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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A0C6><colcolor=#fff> 시청 소재지 | 사쿠라초 2-22 | |||||
도도부현 | 나가사키현 | |||||
면적 | 405.86㎢ | |||||
인구 | 389,895명[1] | |||||
인구밀도 | 961명/㎢ | |||||
시장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스즈키 사로 (鈴木史朗) | ||||
시의회 (40석) | [[자유민주당(일본)| 자민 ]] | 18석 | ||||
[[공명당| 공명 ]] | 6석 | |||||
[[국민민주당(2020년)| 국민 ]] | 6석 | |||||
[[일본공산당| 공산 ]] | 3석 | |||||
[[사회민주당(일본)| 사민 ]] | 2석 | |||||
[[입헌민주당| 입헌 ]] | 1석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석 | |||||
중의원 | [[국민민주당(2020년)| 국민 ]] | 1석 | ||||
상징 | <colbgcolor=#00A0C6><colcolor=#fff> 시화 | 수국 | ||||
시목 | 오구나무 | |||||
시조 | 비둘기 | |||||
지역번호 | 095-8 | |||||
시정촌코드 | 422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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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에도 시대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양과 중국과의 교역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항구 도시였다. 따라서 일본에서 서양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된 곳으로 이른 시기부터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1920년 기준 일본 내 7위의 인구를 갖는 대도시였다.서양과의 교류가 잦아 근세에 포르투갈, 스페인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활동하였고, 덕분에 주로 탄압의 대상이였던 일본 가톨릭의 성지가 되었다. 규슈의 경우 오토모 소린, 아리마 하루노부, 고니시 유키나가 등 많은 다이묘들이 가톨릭 신자였을 정도. 나가사키는 일본에 3곳 있는 대교구 중 1곳으로[2] 평균 가톨릭 신자 비율이 1%가 안되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 비율이 무려 4.5%로 가장 높은 곳이다. 신교인 개신교도의 비율은 가톨릭만큼은 아니고 상당히 적은 편이며 다른 지역과 비슷하다. 물론 일본에서는 신도가 아니면 기독교의 종파를 딱히 구분해서 보지는 않는다. 부속 도서 지역의 경우도 예외. 나가사키 본토나 본토에 거의 붙어 있는 섬 일부가 아니면 역시 다른 지역과 큰 차이가 없다. 개신교 다수 지역인 오키나와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문화권이라서 예외라 볼 수 없다.
가톨릭 성지도 많아 나가사키역 근처 니시자카 언덕에 있는 일본 26위 성인 순교성지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초 탄압 때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총 26명이 순교한 곳. 당사자들은 예수가 죽은 골고타 언덕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곳에서 죽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쿠레키리시탄이 드러난 계기가 된 오우라 천주당, 메이지 유신 후 지어졌지만 원자폭탄 투하로 피해를 입었던 우라카미 대성당 등이 있다. 이곳들은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가사키 현 동쪽에 위치한 운젠 시내 소재의 '운젠 지옥[3]'이라고 불리는 유황온천 지대에서도 신자들에 대한 고문과 처형[4]이 이루어져,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을 기리는 운젠 지옥 순교지 기념비가 있다.
해당 지역의 풍습에 대한 것이 실제 나가사키시 고토지마를 배경으로 하는 바라카몬에서 자세히 나오는데, 성묘를 하는 시점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던가, 묘의 글씨 색깔이 노란색이라는 것 등은 해당 지역의 특징이라고 한다.
3. 인구 추이
나가사키시 인구추이 [1995-2020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 <colbgcolor=#fff,#111> 1995년 | 487,088명 |
1997년 4월 1일, 중핵시로 이행 | ||
2000년 | 470,000명 | |
2005년 1월 4일, 주변 6개정 편입[5] | ||
2005년 | 455,024명 | |
2006년 1월 4일, 긴카이정 편입 | ||
2010년 | 443,689명 | |
2015년 | 429,636명 | |
2020년 | 406,685명 |
- 편입으로 인한 인구 증가를 반영한 통계이다.[6]
- 1995년~2015년 인구는 12월 31일 기준이다.
