통을 개량한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을 개발했다. 문종대에는 다연장 로켓으로도 볼 수 있는 화차와, 그런 화차에 장전할 신기전을 제작했다. 세조대에는 총통위를 폐지하고 비대해진 조직을 재정비하는 한편, 염초 생산에 대한 통제를 풀고 민간에서도 염초를 생산하여 화약 생산량을 높이려 했다. [152]

임진왜란 초기에는 선조 12년에 개발했던 승자총통을 개량한 소승자총통을 활용해 일본의 조총에 맞섰으며, 강화 협상이 이뤄지던 시기부터는 노획물과 여여문을 비롯한 항왜들의 정보에 기초를 두고 조총의 개발과 양산을 시작했다. 조선은 명과 일본 양측으로부터 화약 제조법과 다양한 화약 무기에 대한 정보를 습득해 활용했으며, 그 덕에 조선 후기가 되면 화약의 생산력과 생산량이 기존보다 더욱 진일보했다.

광해군대가 되면, 조총의 보급이 확대되어서 강홍립이 이끈 1만 3천의 원군에 편제된 조총병들이 사르후 전투에 참여했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지방군에도 조총병의 비중이 50%를 넘었고, 천보총이라는 저격용 조총도 발명했다. 순조대에는 화약과 총기가 민간에도 많이 풀려 조총의 매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였다.

화약에 대한 조선의 집착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조정은 민간에 엄청난 민폐를 끼쳐 허구헌 날 그 패악에 대한 상소가 올라오던 취토군을 유지해 화약을 구하려 애썼고, 이렇게 모은 화약을 악착 같이 모아 실탄 훈련에 활용하고 미래의 전쟁에 대비했다. 연산군은 이렇게 모은 화약을 폭죽 놀이 하는데 써서 사관의 비판을 받았고, 광해군은 '화약 만들때 쓸 아까운 염초를 푸른색 기와 굽는데 사용해서 낭비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들었다. 임란 시기에는 바닷물로 염초를 만들 수 있다는 괴소문이 돌아 조정과 선조가 어떻게든 그 비방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선조는 화약 제조법을 개량했다는 이유만으로 평민과 노비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조선의 화약 무기 발전이 정체되어 보이는 것은 오랜 평화로 인해 개발과 유지에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는 군사 장비에 투자할 필요성이 적었던 점과 주변국들 또한 화약 무기의 발전이 서양에 비해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전쟁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 장비에 투자할 필요성이 높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그럴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다.

조선의 화약 무기 발전을 청 왕조가 방해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부정확한 내용이다. 물론, 청 제국은 명 왕조처럼 염초를 공급해주지 않았고 조선이 염초를 구해 가는 것에 대해 강한 통제를 행사하긴 했지만, 청 제국 때문에 머스킷의 도입에 실패했다는 의견은 낭설이다. 나선 정벌에서 조선군은 러시아인들이 사용한 머스킷을 확보해 조정에 바쳤고 이에 고무된 조정에서는 머스킷의 도입을 추진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도입이 무산된다.

먼저, 머스킷은 화승총에 비해 제조 단가가 매우 높았다. 유럽의 국왕들까지도 별 것 아닌 작대기에 쇠장식을 단 주제에 비싸다고 불평할 정도로 머스킷은 비싼 장비였다. 게다가 격발 장치가 화승총에 비해 복잡하고 제작 난이도가 높았으며 비싼 부싯돌은 소모품이었다. 그래서 모든 화승총을 머스킷으로 교체하는 것은 돈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었고, 머스킷 도입을 주도한 조정에서도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두 번째, 동북 아시아의 긴 장마철과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불발을 할 가능성이 화승총에 비해 높았다. 화승총은 습기가 높은 환경이어도 강제적으로 불씨를 갖다 대서 격발을 시킬 수 있지만, 머스킷은 습기 때문에 불발이 날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게다가 화승총을 오래도록 운용해 본 경험이 쌓인 조선군은 습기가 높은 날씨나 폭우가 쏟아질 때에 화승의 불씨를 유지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이를 교육하고 있었으며 방수 장비도 갖추고 있었다. 일례로 이인좌의 난 때, 갑작스런 폭우에 화기가 젖은 바람에 반군은 총기를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방수 비법과 장비를 갖추고 있던 관군은 대포와 총알을 퍼부을 수 있었다.

습기 때문에 불발이 날 경우에는 다시 재발사하면 된다는 의견도 있으나, 1차 중영 전쟁 때 일어난 삼원리 사건을 비롯해 습기와 폭우로 머스킷의 격발이 불가능해져서 총검술로 싸워야 했던 사례가 매우 많았다. 서양 열강들 같은 경우에도 영국 해군 정도나 대포를 플린트락으로 운영하는 정도였고, 그런 영국 해군도 습기 때문에 격발이 안 되면, 즉시 화승을 쓰는 린스톡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준비를 해둘 정도였다.

세 번째, 군부의 보수성이 영향을 미쳤다. 상술한 머스킷의 단점들 때문에 군영에서 머스킷 도입에 난색을 드러낸 것. 비용은 높은데, 장마철엔 무용지물이고 소모품인 부싯돌까지 계속 공급해줘야 한다는 점이 도입 추진 시기의 조선군 군부에겐 부담스러웠던 것이다.[153]

개화기가 되면, 서양의 무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군사 분야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 별기군을 위시한 신식 군대는 서양 무기로 무장하고 서양식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관심과 투자는 민간에도 영향을 주어서 구한말의 조선 포수들은 비록 전장식일지언정, 화승총의 총열에 강선을 새기거나, 화승을 퍼커션 캡으로 대체하여 쓰기 시작했다.

7.3.3. 조선은 수백년간 침략만 당해온 국가이다?

옆동네인 중국인이나 만주족, 몽골인일본인과 비교한다면 그나마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154], 이 세상에 절대 평화적이기만 한 민족은 없다.

한국사, 특히 조선 건국 이후부터 6.25 전쟁까지의 역사를 주로 들먹이며 '수천 년 동안 침공만 당해온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서 이를 또 역으로 해석하여 "한국인은 침략 따윈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이게 자국 혐오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조선은 힘이 약해서 침략만 당했던 나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엔 어폐가 너무 많다.

의복과 같은 고대 문화나 동위도의 다른 민족들과의 평균적인 체격 차이, 유전적 유사성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한국인의 조상은 퉁구스 계통의 북방 민족과 기원을 공유하고, 원래부터 풍요로운 한반도 남부에서 살던 민족이 아니라 요동, 만주, 몽골 고원 등 북방 어딘가의 척박한 곳에서 남하해 이주한 민족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한데 농경민족(정주민족)을 대상으로 이 과정에서 정복과 전쟁은 당연히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척박한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민족의 호전성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된다. 적은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기에 살아남아서 자손을 남기려면 무를 숭상할 수밖에 없고, 농사가 잘 되지 않으니 유목을 하게 되는데 사나운 짐승들을 관리하려면 자신들도 짐승만큼 사나워져야 한다.

건국 초기의 고구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통념과는 달리 고구려가 모든 경제를 전쟁과 약탈에 의존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복을 통해 본격적인 농경지를 얻기 전까지는 바이킹처럼 포악한 민족성을 기반으로 약탈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고구려는 중국이 오호십육국으로 분열된 틈을 타 시도때도 없이 한족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갔고, 고구려의 최종적인 목표는 중국을 분할한 이민족들처럼 언젠가 풍요로운 중원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사 삼국지 등의 기록에서는 이를 보고 고구려는 짐승 같은 놈들이고 누군가를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는 방법 말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때문에 하도 고구려에게 시달린 중국은 예로부터 한민족이 항상 뒤통수에 칼을 겨누고 있다고 생각했고, 기를 써서 정복하려 들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군대를 데려와도 지칠줄 모르는 저항이 뒤를 이었고, 중국의 한국 정복은 결국 실패로 점철된 역사가 되어버렸다.[155]

결국 한국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한 건 정주민족 한족이 아니라, 한민족이 이미 삼국시대를 지나 완전한 농경민족의 기질만 남은 후에 침략해온 이민족 몽골 제국만주족뿐이었다. 그마저도 만주족은 자신들에게 내성이 없는 전염병과 한국이 가진 저항의 역사를 무시하지 못하고 직할령 편입은 포기하고 제후국으로 삼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흔히 삼국의 전쟁은 한국사라는 생각에 서로 간의 전쟁은 단순 내전 수준으로 인식해서 삼국의 전쟁 자체를 축소하는 경향이 많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나라였고[156] 이들이 정말 내전이 아니라 정복을 목적으로 한세기도 쉬지않고 치고받고 싸웠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고구려는 통치력의 한계로 남부의 특히 신라의 영향력만 확보하고 중국으로의 진출이 중심이였으며, 백제는 자신들의 전쟁에 왜국을 자주 동원했는데, 백제의 침략전쟁 스케일을 보면 최소 이 시절부터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걸 알수있다. 그 대상이 단지 근처의 신라, 고구려 였을 뿐이다. 거기에 일본은 백제가 멸망했음에도 동원되었다.[157] 신라의 경우 삼년산성 이라는 정말 요새 건축의 관습과 양심을 팔아먹은 듯한 요새를 짓기도 했으며, 나당전쟁도 물론 당나라가 빌미를 제공했지만 신라가 선제공격해서 일어났고, 관군은 아니지만 신라 해적 신라구쓰시마 섬과 강성할 때는 일본 본토 후쿠오카, 구마모토 지역까지 유린했다.

이러한 한국인의 호전성은 적어도 고려와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다. 고려는 요나라가 친하게 지내자고 하자 선물로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이는 것으로 응수했고[158], 이후 요나라와 치른 전쟁에서 승리하자 고려 사신들은 요나라에 파견을 갈 때마다 행패를 부리며 승전국 행세를 했다.[159] 고려는 원나라에게 정복당하는 바람에 속령이 되기도 했으나, 일단은 큰 간섭을 받되 왕(고려인과 몽골인의 혼혈이지만)도 세우고 어느 정도 자치를 하면서 힘을 아끼다가 원말명초의 혼란기가 도래하자 공민왕은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또 중국에 칼을 꽂았다.

비록 중국의 혼란기가 너무 빠르게 끝나는 바람에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그외에도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 요동을 길게 점유하지는 못했지만, 신생국 조선도 초기에는 호시탐탐 요동을 노렸다. 주원장이 이런 조선의 태도에 학을 떼며 요동에서 손을 떼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조선이 겁을 먹을 거라 생각했던 주원장의 생각과 달리 이성계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은 당장 쳐들어가 명나라를 처부수고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했다.[160]

조선이 여진족을 상대로 마구 전쟁을 벌여 영토를 빼앗은 건 유명한 일이고, 청나라에게 패배하자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했다. 한국이 완전히 쇠락해 전투력을 상실했을 때에도 전투종족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현실적으로 약소국 위치에 있었음 에도, 다른 아시아의 약소국들이 자국을 지키는 데에만 전념하거나 실패해 식민지가 되는 와중에도 일본처럼 힘을 길러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려고 했고, 실제로 청나라가 쇠락해지자 간도로 군대를 보내면서 외부에 힘을 투사하기도 했으며, 약소국 이라는 주장과 달리 다른 열강국들이 기회를 주기도 했지만, 내부 사정으로 인해 그런 기회들을 잡지 못했다.

대략적인 역사를 종합해 보면, 결과적으로 한국은 자신이 현재 가진 힘과는 관계 없이 일단 수틀리면 싸움부터 걸고 보는 전형적인 전투민족이었다. 자신이 더 강할 때는 더 강하니까 싸움을 걸고, 더 약할 때는 상대가 강하다고 으스대는 게 꼴보기 싫다고 싸움을 걸었다.[161]

한국인이 정말 평화주의 민족이었으면 진작에 한족에게 흡수당한 만주족처럼 됐을테니 살아남아도 단일민족이란 말은 못 꺼낸다. 이미 10세기 무렵에 인구 1억을 찍었던 중국 송나라도 약한 국방력 때문에 요나라, 금나라, 서하 등에 침공만 당하다 무너졌다. 즉,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영토도 광대한 나라라도 침공만 당하다가는 끝내 멸망하고 만다. 현대까지 문화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력이 보장되어야 하며, 전근대 시대에는 자국 방어를 위해서 주변의 약소국을 상대로 예방전쟁이 많았다.

한반도가 지정학상으로 주변 나라의 이민족으로부터의 침입을 당하기에도 적당한 데다가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랬던 건 맞긴 하지만 반대의 경우로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명분과 분쟁 거리를 제공한 것도 맞다. 외교 기록을 보면, 한반도 내 국가들은 물론 한반도 밖의 국가들과도 심각할 정도로 처참한 외교로 마찰을 일으키고 다닌 국가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비교적 원나라청나라, 일본에 굴복당한 역사가 강조되는건 그쪽 기록이 더 상세하기 때문이고, 지속적인 노출효과 때문에 더 큰일처럼 부각되었을 뿐이기도 하다.

참고로 고려/조선 때도 중국 쪽으로 침략할 생각이 있었긴 했으나 그 동네가 워낙에 세력이 큰 탓에 실현시키진 못하고 사대주의로 바뀌어 조용히 지냈을 뿐이다. 물론 초기 조선은 명나라와 사이가 좋았던 게 아니다. 명나라도 그렇게 좋게 보는 편도 아니었고, 이 당시에는 조선이든 명나라든 서로 진짜로 한판 해보려던 시도 역시 존재하고, 시도 수준으로 그친 것도 막상 공격이 시작되면 조선이든 명나라든 둘다 국력이 박살 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덕분에 태조 대에 황실 결혼을 하려던 시도가 있기도 했다.[162]

또한 세종 시대, 조선 정부에서는 서역의 무슬림과 어쩌다 흘러들어온 다민족들을 조선인으로 동화 시킬 정도로 강력한 동화정책을 펼쳐 다민족 전체를 흡수하는데 성공 했을 정도로 꽤 잘돌아가는 편이기도 했기에 만일 조선이 근대화를 일찍이 성공시키고 강력한 국가를 갖추었다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쳐들어가서 일제 처럼 동화주의를 시도하지 않을 거라고 전혀 장담을 못 한다. 실제로 약해진 청나라를 보고 만주를 합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군사 행동에 옮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1901년부터 1904년까지 꾸준히 있었던 '대한제국의 만주 침공(Korean invasion of Manchuria)'이다. 이는 1899년부터 1901년에 있었던 의화단 운동으로 청군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월경하여 약탈하면서 대한제국의 국방비에 한해 예산의 40%를 투자하는 군비 증강을 하였고 이를 막아낸 뒤 만주로 반격한 것이었다. 이는 1800년대 중반부터 있었던 외교적 성격의 간도분쟁의 무력충돌로 일본이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뒤 1909년 간도조약에서 청에게서 철도 부설권을 얻은 대가로 간도에 대한 권리를 청에게 넘기면서 종료되었다. 당시 신병기로 무장한 대한제국군은 5천여 명의 병력으로 전투력이 떨어졌던 2만여 명의 청군을 간단히 처부수고 간도 일대를 무력으로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크고작은 학살과 약탈이 일어났고, 포로로 잡힌 청군들도 그다지 좋은 꼴을 보진 못했다는 기록도 다수 남아있다.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 동서양 막론하고 어떤 국가든 자기가 힘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극단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나면 주변국을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조선말-대한제국 시대 자체도 늦은 근대화와 준비가 덜 된 군사력이라는 현실에 눌려 프랑스러시아에 줄을 서는 행보를 보였을 뿐, 실상은 제국주의에 관심을 보여서 이곳 저곳에 외교적 행보를 이어가다 보니 프로이센 왕국에 꽂히기도 했다. 열강의 개입 당시 러시아가 조선도 청나라에 개입하기를 원하기도 했으며. 비록 군사가 부족하고, 군사 장비의 숫자도 부족했지만, 아시아 국가 치곤 군사 장비의 수준은 상위권에 속한 편 이었다.[163] 청나라의 약체화가 가속되고, 군사적 우위를 달성하자마자 만주로 진출해서 전투를 벌이고 간단하게 승리 했다.[164]

현대로 넘어오면 북한은 경제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핵무기를 만들고, 남한은 평소 포방부 소리를 들을만큼 화력에 관심이 많고 처음의 온갖 제약들이 서서히 해제되면서 유사 핵무기를 만든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화력 강화에 몰두하고 있다.

