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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01:15:04

아우랑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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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6대 황제
아우랑제브
پادشاه اورنگزیب عالمگیر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무히 웃딘 무하마드
محي الدين محمد
출생 1618년 11월 3일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다호드[1]
사망 1707년 3월 3일 (향년 88세)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아마드나가르[2]
재위 기간 제6대 황제
1658년 7월 31일 ~ 1707년 3월 3일 (48년 7개월 4일)
대관식 1658년 7월 31일
전임자 샤 자한 (제5대)
후임자 무함마드 아잠 샤 (제7대)
부모 아버지 : 샤 자한 황제 (1592 ~ 1666)
어머니 : 뭄타즈 마할 (1593 ~ 1631)
자녀 슬하 5남 5녀
차남 바하두르 샤 1세 (1643 ~ 1712, 제8대)
3남 무함마드 아잠 샤 (1653 ~ 1707, 제7대)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계승 전쟁2.3. 통치
2.3.1. 군사 원정
2.3.1.1. 무굴-마라타 전쟁
2.3.2. 외교 정책2.3.3. 종교 정책
2.4. 죽음
3. 불우한 가정사4. 평가5. 기타

[clearfix]

1. 개요

무굴 제국의 제6대 황제. 풀네임은 알 술탄 알 아잠 왈 카칸 알 카람 아불 무자파르 무휴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 바하두르 알람기르 1세.

무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황제로 세계사에서도 언급되는 인물이다. 남인도의 골콘다, 비자푸르, 아마드나가르 등지를 정복해 데칸 고원 일대에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확립하는 데에 성공했고, 그의 재위기 무굴 제국은 거의 전 인도를 아우르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거대한 영토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허구한 날 제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거나 봉신국들이 독립을 선포하는 등 조용할 날이 없었고 아우랑제브는 죽을 때까지 이들을 진압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특히 남인도에서 발흥한 마라타 동맹의 경우, 끈질기게 아우랑제브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아서 아우랑제브는 무려 27년 동안 전쟁을 벌이다가 전장에서 죽었다. 이 전쟁을 벌이느라 막대한 전비가 들어갔고 무굴 제국은 이 전비를 감당하느라 엄청난 양의 세금을 물려야만 했다. 이는 결국 심각한 사회 불안정을 불러온다.

게다가 아우랑제브는 신실한 수니파 무슬림으로, 전 인도를 이슬람화하기 위해 강압적인 종교 정책을 실시했다. 선대 악바르 대제 시절의 관용 정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힌두교도와 소수 종교에 대한 억압 정책만이 남았다. 수많은 힌두 사원들이 불타고 무너져 내렸으며, 비무슬림들에게 물리던 인두세지즈야도 부활했다. 당연히 이는 힌두교도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반발을 불러왔고 제국에 대한 반감은 날로 커져갔다. 뿐만 아니라 시크교구루를 고문하다가 끝내 개종하지 않자 생매장해 죽이는 등 온갖 잔혹한 짓거리를 벌이면서 타 종교의 증오를 사기까지 했다. 이 역시 무굴 제국의 붕괴를 불러오는 데 일조했고 아우랑제브가 죽자마자 32년만에 무굴 제국은 델리 일대만을 겨우 다스리는 지방 정권 수준으로 전락한다.

정복 군주로서 고평가되기도 하나, 잦은 전쟁과 과도한 확장 및 제국 내 이교도들에 대한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펼쳐 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암군이라는 평 또한 공존한다. 때문에 프랑스 왕국루이 14세, 청나라건륭제 등과도 자주 비견되는 인물이다.[3]

2. 생애

2.1. 유년 시절

아우랑제브는 1618년 11월 구자라트에서 황제 샤 자한과 황후 뭄타즈 마할 사이에서 샤 자한의 3남으로 태어났다. 1626년 6월에 아버지 샤 자한이 당시 황제이자 할아버지인 자한기르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실패한 후,[4] 당시 8살이었던 아우랑제브는 형인 다라 시코 황자와 함께 라호르에 사실상의 인질로 잡혀갔다. 얼마 지나지 않은 1627년에 자한기르가 승하하자 샤 자한은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했고, 포로에서 황자이자 공식 후계자들 중 하나로 신분이 격상된 아우랑제브는 아그라에서 샤 자한과 재회했다. 이후 아우랑제브는 궁정 교육을 받으며 훌륭히 성장했고,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힌디어 등 다양한 언어에 유창했다. 1633년 5월에는 궁궐로 쳐들어온 코끼리를 창으로 때려 제압하며 아버지 샤 자한으로부터 용감한 자라는 뜻의 '바하두르'라는 칭호와 20만 루피를 하사받았다.[5]

성인으로 성장한 아우랑제브는 어릴 적부터 이미 군사 분야에는 천재적일 정도의 재능을 보였다. 1635년 오르차 지역의 군주 주자 싱이 반란을 일으키자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게 경험을 쌓아줄 겸 그를 명목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아우랑제브는 실무를 맡은 장군들이 오르차 요새를 공성하는 동안 뒤에서 지켜보며 군대 운용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이 때의 경험은 아우랑제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아우랑제브는 1636년에는 데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한창 데칸 지방을 휩쓸던 아마드나가르의 무르타자 샤 3세를 굴복시키고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637년에는 19살의 나이에 사파비 왕조의 공주였던 딜라스 바누 베굼과 혼례식을 올렸다.[6]

그렇게 아우랑제브는 데칸 지방을 성공적으로 제압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 했지만..... 시련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1644년에 그의 누이이자 샤 자한이 가장 사랑하던 딸 자하나라 공주가 향유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었는데, 이에 슬픔에 빠진 황제가 직접 딸을 보살피며 모든 황족들에게 총소집령을 내렸던 것이다. 곧바로 수 천명의 신하와 황족들이 모여 자하나라의 쾌유를 빌었다. 하지만 그와중에 아우랑제브는 소식을 전해들었음에도 무려 3주 동안이나 꾸물거리다가 수도 아그라로 귀환했다. 군장을 차려입고 꺼드럭대며 황궁에 들어오는 아우랑제브를 본 샤 자한은 격노했다. 그는 바로 아우랑제브의 데칸 총독직을 박탈해버렸고, 아우랑제브가 군대에서 무굴 황제의 인장과 깃발, 그리고 천막을 사용할 권리마저 빼앗아버렸다. 아우랑제브에게는 최악의 형벌이었던 셈.[7]

그렇게 아우랑제브는 벌로 7개월 동안 궁정에 연금되어있다가, 1645년 구자라트나와브로 임명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심한 친무슬림 행보 때문에 일부 종교 갈등을 미숙하게 처리하긴 했지만 이미 데칸 총독으로 재임하며 쌓은 행정경험 덕에 아우랑제브는 구자라트를 훌륭히 통치했다. 아우랑제브가 구자라트를 잘 다스리자 샤 자한은 그를 1647년 아프가니스탄의 발크 지방으로 보냈다. 당시 발크 지방은 우즈베크인들이 하도 찝적대는 통에 샤 자한의 속을 썩이고 있었는데, 아우랑제브 이전에 그 곳을 관리하던 무라드 바크쉬 황자가 대응이 미숙했기에 아우랑제브를 믿고 그 곳에 보낸 것. 하지만 아우랑제브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우즈베크인들은 무굴 군대 못지않은 엄청난 정예병들이었고 오랜 싸움을 벌였지만 결과는 무승부였다. 우즈베크 군대는 게릴라를 펼치며 아우랑제브를 압박했고, 무굴 제국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막대한 전비만을 지출한 채 후퇴했다.

