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공화국 구자라트주의 도시 | ||
수라트 સુરત · सूरत Surat | ||
국가 | [[인도| ]][[틀:국기| ]][[틀:국기| ]] | |
상위 행정구역 | 수라트 지구 | |
면적 | 461.6 km² | |
인구 | 6,936,534 명 (2011년) | |
공용어 | 구자라트어 | |
종교 | 힌두교 85.3% 이슬람교 11.5% 자이나교 2.3% | |
시간대 | UTC +5:30 (IST) | |
지역번호 | 0261 | |
우편번호 | 394001 ~ 394999 395001 ~ 395999 | |
차량번호 | GJ-05, GJ-19, GJ-28 | |
웹사이트 | 수라트 지구정부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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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의 항구도시. 땁티강(Tapti River)이 캄베이 만으로 흘러드는 곳에 위치해 있다. 주도인 아메다바드에서 남쪽으로 180여km 떨어져 있으며 동북쪽의 바도다라와 동남쪽의 나시크 모두 100여km 떨어져 있는 인근 도시들이다. 현재 인구는 460만명으로, 구자라트에서 아메다바드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여담으로 항구 도시이긴 해도 오랜 퇴적의 결과, 시내에서 바다까지는 7km 떨어져있다.2. 역사
수라트는 한 브라만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수리아푸르(Suryapur)였다. 당나라의 구법승 현장은 이 지역을 방문하여 대당서역기에 소랄타(蘇剌佗)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였는데 이 지역 주민들이 무척 부유한 대신 성품이 약삭빠르고 불교를 믿는 이들은 적고 힌두교를 믿는 인구가 더 많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에도 이 지역은 페르시아와 뒤이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며 번영하였다. 수라트 시는 부가 집중되었던 무역 도시로 종종 고초를 겪었는데, 14세기 초에 델리술탄왕조의 튀르크 군대에게 약탈되었고 구자라트 술탄국 하에 있던 16세기에는 두 차례 (1512, 1530년)에 포르투갈 군에게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근대에는 마하라슈트라 지방에서 발흥한 마라타 동맹 수라트를 대대적으로 약탈하였는데 이후 수라트는 인도 제일의 무역 도시 타이틀을 마하라슈트라의 봄베이에 넘겨주게 되었다.1573년부터 무굴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수라트는 대항해시대의 여러 해양 세력들이 제국의 중심부 (델리 - 아그라)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 하며 번영하였다. 1612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수라트에 상관을 세웠고 네덜란드 및 마라타 동맹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1800년에 도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마라타 동맹 군대는 이 지역의 현지인들은 마음껏 약탈하였으나 유럽인 상인들과 대사들은 건드리지 않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고 한다. 19세기 당시 유럽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수라트는 인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로서 각지에서 일꾼들이 모여들었고 튀르키예어 및 아르메니아어부터 벵골어까지 다양한 언어가 통용되었다 한다. 수라트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인도의 조로아스터교 민족집단 파르시들은 인도에서 영어를 가장 빨리 배운 현지인 집단이 되었다. 19세기 말엽에 남쪽의 봄베이 및 서쪽의 카라치가 성장하면서 무굴 제국의 가장 부유한 항구였던 수라트는 서서히 쇠퇴하였고, 수라트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파르시들은 상당부분은 남부의 봄베이, 지금의 뭄바이로 이주했고[1], 그렇지 못한 파르시들은 대영제국 식민지 각지로 흩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Queen의 프레디 머큐리로, 원래 발사드출신인 그의 아버지도 파르시였고 이들은 가족 전체가 영국령 잔지바르에 이주해 영국인 지배층을 위해 일하던 하급 관료일을 하다가 잔지바르가 해방된 이후 영국으로 피난온 케이스다.
3. 현재
20세기 들어 정체되던 도시는 최근 들어 다양한 산업의 육성으로 급속도로 성장하며 과거의 인지도를 회복해 나가고 있다. 주민의 87%는 힌두교, 7%는 이슬람을 믿는데 생명을 극적으로 중시하는 자이나교도가 5%로 적지 않게 있다. 따라서 소득 수준에 비해 동물 병원이 많다.4. 교통
4.1. 항공 교통
- 땁티강 하구 쪽에 수라트 국제공항이 있다.
4.2. 철도 교통
- 수랏역(Surat railway Stn)
- 우드나 정션역(Udhna Junction S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