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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락해방동맹의 전신격 단체인 수평사(水平社)의 깃발 |
현 부락해방동맹의 깃발[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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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라쿠민(部落民 ぶらくみん, 부락민) 또는 히사베츠부라쿠민(被差別部落民 ひさべつぶらくみん, 피차별부락민)은 전근대 일본의 신분제에서 최하층에 위치했던 천민을 가리키는 어휘로, 당대 가장 불결하고 금기시되던 곳인 '부라쿠(部落, 부락)'에 거주하였던 집단이다. 현대 일본 사회에서는 그 후손들을 현재진행형으로 차별하고 비하하는 증오 발언으로도 쓰인다.부라쿠 문제(部落問題, 부락문제)[2]는 일본인들이 오늘날 옛 부라쿠민의 후손 또는 후손이라고 규정된 소수자들을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인권 문제로 이들은 결혼, 취업, 장례 등 중대사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인간 관계에서도 기피 당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기본적 권리를 억압받고 있다.[3] 이들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사민 평등[4]이 선포된 후 평민 계급으로 흡수되었으나 몇몇 평민들이 에타·히닌으로 불리던 천민과 동일시되기를 거부하고 신(新) 평민이라고 부르며 차별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현대 일본에는 어떤 법적 계급도 존재하지 않으며[5] 일본국 헌법 제14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천명한다. 따라서 법적으로 부라쿠민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해오고 있으나, 부라쿠 문제는 혈통과 그들이 모여 사는 지역[6]에 의해 대물림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차별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본도 근대에 급격히 발전하고 인구이동이 많아지며 흐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명인은 조금만 찾아봐도 부라쿠민 출신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2. 명칭
현대 한국어로 부락은 그저 '마을'을 뜻하는 평범한 한자어에 불과하고 특별히 부정적인 어감은 없다.[7] 중국어의 경우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유목민족들의 공동체를 부르는 말로 부락이라는 말이 쓰였지만,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어감은 없다. 원래는 일본어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부락이란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잘 안 쓰이게 되고 그 파생어인 부라쿠민만 부정적인 뜻으로 남아서 쓰이다 보니 상위개념인 '부락'의 어감마저 나쁘게 뒤바뀌었다.일본에서는 이 단어 자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여기므로 만약 일본어로 문장을 쓸 일이 있다면 부라쿠민이라는 단어를 매우 조심해서 작성해야 한다. 실제로 소설 등에서 '부락'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썼다가 시민단체에서 항의가 들어와서 이미 전국 서점에 풀린 책을 모조리 회수하거나 심지어 판매가 금지되는 일도 일어났을 정도이다. 게임 야채부락리의 일본판 이름 역시 '부락'에 매우 비하적인 의미가 있기에 바뀌었다.
한 예로 2000년대까지도 '부라쿠민'이라는 단어가 방송 금지 용어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부라쿠나 부라쿠민 등이라는 단어가 방송에서 나오기만 하면 곧바로 항의 전화를 받거나 심의 당국의 경고를 받았다. 이 규정은 현재는 해제되었지만 암묵적인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고 보통은 '동화'라고 표현한다. 일본인과 대화를 할 때는 '부락민'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않기가 권장된다. 비유하자면 방미해서 흑인 차별 문제를 토론할 때 "미국에서는 흑인을 깜둥이(Nigger)이라고 부르는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면서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과 같고, 따라서 미국에서 니거 대신 N-Word라고 돌려 말하듯 '도와(同和)' 라는 대체표현을 사용함이 좋다. 내뱉었다가는 당사자들과도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넘어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준의 일이다.
대중적으로도 부락을 대체할 슈라쿠(集落, 집락)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인터넷에선 부라쿠민(burakumin)의 라틴 표기 앞글자만 딴 B라는 은어가 주로 사용된다. 또 '강 건너(川の[ruby(向, ruby=む)]こう)'[8]라는 식의 속어도 쓰이며, 소설가 나카가미 켄지(中上健次)는 '골목길(路地)'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별개로 실제로 일본에서는 공공연하게 부라쿠민 차별 발언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안 해준다. 일본인들은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부정적인 이슈가 공론화되고 논란이 되는 것을 최대한 꺼리는 문화가 있으며, 이러한 문화의 연장선에서 '부라쿠민' 같은 민감한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사람은 메이와쿠(폐)를 끼친 것으로 기피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칭 자체에 대한 민감한 반응에 비해 실제 일본 사회는 아주 보수적이라 어떤 지원책을 만들어도 차별의 알맹이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3. 역사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 천민 계급의 기원은 확실한 것이 없다. 근대 일본이 군국주의화 되면서 야마토 사상을 꺼내들었던 것의 여파로 오랫동안 잘 연구되지도 않은 주제인데, 당시의 일본은 아이누를 비롯해서 일본 인근 지역을 '사실은 전부 일본 땅'이라는 대일본주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이들과 이들의 토지를 흡수하면서 '일본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소수 집단의 역사를 부인하고 일체화했기 때문이다.[9]이 과정에서 많은 자료들이 사라졌고, 이에 따른 연구의 진보는 미미한 상태. 천민 계층의 기원 시점은 근대, 중세, 고대로 나뉘어지며 근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기간이었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중세는 11세기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 에도 시대에는 천민 계급을 에타(穢多, 예다)[10], 히닌(非人, 비인)[11]이라고 불렸다. 에타는 혈통으로 결정되거나 터부시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하지만 사실상 혈통으로 직업이 정해졌기 때문에 혈통으로 한정해도 무방하다. 히닌은 한센병 환자, 걸인, 연공을 바치지 못한 평민이나 부락으로 도망친 범죄자 등을 뜻했다. 에타는 혈통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계속 천민으로 살아야 했지만 히닌은 원래부터 일반 평민이었기 때문에 신분 보증인(주로 고용인)이나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신분을 복권시켜 주기도 하였다.
에타는 상술했듯 피와 죽음에 관련된 일을 주로 맡았고 소나 말의 사체 처리, 도축업[12], 피혁 가공, 장의사, 도로 청소, 폐기물 처분 등을 맡았다. 특히 출산 시 배출되는 태반을 에나(胎衣, 태의)라 불렀는데, 이 태반은 정해진 방법으로 절차[13]를 치러 처분하지 않으면 신토의 가치관에 따르면 피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나 그 가족에게 '더러움'이 남아 큰 재앙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그 태반을 처리하는 일도 에타가 아니면 맡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타는 '더러움'을 정화하는 전문가로서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구성원[14]이었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갑옷 등에 사용되는 가죽의 수요가 급증해 고도 전문 기술자로 다른 영지[15]에서 스카우트를 해오기도 하는 등 일반 농민보다 우대 받는 경우가 많았다.
히닌은 에타와 같은 일[16]을 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주로 걸인들이 많았는데, 걸인의 조직화도 이루어져 나병 환자나 고아, 장애인 등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이외엔 처형 집행보조[17], 큰 사찰이나 고위 귀족의 영지에서의 야간 순찰과 잡무[18], 떠돌이 승려로 기도를 하고 시주를 받거나[19] 노래나 춤 등을 피로하는 예능인[20], 유녀, 심지어 천황의 황릉을 지키고 천황릉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히닌도 있었다.[21]
에타의 탄생도 일본이 여러 국가나 부족 등으로 쪼개져 전쟁을 하던 시기에 정복 당한 세력이 그 바탕이라는 설도 있고, 외국에서 표류해 온 무리를 노예로 삼은 것이라는 설도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민속학자 아카마츠 케이스케(赤松啓介, 1909~2000)의 연구에 의하면 적어도 센고쿠 시대에는 이미 에타 내지는 그에 준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한다. 나라 시대에는 한자의 표기가 '恵多'로 다르지만 에타가 처음으로 언급되며 이 외에도 매의 먹이를 주는 일로 餌取/恵止利(에토리) 헤이조쿄의 고분군 근처에는 에타 부락이 다수 존재한다. 지금의 '穢多' 표기가 시작된 건 헤이안 시대부터였으며 그 시절까지는 큰 차별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 암암리에 차별은 있었지만 이후 에도 시대부터 본격적인 차별이 시작되었다.
에타나 히닌의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천한 일이라 해도 사람들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 점조직화 되어 그들만의 삶을 살아왔다. 에타가시라/히닌가시라(주로 서일본 지역의 명칭), 혹은 탄자에몬(동일본 지역의 명칭)이라고 불리는 부라쿠민의 두령급은 가죽의 전매 권한을 얻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며, 대략 10만 석의 영지를 갖고 있는 다이묘 수준의 경제력과 격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재력으로 대부업 또한 종사했다. 특히 동일본의 탄자에몬은 '탄자에몬야시키'라고 하는 거대한 저택까지 갖고 있었다.
