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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d002d><colcolor=#fff> 시청 소재지 | 니조오지미나미1초 1-1 | |||||
도도부현 | 나라현 | |||||
면적 | 276.94km² | |||||
인구 | 348,797명[1] | |||||
인구밀도 | 1,259명/km² | |||||
시장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나카가와 모토노부 (仲川元庸, 4선) | ||||
시의회 (37석) | [[자유민주당(일본)| 자민 ]] | 10석 | ||||
[[공명당| 공명 ]] | 7석 | |||||
[[일본공산당| 공산 ]] | 6석 | |||||
''' 나라 ''' | 5석 | |||||
[[일본유신회| 유신 ]] | 4석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6석 | |||||
중의원 (2/465석) | [[입헌민주당| 입헌 ]] | 1석 | ||||
[[자유민주당(일본)| 자민 ]] | 1석 | |||||
상징 | <colbgcolor=#ad002d><colcolor=#fff> 시화 | 나라노야에벚꽃 | ||||
시목 | 돌가시나무 | |||||
시조 | 휘파람새 | |||||
지역번호 | 0742 | |||||
시정촌코드 | 2920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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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나라현의 현청 소재지. 인구는 약 35만 명이다.오사카시에서 동쪽, 교토시에서 남쪽으로 각각 30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2. 경제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다. 나라 시대에 일본의 수도였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중요한 도시로 남아 불교 예술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한국인 관광객도 간사이 여행 중 많이 찾고, 일본 내에서도 수학여행 인기 목적지 중 하나다. 관광업 외엔 시내에 이렇다 할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오사카와 교토 양쪽의 베드타운으로서도 기능하고 있다.관광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대도시 겸 대형 관광지가 2개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숙박업이나 쇼핑 등 관광업종이 발달하지 못한 편이다. 더 관광수요가 큰 두 도시에서 당일치기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밥 한 끼 안 사먹고 나라 공원 주변만 훌쩍 둘러보고 돌아가는 관광객도 많다. 명색이 일본의 역사 수도라는 명소가 숙박업 객실수로 전국 도도부현[2] 중 최하위다.
3. 역사
이미 4세기와 5세기에 걸치는 거대한 고분군이 남아 있어 이전부터 야마토 조정의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710년 헤이조쿄(平城京)라는 도읍이 조성되어 784년 나가오카쿄로 천도할 때까지 74년 동안[3] 나라 시대 일본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당시 활발하게 당과 발해, 신라를 오가던 견당사 및 견신라사 등을 통해 전래된 당풍(唐風) 문화와 불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고 이 시기의 문화를 덴표 문화(天平文化)[4]라고 한다.
나라에 수도가 있었던 시대를 가리켜 일본사에서 나라 시대라고 부르는데, 줄곧 헤이죠쿄에만 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각주에서 상술했듯 740년에서 745년 사이에 쇼무 덴노(聖武天皇)가 구니노쿄(恭仁京)[5], 나니와노미야(難波京)[6], 시가라키노쿄(紫香楽宮)[7]로 옮겨다녔던 적이 있으며 이 시절들을 뭉뚱그려서 나라 시대라고 부른다. 나라의 헤이죠쿄로 수도를 옮기기 전의 수도인 후지와라쿄(藤原京)와 헤이죠쿄를 비교해보면 당풍 문화의 영향이 크게 두드러지는데,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 도로를 놓고 도시를 건설하면서 왕궁이 수도 한복판에 위치했던 후지와라쿄와 달리 헤이죠쿄는 격자형 도로로 이루어진 도시 북쪽에 왕궁이 위치해 당의 장안성과 더욱 비슷한 구조가 되었다. 