아우랑제브의 군사적 실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샤 자한은 이후 물탄신드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사파비 왕조칸다하르가 침공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칸다하르를 수복하려 했지만. 겨울이 오면서 어쩔 수 없이 칸다하르 회복의 꿈을 접고 후퇴했다.[8] 아우랑제브는 다시 데칸 총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652년 아우랑제브가 다시 돌아갔을 무렵, 데칸 지방은 이전과는 비교도 힘들 정도로 척박해진 상태였다. 행정구들은 하나같이 빈곤하기 짝이 없었고 제압해놓은 봉신국들은 정해진 공납금도 내지 않고 중앙 정부의 말도 듣지 않았다. 아우랑제브는 유능한 관료 무르시드 무리 칸을 데려와 북인도의 세법을 데칸 지방에 그대로 적용했다. 덕분에 데칸의 재정 상황은 흑자로 돌아섰고 사회는 다시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또한 비자푸르 술탄국을 공격해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내고 데칸을 안정시키는 공로도 세웠다.[9] 아우랑제브 덕분에 데칸 고원 지대에 무굴 제국의 영향력은 다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2.2. 계승 전쟁

아우랑제브는 제 아버지를 쫓아내고 제위에 올랐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무굴 제국에는 티무르 제국의 전통을 따라 장자 계승의 원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황제가 바뀔 때마다 후계자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 계승 전쟁을 벌였고, 여기서 이긴 사람이 다음 황제로 즉위하는 식이었다. 계승 방식이 이런 식이었으니 제대로 평화로운 제위 계승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이때 당시 샤 자한에게는 다라 시코, 샤 슈자, 아우랑제브, 무라드 바크쉬 황자 등 총 4명의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가 있었다. 개중 가장 유력한 계승자는 다라 시코 황자였다. 악바르의 재림이라 할 정도로 온화한 기질의 군주였고 꽤나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좋아해 힌두교 신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반대로 아우랑제브는 친무슬림이었고 호전적이었으며 강력한 비타협주의를 추구해 무슬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총 4명의 후계자들이 있었지만 이 두 명이 가장 세력이 컸기 때문에 사실상 아우랑제브와 다라 시코 황자가 제위를 놓고 격돌한다.

1657년에 샤 자한이 몸져눕자 후계자들 사이의 쌓여있던 갈등이 폭발한다. 샤 자한은 미리 계승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다라 시코 황자를 다음 황제로 지정한 상태였지만 그런 것 따위는 무굴 제국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이 병석에 누운 것을 기회로 삼아 황위를 찬탈하기로 결심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샤 슈자, 무라드 바크쉬 등 나머지 2명의 황자들도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모두 샤 자한과 다라 시코 황자가 있는[10] 아그라로 진격했다. 샤 슈자 황자는 본거지였던 벵골 지방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아그라로 진격했지만 샤 자한의 진압군에 의해 패배해 달아났다. 아우랑제브는 데칸 일대에서 돈을 있는대로 끌어모아 금력을 쌓은 뒤 바로 아그라로 진군했다. 한편 구자라트가 홈그라운드였던 무라드 바크쉬 황자는 중간에 아우랑제브와 타협을 맺고 서로 힘을 합쳤다.[11]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쉬의 연합군은 둘의 연합을 미처 전해듣지 못했던 진압군을 1658년 4월에 손쉽게 깨부쉈다.

샤 자한이 보낸 진압군을 무너뜨린 아우랑제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젠 다라 시코 황자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우랑제브를 제압하러 나왔지만, 애초에 유한 성격이었던 다라 시코가 전쟁 분야에서만큼은 타고난 아우랑제브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고 1658년 6월 사무가르 전투에서 다라 시코는 대패하고야 만다.[12] 사무가르 전투의 패배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다라 시코 황자는 아그라로 돌아가 아버지 샤 자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가족들만을 챙겨 델리로 도망갔다. 이후 아우랑제브는 아그라로 무혈 입성했다. 샤 자한은 아그라 요새에서 버텼지만 아우랑제브가 물 공급을 끊어버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했고, 결국 1658년 7월에 황위에서 강제로 폐위당했다. 아우랑제브는 아그라 정복 직후 무라드의 뒤통수를 치고 그를 체포한 다음 1659년 1월 괄리오르 성으로 보낸 후 그곳에서 1661년 12월 죽여버렸고, 샤 슈자는 저 멀리 버마 지역으로 내쫓아버렸으며[13] 델리로 도망쳤던 가장 강력했던 경쟁자 다라 시코는 제국의 북서 국경까지 쫒아가 끝끝내 처단했다.[14] 이렇게 모든 경쟁자를 제거한 아우랑제브는 1658년 공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제6대 황제로 즉위한다.

2.3. 통치

그렇게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쟁 끝에 제위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즉위 직후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했다. 1663년에는 라다크 지방을 방문해 제국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고 봉신 왕들의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1664년에는 샤이스타 칸 수베다르를 벵골나와브로 임명했고, 수베다르 나와브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쫒아내고 아라칸인 해적들을 격파, 1666년에는 핵심 항구였던 치타공을 정복하는 등 무굴 제국의 상행로를 훌륭히 지켜냈다. 1685년에는 아들 무함마드 아잠 샤더러 5만 명의 군대를 맡겨 비자푸르의 시칸다르 아딜 샤를 공격하도록 시켰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비자푸르 요새의 막강한 대포 화력 때문에 몇 달씩 고전하자, 흥분한 아우랑제브는 친히 대군을 끌고 친림했고 8일 만에 비자푸르는 무굴 제국의 손에 떨어졌다. 비자푸르마저 떨어뜨리자 이제 데칸 술탄국 중에 남은 건 골콘다 밖에 없었다. 골콘다 요새는 화강암 언덕 위에 8마일에 달하는 엄청난 철벽 요새였지만, 결국 이마저도 8개월 간의 치열한 공성 끝에 함락했고 더이상 남인도에서 아우랑제브에 대항할 세력은 없었다.

2.3.1. 군사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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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cottkaciuba.weebly.com/274234_orig.jpg
주황색 영토가 아우랑제브가 새로 정복한 영토다.

