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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 수바 সুবাহ বাংলা Bengal Subah | |||||
무굴 제국의 행정구역 | |||||
총독기 | 나와브기 | ||||
벵골 수바의 강역 | |||||
1576 ~ 1803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벵골 술탄국 |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 ||||
지위 | 무굴 제국의 행정구역 (1576~1765) - 사실상의 독립국 (1717~1757) - 영국 동인도 회사의 괴뢰국 (1757~1803) | ||||
위치 | 인도 아대륙 벵골 | ||||
수도 | 탄다 (1576~1590) 라지마할 (1595~1596), (1639~1660) 자한기마가르 (1608~1639), (1660~1711) 무르쉬다바드 (1711~1763) 문게르 (1763~1765) | ||||
정치 체제 | 총독령 (1576~1757) 전제군주제 (1717~1757) 과두정 (1757~1803) | ||||
국가 원수 | 수바다르 (1574~1717) 나와브 (1717~1803) | ||||
언어 | 페르시아어, 벵골어(도바시), 아랍어 | ||||
종교 | 시아파 이슬람교 (국교) 수니파 이슬람교 (다수) 힌두교 등 | ||||
통화 | 타카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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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굴 제국이 벵골 지방에 설치했던 행정구역.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 중 하나였다. 벵골의 역사적 최고 전성기로 꼽힌다.2. 역사
2.1. 무굴 제국
벵골 지방은 워낙 토질이 비옥하고 기후가 따스해서 오래전부터 인구 밀집도가 세계적으로 가장 높고 부유한 지방들 중 하나였다. 당연히 역사적으로도 모든 정복자와 군주들이 벵골을 호시탐탐 노렸는데, 이중에는 한창 정복 전쟁을 펼치던 바부르도 있었다. 당시 바부르는 막 무굴 제국을 세우고 델리를 중심으로 북인도 전역에 물밀듯이 확장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때 벵골은 그의 1순위 타깃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결국 바부르는 1529년 가그라 전투에서 벵골 술탄국의 술탄 나시룻딘 나스라트 샤를 격파하고 벵골 일부를 합병했다.그의 아들 후마윤 역시 벵골에 대한 야심을 놓지 않았다. 그는 벵골의 수도 가우르를 점령했고 무려 6개월 씩이나 가우르에 그대로 머물렀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셰르 샤 수리가 후마윤을 쫒아내고 무굴 제국을 반쯤 멸망시켜버렸고, 후마윤은 인도에서 쫒겨나 페르시아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때문에 무굴 제국의 벵골 진출은 잠시 끊겼지만, 훗날 셰르 샤 수리가 죽고 후마윤이 돌아와 무굴 제국을 재건하며 다시 시작된다.
후마윤의 후계자 악바르 대제는 벵골을 아예 정복해버리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1575년 3월 3일 투카로이 전투에서 벵골 술탄 '다우드 칸 카라니'를 꺾었고 다음해에 라지마할 전투로 벵골 술탄국의 세력을 아예 일소했다. 악바르는 새로 편입시킨 벵골 지방에 '벵골 수바'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을 짜기로 결심했다.[1] 그 덕분에 1576년 '벵골 수바'의 결성이 선포되었지만, 실제로 벵골 내 토후세력들이 무굴 중앙정부의 간섭을 극렬히 반대했기에 실질적인 행정력 발휘는 수십여년이 흐른 1594년에야 가능했다고 한다.
무굴 제국이 벵골 지방을 동화시키는 데에 유난히 애를 먹은 이유는 워낙 오래되고 강력한 토착 가문들이 많은 탓이 컸다. 아프가니스탄 같은 경우 지배씨족들의 역사가 길지않고 그 권위도 약해서 무굴 제국의 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벵골은 반대로 유서깊고 강력한 가문들이 지방에 뿌리깊게 박혀있어서 함부로 탄압하기도 쉽지 않았다. 무굴 제국은 이사 칸을 포함해 여러 토착 가문들을 억누르기 위해 무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쏟아부어야했다. 어느 정도 안정화가 이루어지자 다카를 벵골의 중심으로 삼고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깔았다. 이후 다카는 약 75년에 걸친 무굴 통치기 동안 벵골의 수도 역할을 하게된다.