이는 후지와라쿄를 지을 당시에는 일본이 당에 사신을 보내지 않아서[8] 당의 수도 장안성이 어떤 구조인지 제대로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주례(周禮) 고공기에 써진 고대 중국의 도시 구조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라서 지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간무 덴노가 나가오카를 거쳐 헤이안쿄(교토)로 천도한 뒤에는 국도로서의 기능을 잃었기는 하지만 그 뒤로도 야쿠시지(藥師寺) ·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 고후쿠지(興福寺) · 도다이지(東大寺) 등이 남아 문전도시로 번영하였다. 불교의 본산으로서 나라에는 여섯 개의 불교 종파가[9] 존재했고,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교토에 대칭되어 남도(南都)라 불렸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국교였으며[10] 한국의 호국불교 사상과 같은 진호국가(鎭護國家) 사상이 존재했기에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로써 불교는 엄청난 위세와 권위를 누렸고[11] 이에 힘입어 불어난 장원과 재산을 지킬 목적으로 소헤이들이 발호하게 된다. 특히 고후쿠지 승병들은 헤이안 시대 나라호시(奈良法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야마호우시(山法師)라 불린 히에이 산 엔랴쿠지 승병들과 함께 악명을 떨쳤다. 쇼무 덴노가 직접 발원해 지은 도다이지와 함께, 고후쿠지의 경우 후지와라 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써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죠쿄로 옮길 때 같이 옮겨지은 것으로 후지와라 셋칸케와도 연줄이 닿아 있어서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겐페이 전쟁이 벌어진 12세기 말 전국에서 겐지 세력이 타이라노 키요모리 및 헤이케 정권에 반대하며 봉기하는 와중에 지쇼 4년(1181년) 음력 12월 나라의 승병들이 다시금 현지에서 겐지들의 거병을 도와 헤이케 정권에 도전하려다 다이라노 시게히라[12]에 의해 승병들의 거점이었던 동대사와 흥복사가 불타버린다.[13] 이 와중에 불길이 나라 전체로 번져서 시가지가 소실되었다. 일본사에서 말하는 남도 소각(南都焼き討ち, 난토 야키우치)이다. 다이라노 키요모리는 불타 잿더미가 된 나라의 사찰을 다시 짓지 못하게 했지만 국가를 수호한다는 불교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불교의 중심 사찰 대접을 받던 절들을 태워버린 것에 당연히 세간의 반발은 혹심했고[14] 키요모리가 3개월만에 병사한 뒤 헤이케를 이끌게 된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불교 세력을 달래기 위해 나라의 절들을 다시 짓는 것을 허용했지만, 헤이케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
13세기에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지고 쇼군이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자신이 헤이케와 달리 불교를 보호할 것임을 어필하고자, 나아가 불교계를 회유해 아군으로 끌어들이고자 적극적으로 나라의 사찰 재건을 지원했고 이때에 나라의 여러 사찰들이 재건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나라 부교(奈良奉行)가 설치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직접지배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현청소재지가 되고 폐불훼석의 칼바람도 혹독하게 맞았는데, 고후쿠지 5중탑의 경우 25엔에 팔려서 하마터면 통째로 헐려 땔감이 될 뻔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비교적 개발이 덜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덕에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도시 대부분과 달리 간헐적인 폭격 정도를 제외하면 시내를 전소시키는 대공습을 면하였고 고대의 목조건축물이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다.