- 2020년 인구는 9월 1일 기준이다.
- 1990년대 초만 해도 50만에 가까웠으나 지속적인 인구 유출[7]로 인해 현재 40만대도 붕괴되었다.
4. 관광
전근대 시기부터 일본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에 서양 및 중국과 교류해온 역사가 반영된 유적이 많다.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교역상인들이 머무르면서 일본인들과 교역을 하던 데지마(出島)[8]를 비롯해, 외국인들이 모여 살던 주택가인 오란다자카(オランダ坂; 직역하면 네덜란드 언덕), 외국인 기술고문들의 공관을 공원화한 구라바엔(글로버 가든; Glover Garden)[9]이 대표적인 관광명소다.그리고 히로시마와 함께 세계 단 두곳 뿐인 원폭 투하지인 만큼 이와 관련된 명소도 있다. 피폭지역인 마츠야마마치역 인근에 나가사키 원폭추모공원(평화 공원)과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어 원폭의 참상에 대해 알 수 있다.
관광지로서 방문하기 좋은 종교시설도 많다. 가톨릭 성당 중에서는 구라바엔 아래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과 평화공원에서 동쪽 언덕 위의 우라카미 천주당이 유명하다. 우라카미 천주당의 경우 오우라 천주당보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비롯한 조형미가 훨씬 좋고 입장료가 무료이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나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이곳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유물은 원폭에 의해 망가진 성모상 및 여러 성상들이다. 그리고 천주당 입구쪽 2층엔 파이프 오르간이 있으며, 매번 다른 성가를 사제들이 직접 연주해서 중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다만 한여름에도 냉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관람하기 힘들 수 있다. 불교 사찰 중에는 경내에 자리한 마조당이 유명한 숭복사가 있다.
현 북서쪽 외곽에는 네덜란드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인 하우스 텐 보스가 있다. 이곳의 치즈 박물관과 테디베어 박물관이 가볼 만한 명소이다. 그러나 정작 나가사키에서 가기에는 나가사키 본선과 사세보선의 철도환경이 열악해 애로사항이 많다보니 하우스텐보스까지 직통으로 연결하는 특급열차를 탈 수 있는 후쿠오카에서 출발하는 것을 권장한다.
만약 펭귄을 좋아한다면 나가사키 펭귄 수족관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다만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나가사키역에서 버스를 타고 약 30분정도 가야한다. 나가사키역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나가사키 펭귄 수족관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의 위치와 시간표를 안내받을 수 있다. 2019년 9월 기준 편도요금은 300엔이며 배차간격은 약 20분이다. 펭귄 수족관은 2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다. 펭귄 수족관 근처에는 펭귄 모양 케이크를 파는 제과점이나 펭귄 얼굴을 그려놓은 커피를 판매하는 동네카페 등이 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시와 비슷한 면이 많다. 초창기 개항장으로써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이들이 세운 서양식의 건물과 교회 등의 종교 시설이 많다. 그리고 두 도시 모두 야경이 유명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가서 야경을 감상하는 코스가 있다. 실제로 두 도시의 야경이 비슷했다는 감상도 있다. 거기다 90년대 이후로 급격한 인구유출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대도시는 아니지만 역사적인 연유로 만들어진 유명한 관광지가 많아 도시 규모에 비해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네덜란드인들이 도쿄 및 수도권 다음으로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기도 하다. 나가사키 관광 중 서양인을 마주쳤다면 높은 확률로 네덜란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에서 선박을 이용해서 가는 경우도 있고,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20분만 비행하여 도착할 수 있다. 규슈 쪽 자유여행을 간다면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여행하면서 비교적 가까운 나가사키도 잠깐식 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번화가도 크지 않고, 한국에서도 알만한 유명한 관광지도 별로 없다보니 나가사키만을 목적지로 여행하는 경우는 적다.