에도 시대부터 조정은 지배 계급인 무사 층에 불만이 몰리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계급간의 불화(차별)를 부추겼다. 그렇게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피차별 부락,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피차별부락민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부라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구 천민 계급만이 부라쿠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피차별 부락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을 부라쿠민이라고 부르는데, 에타나 히닌의 집단 거주 지역 이외에도 전쟁 포로·전염병 보균자·옛 에조·하야토·구마소 등의 집단 거주 지역이 피차별 부락으로 분류되었다. 부락 내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 부락 밖으로 나가거나, 부락 밖에서 빈곤한 사람이 생활비가 싼 부락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계속 있었고 시즈오카현에서는 민간 음양사가 메이지 초기 음양사 폐지령 이후 실직하여 빈곤으로 인해 피차별민으로 간주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그 외에도 부락 밖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부락으로 유입되는 경우가 있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신분 계급을 없애면서 이들을 모두 평민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타 출신 평민들을 '신(新) 평민'이라고 부르며 여전히 차별하였다. 메이지 시대가 화족 등의 소수의 사회 고위 계층에 이끌려갔던 시대였던 만큼 결코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1884년 도쿄대학에 인류학회가 생기면서 부라쿠민의 기원 등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관지를 보면 신분제가 철폐되었음에도 당당하게 에타라는 멸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에 연구 중에는 심지어 '안구가 빨갛고 고기를 먹기 때문에 조선인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황당한 내용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22]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이만큼이나 진보했는데, '저런 미천한 자들이 일본인일 리가 없다!'는[23] 선민사상에서 나온 주장. 1908년에는 전국적인 지방 개선 운동을 시행하며 미에현에서는 부락 개선 정책도 같이 시행되는데, 이것은 차별 대책이 아닌 치안 대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빈곤층에서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당시 미에현 빈곤층의 대부분은 부라쿠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에타의 타 인종 도래 기원설을 반영하여 도쿠슈부라쿠(特殊部落특수부락 혹은 特種部落특종부락)라고도 불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부락민들에 대한 처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2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일본 사회의 기준으로 문제되는 일부만 솎아내고 국가시스템은 그대로 이어간 것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24]
3.1. 부락해방운동
물론 그렇다고 차별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했던 건 아니다. 1922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수평사(水平社)가 등장하여 부라쿠민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발표된 수평사 창립 선언문은 일본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수평사는 이후 여러 조직으로 갈라져 버렸고, 완전한 해방을 달성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현대에도 부락해방동맹(친 사회민주당, 입헌민주당 성향 단체), 전일본동화회(친 자민당 성향의 단체), 전국부락해방운동연합회[25], 자유동화회[26] 등의 단체는 부라쿠민 차별 해소를 명분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는데 이 중 부락해방동맹과 전일본동화회에서 엄청난 양의 비리를 저질러서 밝혀진 사건만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일본 최대의 사기 사건인 이토만 사건의 주범으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 사기꾼인 허영중도 부라쿠민 해방 운동 계열에서 일했다. 그러나 분명히 부라쿠민 차별은 암암리에 남은 문제로, 단체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그래서 부라쿠민은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당위성으로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3.2. 동화대책사업
전후 일본은 UN을 필두로 하는 국제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 자유, 평화, 인권 및 사회 정의를 중시하는 제1세계 선진국들 사이에서 좋든 싫든 비슷한 수준의 책임을 요구 받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이러한 차별이 존재하며 외국인들의 귀에 그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나라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일본 정부에서는 고도성장기부터 피차별부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대책을 세웠으며, 부라쿠민 출신에 대한 차별이나 부락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우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우선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소득 격차에 대해서는 교육 기회 확대, 일자리 제공, 공무원 채용 우대 등으로 격차를 좁혀 삶의 질을 올리는 것으로 부라쿠민과 다른 일본인들의 차이를 없애려고 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을 동화대책사업이라고 한다.하지만 이런 사업에 상당히 많은 예산이 배정되고, 이에 따른 이권도 비례하여 커지기 때문에 부락해방연대나 전일본동화회 같은 권력화된 부락보호단체 측 간부가 횡령하거나 단체 내에서 탈세, 사기를 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고, 이런 사건들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부라쿠민들의 이미지를 떨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대책 자체가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어서 젊은층 사이에서는 차츰 차별 의식이 사라져가고 있다. 차별을 행하던 세대의 노화로 인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부라쿠민 중에서도 상당수는 부모가 숨겨 스스로도 부라쿠민 출신인지도 모르고 살 정도인데, 이게 굳이 재특회 같은 극우들이 들춰내지 않는 이상은 그냥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4.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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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 earth에서 다룬 일본 부라쿠민 역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영문).[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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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간사이 모 처 부락의 생활상과 동화지구 대책 사업 중 하나인 주택 개량 사업 소개 영상(일어). |
4.1. 과거
일본 사회는 근대가 되도록 한 가문이 계속해서 같은 지역에서 같은 직업에만 종사했다. 전후 민속학의 연구가 활발해진 덕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의 무라(村)[28] 사회에는 법률이나 제도적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어도 강고한 신분 계급이 존재했다.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직업인데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꺼리는 질병이나 죽음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자는 사회적으로 직분이 낮아서[29] 같은 무라 사회의 구성원이라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있었다. 말하자면 직업이 곧 계급인 셈으로, 현대 일본에서도 가업을 몹시 중시하는 것은 그 잔재에 해당한다. 특히 이러한 차별의식에 대해서 이해하기 쉬운 예는 혼인인데, 혼인은 집안끼리 격이 차이가 나지 않는 가업을 가진 가문끼리 맺었고, 이에 따라서 계급이 대물림된 것이다. 그 밖에도 중병을 앓은 경우 원래의 가문의 격보다 한두 단계 정도 낮게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부라쿠민이 생겨난 건 나라 시대부터라는 학설이 우세하며, 센고쿠 시대까지만 해도 암묵적인 차별은 있었다고 하나 당시의 전란에 있어서 필요한 갑옷 등에 들어가는 가죽과 아교, 창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대나무의 가공, 조리나 게다, 셋타와 같은 신발 등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이나 수요가 많았던 무기/갑옷 등을 만드는 데 빠질 수 없는 전문직이다 보니 대우도 일반 농민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살았다. 전술한 것처럼 오히려 천황릉을 지키거나 영지의 야간 순찰 등을 맡는 경우에도 면세 혹은 좋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에도 시대 이후 전란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부라쿠민의 수요는 점차 줄어들고, 천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면서 막부가 무사 계급에의 반발을 막고자 오히려 차별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 중에서도 막부나 조정과의 접점이 많은 갑옷 제작자나 화과자 장인, 가부키 극단의 소유주 가문 같은 이들은 여전히 차별에서 벗어난 채로 사회적으로 상당한 우대를 받고 부를 누렸지만 대부분은 이런 상류층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무수한 차별의 대상이 되었고 다른 계층과의 통혼이나 교류도 금지된 채로 살아야 했다.
이러한 폐쇄적인 신분 차별은 심지어는 무라 단위로도 이루어졌다. 예를 들자면 동과 서에 각각 무라가 있다면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이 많은 쪽을 더 높은 격으로 쳤다. 따라서 무라와 무라는 기본적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일례로 에도 시대에 어떤 마을이 인구 때문에 둘로 갈렸는데 그 중에서 한 마을이 당시 유행하던 가부키로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가부키의 수요가 어쨌건 간에 사회적인 인식은 안 좋았기 때문에 무라 단위로 차별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30]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근대가 되기까지 출신지와 이름[31]으로 어떤 정도의 삶을 살았는지 그 간략한 내력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현대에도 일본인들의 인명을 보면 행정구역의 이름과 똑같은 성을 쓰거나, 다케다(竹田)나 고이즈미(小泉)같이 어떤 지형의 특징을 뜻하는 성씨[32]가 무척 많은 게 이것과 관련 있다. 그 지역을 영지로 하사 받은 구게나 사무라이의 후손이거나 그런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서 그런 성씨가 붙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사 인물들을 연구하는 데에도 출신지가 활용되는데, 대표적으로 이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닌자 설이 있는 마츠오 바쇼가 있다.
이 점을 악용한 것이 바로 부라쿠민 차별이다. 일본 사회에서 최하위층에 속하는 부라쿠민과는 같은 부라쿠민 이외에는 혼인을 맺지 않고 당연히 주거도 제한되기 때문에 출신지를 보면 단번에 부라쿠민임을 알 수 있다. 그 점을 이용하여 이력서 등에 적힌 출신지를 보고 부라쿠민을 불합격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특히 부락의 이름에는 읽기 어려운 난독 한자가 들어가거나 읽는 방법이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고, 부라쿠민의 성도 그런 경우가 많다. 가령 부라쿠민 출신으로 유명한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의 원래 성씨는 한자 '橋下'를 '하시시타(はしした)'라고 읽은 것이었으나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차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음독을 '하시모토(はしもと)'로 바꾼 것이다.[33] 이런 이유로 읽기 어려운 희귀 성씨나 집성촌 출신이 부라쿠민으로 오인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상술했듯이 이미 부를 축적한 부락과 부라쿠민들은 경제적으로 유복한 생활을 이어나갔고, 가부키나 쿄겐 등 전통극이나 전통 갑옷 제조 기술 같은 무형문화재를 대대로 전승해온 부라쿠민 가문은 아예 부라쿠민 신분을 벗고 화족에 준하는 상류층에 편입되기도 했다.[34] 그래서 부락해방운동의 시초인 수평사의 발기인들 중에는 부유한 부락 출신이 많았는데,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고등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아교 공장이나 통조림 공장 등을 운영하며 경제력은 가졌으나 학교나 결혼, 사회생활에서 심각한 차별을 받아 부락차별 철폐운동에 투신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의 공동납골묘지에 묘지 안에 철책이나 담벼락을 둘러 다른 묘비들과 격리시킨 구역이 있다면 거기는 100% 부라쿠민의 무덤이다. 죽어서도 일반인과 차별하는 것이다. 2010년부터 각 지역마다 행정지도를 하고 있다지만 묘지 내 격리 구역이 철거되는 것도 아니라서 딱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또 일본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장례식을 대부분 불교에서 주관하는데, 장례 기간 중이거나 장례식을 치른 후에 승려를 청하여 망자의 영혼에게 계명(戒名)을 지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다. 계명은 원래 승려로 출가하여 비구계를 받거나, 또는 평신도로서 보살계 등을 받아야 지어주는 것이다. 다만 일본의 정토종·정토진종은 '사람이 죽으면 부처가 된다'고 하여 죽은 후에 일괄적으로 계명을 지어주었고, 나중에는 불교 종파를 가리지 않고 일본의 보편적인 장례관습으로 정착했다.
