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Gouvernement provisoi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French Republic | ||
<rowcolor=#fff> 국기 | 국장 | |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애 | ||
1944년 6월 3일 ~ 1946년 10월 27일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벨기에-북프랑스 군정청 | 프랑스 제4공화국 | |
프랑스 군정청 | ||
비시 프랑스 | ||
자유 프랑스 | ||
국가 | 라 마르세예즈 | |
위치 | 오늘날의 프랑스와 알제리 및 전세계 일부 식민지 | |
수도 | 알제 → 파리 | |
정치체제 | 의회공화제 | |
국가원수 | 주석 | |
주요 주석 | 샤를 드골 | |
언어 | 프랑스어 | |
종교 | 가톨릭 | |
민족 | 프랑스인 | |
주요사건 | 1944년 건국 1946년 해체 | |
통화 | 프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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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 본토를 점령하고 있던 1944년 6월 3일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성립된 임시 정부이다. 1944년 8월에 파리가 해방되자 파리로 이동하고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 수립 전까지 헌법 제정과 국가 통치를 맡았다. 당시 임시정부주석은 샤를 드골 대통령이었다. 사실상 자유 프랑스가 이름만 바꾼 수준이었다.2. 역사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의 모태는 샤를 드골 대통령과 앙리 지로 장군이 함께 이끌던 프랑스 국민 해방 위원회(Comité français de Libération nationale, 약칭 CFLN)라는 단체였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임박한 시점에서 탄생한 임시정부의 주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이 프랑스를 재탈환했을 때, 프랑스의 주권을 보존하는 것[1]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침공 이후 공중분해된 프랑스군을 빠르게 재건하여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가는 것. 대전기간 내내 한게 없으니, 이거라도 기여해야지 그나마 종전 후 프랑스가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게 당시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공통된 판단이었다.그리고 임시정부는 상기한 두가지 목적을 모두 성취하게 되는데, 파리를 비롯한 수복된 프랑스 영토에서 주권을 발휘한 것[2]은 물론이고, 재빠르게 프랑스군을 재건하는데도 성공한다. 필리프 르클레르가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을 주축으로 프랑스군은 종전 무렵에는 150만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게 된다. 이는 소련, 미국,중국과 영국에 이어 연합군에서 5번째로 많은 병력이었다. 물론 전쟁으로 파탄난 프랑스의 힘으로는 이 군사를 뒷바라지할 수는 없었고 천조국의 무기대여법이 재건된 프랑스군의 보급과 장비를 책임져 줬다.
당당하게 전승국으로 이름을 올린 임시정부의 다음 목표는 패전한 독일 내에 자신들의 점령구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다른 연합국은 '한 것도 없으면서 웬 꼽사리....?' 정도의 반응. 실제로 처음 독일을 배분하는 계획에서 프랑스의 몫은 없었지만, 드골이 워낙 강하게 주장을 펼친 탓도 있고, 자유 프랑스와 같이 전쟁 중에 프랑스가 한 공적이 어느 정도 인정되어서 불쌍한데 자존심이라도 좀 챙겨주자는 식으로 연합군은 라인강 서부 일대에 자르 보호령을 비롯한 프랑스 점령 지역 설치를 허용한다.
한편 같은 시기에 내부적으로는 한국에서도 나름 유명한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나치 독일에 부역한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됐다. 피에르 라발 총리와 필리프 페탱 장군과 같은 고위 인사들이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3], 이러한 단죄는 단순히 부역자 뿐만 아니라 '비시 프랑스'라는 정권 자체에도 마찬가지여서 비시 프랑스의 정통성은 부인됐고[4] 비시 프랑스 행정부에 의해 행해진 모든 법령과 행정은 무효화됐다.