그렇게 웬만한 인도 왕국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굴복시키면서 아우랑제브 대의 무굴 제국은 거의 완전한 인도 통일을 이룩하고 평화를 구가하…지 못했다. 아우랑제브의 정복 사업이란 게 애초에 정복지를 정식으로 행정구역으로 통합하고 황제가 임명한 지방관이 내려가 대리통치하는 게 아니었고, 대신 일단 토착 왕을 굴복시킨 뒤 충성 맹세를 받아내는 식이었다. 즉 토착 왕들이나 토후들이 계속 그 지방을 통치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토후들은 자신을 강제로 무릎꿇린 무굴 제국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무굴 제국이 조금이라도 약화되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들고 일어나 독립을 선포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무굴 제국은 악바르 시대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에서 벗어나 친무슬림적인 성향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점차 무굴 제국이 이슬람화되어가자 힌두교 신자, 시크교 신자, 자이나교 신자 등 다양한 종교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하나하나 반란을 일으키면서 아우랑제브는 허구한 날 반란을 진압하러 다녀야 했다.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무슬림 신자로서 인도 전체를 이슬람화시키려 했다. 그래서 추진한 핵심 정책이 바로 지즈야, 비무슬림들에게 매기는 인두세 정책이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1669년에는 마투라의 힌두 사원이 파괴된 것을 계기로 힌두교를 믿는 자트족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670년에 이르자 반란군이 급격히 불어나 2만에 달하는 반란군들이 지방 토후 고쿨라의 지휘 하에 무굴 제국에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아우랑제브는 1년도 되지 않아 농민군들을 무찔렀고 고쿨라는 목을 베어 처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쿨라의 아들 라자 람 자트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라자 람 자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악바르의 무덤과 타지마할을 도굴했다. 악바르는 이 때문에 죽은 후에도 부관참시를 당해야 했고, 그의 뼈는 시가지에 질질 끌려다닌 후에 불태워졌다. 또한 타지마할의 은으로 만들어진 문짝을 녹여 약탈해가기까지 했다. 격노한 아우랑제브는 대군을 동원해 반란군을 공격했다. 1668년 7월에 반란은 진압되었고 라자 람 자트의 목은 아우랑제브 앞에까지 배달되었다고.[15]

한창 아우랑제브가 계승 전쟁을 치르고 있을 무렵에 아삼 주의 힌두 왕국들이 무굴 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 벵골 지방으로 쳐들어왔다. 3년 동안은 무굴 제국을 정리하느라 여유가 없어 이들을 가만 놔두었지만, 아우랑제브의 황위가 확고해지자 1660년 벵골 총독 미르 줌라 2세가 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1661년 11월에 무굴 제국군이 아삼으로 진군했고, 1662년 3월에는 아삼 왕국의 수도였던 가르가온을 함락했다. 가르가온에서 82마리의 코끼리, 30만 루피의 보물, 1,000여 척의 함선, 173개의 창고량에 달하는 식량 등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약탈한 무굴 제국은 이후 아삼 지방에 총독을 임명한 채로 원정을 중지하고 얻어낸 영토를 굳히기에 나섰다. 무굴 제국은 1671년 치러진 사라이가트 전투에서는 아삼 군대에게 패배했지만 지방에 대한 통치력만큼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1년 후에 또다시 일어난 이탁훌리 전투에서는 아삼 군대에게 쫒겨나며 아삼 지방의 독립을 사실상 용인한다. 이후 무굴 제국은 더이상 벵골 지방 동쪽으로 영토 확장 시도는 하지 않는다.

종교인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도 흔했다. 1672년 5월에 사트나미교를 믿는 북인도 농민들이 봉기해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북인도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사트나미 신자들은 자신들이 무적이라 생각했고 심지어 분신술을 쓸 수 있다고 여겼다. 초기에는 소수로 돌아다니던 무굴 군대를 격파하며 승승장구했지만 놀란 아우랑제브가 1만 명의 대군을 보내 쓸어버리면서 얼마 가지 않아 잠잠해졌다. 시크교 신자도 반란을 일으켰다. 아우랑제브의 강제적인 개종 정책에 반발한 시크 구루 테흐 바하두르는 아우랑제브더러 만약 자신을 개종시킨다면 제 아래 신자들도 개종시키겠다고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을 받아본 아우랑제브는 테흐 바하두르를 끌고와 혹독한 고문을 하면서 강제로 개종시키려 들었다. 개종 시도는 실패했고 구루는 목이 잘렸다. 종교 지도자를 이따위로 대해놨으니 시크교도 사이에서 아우랑제브에 대한 반감이 맥스를 찍는 건 당연지사. 결국 아우랑제브가 죽기 8년 전인 구루 고빈드 싱이 169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16] 결국 이는 시크 왕국의 창설로 이어진다.

1672년에는 파슈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이유는 카불에 주둔하던 무굴 병사들이 파슈툰 부족의 여인들을 성추행했기 때문. 한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그래도 무굴 제국의 막대한 세금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아프간계 부족들 거의 대부분이 통째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총독이던 아미르 칸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무굴 대군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입했지만,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참히 깨져서 그를 포함해 겨우 4명만이 살아돌아왔다고 한다. 격분한 아우랑제브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쳐들어갔다. 그는 청야전술을 사용해 아프간 지방 전부를 불태워버렸고 헛소문을 퍼뜨려 부족들 간의 불화를 유도했다.[17] 아우랑제브는 혹독한 탄압으로 파슈툰인들을 찍어누르는 데에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력이 예전같지 않던 무굴 제국이 이전처럼 아프간 일대에 확고한 장악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주요 교역로 일대와 대도시들을 제외하면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거의 독립적으로 떨어져나간다.
2.3.1.1. 무굴-마라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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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인들은 마하라슈트라 지방에 살던 인도-아리아계 민족으로, 힌두교를 신봉했다. 당연히 전 인도의 이슬람화를 주창하던 무굴 제국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였던 것. 당시 마라타인들은 수는 많았지만 강력한 구심점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마라타인들의 영웅 시바지 본슬레가 등장하며 뒤집힌다. 시바지 본슬레는 일단 인근의 약화된 비자푸르 술탄국을 공격했다. 술탄 아딜 샤는 그를 막으려 했지만 게릴라 전술을 활용했던 시바지를 막기에는 무리였다. 시바지 본슬레는 비자푸르의 요새들을 함락하고 그 안에 쟁여져 있던 무기와 대포들을 활용해 군대를 재정비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자푸르의 무기로 무장한 마라타 군대는 강력한 군대로 변모했다. 시바지 본슬레는 뿐만 아니라 제 영토 내에서 힌두교도들을 탄압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며 힌두교도 대부분의 인기를 얻었고, 훗날 비자푸르 술탄국이 무굴 제국에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세를 불리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무굴 제국의 세력을 남인도에서 축출하고 힌두교 제국을 건국하는 것이었다.

시바지 본슬레의 군대가 갈수록 커지자 아우랑제브는 1659년 샤이스타 칸[18]을 파견해 본슬레를 꺾고 잃어버린 요새들을 탈환하라 시켰다. 샤이스타 칸은 푼 지방에 자리를 틀고 진지를 차렸는데, 그가 총독의 결혼식 연회에 참여하던 도중 시바지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야습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본슬레는 샤이스타 칸의 아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죽여버렸고 샤이스타 칸의 손가락 3개를 잘라 모욕한 다음 그를 추방했다.[19] 아우랑제브는 샤이스타 칸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라자 자이 싱을 보냈다. 라자 자이 싱은 본슬레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아그라에서 아우랑제브를 알현하기를 요청했고, 본슬레는 이를 받아들였다. 허나 회담에서 본슬레가 황실 예법을 무시하는 등 아우랑제브를 노하게 만들었고, 잠시 구금되어 죽을 위기를 맞았으나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20] 아그라에서 도망쳐나온 본슬레는 데칸 고원 일대로 돌아가 1674년 스스로 '차트라파티'로 선포하고 마라타 동맹을 창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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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지 본슬레 마라타 경기병
힌두 왕국을 건국한 본슬레는 1680년에 죽을 때까지 활발히 전쟁을 벌이며 무굴 제국과 맞서 싸웠다. 안그래도 무굴 제국과 이슬람을 싫어하던 남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열성적으로 마라타 동맹을 도왔고 무굴 제국의 남인도 영향력은 갈수록 사그라들었다. 시바지 본슬레의 뒤를 이은 샴바지 본슬레 역시 무굴 제국의 군대를 남인도 지방에서 몰아내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와중에 아우랑제브의 아들이었던 악바르[21]가 몇몇 신하들과 반란을 일으켜 데칸으로 도망쳤다. 스스로 아버지를 쫒아내고 황제가 되었기에 누구보다 후계자들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아우랑제브는 직접 군대를 소집해 악바르를 쫒아갔고, 악바르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결국 마라타 동맹에 투항한다.[22] 1689년에는 아우랑제브의 군대가 샴바지 본슬레를 사로잡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후임 라자람 1세 등이 끊임없이 저항해대는 통에 남인도는 조용해질 날이 없었다. 마라타 동맹은 계속 무굴 제국의 발목을 잡았고, 무굴 제국은 막대한 전비를 들여가며 이를 진압해야 했다.

