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격인 영국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에 대한 내용은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문서 참고하십시오.
인도 제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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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India[1][2] | इंडिया[3] | [4]ہند | ||
대영제국의 식민지 | ||
국기[5] | ||
상선기[6] | 문장[7] | |
Heaven's Light Our Guide 천국의 빛 우리의 인도자 | ||
상징 | ||
국가 | God Save the King | |
[8] | ||
1858년 ~ 1947년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 자치령 | |
무굴 제국 | 파키스탄 자치령 | |
위치 | 인도 반도, 미얀마[분리] | |
수도 | 캘커타(1858 - 1912)[10] 뉴델리(1912 - 1947)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국왕 (1858~1876) 황제 (1876~1947)[11] | |
정부수반 | 부왕 겸 총독 | |
주요 총독 | 찰스 케닝 자작 (1858~1862) 조지 커존 후작 (1899~1905) 쳄스포드 자작 (1916~1921) 린리스고 후작 (1936~1943)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1947) | |
언어 | 영어, 힌디어, 우르두어, 벵골어, 버마어 등 | |
민족 | 영국인, 인도인, 버마인, 싱할라인, 네팔인 등 | |
종교 |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시크교, 불교 등 | |
면적 | 4,903,312km2 (1937) 4,226,734km2 (1947) | |
인구 | 2억 5,500만명 (1939) | |
주요사건 | 1767년 인도 지부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 1857년 세포이 항쟁 → 바하두르 샤 2세의 강제 퇴위 → EIC령 인도 성립 1858년 인도 제국 전환 1885년 인도국민회의 성립 1919년 ~ 1947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저항 운동 1935년 신인도통치법 제정 1947년 해체 및 인도 분단 발생, 인도, 파키스탄 독립 | |
통화 | 영국령 인도 루피 | |
영토내 현재 국가[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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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印度, India), 통칭 영국령 인도(英國領印度, British Raj) 혹은 인도 제국(印度帝國, Indian Empire)은 1858년부터 1947년까지 89년간 존속한 인도의 제국이자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 인도 역사상 영토가 가장 컸으며 인도 역사상 인도반도 전역을 통일한 유일한 국가였다.[13][14] 당시에는 '인도 제국'이 아니라 그저 '인도(India)'라고 불렸으며, 비공식적으로만 '인도 제국(Indian Empire)'이라고 불렀다. 모든 지역들이 영국령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지역들과 영국이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수백 개의 소규모 토후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15]1857년에 영국에 대항하여 인도인들 사이에서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아예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단한 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시켰고, 그때까지 인도를 대리통치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지배권을 양도했다.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1876년에 인도 황제에 즉위했고, 후대 영국 국왕들이 그녀의 뒤를 이어 인도 황제위를 물려받으며 1947년까지 제국 체제를 유지했다. 이후 1947년에 인도 제국이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나뉘어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의 역사도 끝난다.
한편 인도 제국은 당시 단일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부양하던 국가였으며, 왕관의 보석이라는 별명답게[16] 대영제국의 최대 식민지[17]이자 풍부한 자원 덕에 가장 가치가 높은 식민지이기도 했다.[18] 또한 인도 제국은 식민지였음에도 동군연합 관계의 황제국도 겸하였기에, 국제 외교무대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으로서 국제연맹의 창립 회원국이자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국으로서 1945년의 국제연합의 창립 회원국이었다. 물론 인도 제국의 외교, 국방 및 대외정책은 인도인이 아니라 영국에서 임명한 백인들의 총독부가 주도하였다. 인도 제국 정부의 구성원들이 인도인이 아니라 영국인인 만큼, 당연히 외교 및 국방도 영국과 한통속이었다.
당사국인 인도에서는 이 시대를 British Raj(영어)/ब्रिटिश राज(힌디어)이라 표현한다. 영역(英譯)하면 'British Kingdom, British Realm' 정도의 의미를 가지며, 한국어로 표현하지면 영제(英帝)시대로, 인도 제국이 식민지가 아닌 무굴 제국과 같은 이민족 왕조와 비슷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영국 통치하 인도(British rule in India)로 의역하여 표현한다. 보통 세포이 항쟁이 완전히 진압되고 영국이 동인도회사 대신 직접 지배를 시작한 1858년을 시작으로 친다.
2. 영토
인도 제국의 최대 영역 |
1858년부터 1937년까지는 예멘의 아덴 지역이, 1858년부터 1937년까지는 하부 버마가, 1886년부터 1937년까지는 상부 버마가, 1884년부터 1898년까지는 영국령 소말릴란드, 1858년부터 1867년까지는 해협식민지[23]까지 모두 인도 제국의 관할이었다. 다만 1867년에 싱가포르가 별개의 식민지로 독립하고 1937년에는 버마와 아덴이 별개의 식민지로 분리해 나와서 최종적으로는 인도, 파키스탄, 동파키스탄[24] 지역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페르시아 만의 일부 식민지들은 인도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인도 제국의 루피화를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 대륙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섬나라인 스리랑카 지역은 1802년에 아미앵 조약으로 영국의 소유가 되었으나, 영국령 실론이라고 해서 인도와는 별도로 관리되었다. 또한 북동쪽에 자리하던 네팔과 부탄은 영국군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고, 험난한 지형과 이렇다할 자원이 없는 척박한 땅이었던 터라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25] 서쪽 해안의 몰디브 역시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인도 제국에 속해있지는 않았다.
인도 제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미얀마, 아덴, 말레이시아 해협식민지 등 상당수의 영토들이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청난 면적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현재 인도의 140%에 달하는 영토를 자랑했다. 기후적으로도 히말라야산맥의 만년설 덮인 산봉우리부터 사막, 열대우림과 온대 기후의 평원까지 매우 다양했으며 인구도 무려 5억 5천만 명에 달하면서 당시 세계 인구의 24%를 독점하며 가장 인구가 많은 식민지이기도 했다.
3. 인구
1931년 인도 제국의 인구 밀도[26] |
다만 이런 인구 폭증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인구가 늘어나고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면서 인도 사회가 전염병에 극히 취약해진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특히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의 성지인 바라나시 등은 이때부터 이미 보건 쪽으로는 생지옥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버렸으며 인도 제국 시기 연달아 가뭄과 기근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면역력이 떨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들을 치료할 책임이 있는 영국 식민정부는 인도인들의 죽음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인도인들의 전염병이 영국으로 옮아가지는 않을까, 아니면 인도의 백인 사회까지 영향이 미치지는 않을까 따위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29] 덕분에 당시 인도의 보건 상황은 가히 최악이었다. 그 유명한 테레사 수녀가 빈민들의 비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고 이들을 살리겠다고 활동한 곳도 바로 이 인도 제국이었다.
종교로 따지면 힌두교 신자들이 1921년 기준 약 216,734,586명으로 68.56%를 차지하며 가장 많았고, 그 뒤를 68,735,233명의 무슬림들이 21.74%로 뒤를 이었다. 불교가 11,571,268명으로 3.66%였고 그 외에도 부족 신앙이 9,774,611명으로 전체의 3.09% 정도였다. 또한 기독교(성공회) 국가인 영국이 열심히 기독교를 포교하였기에 기독교 신자도 4,754,064명으로 약 1.5% 정도를 차지했고,[30] 시크교 교인들이 1.02%, 자이나교 신자들이 0.37% 정도 존재하고 있었다.
4. 국기
인도 제국의 깃발들 | ||
상선기 | 해군기, 선수기 | 인도 총독 상징기 |
오른쪽 깃발은 인도 총독[31]의 상징기이다. 1885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보통 유니언 잭과 함께 게양하는 것이 관례였다.[32] 유니언 잭과 다른 점이라면 중앙에 '인도의 별'이 있고 그 위에 영국 왕관[33]이 그려져 있다는 것. 1900년대에 상선기가 유니언 잭 대신 인도를 대표하는 깃발로 확고히 자리잡기 전까지는 이 총독기가 인도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이름이 '총독기'이기는 하지만 총독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주지사(도독)들이나 지방 관료들도 이 깃발을 종종 쓰곤 했다.[34] 하지만 배에서만큼은 예외가 있었으니 오직 총독이 승선한 배만이 주 돛대에 총독기를 게양할 수 있었고, 그 외의 인물들이 이 깃발을 배에 걸려면 무조건 선수에만 걸어야 했다. 인도가 처음으로 자체적인 대표팀을 꾸려서 나온 1920 안트베르펜 올림픽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이후부터는 국제대회 등에서 인도 제국을 상징하는 깃발로 사용되었다. 1920 올림픽(디시인사이드) 1928 올림픽(영어 위키백과) 1932 올림픽(디시인사이드) 1936 올림픽(영어 위키백과) 단 1924 파리 올림픽 당시에는 상선기를 상징기로 내걸고서 대회에 참가했다. (디시인사이드)
자세한 깃발들에 대한 정보는 영어 위키백과를 참고.
5. 역사
자세한 내용은 인도 제국/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6. 정치
1931년 인도 제국의 행정구역 고화질 |
이름은 거창한 '인도 제국'이었지만, 아무리 영국이라도 그 거대한 인도 아대륙을 모조리 통치하기에는 행정력의 한계가 있었다. 특히 오래전부터 지방을 주름잡아온 토후 세력들이 지나치게 강력했기 때문에 영국이 마음대로 인도 전역을 직할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영국은 지방 토후들을 '번왕'으로 인정해주고 이들의 충성과 세금을 받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를 시행했다. 덕분에 토후들은 기존 영토에서는 왕으로 군림하면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는데, 이것을 인도 번왕국이라고 부른다.
인도 제국의 영토는 영국 식민당국이 직접 지배하는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와 토후들이 따로 지배하고 영국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도 번왕국(Princely State)'으로 나뉘었다. '영국령 인도'는 인도 총독, 혹은 영국 국왕의 대리인들이 직접 통치하는 영국 직할령이었다. 20세기 초반 영국령 인도는 총 8개의 행정구역과 몇몇 개의 군소 지방령들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행정구역에는 총독 대리, 주지사, 부지사 등이 파견되었는데 그 목록과 관할 관리, 관할 영역 등은 아래와 같다.