애초에 특히나 서유럽 국가들이 인권 문제를 들어 기술적 우위를 약점 잡아 특정 무기를 특정 국가에 판매하는것을 제한하거나 불허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은 속된 말로 돈만 입금해 주면, 미국이 민감해하는 것만 아니면, 적성 국가만 아니면 가성비 좋은 무기를 꺼리낌 없이 판매하는 데서 죽음의 상인 이라는 별명이 생긴 만큼 절대 평화주의란 말을 쓸 수가 없다.

반대로 한민족, 한국인의 성향은 호전적 성향 혹은 군국주의 성향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는 민족적 근본일 만큼 상당히 오래되었고, 근현대에 수난의 역사가 길었던 탓에 그 성향이 더욱 짙어진 상태라 봐도 이상하진 않다. 외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 한국인은 군사력 증강을 한다고 하면 찬성하면 했지 비판이나, 반대는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인다.[165] 현대 한국인들에겐 "그게 무슨 소리냐"라며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제3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존재, 경직된 정치계, 후술할 남한 사회에 있는 극단적 집단주의의 부작용들, 높은 징집률의 가혹한 징병제민주주의 국가치고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문민통제[166], 과거 교련의 영향을 받은 교육방식[167],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으로서의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168]의 존재 때문에 자주 언급된다.

물론 상당수는 일본 제국군국주의에서 배워온 것들이지만, 모든 게 전부 일본 제국의 탓이고 한국인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며 그 이전의 길고 긴 한국사 속에서 한국인들이 보였던 폭력성이 지금의 한국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일본 제국에 복속되기 이전 대한제국부터가 제국주의에 큰 관심을 보였고[169] 프로이센식 군대를 벤치마킹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한 군국주의 성향을 다분하게 드러냈다. 일본 제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도 대한제국 역시 군국, 제국화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입각하여 현재는 무작정 한국인을 두고 평화의 민족이라 주창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한국인은 평화적인 민족이며 중국과 일본, 서양 열강들의 폭력성에 유린당한 피해자'라는 국수주의, 자기연민에 찌든 주장을 하기도 하며 이는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다.

7.4. 조선은 군약신강의 나라이며 그래서 국가가 허약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조선은 한국사의 역대 왕조 중에서도 왕권이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당장 지방 모든 군현에 수령관을 파견한 것은 조선의 왕권을 보여주는 셈이다. 다만 조선의 군주와 사대부의 관계는 이렇게 일방적인 주종관계가 아니었고, 여러가지 견제 장치가 갖춰져 있었기에 이런 오해를 산 것이다. 또한 당시에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이고 황제권을 구사한 중국의 명청시대[170]가 있기 때문에 조선의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일 뿐이다. 조선을 중국 이외의 국가와 비교하면, 왕권이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국력과 왕권의 관계는 이렇게 단순하게 연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군약신강 문서 참조.

7.5. 모든 계층에서 성리학적 예법과 사상을 따랐다?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이 강화되고 칠거지악, 출가외인 등 예적 제약이 형성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허나 위 항목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주로 양반들에게 해당되던 내용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인식은 "양반과 평민의 입장차이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다." 실제론 계층마다 제약의 종류와 수준이 달랐으며,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고위층은 강력한 규칙과 예가 있는 반면, 평민은 상대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입장이었다.

흔히 조선여성의 권리를 낮게 만들었다고 하는 "남녀칠세부동석, 출가외인, 남존여비, 칠거지악, 지조와 절개, 삼종지도[171], 외출•노출 금지" 등은 민간이 아닌 "양반의 성리학"이었다. 평민•천민 계층에겐 그 관념이 없거나 미약하던, 귀족들의 예법과 정신적 가치였단 소리다. 이 외에도 부부유별, 신체발부수지부모[172]와 같은 사상들도 신분에 따라서 그 유무가 갈렸다.

물론 성리학을 기초로 한 조선시대 특성상 일반적인 백성들도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은 평민들에게도 성리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법이 적용되어, 성차별이 법적으로 명백하게 있었고, 서당의 보급과 함께 소학의 교육이 증가하며, 성리학의 예의범절이 전파되었기에, 여러 가지 성리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였다. 허나 위에서 서술했듯이, 각 계층마다 살아가는 환경이 달랐던 만큼 그 형태와 깊이엔 차이가 있었다. 정말 양반과 동일한 수준의 성리학을 따랐다면, 철저히 몸을 감춰야하고, 방에 갇혀 남성을 멀리하며, 지조와 절개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옷을 입은 듯 만 듯 밖에 돌아다니고, 음담패설과 성 관계 쪽에서 개방적이며,[173] 연애, 외출, 축제 등 남녀간의 접촉이 흔하게 일어났던 당시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쉽게 말해, 유교란 거대한 틀 안에서 "직접적인 예법으로 이루어진 사대부의 성리학" 그리고 "간접적인 법률로 이루어진 민간의 성리학" 정도로 구분되었다고 보면 된다.

성리학적 입장을 제외하곤, 평민들의 차별은 주로 "남자는 힘, 여자는 섬세함" 정도였을 뿐, 뚜렷하게 구분된 경계는 없었다. 전쟁, 스포츠처럼 힘을 중요시하는 것 외에 요리[174], 꽃꽂이, 독서, 조각, 그림, 연주, 노래와 등 웬만한 문화들을 서로가 공유하며 즐겼다. 나중엔 사대부와 같은 지배층들을 까는 문화가 생겨나고, 기존의 다 함께 노는 문화가 맞물리면서 더욱 활발해진다. 실제로 민간에서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개념이 강해진 것은 20세기 즈음에 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조선보단 대한민국 초창기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

7.5.1. 성리학은 양반만의 것?

조선은 위에서 말했듯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삼은 이상 백성들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양반의 율법이 평민에게 모두 적용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향이 아예 없지도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후기와 달리 조금의 유연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조선은 건국 시점부터 태조가 불교를 탄압하며 성리학자 정도전이 국가의 초안을 만들었고 성리학을 국가의 기강으로 삼으며 만들어진 나라다. 성리학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질 때 이렇게 보수적인 학문은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더 보수적으로 변질되었고,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조선 상황에 맞게 변하였다[175].

7.5.2. 계층마다의 삶

신분사회였던 조선은 각 계층마다의 모습이 매우 달랐다. 더욱이 고위층이던 양반과 하위층이던 평민들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서로 반대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같은 문화, 사상적 차이는 성리학적 관념과 유교가 영향을 주어 그 거리가 큰 편이다.
7.5.2.1. 평민사회
요즘 사나운 여편네를 둔 집안은 여럿 있어도
남편이 권세를 쥐고있는 집안은 열에 한둘도 안되는 듯 싶다.
아내에게 눌려 기를 못 펴고 사는 사내들이 많아 기강이 흐트러질까 걱정되지만
그런데 보다보면 그런 집의 살림이 관리가 더 잘 되긴 하더라
중국 남부의 여자들은 온순하고 북부는 거칠다 했는데
우리나라가 지리적으로 북부에 붙어 그 기를 받고 있으니 여자들이 매서운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 -
조선의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거칠고 폭력적이다.
생활력이 매우 강해 산처럼 쌓인 업무가 눈 깜짝할 새 사라져 있었다.
또 허영심이 강해 돈을 낭비하며 먹고 꾸미기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는 남녀가 많았다.
- 구한말(19세기) 선교사들의 기록 -

집안 사정이나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다. 당시 여성들도 어느 정도의 사회생활을 하였고, 구한말 남성들 사이엔 마누라를 두고 "곳간주인"이란 별명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가정에선 그 권리가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화폐가 쓰였다곤 해도 면포의 지위는 그대로여서 남성의 생산성과 여성의 생산성은 서로에게 중요했다. 노동력이 중시되던 사회라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것은 맞았지만, 여성도 엄연한 노동력에 속했기에, 양반처럼 집 안에만 가두면서 예법으로 차별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익과 선교사의 주장들도 비교적 과장된 면이 없진 않겠지만 그만큼 여성들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때론 자신이 위가 되기도 했다는 것, 과거사회의 여성이 전반적으로 남성보다 밑이었지만, 흔히 생각하는 남성의 말에 무조건 일방적으로 순종하고 폭력을 당하는 이미지가 아닌, 서로 큰소리로 욕하고 때론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이 더 많았다고 한다.

노동도 서로의 역할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공통으로 하는 일이 없던 것도 아니다. 농사와 육아, 요리, 청소, 빨래, 설거지처럼 서로가 도우면서 생활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었다.[176]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리학이 심화되어 여러 제약이 만들어지고, 19세기 말기쯤 되면 백성들 스스로가 이를 따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백성의 삶에 큰 변화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한국인이 흔히 아는 가부장제보다 분업으로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은, 근대화로 인해 산업기반이 180도 달라지기 전까지 오래도록 유지되었었다.

물론 당시에도 여성을 학대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를 떠나 여성의 권리가 높다던 삼국시대고려 시대에도 남존여비는 깔려 있었으며, 현대에도 알게 모르게 그 차이는 존재한다. 가령, 왕실 한정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했다거나, 고려 말에 문하시중이 일부다처제를 일반 백성들에게도 허용하자고 왕에게 건의했다가 백주대낮에 길바닥에서 빡친 여자들에게 처맞았다는 등의 기록을 보면 생각보다 여성의 권리가 높은 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조선 시대에 와서야 일부다처제가 엄금되고, 지적 장애가 있던 부인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던 퇴계 이황의 사례와 같이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축첩도 마음대로 못할 정도여서, 이 시기에 외려 여성의 지위가 꽤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는 부인인 신사임당이 죽은 뒤에 첩을 뒀다가 자식들을 대노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이이의 경우는 아예 아버지와 절연하겠다며 절간으로 들어가서 승려가 되겠다며 소동을 일으켰을 정도로, 이 시기에 지 꼴리는 데로 첩을 들였다가는 세간의 질타를 받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개무시당할 수 있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괜히 있던 게 아니다.[177]
7.5.2.2. 양반사회
여기서부턴 우리가 조선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자주 보인다. 그럴만도 한 것이, 교과서실록처럼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료들은 대부분 이 계층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에 유교와 성리학이 유입되었고, 나중에 조선이 건국되면서 부패했던 기존의 불교를 밀어내고자 숭유억불을 시행하면서, 유교가 국가의 새로운 기틀로 자리잡게 된다. 이 때문에 지배층이던 사대부들 또한 이러한 성리학적 질서에 직접적으로 편입되어, 우리가 아는 양반의 이미지가 형성되게 된다. 성차별적 정신세계와 보수적 태도,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고 늘어나는 제약들. 이 모두를 사대부들은 온전히 따랐을 것 같지만 실제론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이를 벗어나곤 했다.

이들은 남녀칠세부동석에 따라 남녀의 구분을 "집 안"과 "집 밖"으로서 철저히 교육시켜서 차등을 두었고, 일반 백성들의 몇 배나 되는 시간을 성리학에 투자하여, 강한 보수성을 띄었다. 그 때문에 여성은 "아이를 잘 돌보고 지아비를 잘 섬기는 것", 남성은 "교육을 받고 나라에서 큰 일을 하는 것"으로 한정되면서 실권을 잡은 남성의 가부장제가 주를 이루었다.[178] 결국 외출과 같은 여러 사회적 활동들이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면서, 양반여성의 권리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더욱이 3대 안에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 양반 취급도 잘 안 해주던 조선시대였기에(양천제가 베이스였던 전기에는 이 기준이 엄격했고, 양반이 통혼으로 서로 얽힌 신분으로 고착되면서 반상제로 바뀌어가던 중후기에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집안 여성들을 포함한 온 가족이 양반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냐 못 받냐 여부가 남성들의 과거합격 여부에 달려있었으니.

이와 더불어 조선 후기에는 제사의 형식이 바뀌면서 장자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일이 나타났고, 딸은 외출과 관련된 제약에 의해 친가에 자주 들를 수도 없어서, 재산 배분에서 불리한 입장이었으며 출가외인이 생기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 때문에 남아선호사상이 가장 강한 계층이었으며,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주체가 되는 계층이었다.[179]
7.5.2.3. 평민과 양반의 차이

평민들이 아예 무시하고 행하여 제약을 무실화하는 성격이라면, 양반은 어느 정도 따라가다가 뒤로 몰래 피해가는 성격으로서,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바보들은 아니었다. 가령, 결혼 시에 정치적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면, 양반가에서도 그냥 연애결혼을 하기도 했다. 다만, 이런 경우라도 양반가에서는 체면 때문에 연애결혼조차도 형식적으로는 정략결혼의 형태는 갖춰서 했고, 이를 위해 정략혼의 상대에 대한 정보를 고의로 자녀에게 흘려서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180].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다 똑같았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실세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연애결혼을 허가한 것이나, 하급 무사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역시 다이묘의 가신의 양녀였던 자신의 정실부인인 네네와 연애결혼을 한 것, 그리고 현대의 튀르키예에서 딸 가진 부모들이 자기들이 알아봐준 신랑감에게 커피 대접을 하게 하고 그 반응에 따라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풍습[181]이 있는 것이 그 예다.

그리고, 조선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신분제도가 상당히 유연했던지라[182], 종종 부유한 평민과 양반이 혼인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183], 그런 경우는 무조건 양반끼리의 결혼일 때처럼 정략결혼이나 중매혼으로 치렀다. 주로 중국이나 일본 등의 외국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이나, 외교 사절의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 집안이 하급 관료 집안과 혼인을 종종 하는 편이었는데, 대부분은 양반 쪽이 경제력이 후달린 탓이 컸다. 양반은 맞는데 명문가도 아니고, 과거 급제를 통해 막 양반 신분을 얻은 사람이라서 고위 관료의 자제와 혼인을 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니, 아쉬운대로 그나마 급이 맞는 평민과 혼인을 한 것이다.