무굴 제국이 마라타 동맹을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던 가장 큰 이유는 마라타 동맹에 핵심적인 중앙 지도부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전 골콘다비자푸르 등은 강력한 술탄이나 중앙정부가 존재해 이들의 머리만 날리면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라타 동맹은 아무래도 여러 마라타 부족들의 연합체에 가깝다보니 부족들 하나하나를 모조리 처리해야만 했기 때문. 아우랑제브가 남하하면서 본슬레 가문의 수도였던 사타라마저 함락시켰지만 마라타인들은 오히려 무굴 제국의 측면인 동쪽 말와나 하이데라바드 등지를 파고들거나 수라트 항을 공격하며 아우랑제브를 위협했다. 게다가 무굴 제국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막아내는 동시에 인도 대륙 남쪽 끝으로 남하하면서 타밀나두 등지의 소왕국들을 정복하면서 힘을 길렀고, 아우랑제브는 마라타인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20년 동안 데칸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는 남인도에서 무굴 군대 전체의 5분의 1 가량을 소모했고 심지어 88세라는 고령에 죽을 때까지 마라타인들과 죽고죽이는 삶을 살았다. 27년의 무굴-마라타 전쟁 동안 무굴 제국은 점차 황폐해졌고,[23] 늙은 황제가 데칸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점차 각지에서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았다.[24]

2.3.2. 외교 정책

무굴 제국이 마지막으로 외교적 정점을 찍었던 시대. 사실상 인도 전체의 황제나 다름없던 아우랑제브였기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나라들이 사절들을 보내왔고 아우랑제브 역시 해외에 관심이 많은 편에 속했다. 아우랑제브의 생일에는 6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대사를 보내 탄신을 축하할 정도로 무굴 제국의 국제적 인지도가 높았다. 특히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의 접촉이 이전 악바르샤 자한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해졌고, 이들은 인도에서 이권을 챙겨가거나 거류지를 개방해 자유무역을 하고 싶어하는 등 점차 인도 내부에 활발히 침투하기 시작한다. 반면 페르시아오스만 제국 같이 전통적인 교류국들과의 관계는 약간씩 소홀해졌다. 특히 아우랑제브가 말년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데칸 원정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 따위에는 별 관심을 쓰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는 한창 내전과 경제난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 시절을 달리고 있었지만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에 더 관심이 많아서 저 먼 무굴 제국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전통적인 교류국이던 사파비 왕조와는 완전히 적대적인 분위기로 돌아선다. 한때 후마윤을 대폭 지원해주기도 하는 등 무굴 제국의 건국부터 인연이 깊었던 사파비 왕조였지만, 힘의 균형이 역전되고 서로 칸다하르 지방을 두고 싸우는 통에 그간의 우호 교류가 모두 날라가버렸던 것. 1660년에는 아바스 2세와 선물을 나누기도 했지만 이를 제외하면 별다른 우호적인 교류는 없었다. 오히려 북서 국경 지대에 추가 군대를 배치하는 등 사실상의 적성국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1666년 아바스 2세가 사망하고 슐레이만 1세가 새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사파비의 국력이 확연히 약해지자 아우랑제브는 아예 사파비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다. 슐레이만 1세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쫒겨난 아들 악바르의 망명을 받아주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악바르는 수차례 자신을 도와 아버지를 상대할 대군을 빌려달라 요청했지만 안그래도 내부가 소란스러운데 무굴 제국과 충돌하기를 꺼렸던 슐레이만 1세는 악바르의 요청을 가볍게 씹어버렸다.

오스만 제국은 껄끄럽게 생각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곧 전 이슬람의 칼리파였는데, 이를 빌미로 오스만이 무굴 내부에 간섭해오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 심지어 물밑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적들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당시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 2세가 보낸 친서도 무시했고, 기독교 국가들을 상대로 지하드를 벌이자는 그의 요청 역시 묵살했다. 그 외에도 티베트와도 적대국으로 지냈다. 티베트가 계속 라다크 일대를 침공하였던 탓이 크다. 1680년대에는 티베트로 군사 원정을 벌여 라싸달라이 라마를 사로잡아보도록 했지만 물론 실패했다. 반면 우즈베키스탄, 몰디브 등 약소국들과는 후원 관계를 맺으며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애초에 무굴 제국에 위협이 될만한 국가도 아니었거니와 그쪽이 먼저 사절들을 보내 무굴과 통상 요청을 했기 때문. 특히 몰디브 술탄국은 갈수록 심화되는 영국네덜란드의 압박을 막기 위해 무굴 제국과 힘을 합치려 들었지만, 아우랑제브가 별 관심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무굴에는 강력한 해군이 없어서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아우랑제브 시기 가장 외교적으로 극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은 바로 영국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영국은 제국주의적인 기질을 탑재하고 언제든지 인도를 집어삼킬 궁리를 하고 있던 차였는데, 1686년 아우랑제브가 무역 특권을 내주지 않자 영국 동인도 회사가 전쟁을 일으킨 것. 이를 앵글로-무굴 전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은 때를 잘못 골랐다. 군대를 일으키면 열등한 인도인들을 쉽게 깨부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직 아우랑제브 하의 무굴 제국은 쌩쌩하게 살아있었고, 아우랑제브가 잔지라에 있던 대군과 인근의 함대를 총동원해 봄베이를 봉쇄하자 영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개전 4년째 들어 영국 요새에 기근까지 들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동인도회사는 바로 스탠스를 변경했다. 1690년에 영국 사절이 아우랑제브 앞에 엎드려 사죄한 뒤 15만 루피의 배상금을 지불했고,[25]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간청했다.[26] 물론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영국이 인도에 해놓은 짓을 생각해보면 진심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95년에는 또 영국 해적 헨리 에브리역사에 기록될만한 해적질에 성공했다. 당시 메카에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아우랑제브 소유의 보물선 간지이사와이(Ganj-i-Sawai) 호를 헨리 에브리가 털어버린 것. 당시 간지이사와이 호는 무굴 함대에서 가장 거대한 보물선이었고, 당연히 이 안에는 막대한 재화들이 그득그득 쌓여있었다.[27] 당연히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우랑제브는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로 격노했고, 4개의 동인도회사 소유 공장들을 폐쇄하고 에브리가 체포될 때까지 영국의 인도 내 모든 활동들을 금지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 영국 정부와 동인도 회사는 당연히 펄쩍 뛰었다. 웬 해적 때문에 엄청난 이윤을 남기던 대인도 무역이 끝장날 판에 놓였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은 눈이 뒤집혀 헨리 에브리의 목에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지만 결국 사로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28] 결국 동인도회사가 울며 겨자먹기로 아우랑제브에게 사과하고 피해를 배상하면서 다시 무역이 재개된다.