1576년부터 1717년 사이까지 벵골은 무굴 황제가 직접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다. 워낙에 중요하고 부유한 지방이어서 아무나 총독을 시켜주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총독은 황족 출신이었다. 그래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는 총독들이 혈연적 정통성을 내세워 칭제를 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샤 자한 재위 말기에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자 벵골 총독을 맡은 샤 슈자 왕자가 벵골을 기반으로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물론 압도적인 군재를 지닌 아우랑제브에게 패배하고 끝장났지만. 이후 아우랑제브는 샤이스타 칸을 보내 벵골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실제로 벵골을 기반으로 황제에 오른 사람도 있다. 바로 무함마드 아잠 샤. 1707년에 즉위해 고작 4개월 밖에 재위하지 못하긴 했지만 어쨌든 벵골 총독직을 맡다가 황제가 된 경우다.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제국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하자, 당시 인도에서 제일 부유했던 벵골 지방은 영국과 프랑스 등 외세 열강들의 1순위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벵골로 진출했다. 이브라힘 칸 2세 총독은 영국, 프랑스 상인들에게 벵골 내 무역을 허가했다. 이미 국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무굴 제국이 서구 열강의 압박을 막아낼 길을 없었다. 마지막 무굴 총독 '아짐 우스 샨' 왕자는 캘커타에 영국의 윌리엄 요새, 찬데르나고르에 프랑스의 올리언스 요새, 친수 라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요새 등 유럽 열강들이 벵골 각지에 아예 군사요새까지 지어대는 걸 허락하기에 이른다.
2.2. 벵골 나와브와 영국의 침략
무굴 제국이 더이상 벵골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국력이 약해지자, 벵골은 나와브들이 난립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혼란기로 들어선다. 명목상으로는 무굴 황제를 모셨지만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이 행세하며 수많은 군벌세력들로 나뉘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무굴 제국에 충성을 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초기까지만 해도 나와브들은 여전히 무굴 제국 전체 재정의 절반에 달하는 기금을 바칠 정도로 무굴 제국에 막대한 지원을 계속해줬고, 동전 역시 무굴 황제의 이름으로 발행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 중앙정부에 보내는 돈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벵골은 유럽인들의 침략 전초기지가 되어버렸다. 벵골의 나와브와 라자들은 모슬린, 비단, 조선, 화약, 초석, 금속 세공품 등 여러 산업들을 장려하면서 초기적인 산업화와 근대화에 나섰지만 메이지 유신처럼 획기적인 근대화 개혁에는 의지가 없었다. 경제력은 풍부했으나 서구 열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외교력, 행정력, 군사력은 부재했다. 영국 동인도회사, 프랑스 동인도회사, 덴마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온갖 열강들이 벵골로 뛰어들어 이권을 챙기려 들었고 벵골은 유럽의 이권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무굴 제국의 샤 알람 2세로부터 벵골의 징세권을 강탈하는 영국인들.
모든 경쟁국들을 꺾고 벵골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얻어낸 건 영국 동인도 회사였다. 영국은 나와브를 밀어내고 벵골을 차지하려 들었는데, 이에 반발해 벵골 나와브가 1756년 캘커타의 영국 기지들을 포위공격했다. 빌미만 노리던 영국은 로버트 클라이브를 파견해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 나와브 시라즈 웃다울라의 군대를 격파했고, 1757년 미르 자파르를 새로운 꼭두각시 나와브로 옹립했다.
미르 자파르가 죽자 미르 카심이 벵골 나와브직을 물려받았다. 미르 카심은 영국군을 몰아내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764년 일어난 북사르 전투에서 미르 카심은 웃드 주의 나와브, 심지어 저멀리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까지 끌어들여 영국군과 대적했으나 처참하게 패배했다. 영국군은 북사르 전투의 승리로 인도 전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했고 벵골은 아예 영국에 복속되어버렸다. 티푸 술탄이 이끄는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국마저도 얼마가지 않아 영국군에게 굴복했고, 영국은 우월한 화기와 기술을 앞세워 마라타 제국과 시크 제국마저 연달아 격파했다.
북사르 전투 이후 벵골의 징세권은 무굴 제국에게서 영국으로 옮겨갔다. 벵골, 비하르와 오리사는 벵골 총독령의 일부로 편입됐고 1793년에는 아예 영국 식민당국에 합병됐다.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던 나와브직은 1803년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이후 1857년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무굴 제국이 멸망하자 영국 동인도회사의 벵골 통치가 끝나고 영국이 직접지배하는 인도 제국이 들어섰다. 다만 벵골의 모든 영토를 영국이 완전히 지배한 건 아니어서, 네덜란드,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등이 조그마한 항구나 조계를 차지하고 식민지배하긴 했다.
[1] '수바'란 한국의 도처럼 당시 무굴 제국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당시 제국에는 12개의 수바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