이것도 동서양 공통으로 있던 일인데, 20세기 영국귀족들이 미국의 부유한 재벌 집안의 자녀와 정략결혼을 자주했던 것이 그 예다[184] 실제로 영국의 전 총리인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인 제니 제롬은 미국 월가의 부유한 금융인 레너드 윌터 제롬의 딸이었고, 처칠의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은 영국의 명문 귀족 가문인 말버러 공작의 후손이다[185]. 게다가 신분 차이를 씹어먹을 정도로 엄청난 갑부라면, 아예 왕족과 결혼하는 일도 있었다. 희빈 장씨가 그 예로, 그녀의 집안이 역관 출신으로 조선 팔도에서도 알아주는 거부였어서, 명문가인 여흥 민씨 출신인 인현왕후에게도 밀리지 않고 기싸움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숙종의 총애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그 정도의 뒷배경이 있었으니 대등하게 알력싸움이 가능했던 면도 있다[186]. 이것도 동서양 공통으로, 유럽에서는 중세기 최고의 갑부 집안 중의 하나인 메디치 가문의 딸들이 대대로 프랑스 왕실에 시집을 갔으며[187], 현 일본천황나루히토의 황후인 마사코 황후도 부유한 기업인의 딸이었다.

8. 조선의 사회

8.1. 조선은 보수적 태도 때문에 교통이 엉망이었다?

조선이 길을 닦는 것은 오랑캐만 편하게 한다, 상업을 촉진시켜 농업의 몰락을 부추긴다고 여겨 길을 닦지 않았다는 점이 자주 언급된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조선의 교통이 딱히 엉망이라고 보기 어렵다. 중국이나 유럽이야 평야가 넓고 인구도 많으니 포장도로가 생길 수 있었다지만, 이들 역시 수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회였다. 여기도 수운이 육로보다 싸게 먹히는 건 매한가지라서, 독일킬 운하러시아볼가-돈 운하, 중국대운하같은 운하들이 전근대시대부터 대거 건설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그 악명높은 라스푸티차때문에 평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운하 등을 이용한 수운의 중요도가 크다. 제정 시절부터 부동항 확보에 집착한 이유가 이것이다. 국토 대부분이 산지에 중국이나 서유럽처럼 많은 인구를 둔 것도 아닌 조선은 당연히 수운을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중국이야 평야가 넓고 인구도 많으니 포장도로가 생길 수 있었다지만,[188] 국토 대부분이 산지에 특별히 많은 인구를 둔 것도 아닌 조선이었다. 웬만한 평지들은 폭증한 인구 때문에 꽉 차 있었기에 수레 기술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산을 넘어서 가야 되니 지게를 애용했다.[189] 물론 수레를 끌거나 사람이 타고갈 말이 부족한 것도 있었다. 사실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중국도 말이 부족했기에, 조선과 비슷하게 등짐이나 인력거를 이용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에 터널을 뚫는 기술따윈 없었을 테니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던 것이다.

해상로를 개척하여 항구를 설치하고 다녔으니[190], 굳이 돈 써가며 흙 길을 닦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과 더불어, 한반도의 엄청난 연교차와 강수량 등등까지 고려하면 전근대에 제대로 된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하기란 처음부터 대단히 어려웠다. 육로는 도시의 도로, 팔도를 연결하는 대로, 국가의 주도로 만들어진 돌다리를 제외하곤 사람들의 순수한 발길과 노력으로 형성됐다.

이는 동시대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도 이 엄청나게 많아서 그만큼 길을 낼 만한 평지가 부족했고, 게다가 반도 국가인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섬나라라서 육로 운송에만 의존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일본 역시 해로를 이용한 운송이 활발했는데, 오죽하면 사카모토 료마가 설립한, 일본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해원대도 해운회사였을 정도다.[191]

현재에도 ~나루가 붙는 지명과 포(浦)나 진(津)으로 끝나는 지명이 있다면 옛날에 수운을 통해서 거쳐가던 나루터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영등포, 제물포, 노량진 등이 있다. 또한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한 곳까지 나루터가 빽빽히 들어찼으니 조선의 교통망은 짜임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몇몇은 조선 후기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수레를 이용할 수 없어 물자 운송량의 한계와 내륙 지방의 자급자족의 문제가 생기고, 이로 인해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현재 주류 사학계에서는 실학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현실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깎아내렸다고도 평하며, 실학자의 현실 인식이 당대 성리학자보다 못했다거나[192], 실학의 존재에도 의구심을 가지는 시각도 나타난다. 실제로 조선 실학의 금자탑으로 여겨지는 수원 화성만 해도 조선 실정에는 전혀 맞지 않는 벽돌성 방식을 추진했다가 천만다행으로 포기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이처럼 실학자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봐야 할 것이다.[193]

조선과 비슷한 연대의 동시기의 다른 지역을 살펴보면 19세기 이전에는 유럽중국, 일본 역시 수운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경제였으니[194]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도 조선의 교통 상황을 안 좋게 깎아내릴 여지는 없다.

세금을 수운으로 운송한 것 역시 육로보다 비용이 훨씬 덜 들었으므로 백성의 부담 측면을 덜어준다는 측면에서도 수운이 더 좋은 선택지이다. 무엇보다 영국의 산업혁명 전까지는 도로나 다리를 만드는 토목공사는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산을 깍고 다리를 만드는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과 자원을 마련하려면 백성들을 징발하고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데 당시 한정된 식량과 자원을 생산하는 농업경제체계에서는 백성들 민생에 치명타였고, 이런 토목공사가 장기화되면 반란의 원인이 되어 국가가 전복되는 경우도 많았기에 당시 조정입장에서도 백성들 입장에서도 대규모 토목공사에 따른 도로 건설은 양쪽다 파멸로 가는 길이었다. 소규모로 국지적으로 길을 닦는 것은 어찌저찌 시도는 가능하지만 특유의 기후와 환경, 인프라 미비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무리한 토목공사로 나라의 재정이 파탄나고 민심이 폭락한 예시를 들자면 개로왕은 토목공사로 인한 민심이반 끝에 고구려의 침공을 막지 못해 목이 잘렸고, 중립외교로 유명한 광해군도 대규모 궁궐 공사를 자주하는 바람에 폐위된 것이다.수양제가 폭군으로 기록된 이유도 고수전쟁 패배나 골육상쟁이 아니라 대규모 운하와 도로공사로 재정을 파탄내고 백성들 노동력을 가혹하게 착취한 탓이 크다.[195] 아예 백성들로부터 크나큰 인망을 얻었던 유비 역시 입촉 이후에 새로 얻은 영지인 익주의 방위를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실시하자, 조조가 이 틈을 타서 익주 침공에 나서려는 시도를 했다가 포기한 것도, 문제의 공사로 인해 백성들을 대거 징용한 것때문에 현지의 민심이 악화되었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게다가 한때 그 유비의 사형으로서 몸을 의탁했던 공손찬은 최후의 보루인 역경루를 건설하느라고 가렴주구를 일삼은 탓에,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유비는 물론, 뒷날 충의의 대명사로 널리 추앙받은 조운까지 그를 배신하고 버렸을 정도로 큰 패착이 되었다.

8.2. 조선은 전적인 폐쇄 사회?

조선에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시행했을 때는 조선 후기, 척화비 세웠을 때에만 한정된다.[196] 동시기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적기는 하나 안 한것은 아니다.

삼국 시대, 통일 신라 및 남북국 시대, 고려 시대만큼 해외와 개방적인 무역까진 아니었을 뿐[197][198], 조선 초기의 경우 쌀, 목재, 향신료 등의 자원들을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한 적도 있었다. 물론 분명히 해외와의 무역이 다소 제한적이고 교류를 하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무역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류큐 왕국과도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으며, 류큐를 통해서 일본의 정세를 알아보기도 했다.

특히 명나라나 청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간혹 명나라, 청나라의 소수 민족들과도 무역을 한 적도 있었고 한어, 만주어와 더불어 몽골어 교과서도 있었다. 애초에 세계 경제의 핵심으로 수백 년 동안 군림한 명 · 청 왕조와 장기간에 걸쳐 교류한 조선을 보고 폐쇄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전세계에서 생산하는 은의 상당 부분을 먹어 치우고 인도와 더불어 세계 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중국과 수백 년 동안 교류했으니 조선도 간접적으로나마 세계 경제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무역은 아니지만 얀 야너스 벨테브레의 경우처럼 총포 기술을 개량한 서양인도 있었다. 그 외 표류를 했거나 어쩌다가 조선에 잠시 들른 해외 외국인들, 일부 선교사들과의 밀무역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학, 건축 등 일부분 서양의 기술도 받아들이기도 했다. 수원 화성만 해도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서양식 기술의 영향도 받아들여 만들어졌다. 그 외 조선 초기의 과학에서도 이슬람권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오히려 서구권과 교류하는데 조선보다 더 유리한 측면이 있던 중국이나 일본도 한때 쇄국정책을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시마바라의 난과 같은 자국 내 가톨릭 신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핑계삼아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서양 국가와 단교를 선언한 에도 막부의 사례가 있다.[199] 중국의 경우는 아편 전쟁 직전까지 광저우마카오 두 곳을 통한 서구권과의 제한적인 무역만 행했던 청나라의 사례가 있다[200].

산업혁명 이전 전근대 국제교역에서 중국의 위상이란 현대 미국과 중국을 합쳐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무시한 것이었고, 절대적 무역흑자국인 중국과의 교역은 막대한 귀금속 유출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유럽은 이 무역적자를 벌충하기 위해 식민지를 가혹하게 쥐어짜내야 했고, 일본도 이와미 은광의 채굴량이 감소하자 반출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며 왜은에 재정을 상당부분 의지하던 조선을 곤란하게 했다. 사실 일각에서 조선을 까는 빌미로 끌어들이는 은광 통제야말로 중일간의 중개무역으로 왜은이 유입되니 국내 은광을 개발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 이후에는 단순 귀금속 거래가 아니라 홍삼이라는 교역품목을 개발해 이를 대체했으니 오히려 아편 따위로 적자를 벌충하려 든 영국보다도 한 수 위라고 할 만하다.

또한 조선의 덜 개방적이거나 더 보수적인 성향이 외교에도 영향을 끼쳐 임진왜란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임진왜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소리다. 애초에 히데요시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명나라였고 강화협상의 주된 요구도 명으로부터의 책봉과 감합무역의 부활이었다. 거기서 조선은 명 침공을 위한 사전 제압 대상 정도로 여겨졌을 뿐이다. 물론 조선 말기 일제의 침략을 받은 경우 보수적 외교 성향이 영향을 미친 건 일부 맞을 수도 있겠으나 이 역시 단순히 조선이 보수적이기만 해서 망했다고 보긴 어렵다. 조선 멸망의 책임은 엄연히 일제에게 있었다.

8.3. 존재하지 않던 악습



백정각시놀이, 씨받이, 고려장 문서들을 참조.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악습들을 가지고 대중들이 조선을 오해하고 비난하는 경우가 꽤나 많은 편이다. 특히 백정각시놀이씨받이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에서 8.15 광복 이후에나 기록이 나오기 시작하므로, 한국인을 비하하고자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날조한 것이거나, 일제 강점기라는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기에 나타난 특수한 사례로 추정된다.

우선 백정각시놀이개화기에서 일제 강점기를 그 배경으로 한 소설인 토지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이 소설의 작가인 박경리가 집필을 시작한 건 1969년부터의 일이다. 또 씨받이 풍습은 실제로 일부 시골 지역에서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이승만 정권 시기라서, 이게 조선시대부터 있어왔던 악습일 리는 없다는 게 중론이다.[201] 고려장도 그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서나 처음 만들어졌으며, 경신대기근 등의 재난 상황에서의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이다.[202]

역시 한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의 하나인 여말선초 시기에도 유력자들 한정으로 고향에 있는 본처와는 별개로, 출세한 후에 수도인 개경에서 중앙의 실권자들의 딸들을 후처로 맞는 일종의 일부다처제가 성행했으나[203], 사회가 안정된 세종대왕의 치세 이후로는 이런 풍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니, 상술한 세 악습도 극한 상황에서나 벌어진 일시적인 행위이고, 이게 고정된 악습으로 발전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8.4. 북한과의 비교?

분단 과정의 북한 사정에 관해 좀 더 부연하겠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재인식》에 실린 키무라 미츠히코(大村光彦) 교수의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ㅡ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과 신형기 교수의 <신인간ㅡ해방 직후 북한 문학이 그려낸 동원의 형상>이 정말 좋은 논문들입니다.

키무라 교수의 논문은 북한의 경제체제가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하였습니다만,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시장경제를 정지시키고 공출과 배급으로 상징되는 전시경제체제를 구축합니다. 이 통제경제는 해방 후 남한에서는 곧바로 폐지되어 시장경제가 부활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름만 바꾼채 더 강화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예컨대 공출(供出)이라는 강제수매제는 성출(誠出)로 이름이 바뀝니다만, 내용을 보면 값도 치르지 않고 거두어 가는 경우가 많고 쌀 이외의 다른 작물에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시행한 마을단위의 생산책 임제는 증산돌격대로 이름이 바뀌지요. 공업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 북한의 이 같은 실상을 명확히 하면서 키무라 교수는 과연 북한 민중에게 ‘해방’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너무 당돌한 질문이라 처음에는 좀 어리벙벙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질문이 촌철살인(寸鐵殺人)입니다. 그렇지요. 민중의 일상적 경제생활에 대놓고 물어봅시다. 공출이나 성출이나 그게 그것이지요.