그런데 일본 불교계는 부라쿠민의 장례식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모욕적인 의미를 담아 계명을 지어주곤 했다. 계명에 귀축(鬼畜)·하인(僕)·도살(屠)·가죽(革)·전타라(旃陀羅) 따위의 천박하고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넣어 죽은 부라쿠민의 직업이나 천한 신분을 조롱한 것. 과거 부락민들의 대부분은 어차피 글도 모르니까 그런 계명을 지어주어도 모욕적인 줄도 모르고 받았다. 이러한 계명을 차별계명(差別戒名)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죽으면 부처가 된다'는 믿음을 따른다면 이런 차별계명들은 곧 부처를 모욕한 셈이라 세속적인 윤리관뿐만 아니라 불교적 관점에서도 변명이 불가능한 악행이다.
현대에는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악행을 참회하는 의미에서인지는 몰라도 과거에 부라쿠민들이 받은 차별계명을 절에서 바꿔주기도 한다. 2009년에는 정토종이 종단 차원에서 과거에 지었던 차별계명 1600여 개를 바꾸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4.2. 현대
패전 후 제국 헌법이 폐지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중요시하는 일본국 헌법이 탄생하면서 정부는 부라쿠민에게도 다른 소수 집단들에게처럼[35] 비슷한 노력을 기울여서 사람들의 차별 의식은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 이들을 비국민처럼 대했던 과거에 비해선 장족의 발전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사회이며 지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은 아직까지도 드문드문 드러나 일본 국내외의 비판을 받곤 한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부라쿠민 출신은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일이 다반사였고, 관동대지진 때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들은 특히 일본 극우 세력들로부터 '화풀이' 식으로 차별 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에 대항해 차별 받던 부라쿠민들의 상당수가 좌익 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였고, 개중에는 아예 야쿠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시 차별 받던 집단인 재일 한국-조선인과 함께 사회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일본에 왔던 한 사업가는 그때 남아 있던 부라쿠민 동네를 이렇게 얘기했다. "여자들은 가끔 관청 허가를 받아서 감시하에 일반인 동네로 나와서 생필품을 사갈 수 있으나, 남자들은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그 동네에 일반인이 들어가면 살해당할 것이 자명하므로 절대 접근하지 말라."[36] 동네에 일반인이 들어가면 살해된다는 점에서 이누나키 마을이 연상되는 대목이다.[37]
현재에는 여러 부락들이 동화지구 대책 사업으로 판잣집이나 가건물[38]을 철거하고 지자체에서 세운 공영주택들이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 센터, 인권 센터, 청소년 회관 등의 지원이 있으나 오히려 이런 점들 때문에 부락이 더욱 눈에 띄게 되었다. 특히 대책 사업 중 하나인 불량 주택 개량 사업의 초창기에는 공영주택 안에 목욕 공간을 만들지 않아 공용 욕탕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부락만이 아닌 달동네나 슬럼 또한 불량 주택 개량 사업의 대상이었으므로 원래 부락이 아닌 지역이 일본의 공업화로 인해 노동자들이 모여들며[39] 슬럼화가 된 경우도 많아 무조건 그런 시설이 있다고 해도 부락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렇게 지어진 공영주택들은 임대료가 싸고 현재 원칙상으로는 누구나 들어가서 거주할 수 있다.
4.2.1. 사례
전후 일본에도 여전히 차별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사례를 연대순으로 기재.- 1963년: 사야마 사건(부라쿠민이 여고생을 살해한 살인범으로 몰린 사건)
- 1971년: 일본 포크 그룹 아카이토리(赤い鳥)가 싱글로 발표한 부라쿠민의 민요 <타케다의 자장가(竹田の子守唄)>[40]가 방송국들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됨(1990년대에 해금).
- 1975년: 부락지명총람사건
- 1990년: 행정 서사들에 의한 부라쿠민 의심자 족보 구매 사건
- 1993년: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의 협박 투서 사건: 부라쿠민 출신의 가정에 "출신지를 폭로하겠다"는 협박 투서를 하여 500만 엔을 요구한 사건. 결국 범인은 체포되었고 2000년에 제적 처분을, 2001년에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의 처분을 받았다.
- 1998년: 차별 신원 조사 사건
- 2001년: 우체통, 공원 등에서 낙서 사건
- 2002년: 청소사무소, 공사현장 등에서 낙서 사건
- 2003년: 부라쿠민 해방동맹 회원 자택에 "에타시네(エタ死ね: 부라쿠민 죽어라)" 투서 사건
- 2003년: 아소 다로의 노나카 히로무 차별 발언 사건
- 2005년: 행정 서사에 의한 호적 부정 입수 신원 조사 사건
- 2006년: 토지 조사 차별 사건
- 2008년: 연속 대량 악질 투서 사건, 공원 낙서 사건, 호적 부정 입수 신원 조사 사건
- 2010년: NTT 동일본 계열사 건물에 낙서 사건
일본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특수부락지명총람 등 사립탐정사무소, 흥신소 등에서 비밀리에 발간, 유통하는 리스트를 구입하여 지원자의 출신지를 가려내는 데 사용하는 등의 문제가 꽤 있었다. 특수부락지명총람의 존재는 일종의 도시전설로 여겨졌으나 1975년에 최초로 부락지명총람사건이 언론에 드러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고 최소 9가지 책자가 채용·결혼 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대의 정서에 역행함을 알고도 발간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게다가 부라쿠민 차별 철폐 운동이 진행될수록 색출 작업도 고도화되어 1990년에는 도쿄도 내의 행정 서사들에 의한 부라쿠민 의심자 족보 구매 사건, 1998년에는 오사카시 시내의 대형 흥신소가 기업들로부터 차별 신원 조사를 의뢰받은 사건 등이 일어났다. 위의 링크 기사에서도 "대기업에서 부라쿠민으로 의심되면 끝까지 뒤쫓아서 기어이 떨어뜨린다" 하는 익명 제보까지 있다.
이러한 필터링은 물론이며 어쩔 때는 없는 죄조차도 무고한 이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실제로 1963년 5월 1일 발생한 사야마 사건(狭山事件)으로, 사이타마현 사야마시에서 일어난 여고생 납치 피살 사건에서 일본 경찰이 납치범을 잡지 못하자 대신 시 근처의 부락에 쳐들어가서 이시카와 카즈오(石川一雄, 당시 24세)를 붙잡아 고문 후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는 대규모 사고를 저질렀다. 이시카와 카즈오는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94년에 가석방되었다.
정치계에서도 부라쿠민 차별과 관련된 논란이 등장하기도 했다. 일례로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자기 파벌의 회합 자리에서 자민당 총리 후보급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노나카 히로무를 상대로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 하는 엄청난 폭언을 했다.[41] 이에 격분한 노나카 히로무는 자민당 총무회에서 똑같이 아소 다로의 면전에다 "장래의 총무대신(행정안전부장관) 자리를 약속 받은 아소 다로 정무조사회장(당 정책위의장 격), 당신은 파벌 회합 자리에서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시 회합에 참석한 의원 중 세 사람을 통해서 이미 확인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당의 정책을 담당하고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앞으로 인권 계몽이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우오즈미 아키라, <노나카 히로무 차별과 권력(野中広務 差別と権力)> 2003년 9월 11일.[42] 이에 사건의 장본인인 아소 다로는 한 마디의 반박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43]
구글 어스에서 고지도와 현재 지형을 겹쳐볼 수 있는 기능을 이용하면 부라쿠민이 살았던 마을을 볼 수 있다고 해서 한때 문제가 되었다.# 구글 어스 기능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2차 사용에 따른 악영향이 문제된 것. 총무성에서도 처음에는 이 기능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지만 부라쿠민 단체들이 건의하였기에, 총무성이 그들에게 악영향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구글에 요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구글은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발생하지 않도록 그 기능을 삭제하였다. 오늘날은 일본 경제의 급성장과 정부 주도의 처우 개선 노력 등으로 인해 부라쿠민 거주지의 주거 환경은 상당 부분 개선됐지만 아직도 암암리에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직·결혼 등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불이익이 있으므로 일본 사회가 풀 민감한 문제로 떠오른 지가 오래다.
현대에도 중장년층은 부라쿠민 출신을 차별하여 자녀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이에 관련된 상담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44]
4.3. 인터넷상의 차별
세월이 흐르면서 일반 시민들에게서는 부라쿠민에 대한 인식이 흐려졌다보니, 인터넷에서는 외국인들이 일본의 부라쿠민 차별 관련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거나 하면- "부라쿠민은 언제적 얘기냐? 벌써 예전에 사라졌고 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괜히 차별 문제를 침소봉대해서 일본을 차별 국가 같이 보이려고 과도하게 부풀려낸 프로파간다", "부라쿠민? 그게 뭐냐? 먹는 거냐? 그런 거 들어본 적도 없는데.", "2ch 종자들이나 차별하지"라는 투로 차별이 거의 사라졌거나 없다는 투로 부정하는 여론이 나온다. # 물론 그렇게 외부인 앞에서 부라쿠민 차별을 '과거의 일'이나 '모르는 일'로 여기면서 차마 '일본의 전통', '부라쿠민은 근본부터가 차별 받아 마땅한 존재' 등 표현으로 대놓고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부라쿠민 차별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악습'이라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으며, 그들 사이에서도 명백한 적폐로 치부된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 부라쿠민 차별이 당연시되었던 전근대 일본에서는 이런 차별 문제가 치부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테고 굳이 부라쿠민 문제를 숨기거나 부정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그러나 여전히 넷 우익들이 비난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재일 한국인에게 하는 레퍼토리와 비슷한데, 차별을 외치면서 지자체로부터 온갖 특혜를 받고 있어 오히려 역차별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나도 (나라에서 세금으로 지원 받는) 부라쿠민이 되고 싶다'는 식의 조롱을 볼 수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 '부라쿠 문제(部落問題)' 문서에도 부라쿠민이 '이권을 얻기 위해 일부러 피차별을 호소하고 있다'고 서술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들의 부라쿠민과 관련 단체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드러난다.