나가사키는 과거부터 서양과 중국 등 여러 국가들과 오랜기간 교류해온 역사처럼 이에 영향을 받은 요리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신치(新地)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에는 하얀 국물로 유명한 나가사키 짬뽕과 현지식으로 번안된 중국식 요리인 싯포쿠 요리 그리고 튀긴 면발에 해물과 각종 야채가 들어간 맑은 색의 소스를 위에 뿌린 사라우동(皿うどん)이 유명하다. 그리고 양식 요리 중에서는 돈가스, 필라프, 스파게티를 한 접시에 담은 토루코라이스가 유명하다.
쿠로시오 해류가 들어오는 길목이다보니 질좋은 수산물을 구하기 쉬운 곳이다. 특히 유명한 것이 숭어알을 건조해서 만든 가라스미라고 불리는 어란이다. 나가사키는 일본 내에서 어란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가라스미는 쫀득한 식감과 청주와의 궁합이 좋아 안주거리로는 최고로 친다. 일본 도쿄도의 고급식당에서 사용하는 어란은 거의 대부분 나가사키산이다.
식사뿐만 아니라 디저트도 매우 유명하다.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전래된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빵을 물엿을 넣어 현지화한 카스테라가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었다. 나가사키 카스테라는 현지에서 오리지널 카스테라는 대체로 1천 엔대이고, 작은 것은 400엔대에 살 수 있다. 그리고 고급화된 제품은 2천 엔을 넘기도 한다. 나가사키 카스테라점중 전국적으로 유명한 3대 가게인 분메이도(文明堂), 쇼오켄(松翁軒), 후쿠사야(福砂屋)가 있으며, 그외에도 나가사키 현지에는 10여곳 넘는 전문 브랜드들이 있다. 나가사키 카스테라의 특징 중 하나는 빵 바닥에 자라메(ざらめ)라는 알이 굵은 설탕을 깔아 굽는 것으로 카스테라를 먹을 때 같이 씹혀 매우 맛있다. 단 모든 나가사키 카스테라가 자라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후쿠사야, 분메이도의 카스테라만이 사용한다. 참고로 자라메를 따로 팔기도 한다. 이 외에도 쿠로보우라는 흑설탕 과자도 유명하다.
5. 교통
5.1. 도로 교통
고속도로로 나가사키자동차도가 지나며, 34번, 202번 국도, 206번 국도, 251번 국도, 324번 국도, 499번 국도이 지난다.고속도로 나들목으로는 나가사키타라미IC, 나가사키스스키즈카IC, 나가사키IC가 있으며, 나가사키 바이패스와 나가사키 데지마도로 등의 고속화도로도 있다.
나가사키시에 본사를 둔 버스 회사로는 나가사키현 교통국과 나가사키 자동차(통칭 나가사키 버스)가 있다.
5.2. 철도 교통
나가사키시의 철도역 | ||
철도회사 | 노선 | 역 |
JR 큐슈 | 나가사키 본선(신선) | 히젠코가역 - 우츠츠가와역 - 우라카미역 - 나가사키역 |
나가사키 본선(구선) | 니시우라카미역 - 우라카미역 - 나가사키역 | |
니시큐슈 신칸센 | 나가사키역 | |
나가사키 전기궤도 | 1계통 | 아카사코역 ~ 소후쿠지역 |
2계통 | 아카사코역 ~ 니시하마노마치역 ~ 호타루자야역 | |
3계통 | 아카사코역 ~ 사쿠라마치역 ~ 호타루자야역 | |
4계통 | 소후쿠지역 ~ 하마노마치아케이드역 ~ 호타루자야역 | |
5계통 | 이시바시역 ~ 신치츄카가이역 ~ 호타루자야역 | |
나가사키 로프웨이 | ■나가사키 로프웨이 | 후치진자역 - 이나사다케역 |
※ 굵게 표시 된 역은 환승이 가능한, 사실상 같은 곳이다. |
광역교통은 나가사키 본선 외에는 부실한 편이다. 그나마 나가사키 - 후쿠오카간 특급열차 카모메의 다이어 개량으로 1시간 50분 ~ 2시간 선으로 후쿠오카까지 갈 수 있게 된건 다행이었으나 2022년에 카모메도 폐지되었다. 후쿠오카 - 나가사키 왕복만 할거라면 철도를 이용해도 무방하지만, 하우스텐보스, 운젠 등 현내 주요 관광지의 철도 접근성이 큐슈 내에서도 영 좋지 않은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라, SUNQ 패스와 렌터카에 탈탈 털리고 있다.