다음은 신형기 교수의 논문입니다. 사회주의적 동원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일반 민중에게 ‘신인간’이란 이상적인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지주, 친일파,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런 것들은 낡은 ‘구인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철저히 일반 민중으로부터 구획되고 배제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사회주의혁명이 요구하는 고된 노동을 감당할 만한 정신적 긴장의 새로운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신인간’의 상징은 항일 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웅, 개선장군 김일성이었습니다. 결국 일제천황을 대신한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습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지는 것을 확인하니 1946년 7월이군요. 대략 그 즈음부터 대량의 ‘구인간’들이 남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전에 이미 100만의 행렬이었습니다. 북한 주민의 1/10이나 되는 큰 인구였습니다. 그보다 더 분단의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웅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 【 대한민국 이야기 】 이영훈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5 천황제를 계승한 수령체제) 출처 “북한은 일제 전시경제체제 그대로 계승했다”

일제강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을 북한에 비유하고 에도 시대제국 시대 일본을 대한민국에 비유하는 말도 안 되는 주장도 있다.[204]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당대 존재했던 모든 국가들이 북한이 되어야 한다. 게다가 북한은 도리어 일빠만큼 조선을 혹평한다. [205][206]

하지만 북한은 조선이 아닌 일본 제국의 전체주의와 군사독재와 훨씬 더 유사하다. 이는 전문가들의 증언과 연구 자료로도 명확히 입증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조선은 전근대 국가였을 뿐 군국주의 국가가 절대 아니었다. 실제로 북한의 권력층은 광복 직후 일본의 천황제를 깊이 있게 연구했다고 한다. 북한은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건국 전부터 천황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김일성의 개인 신격화는 일본 천황제와 유사해 부자 세습이 가능하도록 북한의 국가체제도 만들어 김씨 일가의 세습이 유지된다는 설명이 존재할 정도이다. 북한과 일본의 공통점 알고 보니, 천황제와 수령제 실제로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의 김일평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최고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주민들에게 김부자에 대한 충성과 희생을 강요하는 북한의 주체사상은 오직 천황의 권위 아래 모든 국민이 복종해야 했던 일제의 천황숭배와 제국주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북한과 일제의 유사성으로는 먼저 '천황(天皇)'과 '수령(首領)'이라는 신격화된 인간의 존재라는 매우 큰 공통점이 있다. 이 두 존재는 국가신토(國家神道)와 주체사상이라는 종교적 기반 위에 일사불란한 명령·동원 체제라는 현실정치의 물적 기반이 강고히 결합된 전체주의 체제의 수장이다. 따라서 정교(政敎) 분리가 이루어지던 봉건시대 군주의 지위와 권능을 훨씬 능가하는 절대적 존재다. 국가를 이끌기 위해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인민은 그들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쳐야 한다. 유사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代)를 이어 충성하는 세습제도 역시 동일하다. 군을 핵심기반으로 한 통치 스타일도 일치한다. 천황은 육·해군의 대원수였다.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다. 천황제에 군국주의가 있었다면, 수령제에는 선군(先軍)정치가 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점도 일치한다. 공화국이 아니라는 점에서 두 체제 모두 근대시민과 국민이 없다. 수령님께 충성스러운 조선인민은 천황폐하께 충성스러운 황국신민과 차이가 없다. [아침논단] 북한 수령제는 일본 천황제의 모방품이다

실제로도 오늘의 북은 전근대 국가였던 조선이 아닌 1945년 패전을 앞둔 일본의 처지, 정신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빼닮았다. 일본 천황제가 북의 수령제를 낳았다는 의견이 보수신문에서도 공공연히 나올 정도이다. [동아광장/김충식 칼럼]천황敎徒와 수령信徒 황장엽도 북한의 수령제가 일제의 천황제를 상당 부분 참고해서 태어났다라고 예전에 발언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조선을 북한에 비유하는 게 아니라 북한을 일제에 비유하는 게 훨씬 더 옳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비슷한 일화로도 확인이 가능한데 일본 제국 시절에는 덴노의 어진영(사진)이 덴노 그 자체인 것처럼 숭배시되었다. 심지어는 1940년 쇼와 덴노 시절에는 학교에 불이 나자 교장이 학생들이 아닌 어진영을 구하려고 화염 속으로 그대로 뛰어 들어갔다가 순직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순직한 교장의 행동을 일본정신의 귀감으로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심지어 당시 사망한 교장에게는 "의로운 행동으로 순직한 사람"이라고 표창하는 등 그 행위를 미화함으로써 천황의 신격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룡천역 폭발사고 당시, 불바다가 된 학교에서 김일성김정일의 사진을 구하다 죽은 교사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학생을 구하다 죽은 게 아니라 덴노의 어진영을 구하려다 죽은 일제시절 일본인 교장처럼 똑같이 사진을 구하려다 죽은 것이다. 즉, 일제 시절에 있었던 일이 북한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백두산 3대 장군의 초상화와 일본 천황의 어진영 김정일 부자 사격 표적지 논란 게다가 일본제국에서는 매일 덴노가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는 궁성요배란 것을 강요했는데, 이 역시 북한에서도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나 동상에 절을 하는 형태로 똑같이 이어진다.

전근대 국가인 조선에선 임금의 어진이나 위패를 존귀하게 여기는 예는 있었지만 이런 식의 신격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임금을 상징하는 물건으로서 귀히 여길 뿐이다. 또한 망궐례라 해서 관료들이 임금이 있는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은 있었지만 관료 위주로 행했으며, 매일 하는 게 아니라 새해 첫 날이나 임금의 생일과 같은 매우 특별한 날에만 행했다. 일반 백성들은 강제로 할 필요가 없었고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즉, 전근대 국가인 조선과 비교해도 이런 신격화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북한 미사일 부대에서 10여 년간 복무한 바 있는 탈북자 김춘애 씨는 "북한의 군대에는 상명하달의 명령을 듣는 것 이외에는 의사전달 방식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완전한 위계질서 하에 천황의 권위를 철처히 떠받들던 일본 제국주의의 군대와 흡사한 모습이다. 일본에서는 제국의 신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을 키우고 헌병을 곳곳에 배치하는가 하면, 심지어 특별고등경찰, 약칭 특고라는 비밀경찰집단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특고는 ‘불순분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하고 고문을 일삼았다.

북한 역시 사회안전부가 인민보안성으로 승격하였고 일종의 경찰에 해당하는 안전원과 더불어 경무원[207]들을 배치하여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특히 경무원들에게는 살인 면허가 주어져 항상 따발총을 들고 다닌다. 이 정도면 악명높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경찰에 맞먹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수준이다. 또 모두 알다시피 국가안전보위부라는 KGB 뺨치는 조직을 만들어 반동분자를 수용소나 교화소에 처넣는다.

북한군의 군가에도 일본군의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 발견된다. 일본 군가 ‘천황을 위하여’를 ‘장군님을 위하여’로 가사만 조금 바꾼 북한 군대가 불리고 있다. 다시 말해 대동아 공영을 외치면서 아시아인들의 주권을 짓밟았던 일본군의 군가를 인민을 위한다는 북한군이 그대로 가사만 바꾸어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전속 일본인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의 저서인 ‘김정일의 요리사'에서도 김정일이 주도한 술자리에서 김정일과 그 측근들이 일본 군가를 자주 불러 놀라기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에대해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의 김일평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일성-김정일 체제에 대해 반대하는 무리는 모두 숙청하고 주민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는 북한 사회의 모습은 결국 북한이 청산했다고 주장하는 일제의 잔재가 김일성-김정일 우상화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1차장과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라종일 전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김정일 본인 스스로도 죽기 전에 가장 믿을 만한 측근 열 명에게 “국가 운영은 오늘 여기에 온 당신들이 맡아라.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나라를 운영할 방안을 생각해 보라”며 그 “함께 생각해 보라”며 말한 권력 방식이 일본의 천황제에 가깝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김 위원장이 마치 일본의 천황제와 유사한 제도를 고려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라 교수에게 “그게 될 말인가, 그런 일이 되겠나”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증언마저 존재 할 정도이다. [단독] “김정일, 처음엔 3대 세습 생각 안해 … 천황제 방식 고려”



단, 위의 영상은 선동적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영상의 전제는 주권의 의의를 공동체에 존재하는 여러 모습 중 어떤 것을 외부에 보일지 선택하는 검열에서 찾고 있다. 즉, 공동체 내부의 주체성이 아니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맞추어 공동체의 겉모습을 포장하는 것을 주권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외부시선에 보기에 부적당하다고 판단된 것들은 공동체에서 거세하는 검열을 옹호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반자유주의적 군사독재 치하의 대한민국에서 매우 만연했으며, 오늘날까지 북한에서는 선전도시를 운영하는 등 이것이 여전히 유효하다.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목적으로 주권이 사용된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잠실 및 서울 지역의 달동네들을 밀어버리고 철거민들을 양산한 사례와 최근으로는 G20 환경미화사태를 들 수 있다. 다시 영상의 내용으로 돌아와 분명히 존재했던 조선의 모습을 조선이 주권을 가지고 있었으면 숨겼을 텐데 주권이 없어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상품화되었다는 것은 질 나쁜 프로파간다이자 반자유주의적인 사상의 발로에 불과하다.

8.5. 조선은 반일 국가였으며 그것 때문에 망했다?

현재 한일관계가 격화되자 나오는 주장으로, 조선이 일본을 계속 배척해 무능해졌고 이것이 멸망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조선시대의 유교소중화 사상이 한국 반일감정의 근원이라는 주장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친일 스탠스를 발전으로, 반일 스탠스를 퇴보로 놓는 이분법적인 구조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엄연한 독립국가인 한국의 발전을, 대일관계에서의 멀고 가까움에 종속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 주장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 간의 관계는 외교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일 뿐이며 한일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구한말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가 '반일'의 스탠스를 취했던 것은, 일본이 노골적으로 한국을 종속시키려 시도했기 때문에 이에 맞서 자국 안보를 지키기 위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또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기에 타국과의 외교 관계가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일본이 아닌 서구 열강과의 관계가 차라리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당대 일본 역시 아시아 국가 중 하나로서 서구 문명에서 유래한 많은 것들을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배우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는 와중에도 수많은 유럽인·미국인 학자들을 자국 정부기관에 고문으로 위촉했다. 서구 열강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도 일본 제국은 자신들과 동등한 문명의 선생이 아닌 학생이었으며, 단지 그 중 앞서나간 아시아의 우등생일 뿐이었다.

조선이 '반일 국가'였다는 전제 자체도 사실이 아니다. 근대 이전 조선은 반일을 국가 기조로 삼은 적이 없으며, 일본과의 교류도 적지 않았다. 특히 조선-에도 막부 관계는 백제 멸망 이후 정말 오랜만에 한일관계가 평화롭고 사이좋던 시절이었다. 통신사 파견도 한 예. 오히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반일보다는 반중, 정확히는 반여진, 반 감정이 강했다. 일본계 해적들도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육지를 맞댄 유목민족들을 더 위험시한 것이다. 소중화 사상도 일본보다는 청나라를 타겟으로 한 부분이 크다.[215]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국교를 정상화할 때도 일본측의 형식적 사죄를 받아들이고 무례나 속임수를 알고도 넘어가는 등, 도리어 현재의 한국이나 북한보다도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216][217]

9. 결론

현재 한국 및 북한 사회의 문제점이 전부 조선과 유교에서 나왔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조선 왕조가 멸망하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조선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변형되었으며[218], 사회풍조 및 제도, 지도층들 상당수가 조선과 유교의 영향도 없지는 않지만[219] 일제강점기와 분단에 의한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다. 맹모삼천지교 같은 유학적 주장은 집값 상승 같은 문제를 감내하더라도 직접 실천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아 유교가 아예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고, 일본보다 한국이 20세기 후반까지 동성동본도 금지할 정도로 훨씬 유교적 가족주의가 강한 면은 있다. 때로는 헌법재판소관습헌법의 근거로 경국대전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동성동본 금혼을 폐지한 것도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있었다.

'상놈'과 같은 조선시대의 차별적인 표현,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며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는 조선시대의 주장은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같은 주장까지 극단적인 인터넷 여론에서 '조상의 지혜'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조선, 유학만이 무조건 우월하다는 사상도 문제지만 조선도 사실 양반을 비판하기도 하던 복합적인 사회이기도 하고 분단과 일제의 문제도 동시에 조명하는 노력이 그 문제점을 파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맹목적인 관념으로 심지어 90년대에는 호주제를 유림이 우리 조상의 소중한 문화라고 주장하는 등 맹목적으로 조선시대의 문화는 우월하다는 관념에서 일제의 문화를 옹호하는 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는 삼종지도 같은 조선시대의 갈등을 방관하거나 조장하던 시대이기도 했고, 가족 윤리 부분은 일본의 풍습을 주민들이 굉장히 싫어하여 호주제를 제외하고는 영향이 크게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지도층조차도 유교를 지배 논리로 삼았지, 성선설이나 대동사회 같은 주장은 잘 받아들이지 않아 동학 같은 유학을 부정하는 움직임도 주민 사이에서 있었을 정도다. 천주교도 조선시대에 엄연히 받아들여진 종교고, 개신교도 낮은 신분으로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대안으로 삼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그나마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있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양이나 일본 문화도 사람들이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고, 직업 차별이 적은 풍조와 같은 바람직한 문화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코로나19 같은 부분은 이들보다 우월한 측면도 있었다.