물론 지자체에서 부라쿠민 자영업자에게 세금 감면을 해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라쿠민이 정상적인 직장에 취업할 수 없기 때문에 죽으라고 놔둘 순 없으니 형평성을 위해 지원을 해주는 것일 뿐이며, 게다가 지원해주는 자영업이 그럼 좋은 일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원래 부라쿠민이 해오던 일(즉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의 근거가 되었던 직업), 즉 장의사나 음식 쓰레기 처리, 청소 같은 3D 업종뿐. 이는 부라쿠민으로 알려진 경우 아무리 명문대를 나오고 우수한 경력을 가져도 배척되기에 부라쿠민은 진짜 어렵게 성공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저소득-저학력으로 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만 같은 빈곤층이지 출세의 기회가 작게나마 존재하는 이들과, 아예 일반적인 생활의 기회조차 박탈 당해 국가가 도울 수밖에 없는 이들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작은 지원을 가지고 역차별을 주장하는 이들은 부라쿠민들이 일본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기득권층도 부라쿠민에 대한 인식이 영 좋지 않기는 해도 이들에 대한 국가적 차별은 대놓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일명 '재특회' 같은 극우 단체들에서는 이들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부락민에게 증오 발언과 폭력을 휘둘러 일본 정통 우익들에서도 '국민을 분열시키는 집단'으로 보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부라쿠민은 인도에서 카스트의 하리잔을 구분하듯 사회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 지은 것이므로, 인종적으로는 다른 일본인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일본인 사회에서는 '부라쿠민과 교류하거나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보수적인 가치와 '부라쿠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차별 반대론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으며, '부라쿠민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계적인 인권 선진국에서 오늘날까지 부라쿠민이 차별받고 있을 리가 없다'는 차별 존재 부정론자, 극우파의 '부라쿠민 녀석들이 자신의 지위를 역이용해 정부로부터 각종 보조금과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역차별론까지 온갖 주장이 난립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부라쿠민 문제가 진전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의 전통적 사회의 특수성 때문이다.[45] 일본의 다테마에 문화 때문에 이러한 논란거리들은 쟁점화되어 수면 위로 드러내기보다는 최대한 일상 속에서 언급되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며, 이에 부라쿠민 문제는 차별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침묵한 채 일본 사회에 커다란 그림자로 남아 있다.
2020년대 최근에는 일본의 유튜버들이 마치 귀신이 나오는 흉가나 심령 스팟을 탐험하듯 부라쿠민들이 거주하는, 또는 거주하던 것으로 알려진 지역(동화지구)을 탐험하고 그러한 과정을 녹화하거나 생중계하는 것을 테마로 하는 방송 채널도 더러 있다. 증오발언이라 지적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딥 스팟(Deep Spot)'이라는 식으로 에둘러 말하지만 '일본 제일의 치외법권'이란 타이틀이나 '불결함', '가난함', '치안이 나쁨' 등 부정적인 분위기로 묘사하여 은연중에 경계심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에는 "부락은 치안과 민도가 나쁘며, 부라쿠민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일본의 법률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편견이 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재일한국인-조선적 부락 역시 부락 탐험 소재가 된다. 이 경우에는 혐한이 추가되어 한민족에 대한 증오 발언이 더해지는 경우가 많다. '재일 코리안(コリアン)이 불법 점거 중인 지역'과 같은 식으로 선동하는 것이다.
5. 인구
부라쿠민의 인구 수에 대한 정보는 자료마다 다르다. 1993년 일본 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4533개 '동화지구'[46]에 부라쿠민 89만 2751명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 인구는 200~300만은 된다고 추정한다. '동화지구'는 주로 서일본에 많은데 각 동화지구의 세대 수는 적게는 5가구로부터 많게는 1천 가구까지 있으며 평균 155가구 정도다. 그 4분의 3은 농촌에 있다. 홋카이도·도호쿠 일대·도쿄도·도야마현·이시카와현·오키나와에는 동화지구가 없다.[47]6. 다른 나라와의 비교
일본은 태평양 전쟁 말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비롯한 짧은 시기의 본토 폭격 외에는 한국처럼 국가 기반을 뿌리째 흔들 만큼, 범국가적 규모의 대전쟁이 장기화될 정도로 시스템이 뒤집힐 만한 변화를 겪지도 않았고, 행정력이 박살나는 사태 역시 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기본 사회 틀은 그대로 유지한 채 상대적으로 느리고 차분히 변화했으므로, 기존 사회의 질서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 특히 농촌은 도시와는 달리 주된 폭격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에도 큰 피해를 받지 않았던 편이고, 향촌의 작은 사회 질서는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또 다른 이유는 일본이 가장 오랫동안 신분 차별이 잔존하는 국가였다는 점 또한 작용하였다. 실제로 역사적인 흐름을 보았을 때 동양 문화는 우선 중국에서 발전하고 이것이 주변 국가로 퍼져나가는 방식이었는데, 중국과 가까운 한반도 왕조들은 이 영향을 비교적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은 거리와 지리상의 문제로 인하여 이 흐름에서 뒤쳐지는 편이었다. 일례로 한중일 삼국 모두 한때는 같은 땅 안에서 여러 국가로 찢어져서 싸우던 시기(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 센고쿠시대)가 있었으나 중국은 3세기에 출범한 진나라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룩한 통일국가가 완성되었고, 한반도 또한 10세기에 출범한 고려부터 마찬가지로 통일국가가 완성되었으나, 일본은 이것이 7세기부터 11세기 후반 겨우 4세기 동안 중앙 정부의 통치하에 통일되었다가 다시금 지방 무사들의 반란으로 국토가 분열되어 이후 6세기 동안 내전을 겪다가 17세기에 강력한 권력을 거느린 에도 막부 시대가 되어서야 겨우 잠잠해질 만큼 변화가 느렸다.[48]
일본은 구 화족 출신들 중 상당수가 현대 일본에서도 정계의 명문가로 불리면서 대대로 지역구를 세습하고 있다. 미디어에서도 그런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는데, 일본 만화 중에서 성인 취향의 극화를 보면 정말 자연스럽게 아들이 아버지의, 사위가 장인어른의 지역구를 물려받으며, 아무도 그 상황을 이상해 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49] 심지어 아들이나 사위도 으레 당연히 자기가 물려받는 걸로 알고 있다. 화족이나 무사 집안 출신과 평민 부자들이 정략결혼하여 대대손손 해먹는 모습도 많이 묘사된다.
6.1. 한국과의 비교
집단적인 신분 차별은 근대 이전 한국에도 있었는데, 고려 시대에는 향·소·부곡 등의 지역명을 붙인 천민 집단 거주지라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만 가도 군현제의 변동과 맞물려 축소되거나 사라져갔다. 무신정권기의 유명한 반란인 망이·망소이의 난 등 반란이 일어나 폐해지기도 했고, 반대로 대몽 항쟁기에 몽골군에게 대항해서 그 공으로 현으로 승급되는 등 변화가 다양했다. 고려 말기엔 이름만 남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 후 모두 현으로 승격되었다.조선 시대에는 야인(野人·여진족)과 일본인(倭人) 등의 귀화인이 존재했고 그들 역시 고려시대와 같이 고립된 구역에서 살게 했다. 조선 정부는 향화(向化)라고 하여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여진족이나 일본인을 귀화시켜 노략질을 못하게 하는 회유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은 대부분 백정과 같은 직종으로 한정되었으며[50], 호적에 출신이 기록되어 사실상 조선인과의 통혼이 불가능했다.[51] 물론 조선 말기에 들어와서 호적 세탁 같은 방식으로 신분 제도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이들 또한 평민 신분으로 상승되어 천민, 노예 신분이라 차별받는 일도 많이 줄었다. 이 때문에 백정과 부라쿠민이 1:1로 매칭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대한제국 시대에 갑오개혁을 기하여 노비제와 신분제를 법적으로 폐지하고[52] 사회적인 면에서 근대화를 추구하던 한국인들에 의해 신분 차별을 타파하려는 활동이 활발해졌다.[53] 1922년 일본의 부락해방동맹이 결성된 것과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도 1923년 "형평사[54]"가 설립되어 형평운동으로 불리는 백정 차별 반대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본격화된 1930년대에 다른 사회운동 단체들처럼 해체되었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을 맞게 되고, 기존 신분 질서들이 한번 더 와해되는 와중에 한국 전쟁까지 터지면서 전근대 신분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게 된다.[55] 한반도가 초토화되며 대규모 난민이 형성되었고, 남북한 사이의 이데올로기 경쟁에 따른 학살과 납치가 벌어지며 양반이나 지주에 해당되는 인구가 붕괴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종전 이후에도 한동안 도축업자등에 대한 차별의식은 이어졌으나, 최소한 혈통에 따른 신분제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며, 이에 대한 국민 감정 역시 매우 부정적이다.
