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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바르타 आर्यावर्त Āryāvarta | ||
프라티하라 왕조의 영역(연두색) | ||
존속기간 | 730년 ~ 1036년 | |
위치 | 북인도 | |
수도 | 우자인 카나우지 | |
국가원수 | 마하라자디라자(왕중왕) | |
주요 군주 | 나가바타 1세(730~760) 미히라 보자(836~885) 마헨드라팔라 1세(885~910) | |
언어 |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 |
종교 | 힌두교 자이나교 | |
종족 | 인도아리아인 | |
성립 이전 | 바르다나 왕조 | |
멸망 이후 | 가즈나 왕조 후칼라추리 왕조 파라마라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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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인도를 통일한 마지막 힌두 계열의 왕조. 구르자라-프라티하라(गुर्जर प्रतिहार, Gurjara-Paratihara) 혹은 카나우지-프라티하라라고도 불린다. 그들 스스로는 아리아인이 살고 있는 북인도를 통일했다고 해서 아리아바르타(आर्यावर्त, Āryāvarta)[1]라고 하였다.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서는 보통 북인도 최후의 힌두계 통일 왕조로 하르샤 왕의 바르다나 왕조를 들지만, 사실 프라티하라 왕조가 그 최후의 왕조였다.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프라티하라 왕조의 영토는 바르다나 왕조와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으며 심지어 굽타 왕조의 최대 영토와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수백년에 걸쳐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인도의 방파제로 불리기도 한다. 프라티하라 왕조가 건재하던 시절에 아랍 이슬람은 끝내 인도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는데, 이후 북인도의 군소 국가들을 궤멸시키며 인도 침입에 성공한 이슬람 세력은 아랍계가 아니라 튀르크계와 페르시아계였다.
2. 기원?
왕조의 공식 명칭은 그냥 '프라티하라'지만, 이웃 왕조들의 기록에서는 '구르자라-프라티하라'로 등장하기에 학자들은 과연 '구르자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한 가설에 따르면 구르자라는 원래 그들이 통치한 영토인 '구르자라데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며, 또다른 가설에서는 구르자라가 이들 왕조가 속한 부족 이름이었다고도 한다. 이중 후자는 프라티하라 왕조가 인도 기원의 민족인지, 혹은 외부에서 유입된 타민족인지에 대해서 이견이 갈리는데, 타지역 기원설 지지자들은 프라티하라가 후나족의 북인도 침공 직후인 서기 6세기경에 갑자기 정치 세력으로써 부상한 것을 지적하면서 '프라티하라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토착 인도인들의 혼혈으로 탄생한 부족'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인도 기원설 지지자들은 '이들이 타민족과 혼혈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고, 프라티하라 왕조는 인도 문화에 잘 동화되어 있었으며, 더욱이 그들이 북서쪽 지역을 통해서 인도로 침략해왔다면 왜 비옥한 인도-갠지스 평야가 아닌 오늘날 라자스탄의 반건조 지역에 정착하였는지 설명할 수 없다'며 이를 반박하였다.어떤 사료에서는 프라티하라 및 다른 3개의 라지푸트 왕조들이 아부산의 '희생적인 화덕'에서 유래했다고 기록했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인 이 신화를 프라티하라 왕조가 타민족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하였다.[2] 한편 16세기의 라지푸트 음유시인들은 무굴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프라티하라 왕조가 라지푸트의 영웅적인 씨족의 후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3. 역사
3.1. 건국과 팽창
프라티하라 왕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는 비교적 명확한데, 왜냐하면 아랍 사료로 교차 검증이 가능하며 프라티하라인들 스스로도 비문을 남겨 이를 자랑스럽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나가바타 1세(739~760)는 본래 차브다 왕조[4]의 봉신이었으나, 이슬람 세력이 신드를 정복하고 북인도로 쳐들어오자 738년 라자스탄 전투에서 이를 격파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5]
아랍군을 물리치고, 차브다 왕조로부터 독립한 나가바타 1세는 우자인에 새 수도를 세우고 동쪽과 남쪽으로 원정을 감행하여 신생 프라티하라 왕조의 영토를 괄리오르와 구자라트의 바루흐 항구까지 넓혔다. 이후 나가바타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였던 카쿠스타와 데바라자가 차례대로 즉위했는데, 이 시기에는 관련 기록이 얼마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이때 프라티하라 왕조는 북인도의 주요 강대국으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데바라자의 아들이자 프라티하라 제4대 왕인 바차라자 시대에 이르러 "두 바다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의 주인"이라던가, "서부 지역의 대왕"과 같이 기존 칭호에서 한 단계 더 격상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치세에 서쪽에서 이슬람 세력의 준동이 하강세에 접어들자, 바차라자는 이전 황제들이 물려준 국력을 가지고 본격적인 팽창 정책에 나섰다. 마침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전 바르다나 왕조의 중심지로서 땅이 비옥하고 인구가 풍부하며, 힌두교의 성지들이 여럿 분포해 있던 카나우지였다.[6] 그러나 문제는 당시 프라티하라 왕조만 카나우지를 노리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벵골 일대에서는 혼란했던 지역을 통일한 팔라 왕조가 출범했고, 남쪽의 데칸 고원에서는 찰루키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들어섰다.