2.3.3. 종교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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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 초엽 붉은 요새 안에 세운 모티 마스지드

아우랑제브는 여러 무굴 황제들 중에서도 무슬림 군주의 끝판왕이었다. 그는 실제로도 대단히 신실한 무슬림이었고 전 인도의 무슬림화를 제 일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악바르 시절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완전히 뒤집었다. 비무슬림들에게 받는 인두세인 지즈야를 부활시키는 한편 강제적인 동화 정책 및 개종 정책을 시켜 힌두교, 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에게 엄청난 불만을 샀다. 비무슬림들은 무슬림처럼 옷을 차려입고 돌아다니면 벌을 받았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법정에서도 무슬림들에게는 더 처벌이 약했고 힌두교도들에게는 훨씬 엄했으며, 힌두교도들이 싸움을 벌였다는 이유로 해당 지역의 힌두 학교와 사원들을 모조리 무너뜨려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이슬람 규율인 샤리아를 인도 전역에서 실시하도록 명하고 극단적으로 음악을 인간의 쾌락의 산물이라 여겨 상당수 금지하는 등[29] 무굴 제국을 완벽한 이슬람 제국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그 노력이 오히려 무굴 제국의 붕괴를 불러왔다는 것이 문제일 뿐.

다만 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힌두 사원들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모스크만 주구장창 세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샤리아에 기초해 기존에 세워져있던 힌두 사원들은 최대한 존중해 줄 것을 명령했고, 함부로 무슬림들이 힌두 사원을 파괴하는 건 치안을 악화한다고 여겨 금지했다. 오히려 제 황권에 방해되는 사원이나 모스크는 종교를 가리지 않고 허물어버린 것에 가깝다. 하지만 힌두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했던 것만큼은 맞다. 수많은 힌두 사원들이 그의 재위기에 새롭게 세워지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거대한 규모의 힌두 사원은 지어지지 못했고 그나마 있던 대사원들도 상당수 허물어졌다.[30] 특히 바라나시의 신전은 시바지 본슬레를 도왔다는 이유로 아예 기반까지 싹 사라졌고 한 지방에서는 작은 모스크 하나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그 지방에서 가장 거대한 힌두 사원을 철폐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미얀 석불을 우상숭배라고 파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불과 300년도 안되어서....

아우랑제브는 동전에 제 이름을 새기는 것도 우상숭배의 단계라 생각해서 금지했다. 또한 힌두 축제이던 나우라우즈 축제를 기념하는 풍습 역시 궁전에서 없애며 궁궐의 악사와 춤꾼들을 몰아냈고, 도박, 음주를 법으로 금했다.[31] 힌두의 악습인 사티 역시 금지했고 무슬림 귀족들이 홀리, 디왈리 축제처럼 대표적인 힌두 축제를 주관하는 것은 물론이고 참여하는 것마저 금지했다. 또 악바르 대제 시절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개종해도 봐주었던 것과 달리 아우랑제브는 눈에 불을 켜고 이들을 처벌했다. 1679년에는 국가 재정 보충과 이슬람화를 위해 인두세 지즈야를 재실시했다.[32] 악바르 이래 전혀 실시되지 않았던 힌두교도들의 순례세도 부활했고 힌두교도들이 무슬림보다 좋은 말을 타고 다니는 것도 금지했다. 무슬림 상인들은 거래세가 2.5%였던 것에 반해 힌두 상인들은 무려 5%에 달하는 고세율의 거래세를 물렸다. 게다가 무슬림 귀족들에게 물리던 세목 80개를 없애고 그 세금을 모조리 힌두 농민들에게 거두어들이기도 했다.

2.4.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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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제브의 무덤.

아우랑제브가 죽을 무렵, 그의 치세 하의 무굴 제국은 영토적인 면에서만 보면 그 절정에 달해 무려 4백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해 현재의 인도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인구는 1억 5,800만 명에 달했고 거의 중국청나라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대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내부는 심각하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자한기르샤 자한 등 선대 황제들의 무분별한 사치 행각으로 국고는 안그래도 텅텅 비어있던 상황이었는데, 아우랑제브가 몇 십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군비가 필요했고 국고는 적자에 적자를 거듭했다. 게다가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심각했고 제국 중앙정부의 지방 통치력도 매우 약했다. 황제라는 구심점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독립해 떨어져나갈 위험이 곳곳에 그득했다. 사상누각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생각나는,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대제국이었다는 뜻이다.

늙은 황제는 27년 간 데칸 고원 일대에서 마라타 동맹과 전쟁을 치렀고 그의 나이는 무려 88세에 달했다. 하지만 황제도 30년에 가까운 전쟁에 지쳤던지 마침내 군 막사에 마련된 병석에 누웠고, 기력은 나날이 쇠했다. 아우랑제브는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면 바로 계승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계속 알리고자 했다고 한다. 아우랑제브는 1707년 3월 3일 아흐메드나가르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죽기 직전 300루피 정도의 부장품만을 가지고 묻어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의 장례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치를 것을 명했다. 사치를 배격했던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아우랑제브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황제의 장례식은 수피교 성인의 중정에서 치러졌고 시신은 깨끗한 무덤에 안장되었다.
마지막에 아들들에 보낸 편지에 자신의 막장적인 통치를 후회하는 유언을 남겼다.
나와 너희 옆에 있는 자들이 평온한 것처럼. 단 혼자(저 세상에) 떠난다. 짐이 이 세상에서 보낸 날들은 속죄의 날들을 제외하고, 나머지에 후회의 통념밖에 남기지 않았다. 짐은 임기 응변에 통치하는 재가 부족하고, 백성의 행복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제국군은 혼란에 빠져있다. 덕분에 강한 희망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을 되돌아볼 수 없다.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빠르게 쇠퇴한다. 바로 계승 전쟁이 일어나 황족 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약하거나 무능한 황제들이 연달아 즉위했다. 아우랑제브의 아들 바하두르 샤 1세가 후임 황제로 즉위했지만 이미 아우랑제브 시대에 시작된 제국의 붕괴를 막기에는 무리였고, 바하두르 샤 1세의 무력한 기질과 겹쳐서 제국은 더 급속히 무너졌다. 바하두르 샤 1세가 즉위하자마자 아우랑제브가 죽을 때까지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마라타 동맹이 북상하며 무굴 제국을 본격적으로 침공한다.[33] 아우랑제브 사후 온갖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제 영토 하나 제대로 건사할 여력이 부족하던 무굴 제국은 마라타 동맹이 밀고 올라오자 그대로 몰락했고,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은 지 몇 십년도 지나지 않아 무굴 제국은 델리 일대만을 다스리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한다.