6.2. 중국과의 비교
중국도 마찬가지로 노예나 천민의 비중이 매우 낮고, 실질적으로 사대부와 평민의 2단계로 분리되었기에[56] 천민 계급이 드물었으며, 더구나 중국도 중일전쟁의 혼란과 전후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문화대혁명으로 계급 의식이 와해되었기 때문에 천민 출신에 대한 차별이 없어졌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낸 많은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 수천년간 내려오던 신분제를 완전히 박살냈다는 점에서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현재 중국에서 가문을 따지거나 혹은 조상을 논하는 짓은 좀 멍청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내로라 하는 명문가들은 신해혁명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까지 벌어진 40년간의 아비규환 때문에 거의 몰락했다. 가장 대표적인 명문가인 공부(孔府, 공자의 직계 가문)도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내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도망가거나[57] 숨죽이고 있었고, 문화대혁명 때는 홍위병들이 유교의 본산 공부를 완전히 박살냈다. 대만도 마찬가지로 명색이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국부천대 때 공자 가문처럼 대만으로 이주한 다른 명문가들도 그 과정에서 영향력을 매우 크게 잃어서 말 그대로 가문만 남아 있다. 그나마 공자 가문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자리를 세습하면서 상당한 예우를 받지만, 이는 중화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대만 정부가 의도적으로 예우를 해주는 것이지 가문 자체의 권력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역시 공식적으로는 공직이지 별도의 신분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58]
청나라 때는 팔기군에 소속된 기인이라는 만주족 귀족이 있었다. 이들은 신해혁명 후 몰락하지만, 그래도 청나라 시대에 많은 부를 쌓고 고급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후손 상당수는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상류층을 점유했다.
어느 시대든 명문가의 힘은 그 지역에서 대대로 살면서 이어온 토지와 자원을 차지하는 것과 오래된 혈연·지연을 기반으로 맺어진 강력한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오대십국시대 이후부터 사서에 계속 등장하는 '강남 사족'이라는 말이 이런 이유로 나왔다. 하지만 고향에서 쫓겨난 이런 명문가들에게 남은 건 도망치면서 가져온 족보 쪼가리나 약간의 금은보화 정도였다. 그나마 잦은 화폐 개혁과 인플레를 거치며 이들은 경제적으로도 취약해진다. 이는 한국에서도 자주 보이던 모습이다.[59]
위에서 보듯이 중국에서 공산혁명 이후 명문가는 거의 몰락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지만, 집안의 전통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 이들의 자손들이 다시 출세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중국에서 개혁개방 이후 과거 명문가 집안이었던 사람들이 새 체제에서 다시 출세하는 경향을 주목해 기사를 냈다. # 애당초 저우언라이, 장쩌민, 후진타오, 심지어 현재의 시진핑 같은 중국 역대 지도자들의 과거 집안 내력을 조사해보면, 조상들은 무지렁이 농민이 아니라 적어도 향촌에서 힘 좀 쓰던 대지주-사대부 집안 출신이었다.
6.3. 북한과의 비교
과거 북한 정권과 척을 지던 적대계급 잔여분자들이 출신성분에 따라 조직적인 차별을 받고 있다. 물론 일본 극우들이 그랬듯이 북한 정권은 북한 내부에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6.4. 유럽과의 비교
그나마도 비슷한 섬나라에 같은 군주국인 영국의 경우는 적어도 내부에서부터 끊임없는 개혁을 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어 왔다. 영국은 스스로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민주주의가 스스로 정착되었지만,[60]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미국에 의해 반 강제로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 단, 영국 역시 뿌리 깊은 계층에 대한 분리 의식이 있어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에 대한 분리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영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계층적 분리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그런데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한국에서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생긴다. 흔히 한국에서는 영국 연예계를 보자면 로커, 래퍼 같은 가수들은 대부분 노동자 계급이고 배우나 성우 등 연기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귀족이거나 왕족과 연관 있는 이들이라는 점을 보아 아주 계층 분리가 심하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존 레논처럼 왕실이 준 훈장을 반납하는 사례가 있을 정도로 계급 문제를 '노동 계급의 자부심'을 살리는 방향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배우가 무작정 우월하지는 않은 직업이고, 가수가 낮지 않은 직업인 방향으로 계급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것이다. 교양있는 사람의 용인발음도 거만하게 여겨져 왕실 인사가 더 서민적인 말투를 쓰는 경우가 있다. 요약하자면 유럽의 '계급' 개념은 한국의 '신분' 개념과는 다르다. 유럽에서 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낮은 지위가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일본은 지방 명문가를 비롯한 지역의 고유 특색이 매우 강한 데다가 과거 천민·중인·무사들이 살던 거주지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후손인지 구분도 쉬워서 과거 천민들의 후손들은 차별을 받았다. 현대에 와서는 취직이나 면접에서 출신 성분은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부락지명총람사건으로 인해 여전히 천민 출신이 차별 받고 있음이 드러난 바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계층 간 혹은 지역 간 유동성이 떨어지는 사회라서 일본 사회에 부라쿠민이 존속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당장 영국만 봐도 역사적으로 '천민' 계급은 공식적으로 없었다. 그리고 영국뿐 아니라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도 의외로 신분제의 영향력이 공고하다. 프랑스나 스페인,[61] 오스트리아처럼 몇 번이나 나라가 뒤집어졌음에도 옛 지방 토호나 왕족, 귀족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지방 의회에서 유럽연합 의회 의원까지[62] 하는 사례들은 생각보다 많다. 대신 한국에서 '낮은' 직업이나 정치적 권위가 없는 직업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계층 이동성이 높아서 국회의원 중에 기업가나 노동자나 평교사 출신이 한국보다도 많은 편이다.[63] 특히 스웨덴처럼 평등주의와 왕실이 동시에 있는 나라는 오히려 국회의원의 권위조차 높지 못하다. 서양 사회가 전반적으로 개인주의나 민주주의 정신 때문에 러시아 같은 독재 국가가 아닌 이상 학식 등의 상류층의 우월성을 부정하는 태도가 한국보다 강하며, 계층 이동성을 갈망하는 태도도 한국 못지 않다. 일본은 상공업자의 귀천 의식에 대한 태도는 한국보다 조금 나은 편이나 기이하게 오직 혈통만으로 차별한다는 것이 기괴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부라쿠민 차별을 혼란 없이 사회가 온건하게 발전한 탓이라고만 보기 어려우며, 신분제 자체보다는 종교 등 다른 문제가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장 도축업자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부라쿠민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는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교의 영향이 컸다.
6.5. 인도와의 비교
인도는 카스트에 의한 차별이 헌법으로 금지되어 있다.[64] 불가촉천민의 후손이었던 초대 법무부장관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인도 신헌법에 이를 단단히 못 박았기 때문이다. 물론 말 그대로 법적으로만 없어진 것이라서 아직 시민들의 뇌리 속에 카스트의 잔재는 상당히 남아있지만, 타고난 직위보다는 경제력이 더 중요시되는 21세기 사회의 물결 아래 인도 정부가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위 카스트에게 복지, 세금 감면 등 많은 사회적 혜택을 제공하는 식으로 계층간 평등화를 꾀했고, 인도로 진출한 많은 외국계 대기업들이 '카스트? 신분이 낮으면 어때, 일 잘하는 사람이 장땡이지.' 하면서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고 어디까지나 능력만으로 사람을 뽑아다 쓰다 보니 점차 인도 대중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아닌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는 경향이 퍼져나갔다.[65]외국계 기업과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적은 시골 중심으로 카스트의 악습은 아직 남아있으나, 분명 과거 인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66] 물론 아직도 카스트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이 암암리에 존재하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카스트 제도가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카스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하위 카스트나 불가촉천민의 수가 인도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나 되므로,[67] 그들의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들과 그들과 공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도시민들이 주축이 되어서 카스트 제도 붕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즉, 막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변화한 것이 맞다.
다만 부라쿠민 문제 해결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일본 정부에 비해 인도의 중앙 정부는 카스트 제도의 타파를 위해 적극적인 수단을 강력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인정할 만 하지만, 이 단락에서 이야기하는 '인도에서 카스트 차별 문제의 해결'에는 다소 고평가된 부분도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일본이든 인도든 일단 공식적, 법적으로는 차별적 신분 제도가 전혀 없지만 암암리에 남아있는 차별적 인식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 자체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조건에서 비교해 볼 경우 인도의 불가촉천민 차별이 일본의 부라쿠민 차별보다 훨신 심하고 공공연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나마 대도시를 중심으로 차별적 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지역에서 공공연한 차별, 심하게는 린치와 같은 심각한 범죄도 빈발하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사실 일본의 부라쿠민 문제가 유독 두드러지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진국 일본에서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라는 관점이 크게 작용한 것도 있다. 애초에 인도는 카스트 문제 말고도 문해율이나 소득 수준, 사회적 인프라, 여성 인권 등 많은 면에서 아직은 하위권에 들기에 카스트 문제가 있어도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는 인식이 일견 있지만, 지금도 G7 선진국으로 평가되는 일본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제3자가 보기엔 상당히 이해가 안되는 놀랄 노 자인 것이다.
이 때문에 불교로 개종한 불가촉천민 출신 인도인들이 일본에 와서 부라쿠민 운운하는 소리가 오가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로 개종한 불가촉천민들은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의 영향으로 달리트 정치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도 있다.