시내 교통수단으로는 노면전차(나가사키 전기궤도)가 대표적인데, 일본에서 제일 요금이 싸다. 1984년부터 거리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100엔을 받았으나, 2009년 120엔으로, 2019년 4월 1일부터 어른 130엔, 아동 70엔으로 인상되었고 이후 성인 140엔으로 인상되었다. 1일권과 24시간권이 있으니 전차를 여러 번 탈 때는 이용하자.
나가사키 전차는 차량이 다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인근 후쿠오카는 물론, 도쿄, 센다이 등 일본의 주요 대도시에서 노면전차를 폐선시킬 때 오갈데가 없어진 차량을 죄다 긁어모았기 때문. 심지어는 1911년(메이지 44년)산 전차 (160형 전차)도 현역으로 차적에 등록되어 있다. 이렇게 낡은 차량은 통상적인 영업운전을 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날에만 이벤트로 영업운전에 투입된다고 한다. 곧 노면전차의 날인 6월 10일(6을 '로', 10을 영어로 '텐'으로 읽어 로텐=노면전차에서 '노'와 '전'만 음독해서 로텐), 철도의 날(1872년 신바시-요코하마간 일본 최초 철도 개통을 기념)인 10월 14일, 나가사키 노면전차 개업기념일(1915년 개업)인 11월 16일이다. 그리고 낡은 차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냉난방 시설 등 개조가 잘 되어 있어서 이용하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철도로는 나가사키 본선이 지나며, 니시큐슈 신칸센이 있다. 그러나 니시큐슈 신칸센은 타케오온센역에서 일반 재래선 열차(릴레이 카모메)로 환승해야 후쿠오카까지 갈 수 있다. 타케오온센역 동쪽 구간은 사가현 구간의 건설비 부담[11], 기존선 철도의 경영 분리 등의 문제로 인해 2024년 현재로서는 건설 계획조차 수립되어 있지 않다.
6. 문화
2016 리우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 출신의 최규백이 소속된 J리그의 V-파렌 나가사키가 이 지역 연고 프로구단이다. 2019시즌에는 2014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종호와 U-23의 대표 이상민(1998)이 임대를 와있다. 1985년에 규슈 지역리그 팀 아리아케 SC에서 출발하여 2005년 쿠니미 팀과 통합하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12]2012년 시즌에 JFL에서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J리그(2부리그인 J2리그)에 진입하였으며, 이후 6위(2013)-14위(2014)-6위(2015)-14위(2016)로
2017년에는 대형 인터넷 쇼핑몰 기업인 자파넷이 주주로 들어와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2023년을 목표로 축구전용구장까지 신축하게 되었으니 나가사키 축구팬들에게는 잊지못할 한 해가 되었을 듯.
위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매 순간 새로이 클럽 역사를 써나가는 젊은 팀이며, 경기장 신축 진행과 평균 관중이 두배로 펄쩍 뛴 2018년 시즌에 J1리그를 잔류하느냐 여부가 팀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할 것이다.
