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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8 20:49:53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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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 기념물
法隆寺地域の仏教建造物
1993년

히메지 성
姫路城
1994년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
古都京都の文化財(京都市、宇治市、大津市)
1995년

시라카와고고카야마
역사 마을
白川郷・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1996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원폭 돔)

原爆ドーム
1996년

이쓰쿠시마 신사
厳島神社
1998년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古都奈良の文化財
1999년

닛코의 신사와 사찰
日光の社寺
2000년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
2011년

히라이즈미
: 불교 정토 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정원, 고고 유적군

平泉 - 仏国土(浄土)を表す
建築 ・ 庭園及び考古学的遺跡群
2013년

후지 산
: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富士山 - 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2014년

토미오카 제사 공장과 관련 유적지
富岡製糸場と絹産業遺産群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2016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
- 近代建築運動への顕著な貢献
2017년

신이 사는 섬
무나카타 오키노시마와 관련 유산군

「神宿る島」宗像・沖ノ島と関連遺産群
2018년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산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2019년

모즈·후루이치 고분군
: 고대 일본의 무덤
百舌鳥・古市古墳群 - 古代日本の墳墓群
2021년

홋카이도 · 북도호쿠의 조몬 유적군
北海道・北東北の縄文遺跡群
자연유산
1993년

야쿠시마
屋久島
1993년

시라카미 산지
白神山地
2005년

시레토코
知床
2011년

오가사와라 제도
小笠原諸島
2021년

아마미 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나와섬 북부와 이리오모테
奄美大島、徳之島、沖縄島北部及び西表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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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영어 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
일본어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프랑스어 Sites de la révolution industrielle Meiji au Japon :
sidérurgie, construction navale et extraction houillère
국가·위치 일본 가고시마현, 나가사키현, 후쿠오카현, 구마모토현
사가현, 야마구치현, 시즈오카현, 이와테현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5년
등재기준 (ii)[1], (iv)[2]
지정번호 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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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시대 일본이 이룩한 산업 혁명의 유적을 묶어 지정한 세계유산 항목. 무려 8개 현에 걸쳐 있다. 항목 부제는 철강, 조선, 탄광 산업(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

2009년 잠정목록 등재 당시에는 '규슈야마구치의 근대화산업유산군'이었다. 실제로 규슈와 야마구치에 대부분의 유적이 몰려 있고 동일본의 시즈오카이와테에는 각각 한 군데씩 뿐이다. 세계유산 항목 이름만 보면 모두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유산들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야마구치의 하기 반사로나 가고시마의 구 집성관은 막부 말기에 세워진 것이다. 두 지역이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유신을 주도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 그런데도 굳이 항목명에서 메이지를 강조한 것은 메이지 유신의 임팩트를 고려한 듯.

이 항목은 1869년의 메이지 덴노 즉위 이전과 메이지 20년인 1887년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일본이 서구의 것들을 받아들이던 시기임은 같지만 중간의 근 20년간의 유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메이지 후기의 유적들은 국가 주도의 중공업 발전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후쿠오카의 관영 야하타제철소를 비롯, 각각 미쓰이미쓰비시가 운영했던 미이케 탄광과 나가사키조선소가 그것.

이 가운데 여러 군데에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된 조선인이 일했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의 씨앗이 되었다. 해당 장소에는 표시.

2. 등재를 둘러싼 논란

일본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대상 중 몇몇 시설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의 강제 징용 사실이 있었다는 문제로 인해 등재를 놓고 한국 정부일본 정부 간의 마찰이 있었다.

강제 징용 사실은 누락한 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던 일본 정부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이 강제 징용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문헌에 반영하지 않으면 등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로 인해 등재 결정이 하루 연기되기도 했다. 결국 막바지 양국 정부간에 극적인 합의가 이뤄져 일본 측에서 강제 징용 사실을 인정하고 등재가 결정.

한국측과 일본측의 타결협상안을 보면 강제노동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나, 강제노역이 포함된 사실을 (were 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 수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강제노역을 시킨 주체를 누구인지는 표기하진 않았으며. 그 주체가 당시 일본 정부에 있다고는 볼 수 있다고는 하나 확정적으로 표기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협상안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은 하되,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하여 여러모로 강제성이 거의 없다시피한 타결이라 후에 일본이 태도변화가 있더라도 유네스코의 이행권고만 있을 뿐 강제성이 없다.

일단은 이번 사례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 징용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번째 사례로 볼 수 있다. 단순한 사실 인정 뿐만 아니라 2017년 12월까지 이러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후속조치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보고서로 작성하여 제출하게끔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이 양국 과거사 문제의 해결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가 주목되고 있다.

다만 이 결과에 대해서 한일 양국 국민들은 모두 불만인 모양. 한국인 입장에서는 같은 역사를 다루더라도 너무나 다른 해석을 하는 일본의 몇몇 사례 때문에 아예 등재 자체를 못하게 막거나 확실한 강제력을 가지게 되도록 표기해야 했었다는 의견이 대다수고, 일본에서는 타결 난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에 굴복한 모양새로 보였기 때문에 역시 못마땅하게 받아들이고 있다.[3]

하지만 일본 정부는 2015년 하시마(군함도)·다카시마·미이케 등 탄광과 야하타 제철소 등 메이지 유신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리면서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알리는 정보센터 설치 등 후속 조치를 약속했지만, 지금까지 현재까지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산업혁명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약속한 강제징용 사실을 알리는 후속 조치 이행에 대해 “충실히 지켜보고 있다”고 입장을 밝힌 상황이다. 日, 세계유산 내 강제징용 표시 안해…유네스코 “지켜보고 있다”

모두 23곳의 유적이 8개 현에 위치해 있다.

3. 등재 지역

3.1.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3.2.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3.3. 후쿠오카현

3.3.1. 기타큐슈시

3.3.2. 오무타시, 아라오시

3.4. 구마모토현 우키시

3.5. 사가현 사가시

3.6. 야마구치현 하기시

3.7.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3.8. 이와테현 카마이시시

4. 관련 문서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다만 양국이 합의하도록 지시한 것은 위원회의 결정이고, 한국과 일본이 강경한 반대/찬성을 외쳤다면 사안이 표결로 넘어가버려 결국 위원회의 중재안을 차버린 것이 되기에 외교면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4] 약 4,7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5] 약 40,0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6] 약 6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7] 약 9,2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