사실 이는 오랫동안 통일 왕조의 교체를 통해 한국의 정사(正史)관념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습관이기도 하다. 조선이 확립되고나서 철저한 전 왕실 고려에 대한 깎아내리기가 있었듯, 1910년 조선이 멸망하고 새로운 한반도의 정권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3.1운동을 기점으로 공화주의의 열망이 생겨났고, 나라가 망했다는 안타까움에 우리가 썩은 조선을 제거하고 새 국가를 세운다라는 일종의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정치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수난, 광복후 벌어진 극심한 국가분열과 분단,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한반도 전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얻었고, 실제로 조선왕조의 멸망후 이전의 왕조처럼 복벽운동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인식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기한 체제는 어떤 사상적 연구나 토의가 있는 그러한 체제가 아니었으며, 생존과 자본, 반공, 기복신앙에 극단적으로 기대는 형태로 나타나면서 어떤 사회철학적 시대정신이나 합의정신으로 나타나는게 어려웠고 그에 대한 비판도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2] 중국, 서양, 일본에 비하면 초라할 수는 있지만 주막 같은 편의 시설은 민간에 많았다. 이를 국가적으로 보면 "객사", "누원" 등 관리와 사신들을 위한 고급 숙박용 건축물들이 따로 존재했다. 물론 민간까지 이러한 고급 숙박시설이 퍼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3] 전근대적 농촌 사회의 활동 시간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실제로는 새벽부터 일하고 낮에 쉰다. 또한 한국에 오래 머무른 선교사나 이자벨라 버드 비숍은 세도정치기 이후 부패로 인해 의욕을 잃은 것이 원인임을 지적했다.[4] 근세 서양만 해도 가정의 오물은 길바닥이나 강에 버려서 처리했다. 인류사회에 도시 위생에 대한 개념이 들어선 건 근대 이후이다.[5] 실제로는 건물 장사, 바닥 장사 모두 했으며 가가(假家)라고 불리는 불법 가판대도 존재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기록에서는 건물 장사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바닥 장사의 이야기들이 주로 적혀있다.[6]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다소 누리끼리한 흰색이 아니라 완벽히 깨끗한 흰색이다. 즉, 당시 오히려 고급 기술인 흰색 염료와 표백 기술을 이용한 염색 옷이었다. 백의민족 참조.[7] 다수의 기록에서 보이는 정보 8번과 대조된다. 이 항목 때문에 당시 외국인의 기록이 신빙성을 의심 받기도 한다. 이는 반만 맞는 기록으로, 어디까지나 케바케였다. 한복/양식 문서를 보면 노출한 사람부터 똑바로 입은 사람까지, 짧은 옷부터 긴 옷까지 다양한 양식의 한복을 입었음을 알 수 있고, 노출도 평민들 입장에서는 큰 거리낌 없는 영역이었다. 조선 후기 양식이 주되지만 현대 양식 또한 이러한 오해를 갖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조선의 양식이 아닌 대한민국의 양식에 가까우며 실제로 거리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던 2차대전 후기 양식이다.[8] 7번과 대조되는 기록이다. 이 또한 반만 맞는 기록이다. 신분이 높거나 필요에 따른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몸을 꽁꽁 싸매어 감출 필요가 떨어졌으므로 장옷 없이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나가고 나아가 편하다는 이유로 가슴 가리개를 내려깐 채 외출하는 사람 또한 영상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9] 동양에서 이름은 윗사람이나 부를 수 있었고, 같은 위치의 사람들끼리 혹은 예의있게 부를 경우엔 별명이나 제2의 이름으로 불렀다. 즉 이름이 있어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굳이 차이라면 남자는 따로 를 붙여도 여자는 자가 없어서 별명이 주로 쓰였다는 차이점이 있다.[10]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오해를 갖고 기존의 사실을 설명하려고 하면서 나온 말이다. 알다시피 장독에 보존 식량들을 쟁여놓고 땅에 묻거나 뒷마당에 보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11] 중국인이 적은 기록인데, 그 양초의 정체는 가래떡이다. 혹은 조선시대의 초는 밀랍이나 경랍으로 만들었는데 조선인들이 이를 먹는 것을 보고 초를 먹는다고 생각했다는 주장도 있다.[12] 브뤼셀의 뒷골목에서 구르던 하층민이었던 롬은 본국에서는 상류층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콩고 자유국에서는 백인으로서 누리는 지위에 취해 스스로가 문명인임을 강조하며 귀족들처럼 회화를 그리거나, 자기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콩고에 대한 문화 연구서를 내기도 했다. 본인은 이에 대해 어떤 전문적 학위도 없는 식민지 방위군의 일개 부사관이었음에도 말이다. 롬의 저서에서는 흑인들이 "짐승"이며 "퇴폐적"이고 "시끄럽다"는 식의 서술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막상 그야말로 자기 관사의 꽃밭을 학살 당한 21명의 흑인들의 두개골로 장식하는 등 온갖 야만적인 행동을 일삼았다.[13] 파우스트 전설에 등장하는 악마이며, '종이로 만들었다'는 말은 가짜라는 뜻이다. 종합하면 '악마 행세를 하지만 그조차도 못 되는 잡놈' 정도의 욕설이 된다.[14] 그마저도 전형적인 궁중 회화라거나, 의의나 특성, 상징을 설명할 뿐, 실질적인 형태와 미적감각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다시피하여 꽤 허술하다. 작품성 있는 사진 자료를 찾기 위해선 시간을 따로 들여야 할 만큼 알맹이 있는 것들은 골목 맛집처럼 숨어있는 게 현실이다.[15] 지금 인터넷에 출가외인, 칠거지악을 검색해보면 단순하게 "집을 나간 딸은 남이다.", "아내를 합법적으로 쫓아내는 항목들이다." 등 매우 간략화된 의미로 표현하기에, 당사자가 일부러 깊게 파고들지 않는 이상 대부분이 오해할 수밖에 없다.[16] 그래서 '평등은 오류다'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17] 마녀사냥에서의 학살과 고문, 산업혁명 당시 하층민의 빈곤, 일본과 유럽 등지의 인신매매와 일본 제국 내부의 인권침해 등.[18] 일본어 위키백과 항목 참조.[19] 7.1 항목 참조, 황옌페이 항목 참조.[20] 사실 조선 사대부들이 고려를 폄하하거나 근대 역사가들이 중세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과장하듯이, 왕조나 정권 교체 이후 이전 왕조나 정권을 폄하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떠나서 매우 흔한 일이었다. 자신들이 새로 만든 체제의 우월성을 부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21] 이런 식이면 한글봉건왕조 국왕이 만든 것이니 없애야 하고 봉건왕조의 상징이라는 말 자체가 엄밀한 기준이 없으니 더 나아가 전세계의 모든 문화재를 부수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악행을 수두룩하게 저지른 나치 독일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강제수용소조차 남겨두는데 봉건왕조의 잔재라고 한들 무조건 부수어야 한다는 당위가 성립하지는 않을 것이다.[22] 조선 등 전근대 국가들은 인권과 평등권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해당 시기는 인권과 평등권을 명시했기에 책임이 더 크면 컸을 것이다.[23] 얼마나 심했냐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일본군에 의해 조선왕조실록마저도 모조리 약탈되거나 소실될 뻔했다. 각각 조선왕조실록들을 보관한 서재인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를 일본군들이 파괴하면서 조선왕조실록이 소실되었는데, 기적적으로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살아남아 내장사 주지 승려인 '희묵대사'와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위인들이 일본군인들을 피해 산 꼭대기의 동굴 속에 숨겨둔 덕분에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805권과 고려시대에 전술된 책 538권을 60여 개의 궤짝으로 옮긴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군들이 조선의 철강 기술자들을 모조리 전쟁 포로로 끌고 가면서 전통적인 제철 철강 제련 기술의 명맥이 끊기면서 기술이 오히려 시대가 지날수록 퇴보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그래서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조선은 각종 군사 기술과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가 되면서 오히려 조선시대 초기보다도 훨씬 퇴보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청기와를 제조하는 기술도 명맥이 끊겨 전쟁 후 궁전을 복원하는데 필요하여 왕명으로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럼에도 고려시대에 제작하던 청자기와보다도 훨씬 퇴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로 임진왜란 직후 왕궁 행사를 진행해야 되는데 그 예법을 기록한 의궤까지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에 의해 파괴되면서 곤란했다는 기록도 있다.[24] 다행히도 삼국유사삼국사기는 고대 삼국의 역사서를 토대로 기술되었다. 대표적으로 고대 고구려의 신집의 내용을 상당히 참고했다고 추측된다.[25] 세계 어느 문화권이나 고대사 연구에 대한 현황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고대 로마 역사 역시 생각보다 기록에 오류가 많거나 문화재가 사라지거나 기록에 신빙성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고대시대의 한계점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조선의 경우는 문화재 출토나 기록으로라도 언급이 되니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26] 만화의 출처https://m.ruliweb.com/family/212/board/300063/read/30628354, 원문: https://www.reddit.com/r/polandball/comments/jr92lz/costume_thief/[27] 명과 조선에서 관복으로 사용되었던 단령은 엄밀히 말하면 중국의 오리지널 복식이 아니라 서역에서 비롯된 호복이다. 단령은 오랑캐인 선비족의 복식에서 유래되었으며, 선비족의 영향이 강했던 수나라, 당나라가 호복을 관복으로 사용하면서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이웃한 국가에서도 단령을 관복으로 채용한 것이다. 갑옷 또한 어느 정도 영향 받긴 했지만 두 나라가 같은 형태를 지닌 것은 아니며, 기본 의복인 한복 또한 그러한 경우에는 속하지 않는다. 이는 조선의 상유하고(上襦下袴)와 명나라의 상의하상(上衣下裳)은 서로 다른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복은 과거 중국에게 오랑캐의 옷이라며 폄하당했다. 자세한 건 한복 참고.[28] 고려양몽골족 사이에서 인기를 끄니까 한족이 그냥 따라한 것이지, 그게 한반도에서 유래한 문화라는 건 웬만한 서민들이 알 리는 없었다.[29] 대표적으로 호랑이의 흰 눈썹이 신통한 통찰력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 우리가 새해마다 먹는 흰색의 떡국, 가래떡 등이 있다. 흰색으로 빛나는 신성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새로운 시기의 안녕을 빌던 것이 현재까지 유지되는 것. 결국 흰색이 신성하다는 사상이 반영된 결과이다.[30] 몇몇 외국인들의 견문록에서 한복을 허접하다, 끔찍하다 등 폄하하는 평가들도 확인되는데, 속옷을 장식 삼아 노출하거나 아예 벗고 다니던 19세기 양식의 한복은 그 당시 서양인들의 입장에선 충분히 거슬렸을 것이고 아예 가슴을 가려버리는 치마를 전수하던 것은 어찌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31] 훈도시로 추정[32] 사실 한국도 일본처럼 고려시대까지는 남녀가 나체로 조업을 했다. 물론 고려는 유교 사상이 들어오던 숙종 시기에 금지했지만 중앙 집권이 약했기에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중앙 집권이 강화되고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조선 조정이 나체 조업을 철저하게 금지하며 강제로 물옷을 입게 하는 바람에 사라졌다.[33] 물론 이러한 곳들도 여성이 아무 곳에서나 유방을 드러내는 행위는 금기시했고, 잘해야 가슴골을 노출하는 수준에서 용인했다. 그런데 미노스 문명에서는 여성들이 가슴 전체를 다 까는 옷을 입고 다녔고, 스파르타에서는 평상시에는 한 쪽 가슴이 노출되는 옷을 입었다가 군사훈련을 받을 때는 아예 벗고 다니기도 하여, 아테네의 여행가들이 스파르타 여성들의 이런 모습에 대경실색했다는 기록이 있다.[34] 마찬가지로 1990년대까지만해도 동북아시아에서 여성이 배꼽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되었으나, 21세기에 들어서는 탱크탑을 착용한 정도는 딱히 심의에 저촉되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인도는 기후 문제로 머나먼 고대 시절부터 이런 복장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고, 유럽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일수록 되려 유두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만 가슴 부분이 크게 파인 옷을 입었다.[35] 원중거의 승사록 78면에 보면, '오랑캐 여인들은 통인(通引)을 가장 좋아한다. 시온(時韞)을 모시는 소동인 용택(龍澤)이라는 소년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고는 한 여인이 팔을 벌려 맞아들여 껴안는 모습을 하더니 자신의 젖가슴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곁에 남자가 있었으나 양쪽을 바라보고 웃을 뿐이었다. 면목이 있는 사람들이면서 부끄러움이 없음이 이와 같았다.'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출에 대해서 할 말은 많고 일본의 노출은 할 말이 없다니 어불성설이다.[36] 건축물의 수평투영면적 1층의 바닥면적이 해당됨[37] 훼손 이전 기준 약 16만 제곱미터 (출처: 예(禮)로 지은 경복궁, 임석재)[38] 총건평 8482평으로 약 2만8천 제곱미터[39] 총건평 5800평으로 약 1만9천 제곱미터[40] 약 15,643 제곱미터[41] 벌열가문이라 불리던 관직을 독점한 가문들. 북촌에 있던 이들의 저택은 지금 다 사라지고 작은 필지로 나뉘어 근대형 한옥이 들어섰다. 거의 유일하게 남은 윤보선 가옥, 안채 건물 한 쪼가리만 남았음에도 크기가 주변 근대한옥들을 압도하고 중국이나 일본급으로 크고 사치스럽다. 왕족의 잠저였던 운현궁 역시 마찬가지. 운현궁의 사랑채와 대문은 당대 일본인들에게도 찬사를 들었다.[42] 대표적으로 경복궁 팔우정과 향원정, 덕수궁 석어당, 경북의 운조루[43] 법주사 팔상전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황룡사와 미륵사의 9층 목탑은 아파트 10층 아파트 높이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44] 고려 충렬왕 때 관후서의 '도선 일기'에 의하면 "땅은 다산(多山)을 양, 희산(稀山)을 음. 옥(屋)은 고루(높은 다락)를 양, 평옥을 음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원래 산이 많기에 고옥을 지으면 반드시 국운이 쇠퇴를 부른다."라고 한다.[45] 온돌은 목조 건축물 특성상 다층 건물을 짓기가 어려운데, 그 어려운 난이도를 온돌을 깔아 지반이 약해짐으로서 더 높여버리니 비용이 엄청나게 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6] 온돌을 까는 것이 그 당시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당시 서양에서 쓰던 방법인 벽난로의 열 효율을 생각해보자.[47]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현대 대만에서의 주음부호에 대한 인식과도 어느 정도 유사하다.[48] 과거 시험 급제자가 아닌 사람들.[49] 이건 심지어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에도 이런 목적으로 행해졌는데, 평소 언어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세종대왕이 역시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신숙주명나라로 파견해서, 당시의 중국어의 음운 체계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고 그 결과를 한글로 기록해 정리했고 이것이 동국정운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명한 첫 구절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에서 '듕귁'이 동국정운에 따라서 한자어 중국을 표기한 것이다. 때문에 현대의 역사비교언어학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이 이 시기의 중국어일본어, 여진어 등을 재구하는데 있어서 이들 한글 교본이 매우 중요한 사료로 여겨서, 한글 및 중세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일 정도이다.[50] 동시대 유럽에서도 같은 이유로 공문서나 학술 논문, 교양 서적 및 성경 집필을 전부 라틴어고전 그리스어로 했고, 자국어는 상대적으로 찬밥 취급을 받았다. 토머스 모어유토피아아이작 뉴턴프린키피아조차 초판은 영어판이 아니라 라틴어판이었고, 자국인이 집필한 책을 한참 뒤에나 영국의 번역가들이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한 바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에서 예배 집전을 라틴어로만 했던 것도 이런 역사의 흔적이다. 물론 유럽 사회에서도 민중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고 타지에서의 선교 활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가톨릭 신부수도자들 및 개신교 목사들에 의해 성경을 활동지의 토착어로 번역하는 활동은 활발히 이루어졌다. 때문에 많은 언어의 문증 가능한 가장 오래된 사료가 해당 언어로 번역된 성경인 경우가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 국왕인 제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근대 영어로 번역된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이다.