7. 지리
나가사키 반도와 니시소노기 반도를 시역으로 한다. 이사하야시, 사이카이시, 토기츠초, 나가요초 와 인접해있다. 산지가 많고 급격한 경사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비탈길이 많은데, 이런 지형에 특화된 슬로프카인 나가사키시 사면이송시스템과 글로버 스카이로드가 개통되어 있다.[14]해안에 접한 경사지에 시가지가 자리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부산광역시와 비슷해서 부산 사람이라면 특히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부산에서 흔히 볼수있는 가파르고 험준한 산복도로가 나가사키에도 많으며, 특히 주거 지역들을 보면 재개발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부산 달동네들과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나가사키의 야경도 화려하다기 보다는 은은한 느낌으로 부산의 야경과 비슷하다.[15][16]
8. 경제
입지조건 덕에 예로부터 유서깊은 무역항이다 보니, 항만의 발달과 더불어 근대에 들어 미쓰비시 중공업[17]을 위시한 조선업과 방위산업이 발달했다. 하지만 그것이 미국의 핵공격을 부르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나가사키시의 지역총생산에서 각 산업별 차지 비중은 1차 산업이 0.7%, 2차 산업이 16.6%, 3차 산업이 82.7%로 3차 산업 비중이 높은 편이다. 2차 산업에서는 생산용,업무용 기계산업의 부가가치액이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건설업 부가가치액이 높다. 그러나 두 산업분야에서의 노동생산성은 전국 평균보다 낮다. 3차 산업에서는 보건위생, 행정 분야 산업의 부가가치액이 높은데 여기서도 노동생산성은 일본 평균보다 낮다. [18]
종사자 수와 사업소 수로 분석해보면, 2차 산업에 속하는 제조업의 경우 종사자 수와 사업소 수가 모두 감소하는 경향에 있으며, 3차 산업에 속하는 소매업의 경우 2012년까지는 종사자 수와 사업소 수가 모두 감소하다가 2012년 이후에는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9. 원자폭탄 피폭지
나가사키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제2차 세계 대전말 두 곳의 피폭지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히로시마시에 투하된 리틀 보이보다 더 강한 원자폭탄 "팻 맨"이 투하되었음에도 히로시마시에 비해 피폭지로서 이미지가 비교적 약한 편이다.- 히로시마시의 15Kt급 리틀 보이보다 더 강력한 22Kt급 팻 맨이 투하되었는데도, 히로시마의 사망자 추산 14만 명의 절반인 7만 정도가 사망했다. 그 원인은 나가사키의 지형이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악천후에 의한 시계 악화로 인해, 사수가 시가지가 보이는 즉시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 지점이 거의 분지에 가까운 산에 둘러싸인 곳이었고, 폭발 후 열선과 후폭풍이 산을 넘지 못해 폭심지 근처로 피해가 한정되었다. 참고로 지금과 달리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시역 내 인구는 히로시마가 34만명, 나가사키가 25만명 남짓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 원래 나가사키는 폭탄 투하지 후보 3순위였다. 나가사키 폭탄 투하 당일, 팻 맨을 실은 폭격기가 원래 목표로 한 곳은 발전소 등이 있는 후쿠오카현 코쿠라시(현재의 키타큐슈시 코쿠라키타구, 코쿠라미나미구)였다. 그러나 작전 당일 큐슈 전체가 날씨가 좋지 않아 코쿠라 시가지가 짙은 안개가 가려져 있었고[19], 설상가상으로 초계기와 정보수집기가 투하 지점인 코쿠라시의 사진을 찍는데 실패했다. 폭격기는 어쩔 수 없이 육안으로 확인하고 투하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다음, 작전 시간에 맞추어 코쿠라시 상공으로 진입했다. 1시간 정도 상공에 체류하면서 핵폭탄 발사 준비원이었던 미 해군 중령 프레더릭 애시워스는 나가사키의 시야가 확보되지 못할 경우, 레이더를 이용해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몇 초 간 하늘이 개였고, 연료가 부족하자 폭격기는 핵폭탄을 그대로 투하했다. 불과 투하 1시간 전에 결정된 것으로 이 1시간 사이에 나가사키와 코쿠라의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20] 사실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하러 가던 조종사들은 하느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기지에 있던 군종신부 조지 자벨카의 축복을 받고 출격했다.[21]
- 8월 15일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으로 성모 마리아의 승천, 곧, 성모몽소승천을 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고, 당시 일본 가톨릭 교회에는 성모 승천 대축일에 앞서 판공성사를 보는 관습이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원폭 투하지점)에서 불과 7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라카미 대성당[22]에서는 미사&판공성사를 준비하던 2명의 사제와 24명의 신자가 즉사했고, 8천 명의 신자들도 이후 피폭에 따라 전원 사망하였다. 그리고 성당은 전소되었고, 그 열화에 타버려서 머리 부분만 남은 성모상이 발견되었다. 전후에 재건된 성당에서는 이 두상을 "원폭의 성모님"으로 모셔 전쟁의 아픔을 상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나가사키에서 원폭은 '천벌', 원폭 희생자는 '속죄양'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히로시마와 다른 점이다. 이런 관념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23] 나가사키 의대 교수 나가이 다카시의 책과 그의 자택인 뇨코지(여기당)[24]의 기념관에 잘 나타나 있다.