784년, 카나우지 국왕 바즈라유다가 죽고 장남 인드라유다가 즉위했다. 기회를 잡은 바차라자는 즉시 진격하여 인드라유다를 격파한 뒤 카나우지를 봉신국으로 삼았다. 그러자 팔라 황제였던 다르마팔라가 이에 반발하여 카나우지로 진격, 프라티하라-카나우지군을 무찌르고 팔라 왕조로 망명했던 인드라유다 왕의 동생 차크라유다를 왕위에 앉혀 봉신으로 삼았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바차라자는 카나우지 인근의 프라야그로 진격해 다르마팔라와 맞붙었고, 이 전투에서 팔라 왕조의 황실 양산을 두 개나 빼앗을 만큼 대승을 거두었다. 훗날의 역사 서사시인 프리트바라자 비자야(पृथ्वीराज विजय)는 이때 바차라자가 "갠지스 강과 바다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칼을 씻고 가우다[7]의 땅을 음미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라슈트라쿠타의 황제인 드루바 다라바르샤(780~793)가 나르마다 강을 건너 말와를 침공, 회군하던 프라티하라 군대를 기습하여 승리하고는 곧장 카나우지를 차지하였다.[8] 이후 프라티하라 왕조는 왕위 계승 분쟁이 터지면서 한동안 카나우지를 포기해야 했으나, 805년에 이를 수습하고 즉위한 나가바타 2세(805~833) 시기에 말와를 되찾고 나아가 팔라 왕조로부터 비하르와 카나우지를 비롯한 인도-갠지스 평원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며,[9] 서쪽의 이슬람 세력을 다시 한번 막아내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이슬람의 공격으로 파괴된 솜나트의 힌두 사원들을 재건하고 수도를 카나우지로 옮겨 프라티하라의 세력을 북인도에서 공고히 한다.
3.2. 전성기
나가바타 2세의 후계자인 라마바드라는 3년만 통치하다가 급사했고, 이후 그의 아들인 미히라 보자(836~885)가 즉위했는데 이 시기에 프라티하라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북인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미히라 보자는 먼저 라자스탄의 반란 세력들을 제압하여 내부를 안정시킨 뒤에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구자라트에 있던 라슈트라쿠타의 분파에서는 제후왕인 드루바 2세와 그의 동생 사이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자는 이에 개입, 후자를 지원하면서 기병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구자라트 일부 지역과 말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데바팔라 사후 혼란에 빠져 있던 팔라 왕조를 침공하여 고라크푸르까지 이르는 영토를 점령하고, 타카 왕조를 물리쳐 카슈미르 일대를 정복하기도 했다.
한편 그의 치세에 이슬람의 공격이 다시 재개되었다. 당시 신드의 아랍 총독이었던 임란 이븐 무사는 이슬람의 세를 확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북인도를 침공하고 있었다. 그러자 미히라 보자는 신단 전투에서 아랍군을 격파하고, 833~842년 사이에 이슬람 세력을 북인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880년경, 구자라트의 라슈트라쿠타 제후왕인 크리슈나 2세가 수도 우자인을 침공하여 프라티하라 왕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곧 미히라 보자의 보복이 뒤따랐다. 그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미히라 보자는 구자라트의 라슈트라쿠타를 완전히 정복하여 영토로 편입시켰다.
구르자라의 통치자는 수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그들의 기병은 매우 강력한데, 다른 어떠한 인도 왕들도 이렇게 훌륭한 기병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는 아랍인들에게 불친절함에도 아랍의 왕이 가장 위대한 통치자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인도의 왕들 가운데 그보다 더 큰 이슬람의 적은 없다. 그는 막대한 부와 낙타와 말을 가지고 있다.