[51] 허난설헌에 대한 이야기인데 조선의 여성은 이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초희'라는 이름은 특이한 사례라는 주장의 내용이다.[52] 이이 나오토라, 카테리나 스포르차가 대표적이다.[53] 기독교성인이거나, 국가적인 영웅이 아니면 서양사에도 이름이 알려진 여성은 거의 없다.[54] XX 지역 출신이라는 뜻.[55] 일례로, 조상이 네덜란드인이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경우는 이름의 뜻을 직역하면 '근대밭 출신 루트비히'라는 뜻이다. 베토벤(Beethoven)이라는 성씨가 네덜란드어로 근대(beet, 비트)와 밭(hoven)의 합성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이게 남녀를 불문하고 쓰인 것이라는 것과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아예 성씨로 굳어졌다는 차이가 있다.[5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후의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 독일어로 '합스부르크의 오토'라는 뜻.[57] 미국의 국민적 영웅들 중 하나인 타슝카 위트코. 수족 언어로 '성난 말'이라는 뜻.[58] 펠릭스 멘델스존. 독일어로 '멘델스의 아들 펠릭스'라는 뜻이다.[59] 미하엘 슈마허. 독일어로 '신발제작자 미하엘'이라는 뜻이다.[60] 서나라 유민의 후손이 칭한 서씨가 대표적이다.[61]일본 총리다나카 가쿠에이. 일본어로 '밭 한가운데 사는 가쿠에이'라는 뜻.[62] 하술할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 막내딸이라서 '막례'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63]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누나.[64] 조선 철종의 평민 시절 사랑하던 평민 여성이라고 전해지는데 사실 여부는 의문점이 있다.[65] 일제강점기 감리교선교사로서 아들과 함께 먼 길을 걸어다니며 교회 활동을 하였다. 당시 나이 62세.[66] 류옥영, 류중영, 류소영.[67] 조수임, 조종임[68] 당시 영조의 자녀 14명 중 5명이 4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으므로 대략 40~50%, 왕실도 이럴진대 조선시대 평균 영아 생존률은 더 낮았을 것이다.[69] 다만 이들은 전부 매형인 이방원의 손에 쳐죽임을 당한 바람에, 이름대로 살지는 못했다.[70] 러일전쟁 직후의 홋카이도 지역을 다룬 일본 만화골든 카무이에서는 여주인공인 아시리파가 자기 아명이 아이누어로 '할아버지의 항문'이라는 뜻이어서, 그 아명이 싫다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71] 기묘하게 생겼다고 해서 키묘마루, 머리가 꼭 차센(머리를 상투로 틀지 않고 길게 늘인 모양) 같다고 차센마루, 3월 7일에 태어났다고 해서 산시치마루이다.[72] 이는 동서양을 통틀어 귀족의 개념이 있는 나라라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73] 링크 참조.[74] 고려 때와 비교해서 그 권리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75] 심지어 인수대비조선 시대 인물로는 보기 드물게도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하기도 했다.[76] 장애를 극복한 인물로 유명한 헬렌 켈러도 이 운동의 지지자였을 정도로, 사회 각계각층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77] 주의: 태종 때의 서얼금고법과 성종의 재가금지법은 과거 중 '문과' 응시를 금지한 것이지, 무과와 잡과 응시는 가능했다. 물론 출세하기 위해서는 문과 급제가 필수적이었기에 큰 제약은 맞지만, 문과는 워낙 경쟁률도 세고 급제한다고 해서 바로 관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임용되지 못한 과거 급제자들이 쌓여서 신규 급제자들은 장원 같은 압도적인 성적이 아니라면 임용될 기회도 적었다. 그래서 양반 지위를 유지하고 먹고 살기 위해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무과에 응시하는 양반들도 꽤 있었다. 18세기에 정조는 미임용된 과거 급제자들을 모아 교육하는 '초계문신제'라는 제도까지 운영할 정도였으니, 인사적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78] 실제로 양반이 되려면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냥 과거 급제자의 직계 가족으로 태어나기만 해도 최소 3대까지는 이 신분을 세습받아서 얻을 수도 있었던 만큼, 그 머릿수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79] 출처 : 정지영, 朝鮮後期 寡婦의 守節과 再婚 :『慶尙道丹城縣戶籍大帳』에서 찾은 과부들의 삶, 韓國古文書學會, 2000[80] 3년 내에 재혼한 비율 31.5%[81] 25세 미만인 여성의 비율 63%[82] 출처 : 김건태, 한국문화사 27권 -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국사편찬위원회, 2009[83] 호적을 가진 양반가에서도 이혼/재혼율이 30~50%에 속한다면 민간에서는 동일하거나 그 이상이였을 것이다.[84] 현대에도 발생하는 사티의 경우, 종교적 행위로서 벌어지는 사티로 인한 종교계의 지원금 등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인의 정절에 대한 숭고한 관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금전적인 이유다.[85] 조선 후기의 전쟁 이전에 재가금지령을 내렸지만 이 역시 재혼으로 인한 자녀의 정계를 막는다는 등의 페널티를 보면 민간의 재가금지를 명한 것이 아닌, 양반들의 수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주장하기도 한다.[86] 언니였던 화억옹주가 어릴 적에 사망하여 실질적으로는 장녀였지만, 일단 순서 상으로는 명백히 차녀였다.[87] 다만 기록에 남은 것처럼 열녀문이 세워진 지역과 가문에는 특혜가 내림에 따라 특혜를 노리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살해하는 일은 있었다. 이 경우는 현대에도 발생하는 '배우자의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기에 당연히 권장되는 사안은 아니며, 들킬 경우 관련자들 역시 엄중히 처벌되었다.[88] 고려시대에 원나라를 통해 유입된 외래 문화라는 설도 있지만, 이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 최남선이 왜곡한 내용이다.[89] 이 사실이 서구권에 알려지면서 '동양 여자들은 성범죄 피해를 당하면 무조건 자살을 해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든다'는 편견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지금 언급하는 조선만 해도 성범죄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멀쩡히 살아서 가해자를 고소하거나, 가족들과 함께 린치를 가해서 단죄한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서구권에서의 이러한 오해는 이소룡 주연의 영화인 용쟁호투의 묘사 때문에 벌어진 건데, 정작 그 영화에서도 이소룡의 여동생 역을 맡은 안젤라 마오 잉이 자신을 겁탈하려는 건달들에 맞서서 여러 합을 붙어 분투하면서 도망가다가, 막다른 길에 이르러 갈 곳이 없자 궁여지책으로 옆에 있던 유리 조각을 집어서 자살한 것으로 나오므로, 흔한 편견과는 큰 차이가 있다.[90] 이것도 전투용이나 자결용이 아니라, 순전히 패션용일 뿐이다.[91]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칼은 메노코마키리라고 따로 불렀고, 은장도 같은 장식용 칼은 에무시(emus)라고 했다.[92] 브래드 피트 주연의 2001년 영화인 멕시칸에서는 한 귀족 남성과 결혼하려던 멕시코인 여성이 결혼식에서 예식용으로 쓰려고 가지고 온 장식용 권총으로 자살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건 남편인 귀족이 자기 애인을 그 총으로 쏴 죽인 것에 화나서 그런 것뿐이고, 그 이후로는 실전용이 아닌 갱스터들이 탐내서 서로 가지려고 투닥거리는 골동품으로만 나온다. 애초에 유럽유교 문화권도 아니어서 여성에게 수절을 강요하는 문화가 아예 없다. 16세기 이탈리아용병 출신 귀족 가문인 스포르차 가문 소속의 여귀족인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자신의 을 포위한 정적들에게 자녀들이 체포되어 협박을 당했을 때, 자신의 생식기를 보여주면서 "그런 아이들은 (재혼을 해서라도)얼마든지 더 낳을 수 있다!"라고 외치는 패기를 보여주어서 오히려 자녀들을 무사히 구출한 일화가 있었다. 이는 전근대 시대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이혼과 재혼이 빈번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93] 대표적으론 19세기 영국 출신의 저술가 이사벨라 비숍이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는 조선 후기의 초경(初更) 제도가 소개되어 있다. 책 내용에 따르면 "저녁 8시가 되어 초경이 울리면 남자들은 귀가를 하고, 등불을 밝혀 든 여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자신들의 해방 공간이 된 한성의 밤거리에서 실컷 놀던 여성들은 자정에 다시 종이 울리면 집으로 돌아간다. 더불어 거리는 남성들의 무대로 돌아온다. 그것은 마치 조선 여성들에게 내린 축복인 듯하다. 혹 잘못해 이 시간까지 거리에 남아 있게 된 남성은 최대한 여성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고 한다. 이때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남성은 엄벌에 처해졌다. 이 진기한 풍경이 19세기 말 서울 밤거리의 모습이었다."[94] 엄밀히 말하면 부르카도 본래는 날아오는 모래바람을 막는 용도로서 입은 엄연히 실용적인 물건이었다. 그랬던 것이 1970년대의 오일 쇼크 이후로 도시 한정으로 그런 모래바람의 위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만큼 인프라가 크게 개선되자, 실용적인 목적이 사라졌음에도 이를 종교 핑계로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되려 여성들의 인권을 옥죄는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95] 이해영, 남선화 (2006), "장옷에 관한 연구(1)", '한복문화' 8, 69-78.[96] 임진왜란 직후에 쓰인 박인로의 가사인 누항사를 보면, 새벽 2시쯤 곡식을 빌리려고 민가를 찾아갔더니, 그집 주인장이 하는 말이 "이른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요?"였다. 이미 예로부터 이러한 시간 관념이 있던 것.[97] 이는 당시 군인들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일단 농사를 지은 후에 본업을 하러 나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98] 이원복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 의하면, 코냑의 생산지인 프랑스의 그랑 샹파니아 지방에서는 여름에 기온이 섭씨 45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남유럽이 질 좋은 와인의 산지로 유명하다.[99] 현대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도 같은 이유로 남유럽인이나 동남아시아인, 미국 흑인들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어서, 이것이 1992년의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100] KOICA에서 저개발국으로 파견나간 직원이나 파견원들이 처음에는 현지 주민들의 생활패턴을 보고 게으르다며 혀를 차다가 현지 노동여건을 겪어보고는 도리 없이 수긍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심지어 시골 출신으로 농사일을 해 본 사람들조차 이렇다.[101] 일본이 창작물에서의 묘사대로 시골까지 도시 못지않은 수준으로 인프라가 갖춰진 것은 빨라도 1970년대의 일이고, 늦게는 1980년대의 거품경제 시기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한국에도 새마을 운동으로 인프라가 다 깔린 이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이상으로 산지가 많아서 인프라 확충에 어려움을 겪는 오지가 많다. 그 때문에, 21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 애니메이션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서는 주인공인 케로로 중사가 우연히 일본의 오지 마을에 떨어진 뒤에, 원래 얹혀살았던 히나타 가의 집이 있는 도쿄로 되돌아가려고 버스 배차표를 보다가 버스노선이 이미 70년대에 단선됐음을 알고 멘붕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이외에도 21세기의 시골이 배경인 논논비요리에서는 80년대 장난감을 동네 가게에서 2000년대까지 팔고 있다든지 집인데 그냥은 휴대전화가 안 터져서 팔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거나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102] 그리고 B형간염에 대한 경각심이 뚜렷해진 지금에도 한국 식당에서 내림상 문화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여기 참조.[103] 옛날엔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에겐 크게 대접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때문에 가족들의 한 끼 식사를 손님에게 먼저 제공한 뒤 남은 것을 가족들이 먹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자세한 건 식사예절의 전통예절 참고[104]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선 목욕을 할 때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순서에 맞추어서 씻는 목욕 문화가 있었다. 사족이지만 유럽 또한 중세 초·중기 때만 해도 남녀 관계는 아니더라도 연회 때 먹다 남은 것을 자리 뒤쪽에 앉아 있던 하인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릇 또한 밀가루빵으로 만들어서 먹고 남은 빈 그릇은 그대로 하인들의 식사가 되거나 밖에서 잔반을 기다리던 빈민들에게 주어졌다.[105] 성차별이 아니라 어차피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니까,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더 늦게 먹을 수밖에 없다. 같은 사례로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수도권 등지에서 남자 쪽이 실업자가 되거나 하는 등으로 셔터맨 신세가 되면, 역으로 부인의 밥을 차려주고 출근시킨 뒤에 남은 밥을 먹는 일이 좀 있는데, 이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106] 이는 조선시대 대 간통스캔들의 주인공인 어우동에 관한 처벌을 두고 벌어진 루머일 수 있다. 어우동의 남편 태강수 이동은 아내인 어우동과 헤어지고자 간통 누명까지 씌웠으나 죄가 없었고, 죄없는 아내를 간통으로 무고죄를 저지른 이동은 처벌을 받긴 했으나 죄없는 아내를 두고 정조를 모욕한 것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처벌이였던데다 합치라는 왕명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이후 소박맞고 내쫓긴 어우동은 여러 사람과 사통하였고 스캔들이 터진 뒤, 신하들의 '간통죄로 처벌해야한다'라는 의견을 무시하고 성종의 의지대로 어우동 본인은 '강상죄'로 처형받은 반면 함께 관계를 갖던 남성들은 얼마 뒤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함께 죄를 저질렀음에도 남자에 비해 한없이 무겁게 처벌된데다 어우동 스캔들로 연루된 고관대직들은 처형 이후 복귀까지 했으니 한없이 가벼운 처벌을 두고 '간통을 저질러도 여자는 유죄, 남자는 무죄'라는 루머가 나왔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어우동 항목에도 있지만 해당 건에 관해선 여러 사유가 있었다.[107] 이외에도 칠거지악 등을 비롯해 여인을 벌하는 예로 든 것은 널리 알려져있는데 비해 그 반대의 경우는 그닥 알려지지 않았던 탓일 수도 있다.[108] 첩을 둘 수 없는 조선 중종의 부마 조의정의 경우에도 옹주인 아내를 박대하고 그 일로 중종에게도 견책을 받았으나 종인 풍가이를 첩노릇 하도록 강요한 부마에게 내려진 처벌과는 달리 풍가이에게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곤장 100대형이 내려졌다.풍가이의 경우엔 위력에 의한 강압으로 인한 관계였음에도 과한 처벌을 받음과 이후 옹주의 유모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했음에도 유배형으로 그쳤다. 다른 부마의 첩과 아이을 살해한 전적이 있었음에도 가중처벌은 커녕 중종 사후에 사면되기까지 했다. 후술되는 '미혼여성과의 관계는 간통으로 치지 않는다'라는 조항의 불합리함에 대해서도 더더욱 남성의 간통은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오해의 근거일 수도 있다.[109] 그나마도 순조 치세는 나라가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굴러가던 시기로#, 세도정치를 처음 시작한 김조순을 포함한 초기 세도정치의 주역들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애민주의적인 사람들이라서, 조정 차원에서 민란 진압 후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구휼책에 만전을 기울이거나, 탐관오리 색출을 통한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면서 민생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 것은 철종부터였다.[110] 사실 어느 나라든지, 전근대시대에는 통신 수단의 부재로 인해 행정력이 미비한 데다가, 조선이나 대영제국, 청나라 같은 강대국조차 걸핏하면 대기근이 터져서 사람들이 숱하게 죽는 바람에 그나마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기본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큰 정부론이 득세하여 사회과학계의 주류가 된 것은 라디오TV 등의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정부가 강력한 행정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 20세기 중엽부터였다. 비슷한 이유로 조선이 근대화를 시작할 때 고문들은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다.[111] 기본 세율이 소득의 10분의 1에 불과했으며, 이마저도 조선 후기로 가면 계속 내려간다. 물론 전세 말고도 이것저것 뜯어가는 것이 많았지만. 주요 논문들도 일본과 조선의 세금 제도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조선보단 일본의 세율이 더 과중했다는 의견들이 많다. 이런 논문들은 일본의 세율이 근대화에는 더 유리했던 것과 별개로 농민들이 당장 먹고 살 부분에 있어서는 조선이 일본보다 나았던 시기들은 많았다는 결론을 내린다.