3. 불우한 가정사

아버지 샤 자한을 폐위시키고 유폐한 후 형제들을 죽인 업보 탓인지[34] 아우랑제브는 가정사가 좋지 못했다. 아버지랑 형제들은 물론 자녀들과도 관계가 좋지못했고 그의 자녀들은 아우랑제브를 향해 칼 끝을 겨누었다. 특히 두번째 황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무하마드(1639 ~ 1676)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빴고 아버지가 소개해준 아내를 버리고 아버지의 적인 숙부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이 된 숙부한테 가담하였다. 결국 아우랑제브는 포로가 된 무하마드를 감옥에 가두어버렸고 무하마드는 감옥에서 죽었다.

첫번째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무아잠(1643 ~ 1712)은 1670년 첫 반란을 모의했다가 들통난 후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았지만 그 뒤에도 세 번이나 반란을 모의했다. 네 번째 반란 때에는 아우랑제브도 참지 못하고 그를 감옥에 가둔 후 더울 때라도 냉수를 제공하지 말고, 좋은 식사도 제공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7년여 간을 감옥에서 죄수로 복역하던 무아잠은 아버지에게 또다시 용서를 받고 1695년 풀려나 아버지의 감시가 있긴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그 후 그는 제국의 서북 변경지대 카불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재임 중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 무아잠은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남은 형제들을 모두 죽인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다섯번째 아들인 악바르는 1681년 라지푸트와 손을 잡고 반란을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난 후 데칸으로 도주해 마라타 왕국의 왕 샴바지와 손을 잡고 대항했다. 격분한 아우랑제브는 '최악의 악바르'라 부르며 군사를 모아 마라타 왕국의 군대를 박살내 버리고 샴바지 왕을 포로로 잡아 잔인하게 고문한 끝에 죽였으나 악바르를 잡는데는 실패했다. 도주한 악바르는 페르시아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던 중 사망했다.

장녀인 제브니사 공주와도 관계가 나빠서 자주 다투었으며 나중에는 그녀가 동복동생인 악바르를 지지했는데 아우랑제브 황제는 제브니사가 반역자인 악바르와 연락했다는 것에 분노했고[35] 그녀의 재산을 몰수한 다음 델리 외곽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녀는 아버지한테 용서받지 못하고 20여 년간 세상과 격리된 채 지내면서 마크피(숨겨진 자)란 필명으로 수백 편의 수피 전통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기 5년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고 그녀의 시는 1929년 델리에서 출간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사망하기 전 아들 세 명에게 제국을 삼등분해서 다스리라고 유언을 남겼고, 제국의 황제 자리는 3남 무함마드 아잠 샤(1653 ~ 1707)에게 넘겼으나 앞서 말했던 차남 무아잠이 모든 형제들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그나마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생전에 안 본 게 위안거리인 셈.[36]

아내들을 사랑했지만 아내들도 자식들만큼 그의 생애 동안에 불행하게 살았는데 첫째 아내는 5번째 아이를 낳다가 어머니 뭄타즈 마할처럼 산고로 사망하고 두번째 아내와는 권력 문제로 다투게 되어 별거하였고 세번째 아내는 전염병으로 사망했으며, 네번째 아내와도 관계는 좋았지만 그가 사망한지 4개월만에 사망한다.

4. 평가

위대한 정복군주, 그러나 무리한 확장과 종교 탄압으로 제국의 멸망을 불러온 황제로 평가받았으나 최근에는 재평가받고 있다. 아우랑제브 개인은 독실한 무슬림[37]이자 뛰어난 학식과 군사적 재능을 지닌 영웅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국무를 보다가 밤늦게 잠에 들었고, 스스로도 굉장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 등 분명 신념과 능력만큼은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치세 후반기에 들어가며 국가경영과 자신의 종교관을 분리시키지 못한 것이 최대 실책이라 평해진다. 인도는 힌두교, 이슬람,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등 주요 종교들 외에도 지역별로 군소 종교와 기독교,[38] 심지어 소수의 유대인들까지 온갖 종교와 문화가 난립한 땅이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제위 후반기에 벌인 지나친 이슬람 우대 정책으로 제국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선제들의 노력을 무너뜨려버렸고,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붕괴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런 이슬람 강요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경하게 탄압하는 폭정을 저질렀다. 이외에도 궁정 내에서 '무타시브(이슬람 율법)' 강요 및 힌두교식 인사법 금지와 제국 각지의 비 이슬람 종교 시설의 파괴, 비 무슬림 관료들에 대한 차별과 이유 없는 해고를 일삼았다. 이에 이슬람 학자들과 신자들은 '이슬람 성군이 탄생했다'며 칭송했지만, 이는 소수의 무슬림들의 의견일 뿐이었고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힌두교도들은 이런 아우랑제브를 증오했다. 게다가 아우랑제브의 끝없는 전쟁에 들어가는 군비 때문에 국가 재정은 나날이 악화되었고 도저히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39] 결국 아우랑제브 사후 제국은 끝없는 반란과 재정 파탄으로 멸망 직전에 몰려있는 상태였다. 이를 아우랑제브의 차남 바하두르 샤 1세가 어느 정도 수습했으나 즉위 5년만에 급사하여 이후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껍데기만 남아 전 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서의 무굴 제국은 불과 30년도 되지 않아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그렇지만 위에서도 잦게 언급되는 군사적 재능 하나만큼은 천재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개인의 무력 면으로는 황자 시절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군영에 대형 전투 코끼리 하나가 난입해오자 혈혈단신으로 말에 올라타 장창으로 코끼리를 죽여 '용사'라는 뜻을 가진 '바하두르(Bahadur)'[40] 칭호를 하사 받았으며, 전술•전략가로서의 능력은 물론 군행정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화약 무기 도입,[41] 군 조직 체계화, 병과의 유기적 연계 등의 개혁을 단행하여 아우랑제브 시기 무굴 제국의 군사력은 정점에 달했다고 평해진다. 다만 무굴 제국군이 정점에 달하는 이 시기에도 연간 1백만 루피의 세금을 창출하던 무굴 제국의 대표적인 무역항인 수라트가 마라타 동맹의 지도자인 시바지에게 함락되어 6일 동안 계속된 약탈은 무굴 제국의 세금 수입에 치명타를 입혔다. 대대적인 약탈의 와중에 멀쩡했던 이들은 영국인과 포르투갈인들이었는데 유럽 국가를 건드리면 마라타는 끝장이라고 판단했던 시바지는 이들에게 무리하게 공세를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인도의 군사 기술력과 인프라는 유럽 문명과의 활발한 인도양 무역과 교류를 통해 상당한 발전을 이루면서 유럽의 성형 요새와 유사한 구조의 대포병 요새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군대들이 겪었듯이 이런 포격에 강한 낮고 두꺼운 방벽에 사각이 안 생기는 공간 디자인, 대규모 요새포 운용이 가능한 본격적인 요새 하나에 걸리면 무굴 제국의 군대도 몇개월이고 빌빌거리며 피똥싸는 공성전 상황이 연출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아우랑제브는 비자푸르, 골콘다 같은 이런 장기전으로 질질 늘어지는 대규모 공성전에 몇차례나 직접 개입하면서 전황을 타개하고 무굴 제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군사 기술이란 측면에서도 동시대 유럽, 오스만 제국과 교류하며 지속적으로 기술자, 고문들을 초빙하고, 당시 기술로서 최첨단인 조병창, 탄약 공장을 짓고 여전히 기마 귀족층의 기마 궁시가 중요했던 무굴 제국의 군대에 화약 전담 보병들인 총병대랑 포병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배치하는 등 세계적 트렌드를 잘 인지하고 있는 유능한 군사행정가였다. 개인의 무력으로나, 장군으로나, 군주로나 군사적인 능력에서는 인도사 전체에서도 역대급인데 정치, 종교적 문제에서 오히려 스스로 점수 다 까먹어버린 인상이 강하다.