미히라 보자의 치세에 북인도를 방문한 아랍 연대기 작가 술레이만
미히라 보자의 치세에 북인도를 방문한 아랍 연대기 작가 술레이만
미히라 보자의 후계자인 마헨드라팔라 1세(885~910)의 시기에 프라티하라 왕조는 번영과 권력의 정점에 달했다. 당시의 프라티하라 왕조는 서쪽으로는 신드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벵골까지, 북쪽으로는 카슈미르 너머 히말라야에서부터 남쪽으로는 나르마다 강까지 이르는, 어쩌면 이전 바르다나 왕조나 굽타 왕조와 맞먹는 수준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이 시기에는 여러 건축물들이 대거 건설되었다. 특히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에 남아있는 카주라호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아름답고 웅장하다. 또한 종교나 학문에 대한 후원도 많이 이루어져, 수많은 학자들이 카나우지에 있는 프라티하라 궁정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사료와 문헌 등을 남겼다.
3.3. 쇠퇴와 멸망
마헨드라팔라 1세 사후에 즉위한 보자 2세(910~912)는 얼마 통치하지 못한 채로 마이팔라 1세(912~944)에게 찬탈당한다. 그러나 왕위 계승 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프라티하라 왕조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파라마라 왕조, 찬델라 왕조, 후칼라추리 왕조, 토마라 왕조, 차우한 왕조 등이 모조리 독립해나갔다.916년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인드라 3세가 카나우지를 습격, 함락시킨 뒤에 잠시나마 북인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프라티하라 왕조의 세는 더욱 약화되었다. 10세기 중반까지 프라티하라 왕조는 서쪽으로부터는 튀르크~아랍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남쪽으로는 라슈트라쿠타 왕조로부터, 서쪽으로는 팔라 왕조로부터 계속 공격받았고, 그에 따라 속국들이 계속해서 독립해나가는 악순환에 빠졌다. 심지어 왕조의 발상지인 라자스탄 지역마저 빼앗길 정도였다. 10세기 말이 되면 프라티하라 왕조는 카나우지 인근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쪼그라든 상태였다.
1018년, 중앙아시아의 패자였던 가즈니의 술탄 마흐무드가 쳐들어와 카나우지를 점령했다. 당시 프라티하라 통치자였던 라자팔라는 도망치다가 찬델라 왕조의 비디야다라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찬델라 왕조는 라자팔라의 아들 트릴로찬팔라를 꼭두각시 왕으로 앉혔다. 트릴로찬팔라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036년에 후칼라추리 왕조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 '아리아인의 땅'을 가르키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동·서로는 벵골만과 아라비아해, 남·북으로는 각각 빈디아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까지의 영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한국어 위키백과 참조.[2] 예로부터 타민족들이 인도에 침입하여 왕조를 세우고 인도화될때, 전통적으로 불 의례를 행한 후에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에 편입되었기 때문이었다.[3] म्लेच्छ, 당시 인도에서 외부에서 유입된 이민족을 부르던 명칭 중 하나. 이외로는 야바나(인도-그리스), 샤카(인도-스키타이), 팔라바(인도-파르티아), 쿠샤나(쿠샨 왕조), 후나(에프탈, 알촌 훈족)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실제로 인도를 침공한 민족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에서는 시기상 아랍의 우마이야 이슬람 칼리파국을 말한다.[4] 차우다, 혹은 차바다라고도 하며, 690년경부터 942년까지 구자라트 일대를 통치했다. 마지막 왕이었던 사만타마는 자식이 없어 조카인 물라라자를 입양했으나, 그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함으로써 차브다 왕조는 멸망했고 대신 차울루키야 왕조가 들어섰다. 여담으로 차울루키야 왕조는 이름만 비슷할 뿐 동시대의 서찰루키아 왕조나 이전의 찰루키아 왕조와는 별개의 왕조이다.[5] 이때 이슬람 군대는 다마스쿠스에 온 시리아 기병대, 현지의 아랍 군대, 신드의 개종한 힌두교도, 튀르크족과 같은 외국 용병들을 전력으로 삼아 10,000~15,000명의 기병, 5,000명의 보병, 2,000마리의 낙타를 보유하고 있었다.[6] 당시는 아유다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다.[7] 벵골 일대를 가리키는 고중세 용어이다.[8] 라슈트라쿠타 왕조도 793년에 드루바 다라바르샤가 사망한 이후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려 카나우지를 팔라 왕조에게 상실해버렸다. 어부지리로 카나우지를 얻은 팔라 왕조는 "북인도의 황제"를 선언하기도 했다.[9] 이때 점령된 카나우지는 910년까지 쭉 프라티하라 왕조의 영토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