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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7:52:45

부르봉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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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Royaume de France
Restauration
파일:프랑스 국기(1814-1830).svg
파일:부르봉 왕조 문장.svg
<rowcolor=#002395> 국기[1]
파일: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왕국 어기.svg
<rowcolor=#002395> 어기/정부기 국장
파일:부르봉 왕정복고.svg
1814년 4월 6일 ~ 1815년 3월 20일[백일천하]
1815년 7월 8일 ~ 1830년 8월 2일
성립 이전 7월 혁명 이후
프랑스 제1제국 7월 왕정
국가 프랑스 왕자들이 파리로 돌아오다[3]
왕가의 품만큼 좋은 곳은 없다네[4]
위치 오늘날의 프랑스
수도 파리
인구 31,200,000명 (1815년)
정치체제 입헌군주제[5]
국가원수 국왕
역대 국왕 루이 18세
샤를 10세
언어 프랑스어
종교 가톨릭
민족 프랑스인
주요사건 1814년 왕정복고
1815년 3월~7월 백일천하
1830년 7월 혁명으로 왕조교체
통화 프랑
1. 개요2. 역사3. 사회 변화4. 정치 체제

[clearfix]

1. 개요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추방되자 프랑스 혁명 이후 추방된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세운 왕정국가.

2. 역사

나폴레옹을 폐위시킨 대 프랑스 동맹국 측은 새로운 프랑스의 왕위에 누구를 올릴지 여부를 놓고 대립했다. 영국 측은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오스트리아 측은 자신들 황제의 외손자이자 나폴레옹의 적자였던 프랑수아 보나파르트를, 러시아 측은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각각 지지했으나, 나폴레옹의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새로운 프랑스의 국왕으로 결정되면서 루이 18세[6]로 즉위한다.

오랜 에 지쳐있던 민중들은 초기 루이 18세의 즉위를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루이 18세가 반동적인 정책을 펼치려는 모습을 보이자 이러한 지지는 빠르게 식어버린다. 이 틈을 노려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30일에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잠시 권력을 잃었으나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면서 7월 8일에 루이 18세가 복위되었다. 복위한 루이 18세는 신성불가침의 세습왕권을 인정하는 헌법을 공표하는 한편으로 해외에서 망명 중이던 귀족들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모든 것을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지만, 입법부사법부의 존재 인정 및 법 앞에서의 평등 등을 인정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실제로 1815년 내각을 급진왕당파들이 장악하고 각종 백색테러를 자행하자, 온건 입헌군주세력을 입각시켜서 이들의 행동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후 왕제인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 2순위였던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이 파리에서 암살당하자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왕당파를 내각에 적극 등용하면서 자유주의 세력과 공화파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잡기 시작한다. 이렇게 반동적인 움직임이 거센 가운데 1824년 9월 루이 18세는 세상을 떠나고 루이 18세의 남동생이었던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샤를 10세는 루이 18세보다 한 술 더 뜨는 왕권신수설자로 입헌주의를 철두철미하게 반대하면서 의회를 해산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혁명 이후 근본적으로 뒤집어진 시대 정신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었고,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난다. 군대가 전부 알제리 정복을 위해 알제리로 가있는 동안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진압을 할 수도 없었고 샤를 10세는 퇴위[7]한다. 이후 루이필리프 1세에게 정권이 넘어가 왕조가 교체[8]되었다.

3. 사회 변화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리기로 결의한 빈 회의의 의결에 따라 왕정체제가 복구되었지만, 이미 10여년에 걸쳐 혁명을 경험한 프랑스 사회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일정수준의 자치권을 가졌던 지방귀족이 밀려나고 나폴레옹 시대에 법전통일을 단행하면서 행정적으로 구 왕정시대에 비해 중앙집권화되었고, 혁명 시절에 만들어진 행정구역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또한 의무교육 제도의 도입으로 문맹률이 크게 줄어들고 식자층이 크게 늘었던 상황인데, 왕정복고파들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고 그 대신 교회를 후원하여 지방에도 학교를 설립하는 식의 정책을 펴야 했다. 1793년 헌법을 통해 폐지된 앙시앵 레짐의 핵심요소인 신분제도와 봉건적 특권은 왕조가 복구된 뒤에도 부활하지 못했다.