나라는 오늘날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바뀌었으며, 서부는 오사카 도시권 안의 주택 위성도시로 변하고 있다. 나라 공원에서는 꽃사슴을 1천 마리 이상 공원에 풀어놓아 기르며 시의 관광명소가 거의 공원 안에 산재해 있다. 나라에서는 사슴이 신의 사자로 여겨지는데, 고사기(古事記)에 오쿠니누시가 니니기에게 나라를 넘긴 신화에서 아마테라스가 오쿠니누시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요구하는데 보낼 사자로 아메노오하바리(アメノオハバリ)를 선택하고, 사슴신 아메노카쿠(天迦久)를 시켜서 아메노오하바리에게 사신으로 오쿠니누시에게 좀 갔다오라고 전하게 했는데 이때 아메노오하바리는 자신이 가지 않고 대신 아들인 타케미카즈치 신을 보내 오쿠니누시에게 "지상은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다스려야 할 곳이니까 니가 알아서 내놓으라"고 선포해 오쿠니누시로부터 나라를 넘겨받게 된다. 타케미카즈치는 카스가 산으로 내려올 때 흰 사슴을 타고 있었다고 하며, 이때부터 사슴을 신의 사자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15]
4. 지명 유래
'나라(奈良)'라는 지명은 뜻을 알기가 어렵다. 한자 뜻을 풀이하면 '어찌 좋다'는 이상한 의미가 된다. 이런 식의 지명은 한자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차자 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실제로 문헌에는 奈良 이외에도 那良, 奈羅 등 '나라'라고 발음되는 여러 가지 한자 표기가 존재하며, '나라'가 무슨 뜻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5. 지리
나라현의 북서쪽에 위치하여 교토부 경계와는 바로 인접하여 있다. 나라현 전체가 통으로 하나의 분지로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시 또한 동서로 산지가 펼쳐진다.시가지는 가운데의 헤이조 유적을 중심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동쪽이 관광객이 많이 오가는 옛 나라에 해당하고, 서쪽의 야마토사이다이지역을 중심으로 한 니시노쿄(西ノ京) 일대는 1951~55년에 편입된 지역으로 원래의 나라시와는 군단위로 갈리던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서쪽 지역은 원래의 나라 도심 못지 않게 오사카 쪽에 교류가 잦은 지역이 되어 있다.
일본의 고도(古都)답게 일본 내에서 지진에서 안전한 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비교적 지진이 적은 간사이 내에서도 안전한 편인데 단층발 지진에 있어서는 간사이 일대에서 가장 활발한 단층군인 롯코-아와지섬 단층대 및 아리마-타카츠키 단층대[16]의 피해 범위에서 다소 벗어나 있어 지진이 적기로 유명한 교토보다도 더욱 안전하다. 이 단층대에서 다소 떨어진 오사카시와 비교해도 매립 평야가 많은 특성상 호에이 대지진 때와 같이 난카이 해곡 대지진 피해에서 위험한 오사카시보다 지반이 단단한 나라 분지에 위치해 있어 더욱 안전하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 내에서도 오카야마 다음으로 지진에서 안전한 지역 중 하나로 손꼽힌다.[17] 실제로 교토의 경우 니시혼간지, 도지와 같이 역사적으로 대지진의 피해를 입은 후 복구한 문화재가 꽤나 존재하는 반면 도다이지, 야쿠시지 등 나라의 문화재들은 지진으로 인한 재건 기록이 많지 않아 천 년이 넘은 목조 문화재가 다수 남아있다.[18]
6.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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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문화유산 | ||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 기념물 法隆寺地域の仏教建造物 | 1993년 히메지 성 姫路城 | 1994년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 古都京都の文化財(京都市、宇治市、大津市) | |
1995년 시라카와고와 고카야마 역사 마을 白川郷・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 1996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원폭 돔) 原爆ドーム | 1996년 이쓰쿠시마 신사 厳島神社 | |
