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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15대 황제 알람기르 2세 عالمگی | |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 아지즈 알딘 무함마드 عزيز الدين محمد |
출생 | 1699년 6월 6일 |
무굴 제국 부르한푸르[1] | |
사망 | 1759년 11월 29일 (향년 60세) |
무굴 제국 코틀라 파테 샤 | |
재위 기간 | 무굴 제국 황제 |
1754년 6월 3일 ~ 1759년 11월 29일 (5년) | |
대관식 | 1754년 6월 3일 |
전임자 |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제14대, 당조카) |
후임자 | 샤 자한 3세 (제16대, 육촌) |
부모 | 아버지 : 자한다르 샤 황제(제9대, 1661 ~ 1713) 어머니 : 아눕 바이 |
자녀 | 샤 알람 2세 (제17대)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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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굴 제국의 제15대 황제. 참고로 알람기르 1세는 아우랑제브다. 사촌인 무함마드 샤와 마찬가지로 무굴 제국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던 명군이었으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던 탓에 실패한 비운의 군주이다.2. 생애
알람기르 2세는 1699년 6월 6일 부르한푸르에서 마아즈 웃딘 왕자, 후일 자한다르 샤로 즉위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그의 이름은 아지즈 웃딘이었다. 그의 어머니 아눕 바이는 라지푸트족 공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증조부 아우랑제브가 1707년 데칸에서 죽을 무렵 그의 나이는 불과 7세에 불과했고, 그의 아버지 자한다르 샤는 무굴의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자한다르 샤가 얼마 못가 파루크시야르에게 쿠데타로 축출당하자 아지즈 웃딘 역시 반란을 두려워한 파루크시야르 황제에 의해 1714년 감옥에 갇혔다. 그렇게 아지즈 웃딘은 감옥에서 대략 40년 넘게 갇혀있다가, 1754년 풀려나 제국이 혼란스러워진 상황 속에 실세를 거머쥔 재상 이마드 울물크에 의해 꼭두각시 황제로 즉위한다. 이마드 울물크는 유약한 성정의 아지즈 웃딘 왕자가 허수아비로는 적격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마드 울물크는 당시 무굴 제국의 최대 적국이던 마라타 동맹과 손을 잡고 마음대로 제국을 주물렀다. 그는 어마어마한 부정축재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반대로 황족들 중에는 굶주리는 자가 나올 정도로 황실의 신세는 비참해졌다. 이마드 울물크는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마라타 동맹의 힘을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부렸는데, 이때문에 알람기르 2세는 극도로 이마드 울물크를 싫어했다고 한다. 한편 펀자브의 총독 모인 울물크가 1755년 사망하자 그의 아내가 전쟁을 막기 위해 두라니 왕조에 요청을 청했다. 두라니 왕조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이를 핑계로 인도를 침공했고, 1756년에는 라호르까지 점령했다. 1757년 10월에는 여세를 몰아 델리까지 진격해 이마드 울물크 정권을 뒤엎어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이마드 울물크와 마라타 세력을 몰아내고 대신 나집 웃디울라 장군[2]을 델리의 책임자로 세워놓았다.
로힐랴족 출신이던 나집 웃디울라 장군은 두라니 왕조의 도움을 받아 알람기르 2세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남겨놓은 채 델리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마드 울물크가 마라타 동맹의 영토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고, 마침 팽창정책을 고수하며 두라니 왕조와 사이가 좋지 않던 마라타 동맹은 이마드 울물크를 돕기로 결정한다. 마라타 동맹은 대군을 이끌고 델리로 진군했다. 병사가 2,500명 밖에 없었던 나집 웃디울라는 델리 성문을 닫아걸고 필사적으로 5개월 가까이 항전했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델리에서 탈출해 도망쳤다. 마라타 군대는 점령 직후 델리를 무자비하게 약탈했고 알람기르 2세는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바라트푸르 지방으로 도망쳤다. 이후 델리의 붉은 요새를 포함해 마음껏 노략질을 즐긴 마라타 군대에 이어 자트족이 한 차례 더 델리를 약탈했고, 자트족이 물러간 후에야 알람기르 2세는 델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한편 마라타 동맹의 도움을 받아 겨우 델리로 돌아온 이마드 울물크는 끝까지 도망간 나집 웃디울라 장군을 추격해 더 북쪽으로 몰아내는 데에까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지 못했다. 두라니 왕조의 힘을 직접 본 알람기르 2세가 혹시나 두라니의 손을 잡고 자신을 제거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결국 이마드 울물크는 알람기르 2세에게 힌두교 성인이 알현을 요청한다고 속여 그를 궁궐 밖으로 꾀어냈고 황제가 밖에 나온 틈을 타 암살자를 시켜 그를 살해하고야 만다. 이마드 울물크는 알람기르 2세가 죽자 샤 자한 3세를 새로운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한다.
3. 기타
- 그의 재위기에 벵골 지방에서 3차 카나틱 전쟁이 발발한다. 오랫동안 벵골을 지켜온 알리바디 칸이 사망하자 알람기르 2세는 알리바디 칸의 후계자 시라지 웃다울라를 새로운 벵골의 나와브로 임명했는데, 내부에서 그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시라지 웃다울라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급하게도 영국 동인도 회사 소유의 캘커타를 공격하는 짓거리를 저질렀고, 영국은 로버트 클라이브를 시켜 캘커타를 탈환한 다음 플라시 전투에서 시라지 웃다울라를 끝장냈다. 시라지 웃다울라는 휘하 장군 미르 자파르에게 죽임을 당했고 미르 자파르가 새로운 벵골 나와브를 자칭했지만 알람기르 2세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3]
- 알람기르 2세는 무굴 최고의 확장기를 이끌었던 아우랑제브 황제의 제호인 '알람기르'를 따서 제 왕호를 짓고 평생 아우랑제브를 본받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워낙에 시기가 좋지 않았고 영국과 마라타, 아프가니스탄 등 외세의 간섭이 너무 심해서 성공하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이렇게 무굴 제국이 망해가고 있을 즈음이니 1750년대에 반대로 마라타 동맹은 영토적인 면에서 최절정기를 찍었다. 특히 나집 웃다울라를 몰아내고 델리를 다시 장악한 직후의 마라타 동맹은 북인도 대부분을 다스리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고, 거의 인도 아대륙 절반 넘게를 아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