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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5:49:47

바하두르 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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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20대 황제
바하두르 샤 2세
ظهیرالدین محمد بابر
파일:Bahadur_Shah_II.jpg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미르자 아부 자파르 시라즈 웃딘 무함마드
ظهیرالدین محمد بابر
출생 1775년 10월 24일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델리
(現 인도 델리)
사망 1862년 11월 7일 (향년 87세)
파일:영국령 버마 기.svg 영국령 버마 랑군
(現 미얀마 양곤)
재위 기간 무굴 제국 황제
1837년 9월 28일 ~ 1857년 9월 21일 (21년)
대관식 1837년 9월 28일
전임자 악바르 2세 (19대)
가족 친고조부 자한다르 샤 (9대, 1661 ~ 1713)
친증조부 알람기르 2세 (15대, 1699 ~ 1759)
친조부 샤 알람 2세 (17대, 1728 ~ 1806)
친조모 쿠드시야 베굼
아버지 악바르 2세 (19대, 1760 ~ 1837)
어머니 랄 바이
종교 이슬람 수니파
파일:Bahadur_Shah_II_of_India.jpg
바하두르 샤 2세의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세포이 항쟁2.2. 법정 출두와 폐위
3. 시인4. 기타

[clearfix]

1. 개요

무굴 제국의 제20대이자 마지막 황제. 제19대 황제인 악바르 2세의 아들이며,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이름은 자파르(Zafar)다.

2. 생애

바하두르 샤 2세는 1775년 10월 24일 악바르 2세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제위에 오르기 전에는 '미르자 아부 자파르 시라즈 웃딘 무함마드' 왕자로 불렸다. 원래 악바르 2세는 바하두르 샤 2세를 다음 후계자로 지정할 생각이 딱히 없었다. 그가 총애하던 후궁이 제 아들인 미르자 자한기르를 다음 황제로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자 악바르 2세는 미르자 자한기르를 사실상의 황태자로 지정했지만, 미르자 자한기르가 황궁 내 영국 동인도 회사 숙소를 급습하는 대형 사고를 치고말았다. 당연히 영국은 미르자 자한기르가 마음에 들 턱이 없었고 악바르 2세에게 자파르 왕자를 다음 황제로 지정하도록 강요하면서 원래라면 황위와 연이 없었을 자파르 왕자가 1837년 9월 28일 '바하두르 샤 2세'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굉장히 늦게 즉위했는데 즉위했을 때의 나이가 무려 62세였다. 바하두르 샤 2세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 무굴 제국은 이미 몰락하여 영토가 델리 주변만 겨우 유지하는 소국으로 쪼그라들었고, 영국의 보호국으로 명맥만 잇고 있었기에 바하두르 2세가 군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델리와 델리 인근을 통치하는 일과 취미로 우르두어 시를 짓는 걸 빼면 거의 없었다.[1] 바하두르 2세는 우르두어 시인이었으며 미얀마로 유배된 후에 쓴 가 유명하다. 그렇지만 무굴 제국 황제라는 직위가 인도 전역을 다스리는 통치력을 다 잃었지만, 명목상으로는 인도 대륙의 전역을 다스리는 지배자라는 권위가 있었다. 동인도 회사 역시 티무르 제국 시절부터 전해져내려온 무굴 황실의 권위를 인정했고 붉은 요새에 머무르게 하면서 매달 연금을 지급했다.

2.1. 세포이 항쟁

파일:sackofdelhi.png
1859년 영국군의 델리 함락

1857년에 영국인들의 폭압적인 식민행정과 온갖 수탈에 질린 인도인들이 용병 세포이[2]들을 중심으로 세포이 항쟁을 일으킨다. 당시 바하두르 샤 2세는 종교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명목상이나마 무굴 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영국에 저항하는 인도인 세력들은 바하두르 샤 2세를 '인도의 황제'로 추대했다.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몇 년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세포이들이 그가 반란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자 머뭇머뭇거리다가 끈질긴 설득 끝에 소극적으로 반란에 참여했다. 이쯤만 봐도 알겠지만 바하두르 샤 2세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다. 흥분한 세포이들은 막나가기 시작했고 5월 16일에는 황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붉은 요새에 머무르던 52명의 영국인들을 참수해버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소수의 영국 주둔군을 몰아내고 델리 시가지를 장악한 세포이들은 황제의 명령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넘기며 제 하고 싶은 대로 나돌아다녔다.