<rowcolor=#fff> 행정구역 (1907년 기준) | 면적 | 인구 | 관할 관리 |
벵골 (방글라데시, 서벵골, 비하르, 자르칸드, 오디샤) | 390,000 km2 | 7천 5백만 명 | 주지사 |
연합 주 (우타르프라데시, 우타라칸드) | 280,000 km2 | 4천 8백만 명 | 주지사 |
마드라스 (안드라프라데시, 타밀나두, 케랄라, 카르나타카, 오디샤, 텔랑가나) | 370,000 km2 | 3천 8백만 명 | 주지사 |
펀자브 (펀자브, 이슬라마바드, 하리아나, 히마찰프라데시, 찬디가르, 델리) | 250,000 km2 | 2천만 명 | 주지사 |
봄베이 (신드, 마하라슈트라, 구자라트, 카르나타카) | 320,000 km2 | 1천 9백만 명 | 주지사 |
중부 지방과 베라르 (마디아프라데시, 마하라슈트라, 차티스가르, 오디샤) | 270,000 km2 | 1천 3백만 명 | 수석 판무관 |
버마 (미얀마) | 440,000 km2 | 9백만 명 | 주지사 |
아삼 (아삼, 아루나찰프라데시, 메갈라야, 미조람, 나갈랜드) | 130,000 km2 | 6백만 명 | 수석 판무관 |
영국이 간접적으로 통치했던 인도 번왕국은 기존의 라자나 왕들이 알아서 자치를 누렸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할 1947년 무렵, 인도 제국에는 무려 565개에 달하는 번왕국들이 존재했다. 다만 압도적 다수의 번왕국들은 매우 영토가 작았고 인구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565개에 달하는 번왕국들 중 200여 개의 왕국들의 영토는 고작 20km2보다 작았다. 대부분의 라자들은 고작 서울시 구로구만 한 수준의 왕국을 다스렸다는 이야기. 이렇게 작은 번왕국의 라자들은 외교, 조세권 등은 모두 영국에게 위탁하고 대신에 그 조그마한 왕국 내에서는 신처럼 대접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번왕국들은 위처럼 왕이라기보다는 구청장에 더 가까웠지만, 일부 왕국들은 웬만한 나라보다도 거대한 영토를 거느리고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하이데라바드 왕국, 잠무 카슈미르 왕국, 마이소르 왕국 등이 있다. 이들을 포함한 약 21개의 번왕국들은 자치정부를 따로 가지고 있어서 조세, 내정 등 일부 분야에서는 독립적인 행보를 보일 수 있었다. 영국 역시 이 번왕국들이 세금과 자원만 꼬박꼬박 바치고 반란을 모색하지만 않는다면 딱히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번왕국들 사이에서도 당연히 격이 존재했다. 인도 제국 내에서는 경례용 예포 수로 번왕국들의 격을 표시했다. 번왕들을 맞이할 때 발사하는 예포의 수로 격을 나눈 것이다. 21발, 19발, 17발 등등 순서대로 예포의 수가 많을수록 격이 높았다. 가장 높은 격의 21발은 바로다 왕국, 하이데라바드 왕국, 잠무 카슈미르 왕국, 마이소르 왕국, 괄리오르 왕국 이렇게 5개의 왕국들만이 받는 최고의 예우였고 그 아래로 갈수록 19발, 17발, 15발 등등 순서로 격이 낮아졌다. 모든 번왕들이 예포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600여 개에 달하는 번왕국들 가운데 예포를 쓸 수 있는 왕국은 고작 117개에 불과했다.[35] 참고로 무굴 제국의 후계자이자 인도의 최고 권력자인 영국 국왕은 101발의 예포를 사용했다. 아래는 가장 중요하게 대접받고 영국 중앙정부와 직접적인 영향을 맺었던 5개의 번왕국들의 목록이다.
<rowcolor=#fff> 번왕국 | 면적 | 인구 | 수입 | 통치자의 직함, 종교 | 예포 수 |
바로다 왕국 | 35,913km2 | 3,343,477 | 32,326,000루피 | 마하라자, 힌두교 | 21발 |
하이데라바드 왕국 | 214,187km2 | 16,338,534 | 158,243,000루피 | 니잠, 이슬람교 | 21발 |
잠무 카슈미르 왕국 | 218,779km2 | 4,021,616 | 46,395,000루피 | 마하라자, 힌두교 | 21발 |
마이소르 왕국 | 76,296km2 | 7,328,896 | 100,138,000루피 | 마하라자, 힌두교 | 21발 |
괄리오르 왕국 | 68,368km2 | 4,006,159 | 35,675,000루피 | 마하라자, 힌두교 | 21발 |
인도 본토에선 캘커타의 인도 총독이 실무를 담당했다. 총독은 국왕 대리이자 인도 내 최고 권력자로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총독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런던의 인도부 장관과도 협의를 거쳐야 했고, 게다가 인도 현지 의회와도 협의를 따로 해야만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권력의 견제가 일찍부터 이뤄졌던 영국이었기에, 총독 역시 영국 국왕처럼 의회의 견제를 받았던 것이다. 총독들은 당연히 이런 시스템을 귀찮아했다. 캐닝 총독은 아예 업무를 의원 개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의원 개개인을 마치 1인 집행부처럼 만들어서 일상적인 업무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했다. 물론 중요한 업무는 총독의 동의가 필요했고, 총독이 동의하지 않을 시 의회 전체의 동의를 구하도록 했다.
인도 총독은 영국 국왕이 직접 임명했고, 고정 임기는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5년 정도 재임했다. 연간 25만 파운드에 달하는 고액의 연봉을 받기도 했다. 총독은 단순한 국왕 대리일 뿐만 아니라 인도 현지 의회의 의장이기도 했다. 인도 현지의 의회는 양원제를 채택해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어졌는데, 총독은 상원의장직을 겸직했고 하원의장직은 총독이 임명한 주지사가 맡았다. 5년 임기의 상원의원은 58명, 3년 임기의 하원의원은 141명이었다. 다만 총독이 임기 내에 상하원 모두 해산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서 의원들이 임기를 끝까지 다 채운다는 보장은 없었다. 총독의 권한은 매우 막강해서 인도 현지의 의회가 반대한다고 해도, 국왕과 런던의 의회가 동의하면 그냥 현지 의회를 무시하고 원하는 법 제정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새 법을 제정할 때에는 인도 현지에서 '입법위원회'를 조직했다. 2년 임기의 위원 12명으로 구성된 입법위원회에서 법을 제정하면, 이 법이 런던의 인도부 장관에게 보내졌고 장관이 이를 허가하면 그때부터 효력이 발휘되는 방식이었다. 입법위원회 위원들의 절반은 영국 관료들이었지만 의외로 인도인들이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도인들이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기 때문. 물론 그래봤자 인도 출신 입법위원들은 죄다 친영 성향의 지방토후 출신이었기에, 영국 아래에서 고통받던 인도인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했다.
7. 군사
자세한 내용은 인도 제국군 문서 참고하십시오.8. 경제
PPP 기준으로 한 영국인과 인도인의 수입 비교[37] |
당시 인도는 결정적으로 자원을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인도의 경제 규모는 생각보다 빠르게 발전하지 못했다. 당시의 유럽 열강들의 엄청난 고도 성장을 생각해보면 1% 대의 성장률은 거의 퇴보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모두 식민지화되기 전보다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지만 대부분의 자본들이 영국인 자본가들의 소유거나 국가 소유였기에 인도인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주요 산업은 여전히 농업이었으며, 대부분의 농부들이 백인 지주들이나 소수의 인도 영주들에게 잡힌 농노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무거운 세금을 바쳐야 했다. 게다가 물가는 끊임없이 상승했던 것에 반하여 임금은 도저히 오를 생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인도가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무굴 제국 시기 25%에 달했던 것에 비하여 식민지 시기에 5%까지 추락했다.[38]
이 시대에 무굴 제국 시기 인도의 최고 산업이었던 면직 산업은 몰락했다. 1813년 동인도회사가 영국과 인도의 무역을 장악한 이래 산업 혁명으로 가성비가 대단히 저렴한 영국산 직물들이 인도로 엄청나게 수입되어 쏟아져들어왔다. 1814년에 인도는 약 1백만 야드의 솜을 국외에서 수입하고 있던 것에 비해서 1890년에는 무려 20억 야드에 달하는 솜을 영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인도인들에게 '자유 무역'을 강요했던 주제에 자신들보다 더 저렴하게 면을 찍어낼 수 있는 미국 등 타 거래처가 인도에게 면직물을 수출할 때에는 30%에서 70%에 달하는 초고율 관세를 때려버렸고, 덕분에 영국산 면직물은 인도에서 독점에 가까운 위상을 갖추고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인도의 전통적인 면직물 생산업자들은 자본과 설비에서 영국을 따라갈 수 없었고 결국 인도는 한때 세계 최대의 면직물 생산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880년에는 오직 국내 수요의 25%만을 겨우 생산해냈다.
다만 인도 면직물산업이 몰락을 영국의 의도한 건 아니었다. 수출에만 관세를 먹였을 뿐 인도 내에서 생산 및 소비할 물품들은 사실상 자유경쟁이었다. 그리고 인도 내수시장은 충분히 컸기 때문에 경쟁력만 있다면 내수만으로도 충분히 산업을 지탱할 수 있었다. 인도 내에서까지 영국에게 패배한 것은 양국의 산업 경쟁력이 뒤집혔기 때문이다. 인도는 무굴제국이 몰락하면서 혼란기가 찾아왔고 그 자체로 농촌이 쇠퇴했는데, 계속된 전쟁으로 세율이 높아지고 근로의욕까지 떨어지면서 면직물 산업만이 아닌 인도 산업 전체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됐다. 여기에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와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영국 면직물 산업의 경쟁력이 극도로 올라갔다. 이 결과로 인도의 면직산업이 완전히 몰락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본국의 이익을 위해 이 상황을 그냥 내버려뒀다.
현재 인도 최대 그룹인 타타의 창업주인 잠셋지 타타가 바로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한다. 타타는 1877년에 봄베이에 직물 회사를 설립하고 인도산 솜과 영국에서 수입해온 기계들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사업을 확장하면서 이집트산 솜과 더 성능이 좋은 미국산 기계들로 공장을 차렸고, 이를 통해서 얼마가지 않아 영국산 면직물과도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세를 불렸다고 한다. 면직 산업으로 자본을 모은 타타는 1890년대에 중공업에 도전했고 인도 정부의 집요한 간섭에도 불구하고 '타타철강회사'를 설립하여 1908년에 공장을 차리고 아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이후 40여 년 동안 타타는 탁월한 경영력과 운이 겹치며 무려 12만 명에 달하는 직원들을 고용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성장한 타타 그룹은 인도의 민족자본으로서 고임금과 높은 기술력 등으로 뭇 인도인들의 선망을 받는 회사가 된다. 다만 타타그룹은 인도 국민회의와 독립 세력들에게는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았는데 기득권층들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인도국민회의 등이 지나치게 영국에게 호전적이고 급진적인 세력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8.1. 철도
영국이 인도에 설치한 철도 | 인도 제국의 철도 지도 |
인도 식민정부는 영국의 부유한 자본가들에게 토지를 제공할 테니[39], 인도의 철도 건설에 투자해 줄 것을 요청했고 최소 매년 5%에 달하는 수익률을 제시하면서 영국 자본시장으로부터 막대한 자본을 끌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철로들은 모두 기업들의 소유였고 최소 99년 간 임대하면서 상당한 양의 수익들을 챙겨갔다. 당시 인도에는 크게 2개의 철도 회사가 있었다. 하나가 '대인도반도 철도회사(GIPR)'였고 나머지 하나가 '동인도 철도회사(EIR)'이었다. 이들은 1853년에 봄베이와 캘커타를 운행하는 열차를 처음으로 개설했고, 1859년에는 알라하바드와 칸푸르를 연결하는 첫 승객용 열차를 개통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총 5개의 대규모 철도회사들이 인도의 철도시장을 갈라먹는 형태가 되었으며 이 5개의 철도회사 모두가 백인 소유의 영국 회사였음은 당연하고 모두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방식으로만 운영하였다. 정부는 이같은 운영에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았고 기업들은 정부의 방관 속에 인도인들의 고혈을 짜내가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치중하였다.