1998년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古都奈良の文化財 | 1999년 닛코의 신사와 사찰 日光の社寺 | 2000년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 |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 |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 | 2011년 히라이즈미 : 불교 정토 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정원, 고고 유적군 平泉 - 仏国土(浄土)を表す 建築 ・ 庭園及び考古学的遺跡群 | |
2013년 후지 산 :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富士山 - 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 2014년 토미오카 제사 공장과 관련 유적지 富岡製糸場と絹産業遺産群 |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 |
2016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 - 近代建築運動への顕著な貢献 | 2017년 신이 사는 섬 무나카타 오키노섬과 관련 유산군 「神宿る島」宗像・沖ノ島と関連遺産群 | 2018년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산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 |
2019년 모즈·후루이치 고분군 : 고대 일본의 무덤 百舌鳥・古市古墳群 - 古代日本の墳墓群 | 2021년 홋카이도 · 북도호쿠의 조몬 유적군 北海道・北東北の縄文遺跡群 | 2024년 사도 광산 佐渡金山 | |
자연유산 | |||
1993년 야쿠섬 屋久島 | 1993년 시라카미 산지 白神山地 | 2005년 시레토코 知床 | |
2011년 오가사와라 제도 小笠原諸島 | 2021년 아마미 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나와섬 북부와 이리오모테 奄美大島、徳之島、沖縄島北部及び西表島 |
동쪽 구릉지에는 나라 공원을 중심으로 도다이지, 고후쿠지, 가스가타이샤, 쇼소인 등이 있고, 서쪽 교외의 니시노쿄에는 사이다이지, 야쿠시지, 도쇼다이지, 평성궁 등이 있다. 이 중 일부가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이라는 유산군에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예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고전 행사가 많고, 칠기·먹·붓 등의 전통 공예품의 생산도 활발하다.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경주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고 있는데, 실제로 매체에서 로컬라이징되는 것과 달리 경주시는 천여년 전에 수도였던 점이나 도시에 널린 고분, 오늘날 30만 정도 되는 인구 등, 교토보다는 나라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19]
사찰이 볼거리라는 점에서 교토와 비슷하지만, 여러모로 교토와 분위기 차이가 크다. 나라가 더 과거의 수도였기 때문에 교토가 남아있는 게 더 많아 볼거리 자체는 교토가 더 많다고 평가받지만, 볼거리가 사방에 퍼져있고 시내교통도 불편한[20] 교토와 달리 나라는 중요 볼거리가 나라 공원 근처에 콤팩트하게 모여있기 때문에 일정이 짧다면 교토보다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도다이지 등 세계유산이 있는 나라 공원 및 주변 도로에 꽃사슴들이 바글바글하다.[21] 자세한 내용은 나라 공원 문서 참조.
나라시 도로교통과에서 100엔 버스#를 운영중이므로 관광에 참고하자.
7. 교통
나라시의 철도역 | ||
철도회사 | 노선 | 역 |
JR 서일본 | 나라선 야마토지선 | 나라야마역 - 나라역 |
사쿠라이선 | 나라역 - 쿄바테역 - 오비토케역 | |
킨키 일본 철도 | 나라선 | 토미오역 - 가쿠엔마에역 - 아야메이케역 - 야마토사이다이지역 - 신오미야역 - 킨테츠나라역 |
교토선 | 타카노하라역 - 헤이죠역 - 야마토사이다이지역 | |
카시하라선 | 야마토사이다이지역 - 아마가츠지역 - 니시노쿄역 | |
케이한나선 | 갓켄나라토미가오카역 | |
※ 굵게 표시 된 역은 환승이 가능한, 사실상 같은 곳이다. |
간사이 게이한신 광역권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오사카, 교토와는 나라선, 간사이 본선(야마토지선), 많은 근교철도 노선이 연결되어 있다. 주요 역은 JR 서일본의 나라역과 긴키 일본 철도(긴테쓰) 긴테쓰나라역과 야마토사이다이지역이 있다. 다만 지역간 노선은 JR그룹은 없고, 긴테쓰 특급열차가 미에현 이세시 방향으로 운행하는 정도이다. 2040년대에는 주오 신칸센 중간역이 나라시내에 들어설 예정이다.[22]
간선도로는 제2한나도로(E92), 게이나와자동차도(E24)와 함께 24번 국도, 169번 국도가 경유한다. 철도와 마찬가지로 장거리 간선도로를 타려면 대체로 오사카나 교토를 거쳐야 한다.
8. 센토군
자세한 내용은 센토군 문서 참고하십시오.나라를 대표하는 마스코트 캐릭터.
