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리스트 갈루아 Évariste Galois | |
출생 | 1811년 10월 25일 |
프랑스 제1제국 오드센주 부르라렌 | |
사망 | 1832년 5월 31일 (향년 20세) |
프랑스 왕국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수학자, 사회운동가 |
학력 | 파리 고등사범학교 (중퇴)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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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수학자.고작 20세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수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수학자. 그야말로 불꽃같이 짧지만 드라마같은 삶을 살다 갔으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수학자들 중에서 가장 단명한 축에 든다.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동시대의 노르웨이의 수학자 닐스 헨리크 아벨과 함께 불행하게 요절한 천재 수학자의 대명사로 손꼽힌다.[1]
그가 생전에 정립한 군론[2]은 대수학의 기초가 되었으나, 생전엔 여러 가지 불운으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이 사후에 알려진 후 수학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기에 그가 열정적인 삶의 끝에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2. 생애
2.1. 유년기
1811년 10월 25일 프랑스의 소도시 부르 라 렌 시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골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다 시장에 당선된 이후 17년 동안이나 쭉 시장을 역임했으니 갈루아는 상당히 좋은 집안 출신인 셈이다. 12살에 고향을 떠나 명문 기숙 학교 '리세 루이 르 그랑'[3]에 입학했고, 언어 방면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며 교사들 사이에서 유명해진다.15살에 우연히 프랑스 수학자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가 쓴 <기하학 원론 Éléments de géométrie, 1794>을 접한 갈루아는 2년 과정으로 쓰인 그 책을 단 '이틀' 만에 모조리 읽어냈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쓴 교재가 아닌 그 당시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전문 서적을 독파한 것이다.
이후 갈루아는 수학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여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상급 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4]로 가는 것과 이름난 수학자들을 만나 전문 수학을 공부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다. 문제는 수학 이외 다른 과목들은 낙제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동급생이나 교사를 무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학교 내에서도 따돌림을 당했다. 이러한 모나고 오만한 성격 탓에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 또한 최악이었다. 생활 기록부에도 갈루아의 정신 상태가 광기라고 적혀 있으며, 이해심 많은 갈루아의 어머니조차 아들이 정신병이라고 우려할 정도였다. 막내동생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갈루아를 미쳤다고 외면했다고 한다.
2.2. 첫 번째 불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입시 실패
부르라렌의 시장이었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갈루아 역시 혁명가를 꿈꾸었다. 그래서 갈루아는 당시 젊은 혁명가들이 모이는 곳이자 유럽의 학술적 업적이 탄생하는 중심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낙방하였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재수까지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갈루아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이 시기 갈루아는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왕립과학원)의 교수로 재직하던 오귀스탱루이 코시에게 직접 자신의 발견을 적은 소포를 보냈다. 소포 안에는 5차 방정식의 대수적인 해법이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코시는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17살에 불과한 소년 갈루아가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코시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러나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지 못했다. 갈루아가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중, 공화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희생[5]당해서 목을 매어 자살해 버린 것이다.[6] 이 사건으로 소년 갈루아의 삶의 토대는 산산이 부서졌고, 위대한 수학적 발견을 해서 행복하던 시간은 가장 괴로운 시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갈루아는 급진 공화주의자가 된다.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던 갈루아는 두 번째 입학시험에서 면접관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심지어 그들에게 네가 하는 설명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만 듣자 칠판지우개를 던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우개가 면접관의 이마에 제대로 명중했다.[7] 게다가 면접 당시 갈루아는 자신의 증명을 설명하면서 온갖 계산 과정을 건너뛰어 버렸다. 