1854년에는 달후지 경이 인도의 지방 도시들까지 촘촘하게 철도망들을 건설한다는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힘입어 영국 본토에서 막대한 자본을 들여와 철로들을 깔아대면서 인도의 철도망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삼 주와 라자스탄 주 등이 독자적인 철도 체계를 가질 정도로 철도들이 많이 깔렸고, 1860년부터 1880년 사이에 인도의 총 철로 길이는 1,349km에서 25,495km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 철도들의 대부분은 3개의 대도시인 봄베이와 마드라스, 캘커타를 잇는 산업용 열차였다. 게다가 1857년의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당국이 이 철로를 반란지대로 병사들을 빠르게 이송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게 되면서 철도들은 1900년대까지도 꾸준하게 증가했다.
철도의 주 목적은 석탄, 철광석, 면화 등을 본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항구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이야 1등석 혹은 2등석에 앉아서 갔으나 인도 현지인들이 타는 3등석은 시설도 위생도 최악이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영국인들도 인도인 객차들의 상태를 보고 지나치게 관리를 안 하는 거 아니냐고 한탄했을 정도. 철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도 없었다. 모든 기술은 오직 백인 남성에게만 한정되었고 인도인들에게 기술을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뭄바이의 빅토리아 역[40] |
영국의 일부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면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이 철도의 건설이다. 주로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며 철로를 건설하고 일자리들을 제공하면서 인도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요지인데, 영국은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 기술자들이 그랬듯이 인도인들에게는 절대 핵심 기술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정작 인도인들은 온갖 험한 대우를 받으며 백인 노동자들에 비해서 훨씬 극악한 환경 속에서 적은 임금을 받고 노가다 일했다. 게다가 철로 역시 주로 군수물자 수송과 병사 운송, 아니면 물자 침탈 등 주로 인도인들에게 좋을 것 하나없는 목적으로 가동되었고, 철도회사들이 오직 이윤만을 노린 자유지상주의식 경영을 했기에 말그대로 인도인들의 경제를 망가뜨린 주범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인구 폭증으로 인한 식량 문제 등으로 인하여 중국의 쿨리처럼 수많은 인도인들이 해외 노동자로 나가서 일하였고 이들은 중국 화교처럼 모리셔스, 피지, 가이아나, 수리남,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에서 정착하여 인도 교포가 되었다.
사실 인도의 철도 건설은 복합적인 면이 존재하며 하나로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면이 분명히 있다. 영국은 분명히 인도의 풍부한 물산을 본토로 빼내기 위한 목적으로 철도를 깔았고, 빠르게 군대와 군수물자들을 인도 곳곳으로 이동시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철도를 깔았다. 애초에 철도 증설의 목적이 인도의 착취에 있었던 것이다. 허나 철도 건설은 인도 내부에서의 물산 이동량을 증가시켰고, 상대적으로 고립되어있던 인도의 시장을 하나로 묶어내었다는 효과도 가져왔다. 물론 그러한 장점들은 영국의 수탈량에 상쇄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인도에게 마이너스 효과를 불러왔을 뿐이었다.
9. 사회
인도인들의 시중을 받는 백인 상류층 | 콜카타 시내의 모습 | 인도인들을 부리는 영국 장교 |
사회의 하류층을 구성하는 인도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매우 살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세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식민정부나 대기업, 혹은 지주들에게서 '월급을 받는 형식'으로 돈을 벌었다. 이같은 기형적인 구조는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이 정상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면 절대로 나타나면 안 되는 구조였다. 쉽게 말해 이들은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아니었으며, 영국이나 부유계급에게 예속된 노예에 더 가까운 위치였다는 것이다. 정부나 고용주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물건들의 대부분을 떼가니 사람들은 극도로 가난에 시달렸고, 영양실조와 질병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영국인들이 소위 문명화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서구의 의료체계와 약들을 가지고 오면서 상황이 아주 약간 개선되기는 했지만, 의료기술의 혜택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서구식 설비를 갖춘 병원에서 제대로 진료받을 수 있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1911년의 인도의 평균 기대수명은 21세에 불과했고,[42] 전쟁으로 인해서 상황이 악화되었던 1946년 즈음에는 인도인 1명이 1년 동안 섭취하는 식량의 무게가 137kg 밖에 되지 않아 세계 최하위권을 달렸다.
특히 영국은 인도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벵골 지방을 집중적으로 수탈했다. 세리들에게 서로의 실적을 경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초고세율을 사람들에게 물리도록 시켰고, 농민이나 공장 노동자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생산품들을 약탈해가다시피 착취해버렸다. 이같은 경향은 아직 영국이 식민지 통치에 미숙했던 1700년대 후반에 그 절정을 찍었다. 게다가 이 당시 겹쳐서 일어난 벵골 대기근으로 인해서 당시 벵골 인구의 3분의 1이 그대로 증발해버릴 정도로 사회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인도 제국은 다른 세리들을 여러 차례 보내거나 세금에서 거래비를 제하고 나중에 따로 세금을 매기는 등 교묘한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이중과세를 물렸고, 당시 자본주의에 미숙했던 인도인들은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게다가 토지세 뿐만 아니라 의복세, 소금세 등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만들어 돈을 빨아들였고, 영국이 부유해지는 만큼 인도인들은 반대급부로 더욱 빈곤해졌다. 특히 한때 인도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벵골 지방은, 얼마 가지 않아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인도 제국이 이렇게 착취해서 뜯어낸 세금의 3분의 1은 인도에 쓰이지 않고 그대로 영국으로 보내졌다. 영국은 이를 이용해서 자국이 유럽이나 북미에서 벌이는 사업에 투자하는 등, 인도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 정도로 취급했다.
인도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범죄는 최소한의 처벌만을 받았다. 자신의 인도인 하인을 총으로 쏴죽인 영국인은 6개월의 징역형과 고작 100루피라는 벌금을 물었다. 반면 영국 여성에 대한 강간 미수로 잡힌 인도인은 2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200여년에 걸친 영국 통치 기간 동안 인도인들을 살해한 혐의로 영국인이 처형된 사례는 고작 3건에 불과했는데, 반면 영국인들은 수 천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을 살해했고 그중 상당수는 제대로 처벌되지조차 않았다. 영국인이 인도인을 죽이는 건 언제나 '사고'였고 인도인이 영국인을 죽이는 건 죽을죄였다. 영국인 주인이 인도인 하인의 배를 발로 차죽였을 때에도 인도인이 말라리아 때문에 비장이 비대해진 탓이라고 판결내리는 수준이었다.
10. 교육
토머스 베빙턴 맥컬레이 (Thomas Babington Macaulay) |
19세기 중반, 런던의 인도의회 정치인 토머스 베빙턴 맥컬레이(Thomas Babington Macaulay)는 인도를 '문명화'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영국의 교육 시스템을 도입한다. 맥컬레이는 영국의 언어와 문화를 도구로 사용하여 인도인들이 서구의 지식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하여 인도인들 사이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고자 했다. 얼핏 들으면 좋은 뜻을 가진 정치인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멕켈레이는 한 유럽 도서관의 단 한 책장이 인도와 아라비아의 모든 토착 문학보다 가치있다고 주장하기도 한, 상당한 오리엔탈리스트(=서구우월주의자)였다. 이러한 관점은 인도에서 추진한 교육 정책에 크게 반영되었는데, 특히 멕켈레이는 서양의 교육 방식을 도입하는 것 뿐만 아니라 동양 철학과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나 교육원들을 폐쇄하는데에도 주력했다.
이렇듯, 영국인들은 식민지를 더 확실하게 통치하고 말이 통하는 협력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도인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데에 관심을 쏟았다. 초반에는 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영어나 기본적인 글쓰기들을 가르치는 학당을 중심으로 서구식 교육을 했고, 1835년 당시에는 이 선교 학교들의 설치를 장려하면서 벵골에만 10만 개의 학당을 두고 전체 학령기 소년들의 13.2% 정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동인도회사는 정부의 입김이 확실하게 들어간 공공 학교들을 세우면서 이들로 하여금 선교사들의 학교를 몰아내게 만들었다. 동인도회사 주도의 학교들은 주로 영어와 기본적인 산수를 가르치면서 기초적인 초등교육 수준에 중점을 두고 인도인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커리큘럼들이 지나치게 암기식 위주의 수업이었다. 실생활에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멕켈레이의 사상에서 주된 목적 자체가 인도 고유의 언어를 몰아내고 영어가 그 자리를 대체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같은 교육 정책은 효과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힌두교도나 무슬림, 페르시아인들 모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서 소통하기 시작했으며, 이같은 경향은 현재까지도 이어 내려오고 있다.[43]
인도의 첫 근대적 대학인 뭄바이 대학교 |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도 설치했다. 주로 상류층들의 자녀가 대상이었으며,[44] 모든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했다. 1890년 경에는 약 6만 명 정도의 인도인 대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중의 3분의 1은 졸업해서 공무원이 되었고, 3분의 1 가량은 변호사가 되었다. 영국은 대학을 통해서 식민통치에 필수적인 고급행정인력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1890년대 당시 인도의 중급 공무원들 중에 45%가량이 힌두교도 인도인 출신일 정도로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고급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백인 출신 영국인들 밖에 없었다. 특히 대부분이 옥스브리지 출신으로 이들끼리 고위직이나 요직들을 돌려먹었다. 인도 제국은 1880년대에 4개의 종합대학과 67개의 단과대학을 설치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점차 대학교육 규모를 확장시켜나갔고, 1945년에 인도에는 무려 21개의 종합대학과 496개의 단과대학이 운영중이었다. 이같은 대학들은 의도치 않게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모하마드 진나 등 후에 인도 독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키워내는 학문적 산실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독립 이후에도 나름 오래된 역사와 수준높은 교수진들 덕택에 현재까지도 인도 학문연구의 중심지로 오랫동안 남아있다.
이렇듯, 영국 지배 시기 인도에서의 교육은 두 가지 특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영국 식민 정부는 인도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인도인에게는 고등 교육 기회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도인 엘리트 계층이 형성되었다. 둘째, 대다수 인도인에게는 기초적인 교육조차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광범위한 문맹률을 유지했다. 이는 인도 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을 저해했으며, 장기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격차를 심화시켰다.
