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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9:57:17

에투알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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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알 개선문
Arc de triomphe de l'Étoile
파일:파리 개선문1.jpg
국가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착공 1806년 8월 15일
완공 1836년 7월 29일
용도 개선문
건축가 장 샬그랭(Jean-François-Thérèse Chalgrin, 1739~1811)

1. 개요2. 역사3. 구조4. 장식5. 관람6. 미디어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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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투알 개선문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개선문이다.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죽은 프랑스 병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졌다. 1836년 7월 26일에 완공되었다.

21세기 에펠 탑과 함께 프랑스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들 중 하나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68혁명 등 프랑스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함께한 프랑스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나폴레옹은 로마 원정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보고 매우 탐이 났으나 도저히 파리로 가져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파리에 개선문을 만들었는데 물론 훨씬 더 크고 멋지게 완성되었다. 파리 개선문은 폭 45m, 높이 50m의 거대한 구조물로, 벽면에는 각종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일반인에게 개선문이라 했을 때 떠올리는 대표적인 개선문이다.

2. 역사

에투알 개선문은 1806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하는 데에 성공한 직후, 나폴레옹에 대한 지지가 그 정점에 달했을 때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승리에 고무된 파리의 시민들은 나폴레옹의 업적에 걸맞은 거대한 기념물을 짓고자 하였고, 이로 인하여 새로운 개선문 건설이 의회에서 결의된 것이다. 워낙 거대한 대공사였기에 지면을 다지는 데에만 2년이 걸렸고, 이때문에 정작 나폴레옹이 1810년에 마리 루이즈 여대공을 데리고 파리로 개선하였을 때에는 제대로 공사를 시작하지도 못한 터였다. 결국 나폴레옹이 개선식을 치를 때에는 나무로 완성된 개선문의 형태를 그 자리에 세워서 이를 이용하여 개선식을 진행했다. 1811년에는 공사를 총감독하던 장 샬그랭이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장 니콜라스 휴요트가 공사 총감독이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황제는 개선문의 건설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개선문 공사 지연을 문제 삼으며 건설을 독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승승장구도 잠시,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군대가 호레이쇼 넬슨 제독에게 대패하고 나폴레옹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자 나폴레옹을 기리기 위한 목적이었던 개선문 공사도 점차 시들해졌다. 결국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폐되고, 쫒겨난 부르봉 왕가가 돌아와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개선문 건설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새로운 국왕이었던 루이 18세는 개선문 건설에 관심도 없었고, 혁명 전후 혼란스러운 프랑스 정계 탓에 이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를 몰아내려 들었으나, 또다시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완벽하게 유배되면서 나폴레옹이 꿈꾸던 그의 치세 하에서의 개선문 완공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1840년에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은 뒤, 그의 시신이 파리로 운구되어 4년 전 완공된 개선문을 통과하였으니 죽어서라도 자신을 위해 지어졌던 개선문을 통과하겠다는 소원은 풀었다 할 수 있겠다.
파일:napoleonfuneral.png
개선문 아래에서 치러지는 나폴레옹의 장례식 그림을 컬러로 복원한 모습.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 개선문 꼭대기에 금색 동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독일(당시 프로이센)에게 승리한 프랑스군이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가져온 황금 사두마차상이다. 이후 독일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 동상을 도로 되가져 가서 지금은 현재처럼 텅 비게 되었다. 한편 사두마차상을 다시 가져간 독일은 이를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다시 올려 놓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와중에 폭격으로 파손되었다가 종전 후 복원되었다.
1916년에는 베르됭 전투가 치러지기 바로 전날에 개선문이 들고 있던 검이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정부가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여 바로 치웠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19년 8월에는 찰스 고드프로이라는 이름의 비행사가 개선문 사이의 아치를 비행기를 몰아 성공적으로 통과하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게 당시로서는 대단했던 것이, 아치의 너비는 14m, 높이는 30m도 채 되지 않았는데 꽤 큰 부피의 복엽기를 몰고 이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장 나바르라는 비행사도 이를 시도하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숨지기도 했다.