당시 시험관의 보고서에 따르면[8] 갈루아는 구술 면접에서 "그것은 자명하다"만 반복하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는 표정만 지으면서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9] 생전 갈루아가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귀찮은 부연설명은 다 건너뛰는 습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한 좀 알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요구를 하자 면접관들을 자신의 뛰어난 의도를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경멸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갈루아는 당연하게도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떨어졌다. 다만, 갈루아는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의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면접을 제대로 치렀더라도 결국은 낙방했을 것이다. 실제로 갈루아의 에콜 폴리테크니크 낙방의 공식적인 사유는 '수학 이외 과목의 성적 미달'이다.[10]
2.3. 두 번째 불운: 코시의 망각과 푸리에의 사망
이후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대신 에콜 프레파라투아르(École préparatoire, 예비학교)[11][12]에 입학한다.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이 무산되자 전에 코시에게 보낸 논문에 모든 기대를 걸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코시마저도 건강상의 이유로 갈루아의 논문을 발표하는 걸 미루었다가 그대로 잊어먹어 버렸다. 이후 다시는 코시가 갈루아의 논문을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13] 그러자 갈루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자기의 논문을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왕립과학원)에 제출했고, 그 논문은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14]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푸리에는 갈루아의 논문을 받고 몇 주 후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결국 갈루아의 논문은 또다시 분실되었다.한편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이후 갈루아의 혁명에 대한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러나 7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에콜 프레파라투아의 교장인 기뇨(Giniault)는 학생들에게 혁명 참여를 금지시켰고 갈루아는 에콜 프레파라투아의 교장은 학생들을 혁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역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교장은 지금껏 갈루아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 때문에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참아왔으나 갈루아가 신문(라가제트 데제콜레)에 사설까지 기고하며 교장을 비난하자 더 이상 참지 않았고 갈루아를 퇴학시켜 버렸다.[15] 결국 갈루아는 그토록 원하던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학생들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단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번의 혁명은 반드시 자신이 주도해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2.4. 세 번째 불운: 푸아송의 논문 기각
에콜 프레파라투아에서 퇴학당한 이후, 갈루아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개 강의를 열었다. 그는 자신의 수학적 연구 결과들을 강의에서 발표했는데, 청중 중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자 그랑프리의 심사위원인 시메옹 드니 푸아송(Siméon Denis Poisson)[16]도 있었다. 푸아송은 갈루아의 강의를 듣고 다시 한 번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연구 결과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고, 갈루아는 다시 한 번 인정받을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몇 달이 지나도록 갈루아의 연구 결과에 대해선 아무 소식이 없었다.이후 갈루아는 알렉상드르 뒤마 등의 거물들이 모인 연회에서 공개적으로 당시 국왕이던 루이필리프를 위협하는 말을 했고, 체포당해 재판을 받았다. 이는 혁명적 영웅으로 투옥되고 싶은 갈루아의 의도였지만, 변호사의 재치로 인해 의도와는 달리 무사히 풀려난다. 하지만 덕분에 갈루아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갈루아의 친구인 슈발리에 형제는 갈루아를 변호하기 위해 신문에 갈루아가 푸아송으로부터 다섯 달 동안이나 답변을 듣지 못해 초조해져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고 썼고 이 기사를 읽은 푸아송은 불쾌해져서 갈루아의 논문을 불합격 처리해 버렸다.
2.5. 젊은 천재의 죽음
일주일 후, 갈루아는 공화주의 시위를 하던 도중 사소한 이유를 계기로 체포되어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갈루아는 수학을 자신의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고 연구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는 의외로 감옥 내에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하며, 한번은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자 죄수들 사이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1832년 봄,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관계 당국은 젊은 수감자들이 감옥에서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 안에는 갈루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갈루아는 병원 의사의 딸이었던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갈루아가 스테파니가 보낸 편지를 모두 찢어버려서 불태웠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갈루아의 수학 논문 뒤편에서 확인된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스테파니는 그냥 친구로 지내길 원한다면서 갈루아를 거절했다.
