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Franco-mexicanos
프랑스어:Franco-Mexicains
1. 개요
프랑스계 멕시코인은 프랑스계 혈통이 있거나 조상이 프랑스에 기원을 둔 멕시코인이다.2. 이민사
2.1. 멕시코 독립 이전
오늘날 멕시코는 전근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이다. 18세기 중반 루이지애나 주가 스페인에게 인수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루이지애나 크리올[1]들이 누에바에스파냐의 신민으로 편입되었던 바 있다. 인구가 희박했던 루이지애나 일대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스페인 제국 정부는 당시 영국의 탄압을 받아 망명하던 케이준[2], 알자스-로렌 일대의 주민들의 이민을 초청하여 루이지애나의 인구를 늘려나갔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서 반강제로 반환받으면서 스페인의 루이지애나 지배는 끝을 맺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부 프랑스계 인구가 멕시코로도 유입되었다.2.2. 멕시코 독립 이후
1830년부로 프랑스와 멕시코는 상호 수교하였고 이를 계기로 19세기 중반 프랑스는 멕시코에게 있어서 3번째로 중요한 교역국이 되었고, 상당수의 프랑스인 사업가들이나 전문 인력들이 멕시코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멕시코에서 탈스페인 정책을 취한 것을 계기로 멕시코에서 프랑스의 사회 문화 요소를 도입하려는 요구가 적지 않았는데, 이렇게 멕시코로 이주한 프랑스인들은 사회 각계각층이 포함되어 있었다.그러나 당시에도 멕시코는 강도 문제가 워낙 심각했고, 결정적으로 피해자들이 외국인인 경우 경찰들이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강도나 약탈을 당한 피해자들은 멕시코 경찰 측에 도움을 요청해도 무시당하자 자국 대사관에 직접 항의 서한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1832년에는 멕시코 시티에서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빵집이 약탈을 당하자, 프랑스가 참다참다 못해서 멕시코를 대상으로 해상 봉쇄를 벌이는 이른바 페스트리 전쟁(1838~1839년)이 발발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빵집 약탈 사건 및 여타 멕시코 내에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강도살인 사건들에 대한 배상으로 300만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요구하였으나, 멕시코는 끝끝내 갚지 않았다.
30년 후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멕시코를 정복하면서[3] 멕시코 제2제국이 성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프랑스인들이 멕시코로 이주하기도 했으나 멕시코 제2제국은 장기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프랑스계 멕시코인은 유럽에서 멕시코로 이주한 민족 그룹 중 스페인인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그룹이었으나, 멕시코 전체 인구에 비하면 극소수에 해당하는데, 이는 멕시코로 이민을 희망하는 유럽인 인구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치안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미 심각하게 불안한 수준이었다. 멕시코에서 프랑스인 사업가들이 강도를 만나서 살해당하거나 재산을 뺏기는 경우가 유명했고, 프랑스인들의 멕시코 이민은 그나마 행정력과 치안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멕시코 시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4]
상술한 것처럼 멕시코 시티에 체류하던 프랑스인 사업가들은 멕시코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프랑스계 미국인 인구가 밀집한 루이지애나를 오고가며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 기준 프랑스계 멕시코인의 66.1%가 이중국적자라고 한다.
멕시코의 배우 중 프랑스계 혈통을 물려받은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에 나온 여성은 아리아드네 디아스
3. 실존 인물
-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 포니아토프스카라는 성에서 보듯 폴란드계 프랑스인 출신이다.
- 아리아드네 디아스(Ariadne Diaz) - 멕시코의 여배우
- 알레한드라 길만트 - 멕시코의 여성 모델
4. 관련 문서
[1] 프랑스계 정착민 남성과 흑인 노예 여성들의 혼혈 후손 등등 미국 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여러 인종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어휘이다.[2] 프랑스계 캐나다인, 캐나다계 미국인 문서 참조.[3] 프랑스의 라이벌로 사사건건 프랑스를 방해하던 영국 역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멕시코에 돈을 빌리고 떼먹힌 게 많아서 프랑스를 지원하였다.[4] 이러한 추세는 오늘날에도 이어지는데 21세기 통계 기준으로도 프랑스계 멕시코인의 3/4가 수도 멕시코 시티에 거주한다는 통계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