개선문은 건설 이후부터 쭉 그 목적에 맞게 프랑스 군인들이 개선식을 치르는 장소, 그리고 매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기념 퍼레이드 장소로 자리매김하였다. 다만 프랑스 군대만이 이 곳에서 개선식을 치른 것은 아니라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전 직후 프로이센이 에투알 개선문에서 개선식을 열었다. 정작 프랑스는 에투알 개선문에서 개선식을 한적이 없었던지라 [1]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개선문 아래에 바리케이드를 쳐서 프로이센 보병대가 개선문을 통과하지 못하게 한건 성공했지만. 기병대 선두 일부가 바리케이드를 무시하고 꿰뚫어버렸다고. 에투알 개선문의 치욕은 프랑스 침공에서도 재현되었는데1940년 6월 14일 무방비 도시로 선언된 파리를 독일 육군 제 30사단이 점령하며 에투알 개선문의 포슈 거리를 따라 행진하였고 프랑스가 항복을 선언한 이후 폰 브리젠 30사단장이 사열하는 가운데 철십자 훈장 수여식과 함께 30사단 병력들의 대대적인 퍼레이드를 개최하였다. 6월 14일과 6월 20일 30사단 병사들이 에투알 개선문을 따라 행진하는 사진은 2차 대전 프랑스 치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면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다만 프랑스 군대가 2차 세계대전 후반인 1944년에 파리 수복에 성공하고 8월 29일에 미군과 함께 다시 개선문 아래에서 개선식을 치르면서 이 자존심을 조금 회복하기는 했다. 그래봤자 일부지만. 참고로 개선식을 진행할 때에는 아치 바로 아래에 묻혀 있는 무명용사들의 묘 때문에 이를 밟고 지나갈 수는 없다는 이유로 아치 자체를 통과하지는 않으며, 대신 개선문 주변의 환상도로를 크게 한바퀴 도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무명용사들의 묘에 대해 국방군도 배려를 하였는데 비록 에투알 개선문 앞에서 프랑스 침공 유공자에 대한 훈장 수여식과 개선식을 벌이는 등 프랑스 인들 자존심에 대못을 박긴 했지만 이에 앞서 파리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리젠 소장과 예하 참모 장교들은 무명 용사묘를 참배하는 등 예의는 지켰다. 또한 독일군의 서부전선이 무너지고 있던 1944년 8월 히틀러는 파리를 통째로 파괴하라고 명령했지만 프리드리히 폰 콜티츠 파리 군정 장관이 거부하고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에투알 개선문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파일:parisnaziarc.jpg
파일:parisliberation.jpg
1940년 6월 14일 파리 점령이후 에투알 개선문을 따라 행진하는 독일 국방군의 모습 1944년 파리를 해방시킨 후 개선식을 진행하는 연합군의 모습

종전 후에도 개선문은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이나 국가기념일 등 대규모 행사에 주로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상징으로 굳게 자리매김했다. 다만 60년대에는 도로 차량들의 매연 탓에 하얀 개선문의 석재들이 지나치게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나중에 한 번 대규모 청소 작업을 실시한 적도 있었다. 1995년에는 알제리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서 개선문 주위에 폭탄을 설치하여 17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적도 있다. 같은 해의 프랑스 전승기념일(2차대전 유럽전선 종전일, 일명 V-데이)에는 프랑스측에서 독일 연방군을 초청해서 프랑스군과 함께 독일 육군 군악대가 개선문에서 행진하는 일이 있었다.[2]

한편 2018년에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으로 인하여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이때 개선문 일부가 조금 파손되었다고 한다.

2021년에는 설치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1935∼2020)의 유작으로 포장이 이뤄지기도 했다.#

3. 구조

에투알 개선문의 높이는 50m, 너비는 45m이며, 깊이가 22m 정도 된다. 또한 정면의 거대한 아치는 그 높이가 29.19m, 너비가 14.62m이며, 측면의 상대적으로 작은 아치는 높이가 18.68m, 너비가 8.44m이다. 이처럼 워낙 높이가 높고 거대하다 보니 1938년에 멕시코시티에 혁명 기념문이 세워지기 전까지 몇 백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개선문이기도 했다. 또한 평양에 지어진 평양 개선문 역시 이 에투알 개선문의 모습을 기본적으로 본떠 지은 것이다. 참고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개선문은 파리의 라데팡스 지구에 지어진 '신개선문'으로, 이 역시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개선문은 건축가 장 샬그랭이 옛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양식을 답습하여 신고전주의식으로 지었으며, 참고로 개선문의 하단부에 세워져있는 조각상들은 개선문과 일체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제작되어 마치 트로피처럼 그 곳에 전시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기둥들 하나씩마다 조각상이 1개씩 세워져 장식되어 있는데, 그 이름들이 각각 '1810년의 승리', '저항', '평화', 그리고 '1792년 출발'이라고 한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1792년 출발'로, 프랑스 혁명 당시 이웃의 왕정국가들이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선포하자, 마르세유 지방 등에서 의용군이 일어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여성으로 의인화된 프랑스가 국민들을 이끌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조각상의 모습은 프랑스 육군 원수의 벨트 장식 도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편 개선문 아치 안쪽의 천장에는 혁명 전쟁 당시 프랑스 측에서 승리한 영광스러운 전투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으며[3], 안쪽 벽에는 프랑스 혁명 시기와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를 위하여 싸웠던 660명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 중 558명이 프랑스 제1제국의 장군들이라 할 정도로 대부분 거물들이다. 참고로 전투 도중 전사한 장군들의 이름 아래에는 밑줄이 쳐져 따로 구분된다. 당연히 개선문에 새겨진 전투들은 프랑스가 승리한 전투들만 기록되어 있으며, 나폴레옹이 대패하고 그의 몰락을 재촉했던 워털루 전투 같은 치욕스러운(...) 전투들은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개선문 바로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묘'(La tombe du soldat inconnu)라고 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한 이들을 기리는 묘가 세워져 있다. 1920년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절대 꺼지지 않는 불(La flamme)이 늘 타오르고 있다.[4] 물론 몇 년 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후에는 1, 2차 가릴 것 없이 두 대전에 참여해 사망했던 이들을 기리고 있다. 매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인 11월 18일에 이 곳에서 행사를 열어 이들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참고로 원래 무명용사의 묘는 팡테옹에 만들어질 예정이었으나, 파리 시민들의 강력한 주장과 편지 캠페인 등으로 인하여 결국 이 개선문 아래에 묘가 만들어져 안장되었다. 묘지의 명판에는 프랑스어로 ' ICI REPOSE UN SOLDAT FRANÇAIS MORT POUR LA PATRIE 1914–1918', 즉 '이 곳에 조국을 위해 싸운 이들이 잠들다 1914-1918'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난 1961년에는 미국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이 곳을 찾아 샤를 드골 대통령과 함께 개선문의 무명용사 묘지에 묵념하는 행사를 치르기도 했는데, 불과 2년 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 그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가 무명용사의 묘 곁에서 타오르는 성화를 기억해내고 이 성화의 불을 빌려와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이후 드 골 대통령이 성화를 가지고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지금도 케네디의 묘에서 타오르고 있다.