갈루아가 죽기 며칠 전의 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사랑했던 여인 스테파니를 둘러싼 결투[17]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혁명가인 갈루아가 스스로를 혁명의 제물로 삼았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말도 있다. 결정적으로 갈루아를 죽인 범인조차도 밝혀지지 않았다. 갈루아가 짧은 인생 동안 열정적으로 하도 많은 결투를 치러서, "그가 이 결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다음 결투에서 죽었을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5월 30일 아침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죽어가는 그를 한 농부가 발견하고 기겁하여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급히 입원한 코친 병원(Hôpital Cochin) 의사들은 배에 총알이 깊숙이 박혀 제거해도 며칠도 못 넘길 것이라며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렸다. 당시에는 마취가 없어 큰 수술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고 설령 수술을 해도 소독이라는 개념이 없어 감염으로 죽는 일이 흔했다. 당시의 외과술은 현대와 비교하면 매우 열악했다. 갈루아가 죽고 50년 가까이 지나서 1881년 바로 미국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도 암살 미수를 당해 무사했건만, 수술 과정에서 소독안한 메스로 총알을 제거하다가 감염된 패혈증으로 죽었다. 하물며 1830년대에는 어떨지 알만하다.
성격이 모나다보니 식구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가 병원에서 죽을 당시, 그나마 그를 유일하게 존경하던 13살 난 막내아우 알프레드만 와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우를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보이며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18]
Ne pleure pas, Alfred ! J'ai besoin de tout mon courage pour mourir à vingt ans
울지마라, 알프레드! 나이 스물에 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단다.
울지마라, 알프레드! 나이 스물에 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단다.
이후 혼수상태에 빠진 갈루아는 다음 날인 5월 31일, 아침 10시쯤에 2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혁명 동지들은 젊은 천재인 갈루아의 죽음을 구실로 삼아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지만,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오른팔인 라마르크 장군이 같은 날 숨을 거두고 만다. 그렇게 갈루아의 죽음은 라마르크 장군의 죽음에 의해 그대로 묻혀버렸고, 갈루아의 장례식도 급히 마무리되었다.
한 술 더 떠, 갈루아의 무덤은 대충 공동무덤에 아무렇게나 묻혀져서 대체 어디에 묻혀졌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도 세월이 지나서 만들어진 가묘만 있을 뿐이다. 그를 존경한 알프레드가 평생을 진짜 무덤을 찾으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여 아쉬움 속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갈루아의 무덤. 가묘이다.
그래도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 때 본격적인 봉기가 발생했는데 이게 바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핵심적인 사건으로도 유명한 1832년 6월 봉기다.
갈루아의 논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관계로, 갈루아가 받을 수 있던 최고의 상인 그랑프리는 노르웨이의 수학자인 닐스 헨리크 아벨에게 대신 수여되었다. 그러나 아벨 역시 사후에야 이 상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생전에 갈루아는 아벨의 연구 성과를 알고 있었고 그를 천재라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2.6. 뒤늦은 인정
갈루아가 작성한 자신의 연구 결과. 한 여자(Une Femme)와 같이 수학과 관련 없는 낙서들이 곳곳에 보인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je n'ai pas le temps(시간이 없다)' 같은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죽기 직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총정리 하는 한편, 자신의 논문을 친구인 슈발리에에게 보내어 자기 대신 세상에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갈루아는 본인의 연구 결과가 옳은지 그른지가 아닌, 얼마나 중요한지를 평가받고 싶었다고 한다.
슈발리에도 천재였던 친구의 노력을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슈발리에는 갈루아가 죽기 전에 한 부탁대로 그의 논문을 독일의 수학자인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19]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게 보냈지만, 그들은 프랑스인의 빡빡한 논문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우스는 당시 갈루아의 논문을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이 일로 가우스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당시 가우스는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전국에서 논문이 물 밀듯이 몰려와 자신의 본업조차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우스를 두둔하는 주장도 많다. 가우스의 지인들은 "나에게 하루에도 편지가 수십 통은 오고 책도 한 달에 수십 권 온다네. 그들의 수학적 시도를 나 혼자 다 인정해야 하는가? 나도 처음에는 열심히 읽었으나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공식을 나에게 인정해달라는 이들은 뭔가? 나도 대학교수이자 나의 수학 연구로 시간이 부족하다네."라는 생전의 가우스의 말을 언급했었다.