- 당시 나가사키시에 수용됐던 연합군 포로들 중 일부가 이 때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작, 배우 휴 잭맨이 주연인 더 울버린에서 연합군 포로로 잡힌 울버린이 피폭되는 장면은 이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 나가사키 폭격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극우는 의외로 같은 의견을 한다. 당시 원래 폭격 목표였던 코쿠라 시의 경우 히로시마와 동일한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예정대로 코쿠라 시가 피폭당했을 경우 피해가 1차 피폭지였던 히로시마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이 피폭의 참사를 기억하고자 나가사키 평화공원이 세워졌고, 현재도 원폭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있다.
-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면서 나가사키에서 온 일본인에게 "아, 그 핵 떨어진 곳?" 란 돌직구를 날렸다는 소문이 있다. 사실, 송해는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18세였다. 하지만 실제 저 발언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10. 前 시장 총격 사건
長崎市長銃撃事件 (1990)
長崎市長射殺事件 (2007)
히로시마도 그렇지만, 전쟁의 끔찍함을 겪은 도시다보니 전반적으로 (우리의 반전주의 인식과는 좀 다를 수 있지만) 반전주의 성향이 강하다. 나가사키에서는 반전주의 성향의 후보가 시장에 당선되기도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시장 총격 사건이 두 건이나 발생하기도 했다. 둘 다 자민당의 지지를 받은 보수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1988년 12월 7일 나가사키 시 의회 질의에서 공산당 소속 시의원 시바다 보쿠가 당시 시장이었던 모토시마 히토시 시장에게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자,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하였다. 문제는 당시 히로히토 천황이 오늘내일 하면서 사경을 헤매이고 있었던 터라, 일본은 사회 전체가 소위 "자숙" 모드였다.[25] 현의회에서는 모토시마 시장에게 해당 발언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짓을 할 수 없다며 발언 철회를 거부해서 소속당인 자민당에서 제명당했고, 극우 단체의 확성기 차량 80여대가 몰려들어 연일 그를 비난해댔다. 극우 깡패들이 여저저기서 그를 노리면서 나가사키 시는 모토시마 시장에 대한 경호 수위를 높이고 공관에서 지내게 했다. 평소 그는 아침 일찍 출근 전 산책을 즐겼는데, 이 조차도 시장 공관에서 런닝머신으로 대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90년 1월 18일 오후 3시경 그는 나가사키시청 현관 앞에서 관용차에 오르려다 등 뒤에서 다가온 우익단체 쇼기주쿠(正氣塾) 간부 와카시마 카즈미에게 등 뒤 1m라는 근거리에서 총격을 당했다.[26] 탄환은 왼쪽 흉부에 명중했으나 갈비뼈에 맞아 탄도가 변해 심장과 대동맥 등을 벗어나서 관통한 덕분에 전치 1개월의 중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다.[27] 회복한 이후에 모토시마 시장은 자신을 저격한 와카시마를 용서한다고 말했으며, 그 다음 해의 선거에서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음 선거인 1995년 선거에서 모토시마 시장은 낙선하고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지내다가 2014년 10월 31일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2005년 한국 방송사인 문화방송이 광복 60주년 특집으로 제작한 5부작 다큐멘터리 <천황의 나라, 일본>의 1부 방송인 '덴노, 살아있는 신화'에서 이 사건을 다뤘는데, 여기에 직접 인터뷰어로 직접 출연했다. 그에게 질의를 했던 시바다 보쿠 전 시의원도 인터뷰에 응했다.