7. 창작물에서
- 《공기의 밑바닥(空気の底)》시리즈 - <밤의 목소리(夜の声)> 편: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철완 아톰으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 데츠카 오사무는 만화 잡지 <플레이 코믹>에서 총 14편의 연작 단편을 연재했고, 이를 1970년에 《공기의 밑바닥(空気の底)》이라는 이름으로 2권의 만화집을 출간했다. 이 중 하권에 실린 <밤의 목소리(夜の声)>라는 단편에서 여주인공 '유리'는 일본을 떠나 베트남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유리는 전도유망한 일본인 청년 사장 에이이치의 프로포즈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부라쿠민이라 일본에 돌아가지 못하고 결혼할 수 없다"고 밝히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초판에만 등장하고, 2번째 판본부터는 유리가 돌아갈 수 없는 원인이 '부라쿠민'에서 '전과 6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당시 일본의 부라쿠민을 쉬쉬하는 분위기를 봤을 때, 사회적 파급을 고려해서 바꿔야만 하는 당시 어른의 사정이 있었던 모양. 출처.
- 《굿 바이》: 2008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영화 《굿 바이》(원제: 오쿠리비토(おくりびと))에 보면 전직 첼리스트가 고향으로 내려와 장의사가 되는데, 부인(히로스에 료코 분)을 비롯하여 모든 친척들이 수치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마을 사람들도 장의사를 천대하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이다.
- 《떠오르는 태양》: 1993년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인 《떠오르는 태양》에서 부라쿠민이라는 말이 대사에 직접 나와서 일본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일본 내에서 부라쿠민을 일반적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기 때문.
- <SAYAMA: 보이지 않는 수갑을 벗을 때까지>: 2014년, 50년 전 사야마 사건의 용의자로 억울하게 피해를 보았던 이시카와 카즈오 씨와 그의 부인,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사는 그의 형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SAYAMA: 보이지 않는 수갑을 벗을 때까지>가 공개되었다. 예고편을 보면 그는 75살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여전히 거리에서 무고함과 결백함을 주장하고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피해자 마을에서는 진범 찾기로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 발생보단 부라쿠민 출신 이시카와 카즈오를 희생시켜 마을 단결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 House M.D.: 주인공 그레고리 하우스가 군 대위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병원 청소부 취급을 받던 부라쿠민 출신 의사가 실력만으로 주변을 입 다물게 만드는 것을 보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69] 하우스 본인도 계급이 아니라 성격 때문이지만 왕따 취급을 받으면서도 오직 실력 하나로 주변을 입 다물게 하는 의사가 됐다. 비슷한 경우로 재일교포들이 의료계에 많이 진출해 있어서[70] 오사카, 고베 등지에는 재일교포 출신인 의사가 많다. 의료계는 어차피 실력만으로 승부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71]
- 휴먼버그대학교 - 텐노지구미의 최강 전력 토가리 겐야가 출신 성분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당했다고 한다. 작중에서는 아카모리(赤森) 지구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만 댓글의 반응은 백퍼 부라쿠민을 모티브로 했다고 여기는중. 시부야 다이치도 이쪽 북부 출신이라고 한다.
8. 부라쿠민 출신 유명인
현대 인물[72]은 본인이 부라쿠민 출신임을 밝혔을 경우에만 등재하고, 역사적인 인물은 출신에 대한 기록이 있을 경우에만 등재한다.- 나카가미 겐지: 소설가 겸 수필가
- 노나카 히로무: 자민당 소속 정치인, 전 내각관방장관
- 마츠모토 지이치로: 인권운동가 겸 정치인. 부락해방동맹의 창립자이자, 일본 참의원의 초대 부의장을 지냈다.
- 미쿠니 렌타로: 일본의 국민 배우. 영화 맨발의 겐, 미야모토 무사시 등에 출연했다.
- 야나이 타다시: 기업인. 유니클로의 설립자. 큰아버지 야나이 마사오(柳井政雄)는 부락해방 운동가로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유착하여 자민당 계열 부라쿠민 단체인 '전일본동화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 요시다 다다오: 기업인. YKK 그룹[73]의 설립자다.
- 우에하라 요시히로: 언론인 겸 미식 평론가. 부라쿠민이나 재일 한국인, 미국 흑인 등의 여러 피차별 계층들의 식문화를 탐구한 책인 '차별 받은 식탁'을 저술했다.
- 이노우에 잇세이: 정치인. 일본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
- 하시모토 도루: 정치인. 일본 유신회의 창립자, 전 당대표이자, 제19대 오사카시장 및 제52대 오사카부지사.
9. 여담
- 전 오사카시 시장이었던 하시모토 도루가 부라쿠민 출신이다. 아사히신문 계열의 잡지 <주간 아사히>에서는 '하시모토 도루의 과격한 행동은 그의 혈류에 있다.'[74]는 취지로 쓴 칼럼을 실어 온갖 쌍욕을 먹은 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지향점은 우익 성향이다.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개혁에 나선 사람은 하시모토 도루처럼 최하층 출신일 경우에는 대부분 외부에서의 과격·강경 성향의 변화를 추구했고, 내부 개혁은 오히려 기득권층 내 일부 깨어있는 이들의 몫이었다.[75] 이 칼럼이 게재될 당시만 해도 하시모토 도루는 극우 성향이었지만, 오사카 시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온건중도화됐다.
- 굳이 대놓고 동화지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유신 이전에 도축장이 있었다거나 해서 부락이 있을 수밖에 없던 지역이면 타 지역민들이 해당 지역을 싸잡아서 좀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특히 각 지자체 면적이 촘촘하기 때문에 기초 지자체, 즉 시·정·촌 단위로 이렇게 싸잡기도 편한(?) 면이 있다.
- 도축업에 종사하던 부라쿠민들은 아부라카스(あぶらかす)라 하여 돼지껍데기나 곱창 등을 기름에 튀겨먹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오키나와 요리의 안다카시나 재일교포들이 고안해냈다고 알려진 호르몬 요리와 유사하다. 이런 점을 흥미롭게 생각했는지 부라쿠민 출신 저널리스트인 우에하라 요시히로는 <차별 받은 식탁>(원제: 被差別の食卓)이란 이름의 책을 쓰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은 이후에 한반도에 남은 일본인들 중에서 일본에 돌아가는 걸 거부한 사람들 대다수가 부라쿠민이라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자신들이 본국에서 당했던 설움을 알고 있어서, 같은 마을에 관청에서 시찰이니 공출이니 쳐들어오면 한국인들을 잘 커버 치면서 서로 윈윈하던 사이라 광복 이후에도 잘 섞여 살았다. 물론 부라쿠민도 어쨌거나 혈통상으로는 일본인인지라 한국인들을 상대로 갖은 부심을 부리면서 악랄하게 대한 사람들도 있긴 했기에, 이들은 당연히도 해방 직후에 일본으로 추방되거나 한국인들에게 무수한 보복을 당하고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이런 경우는 일본 내의 하층민들을 이용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막고자 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76] 이는 웬만한 제국주의 국가들이라면 예외 없이 벌이는 악행으로, 당장 일본 제국은 만주를 침공하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울 때도 한국인들을 끌어들이고는 이들을 우대하는 식으로 원주민인 만주족과 몽골족, 한족들의 저항을 찍어 눌렀으며, 스페인이 남아메리카를 침공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착취할 때에 여기에 앞장섰던 콩키스타도르의 대부분이 가난한 하급 귀족이나[77] 스페인 정부의 수배를 받던 부랑자와 범죄자였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 일본 극우사관을 가진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부라쿠민에 대해 '종교적인 차별이 없었으며, '부락 상류층의 자칭 볼셰비키'들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자신들이 속한 집단을 끼워 맞추기 위해 가상의 정체성을 창조했다'는 주장으로 수준 이하의 색깔론을 붙인 논문을 써 논란이 되었다. #
- 부라쿠는 일종의 혐오 시설이 있던 터라 땅값이 싸고 혹은 공터가 많아 부라쿠가 있는 곳에는 항상 조선인이 모여 살던 조선부락(朝鮮部落, 쵸센부라쿠)도 존재했다. 일부 부락에선 부라쿠민과 재일교포들이 동병상련으로 잘 지냈다고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신들이 받는 차별의 화풀이 삼아 역으로재일교포를 차별한 곳도 많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인질들이 군락형태로 모여 살던 부락이 조선부락의 시원이란 설도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쵸슈(지금의 야마구치)와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에 터를 잡고 살았다.