세포이들의 장악 하의 델리는 온갖 혼란이 일어났다. 약탈이 빈번했고 치안은 무너져 행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제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미르자 무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델리를 통제하도록 했지만, 황제의 명령도 무시하는 세포이들이 황태자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밖에서는 영국군이 식량 보급줄을 끊어버리고 대군을 소집해 델리 탈환을 위해 진군해오면서 델리는 나날로 위태로워졌다. 결국 9월에 영국군이 델리를 가볍게 제압하는 데 성공하면서 바하두르 샤 2세의 짧은 황제 생활도 끝난다. 바하두르 샤 2세는 겁에 질려 후마윤 황제의 영묘로 피신했지만 윌리엄 호드슨 소령이 9월 20일에 체포했다. 황제를 사로잡은 윌리엄 호드슨 소령은 직권으로 황태자 미르자 무굴을 포함해 바하두르 샤 2세의 아들 미르자 키즈르 술탄, 손자 미르자 아부 바크트를 권총으로 처형하고 델리 탈환을 선포했다.[3] 영국은 직후인 9월 21일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했고, 무굴 제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330여 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2. 법정 출두와 폐위

영국인들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전범 재판을 열었다. 재판은 약 21일간 진행되었다. 원래는 동인도 회사의 고위 간부들이 편하게 참석할 수 있는 캘커타에서 재판을 열기로 했지만 나중에 일정이 바뀌어 델리 붉은 요새에서 법정이 열렸다. 당연히 항쟁의 핵심 관계자였던 바하두르 샤 2세도 재판의 주요 피고인이었고, 황제는 총 4개의 죄목으로 기소당했다. 그 4개의 죄목들은 다음과 같다.[4]

바하두르 샤 2세는 재판 20일 차에 항변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재판록을 살펴보면 바하두르 샤는 자신이 거의 반강제적으로 세포이들에게 휘둘렸다고 항변했다. 세포이들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황제의 인장을 찍어 칙령을 내리거나 문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증거로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바하두르 샤 2세는 항쟁 내내 무기력했고 거의 얼굴마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가 법정에서 말한 것만큼 완전한 허수아비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가 주도해서 추진한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영국인들이 늙은 황제의 항변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판사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대신 호드슨 경에게 자진항복한 것을 참작해 사형에서 미얀마 랑군으로의 추방형으로 형을 낮춰줬다. 결국 바하두르 샤 2세는 1858년 10월 7일 새벽 4시, 가장 가까운 가족들만을 데리고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쓸쓸하게 미얀마로 길을 떠났다.
그렇게 미얀마에서 초라한 말년을 보내던 바하두르 샤 2세는 얼마 지나지 않은 1862년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미 87세에 이르는 고령이었던 노인이었던 터라 각종 심리적 스트레스에 노화가 겹치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던 것. 1862년 10월까지만 해도 수저를 들어 수프를 떠먹을 수는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11월이 되자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를 돌보던 영국 장교 H. N 데이비스 경은 바하두르 샤 2세가 몸 전체와 목 아래까지 마비 증세를 보였다고 썼다. 황제가 죽을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데이비스는 11월 6일에 그의 무덤에 쓸 석회와 벽돌을 준비했고, 바하두르 샤 2세는 11월 7일 새벽 5시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은 대단히 간소하게 치러졌고 시신은 쉐다곤 파고다 인근의 작은 묘지에 묻혔다.[5]