[112] 고아원이라는 이명이 있는 오늘날의 보육원과는 달리, 이 당시에는 어린이집이나 탁아소 개념에 더 가까웠다.[113] 독일 소설가인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나, 이를 원작으로 한 독일의 영화 감독인 톰 튀크베어의 동명의 영화에서 당시의 보육원들의 참상이 잘 묘사되었다.[114] 대기근의 경우,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유대인만 하더라도 구약성경에 서로의 자식을 잡아먹은 사건을 기록했다. 대기근 같은 극한 상황의 경우 발생하는 영아유기 및 살해, 식인 등은 전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발생했다.[115] 영화 스파이 조르게에서도 이 사건이 묘사된다.[116] 19세기 말엽의 일본의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인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면 그 참상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남의 식량을 훔쳤다는 이유로 사위에게까지 개무시당할 정도로 철저하게 매장된 남자의 이야기에서,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난을 겪는 것을 막고자 남자들의 결혼과 성생활을 제한한 탓에 마을 남자들이 성욕 해소를 위해 동네 들을 상대로 수간을 일삼으며, 일정한 나이가 된 부모를 산에 유기하는 등의 충격적인 묘사가 마구 나오는데, 당대 일본의 민중들의 삶을 고증한 부분이다.[117] 이해가 안 된다면 연방제의 부작용 탓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대한 방역 정책이나 백신 접종 계획이 지지부진한 미국을 보면 쉽다.[118] 고려 시대 때까지도 조정이 보낸 지방관과는 별개로 탐라의 옛 군주들이 계속해서 군주위를 세습하면서 지방관들의 행정권에 지대하게 간섭했는데, 조선 시대로 넘어오자마자 군주들이 몽땅 폐위되고 직할통치가 실시되었다.[119] 물론 신문고 문서에도 있듯 신문고를 치는 데에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뒤따랐지만, 백성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의 군주들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나온다. 가장 좋은 예로 격쟁이 있다.[120] 특히 농민들의 형편에 따라 지방관들을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평민들이 영주의 착취에 견디다 못하여 민란을 일으키면 막부에서 영주에게 책임을 물어 영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조선에 비하면 규칙화가 덜 된 편이었다.[121] 다만 이러한 시스템이나 이념도 전근대적인 시대 환경에서 형성되고 운영되는 것이기에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미비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특정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전근대적인 시대 환경을 이해하기 힘들다. 이를 두고서 이헌창 교수는 조선이 전근대에 피지배층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한 사실은 잘 시행되든 안되든 세계사적으로 봐도 특이한 사항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22] 원래 유교적 이상에 따르면 윗사람은 윗사람답게 인덕을 베풀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답게 순종하되 윗사람이 잘못하면 복종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유교적인 이상체제다. 다만 이상이 현실에도 적용되었다고 보긴 힘들다.[123] 결국 다이어 장군이 저지른 학살 사건이 인도 현지의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자 전세계의 비난이 쏟아졌고, 끝내 뒤늦게 진상을 알아차린 영국 정부에 의해 영국 육군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뒷북 내지는 학살극에 대한 은폐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124] 흔히 이를 조선 후기에 민중들의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너도나도 공명첩을 사서 신분을 세탁한 결과라고 보기도 하는데, 공명첩 자체가 어지간히도 부자가 아닌 이상에야 신분 세탁용으로 쓰기에 부담되는 가격인 것을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얘기다. 그보다는 평민들의 교육열이 높아짐에 따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는 게 더 맞다. 즉, 실상은 그 급증했다는 '양반'들의 정체가 과거 급제자라는 이유로 명목 상의 신분만 양반인 평민들이라는 소리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소녀의 할아버지인 윤 초시나,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인 허 생원, 오영진의 희곡 시집가는 날의 주인공 맹 진사 등은 모두 생원시나 진사시 등의 소과나 초시(대과의 1차 시험) 합격자라서 생원이나 진사, 초시라는 칭호가 붙은 사람들이다.[125] 더 높은 공직에 오른 사람이면 '학생부군신위'라는 말을 '현고+(관직명)+부군신위'라고 바꿔서 쓴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는 '현고대통령부군신위 노무현'이라고 쓰는 식이다.[126]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 6월 29일 신사 2번째기사[127] 성종실록 111권, 성종 10년 11월 29일 경술 2번째기사[128] 출처: Rodriguez, Junius P.(EDT), The Historical Encyclopedia of World Slavery, Abc-Clio Inc, 1997[129] 규정상 부에는 서원 34인과 일수 44인, 대도호부와 목에는 서원 30인과 일수 40인, 도호부에는 서원 26인과 일수 36인, 군에는 서원 22인과 일수 32인, 현에는 서원 18인과 일수 28인이 있었다. 여기에 각 거진엔 나장 30인, 주진엔 나장 20인, 제진엔 나장 10인이 있었으며 대로의 역엔 역리 20인, 중로의 역엔 역리 15인, 소로의 역엔 역리 10인이 있었다. 경국대전이 쓰여질 당시의 행정구역이 부 5개, 목 24개, 대도호부 4개, 도호부 43개, 군 82개, 현 164개였으므로 여기에 있는 일수, 서원의 수를 합치면 대략 17,000여 명 정도다. 여기에 당시 역참은 41역도 543속역 체계였으며 대전통편에 기록된 각종 진의 수가 500개가 넘어가는 점, 그리고 경아전도 3,000여 명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을 다 합치면 30,000명을 넘어간다.[130] 즉 노비 보병 잡색군의 경우 한 명의 노비만 보인으로 편성된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양인의 경우 보병은 정군 한 명당 두 명의 양인이 보인으로 편성되는 게 원칙이였다.[131] 출처:https://www.fmkorea.com/best/5382580618[132] 뿐만 아니라 어떤점에서는 고려가 조선보다 더 악질인것이 원나라가 고려의 노비개혁을 시도하자 충렬왕이 “옛날 우리 시조(始祖)께서 뒤를 잇는 자손들에게 훈계하며 이르시기를, ‘무릇 이 천류(賤類)들은 그 종류가 다르니 진실로 이 무리들을 양인으로 삼지 말라. 만약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뒤에 반드시 벼슬길로 나아가고 점차 요직(要職)을 구하여 국가를 어지럽히기를 꾀할 것이니, 만약 이 훈계를 어긴다면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기록도 있다.[133] 출처:https://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085_0010_0060_0190[134] 전근대라는 시대상황을 감안해도 천민은 종자가 다르므로 양인으로 삼으면 안된다는건 엄청난 망언인것이 천민이라도 하늘이 낸 백성이라고 여겼던 세종(조선)이 보면 격노하여 "고려는 왕부터가 저런 그릇된 생각을 하였으니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건 하늘의 뜻이다."라고 조선 건국 정당성을 위해 선전용으로 써먹어도 할말없는 수준이다.[135] 본문에 써있듯 민족이란 개념도 논란이 많지만 애당초 중세 사회에서 지금의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물론 각 지역 사람들마다 문화적 동류의식은 있었지만 이는 민족이란 개념과는 다르다.)[136] 뉴라이트가 유독 '자민족'을 강요하는데 이는 현대 사회의 시각으로 조선을 평가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조선을 비하하고자 함이다.(한번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조선을 비하하는 최종 목적은 민주주의를 넘어 시장만능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하고자 함이다.) 타국가, 민족의 경우 정복전쟁을 통해 노예를 수급했는데 현대 사회기준으로는 타국에 대한 침공과 납치는 외교채널이 끊길 정도의 반인륜적인 범죄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도 뉴라이트들은 유독 조선에게만 비정상적으로 가혹하면서 동시기 다른 국가들의 전쟁범죄는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137] 16세기 전국시대 일본에도 엄연히 전쟁노예들이 존재했으며 심지어 전쟁노예 사냥과 인신매매가 일본 내부에서도 매우 성행했음이 밝혀졌다. 자세한 사항은 노예 항목의 일본 부분을 참조. 또한 짧은 기간이었으나 17세기 초반까지 일본 군인들이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자 자국 노예를 대량으로 수출까지 하기도 했다.#[138] 다만 미국의 연한계약하인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해방되었고, 현대 시점에서 보면 영락없는 노동착취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되었다. 그러니까 흑인 노예제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오히려 노예의 기준을 인종으로 삼은 경우는 미국을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 속국들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다시 말해 원래는 조선처럼 동족 내지는 (인종이 같은) 주변국 사람들을 노예로 부린 것이 훨씬 더 흔했다는 것. 물론 전부 다 비윤리적인 제도였음은 다름 없지만.[139]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걸 부민고소금지법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부민고소금지법은 지방 호족들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수령에 대한 고소를 금지하고 나라에서의 감시와 처벌만을 합법화하는 법이다.[140] 2차 왕자의 난 당시 공신이었던 이숙번의 간통 강요에 얼굴에 칼로 흉터를 내고도 무죄 선고를 받은 여노비가 대표적이다.[141] 실제로 조선 태종 시기에 질병으로 인해 집안 남자들이 모두 죽고 두 자매만 남은 집에서,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들의 주인인 자매들을 윤간을 하다가 모조리 체포되고, 여기에 가담한 노비 전원이 처형당한 사례가 있었다.[142] 흉악범죄의 과반수 이상이 백정과 재인 집단에서 벌어졌다.[143] 멀쩡히 조선 사회에 적응한 외국계 인물들은 오히려 고위층으로 승진한 이들도 꽤 된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 투항했던 일본인 장수인 사야가나, 여말선초위구르족 장수인 설장수, 여진족 출신으로 태조 이성계의형제였던 이지란, 그리고 풍랑으로 인해 한반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사략해적얀 야너스 벨테브레가 있다.[144] 물론, 현대 일본조직폭력배들인 야쿠자한구레의 적지않은 수가, 극심한 사회적 차별 탓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여 범죄자로 전락한 재일 한국인이나 부라쿠민, 아이누족이라는 걸 생각하면, 백정들에 대한 차별이 이들을 범죄의 유혹에 빠지게 한 부분도 있다.[145] 원 간섭기 당시에는 외국으로서의 형식적인 권리만 있었지, 실질적으로는 몽골의 체제 아래였고 일제강점기는 형식적인 권리조차 빼앗긴 상태였다.[146] 원나라에게 지배당하던 고려의 경우 툭하면 왕과 귀족들이 교체되고 심하면 죽임을 당하는 등 오직 원나라에게만 충성하고 딴생각 못하도록 심한 견제를 당했다.[147] 단, 대부분은 대월 같은 베트남 국가에 조공하는, 말하자면 "번국의 번국" 같은 모양새가 많았다.[148] 이 때문에 현대에도 군주의 작위가 뭐냐, 혹은 군주 가문의 급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귀족 가문들끼리 상하 관계를 따진다.[149] 애초에 외교의 격만 쳤을 때 조선 통신사의 격이 일본 사절보다 월등히 높다. 조선통신사 항목에도 나오지만 조선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 에도 막부의 쇼군(=일본 총리)과 대면하고 올 수 있지만, 일본 사절은 온다 해도 동래 도호부사(현대로 치면 도지사급도 아니고 경상남도소속의 일개도시 시장)가 한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 막부는 통신사를 받는 쪽이 유리하기에 이런 굴욕적인 형태로라도 외교 관계를 이어나갔다.[150] 이러한 속국드립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도 쓰이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일본이다. 일본이야 혐한들이 간간이 쓰는 말이고, 중국의 경우 저쪽도 속국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게 아니기에 동북공정중화사상의 밑거름으로 사용되어 한국인들을 욕할 때 자주 보인다.[151] 갑옷을 제대로 무장한 병사들이 부족한 것은 전세계적으로 흔한 현상이었다. 현대의 미디어매체에서야 다들 갑옷을 입혀놓은 캐릭터들을 잔뜩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어떤 시대에나 모든 지역의 병사들이 완벽한 무장도를 유지한 경우는 현대에도 많지 않다. 하다못해 세계 순위권 육군력을 자랑하는 현대 한국군도 수많은 장비들이 치장물자로 보존만 되어 있다.[152] 기존에는 세조의 총통위 폐지를 조선의 국방력 약화로 인식했으나, 세조대에도 화약과 화기의 생산이 계속 늘어나는 경향이 드러나기에 세조가 조선의 국방력과 화약 무기 생산을 약화시켰다고 볼 수는 없다.[153] 궁극적으로 부싯돌문제가 가장큰데 서양처럼 공이친다고 바로 불꽃이 튀는 부싯돌은 동아시아에서 구할수가 없었다.[154] 이것도 그들보다 딱히 평화로워서가 아니라, 여건이 안 돼서 침략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다. 한민족 국가들도 여건이 된다면 주변을 잘만 들쑤시고 다녔다.[155] 한(漢)족이 한(韓)족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은 단 두 번, 한나라의 고조선 정복과 당나라의 고구려 정복뿐이었고, 하물며 고구려 정복은 결국 옛 백제와 통일신라까지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한 반쪽짜리 정복이었다. 게다가 당나라 역시도 완전 한족이 아니라 그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목민 출신의 선비족이었기에, 결국 전투민족을 정복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그들과 같은 전투민족의 기질이었다.[156]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진 남남이다. 그들의 먼 조상이 같은 피에서 갈라져 나왔을 수는 있으나 서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역사가 아니었다.[157] 나당연합에 멸망한 백제의 잔존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수만 명의 왜국 정규군을 동원한다. 하지만 나당연합의 대처로 패전하게 되고, 전투 이후 왜국으로 백제인들이 정착하면서 왜국에 일본이란 국명이 전해지고 일본이 한국에 개입할 명분 역시 제공하게된다.[158] 만부교 사건은 후대에 고려왕이나 조선왕에게도 비판 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건은 형제의 나라인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짐승의 나라라고 폄하했지만 형제의 나라라는 건 같이 고구려의 후손을 표방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지 요나라가 보기에 고려와 발해는 기원부터가 다른 생판 남남이었다. 그러니 만부교 사건을 당했을 때는 자신들이 고려해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고려는 이유도 없이 욕을 하고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159] 참고로 고려 사신은 송나라에서도 비슷한 짓을 하는 걸로 당대에 유명했는데, 소동파 문서 참고.[160] 이 위기는 다행히 이방원이 정권을 잡고 계획을 백지화하며 일단락됐다.[161] 전자는 오호십육국으로 약해진 중국을 공략하던 고구려가, 후자는 제3차 요동정벌와 북벌론을 일으킨 조선이 해당된다. 요동정벌과 북벌 모두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실현 직전까지 갔다가 취소된 만큼 정말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있었던 것은 맞다. 더 넓게 보자면 이승만 정권 시절에의 북벌론도 있긴 하다. 6.25 전쟁의 피해가 이렇게까지 컸던 이유는 이승만 정부에서 북한 정복 야욕을 드러내는 바람에 소련과 중공이 북한에 T-34 전차와 각종 군사물자를 줄 때 미국은 지도자 성향상 2차대전을 겨우 마무리 지었는데 또 소련과 전쟁하는 것을 우려해서 물자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는 태평양 전쟁에서 쓰고 남은 M4 셔먼과 잡다한 것들을 공여의 형태로 한국에 버리려고 했는데 38선 절대 불인정을 내세우며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점유권을 빡빡 우겨대던 이승만의 성향에 화들짝 놀라서 총알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갔다. 물론 북한도 단일민족이 맞다는 것을 인증이라도 하듯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300번 가량 찾아가서 스탈린 앞에서 한참을 빡빡 우겼고 듣다 질린 스탈린은 어차피 미국이랑 언젠가는 한 판 겨뤄야 하는 건 사실이었으니 이참에 남의 피로 대리전 좀 해보자고 마지못해 허락, 결국 북한이 남침하고 말았지만.[162] 애초 고구려-수 전쟁고구려-당 전쟁으로 수나라가 망해버리고 당나라는 수나라 꼴 안 날려고 신라와 동맹까지 하는 등, 중국 역시 고구려를 중화패권을 위협할수 있는 호적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고구려가 얼마나 큰 위협인지는 당대의 중국인들은 고구려 국경과 전선에 배치되는 것을 유배당한걸로 취급한 것 만 봐도 알 수 있다. 고구려 역시 국력에 한계가 있고, 한반도의 두 국가가 가만히 있어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만 노리기도 했으며, 결국 위나라와 전쟁을 하게 된다. 