[1] 위의 수평사의 깃발이나 이 깃발이나 둘 다 예수의 가시 면류관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는 부라쿠민 차별이 불교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며 불교가 아닌 가톨릭의 예수를 상징으로 삼았는데 이는 항상 낮은 자들과 함께했던 예수의 행적을 본받기 위해서이다.[2]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의 표제어가 部落問題(부라쿠 문제)이며, 한국어 위키백과와 영어 위키백과 문서의 표제어는 부라쿠민이다.[3]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현대 일본에서는 형식상으로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 자체가 비칭이고 멸칭이지만, 이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은 현대에까지 계속해서 실존하고 있다.[4] 황족과 화족(귀족)을 제외한 일반 무사와 농민, 상인, 천민 간의 신분제를 없애려고 메이지 정부에서 실시한 정책.[5] 황실은 2차대전 패전 이후 강제 인간선언으로 이후 어떠한 특권도 부여받지 못하기 때문에 계급이 아니다.[6] 부라쿠민이 아닌 사람이 결혼 등 이유로 부락으로 이사하면 역시 부라쿠민으로 취급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래에도 나오는 부라쿠민의 인구 통계이다. 여기서는 부라쿠민 혈통을 타고 태어난 인구가 아니라 부락 지역(동화 지구)의 인구를 집계하였다. 즉, 혈통과 상관 없이 그 지역에 살면 부라쿠민으로 지칭하는 것이다.[7] 한국에서는 '마을'이라는 순우리말 고유의 단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일상에서 부락이란 말은 잘 쓰이진 않는다.[8] 도축업이나 피혁 가공에 종사하는 부라쿠의 경우 악취나 동물 사체가 널부러져 있는 광경 때문에 강변 혹은 강의 건너편에서 부라쿠가 형성됐기 때문이다.[9] 막부 시대를 열고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쇼군도 헤이안 시대 때까지는 아이누( 동북쪽의 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선발되었다는 의미의 '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에서 온 말이다. 한자를 해석하자면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 그러나 율령제가 붕괴되고 나서는 군벌화되었고, 가마쿠라 막부기 때부터 에도 막부기 때까지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10] 불교와 신토에서 말하는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 특히 신토에서 피나 죽음에 관련된 일을 매우 부정하게 보았다.[11] 불교 용어로 '인간의 형상을 하였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를 뜻한다. 원래는 둔갑술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야차나 용 등을 가리켰다.[12] 일본의 역사에서는 식육 금지령이 자주 내려졌지만 해금되었던 시절도 있었다.[13] 이 절차를 에나오사메(胎衣納め)라고 부른다. 산후 5일 혹은 7일 후에 대야나 항아리에 담아 길일과 태어난 아이의 생년월일로 길한 방향을 찾아 묻는 의식이다.[14] 심지어는 각 마을에 배치하기도 했다.[15] 특히 서일본 지방에서 많이 불러왔다.[16] 지역마다 다르나 피나 죽음에 관련된 일보다 토목 공사, 청소나 폐기물 처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17] 처형은 주로 에타가 행했다.[18]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을 산죠(散所, 산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착하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19] 이런 이들을 쇼몬지(声聞師, 성문사)라고 불렀다.[20] 특히 고위 귀족의 연회에 남장을 하고 가무를 선보인 시로뵤시(白拍子, 백박자)가 많았다. 이 가무는 원래 신에게 바치는 가무였다.[21] 이들은 료코(陵戸, 능호)라고 불리며 에타/히닌 중에서도 여러 가지 면세 혜택을 받는 등의 엄청난 우대를 받았다. 하지만 다른 히닌들과는 다르게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과 혼인을 해야만 했다.[22] 籐井乾助, 「獲多は他国人なる可し」, 『東京人類学会報告』, 第10号, 1886年 12月. 원래 일본에는 육류 음식이 없었다. 675년 덴무 덴노가 금육령을 제정한 이래 약 1,200년간 육식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의 신장을 개선하고자 정부 차원에서 1871년 금육령을 해제했으나 실제로 대중들 사이에 육식 문화가 퍼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190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서양 음식과 함께 육류 문화가 조금씩 퍼지는 정도였다. 이때부터 화식(和食)과 양식이 섞이는 화양절충도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그러나 금육령 기간에도 고기를 먹을 사람은 먹었기 때문에 음성적으로는 남아 있었다.[23] '일본의 어두운 면이나 사건사고는 전부 재일 외국인들이 일으키는 것이고 순수한 일본인은 무결하다'는 기적의 논리는 일본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24] 사실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기는 했으나, 6.25 전쟁을 겪은 한국과는 달리 나라의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 내릴 정도로 쑥대밭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실행 직전에 일본이 원폭을 맞고 바로 항복한 덕분에 기존부터 이어져오던 국가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25] 부락해방동맹에서 일본공산당 지지자들이 나온 단체로 부락 해방 운동의 권력화나 부패상을 비판한다. 다만 이쪽도 완전히 깨끗한 건 아닌 게, 교토 지부에서 공금 횡령 사건이 일어난 바 있다.[26] 친 자민당 성향의 단체인데, 1981년 전일본동화회에서 탈세 사건이 밝혀지자 전일본동화회에서 탈퇴한 회원들이 만든 단체.[27] 촬영 장소는 오사카시 니시나리구(니시나리구의 모처가 부락이기도 하였다) 일대로 보인다. 아이린 지구가 포함된 그 지역이다.[28] '마을'을 뜻하는 촌을 풀어서 읽은 것으로, 학문적으로 '무라'라고 할 경우 일본 특유의 사회 단위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29] 이러한 관습은 전세계적으로 존재하며, 과거 한국에서도 동물을 죽이는 백정이나 상여를 끄는 상여꾼은 천민이었다. 다만 한국에선 장례식 자체는 문중들이 주관하는 문화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부라쿠민이 장례에서 맡는 역할은 무덤을 파고 시신을 매장하는 것과 같이 당시에는 멸시 받는 역할이었다. 신성한 장례 의식을 천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주관하는 것은 그 가족들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장례는 사찰에서 주관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관습이 옅어져 장례지도사가 전문직 대접을 받는다.[30] 다만 가부키 배우가 부라쿠민 취급 받는 건 에도 막부 시기까지의 이야기고 오늘날에는 전문적인 가부키 극단이나 대대로 배우 생활을 하는 가부키 집안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인간문화재로 공인받아서 도리어 황족이나 구 화족, 재벌급 최상류층으로 통한다.[31] 성씨라는 개념은 원래 일본의, 적어도 평민 이하의 사회에서는 없었으므로 최소한 메이지 유신 이전에 성이 따로 있는 사람들은 미야케를 가지는 황족이 아니면 절대 다수가 사무라이로 대변되는 무인(武人)과 화족이었다.[32] 다케다는 일본어로 '대나무 밭'이라는 뜻, 고이즈미는 '작은 샘'이라는 뜻이다.[33] 다만, 모든 부라쿠민이 이런 성씨를 쓰지는 않는다. 일본의 현행 민법에서는 개명 신청을 할 때 이름뿐만 아니라 성씨도 바꿀 수 있어서, 통상적인 일본인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성씨인 사람도 많다. 대표적으로 부라쿠민 출신 국민배우인 미쿠니 렌타로의 본명은 사토 마사오(佐藤 政雄)로, 한국으로 치면 '김철수' 수준으로 흔한 성씨와 이름이다.[34] 일본의 국민 가수인 마츠토야 유미가 이런 식으로 상류층에 편입된 기모노 제작자 가문의 딸이었다. 이 때문에 마츠토야의 지인들 중에 구 화족이나 재벌, 황족 출신들이 즐비했고 평상시 성격도 대단히 오만한 편이다.[35] 다른 일본 내 소수 집단들인 아이누,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류큐인들은 각각 일본 정부 차원에서의 선주민 인정, 한류, 중화가, 동화 정책 등으로 어느 정도 사회 내 포용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아이누인은 거의 조상 민족에 대한 의식 없이 사는 사람도 굉장히 많으며 류큐인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냥 오키나와현 토박이 정도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일본에 완전히 동화됐다.[36] 잇시키 마코토의 만화 피아노의 숲에서 초기 배경이 되는 마을인 이치노세 카이의 고향, '숲의 가장자리'에도 이런 묘사가 있다.[37] 실제로 이누나키 마을이라는 도시전설이, 실존하는 부라쿠민 마을에 대한 혐오감정이 섞인 낭설들이 살이 붙으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38] 일본어로는 'バラック(배럭)'이라고 한다.[39] 공장 등이 들어서 소음과 공해 등으로 인해 원주민들이 떠나고 저렴해진 임대료로 들어가거나 빈 공터에 가건물을 지어 공장 노동자들이 들어가 살게 된 케이스가 많다.[40] 싱글의 B면은 그 유명한 <날개를 주세요>.[41] 아소는 여동생인 노부코 비를 일본 황실에 시집 보낼 정도의 일본 전통 신분제 사회의 최상위 계급 출신으로, 친가는 재벌이자 화족 후예이며 외가와 처가는 총리대신을 배출한 정치 명가이다. 사실 평소 폭언, 망언으로도 유명한데, 자기 지역구의 선거 유세에서 주민들을 "밑바닥 쌍놈들"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42] 総務大臣に予定されておる麻生政調会長。あなたは大勇会の会合で『野中のような部落出身者を日本の総理にはできないわなあ』とおっしゃった。そのことを、私は大勇会の三人のメンバーに確認しました。君のような人間がわが党の政策をやり、これから大臣ポストについていく。こんなことで人権啓発なんかできようはずがないんだ。私は絶対に許さん![43] 원래 일본인들은 웬만해서는 직접적인 모욕은 삼가고 화가 나도 빙빙 돌려서 말하는 문화(다테마에)가 있고 특히 이 양반의 출신지인 교토는 다테마에가 일상인 일본에서도 최고 레벨인 곳인데, 이런 문화를 가진 일본인이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상대방을 절단 내겠다는 뜻이다. 즉 '부라쿠민'이라는 단어가 사생결단을 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모욕으로 쓰인다는 것이다.[44] 질문: 부락 차별에 대해서(질문입니다). 30세 남자입니다. 저희 집이 부락(민)입니다. 그게 원인이 되어 여자친구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제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고, 평생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도 자기 부모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상대도 안 해준 것 같습니다. 사랑의 도피라도 하려 했지만, 저희 집은 자영업을 하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습니다. 저는 장남이고 형제가 없습니다(가업을 이어줄 사람이 없어서 도피도 힘들다는 말). 