오늘날 힌두교가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인도에서 힌두교도들을 탄압했던 아우랑제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우랑제브의 실책도 많지만 현재 인도에서는 그 실책을 더욱 강조하여 말하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로 2016년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우랑제브의 이름을 딴 '아우랑제브 로'가 많은 사람들의 비판으로 인해 지워지고 그 자리엔 인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압둘 칼람의 이름이 붙었다. 2014년 인도 공화국의 다수 여당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인도 인민당은 아예 아우랑제브에 이어 무굴 제국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인도의 길거리에서 아우랑제브를 악마화해 묘사한 조각상을 불태우기도 한다니 말다했다. 반대로 악바르 대제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관용과 타협을 좋아했던 악바르 대제였기에 교과서에서도 마우리아 왕조아소카 대왕에 필적하는 위대한 성군으로 묘사하는 반면, 아우랑제브만큼은 무리한 확장으로 제국의 멸망을 자초한 평가를 주로 실어놓는다.

반대로 파키스탄에서는 아우랑제브만한 황제가 따로 없다. 일단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주류일 뿐만 아니라 힌두교도들을 원수 대하듯이 하고 있기 때문에 힌두교도들을 탄압하고 이슬람을 숭상했던 아우랑제브를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 인도에 비하면 워낙 아우랑제브에 대한 이미지가 호의적인 편이기 때문에 악바르 대제보다도 더 위대한 취급을 받는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심지어 파키스탄의 교과서에는 무굴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오히려 아우랑제브로 보는 시각도 있고, 그에 대한 서술 분량도 인도에 비하면 압도적인 비율로 그득그득하다. 곳곳에 아우랑제브의 이름을 딴 도로나 건물들을 짓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신형 미사일에 붙이기도 했다. 다만 안타까워하는 점은 아우랑제브의 지나친 확장 정책으로 인해 그의 사후 무굴이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점, 그리고 남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확실하게 끝장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 정도다.

21세기 들어서는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아우랑제브가 조상인 악바르 대제처럼 포용력이나 정치적 유연성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냥 비관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힌두 귀족의 수는 그의 치세에 오히려 증가하였는데 아우랑제브 이전엔 힌두교도가 귀족의 20%를 차지했지만 그의 재위 시절엔 그 비율이 30%에서 절반 가까이로 늘었다. 무슬림 귀족들은 이런 힌두교도 우대에 아우랑제브에게 따졌으나 그는 "그대들의 종교는 그대들의 것이고, 내 종교는 나의 것"이란 말로 듣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무슬림이었는데다가,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온 강직하고 엄격한 무골이기도 했던 아우랑제브는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민법 강화와 민간에서의 혼합종교적(syncretic) 풍습에 대한 탄압 등으로 기본적으로 전임자들보다 종교적으로 더 엄격한 사회를 지향했던 건 사실이나, 힌두교 음악과 제례에 대한 전면적 탄압 같은 에피소드는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게 현대 무굴 제국 사학계의 평가이다.

사실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이란 측면은 시크교 구루 살해, 바라나시 강제 개명 시도 같이 해당 종교의 지도자급 인물이나 성지에 대한 정치적 박해 중심이지, 아예 사회적 차원에서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 신도들을 아예 강제 개종, 박멸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악명 높은 힌두교 사원 파괴 사건들도 주로 정치적 반란이나 불온함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고, 반대로 아우랑제브 치세의 후원으로 인해 융성해진 힌두교 사원들도 있다. 게다가 독실한 무슬림을 표방한 것치고 그가 상대한 적들 중 많은 수가 데칸 술탄국의 같은 무슬림 군주들이었고, '아우랑제브의 악행'으로 기억되는 큰 사건들 중 하나인 골콘다 약탈과 모스크 파괴도 같은 무슬림 상대로 저지른 것이다. 즉, 아우랑제브가 종교 불문한 정치적 독단성과 무자비함으로 적을 많이 만든 건 사실이라도, 특별히 종교적으로 불관용과 독선의 화신이었다는건 후대 19세기 인도 자체와 영국의 자유주의 역사학계가 만들어낸 과장된 인식이 20세기 들어와 힌두교 다수 인도 vs 무슬림 파키스탄이라는 정치적 구도 속에 재생산되면서 생긴 왜곡에 가깝다.#[42]

세력 확장을 잘하긴 했으나, 무리한 전쟁으로 국운을 갉아먹은 양날의 검인 점이 전한 천자인 한 무제 유철과 공통된 부분이다. 차이점이라면 아우랑제브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아서 일어난 반란을 무리하게 진압하느라 국운을 기울인 것이고 유철은 냅둬도 되는 흉노를 굳이 건드려서 일을 크게 만들어 국운을 기울인 점이다.