종전 이후 열린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국민들은 96%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프랑스 제3공화국을 종식시키는데 찬성하였고, 새로 프랑스를 통치할 공식 정부를 만들기 위한 제헌의회 선거가 1945년 10월에 열렸다. 재미있는건 여기서 의장이었던 드골을 눌러버리고 공산당 계열이 압승을 거둔 것.[5] 공산당이 중심이 된 제헌의회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꿈꾸던 드골의 임시정부와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고, 제헌의회가 임시정부가 헌법의 초안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자 드골은 의장직에서 사퇴한다. 허나 그렇게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해 작성한 헌법은 1946년 5월에 다시 국민투표에 회부되었으나 국민투표에서 반대로 결론이 난다. 개헌안이 부결됨에 따라 기존의 제헌의회가 해산되고 제헌의회 선거가 다시 실시되어 새로운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프랑스 헌법이 절충안을 찾는 과정에서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로 특징지어지는 헌법안이 최종 통과되고, 1946년 10월에 프랑스 제4공화국이 출범한다.
3. 정치
이 시기 프랑스의 정국을 이끈 세력은 크게 세 갈래였다. 오늘날 사회당의 전신이 되는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프랑스 공산당(PCF), 그리고 대중공화운동(MRP)이 그것.[6] 종전 직후 가장 지지도가 높았던 당은 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내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중심을 맡았던 공산당이었다. 이에 비해 제3공화국 시기 정국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던 SFIO는 그 기세가 많이 죽어서, 공산당 2중대 정도의 이미지로 추락한 상태였다.[7] 대중공화운동은 '대중공화연합'이라는 명칭으로 기독교 민주주의 계열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에 의해 창설되었다.[8] 지지 기반이 가톨릭 교회였던 대중공화운동은 드골 계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보수계로 간주되어 세간의 인식은 '그 놈이 그 놈이지' 정도.[9][1] 거의 5년 가까이 독일의 치하에 있었으니 사실 연합군이 프랑스 점령 후 군정을 실시해도 의아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걸 막으려고 대전기간 내내 드골은 루즈벨트와 처칠을 상대로 실갱이를 벌어야 했다.[2] 네이버 지식백과[3] 라발 총리는 열렬한 나치 부역자로 온갖 야유와 비난을 받으며 사형 선고 일주일만에 사형되었고, 페탱 장군은 사형 선고는 받았으나, 당시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주저하다가, 샤를 드골이 직접 옹호하면서 종신형으로 감형 되었다. 베르됭 전투를 포함해 1차 대전 전반에서 영웅적인 업적을 세우며 원수의 명예까지 얻었던 페탱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자 군인들에게 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 외에도 사회 전반에서 페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근소한 차이로 사형 찬성파가 승리하여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사형 찬성파만큼이나 반대파도 많았다는 것이다. 페탱의 처벌을 찬성하는 사람들중에서도 사형까지는 지나치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페탱을 처벌하는 것은 강한 정치적 부담이었고, 동시에 프랑스내에 큰 분열을 야기 할 수 있었다.[4] 처음 비시 프랑스가 수립됐을 땐 다수의 국가들이 비시 프랑스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자유 프랑스를 부정했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실질적인 대표성이 없으니 외교하려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 물론 말로만 정통을 인정해주고 뒤에선 자유 프랑스를 알게 모르게 지원해주긴 했다. (지금의 서방이 중국과 대만 관계에서 취하는 포지션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5] 사실 당시 프랑스인들 눈엔, 비시 프랑스에서 부역한 라발 총리와 페탱 대통령 모두 우파 계열 인물이었으니 '우파=매국노'로 안찍힌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대대적인 숙청 역시 드골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6] 그래서 이 시기 프랑스의 정국을 이른바 '3당 체제(tripartisme)'라고 부른다.[7] 이는 아무래도 전쟁을 거친 극단적인 시기에 중도적인 목소리가 급진적인 목소리에 압도당한 탓이 크다. 그래도 SFIO 역시 다시 살아나긴 한다.[8] 1967년 민주중도로 개칭되어 사라진다.[9] 전후 대중공화운동은 드골계와 연을 끊고, SFIO 세력 역시 공산당과 연을 끊으면서 제4공화국에서는 SFIO와 급진사회당, 대중공화운동의 온건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