이번 주에 여자친구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가면 좋을지 조언을 해줬으면 합니다. 답변: 차별하는 상대를 비난하지 말 것. 성실히 진심을 말할 것. 아마 이야기는 평행선을 달리겠지만, 한 번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로 설득되리라 생각하지 말 것. 끈기 있게, 포기하지 말고. 지금은 부락 출신 80% 이상이 부락민 아닌 사람과 결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타인인 당신이 아무리 설득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다. 딸의 강한 마음만이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45] 부라쿠민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은 현재진행형이지만, 한때는 그 정도가 너무도 심하여 일본의 야쿠자 문제가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가 될 정도였다. 부라쿠민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사회에서 출세할 방법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폭력 범죄에 손을 대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46] 同和地区=피차별 부락으로 정부에서 지정, 지원하는 지역.[47] 동화지구로 선정되면 역으로 여기가 피차별부락이었다는 걸 광고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동화지구 선정을 거부한 사례도 있다. 단적인 예로 센소지로 유명한 도쿄의 아사쿠사 근방도 과거에는 에타가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48] 그나마 이 때도 혼란만 가라앉았을 뿐, 중앙 정부(에도 막부)의 통제력이 일본 전역에 미치지 않아서 다이묘가 여전히 존재했다.[49]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고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일부 층이 "시대가 어느 땐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아직도 세습제를 하냐"는 식으로 비난을 하긴 한다. 문제는 이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일본 전체 인구에 비해 극히 소수인 데다 일본 정치 주류 계층인 우익, 극우층이 이런 자들을 싸잡아 좌익 테러리스트, 중국 스파이 등등으로 치부하며 입을 막으려 든다는 것이다. 이는 신세대 우익도 예외가 아니라 극우 입맛에 맞춰 만들어진 일본 창작물에서 이들 좌익들은 죄다 입만 산 찌질이들로 묘사되고, 삼류 악역 혹은 주인공 일행의 발목만 잡는 발암 유발자 엑스트라 역할을 맡는다. 주류 계층에서 메이와쿠를 기가 막히게 악용하며 이런 사람들 입을 막아대기 때문에 나머지 일본인들은 애초에 정치에 관심도 없는 거에 더해 이런 세습에 대해 부화뇌동하고 있다.[50] 다만 백정항목에서 보듯 조선 정부는 백정들이 일반 평민들과 평등한 삶을 살도록 정책을 펴기도 했다.[51] 여담으로 지역적으로는 성균관 앞 현 대학로 부근에 위치해 있던 반촌(泮村)이 이러한 특수 지역으로 기능했고, 이 반촌 내의 주민들은 '반인'(泮人)이라고 하여 양인들과 구분되어 살기는 했다.[52] 그 이전의 조선 후기에도 서얼을 등용하고 노비 세습제를 폐지하는 등의 노력이 있었다.[53]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의 개혁 정책과 자본주의 도입에 의해 양반 중심의 신분 제도가 폐지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일단 제도적인 차별은 대한제국 때 이미 폐지되었다. 그러나 법적인 철폐와 별개로 잔존했던 신분 의식은 일제강점기에도 건재했으며, 오히려 총독부는 친일 양반, 유림을 수용하며 신분제적인 기득권을 유지시켜 줬다. 사실 일본도 조선보다 먼저 신분제를 폐지했음에도 여전히 구 황족, 화족은 특권을 누렸으며,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은 그대로라서 부라쿠민들은 1922년 '전국수평사'를 결성하게 된다.[54] 조선형평사[55] 학계에서는 결과만 놓고 볼때 한국전쟁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 전근대식 신분제의 완전한 붕괴를 꼽기도 한다.[56] 물론 노비가 있긴 하지만 자손이 아닌 1대에만 한정되고, 그나마도 대부분 죄인이나 전쟁 포로 신분이었다. 조선에서는 19세기에야 일반화되는 궁정이나 양반집의 고용인 제도가 중국에서는 이미 고대 시대부터 일반화된지 오래였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노비 계급이 세습되었다. 특히 주인이 노비의 자식들을 자기 가문에 입적시켜서 계속 노비로 부려먹던 방법도 있고, 외국에서 조공이나 선물로 보내온 노예나 군대에서 부리는 노비들은 대대손손 부려먹었다.[57] 이것은 연성공을 맡고 있던 공덕성(1920-2008)이 국민당 정부의 부총리 직을 가진 고관이었기 때문이다.[58] 사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도 원래는 연성공이라고 해서 진짜로 귀족 작위에 해당했지만, 신해혁명으로 세워진 중화민국은 신분제가 없는 공화국이다 보니 '~공'이라는 귀족 작위가 있는 것이 모순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어 공직자를 뜻하는 '~관'으로 바꾸고, 대우도 특임관이라는 장관급 공직자의 격에 맞게 해주고 있으며, 직책의 성격도 무보수 명예직이 되었다.[59] 현재 한국의 개성 왕씨 가문이나 전주 이씨 가문이 과연 일본의 구 화족이나 황족 출신들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대부분의 전주 이씨들은 그냥 평범한 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이석씨나 이원씨 같이 꽤나 대한제국 황가와 가까운 혈통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결혼 등을 통해 그 집안에 편입되려고 하지 않는다. 유럽처럼 과거에, 혹은 현재도 귀족으로 여겨진 가문의 일원이 되거나 작위를 받으려고 혈안인 사람들 또한 전혀 없다.[60] 영국 내에서 의회파와 왕당파가 갈려 서로 내전을 했을 만큼 국토가 내전으로 황폐화된 적도 있었다.[61] 프랑스와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에서는 혁명 이전에 프랑스어로는 '카고(Cagots)', 혹은 스페인어로 '아고테스(Agotes)'라는 부라쿠민 비슷한 계급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졌다. 이 역시 제2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전으로 계층이 와해된 덕이 크다.[62] 대표적인 사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63] 일례로 한국 최초의 비정규직 출신 국회의원은 제22대 국회에서의 정혜경 의원이다.[64] 카스트 자체가 인도사에서 단 한 번도 법제화된 적이 없다.[65] 재미있는건 신라 시대 골품제의 영향으로 6두품 이하 사람들은 비슷한 불만을 표출하며 당시 외국인 관료도 뽑던 당나라로 많이들 넘어갔다.[66] 아직도 카스트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흔하다지만 인도의 경제가 고속으로 발전하면서 카스트 대신 능력별로 사람을 쓰는 일이 늘었다 보니 "재력이나 스펙이 달리면 카스트도 소용 없다"는 푸념이 인도인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외국에서 들어오는 정보의 습득이 빨라서 세속주의적인 경향이 큰 대도시에서는 극단적인 힌두교 근본주의자가 아닌 이상 카스트를 가지고 사람 차별하는 것 자체가 몰상식한 짓으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상대의 카스트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아예 카스트 따위는 장식으로 여긴다. 그래서 요즘 인도에선 시골에서나 카스트 운운하는 상황이다.[67] 실제로 수드라, 불가촉천민 출신 정치인도 있고, 람 나트 코빈드 현 인도 대통령도 불가촉천민 출신이다.[68] 작중에 자세한 묘사는 나온 바 없지만 신분을 감춰야 한다든가, 그곳에 함부로 들어가면 살아남지 못한다든가, 숲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난 인간은 (설령 그가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해도)숲의 가장자리에서 삐끼로 살아야 한다든가, 자기네들의 독자 규칙으로 움직이고 이를 이상하게 여기면 반발하거나 차별을 받는 모습 등을 통해 이들이 부라쿠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최종권에서도 숲의 가장자리에서 카이를 숲의 가장자리 출신이라느 것을 이유로 옭아매려고 하는 모습이나 국제 범죄자들이 숲의 가장자리와 손을 잡고 카이를 협박하려 드는 모습을 봤을 때 거의 확실한 듯.[69] 하지만 이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일이다. 부락 출신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 자체는 명목상 가능했으나 대부분의 부라쿠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해 문맹율이 높고, 현재까지도 부라쿠민 출신 학생들의 저학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부유한 부락 출신이라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해도 취업 차별로 인해 병원 취직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라쿠민이 의사가 되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미 의사가 된 부라쿠민인데도 그저 부라쿠민이란 이유로 청소부 취급하며 차별하는 작자들인데, 실력이 좋다고 별로 인정해줄 거 같지는 않다[70] 실제 사례로 재일 한국인 음악가 양방언의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이주 후 외과의사가 되었고, 자녀 5명을 모두 약사 또는 의사가 되도록 키웠다. 그러나 양방언은 의사가 되었다가 이것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느껴 병원에서 뛰쳐나가 음악가가 되었고, 그 후 아버지와의 사이가 서먹해졌다고 한다.[71] 하지만 결국 이들 중 적잖은 수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한국인, 일본인을 모두 상대한다.[7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망자와 현 생존자.[73] 세계 최대의 지퍼 제작회사다.[74] 물론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에 의해 일부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다.[75] 프랑스 대혁명을 보아도 혁명 세력에 귀족 출신과 그에 준하는 부유층 시민들이 대거 가담한 바 있고, 이들이 혁명을 주도하였다.[76] 염상섭의 소설인 만세전에서는 일본인 야쿠자 하나가 같은 일본인인 가난뱅이 농부에게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인신매매를 하자고 꼬드기는 대목이 나온다. 정부건 민간인이건 할 것 없이 한국인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데 자국의 하층민을 포섭하여 이용하는 일이 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77] 끼니를 거를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는데도 귀족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생업에 종사할 수 없던 이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메리카건 북아프리카건 어딜 가든지 한 탕 벌어 챙기겠다는 욕심에 현지인에 대해 학살과 약탈, 착취를 일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