실제로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영국 지배 시기의 인도에서는 전반적으로 높은 문맹률이 항상 문제였다. 이 시기 인도의 대부분 인구는 글을 읽거나 쓸 수 없었는데, 대부분 인도인들은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받지 못했다. 영국 식민 정부는 주로 도시 지역과 특정 계층에 집중해서 교육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기초 교육 설비가 부족한 농촌 지역이나 저소득층, 특히 여성과 소수 민족은 교육받을 기회가 현저히 적었다. 실제로 이 시기 인도의 문맹률은 일제강점기 조선과 비교해도 많이 낮은 수준으로, 오래 전부터 선교가 진행된 일부 남부 지역과 대도시권역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문해율이 1930년대까지도 10%를 넘지 못했다. 여성 문해율의 경우 그마저도 남성 문해율의 10 ~ 20%에 불과했다. 이렇듯, 영국 주도의 식민지 근대화는 한편으로는 근대 교육 시스템의 도입과 전문가 계층의 형성을 통해 인도 사회의 일부 변화를 촉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다수 인구의 교육 접근성을 제한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시켰다.
11. 델리 더르바르
1877년 빅토리아 여왕의 델리 더르바르 |
굳이 델리 더르바르를 치른 것은 영국 국왕의 인도 황제로서의 지위를 공고히하고 인도의 통치권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국왕에게로 옮겨온 것을 확실히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도 총독 리턴 경은 '인도인들은 작은 호의나 명예의 표시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 황제로 선포하면 인도 신민들이 무굴 제국의 고대 황좌에 그녀의 권위를 두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과거 무굴 제국이 소유했던 인도 전체를 아우르는 황제라는 타이틀을 빅토리아 여왕에게 덧씌우려 했던 것이다.
1877년 치러진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여제 즉위식은 극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1877년 1월 1일부터 약 2주에 걸쳐서 열렸으며, 인도 전역에서 인사온 마하라자, 왕족과 귀족, 나와브들이 참석했다. 공식적으로 84,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고 군악대들이 퍼레이드를 벌였다. 델리 더르바르는 세계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은 전 세계에 이 소식을 떠들었고, 1903년 뉴욕 코니 아일랜드에 개관한 루나 파크에서는 델리 더르바르를 컨셉으로 구역을 만들어 인도식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퍼레이드는 하루 5천 명이 넘게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곧 폐쇄되었지만, 당시 델리 더르바르의 명성이 단순히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세계적으로도 퍼져나갔다는 증거였다.
1903년에는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가 인도 황제ㆍ황후로 즉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델리 더르바르가 치러졌다. 2주간 치러진 1903년의 델리 더르바르는 1877년의 더르바르보다도 압도적으로 화려하게 치러졌다. 당대 인도 총독 커존 경은 심혈을 기울여서 행사를 기획했고, 황량한 평야를 수많은 텐트들로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인원을 동원했다. 이 행사를 위해 임시로 경전철을 깔았고 자체 우표 발행, 임시 우체국 및 상점 설치, 경찰, 병원, 치안 법원 설치는 물론 심지어 경찰 제복마저도 특별히 디자인할 정도로 신경을 쏟았다.
하지만 커존 경에게는 실망스럽게도, 행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7세는 정작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아서 윌리엄 패트릭 앨버트 공작을 대신 파견했다. 커존 경은 앨버트 공작을 맞이한 뒤 인도 전역에서 불러모은 마하라자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관람했다. 커존 경은 어금니에 금으로 된 촛대를 꽂은 코끼리를 타고 축제에 참석했다고.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행사였던 만큼 영국 식민정부도 인도인들에게 행사 홍보영화를 제작해 방영하는 등 행사 홍보에 신경을 썼는데, 이게 인도 영화산업의 시작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1903년 델리 더르바르는 극소수 인도 마하라자들과 영국 고위계급들이 참석한 무도회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이때 어찌나 휘황찬란한 옷차림을 하고 왔던지 커존 경의 아내의 공작새 드레스는 아직까지도 더비셔에 고이 보관되어 있을 정도다.[45]
1911년 인도를 방문해 마하라자들의 문안을 받는 조지 5세. |
다음날인 12월 13일, 조지 5세는 레드 포트의 발코니에 머물며 50만 명 이상을 맞이했다. 옛 무굴 제국의 관습을 따라한 것이었다. 영국군 및 인도군 병사들에게 무려 26,800여 개에 달하는 훈장을 내려줬고, 개중 100개는 특별히 황금으로 만들어 인도 마하라자들이나 영국군 최고위 장교들에게 하사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조지 5세는 기차를 타고 네팔로 이동해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 이후 다음해 1월 10일에 봄베이에서 출발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의외로 이 방문은 인도인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에 효과가 있어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인들의 들끓는 불만 여론을 약화시키고 많은 인원들을 차출해 전쟁에 데려가는 데 성공하는 효과를 냈다.
1936년 1월 조지 5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8세가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델리 더르바르가 치러져야 했고, 에드워드 8세도 1936년 11월 처음이자 유일한 국회 개원식 연설에서도 1937년 대관식 이후 겨울에 더르바르에 참석할 것을 발표했다. 1936년 12월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고 조지 6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당시 인도부 장관이었던 제틀랜드 경과 인도 총독이던 린리스고 경은 조지 6세의 더르바르 계획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탠리 볼드윈 총리와 국왕 주치의는 조지 6세가 1937년 5월의 대관식 직후에 인도까지 장거리 여행을 할만한 정신적ㆍ육체적 상태가 안 된다고 판단해서 이를 뜯어말렸다. 여기에는 조지 6세의 즉위 직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왕이 될 수 없는 상태라는 헛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결국 새로 즉위한 조지 6세의 델리 더르바르는 1937년 이후로 '연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버린다.
그러나 델리 더르바르 연기가 발표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37년 8월, 인도의 독립운동에 가속이 붙는다. 1935년 제정된 인도 정부법에 따라 이미 온건한 독립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고, 1937년 지방선거에서 11개 주 중 7개 주를 장악한 인도 국민회의는 대놓고 인도 독립을 주장했다. 인도 국민회의는 더르바르 행사 보이콧은 물론이요, 그딴 행사에 인도인들의 세금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인도인들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린리스고 총독은 본국의 인도부 장관 제틀랜드 경에게 "만일 왕이 인도를 방문한다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전했고, 제틀랜드 경은 새 총리인 네빌 체임벌린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자와할랄 네루 역시 인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국 정부가 '불행한 사건'으로부터 국왕을 보호하려면 국왕이 영국에 그대로 머물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인도 현지의 상황이 안좋다는 걸 깨달은 체임벌린 총리는 국왕의 인도 방문을 심각하게 재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지 6세가 제 영토인 인도에 가보고 싶다는 입장을 강력히 피력했기에, 이를 만류하는 데에 진땀을 빼야했다. 체임벌린 총리의 설득으로 1937년 10월 국왕 연설문에서 왕이 직접 인도에 가겠다는 언급을 생략했지만, 조지 6세의 압력으로 인해 '관심과 기쁨을 가지고 인도 방문이 가능한 시기를 기대하겠다'는 문구로 대체되었다. 이에 린리스고 총독과 제틀랜드 인도부 장관은 인도의 상황 대신 비용을 구실로 조지 6세의 인도 방문을 연기하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약 100만 파운드로 예상되는 행사 비용을 인도 총독 정부가 지출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마침내 1938년 2월, 체임벌린 총리는 조지 6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안정되고 재정 전망이 더 확실하게 될 때까지 인도 방문을 무기한 연기하겠다'라는 입장 발표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만약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면 조지 6세가 더르바르를 치렀겠지만... 1년 후에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인도 여행은커녕 해외 방문마저도 어려워지며, 조지 6세의 더르바르는 흐지부지되어버린다. 이후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며 델리 더르바르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2. 평가
12.1. 전반적인 평가
피식민지배국이 보는 식민지 시절이 대개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좋게 보지 않는다. 인도 제국은 근본적으로 피정복민들을 착취해서 본국을 살찌우는 식민제국으로서의 한계가 명확했고, 실제로도 존속 기간 내내 인도의 막대한 부를 침탈하여 영국으로 실어나르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 게다가 9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인도인들을 하인으로 부리면서 영국인들의 탐욕을 채웠으며, 인도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대전에 2번이나 참전시키는 등, 인도인들의 뜻은 정책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평상적으로, 심지어 인도에서 기근이 들어 몇 백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들이 발생했을 때에도 영국의 식량 값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엄청난 양의 쌀과 밀들을 영국으로 강제로 수출하도록 했으며, 한때 전 세계 GDP의 25%를 차지하던 경제대국을 전 세계 GDP의 5% 밖에 되지 않는 빈국으로 만들어 버렸다.[46] 당시 인도의 인구가 5억 5천만 명에 달해서 세계 인구의 24% 가량을 차지하던 것을 생각하면 세계 GDP 기여분이 5%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이 인도에서 200여 년동안 강제적으로 수탈했던 인적, 물적 자원들을 모두 환산하면 44조 6천억 달러,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현재 가치로 대략 6경 2,000조 원에 달한다는 연구 조사가 있을 정도다.[47]
흔히 영국의 식민지배가 인도에 민주주의와 의회제도를 정착시키는 데에 공헌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영국이 인도에 선거를 실시하고 의회를 구성한 것은 맞다. 하지만 분리선거구제를 실시하여 극소수의 친영 인도인들에게 제한적인 선거권만을 부여하였고, 종교와 계급, 보유 자산, 영국에 대한 충성도 등에 따라서도 선거권에 차별을 두었다. 영국의 식민통치기 때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인도의 민주주의 제도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은 독립 이후에도 정치적 부침이 끊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인도인들에게 독자적이고 자발적인 민주주의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으며, '영국이 아니었다면 인도는 스스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선민의식과 백인우월주의에 가득찬 식민지주의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영국이 인도에 남긴 폐해는 정치적인 것에만 미치지 않는다. 영국 당국은 섬유, 해운, 철강, 조선 등 한때 인도가 영국보다도 앞섰던 산업 분야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지시했다. 영국 정부는 인도의 제조업 성장을 방해했고 빼돌린 원자재로 자국의 산업만을 육성했다. 인도의 세계 제조업 수출 비중이 18세기 초에 27%였던 것이 독립할 무렵에는 2% 수준으로 추락했고, 인도는 모든 분야에서 타 서구 열강들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열세에 놓여있었다. 인도는 근대식 경제체제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겼다. 그 결과 인도는 그 막대한 잠재력을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강제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하부 구조물 수준으로 가치가 절하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자생중이던 수공예 산업, 가구 산업 등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값싼 영국산 상품들을 판매함으로써 인도를 자국의 독점 시장 그이상 그이하로도 여기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대규모 자본을 손에 쥐고 절대로 인도인들 사이에서 자신들과 비벼볼만한 혁신가들이 탄생하지 못하도록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탄압했다. 이같은 짓거리를 영국은 인도에게 거의 몇 백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해왔고, 초대 인도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는 대놓고 '우리 인도는 소위 선진적이라는 영국이 개입하기 전보다도 훨씬 가난해졌다'라고 비꼴 정도였다.
12.2. 긍정적 일면?
