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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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rois Glorieuses[2]1830년 7월에 프랑스 왕국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 이 혁명 이후 공화주의의 물결이 주변국으로 퍼져 네덜란드 연합왕국에서 벨기에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2. 내용
당시 국왕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3]는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제만을 추구하고 입헌정치, 자유주의를 아예 인정조차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1829년 왕당파의 쥘 드 폴라냐크[4] 내각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1830년 5월 16일에 반왕당파들을 의회에서 쫓아내기 위해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7월 선거를 실시하지만 반왕당파들이 압승을 거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25일 7월 칙령을 발표했는데 그 칙령은 출판의 자유를 정지하고 하원을 해산시키고 선거 자격을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칙령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7월 26일 다음 날인 7월 27일에 프랑스의 언론들은 칙령을 무시하고 출판했고 파리에서는 군중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7월 28일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었고, 당시 알제리 원정을 떠나서 힘이 빠져 있던 프랑스 군대 덕분에 7월 29일 혁명은 성공했다. 이 7월 27일부터 7월 29일까지를 영광의 3일(Trois Glorieuses)이라고 부른다.
결국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8월 9일 자유주의자로 알려졌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길고 길었던 부르봉 왕조가 끝나고 7월 왕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귀족 체제가 붕괴되었고 공화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당시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던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막은 교장을 통탄하게 비난했고 7월 혁명은 물건너 라이프치히까지 퍼져 리하르트 바그너도 참여했다. 둘 다 10대 때 일어난 일이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1840년 7월 28일에 열린 혁명 10주년 기념식을 위해 정부가 의뢰한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Grande symphonie funèbre et triomphale)을 작곡했고 기념식 행렬에 참가한 200여 명의 마칭밴드를 이끌고 행진하면서 초연했다. 하지만 기념식에 모인 군중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 등 온갖 시끄러운 소음에 음악이 거의 묻혀 버리면서(...) 연주는 실패로 끝나 버렸다.
[1] 콜드플레이의 앨범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에서 앨범 커버로 되어있다. 실제로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인 Viva la Vida는 이 7월 혁명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다.[2] 영광의 3일. 혁명이 일어난 3일을 일컫는 별명이며 이는 이후 프랑스의 2차대전 전후 황금기가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리는 원인이 되었다.[3] 그 유명한 루이 16세와 루이 18세의 동생으로 67세에 왕위에 오른 왕이다.[4] 랑발 부인과 함께 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으로 유명한 폴리냑 공작부인의 3째 아들이었다.랑발 부인이 남아 비참하게 맞아죽은 거랑 달리 폴리냑 일가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고 돌아온 뒤로 쥘이 왕당파로서 날뛰었지만 7월 혁명으로 모든 걸 잃고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지만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1845년에서야 프랑스로 돌아왔다가 2년 뒤에 67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