또한 아벨 건에 대해서는 아벨이 논문의 제목을 5차 이상의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없음을 증명했다는 것이 아닌 5차 이상의 방정식의 근이 없음을 증명했다는 것으로 잘못 지어서 일어났다는 설도 수학사학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닐스 헨리크 아벨과 갈루아 젊은 비운의 두 천재의 편지들을 무시하다 나중에 그들의 업적을 뒤늦게 알게 된 가우스는 내심 후회하면서 이후 받게 되는 논문들을 조금씩이나마 읽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슈발리에는 포기하지 않고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인 조제프 리우빌[20]에게도 갈루아의 논문을 보냈고, 리우빌은 갈루아의 논문을 주의 깊게 검토해본 결과 그의 발견이 아벨과 비슷한 업적임을 이해하게 된다. 애국자였던 그는 조국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의 존재를 알게 되자 굉장히 흥분했지만, 갈루아의 논문은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설명이 부족했기에, 리우빌은 일반 수학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주석을 덧붙인 후 학계에 공개한다. 사후 10년이 지나서야 젊은 천재의 업적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갈루아의 논문을 무시했던 야코비도 그제야 혹시 갈루아의 또 다른 논문이 없냐면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가우스도 10여년이 지나서야 아벨과 갈루아를 무시했던 걸 후회한다. 갈루아 사후 갈루아의 천재성이 알려지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시 담당관들은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죄로 징계를 먹게 되었다. 그리고 갈루아의 케이스는 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시제도 개편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다만 면접관들은 억울한 면이 있어서 소송을 걸어 저항했는데 그 때문에 위의 칠판 지우개 투척과 같은 일화가 퍼지게 되었다. 저런 건방진 태도로 일관하는데 어떻게 제대로 평가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자가 바로 프랑스가 낳은 또 하나의 천재 쥘 앙리 푸앵카레. 푸앵카레 역시 갈루아처럼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에선 낙제점(하지만 이후 천문학이나 다른 분야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한 다재다능한 면을 보였다.)을 받았던 천재였다. 더불어 갈루아처럼 성격이 개차반이었지만 에르미트[21]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갈루아와 달리 프랑스 최고 명문인 소르본 대학 교수(다만 천문학)가 될 수 있었다.
갈루아의 논문이 공개된 후, 그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리우빌은 "갈루아 같은 천재들은 자신이 발견한 이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때는 시시콜콜한 설명을 붙여야 이해가 되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일반 수학자들은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며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갈루아의 논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러한 사례는 지금도 볼 수 있는데, 밀레니엄 문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그리고리 페렐만의 사례가 있다.
그리고 현대에 수학을 하는 모든 학생들은 갈루아의 업적을 배우고 있다.
3. 업적
현대 수학의 아주 많은 분야에 걸쳐있는 군론의 시작과 그 무한한 확장이 갈루아의 업적이다. 군론이라는 것은 그 범위와 영향이 너무나 커서 위키에서 다룰만한 지식이 아니다. 수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등 수학으로 기술되는 여러 학문들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아래의 내용은 갈루아의 본 업적이라기보다는, 현대수학의 언어로 다시 쓰인 내용을 요약한 것이므로 주의바람. 자세한 내용 및 정확한 정보를 위해선 웬만하면 수학사 서적과 대수학 교재를 참고.)
현대대수학의 갈루아 이론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방정식과 그 근들을 치환하는 군을 연관시켰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정식 x2 - 2 = 0 의 근인 √2와 -√2, 유리수로 만들어진 수 집합[22] Q(√2) = {a + b√2 | a,b는 유리수} 에서 √2와 -√2를 서로 바꾸는 치환은 이 집합에 a + b√2 → a - b√2 로 작용한다.