영국이 현대 인도에 남긴 그나마 긍정적인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인도반도라는 거대한 지역에 하나의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영국이 들어오기 전 인도는 마우리아 제국과 무굴 제국 시기 최남단 일부를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정복한 사례가 있었지만 인도반도 전체가 하나의 정치 세력 하에 통치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심지어 독립 이후에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종교 문제로 떨어져 나갔고 시크교도들이 무력 독립운동을 개시하고 있는 게 현재 상황이다.[48]인도와 같은 거대 국가인 중국이 한족이라는 압도적 다수의 민족이 존재하여 수천년간 통일정권을 유지해온 것과 달리 인도는 인도반도에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민족이라 할 만한 주류민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마다 스스로를 같은 민족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종교도 달랐다. 그러니 인도반도 내에 여러 국가들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인도 전체를 정복하고 단일정권하에 지배하였고, 의도치 않았겠지만 피지배민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인도인들의 마음 속에 '인도'라는 국가적 개념과 '인도인'이라는 민족적 개념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영국에 의해 하나의 인도라는 행정적인 체계와 민족의식이라는 정신적인 틀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독립 직후 인도가 분열되지 않은 거대한 대국으로 남아있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일 대영제국이 인도 전역을 통합하지 못했다면 현재의 인도 대륙에는 수십 개의 왕국이나 공화국들이 가득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영국은 인도의 여러 전근대적인 악습들을 철폐했다. 일례로 1829년 인도에게 2,000년간 지속되었던 순장 풍습인 사티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물론 영국의 행위는 식민통치의 편리성을 위해서 힌두교 계급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으며 지금도 사티 풍습은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지만, 영국이 법으로 사티를 금지시킨 것은 결과적으로 인도의 인권 면에서 일대업적을 이룬 것은 확실하다.
또 고고학적인 성취도 영국이 남긴 그나마 긍정적인 영향에 속한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들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고,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영국 식민지배기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에 성공한 샹폴리옹이 있다. 영국은 화려한 인도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정작 인도인들은 찾아보지도 않던 고대 도시들을 발굴하고 비문들을 해독하는 등 고고학적인 조사를 많이 진행했다. 덕분에 인도 문명의 뿌리인 모헨조다로 유적과 고대 인더스 문명이 영국 식민통치기에 그 존재가 드러났으며, 탁실라 지방의 거대한 석조 비석의 탁본을 떠서 고대 산스크리트어를 해석하는 등 고고학적인 진전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고대 인도어와 유럽어를 비교해서 세계 최대의 어족인 인도유럽어족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도 영국의 언어학자 토마스 영이었다. 그 외에 영국 군인 알렉산더 커닝엄은 대표적 불교 유적인 탁실라를 발굴하고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다고 알려진 사르나트의 녹야원을 발굴, 그 외에도 여러 고대 힌두 사원들을 발굴해서 복구하기까지 했다.
다만 이 역시 긍정적인 부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밝혀낸 고고학적 성과들을 오리엔탈리즘적인 입맛에 맞추어 바꾸어 썼고, 기본적으로 인도 문화가 유럽에 비해서 '열등'하다고 여기고 작업했다. 이에 맞춰 학문적 성취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도유럽어족의 존재이다. 영국인들은 인도유럽어족의 존재를 통해서 영국인과 인도인의 동족의식을 강조하고 인도인들이 타지마할 등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과 찬란한 문명을 지을 수 있던 것을 '우월한 서구권의 피'를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믿었다. 한때 같은 아리아인이었던 유럽인들과 인도인들이었으나, 유럽인들은 유럽에서 인종적 순수성을 보존한 데에 반해서 인도인들은 열등한 드라비다인 등과 통혼하여 피를 섞으며 혈통이 오염, 열화되었고, 같은 인도유럽족이자 우월한 유럽인(영국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은 예전으로 회귀하는 것이니 영국의 식민통치는 합당하다는 것이다.[49][50] 이처럼 영국은 고고학적 업적들마저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에 영국 치하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나마 영국이 한 짓에 비해서는 나은 편에 속할 뿐이지.
12.3. 현대 양국간 인식
인도인들은 인도 제국에 대해서 당연히 평가가 좋지 않다. 물론 식민지 시기에 대해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피식민지인들이 어디 있겠냐마는 말이다.[51] 워낙 그 시절 영국이 교묘하게 악랄한 짓을 많이 했기에 인도 제국에 대한 추억이 영 그닥인 것이다. 인도에서 신적 취급을 받는 대위인 마하트마 간디부터가 영국의 통치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이고, 현대 인도를 세운 국부들이 모두 영국에 맞서 싸운 자들 뿐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도 제국 말기 인도인들의 영국에 대한 반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인도를 탈출해서 일본 제국과 손을 잡고 영국과 맞서려 한 찬드라 보스를 영웅화할 정도였다. 물론 당시 인도인들은 일본군의 본격적인 침공을 받지 않아 별 피해도 입지 않았기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식으로 일제를 대한 까닭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을 통치하는 집단에 맞선 인물을 공공연히 영웅시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인도인들의 반감이 심했는지 알 수 있다.그래서 현대 인도인들의 전반적인 평은 '인도는 영국 통치 시기의 탄압으로 거의 모든 것이 퇴보했다. 다만 좋은 것은 인도의 통일과 고고학적 발견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현대 인도인들은 현대 영국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반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시절의 영국과 현대의 영국은 워낙 정치적 성향과 입장이 다르기도 하고, 인도가 GDP 순위에서도 영국과 비슷해지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인들을 우러러보거나 대접해주는 것도 아니라 그냥 타 국가들과 비슷하게 취급하면서 살고 있다.
한편 영국인들은 표면상으로는 인도 제국에 대해서 '안타까운 역사'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영국인 특성상, 본심으로는 인도 제국 시기에 대하여 낭만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한때 인도를 포함한 전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 시기의 제국주의적 영광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52] 특히 영국의 하류층으로 갈수록 이런 입장을 드러내는 경우가 잦다. 아무래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있거니와 생활 속에서 인도나 파키스탄계 노동자들을 만날 일이 가장 잦은 집단이기 때문이다.[53] 반면 중산층과 상류층의 경우,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받기도 했고 제국주의자라는 현대 유럽 최악의 낙인이 찍히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마음 속으로 대영제국 시기에 가지고 있는 낭만이나 향수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영국의 수많은 드라마나 TV물들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영국의 보수적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은 저서 제국(2004)에서 인도제국을 켈트-인더스 문명이라고 평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에서는 유독 스코틀랜드인의 존재감이 컸는데, 이들은 사무원, 무역상, 공학자, 선교사, 차 및 염료 재배꾼, 섬유상 및 교사들로 인도에 정착하였다. 1771년에는 반이상의 최하급사무원이 스코틀랜드인로 이루어졌었고 실제로 초기 3명의 총독은 모두 스코틀랜드인이었다. 식민경영 이후 은퇴기 잉글랜드인들은 본국인 잉글랜드로 돌아가 지역 유지로 사는 것에 만족하여 돌아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하이랜드 클리어런스와 같이 가난한 본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기보단 캘커타에 남아 인도인 현지처와 결혼해 인도에 끝까지 남는 경향이 있었다.[54] 스코틀랜드인과 인도인의 통혼으로 태어난 스코틀랜드계 인도인은 아버지처럼 하급 공무원 및 장교 등 훗날 영국령 인도의 핵심계층이 되어 인도 제국 운영의 주축이 되었으니 인도제국은 켈트인과 인도인의 결합이 만들어낸 식민제국이라는 주장이다. 스코틀랜드인이자 식민지배에 대해 수정주의적 관점을 가진 니얼 퍼거슨의 저서에서는 위의 언급대로 대영제국의 왕관보석이었던 인도제국에 대한 낭만적인 서술을 꽤 찾아 볼 수 있다.
13. 그 외
인도 반도는 식민지 시기에 처음 통일되었다.[55][56] 그렇기에 인도반도 전역이 통일된 것은 인도 제국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전 인도를 지배한 왕조가 없었다. 다만 마우리아 왕조와 무굴 제국이 최남단 일대를 제외한 인도반도 대부분을 영향력 아래에 두어 거의 통일 직전까지 간 적은 있었다. 사실 북부의 아리안계와 남부의 드라비다계는 종교를 제외하면 언어도 문화도 역사도 전혀 다르다.식민지 시기의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하는데, 1757년부터 1947년 사이의 인도의 1인당 소득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57] 실제로는 19세기 후반기 동안 기근이 겹치고 상당수 농민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임노동자로 전락하면서 소득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을 거라는 추측이 우세하다.[출처:] 1872년부터 1921년 인도 서민의 평균 수명은 놀랍게도 20% 정도 하락했다. 인도가 위생적으로 불량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영국의 위생상태가 획기적으로 나아져서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인프라 시설에 돈을 생각보다 많이 들이지 않았다는 소리이다.
또한 인도에 근대식 교육을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고, 인도의 문맹률은 독립당시에 80%를 넘는 수준이었다. 즉, 인도지배의 좋은 측면들은 거의 상류층에 국한되었으며 하류층들은 별 혜택을 못 봤다는 얘기이다.
그 영국조차도 선교계 최강의 몹인 힌두교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인도 본토에서는 말이다. 더구나 과거에도 불교와 이슬람교의 도전을 모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도 인도는 최종 던전이다.
인도 제국이 세계사적으로 끼친 가장 유명하면서도 악명 높은 업적(?)은 아편이다. 당시 인도는 아편의 주산지였는데, 영국이 중국의 차에 대한 거래 대금으로 이걸 뿌리는 바람에 아편전쟁이 터졌다.
1941년 인도 제국군의 훈련 모습 |
인도 제국은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도 간접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바로 1905년 2차 영일동맹 당시 영국이 인도 제국의 지배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인정한 것이다.[59]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비백인 피식민지인들을 격동시켰는데, 안그래도 쥐어짜이며 부글거리는 2억 인도인들을 상대로 일본이 아시아주의 홍보만 때려도 식민지 치안소요가 급증할 우려도 컸다. 실제로 2차대전기에 많은 아시아인들이 대동아공영권을 환영했다… 일본군하고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흔히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인도까지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알렉산더 대왕은 우리가 흔히 인도라고 부르는 곳의 본토에 침입하기는커녕 지금의 파키스탄 언저리만 살짝 찔러보고 회군했다.[60][61] 다만 당시에는 이란 동쪽에서 인더스강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인도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인도를 정복한 게 맞기는 하다. 그 유명한 간다라 미술도 본국인 인도 입장에서는 파키스탄 일부 지방의 변방 민속 예술 수준에 불과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지배국인 영국이 그래도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을 허용해 줘서인지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네 나라 모두 영연방에 가입해 있는 상태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불화 문제로 1972년 연방을 탈퇴했으나 2004년에 복귀했다.
제국이라는 타이틀 탓인지 무굴 제국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은데, 무굴 제국은 인도 제국이 성립하기 바로 전에 인도 반도에 존재했던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후신[62]을 자처한 이슬람 왕조이다.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4개국은 하나같이 인구가 어마어마하다. 네 나라 중 가장 인구가 적은 미얀마도 5,500만 명으로 대한민국보다도 많고, 인도 동쪽에 조그맣게 끼어있는 방글라데시 인구가 1억 6천만 명이다.(세계 7~8위)[63] 파키스탄의 인구가 2억이다. 인도는 최근에 14억 명을 넘기었다. 이 인구를 다 합치면 18억에 육박한다. 더구나 산아제한정책으로 출산율이 세대교체율을 밑도는 중국과는 달리, 이들 인도계 국가는 하루가 다르게 인구 폭증, 해마다 수천만 단위로 인구가 늘어난다. 인도 한 나라의 인구만으로 2023년에 중국을 앞질렀다.