9. 여담
- 일본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지역드립으로 오사카 사람들은 솔직하지만 거칠고, 교토 사람들은 친절하지만 교활한데 비해 나라 사람들은 겉도 속도 시크하다는 이야기가 있다.간사이 사람들의 특징을 불상에 비유한 짤방
10. 출신 인물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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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계인구 2024년 2월 1일 기준[2] 한국의 광역지자체 격[3] 다만 740~745년 동안 천황이 헤이조쿄를 떠난 적이 있으며 784년 나가오카쿄 천도 이후인 794년 헤이안쿄(교토)로 수도를 옮기는데, 일본사에서는 교토로 천도한 794년을 헤이안 시대의 시작으로 잡고 천황가가 나라를 잠시 떠난 740~745년과 나가오카쿄에 도읍이 있었던 784~794년의 시기도 편의상 나라 시대로 간주한다.[4] 덴표(天平) 연호는 729년에 처음 쓰이기 시작했는데, 767년에 진고게이운(神護景雲)으로 고칠 때까지 덴표간포(天平感寶, 749년), 덴표쇼호(天平勝寶, 749-757년), 덴표호지天平寶字(757-765년), 덴표진고(天平神護, 765-767년) 등으로 글자를 덧붙여가면서 '덴표' 연호를 계속 썼다.[5] 지금의 일본 교토 부 기츠가와 시(木津川市) 가모 지구.[6] 지금의 오사카. 오사카는 고토쿠 덴노 시절 잠시 수도였던 적이 있다.[7] 지금의 시가현(滋賀県) 코우가시(甲賀市) 신라쿠(信楽).[8]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를 도우러 왔던 왜의 수군이 나당 연합군 수군에 궤멸당했다.[9] 삼론종(三論宗), 성실종(成実宗), 법상종(法相宗), 구사종(倶舎宗), 화엄종(華厳宗), 율종(律宗). 이들을 난토 6종(南都六宗)이라고 하는데, 종교 종파라기보다는 학파로써의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한 절에서 혹은 한 승려가 두 개 이상의 종파의 교리를 겸해서 익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10] 다만 기독교 등의 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들과는 달리 일본은 불교를 국가의 기간 종교로 존숭했던 어떤 시절에도 불교 이외의 도교나 신토 같은 토속 종교를 탄압하거나 금지하는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11] 신토는 진작에 불교에 거의 흡수되어 버리다시피 했다.[12] 다이라노 키요모리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13] 다만 오다 노부나가가 승병 몰살을 위해 작정하고 히에이 산에 불을 질렀던 것과는 달리 시게히라는 일부러 작정하고 불을 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대사 대불전을 태워버린 악명이 전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경우 정말 그가 동대사 대불전을 태웠는지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도다이지 항목 참조.[14]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키요모리가 죽기 전에 꿈에 지옥에서 키요모리를 데리러 온 사자를 보았는데, 키요모리가 수레를 가리키며 거기에 적힌 '無'자의 뜻을 묻자 지옥 사자가 "나라의 비로자나불을 태워 없앤 죄로 너를 무간지옥으로 끌고 갈 수레라는 뜻이다"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15] 타케미카즈치 신은 카스가 다이샤에서 모시는 신인 동시에 후지와라 씨의 수호신으로 섬겨졌다.[16] 효고현 아와지 섬에서 시작해 고베시와 오사카부 북부를 지나 교토시 서부까지 분포하는 이 두 단층대는 1596년 교토 일대에서 큰 피해를 입힌 게이초 후시미 지진과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 그리고 지난 2018년에 발생한 오사카 지진의 진원이다.[17] 참고로 오카야마는 난카이 해곡의 직접적 피해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데다 단층도 덜 발달해 나라보다도 지진 피해가 역사적으로 훨씬 적고 일본 내에서도 압도적으로 안전한 현으로 유명하다.[18] 다만 여느 목조 문화재들이 그렇듯 지진에 의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문화재가 적은 것이지 다른 이유로 발생한 화재나 태풍 등으로 인한 피해는 줄곧 있어왔으며 역사적으로 지진 피해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참고로 교토보다 나라가 대체로 지진이 더 적은 것은 맞지만 난카이 해곡과 더 가깝기 때문에 난카이 대지진의 피해는 일반적으로 나라 쪽이 더 크다.[19] 오히려 한국에서 교토와 비슷한 곳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가회동, 삼청동, 사직동 등에 가깝다.[20] 버스나 택시를 타야 갈 수 있는 곳이 많고, 교토는 교통체증도 심한 편이다.[21] 2021년 기준으로 약 1,200마리[22] 2020년 현재 미정이나, 나라야마역으로 예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