물론 옛 귀족층이 루이 18세의 복귀 후 프랑스로 귀국하고, 대귀족은 재산을 되찾았다. 대다수를 차지하던 중소귀족은 얼마 안 되는 땅을 매입해봐야 이미 봉건적 특권이 폐지된 상황에서 수지타산이 안 맞아 연금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이를 되찾아주려고 했던 게 샤를 10세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권력과 부의 공백을 대체한 세력이 바로 부르주아로 19세기 프랑스사를 주도해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 엘리트층과 신 엘리트층 간의 갈등도 컸다.

한편 절대왕정 시기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중앙집권화는 혁명을 거치면서, 부르봉 왕정복고기에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표준 프랑스어의 보급을 통한 언어적 통일, 징집 혹은 자원 입대한 백성들로 이루어진 국민군의 창설은 민족주의를 싹트게 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현대적인 프랑스, 프랑스인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다.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는 1815년에 580,000명이었는데 이 시기부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해 런던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준의 인구를 유지했다.

예술 강국인 프랑스에서 1826년 최초의 사진가인 조제프 니엡스가 사진술을 개발하면서 미술사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의 對 아프리카 제국주의 정책도 이때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했다. 1830년 7월 샤를 10세프랑스 식민제국의 가장 중요했던 대외영토 프랑스령 알제리를 세웠기 때문이다.

4. 정치 체제

루이 18세가 반포한 헌장은 국민대표가 제정한 헌법이 아니라 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흠정헌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왕정의 복구가 혁명 전의 앙시앵레짐의 복구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장하였다. 사반세기의 혁명이 이뤄놓은 것을 깡그리 없애버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헌장은,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 재능에 따르는 취업의 자유, 재산에 비례하는 납세, 관권의 자의적인 억압과 체포로부터의 자유, 종교와 출판 및 언론의 자유, 소유권의 불가침성 등을 보장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혁명정부가 교회와 망명 귀족에게서 몰수한 국유재산과 국민이 정부로부터 구입한 재산도 다른 재산과 마찬가지로 그 소유권이 보장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헌장은 나폴레옹 치하에서 국가가 국민에게 진 빚의 반제를 약속하고, 강제 징병제를 폐지하며, 나폴레옹이 멸시했던 정치적 자유의 문제도 해결할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헌장은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 이외의 어느 나라의 것보다도 가장 ‘리버럴’한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노명식

헌법상으로는 왕의 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었지만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루이 18세는 양원제와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실시해주었다. 이 당시 프랑스에서 활발히 움직였던 정치세력은 크게 네 갈래로 볼 수 있는데, 공화정을 꿈꾸는 공화주의자(républicain), 강한 정치 개혁을 꿈꾸는 자유주의자(libéraux)가,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헌법파(constitutionnels), 구체제로의 복귀를 계획하는 초왕당파(Ultra-royalistes)로 구성되었다. 그렇다고 왕의 권한이 약한 것도 아니어서 절대왕정 시기 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편이었다. 입법권과 사법권은 왕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이었더라도, 행정권만큼은 철저히 왕의 손안에 놓여있었으며 상원 의원은 국왕이 임명하도록 되어있었다. 한편 하원의 경우는 세금 납세액을 기준으로 투표권이 주어졌다. 문제는 이렇게 납세액을 기준으로 투표권을 받은 인물들이 전체 성인 남성의 1% 가량[9].



[1] 이미지에 오류가 난 것이 아니며, 그냥 국기 자체가 백기이다. 엘랑스 이는 왕실의 상징색이 하얀색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실의 상징기인 노란 백합을 사용한 깃발(아래 이미지)도 널리 쓰였다.[백일천하] 1815년 3~7월 나폴레옹 1세의 복위로 인한 일시적인 왕정 붕괴[3] 비공식[4] 왕가[5] 왕정으로 복고하였기에 전제적 성격이 강했다.[6] 루이 17세는 루이 16세의 적자였던 루이 샤를을 추존하는 과정에서 루이 샤를에게 넘어갔다.[7] 샤를 10세를 왕위에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체제를 전환시키려고 했지만, 샤를 10세 본인이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스스로 왕위에서 내려왔다. 이 때 샤를 10세가 한 말이 "영국 왕과 같은 조건으로 왕을 하는 것보다는 숲에서 도끼질을 하는 편이 낫다."였다.[8] 부르봉 왕가에서 오를레앙 왕가로 교체.[9] 다만 루이 18세 시절의 경우, 중도에 가까운 왕에게 맞서 왕당파가 투표권 확대 및 의회주권론을 주장하는 기묘한 모습이 나타났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루이 18세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