4. 장식

사진 설명
파일:ledepartde1792.jpg 1792년 출발(Le Départ de 1792)
개선문을 장식하는 조각상들 중 가장 유명한 조각상. 다른 이름으로는 라 마르세예즈라고도 불리며, 8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이 탄생한 것을 기리고 있다. 날개를 단 자유의 여신이 군중들을 인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파일:letriomphe.jpg 1810년 승리(Le Triomphe de 1810)
당시 오스트리아쇤부른 궁전에서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체결된 1810년의 쇤부른 조약을 기념하여 지어진 조각상. 승리의 여신이 나폴레옹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며 축복하고 있다.
파일:laresistancede1814.jpg 1814년 저항(La Résistance de 1814)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 황제 주도의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럽 각국들이 결성한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에 맞서싸우는 프랑스 군대의 모습을 기념한다.
파일:lapaixde1815.jpg 1815년 평화(La Paix de 1815)
나폴레옹 전쟁을 종결한 1815년의 파리 조약을 기념한다.

5. 관람

단순한 문이 아니라 내부에도 공간이 있어 전시품도 있고, 겉보기와 달리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다. 관광객들은 보통 에펠 탑에서 야경을 보려고 하지만, 파리라는 도시를 이해하고 싶다면 개선문에서 전망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일단 에펠 탑은 입장료가 너무 비싸고, 에펠 탑 전망대에서는 에펠 탑을 볼 수 없다.

또한 파리의 지형은 거의 평지인 데다가, 건축물의 고도를 제한하고 있어서, 언덕 마루에 우뚝 솟은 개선문의 높이에서도 가려지는 시야 없이 충분히 도시를 조망할 수 있다. 더구나 개선문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유명한 대로들(샹젤리제 거리 등)을 360도 파노라마로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쪽 신도심지구인 라 데팡스 지역의 신개선문(Grande Arche de la Défense)을 볼 수 있는데, 파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지는 상징성과 대칭적 구도를 흥미롭게 비교해볼 수 있다.

6. 미디어

7. 기타

파일:파리 개선.jpg
에투알 개선문과 그랑드 아르슈의 전경

[1] 개선식을 할만한 대형전쟁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없었다. 상술했듯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완공되었던지라….[2] 흥미롭게도 독일에서는 연합국 승전 기념식에 초청받는 것을 딱히 문제삼지 않는다. 예로 러시아의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 반드시 독일 총리가 참관하여 소련군 무명용사들을 추모하는데 이는 독일이 V 데이를 0 데이,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3] 아우스터리츠, 울름, 프리틀란트, 바그람 등등 나폴레옹 전쟁사를 공부했다면 한번에 알아볼 기라성 같은 전투들이 새겨져 있다.[4] 참고로 이 성화는 포로 로마노의 베스타 신전에서 4세기 경에 불이 꺼진 이후 서양에서 처음으로 다시 점화된 성화라고 한다.[5] 이후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돔까지 파괴해 버린다...[6] 다른 나라들의 사례로는 한국의 서울 종로 보신각 타종,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 영국 런던의 빅벤, 대만 타이베이의 타이베이 101 등이 대표적이다.[7] 참고로 당시 루마니아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중에서도 가장 가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