3. 시인

바하두르 샤 2세는 꽤나 소질이 있는 시인이었다. 대부분의 시들은 그가 미얀마로 추방되어있을 때 썼고, 망국의 군주라는 비참한 상황 때문에 시의 분위기는 꽤나 음울한 편이다. 다음 시는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시라고 한다.[6]

이 황폐한 땅에 내 마음 쉴 곳이 없구나
누가 이 척박한 땅에서 만족을 누렸으랴

나이팅게일은 파수꾼에게도 사냥꾼에게도 불평하지 않고
운명은 봄의 추수철[7]에도 감금을 명령하노니

저 새들더러 다른 곳으로 가 노래하라 말하라
내 더럽혀진 마음에 그들 있을 곳이 어디 있을까

나이팅게일은 꽃가지에 앉아 즐겁게 지저귀니
내 심장의 정원에 가시를 흩뿌리누나

기나긴 삶을 염원했으나, 허락된 것은 나흘 뿐이었노라
이틀은 갈망하며, 나머지 이틀은 기다리며 허비했구나

내 삶의 해가 저물고 저녁마저 끝나가고 있구나
나는 잠을 청할 것이다, 발을 쭉 편 채로, 내 초라한 무덤 속에서

자파르는 얼마나 불행한가! 그가 평생 동안 사랑했던 곳에 이 몸뚱이가 묻힐 단 2야드의 땅조차 가질 수가 없구나[8]

4. 기타

파일:바하두르 샤 2세 말년 사진.jpg
파일:Last_Mughal_Emperor_Bahadur_Shah_II_with_sons_Mirza_Jawan_Bakht_&_Mirza_Shah_Abbas.jpg
48시간 전부터 이곳에 체류하고 있다.

인도의 아름다움에, 특히 초원에 감탄하여 당신에게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황량한 사막으로 들어섰다. 그것은 며칠간 계속되었다. 델리 근처였다...

길을 가던 도중, 무굴 황제의 성을 지키는, 나와 일찍이 면식이 있는 영국인 중대장을 만났다. 그는 나를 자기의 무게차에 태워주었다. 나는 그 차를 타고 델리에 있는 성채의 쌓아올린 성벽 및을 지나쳤다. 그 성벽은 붉은 대리석의 일종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멀리서 들리는 잡다한 음향이 섞인 팀파니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궁으로 돌아가는 황실의 행렬이었다. "이쪽으로 빨리 갑시다." 그가 나에게 커다란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 문은 코끼리라도 그 밑에 서면 생쥐보다 커보이지 않을 듯한, 뾰족한 못이 박힌 놋쇠 문이었다. "이 문을 통해 궁전의 첫번째 뜰로 들어갑시다. 행렬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곧 그렇게 하였고, 제각각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팀파니와 다른 악기의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러나 무굴의 기마병들이 두 명씩 짝지어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거의 밤이 된 뒤였다. 그들은 커다란 문을 통해 뜰을 지나 거대한 담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기마병이 여러 명 지나간 후에는 가마와 소가 끄는 마차가 여러 대 지나갔다. 그 다음에는 한 떼의 악사들이 트럼펫, 팀파니, 피리 같은 악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소리를 내며 문을 지나 궁전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밝은 횃불이 비치면서 가마꾼이 든, 천개가 덮인 의자 위에 몸을 곳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엄격한 모습의 깡마른 늙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바로 무굴 황제였다. 바로 뒤를 흙뒤범벅이 된 코끼리 20마리가 한 떼를 이루어 그를 따라갔다. 어떤 코끼리에는 금색 천개가 덮여있었고 다른 놈들의 등에는 팀파니를 두들겨대는 악사들이 타고 있었다. 보통 무굴 황제 전속 악사들의 공로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공돈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열정은 신들린 듯하다.

코끼리 특유의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슬프고도 느릿느릿하게 걷는 코끼리들이 지나간 뒤에는, 커다란 깃발을 든, 뒤에 처진 기마병 몇 명이 왔다. 그리고 그 뒤로 정적이 흘렀다.

