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01:09:57

치타공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방글라데시의 도시
চট্টগ্রাম

치타공 | Chittagong
국가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방글라데시
지역 치타공 주
면적 168km²
인구 2,592,000명(2011)
광역인구 9,543,000명
인구밀도 15,325명/km²
파일:방글라 치타공.jpg

파일:치타공 방글라.jpg

1. 개요2. 역사3. 교통

1. 개요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 주의 주도이다.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이다. 인구대국 방글라데시의 제2도시인 만큼, 인구서울특별시급으로 많은 9백만에 이른다. 갯벌이 많은 치타공의 환경덕분에 주요산업으로 선박해체가 발달해있다.

대형선박들은 해체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낀 슬러지나 폐유등이 새어나와 극심한 환경오염이 발생하고[2] 선박 해체작업 자체가 워낙 위험한 일이라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환경오염을 이유로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그 전에 환경오염 방지책이나 기술자들의 위험수당 같은 각종 비용을 감안하면 아예 불가능한 사업이라 폐 선박을 스스로 처리하는 대신 선박 자체를 헐값[3]에 판매해 넘기고, 넘겨받은 개발도상국의 기업은 그걸 해체하여 얻은 부품이나 자재를 판매하여 수익을 내는 구조다. 전세계 수많은 대형선박들이 치타공으로 와서 해체되며 여기서 나온 폐자재들은 방글라데시에선 주요한 공급원이다. 또한 단순히 철뿐만 아니라 해체한 선박의 재활용 가능한 모든 부분을 재사용한다(선박의 싱크대부터 전구, 파이프까지 모조리 가져온다. 공산품을 수입하는 입장에선 이런 내장재 하나하나가 귀하기 때문이다). 치타공의 위성사진을 보면 위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남쪽 카르나풀리 강 하구 쪽에 샤아마나트 국제공항이 있다.

2. 역사

지명은 아랍어델타를 의미하는 '샷트' 혹은 현지 차트 계급의 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부터 항구가 있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서 동방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7세기 이후 아랍인들이 자주 왕래하였고, 1154년 아랍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바스라와의 교류가 잦은 항구라고 기록하였다. 수피 선교사들을 통해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1340년 델리술탄왕조에게 점령되어 그 주요 항구가 되었다. 1345년 이븐 바투타, 15세기정화가 방문하였다. 한편 일대에는 많은 이란인들이 정착, 페르시아어공용어로 통하기도 하였다. 1528년 벵갈 술탄은 포르투갈이 치타공에 상관을 설치하도록 허가하였다. 얼마 후인 1531년 미얀마 아라칸족의 아라칸 왕국이 치타공을 점령하였다.[4]

권력의 공백을 틈타 포르투갈인들은 치타공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 1602년 샌드위프 섬을 점령하였고 1615년 인근 해역에서 네덜란드-아라칸 함대를 격파하였다. 다만 이후 아라칸 인들이 도시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던 1666년 무굴 제국의 벵골 총독 샤이스타 칸이 288척의 함대로 항구를 봉쇄하고 6500의 병력으로 도시를 공격하는 수륙 양면 작전으로 3일만에 아라칸 수비대를 항복시켰다. 이후 샤이스타 칸은 포르투갈인들을 축출하고 도시를 이슬라마바드로 명명하였다. 1686년1689년 영국 해군이 점령을 시도했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무굴제국기에 안데르 성채와 많은 모스크가 세워졌고, 조선업과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1793년 기어코 영국령이 된 후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1823년 영국-버마 전쟁 때에 버마군이 도시를 위협하였고, 1857년에는 세포이 항쟁과 연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1865년 다카와의 철도가 놓였고, 인도-버마 무역의 주요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태평양 전쟁기에 도시는 영국의 대일본 거점이었고, 1942년 일본 공군의 폭격을 받았다. 1943년에는 기근을 겪었고, 전쟁으로 인한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독립파키스탄 시기에는 카라치에 비해 저조한 투자가 벵골인들의 주요 불만 사항 중 하나였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도시는 주요 격전지였고, 저항군은 항구에 정박한 외국 선박들을 통해 독립 선언을 알렸다. 전후 소련 해군이 기뢰를 제거하고 항구를 정상화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이 작업은 1년이 소요되었다. 지아우르 라흐만 대통령은 치타공의 발전을 지휘하였으나 1981년 그곳에서 일어난 쿠데타 시도로 암살되었다. 1991년 사이클론이 불이닥쳐 도시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 정부가 복구를 도왔다. 현재도 치타공은 벵골 수출 경제의 중심이다.

3. 교통

샤 아마낫 국제공항(Shah Amanat International Airport)이 도시 남쪽 카나푸리강 어귀에 있다. 무슬림국가답게 모든 국제선은 성지순례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의 주요공항인 두바이로 연결된다.
[1] 2018년부터 아래 벵골어 발음을 살린 'Chattogram'이라는 표기도 쓰이고 있다.[2] 특히 대형 유조선을 해체하는 사진을 보면 위성사진에서도 보일 정도로 시커먼 바다를 볼 수 있다.[3] 1$에 판매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회계와 세금때문인데, 기업의 자산을 무상으로 증여하거나 하면 탈세 및 돈세탁 등등의 혐의가 없는지 매우 복잡한 감사를 받아야 한다.[4] 일찍이 1512년과 1516년에 시도해 보았으나 아직 벵골 술탄국이 전성기일 때라서 진압당하고 역으로 마웅도 지방 등 나프 강 일대를 헌납하고 공물까지 왕창 뜯긴 뒤 절치부심하여 군사력을 기르고 벵골 술탄국이 약해진 틈을 타 포르투갈 콩키스타도르와 해적들과 연합해 1531년 세번 째 시도 끝에 드디어 치타공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급의 무역항을 얻게 된다. 중꺽마의 표본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