특이한 점은 1995년 선거에서 이 모토시마 후보를 꺾고 당선된 후보가 자민당의 지지를 받은 무소속 이토 잇초 후보라는 점이다. 잇초는 출마 전에는 '방위·외교는 국가의 관할 문제'라며 평화 문제는 언급을 자제했다. 그러나 시장에 당선된 후 핵무기 철폐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평화헌법 개정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며, 미국의 핵정책과 북한의 핵실험을 비판하며 반핵, 반전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던 중, 2007년 4월 17일, 4선에 도전하여 선거운동을 하다가 나가사키 역 부근에서 야마구치구미 계열 스이신카이의 회장대행인 야쿠자 시로오 테츠야에게 모토시마 시장처럼 총격을 받았고, 다음날 과다 출혈로 숨졌다.[28]
엄밀히 해두자면 두 사건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범행 동기도 1990년 사건이 극우의 정치적 테러였다면, 2007년 사건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차량 파손 보상 및 관급공사 개입 문제에 따른 원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범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여하간 2대에 걸쳐서 현직 시장이 연달아 총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여담으로 2007년 총격 사건 당시 총격으로 이토 시장이 사망한 직후 유족들과 후원회가 투표일이 3일 이상 남았을 때에는 추가 후보 등록이 가능한 규정을 이용해 이토 시장의 사위를 후보로 내세워 추가 입후보 시켰다. 이를 두고 나가사키시 시청에서 근무하던 타우에 토미히사라는 한 직원이 가족 세습이라고 비판하며 마찬가지로 시장 선거에 추가 입후보 했는데, 선거 결과 그 직원이 이토 시장의 사위를 0.5%p 차이로 꺾고 당선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11. 자매결연도시
12. 매체에서의 등장
자세한 내용은 나가사키(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물드는 세계의 내일로부터: 나가사키 시내의 노면전차 및 구라바엔, 이나사야마, 메가네바시 등의 각종 관광지의 실배경이 잘 드러나 있기도 하다.
- 언덕길의 아폴론: 정확히는 사세보시가 배경으로, 나가사키시는 종종 나오는 편이다.
-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10번째 시나리오에서 명군의 첫 상륙지로 등장한다.
- 체리마호: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영화): 영화판의 촬영지로 쓰였다.
- 네가 마음을 주었으니까: 오우라 천주당, 미즈베노모리 공원, 메가네바시등 주요 명소가 나온다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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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계인구 2024년 4월 1일 기준[2] 나머지는 도쿄, 오사카.[3]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이라고 한다.[4] KBS 역사스페셜 2012년 3월 8일에 방송된 임란포로 빈센트 권은 왜 화형당했나 편에서 운젠 지옥에서 행해진 가톨릭 신자 대상의 고문과 처형에 대한 언급이 잠시 나온다. 일본에 남아있는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산입(山入)'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산입이란 뜨거운 열탕이 솟는 운젠 지옥으로 신자들을 끌고 가 100도가 넘는 온천의 물로 고문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고문은 수 일에 걸쳐 자행되었는데, 3일을 버티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고 한다.[5] 고야기정, 이오지마정, 다카시마정, 노모자키정, 산와정, 소토메정[6] 예를 들어, 2000년 인구는 "통합 안 된 나가사키시(423,143명)" + "주변7개정(46,857명)"으로 계산해 470,000명이다.[7] 주로 후쿠오카, 구마모토 등[8] 원래는 바다를 메워서 만든 인공섬이었는데, 근대 이후 시가지를 확장하면서 간척되어 인공섬의 모습은 사라졌다.[9]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중공업화에 기여한 토마스 앨버트 글로버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참고로 공원내 공관 곳곳에 일본 제국 시절 군함도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어 이를 읽은 한국인들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10] 관광 성수기에 나가사키역 정거장에서는 사람이 많아 타지 못하는 일이 손쉽게 벌어진다. 물론 교토 버스의 가축수송보단 사정이 훨씬 낫다.