빼먹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가마꾼이 멘 의자에 앉아 있던 무굴 황제가 뒤에서 시종이 들고 가던 커다란 수연통(水燃筒)의 갈고리처럼 휜 끝부분을 손에 쥐고 있었다. 침침한 빛과 횃불의 연기 속에서 그의 얼굴은 미라처럼 검게 보였고, 그는 금박으로 장식하고 방부처리를 한 시체처럼 보였다.

며칠 후 이 여행자가 폐하의 앞에 가 섰을 때 그의 초상화를 완성시킬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실상 무굴 황제는 아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의식에도 참여할 수 없는 불쌍한 늙은이였다. 사람들이 그를 들어다 왕좌에 앉히면 그는 아편의 힘이 지속되는 동안만 앉아있을 수 있었다.

왕좌는 난간으로 둘러싸인 대리석 단상이다. 빛나는 궁전의 한가운데에 공허함만이 황제의 주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초라한 옷을 입은 몇 명의 늙은 시종이 은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황제의 친족인 두 어린 소년은 왕좌의 발치에 앉거나 가로누워 있었다.

무굴 황제는 얼빠진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눈은 이상하게 빛을 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석처럼 광택이 없어졌다. 나에게는 그가 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옷은 표범 가죽을 모방한 빌로드로, 군데군데 검은 담비 모피나 다른 가벼운 모피의 띠를 이상하게 장식한 것이었다. 그의 얼굴과 손은 마르고 핏기가 없으며 거무스름했다. 코는 매부리코였고 볼은 움푹 패어 있었다. 치아는 거의 없었고, 수염은 숱이 적고 보라색을 띤 불그스름한 검은색이었다.

델리의 왕좌에서 내가 본 이 늙은이가 티무르의 후손인 바하두르 샤였다.

<무굴 제국 여행>

[1] 무굴 제국은 이미 1750년대부터 제국의 면모를 잃어버렸고 마라타 동맹의 보호국 신세가 되어 휘둘리다가 1803년에 델리 함락으로 영국의 속국이 되어있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무굴 제국/역사 문서 참조.[2] 영국인들이 치안 유지를 위해 현지에서 모집한 인도인 용병들.[3] 정확히는 이미 대세가 기운 걸 안 황후 지낫 마할이 황제가 델리를 탈출하지 않고 영국에 투항하면 황제와 황후 자신, 황후 본인이 낳은 세 황자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영국군과 거래한 것이다. 이때 나머지 황자들의 신원보장은 약속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머지 아들들과 손자가 처형된 것을 알게 된 바하두르는 큰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을 정도.[4] 물론 영국이 바하두르 샤에게 죄를 묻기 전에 영국이 인도 보호를 명목으로 인도를 침략한 것부터가 죄다.[5] 같이 유배된 황후 지낫 마할(1823~1886)도 나중에 같이 묻혔다.[6] 바하두르 2세의 시가 아니라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활동한 우르두어 시인 시맙 아크라바라디가 쓴 거라는 주장도 있다. 정확히는 시의 내용 중 '기나긴 삶을 염원했지만 허락된 것은 나흘 뿐이었노라('umr-e daraaz maaNg ke laa'e the chaar din do aarzuu men kaT ga' do intizaar menN)'라는 유명한 구절을 시맙 아크라바라디가 썼다는 것(출처는 위키백과 영어버전 바하두르 샤 자파르 문서(우르두어 시 원문 포함)[7] 그가 유배되어 있었던 미얀마 지방은 이모작이 가능해 가을 뿐 아니라 봄에도 수확이 가능했다.[8] 바하두르 샤 2세는 고향인 인도가 아니라 미얀마의 유배지에 묻혔다.[9] 때문에 그의 아내이자 황후였던 지낫 마할이 1882년에 죽었을 때도 바하두르 샤의 무덤을 끝내 찾지못해 대충 무덤의 추정 위치 옆에 묻어버렸다.[10] 최고치는 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