일본에서 나온 세계의 역사류 학습만화 전집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파트이다. 인도 제국 시기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의 대영 항쟁 부분에서다. 일례로 슈에이샤에서 편찬한 세계의 역사(총 16권) 시리즈를 보면 2권에 걸쳐 세포이 항쟁,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그리고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매우 비중있게 그린다. 심지어 대놓고 이런 부분도 등장한다.[64]
(영국인 현장감독) "이 녀석! 게으름 피우지 말어! 영국은 인도를 위해 철도를 건설하는 거야!"
(인도인 노동자들) '(속으로)흥! 거짓말! 면화와 차를 운반하기 위해 철도를 놓는 거면서…'
이는 일본의 소위 대동아 공영권 역사관이 어느 정도 반영된 서술이다. 일본이 대한제국 및 만주 등 아시아-태평양 제국주의적 침공을 정당화한 논리가 "서양 귀축영미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형성하여 뭉쳐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서양 세력인 영국이 아시아인 인도를 침탈한 것에 대해 적나라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65]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그놈이 그놈인 제국주의를 다른 제국주의와 비교하며 포장하는 것이기에 본인들이 '서구로부터 보호/해방'시켰다고 주장하는 국가에서 비슷한 짓거리를 한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인도인 노동자들) '(속으로)흥! 거짓말! 면화와 차를 운반하기 위해 철도를 놓는 거면서…'
인도에서는 독립운동가를 '자유투사(freedom fighter)'라고 부르며, 독립운동가과 그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을 위해 1972년부터 인도 내무부에서 '자유 투사 및 재활국'[66]을 운영하고 있다.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 공식 사이트 2023년 7월 1일 인상된 월 연금은 37,440~43,200루피, 한화로는 약 62만~71만 원이다. 인도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매우 많은 돈인 셈. # 그런데 지원이 제대로 안 되는지 부패한 정부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름조차 잊혀지고 그 유족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있다. #
14. 역대 황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00, #c8102f 20%, #c8102f 80%, #c00); color: #ffcf4c;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cf4c>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빅토리아 | 에드워드 7세 | 조지 5세 | 에드워드 8세 | 조지 6세 |
}}}}}} ||
인도의 황제
Emperor of India
황제/여제 | 즉위연월일 | 퇴위연월일 | 재위기간 | 대관식(Delhi Durbar) |
빅토리아 | 1876. 5. 1. | 1901. 1. 22. | 24년 21일 | 1876. 5. 1. |
에드워드 7세 | 1901. 1. 22. | 1910. 5. 6. | 9년 104일 | 1903. 1. 1. |
조지 5세 | 1910. 5. 6. | 1936. 1. 20. | 25년 259일 | 1911. 12. 12. |
에드워드 8세 | 1936. 1. 20. | 1936. 12. 11. | 10개월 22일 | 없음 |
조지 6세 | 1936. 12. 11. | 1947. 8. 14[67] | 10년 249일 | 없음 |
이전에 영국이 자체적으로 국왕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하고 했던 시도가 있었다. 조지 3세 시절 아미앵 조약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을 승인하면서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거긴 하지만) 프랑스 왕위 타이틀을 포기해야 했고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일랜드인들이 프랑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아일랜드인들의 효과적인 통제을 위해 영국의 속령이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명목상으로는 영국과는 별개의 국가였던 아일랜드 왕국을 정식으로 영국 본토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왕위 2개를 잃어버린 왕을 위로하고자 영국 의회에서 자국 군주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하고자 했으나, 영국 왕이 동군연합으로서 겸하고 있던 하노버 왕국 선제후(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봉신국)라는 이중 직위로 인한 외교 마찰을 우려한 조지 3세에 의해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하지만 조지 3세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자는 제안을 기각한 지 불과 몇 년 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유럽 군주들의 칭호 인플레가 시작되었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얼마 안 있어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던 점도 있다.
유럽 내 제국은 할 수 있는 경우 정통성을 위해 로마 제국과의 연결점을 주장한 경우가 많으나,(서로마 제국> 카롤루스 대제 >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동로마 제국 >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도 동로마 계승을 내세우기도 했다.) 로마와의 연결점 없는 영국은 非유럽 문화권을 이용한 것이었다.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인도 각지의 제후들의 자치를 계속 인정했으니 영국 국왕이 그들 위에 군림한다는 모양새를 갖출 필요도 있어서 인도 황제 칭호를 덧붙인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빅토리아 여왕(Queen)의 장녀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동명이인)가 프로이센 왕국의 왕세자 프리드리히에게 시집갔는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만들게 되자 빅토리아 공주가 향후 황후(Empress)가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공주가 독일 황후(Empress)가 되면 모친인 빅토리아 영국 여왕(Queen)의 칭호를 역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므로 자존심 상해 하던 영국인들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벤저민 디즈레일리 당시 영국 총리가 인도 황제/여제라는 칭호를 쓰는 게 인도 통치에도 유리하고 영국 국민의 자존심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여제 칭호를 바치게 되었다.[68]
물론 인도 황제라는 칭호는 영국 국왕이라는 칭호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이었고 실제 지배는 영국에서 파견한 총독이 했다.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건 포르투갈이 만든 브라질 제국이 원조다. 다만 이건 자국용이고 인정을 못 받았다. 다만 이쪽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본토는 탈탈 털리고 브라질이 독립을 해서(…) 사실 브라질 왕국으로 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제국을 자칭한 걸 보면 황제 호칭을 바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영국 및 영국 자치령 국왕/여왕·왕비 겸 인도 황제/여제·황후는 줄여서 King-Emperor/Queen-Empress로 불렸고 라틴어 약자로 R.[71]I.[72]라고 표기했고 자신들의 서명에도 넣었다. 사실상 인도 제국의 상징적인 군주였고, 모든 실질적인 업무는 본국의 의회와 인도에 파견나간 총독이 맡아서 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후계자들이 '황제'라고 불릴 수 있도록 해준 칭호이자, 국왕들이 '영국 국왕'이라는 칭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칭호이기도 하다.
당시 영국인들은 유럽의 독일 제국이나 오스트리아 제국보다 단순 국력만 놓고보면 훨씬 더 강력했던 대영제국의 국왕들이 황제로서 불릴 수 없는 상황을 불만스러워 했다. 유럽에서 '황제(Emperor)' 칭호는 단순히 제국을 선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조금이라도 입증해야 했기 때문. 로마와 연관점이 전혀 없었던 영국 입장에서는 황제위를 선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비록 편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영국인들은 '인도의 황제'라는 수식어를 매우 좋아했다.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임하자마자 당시 대영제국 내에서 발행하는 금화들에 'Imp', 즉 황제를 상징하는 약칭을 넣었고, 이 금화는 인도 뿐만 아니라 영국, 캐나다 등 모든 곳에서 통용됐다.
인도의 황제로서 인도를 처음 방문한 황제는 조지 5세로, 황위에 즉위하기 위한 의식인 '델리 더바(Delhi Durbar)'에 참석하기 위해 뉴델리를 찾았다. 이때 그를 위해 인도 제국의 황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황관은 무게가 920g이고 6,170개의 다이아몬드와 9개의 에메랄드, 4개의 루비, 4개의 사파이어로 화려하게 장식했다.[73] 다만 정작 조지 5세는 즉위식 이후 일기장에 '3시간 반동안 그 황관을 쓰고 있자니, 너무 무거워서 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라고 써놓았다.
칭호는 인도 제국 황제였지만 실질적으론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만큼 진짜 인도인은 1명도 없고 죄다 영국인 황제들이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전의 델리 술탄국과 무굴 제국부터가 이민족이 세운 정복왕조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인도 제국은 근대적 식민지라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인도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웨일스 공 윌리엄이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되면 해당 시기부터는 그(와 동생인 해리 왕자)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지 않는 한 미약하게나마 인도인 혈통을 가진 영국 국왕이 배출될 예정인데, 그의 어머니인 다이애나 스펜서의 6대조 외할머니가 인도인 어머니를 둔 아르메니아인이었기 때문이다.