[11] 왜 신칸센 건설비를 지자체가 부담하는지는 정비신칸센 문서 참조[12] 전형적인 J리그 식의 외국어 단어 짬뽕조합 네이밍인데, 데지마로 연을 맺은 두 나라의 언어 중 포르투갈어의 승리, 네덜란드어의 평화, 항해하다 라는 V로 시작하는 세 단어를 조합한 이름이라고 한다.[13] 그러나 2018시즌 한시즌만 뛰고 곧바로 강등되고만다.[14] 참고로 2010년대 들어 국내에도 이런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영주동 오름길 모노레일이 있다.[15] 세계 3대 야경이라고 홍보하는 이나사야마(稲佐山) 정상 전망대의 풍경. 부산의 야경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16] 그러나 도시 규모나 인구 규모로 따지면 나가사키가 부산보다 훨씬 작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전라남도 여수시가 더 비슷한 편이다. 여수에도 산이 많고 도로도 경사가 있어 운전하기가 힘들다.[17] 미쓰비시 중공업의 발상지가 나가사키이다. 미쓰비시조선소는 현재도 운영 중이며, 1909년에 영국에서 수입되어 과거 선박건조에 쓰였고,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가동중인 캔틸레버 크레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심지어 이 크레인은 1945년 원자폭탄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다만 세계유산 등재항목에 한국에서 논란이 되는 군함도 탄광과 함께 묶여있다.[18] #[19] 고쿠라 상공을 덮고 있던 이 연기에 대해서는 2014년에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히로시마시 폭격 이후, "B-29 한두 대가 날아오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특수폭탄 폭격이다."라는 소문이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었고, 코쿠라에는 제철소와 무기 공장 등도 있어서 "다음은 우리 차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8월 9일 아침 소규모의 B-29들이 코쿠라로 접근한다는 얘기를 들은 야하타시 제철소에서 직원들이 드럼통에 대량의 콜타르를 태워서 연기를 발생시켜 시야를 가렸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원자폭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B-29 작전고도는 상공 10km인데, 이 정도는 서울 전역이 내려다 보이는 고도이고, 해당 주장에 따르면 콜타르를 태워 서울시 전역에 연막탄을 뿌린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열악한 기상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20] 1순위 후보였던 코쿠라(17만 명) 근처에는 반경 10km 내에 모지(14만 명), 야하타(26만 명), 토바타와 와카마츠(각 8만 명), 시모노세키(20만 명) 등 대도시가 몰려 있어 예정대로 투하되었다면 수십 만의 희생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21] 조지 자벨카는 히로시마 원폭 때도 조종사들을 축복했는데, 나중에 자신이 축복한 병사들에 의해 대성당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 방문했을 때 히로시마는 갔어도 나가사키는 갈 용기가 나지 않아 갈 수 없었다고 한다.[22] 당시 동양 최대의 성당이자 나가사키 대교구 주교좌 성당이기도 하였다.[23] 원래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카쿠레키리시탄의 후예였던 아내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귀의했다.[24] '네 이웃을 네 몸 처럼 사랑하라'(마 12:31)의 한역인 여기애인(如己愛人)에서 당명이 유래되었다.[25] 예시를 몇 가지 들면 이 시기 히카루 겐지는 콘서트를 취소했고, 그 해 호시노 센이치는 50승 15패 3무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주니치 드래곤즈를 6년만에 NPB 센트럴 리그 정상에 올려놓는 대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를 축하하는 자리가 모두 축소 혹은 취소되었다.[26] 당시는 문제의 발언이 있고 만으로 1년이나 지난 시기라서 극우단체들도 이제는 다 철수를 했기 때문에 경호 수위가 낮아졌다고 한다.[27] 여기에 덧붙여서 피의자는 총격 직후 쓰러진 모토시마 시장에게 「괜찮냐?」라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28] 참고로 전직 시장이었던 모토시마 시장은 자신을 이긴 이토 잇초가 암살당해 사망하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대에 걸쳐 시장이 총격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고 말했다.[29] 통계 과장 출신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말단 공무원은 아니다. 그러나 당장 지자체장 도전을 가시권에 둔 직위라고 보기에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