중국이 삼파전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공격을 강행 한 것, 결과적으로 중화와는 분쟁이 시도때도 없었지만 한반도 전체가 완전히 라고 할만큼 굴복당한적은 거의 없다. 대표적인 원나라청나라는 민족이나 정부 구성상 중화를 정복한 유목민 문명 이지 중화권 문명이 아니다.[163] 동아시아 3국으로 따지면 일본 다음으로 군사 장비가 좋은 국가가 대한제국이었다.[164] 어느 정도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국가의 지위가 안정화되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항상 주변국을 침략했다. 당시 시대는 '열강으로 불리려면 식민지 한두 나라 정도는 가지고 있어줘야 하는' 시대였다. 이 때문에 식민지의 불필요성을 일찍 내다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빌헬름 2세가 끊임없이 아프리카중동을 침략하며 3B정책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분위기는 2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영국, 프랑스 등의 전통 열강들이 베트남알제리, 인도네시아의 독립 전쟁에 하나 둘 무너지면서 세계 패권이 미국소련으로 양분되면서 끝나게 된다. 식민지를 유지할 국력도 없는 데다가, 비교적 식민지가 적었으며 한편 본국이 넓던 미국과 소련은 저들의 식민지가 독립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진영도 겉으로는 독립을 유도했지만, 정작 자국에 충성하거나 자원을 헐값에 얻으려고 유사 식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쿠데타 지원으로 국가 전복부터 주요 인물에 대한 온갖 더러운 공작을 시도하는 대첩보전의 시대가 개막된다.[165] 해당 계획에 맞춰서 대안제시하는 형식 등의 비판들은 있지만, 그 시도 자체를 완전히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다.[166] 헌법상에도 문민통제를 기본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167] 최근엔 많이 희미해졌지만 국민학교 시절에는 아이들에게도 간단한 제식을 가르쳤었다. 그리고 이것의 영향이 아예 남아있는 부분이 조회, 학교 수련회해병대 캠프이다.[168] 해당 문서에도 간접적 언급이 있지만, 조금만 정치적으로 틀어지면 프로파간다가 될 수도 있는 이런 스타일의 프로그램은 방송 역사상 전무후무할 경우다. 오죽하면 '조작 사나이'라는 멸칭이 만들어질까. 거기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군복무를 경험하고, 수행하는 현실에서 이런 되도않는 프로파간다로 현 군대의 문제점을 숨기고 미화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현 국방부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증이기도 하다.[169] 멀리 갈 것 없이 국가 명칭을 대한제국으로 했다는 것부터가 한민족이, 적어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고종을 비롯한 상층부 인사들이 제국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적나라게 드러낸다.[170] 사실 명청시대의 중국은 황제권이 다른 시대의 중원 왕조들과 다른 지역의 국가들과 비교할 때 지나칠만큼 강력했던 특수한 경우이다.[171]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충성하고 받든다는 사상.[172] 부모에게 받은 몸을 훼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상.[173] 민간에서는 기본이고 판소리, 탈춤 등 옛날 대사 속엔 생각보다 수위높은 드립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이후에 양반층으로 넘어가면서 어느정도 순화되었지만, 민간에선 여전히 남녀노소 흔한 유희성 발언이었다.[174] 단순히 요리는 조리할 양이 많아질수록 필요한 일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기 때문에 남성의 역할이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허영만의 만화 식객을 봤으면 알겠지만, 숙수라 하여 조선시대에 남자 요리사들이 엄연히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령숙수라고 불리는 궁궐 수랏간의 주방장 직위도 있었는데, 현대로 치면 청와대의 주방장 정도로, 요리사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직위다.[175] 실제로는 조선 초기에도 성리학은 매우 진보적인 학파로 꼽혀서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널리 각광을 받았다. 당장 정도전을 포함해서 성리학적 사고에 근거해서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들만해도, 당대는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도 매우 급진적인 성향을 지녔던 사람들이다.[176] 이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과거 소련에선 조선의 민중들을 보곤 "이 곳은 이미 사회주의가 이루어져있는 곳이다." 라며 칭찬했다는 얘기가 있다.[177] 참고로 율곡 이이의 집안의 사례는 다른 면에서도 조선 시대 여성들의 지위가 생각보다 높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원수가 죽고 나서, 신사임당이 친정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각종 토지나 금은보화 및 노비들과 같은 재산이 잔뜩 남아있었는데, 이를 이이가 자기 누나를 포함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공평하게 나눠가진 것이 그 예다. 이를 입증하는 당대의 행정 문서가 현존하고 있으니, 이것으로도 조선시대 여성들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동 시대의 영국은 앵글로 색슨 왕국 시기 상속법의 영향으로 인해 모든 재산이나 작위를 장남에게 독점적으로 상속했다.[178] 기록에는 사대부들이 '여성은 집에서 길쌈과 손님맞이만 잘 하면 된다' '요즘 백성들 사이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눌리고 살아가는 폐단이 자주 일어난다' '가장으로서 집안의 기둥이 되어 아내를 다스려야 한다' 는 발언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확실히 가부장제의 영향이 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179]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지위가 높은만큼 그 권위를 지키려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흔하다. 더욱이 성씨의 주체가 되는 남성이 그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폐단이 일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세계사적인 역사의 흐름이었다.[180] 일제강점기의 극작가인 오영진의 희곡인 시집가는 날에 이것이 잘 드러나 있다. 명망있는 정승 집안인 미언의 가족들이 고의로 자기 아들이 장애인이라는 가짜 뉴스를 퍼뜨려서 주인공인 맹 진사의 집안을 떠보기도 하고, 이에 낚여서 맹 진사가 노비인 입분이를 자기 딸인 갑분이로 위장시켜서 혼례를 치르려고 하자, 이를 간파하고는 마침 입분이에게 반해있던 미언의 혼례를 강행해 버렸다. 어느 정도의 과장이 섞였지만, 양반들도 사람인만큼 정치적인 부담만 없다면 연애결혼을 허락하기도 했다는 뜻이다.[181] 딸이 소개받은 남자의 커피소금을 타서 준다든가, 아예 커피를 그 남자에게 실수인 척하고 폭삭 엎어버리면, 그 결혼은 물 건너간 것으로 친다.[182] 양반이 핏줄 좋아서 되는 게 아니고, 전, 현직 관리의 직계 자손이나 과거 급제자의 가족들만 양반 신분을 얻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평민들도 과거 급제만 하면 얼마든지 양반이 될 수 있었고, 반대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어도 3대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양반 신분이 박탈되었다. 실질적으로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데 드는 돈이 너무 많아서 대부분이 서당만 마치고 다른 직업을 택했을 뿐이지, 과거 시험이 양반'만' 치르는 건 아니고 양반'도' 치르는 것이었다.[183] 위의 각주에서 나온 시집가는 날의 주인공인 맹 진사네 집안 같은 경우다. 극중에서 맹씨 집안은 대대로 상인 집안이고 과거시험도 간신히 초시(1차 시험)만 합격한 핫바리 집안이라서, 자신의 딸인 갑분이가 정승의 아들인 미언과 결혼하기로 결정나자 로또 맞은 것처럼 가문의 경사가 났다며 좋아하거나, 사돈 앞에서 쪽팔림당하지 않으려고 족보를 위조하는 장면이 나온다.[184] BBC에서 방송한 영국 드라마다운튼 애비를 보면, 주인공 집안인 그랜섬 백작가의 백작부인인 코라 크로울리가 부유한 미국인 기업인의 딸로 나온다. 미국 영어가 상류층들이 쓰는 방언일수록 영국 영어와 음운 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게 이 때문이다.[185] 물론 영국의 귀족들은 자국인 평민과의 결혼을 하는 경우도 좀 있지만, 이 경우도 부유한 기업인과 혼인을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귀족 출신인 여주인공 로즈 드윗 뷰케이터가 어머니인 루스에 의해 몰락한 가문을 부흥시킨다는 미명 하에, 부유한 기업인인 칼리든 호클리와의 정략결혼을 강요받는 것으로 나온다.[186] 똑같이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숙빈 최씨는 정작 핫바리 천민 집안의 여식이어서 뒷배경이 별 볼 일 없었기에, 그 희빈 장씨와는 달리 인현왕후의 자리를 위협하는 수준까지는 가지도 못했고, 그 아들인 영조도 하마터면 신임옥사 당시에 형인 경종에 의해 제거당할 뻔하거나, 즉위 후에 이인좌의 난을 맞아서 폐위될 뻔하는 등으로 피말리는 권력투쟁을 벌여야 했다.[187]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의 장본인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188] 그런 중국도 포장도로는 매우 부족했다. 로마제국과 동시기의 한나라도 포장도로가 없었다.[189] 다만 "우리나라 땅이 중국과 같이 평탄하면 수레를 쓰는 것이 어렵지 아니하나, 세종조(世宗朝)에도 각역으로 하여금 수레를 쓰게 하였는데, 길이 험하여 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드디어 폐하였습니다. 이제 비록 법을 세울 지라도 또한 쓰지 못할 것입니다. 민간의 평탄한 곳에는 지금도 쓰고 있으나, 참부(站夫)들이 수송하는 데 쓴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문종시기 기록을 보면 수레가 아예 안 쓰인 것도 아니었다.[190] 나라에서 거둔 세금을 한양으로 수송하는 조운 업무를 조운선이라는 배로 수행했던 것이 그 예다.[191] 현대의 일본 역시 해로를 이용한 운송이 매우 중요하다. 이 때문에 일본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해로인 세토 내해의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현지의 7개의 현 소재 대기업들의 출자를 받아서 출범시킨, 희한한 컨셉의 지역 아이돌 그룹인 STU48이 있을 정도다.[192] 박지원이나 홍대용같은 노론 북학파 계열을 제외하면, 통념과는 달리 실학자들 대부분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193] 이런 식으로 국내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해외 사례를 무차별적으로 추종하는 오류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교통 부문만 한정해서 봐도 자전거 활성화나 트램 도입, 철도 민영화와 경쟁체제 도입 시도 등 한둘이 아니다.[194] 아편전쟁 당시 영국이 대운하를 막자 청은 바로 항복했고, 쿠로호네 사건 당시 막부가 순순히 개항했던 이유 역시 수운 차단 우려 때문이었다.[195] 물론 운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수양제는 운하공사를 단기간에 끝내고자 백성들을 지나치게 동원했고, 또 수송 편의라는 당초 목적과는 달리 그걸 기념한답시고 미친듯이 돈을 퍼부어 화려한 용주를 띄워 백성들을 쥐어짜내가며 물길은 물길대로 절찬리에 막아댔다. 이는 수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진다.[196] 게다가 척화비가 세워질 때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1년도 안 되어 폐지된다.[197]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동아시아에서도 수많은 나라들과 민족들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조선보다 더 많은 나라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동남아와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서아시아 및 유럽 지역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거리가 멀어서 무역을 하기엔 한계가 있었다.[198] 그리고 고려시대에 아라비아인 등 중동 사람들과의 무역도 있었지만 이는 세 차례 밖에 없었다고 한다.[199] 물론 데지마 등 부분적인 교류는 있었으나 그 외의 구역들은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에도 이전 시대보다 폐쇄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200] 명나라쇄국정책을 한 바는 있지만, 이쪽은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해안가 지역이 초토화된 탓에 외국과의 제대로 된 해상 무역이 불가능했던 탓이 크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의 최우방국인 조선과의 조공무역조차 왜구 탓에 만주를 거쳐가는 육로를 이용해서 실시했을 판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쪽은 본격적인 쇄국 정책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201] 1956년 생인 유명 요리사 임지호SBS의 예능 프로그램인 힐링캠프에 출연하였을 때, 자신의 생모가 씨받이로 들어온 사람이었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즉,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 이런 악습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임지호의 집안은 안동시의 유서깊은 양반 가문이었고, 그가 태어났던 1956년은 6.25 전쟁이 끝난 지 고작 3년밖에 안 되었을 때다. 당연히 아이 낳을 사람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인지라 궁여지책으로 일종의 대리모 역할을 할 사람을 구하느라 생긴 임시적인 행위가, 상습적인 악습이라고 와전된 데서 씨받이 얘기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202] 현대에도 세월호 사고9.11 테러, 코로나19 범유행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대상자를 유기하는 행위가 드물지않게 발생한다. 하지만, 당연히도 이것이 고정된 악습으로 남는 건 아니므로, 경신대기근 때도 식량난과 이로 인한 생활고로 고생하던 한 남성이 자신의 어머니를 길가에 유기하고 달아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당대에도 천륜을 저버린 비상식적인 행위라며 왕인 현종에게 상소까지 올라와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바 있다.[203]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이런 식으로 들어온 후처였다.[204] 그런데 6.25 전쟁 당시 북한은 남한보다 발전되어 있었으니 일뽕의 논리대로라면 도리어 북한이 남한을 지배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205] 즉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악질 부르주아를 조선, 그리고 악질 부르주아를 무찌르려는 프롤레테리아 혁명의 주체가 김일성이라는 것, 여기서 김일성을 일제로 바꾸면 일빠의 논리와 비슷해진다.[206] 정작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야말로 북한과 같은 암흑기라며 까는 의견이 있다는 점에서는 아이러니#[207] 헌병에 해당한다.[208] 다만 나중에는 조선의 시스템이 점차 무너지면서 세도정치가 출현하긴 했다.[209] 물론 법적으로 이랬다는거고 실제로는 보호받지 못하는 케이스가 많기는 했다. 그래도 주인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노비들도 여럿 존재한 걸 보면 북한보다 훨씬 낫다.[210] 심지어 여자 노비가 죽은 남편으로부터 상속받은 땅을 지키고자 관아에 소송을 걸어서 그 소유권을 인정받았던 사례도 있었다.#[211] 북한의 고난의 행군처럼 세대가 갈수록 신장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임과 동시에 대다수 피지배 주민들의 생활을 고의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어 체제 유지에 이용했다.[212] 다만 양반 신분 한정이다.[213] 일본은 나치 독일의 '단종법(斷種法)'을 좇아 1948년부터 1996년까지 지적장애인, 정신질환자, 유전성 질환자 등을 대상으로 강제로 인공중절 수술이나 불임수술을 받게 하는 우생보호법을 시행했다.[214] 전체적인 국력이나 역량은 일본이 조선을 능가했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아직 조선을 완전히 능가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215] 사실 중국의 중화사상을 수용해 자국을 높이고 외부 세력을 오랑캐라 비하하는 것은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만 그랬던 게 아니다.[216] 현재에도 일부 진영에서 중국과 북한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문제를 극복하고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는 것처럼# 조선 또한 병자호란 등 청나라로부터 오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임진왜란으로 험악해진 대일관계를 완화하려는 의도가 존재했다.[217] 다만 이 때문에 오히려 일본에서는 일본이 임진왜란의 승전국이라 조선이 일본에게 숙이고 들어갔다는 혐한적인 관념이 퍼지게 되었다.[218] 남자가 집을 해와야 한다는 관념은 조선시대에 전통적인 장가 풍습이 무너지며 남녀균분상속이 줄어들고, 장남이 재산을 가지게 된 풍습이 해방 후 산업화가 되면서 변질된 것이다.[219]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직접 화를 내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조선 왕조의 중앙집권적 가치를 일본의 봉건제보다 우월한 제도로 옹호하는 모습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