15. 역대 총독 겸 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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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총독 겸 부왕
Governor-General and Viceroy of India
작위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1대 캐닝 백작 (1st Earl Canning) | 찰스 존 캐닝 (Charles John Canning) | 1858. 11. 1. | 1862. 3. 21. |
8대 엘긴 백작 (8th Earl of Elgin) | 제임스 브루스 (James Bruce) | 1862. 3. 21. | 1863. 11. 20. |
1대 막달라의 네이피어 남작 (1st Baron Napier of Magdala) | 로버트 코널리스 네이피어 (Robert Cornelis Napier) | 1863. 11. 21. | 1863. 12. 2. |
윌리엄 토머스 데니슨 경 (Sir William Thomas Denison) | 1863. 12. 2. | 1864. 1 12. | |
1대 로런스 남작 (1st Baron Lawrence) | 존 레어드 메어 로런스 (John Laird Mair Lawrence) | 1864. 1. 12. | 1869. 1. 12. |
6대 마요 백작 (6th Earl of Mayo) | 리처드 사우스웰 버크 (Richard Southwell Bourke) | 1869. 1. 12. | 1872. 2. 8. |
존 스트레이치 경[74] (Sir John Strachey) | 1872. 2. 9. | 1872. 2. 23. | |
10대 네이피어 경 (10th Lord Napier) | 프랜시스 네이피어[75] (Francis Napier) | 1872. 2. 24. | 1872. 5. 3. |
1대 노스브룩 백작 (1st Earl of Northbrook) | 토마스 조지 베어링 (Thomas George Baring) | 1872. 5. 3. | 1876. 4. 12. |
1대 리턴 백작 (1st Earl of Lytton) | 에드워드 로버트 리튼 불워리튼 (Edward Robert Lytton Bulwer-Lytton) | 1876. 4. 12. | 1880. 6. 8. |
1대 리폰 후작 (1st Marquess of Ripon) | 조지 프레더릭 새뮤얼 로빈슨 (George Frederick Samuel Robinson) | 1880. 6. 8. | 1884. 12. 13. |
1대 더퍼린과 아바 후작 (1st Marquess of Dufferin and Ava) | 프레더릭 해밀턴템플블랙우드 (Frederick Hamilton -Temple-Blackwood) | 1884. 12. 13. | 1888. 12. 10. |
5대 랜스다운 후작[76] (5th Marquess of Lansdowne) | 헨리 찰스 키스 패티피츠모리스 (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 1888. 12. 10. | 1894. 10. 11. |
9대 엘긴 백작 (9th Earl of Elgin) | 빅터 알렉산더 브루스 (Victor Alexander Bruce) | 1894. 10. 11. | 1899. 1. 6. |
1대 케들스턴의 커즌 후작[77] (1st Marquess Curzon of Kedleston) | 조지 너새니얼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 1899. 1. 6. | 1905. 11. 18. |
4대 민토 백작 (4th Earl of Minto) | 길버트 존 엘리엇머리킨마운드 (Gilbert John Elliot-Murray-Kynynmound) | 1905. 11. 18. | 1910. 11. 23. |
1대 펜스허스트의 하딩 남작 (1st Baron Hardinge of Penshurst) | 찰스 하딩 (Charles Hardinge) | 1910. 11. 23. | 1916. 4. 4. |
1대 첼름스퍼드 자작 (1st Viscount Chelmsford) | 프레더릭 네이피어 세시저 (Frederic John Napier Thesiger) | 1916. 4. 4. | 1921. 4. 2. |
1대 리딩 후작 (1st Marquess of Reading) | 루퍼스 아이작스 (Rufus Isaacs) | 1921. 4. 2. | 1926. 4. 3. |
1대 핼리팩스 백작 (1st Earl of Halifax)[78] | 에드워드 프레더릭 린들리 우드 (Edward Frederick Lindley Wood) | 1926. 4. 3. | 1931. 4. 18. |
1대 윌링든 후작 (1st Marquess of Willingdon) | 프리먼 프리먼토머스 (Freeman Freeman-Thomas) | 1931. 4. 18. | 1936. 4. 18. |
2대 린리스고 후작 (2nd Marquess of Linlithgow) | 빅터 알렉산더 존 호프 (Victor Alexander John Hope) | 1936. 4. 18. | 1943. 10. 1. |
1대 웨이벌 백작 (1st Earl Wavell) | 아치볼드 퍼시벌 웨이벌 (Archibald Percival Wavell) | 1943. 10. 1. | 1947. 2. 21. |
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79] (1st Earl Mountbatten of Burma) | 루이 프랜시스 앨버트 빅터 니콜라스 마운트배튼 (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 | 1947. 2. 21. | 1947. 8. 15. |
16. 창작물에서
- 닥터후나 빅토리아 등만 보아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이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빅토리아 시대이며, 다운튼 애비나 명탐정 푸아로 등 당시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여러 매체들이 추억팔이로 인기를 끌고 있다.[80] 이런 드라마들, 그중에서도 빅토리아 시대의 상류층들을 다룬 드라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인도인 하인들이며, 아니면 인도산 사치품이나 유행을 즐기는 화려한 모습들이 중점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 소공녀에서 주인공인 세라 크루가 영국에 오기 전까지 살았던 배경 장소로 언급되며, 아버지 랄프 크루 대위는 인도 제국 주둔 영국군 소속의 장교다. 크루 대위와 그의 동업자인 캐리스퍼드씨는 인도에서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을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포그 일행의 기착지 중 하나로 나온다. 여기서 사티당하기 일보직전의 아우다 부인을 구출해 일행에 합류시킨다.
- 영화 RRR: 라이즈 로어 리볼트의 배경으로, 1920년대 인도 제국에서 영국에 저항한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17. 여담
- 순식간에 독립했던 브라질 제국과 더불어 제국의 칭호를 했지만 실상은 식민지인 국가이다. 좀 더 둘러보자면 만주국도 1934년 국호를 대만주제국으로 고친 예가 있다. 또 베트남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국이 세워진 적이 있다. 다만 이들 국가들은 인도 제국만큼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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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2] Crown rule in India나 Direct rule in India로도 불렸다. 굳이 Crown rule이나 Direct rule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Company rule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British Raj나 Indian Empire로 불렸다. 현대 인도에서는 British Raj(ब्रिटिश राज)라고 부른다.[3] 힌디어[4] 우르두어[5] 공식적인 인도 제국의 국기는 대영제국의 유니언 잭이다. 흔히 인도 제국의 국기로 소개되는 붉은 바탕에 유니언 잭과 인도의 별을 넣어만든 깃발은 인도 제국의 상선기이다.[6] 본래 인도 제국의 상선기이지만 올림픽이나 UN 총회 등에서 사실상의 국기로 사용되었다.[7] 1861년 제정. '인도의 별'이라고 불린다. 빅토리아 여왕이 창설한 '인도의 별 기사단'의 상징이었으며,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별에서 26개의 빛줄기가 뻗어져 나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별 주위의 푸른 띠에는 기사단의 표어인 '천국의 빛 우리의 인도자'가 적혀있다. 영국이 만든 상징임에도 기독교적인 색채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인도인들이 기독교적인 상징을 자신들의 문양으로 삼기를 극렬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8] 해당 지도는 영국령 실론(現스리랑카)도 인도 제국과 같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분리] 1937년 영국 하원에서 신인도통치법이 가결됨에 따라 영국령 인도와 별개의 식민지가 된다.[10] 무더위를 피해 여름에는 수도 기능이 잠시 심라로 옮겨졌다. 원나라가 상도로, 청나라가 청더로 여름에 수도를 옮긴 것과 비슷하다.[11] 영국 국왕이 겸임했다.[12]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타이완) 양측 모두 아루나찰프라데시를 비롯한 일부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 중이다. 특히 중국은 아크사이친 지역의 경계 불분명으로 인한 갈등이 있다.[13] 다만 마우리아 왕조와 무굴 제국 시대에 최남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 반도 지역을 영향력 아래에 두기는 했다.[14] 엄밀히 말하자면 포르투갈령 고아, 프랑스령 푸두체리 등 타 국가에 소속된 도시들이 존재하기는 했다.[15] 이 토후국들은 명목상으로는 독립된 지역이었으며 이들이 중앙정부의 직할 통치 하에 놓인 것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의 일이다. 심지어 인도 독립 후 수년이 지나서야 완전하게 편입되었다.[16] 실제로 코이누르라는 다이아몬드가 인도에서 채굴된 것이다. 단 코이누르 왕관은 전통적으로 왕이 아니라 왕의 배우자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17] 면적으로는 캐나다와 호주가 훨씬 넓지만, 인구는 저 두 국가를 합쳐도 방글라데시의 절반도 안 된다.[18] 인도를 상실하면서 영국은 인도에서 생산되던 막대한 자원을 한순간에 잃었고 결국 식민제국으로서 몰락하게 된다.[19] 미얀마 전역이 인도 제국에 편입된 시기도 있었으나, 1937년 신인도통치법에 의해 인도 제국과 별개의 식민지가 된다.[20] 인도 반도 바로 밑에 있는 스리랑카는 인도의 일부가 아닌 영국령 실론이라는 별개의 식민지였다. 스리랑카는 1948년에 인도와는 별개의 국가(정확히는 실론 자치령)로 독립하였다.[21] 1937년 영국령 아덴 지역에 합병된다.[22] 이곳은 1862년 인도 제국과 별개의 식민지로 분리되며, 소속되어 있던 4개의 지역 중 3개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병합되고 나머지 1개가 독립국가로 남는데, 이게 바로 현재의 싱가포르다.[23] 도시의 체급을 지닌 4개의 식민지들을 한꺼번에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중 싱가포르를 제외한 3개는 나중에 말레이시아 연방에 주로써 편입되지만 다른 주들과 달리 세습 군주가 없고 주지사를 직접 선출하는 등 영국의 영향이 남아 있다.[24] 현 방글라데시[25] 다만 1940년대까지 영국의 간섭을 받기는 하였다.[26] 네팔, 부탄, 영국령 실론, 포르투갈령 인도, 프랑스령 인도도 지도에 함께 있다.[27] 사실 제국주의 시대 당시 어느 특정 식민지가 다른 식민지 모두의 인구를 합한 것보다 인구가 더 많은 경우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당시 식민지는 본국에 의해 착취되는 구조였다. 이러한 식민지를 착취하는 데 있어 지배구조를 단일화하면 보다 효율적인 관리와 통제가 수월하기 때문에 여러 식민지를 통합한 주요 식민지란 개념이 나타났다. 영국에게는 인도가 그러한 존재였다. 영국, 네덜란드 같은 경우는 최대 식민지인 인도와 동인도(인도네시아)의 인구 규모가 너무 커서 인도, 동인도의 인구는 해당 식민지를 제외한 영국, 네덜란드 영토의 인구를 합한 것보다 많았다.[28] 다른 국가의 예시로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있으며, 미국령 필리핀이나 독일령 동아프리카, 일제강점기 조선처럼 다른 식민지들 전체를 합한 것보다 면적이나 인구가 더 큰 최대 식민지가 있었다. 예외적으로 프랑스는 최대 식민지를 만들지 않고, 비슷한 규모의 식민지 여러 곳을 거느리는 형태로 구성된 식민제국이었다.[29] 실제로 당시 갠지스 강 유역의 풍토병이었던 콜레라가 영국을 통해 퍼져 나가 전 세계적인 대유행을 했다.[30] 적은 것 같지만 인도 인구의 1.5%는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게다가 인도는 워낙 힌두교가 강하게 자리잡은 탓에 그때나 지금이나 포교의 지옥으로 꼽힌다.[31] 인도의 부왕(Viceroy of India). 다른 식민지와 달리 인도 총독은 급이 한 단계 더 높았는데, 인도 황제(영국 국왕이 겸임)를 대리하는 자였기 때문에 황제가 허락하는 한 인도에서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황제에게서 기사 작위 수여권도 위임받았기 때문에 영국 본토의 대영제국 기사단에 해당하는 인도의 별 기사단의 단원을 임명하고 작위를 주는 사람도 총독이었다. 그만큼 인도 총독들은 이미 귀족 작위를 소지한 사람들이거나 새로 작위를 받은 사람들이었고, 마지막 총독은 아예 왕족이었다.[32] 인도 총독의 근무지와 관저에는 유니언 잭과 총독기를 나란히 걸었다.[33] 정확히는 튜더 왕관이다. 이건 헨리 7세나 헨리 8세가 처음 사용한 걸로 추측되는 오래된 물건으로 크롬웰 시대에 파괴됐지만 빅토리아 여왕 시대까지 문장에 사용되었다. 현재는 튜더 왕관이 파괴된 이후 제작된 성 에드워드 왕관이 문장에 사용된다.