이를 일반화해서, 임의의 n차 다항방정식 f(x) = 0에 대해 f(x) = 0의 근과 유리수로 만들어진 수의 집합을 F라 하고, F→F의 자기동형사상(합과 곱을 보존하는 일대일함수)들의 군을 f의 갈루아 군(Galois group)이라 정의하자. 그러면 갈루아 군은 방정식의 근들을 유일한 방식으로 치환하고, 따라서 대칭군 Sn 의 부분군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위의 경우, 즉 f(x)=x^2^ -2 이고 F = Q(√2)인 경우, f의 갈루아 군은 항등함수와 위에서 생각한 '켤레연산'의 두 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근들의 집합 {√2, -√2}의 대칭군과 동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항등치환, 하나는 자리바꿈으로)
갈루아 이론에서 방정식에 대한 결과만을 간추리자면, f(x)=0의 방정식을 (사칙연산과 제곱근호만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은 f의 갈루아 군이 가해성(solvability)이라 불리는 특정 조건을 만족한다는 것과 동치이다.[23] 한편 3차와 4차 대칭군 S3 과 S4 은 모두 가해군이지만,[24] S5 는 가해군이 아니다. 따라서 5차 다항식 f의 갈루아 군이 S5 그 자체가 된다면, 그 방정식은 풀 수 없다. 실제로 실수가 아닌 근이 정확히 2개 존재하는 5차방정식이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5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갈루아 당시에는 군의 개념조차 없었다. 현대대수학의 추상적 군의 개념은 갈루아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대수학의 어떤 강력한 도구도 없이, 순전히 대칭다항식에 대한 근대적 산술[25]만을 써서 이 이론을 전개한 갈루아의 천재성은 엄청나다는 수식도 부족할 정도이다.
4. 기타
요절한 천재가 많다는 수학계에서도 손꼽히는 희대의 천재로, 워낙 짧고 강렬한 삶을 살다 갔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도 갈루아라는 이름은 제법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갈루아 이론을 배우는 추상대수학 교과서에서는 묘하게 박한 대접을 받는다. 물론 그가 이뤄낸 업적은 영원불멸하며 전세계의 수학도들을 잠 못 이루게 하고 있지만, 여러 교과서 저자들은 챕터 중간중간에 트리비아 삼아 수학자에 대해 소개하면서 갈루아에 대해서는 여우같은 요물한테 빠져가지고는 천지분간도 못하고 총질이나 하다 죽어가지고 아까운 재능을 낭비한 멍청이 정도로 깨알같은 말을 달아놓곤 한다.수학자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전의 갈루아는 정치운동가로서만 아니라 수학자로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갈루아의 비극적인 생애는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건 닐스 헨리크 아벨도 마찬가지로, 아벨 역시 생전에 노르웨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수학자였다. 인정받지 못한 천재라는 측면은 이후 붙은 것.
[1] 묘할 정도로 수학자 중에는 요절하거나 불행한 삶을 산 경우가 다른 분야에 비해서 많은 편이다. 사실 수학자 중 노름꾼 출신 인생이 뭐낙 많았어서 그렇다 가우스의 제자인 천재 수학자 리만도 학자로서는 매우 젊은 나이인 40세에 죽었지만 창시한 분야가 한둘이 아니다. 물론 이런 개별적인 천재들이 이끌어나가는 건 수학이 새롭게 개척되던 20세기 초까지의 이야기이고, 이미 대체로 틀이 정립된 현대 수학에서의 연구는 다른 과학 분야들처럼 연구자들 간에 협업하는 형태가 많다.[2] 아벨이 5차 이상의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갈루아의 군론을 통해서도 이를 증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두 천재 수학자는 묘한 교점이 있다.[3] Lycee Louis le Grand(루이 대왕 고등학교). 이 학교 출신의 유명인으로는 로베스피에르와 빅토르 위고가 있다. 앙리 4세 고등학교(Lycee Henri-IV)와 함께 공립 학교 중에서는 프랑스에서 최고 수준으로 알아주는 명문고이기도 하다.[4] 그랑제콜 중 하나로서, 현재까지도 상당한 권위를 갖추고 있다.[5] 아버지가 취미로 풍자시를 짓고는 했는데, 가톨릭 신부가 지역의 명사를 저질적으로 음해하는 풍자시를 갈루아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성해서 발표해버렸다.[6] 갈루아의 아버지를 자살하게 한 장본인인 예수회 가톨릭 신부는 이후 뻔뻔하게 갈루아의 아버지 장례를 진행했다가, 그 위선에 분노한 시민들에게 욕설과 함께 돌 세례를 맞고 허겁지겁 달아났다.