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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미쿠니 렌타로 [ruby(三國, ruby=みくに)] [ruby(連太郎, ruby=れんたろう)]|Rentaro Mikuni | |
본명 | 사토 마사오 ([ruby(佐藤, ruby=さとう)] [ruby(政雄, ruby=まさお)]) |
출생 | 1923년 1월 20일 |
군마현 오타시[1] | |
사망 | 2013년 4월 14일 (향년 90세) |
도쿄도 이나기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8cm, AB형 |
직업 | 배우, 영화감독 |
활동 기간 | 1950년 – 2013년 |
가족 | 아들 사토 코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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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본의 배우, 영화감독
2. 데뷔 전 이야기
2.1. 유소년기
어머니는 해군 집안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미쿠니를 임신한 몸으로 쫓겨났다. 이후에 부라쿠민 출신 전기공을 만나 결혼, 미쿠니를 낳게 된다. 출생부터 사생아였고 양아버지가 부라쿠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갖은 차별은 다 받고 살았다. 살던 마을에서 무언가 하나 없어지면 제일먼저 불려가서 조리돌림을 당하였다고 한다. 원래 소학교만 졸업하고 노동자로 일하려고 하였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중학교로 진학, 결국 중간에 자퇴하고 가출을 단행하였다. 그 이후로 경찰에 잡혀 여러번 집으로 송환되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집을 나가는 일을 반복했다. 20세 전까지 중국 칭다오와 식민지 치하의 부산을 포함한 방방곡곡을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떠돌았다고 한다.2.2. 군복무
그는 징병을 기피하다 미수에 그쳐 군복무를 했다고 한다. 미쿠니 렌타로가 1923년생이며 1945년의 일본에서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징병제가 폐지된 것을 감안하면 40년대 초반에 당시에 미쿠니 렌타로는 징집연령인지라 징병검사를 피할 수 없었다.그는 징병검사에서 갑종합격으로 상비병 판정을 받은지 몇달후 일본군 소집영장이 날라오자 그는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 한반도를 거쳐서 중국대륙으로 도망을 가기 위해서 열차에 몰래 탄 다음 중간에 내려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살아남고 싶으며 이것이 마지막 불효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는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한 곳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는 형무소로 가지 않고 군복무를 했다. 당시 일본 병역법에서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도망이나 신체를 손상하거나 병을 작사하는 등의 사위행위를 하면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고, 현역병으로 입영해야 하는 자가 정당한 사유없이 입영날짜에 입대하지 않은지 10일을 넘었을 경우 6개월 이하의 금고형(전시에는 5일을 넘었을때 1년 이하의 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당시 일본의 병역기피자에게 실제로 이런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미쿠니 렌타로가 이런 케이스로 그는 당시 일본의 병역법 규정대로라면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지만 미쿠니 렌타로는 그런 규정을 적용받지 않고 그대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군복무기간 중 중국으로 가기 전에 그의 어머니가 면회를 와 전쟁터에 가줘야 우리 일가가 살아남는다고 했는데, 그때 왜 잡혔고 형무소로 가지 않고 군복무를 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전쟁터로 가던 중, 몸을 망치고 열병에 걸려 의식불명상태에 빠져 죽을뻔했다. 군대에서는 꾀병을 부려 훈련에 빠지거나, 인근의 양조 공장에 파견을 나가는 등으로 전투를 회피했다. 이후 병기근무과에서 복무하다 중국에서 패전으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2.3. 패전 후
일본군 복무 중 패전으로 수용소로 보내진 후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을 했을 경우에는 귀국을 빨리 할 수 있어서 자신의 성씨와 같은 여자와 위장결혼 후 일본으로 귀국했다.3. 데뷔 이후
버스 정비공을 비롯해 다양한 일을 전전하다가 사진을 찍었던 사진관 주인이 영화사 오디션에 응모했고, 길거리 스카웃으로 발탁되어 1951년 영화 선마(善魔)로 데뷔, 캐릭터의 이름이었던 미쿠니 렌타로를 예명으로 쓰게된다.여성 편력이 있었으며 평생 4번의 결혼을 했는데 그 중 세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사토 코이치는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가정사가 난잡했던지라 사토 코이치는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았던 걸로 유명하다. 세번째 부인과는 미쿠니 본인의 가출로 결혼 생활이 끝나버렸고, 별로 자주 만나지도 않았는지 1996년 맛의 달인 실사판에 같이 출연했을때 요비스테 없이 성+호칭으로 딱딱 부른데다 [3] 기자 회견장에서조차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될 정도였다. 2000년대 후반에야 화해했다고. 때문에 일본 현지에서 사이 안 좋은 부모자식 연예인 하면 항상 거론된다.
3.1. 출연작품[4]
- 선마 - 1951년 데뷔작. 미쿠니 렌타로라는 이름은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다.
- 전국무뢰 - 1952년
- 부부 - 1953년 (나루세 미키오 감독 작품)
- 아내 - 1953년 (나루세 미키오 감독 작품)
- 미야모토 무사시 - 1954년
- 버마의 하프 - 1956년
- 할복 - 1962년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 작품)
- 괴담 - 1965년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 작품)
- 기아해협 - 1965년
- 신들의 깊은 욕망 - 1968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작품)
- 맨발의 겐, 이누가미 일족 - 1976년
- 핫코다산 - 1977년
- 복수는 나의 것 - 1979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작품)
- 세일러복과 기관총 - 1981년
- 신란, 하얀길 - 1987년 / 본인이 각본과 감독을 맡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Jury Prize) 수상
- 낚시 바보 일지 - 1988년 ~ 2009년
- 아들 - 1991년
- 세 번째 건너는 해협 - 1995년 /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자로 분해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남우 주연상 수상
- 내 어머니의 연대기 - 2012년 유작
4. 사망
2012년 봄부터 도쿄 근교의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가 나왔고 같은 해 9월 13일호 주간문춘에서는 양로원에서 살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그리고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오전 9시 18분, 도쿄도 이나기시의 병원에서 급성호흡부전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90세. 유언으로 "계명은 필요 없고 미쿠니 렌타로 그대로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5. 여담
- 짱구에 나오는 훈이와 이름이 똑같다.
- 1996년에 개최된 대종상 영화제에 참석을 했었다. 여기서 한국 영화계의 길이남을 흑역사인 애니깽 사태를 직접 눈으로 바라보고 말도 안 되는 수상 결과에 납득하지 못하는 인터뷰를 하면서 "이것이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입니까?" 라고 크게 놀란 적이 있었다.
- 아들 사토 코이치 또한 일본을 대표하는 대배우이다.
[1] 출신지는 시즈오카현 가모군으로 양아버지의 고향이자 생후 7개월 때 일가족이 이사갔다.[2] 말년의 모습, 옆에 붙어있는 것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여 증서다.[3] 한마디로 서로 가족 취급하지 않고 남이라고 선언한거나 다름없다. 우습게도 사토 코이치랑 같이 공연한다는 아이디어는 미쿠니 렌타로가 먼저 제안했다고.[4] 대표작 위주[5] 1위는 미후네 토시로, 2위는 모리 마사유키, 3위는 이치카와 라이조, 공동 4위는 타카쿠라 켄, 카츠 신타로, 공동 6위는 마츠다 유사쿠, 하라다 요시오, 9위는 미쿠니 렌타로, 10위는 시무라 타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