5. 기타


[1]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구자라트.[2]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마하라슈트라.[3] 아우랑제브, 루이 14세, 건륭제와 아슈르바니팔 모두 긴 재위 기간 동안 외적으로는 엄청나게 팽창하면서 겉으로는 최강국의 모습을 보였지만 내치 관리에는 실패해 사회 분열을 불러왔다는 공통점이 있다.[4] 샤 자한은 이때 이미 비공식적인 황위 계승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자한기르가 총애하던 후궁 누르 자한이 옆에서 살살 자한기르를 꼬드겨 자신을 제치고 다른 사람을 황제에 올릴까 두려워한 샤 자한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5] 후일 아우랑제브는 회고록에서 '내가 그때 그 코끼리에게 죽었다고 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황제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죽음 자체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내 아우들이 코끼리 앞에서 도망쳤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6] 딜라스 바누 베굼은 그의 첫 번째 아내이자 그가 가장 사랑하던 황후이기도 했다.[7] 이게 정설이지만 독실한 수니파 무슬림이었던 아우랑제브가 무소유를 선언하자 샤 자한이 어이없어하며 총독직도 같이 뺏어버렸다는 소문도 있다.[8] 아우랑제브의 역량 부족이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칸다하르 지방의 척박한 교통로와 추운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군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아우랑제브의 형이었던 다라 시코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다.[9] 다만 여기서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과 그의 황태자 다라 시코에게 크게 실망한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완전히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는데 샤 자한이 중지를 명했던 것. 호전적인 아우랑제브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 명령 뒤에 유화적인 성격이던 다라 시코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10] 다라 시코 황자는 이미 다음 황제로 낙점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버지 곁에서 정무를 보좌하고 있었다.[11] 무라드 바크쉬가 아우랑제브와 맺은 협약의 내용은 대충 제국의 3분의 1은 무라드 바크쉬 황자에게, 나머지 3분의 2는 아우랑제브가 갖는 것이었다.[12] 다라 시코는 뛰어난 문학적 업적과 다르게 군사적 재능은 꽝이었는데 샤 자한의 칸다하르 원정 중 다라 시코가 이끈 3차 칸다하르 공방전은 7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실패했다. 1658년 5월 29일 사무가르 평원의 전투에서 잘 준비된 아우랑제브의 군대와 다르게 다라 시코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고, 다라 시코가 몰던 코끼리가 부상당해서 말로 갈아타자 부하들이 다라 시코가 전사한 줄 알고 도망쳤다.[13] 이후 샤 슈자는 아라칸 왕국으로 망명갔으나, 그곳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좀 있는데, 샤 슈자는 망명 이후 아라칸 왕국의 왕인 산다 투담마에게 메카로 갈 수 있는 배를 돈을 주고 제공받기로 약속받게 된다. 하지만 산다 투담마는 차일피일 이를 미루며 배를 내주지 않았고, 도리어 샤 슈자의 딸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샤 슈자가 거절하자 3일 이내에 아라칸 왕국을 떠나라고 명령하면서 결국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후 산다 투담마는 샤 슈자를 처형하고 샤 슈자의 장녀와 결혼했으나(나머지 딸들은 자신의 하렘에 넣었다고 한다,) 다음 해에 샤 슈자의 자식들이 쿠데타를 또 일으키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샤 슈자의 아들들은 모두 처형시키고 딸들은 모두 가둬서 굶겨죽인다. 심지어 이때 장녀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도 굶겨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아우랑제브는 샤 슈자와 자녀들이 처형당한 것을 아라칸 왕국이 벵골 술탄국에게서 뺏어갔던 많은 영토와 치타공을 다시 뺏어오는 명분으로 잘 써먹게 된다.[14] 다라 시코 황자가 도망가던 중 휘하 장군이 그를 배신했고, 다라 시코는 1659년 8월에 목이 잘렸다. 시체는 조상 후마윤의 묘 근처에 버려졌고, 남은 목을 아우랑제브가 친히 칼로 한 번 더 으깬 후, 감금된 샤 자한에게 보냈다. 막내아들이 죽인 장남의 머리를 보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 한편 다라 시코의 장남 술라이만 시코는 지속적으로 마약을 투여해 중독사시키려 했으나 18개월이나 지나도 죽지 않아 아우랑제브의 명령에 의해 부하들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15] 참고로 아우랑제브 사후 자트 농민들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해 떨어져나갔다.[16] 구루 고빈드 싱은 말년의 아우랑제브에게 그의 잔인함과 무도함, 그리고 그가 자비로운 알라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다고 고발하는 서한을 보냈다. 신실한 아우랑제브는 그 서찰을 읽고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17] 이 때문에 아프간 부족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고 이는 근현대까지 아프가니스탄에 제대로 된 중앙정부가 세워지지 못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18] 아우랑제브 황제의 삼촌이기도 했다.[19] 샤이스타 칸은 이후에도 죽지 않고 아삼 지방으로 원정을 떠나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0] 이때 아우랑제브가 본슬레를 죽였다면 훗날 마라타 제국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21] 물론 그 악바르 대제와는 조상과 후손 관계이다.[22] 이후 마라타 동맹마저도 아우랑제브에게 패하자 이젠 페르시아까지 도망가서 아버지가 죽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자신이 먼저 죽었다.[23] 전쟁에 들어간 엄청난 양의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이 극도로 높아졌다.[24] 27년 간의 전쟁 동안 대략 250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200만 명에 달하는 일반 백성들이 전쟁 때문에 일어난 기근가뭄에 굶어죽었다. 이는 결국 무굴 제국의 붕괴를 촉진한다.[25] 현재 가치 약 440만 달러, 한화 약 54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26] 아우랑제브는 영국의 사죄를 받고 요새 봉쇄를 해제했다. 이후 동인도회사는 봄베이에 다시 자리를 잡고 캘커타에도 진출하는 등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활발하게 활동했다.[27] 그 당시 가치로 4억 달러, 한화 4,800억 원에 달하는 규모였다. 지금 가치로 재환산하면 당연히 몇 천억 쯤은 가볍게 뛰어넘을 것이다.[28] 참고로 이 사건은 세계 최초의 맨헌트라 불린다.[29] 완벽히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샤 자한이 애초에 음악을 좋아했고, 아우랑제브도 수 천년간 유지되어 온 인도의 음악 문화를 하루아침에 금지하기에는 불가능했다.[30] 하지만 대사원들이 사라진 거지 지방의 소규모 사원들은 더 늘어났다. 한 통계에는 그의 재위기 동안 사라진 사원이 고작 15개 밖에 안된다고 한다.[31] 물론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32] 이때 비무슬림들을 크게 세 계급으로 나누었다. 1년 수입이 200 디르함보다 적은 백성은 1년에 12디르함, 200디르함에서 1만 디르함인 사람은 1년에 24디르함, 1만 디르함 이상은 48디르함을 바쳐야했다. 여성, 아이, 거지 등은 예외였고 제 수입이 지출보다 많은 사람만 냈다.[33] 아우랑제브가 워낙 오래 살아서 바하두르 샤 1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황제에 오른지 5년 만에 죽었고 이는 무굴 제국의 붕괴를 가속했다.[34] 아이러니하게도 샤 자한이 폐위된 것 자체는 샤 자한 본인의 자업자득이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35] 특히 편지에서 아버지를 이슬람 율법에 위배되는 범죄를 저질렀다며 대놓고 비난하는 내용이 나와서 아우랑제브가 더욱 분노하게 되었다.[36] 아버지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 본인에 의해 생전에 못볼 꼴을 다 봤다.[37] 보석상인이자 여행가인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호랑이 가죽을 덮고 땅바닥에서 잘 정도로 고행에 열중했다고 하며, 일과가 단순하고 경건하며 엄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화려한 무굴의 궁중생활보단 반복적인 군사원정의 삶을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황제 자신은 장신구가 칼 밖에 없을 정도로 검소했다.[38] 중세 초기 인도로 이주해 독자적 종파를 세운 네스토리우스 계열 사도 토마스 교회 및 고아 지역을 비롯한 유럽 식민 제국들의 정복을 통해 가톨릭 포교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문서 등 참조[39] 또한 아우랑제브의 즉위 명분이었던 '선제의 폭정으로 인한 재정 파탄'은 아우랑제브 본인의 실책으로 인해 들고 일어난 반 무굴 세력과 제위 초부터 끝없이 이어져 오던 전쟁 및 해이해진 관료 기강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수 배는 더 심하게 답습하였다. 황제 개인의 생활은 검소했을지 몰라도 전쟁 지출이나 병사들의 봉급으로 막대한 돈을 지출하느라 그 규모만큼은 절대로 선대 황제들에 뒤지지 않았다.[40] 몽골어 '바아투르(Baghatur)'에서 유래한 단어.[41] 후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의 군사 기술자들을 초청해 지속적으로 개량한 결과 로켓 무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42] 이런 악평은 19세기 인도에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의 인도 작가 반킴 찬드라는 자신의 소설 『라즈싱하』에서 아우랑제브 황제가 힌두를 증오하려고 태어난 인물로 묘사하였다. 영국 지배자들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의 통치와 비교하며 힌두를 차별한 아우랑제브는 폭군이었다고 평가했고 이 평가는 후대로 그대로 이어졌다. # ##[43] 사실 2001년 3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폭파 이전에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게 찍혀 수백 년 동안 차츰차츰 파괴되고 있었다. 단지 기술력 부족으로 완전히 파괴하지 못해서 그렇지.[44] 물건 안 주는걸 넘어서서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한다. 샤 자한이 지급되는 물이 너무 짜서 강물이라도 달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들어주지 않았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