[7] 여기에 관해서 실은 칠판지우개 투척 사건은 없었고 후대의 전기 작가의 창작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다.[8] 이 보고서에 칠판지우개 투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9] 다만 "그것은 자명하다"라는 말을 반복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너무 자명했기 때문에(trivial)"를 오역한 것이 아닌지.[10] 사실 갈루아의 성격적 결함과, 이후 에콜 프레파라투아르에서 보인 행동을 보면 어찌어찌 입학했더라도 원만한 학교생활을 영위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11] 현재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이 역시 그랑제콜의 하나다.[12] 지금은 다수의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수학 쪽으로도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수학 쪽으로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13] 이에 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코시가 갈루아의 논문을 분실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코시가 자기가 발표하는 대신, 갈루아가 직접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최고의 과학 및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그랑프리에 도전하도록 권유했다는 설이다. 이와 반대로 코시가 논문을 고교생이 썼다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설도 있다.[14] 1768–1830. 푸리에 급수의 그 사람.[15] 1832년 1월 2일자엔 언제까지 학생들은 하루 종일 수동적으로 강의를 듣거나 아니면 반복해 암송만 해야 할까? 축적된 지식을 숙고할 시간은 언제나 주어질까? 수많은 정리와 연관성 없는 계산들을 정리하여 내재된 패턴을 찾아낼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주어질까? 학생들은 시험 통과에 관심이 있지 학습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라는 칼럼을 기고해 팩트폭력을 날렸으나, 안타깝게도 교수법이 바뀌고 영재교육이 도입된 시기는 그가 죽고 한참이 지나서 이루어지기에 당시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다.[16] 1781–1840.전자기학에 주로 나오는 푸아송 방정식과 재료역학을 수강했다면 익숙할 푸아송 비(Poisson's ratio), 혹은 확률 분포를 공부하면 나오는 푸아송 분포의 그 푸아송이다.[17]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이 당시 유행하던 결투의 방식이었다.[18] 알프레드는 1848년 2월 혁명이 성공하자 이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형의 동판화를 제작했다.[19] 갈루아가 참가한 그랑프리에서 갈루아를 이긴 수상자였다.[20] Joseph Liouville. 1809–1882. 최초로 초월수의 존재를 증명한 수학자. 리우빌의 정리로 유명하다.[21] 샤를 에르미트(Charles Hermite, 1822–1901). 수학 분야에서 상당한 천재였음에도 어릴 적부터 다리 하나를 절었다는 이유만으로 퇴학당했다. 다만 이는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항목에서 나오듯이 시작이 사관학교 같은 성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학당한 에르미트는 열심히 공부하여 갈루아랑 비슷한 20살 나이로 논문을 발표해 인정받아 수학적 성과를 이루자 퇴학당한지 몇 년 안가 에콜 폴리테크니크 측은 에르미트를 조교로 받아들였고 그는 나중에 정식 교수가 된다. 에르미트는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어도 천재적인 수학자에 대하여 관대했기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시제도 개편에 열심히 나섰다.[22] 엄밀하게는 확장체(extension field)[23] 가해성을 정확히 말하자면: 군 G에 대해 1=G0 , G1 , ..., Gk = G 의 열이 있어, Gi+1 / Gi 가 가환이다.[24] 따라서 3차방정식과 4차방정식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갈루아 이론을 활용해서 카르다노와 페라리의 공식을 유도할 수도 있다.[25] 과장해서 말하자면 근과 계수와의 관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