[34] 주지사나 지방 관료들 모두 총독의 권한을 위임받아 관할 지역을 통치하는 사람들이다.[35] 인구나 영토 크기 순서대로 예포 예우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단적으로 수르구자 왕국은 카라울리 왕국보다도 더 크고 인구가 많았지만, 카라울리 왕국이 무려 17발의 상위급 예우를 받은 것에 비해 수르구자 왕국은 아예 예포 예우가 없었다.[36] 인도의회의 의원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모두가 백인이었다. 다만 1907년 인도인 의원 K. G Gupta와 Hussain Bilgrami가 인도의회에 진출하긴 했다.[37] 무굴 제국의 전성기인 1650년대에 정점을 찍고 이후 영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17세기 후반부터 급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1900년대 즈음부터 그래프가 더 뾰족뾰족한 것은 그때부터 제대로 된 통계가 나와서 정확한 계산이 가능했기 때문. 그 이전까지는 추정치다.[38] 다만 이는 무굴 제국 시기와는 달리 미국, 대영제국, 독일 제국 등의 서구 강대국들의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기 때문에 상대적인 면이 더 크다.[39] 인도 식민정부는 '자유토지'를 구매했다고 선전했으나 그 '자유토지'의 실상은 대부분이 마을의 공유지나 행정체계에 미숙한 인도인들이 신고하지 않은 땅이었다. 게다가 그 '구매'할 때 쓴 예산 역시 영국 본토의 세금이 아니라 인도에서 거둬들인 세금이었다.[40] 이 역은 인도가 독립된 이후에도 버려지지않고 현재 '차트라파티 시바지 역'으로 개명되어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다.[41] 사실 영국인 노동자들도 썩 좋은 대우를 받은 건 아니었다. 영국 본토의 노동쟁의를 기관총으로 진압하던 게 고작 수십 년 전이었으니...[42] 이는 매우 심각한 수치인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며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최악을 달리던 시기에야 이 수치를 찍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영국은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서서히 개선되어가고 있던 시기이다. 즉 영국 본토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이것도 어디까지나 브리튼 섬 한정, 아일랜드 섬은 여전히 막장이었다.) 인도는 그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것.[43] 인도는 하나의 민족국가라기보다는 하나의 대륙을 묶은 것에 가깝기 때문에, 수백 개에 달하는 언어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같은 인도인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불가하니 어쩔 수 없이 모두가 할 줄 아는 영어를 쓰는 것이다. 특히 인도의 언어는 카스트의 영향도 묻어져 있어서 하위 카스트는 무조건 상위 카스트를 존대하는 말을 해야 하는데 영어는 그런 게 없어서 하위 카스트 중에서는 일부러 영어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44] 다만 나중에 예산이 증가하자 중산층 자녀들도 입학하였다.[45] 공작새는 인도 황제들의 상징이자 특히 무굴 제국 황제들의 상징이었다. 커존 부인이 입었던 드레스는 무굴 황제들이 앉던 왕좌 '공작좌'의 디자인을 참조해서 만들었다.[46] 인도는 2010년대 후반까지도 최빈국 수준의 1인당 GDP를 벗어나지 못하는 국가였다.[47] 조 다음의 그 경이 맞다. 인도의 경제학자 우트사 파트나이크가 추정한 수치다.[48] 그나마 유고슬라비아 내전처럼 민족간 제노사이드가 안 일어난 걸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49] 인도인들이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였던 인더스 문명을 건설하고 도시와 탑들을 쌓아올릴 때, 훗날 영국이 들어설 브리타니아에서는 몽둥이 들고 멧돼지나 사냥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다. 애초에 에게 해의 그리스를 제외한 유럽은 문명이 늦게 발생한 편으로 로마 제국이 브리튼 섬에 침공했을 때도 그곳은 이곳저곳 켈트 부족들이 난립해 있을 뿐이었고 게르마니아도 마찬가지였다.[50] 그리고 인도인 입장에서도 살짝 억울한 것이 인도는 카스트라는 확고한 체계가 있어서 상위 카스트를 차지하는 아리아인과 하위 카스트를 차지하는 드라비다인은 상당히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애초에 이들은 외모에서부터 큰 차이가 나서 설사 드라비다계 상위 카스트가 있어도 같은 카스트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조금 낮은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51] 그나마 구 식민시절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남아 있는 경우는 캐나다나 호주와 같이 아예 현재의 국가 구성원 주류가 유럽에서 건너온 경우, 또는 대만과 같이 그 자체로 국가를 이룬 경험이 없는 경우에 한정된다. 아니면 홍콩과 같이 중국공산당의 탄압 때문에 식민지 시절이 그립다는 여론이 강한 것 정도.[52] 애초에 제국주의 시절 열강이었던 나라가 다 이렇다. 멀리 갈 거 없이 일본이 이런 경향을 보이는데 일본보다 더 오랫동안 잘나간 제국주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 과거를 잘 뉘우쳤다고 알려져 있는 독일도 나치 정권 시기의 잔학한 제노사이드는 반성하지만 프로이센~독일 제국 시기에는 어느 정도 향수가 있다.[53] 인도 제국 시기 수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들 중 당연히 사회 계급이 높고 부유한 이들도 많지만, 은연중에 인종차별이 많은 영국 내에서 이들이 토종 백인들처럼 공평하게 대접받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그렇기에 상류층보다는 중하류층에 더 많이 포진해있다.[54] 일제치하 조선에서도 내지에서 건너온 히키아게샤들도 본국에서 차별받는 빈농 및 부락민이 많았고 만주국으로 건너간 조선인들도 하루 겨우살던 빈농과 노동자들임을 생각해보면 빈곤계층의 한탕주의를 자극해 본국 엘리트들을 대신하여 하류층을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보낸 일은 당시 제국주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던 현상이다.[55] 포르투갈(고아, 다만, 디우, 다드라나가르하벨리)이나 프랑스가 지배한 곳(퐁디셰리, 야나옹, 마에, 카라칼, 찬데르나고르)도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 통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포르투갈과 프랑스가 점유한 지역은 영국이 점유한 지역에 비하면 그야말로 엄청 작았던지라.[56] 이 점은 아일랜드도 비슷하다.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섬을 모두 정복하고 아일랜드 왕국을 선포하면서 아일랜드 통일이 이뤄진다.[57] 다만 제 1, 2차 세계대전과 벵골 대기근 등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출처:] Late Victorian Holocausts / 마이크 데이비스 저[59] 엄밀히 말하면 이미 반석에 오른 인도의 통치보다는 '인도의 국경선을 보장', 즉 영국이 병합한 지 얼마 안 된 미얀마의 병합을 승인하는 목적이 강했다.[60] 포루스 왕이 이끄는 코끼리 군단에 의외의 고전을 한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사실 포루스 왕은 인도의 군벌 중 가장 약한 녀석이었지!"라는 소문에 경악해 겁에 질려버렸고(사실 이건 전투에서 진 포루스 왕의 병사들이 뻥을 친 것이다. 포루스 왕의 펀자브 왕국은 당시 인도 내의 수많은 국가들 중 강하기로는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나라였다.),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끝내 부하들의 사기를 되돌리지 못하고 바빌론으로 회군한 후 병사한다. 물론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펀자브 왕국의 병사들의 거짓말을 들었다고 사기가 바닥을 칠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고 이들에게 심각하게 당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북서부 지역을 공략하고 이 거짓말을 들은 뒤 만난 다음 상대가 그 펀자브 왕국을 털어먹던 당시 인도 북부의 끝판왕 난다 왕국이었던 게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난다 왕국의 군세 앞에서는 여태까지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고, 난다 왕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발이 멈춘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사기도 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61]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병사한 후에 마케도니아 제국의 후계국 중 하나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시절에 그리스인들이 재차 침략해와서는, 알렉산드로스 때와는 달리 정말로 인도의 여러 나라들을 개발살내고 떡하니 나라까지 세워서, 서기 9세기 경까지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62]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가 부계는 티무르의 후손, 모계는 칭기즈 칸의 후손이며 티무르도 생전 몽골 제국의 후예를 자처했다.[63] 방글라데시 인구가 러시아를 능가한다. 러시아 지도와 방글라데시 지도를 번갈아 비교해보면서 놀라주자. 세계지도로 비교시 러시아가 훨씬 북쪽이라 엄청 차이 나 보인다 일부 출처에서는 1억 6,500만 명까지도 올라간다. 더군다나 여기는 더 놀랄 일이 따로 있다. 바티칸 같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이 국가가 세계 인구밀도 1위이다. km²당 인구가 1,100명에 달한다. 참고로 2위는 대한민국이다.[64] 위 시리즈를 한국에서 무단으로 번역 출판한 중앙문화사 판본의 번역임.[65] 이러한 일본의 피지배 인도인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은 찬드라 보스와 같이 친일적 인도 독립운동가가 있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66] 한국으로 치면 국가보훈부와 비슷하다.[67] 이후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자치령에서도 황제가 아닌 국왕의 칭호를 썼다. 인도 자치령이 현재의 인도 공화국이 되면서 인도에서 국왕 칭호를 내려 놓게 된다(대신 이때부터 영연방 원수라는 새로운 칭호를 쓰기 시작한다). 파키스탄은 조지 6세 사망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치세 초기까지 자치령으로 남았기에, 엘리자베스 2세가 마지막 파키스탄 여왕이 된다.[68] 이 조치가 취해지자, 영국 국내에서는 독일 제국에 자존심 상해 하던 일각의 반응과 정반대로 "이게 뭐하는 뻘짓이냐"고 빈정거리는 반응도 나왔다. 빅토리아 여왕 문서를 보면, 인도 여제 칭호를 바칠 당시 이것을 비꼬던 풍자화를 볼 수 있다. 해당 문서 참고.[69] 영국에서는 준남작 이하 귀족의 경칭으로 Sir/Dame이 붙는데 반해 남작 이상의 귀족에게는 더 높은 Lord/Lady가 붙는다. 그리고 지금은 제도가 바뀌었지만 과거 영국은 1990년대 말 토니 블레어 정권 초기까지 왕족을 제외한 남작 이상의 귀족들은 무조건 자동으로 종신직 귀족원(상원) 의원이 되었다. 애초에 영국 귀족원의 영어 표기가 House of Lords이다. 물론 귀족원은 사실상 실권이 없기 때문에 정치에 꿈을 품은 귀족 남성들은 귀족 신분으로 인해 서민원(하원)에 출마할 수 없어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오죽하면 정적에게 귀족 작위를 줘서 뒷방으로 보내버리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 물론 현재는 자발적으로 작위를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70] 사실 영국은 과거의 인도 부왕직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몇몇 고위직에 대해 이런 식으로 평민에게 작위를 주고 임명하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귀족원(상원) 의원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또는 대법관으로 임명하거나 정적을 엿먹이기 위해 남작 이상의 작위를 내리는 식이다.[71] Rex/Regina.[72] Imperator/Imperatrix.[73] [74] 전임자 마요 백작이 암살당해 부왕 자리가 공석이 되자 임시로 맡음.[75] 수학에서의 log, 즉 로거리듬을 만든 존 네이피어의 후손이다. 단, 존 네이피어의 부계 직계 계승은 아니다. 6대 네이피어 경은 모계 계승이었다.[76] 대한제국사에 관심이 있다면 알겠지만 하야시와 함께 제 1차 영일동맹을 체결한 사람(...)맞다. 체결 당시 외무상[77] 커즌 선의 그 커즌 맞다.[78] 부왕 재임 당시에는 어윈 남작(Baron Irwin).[79] 피의 일요일 사건 보복으로 IRA에게 폭탄으로 폭사당한 그 사람이다.[80] 다만 2010년대 들어서는 영국 내에서도 이런 시대에 대한 암흑상을 다루는 미디어가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닥터후의 경우에도 2010년대 이후 등장한 뉴 시즌 5부터는 상대적으로 묘사를 줄이고, 빅토리아 시대의 가난한 빈민층을 중심으로 다루는 에피소드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