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센이치의 수상 경력 / 감독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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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900>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영구 결번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rowcolor=#ccac00> No.10 | No.77 |
<rowcolor=#ffcc00> 팬 | 호시노 센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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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쇼와 시대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1965년 ~ 1988년 | ||||
<rowcolor=#20272c,#d3dade> 1965년 | 1966년 1차 | 1966년 2차 | 1967년 | 1968년 | ||
토요나가 류세이 (豊永隆盛) | 오오바 타카히로 (大場隆広) | 이구마 히로카즈 (伊熊博一) | 츠치야 히로시 (土屋紘) | 호시노 센이치 (星野仙一) | ||
<rowcolor=#20272c,#d3dade> 1969년 | 1970년 | 1971년 | 1972년 | 1973년 | ||
야자와 켄이치 (谷沢健一) | 우지이에 마사유키 (氏家雅行) | 후지사와 테츠야 (藤沢哲也) | 스즈키 타카마사 (鈴木孝政) | 후지나미 유키오 (藤波行雄) | ||
<rowcolor=#20272c,#d3dade> 1974년 | 1975년 | 1976년 | 1977년 | 1978년 | ||
츠치야 마사카츠 (土屋正勝) | 타오 야스시 (田尾安志) | 미야코 유지로 (都裕次郎) | 후지사와 키미야 (藤沢公也) | 타카하시 미치타케(1) (高橋三千丈) | ||
<rowcolor=#20272c,#d3dade> 1979년 | 1980년 | 1981년 | 1982년 | 1983년 | ||
우시지마 카즈히코 (牛島和彦) | 나카오 타카요시 (中尾孝義) | 오노우에 아키라 (尾上旭) | 카시마 타다시(1) (鹿島忠) | 후지오 야스하루 (藤王康晴) | ||
<rowcolor=#20272c,#d3dade> 1984년 | 1985년 | 1986년 | 1987년 | 1988년 | ||
나카무라 타케시(1) (中村武志) | 사이토 마나부(1) (斉藤学) | 콘도 신이치(2) (近藤真市) | 타츠나미 카즈요시(2) (立浪和義) | 이마나카 신지 (今中慎二)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헤이세이 시대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1989년 ~ 2018년 | ||||
<rowcolor=#20272c,#d3dade> 1989년 | 1990년 | 1991년 | 1992년 | 1993년 | |
요다 츠요시 (与田剛) | 코지마 히로무(1) (小島弘務) | 오치아이 에이지(1) (落合英二) | 사토 히데키(1) (佐藤秀樹) | 히라타 히로시(3) (平田洋) | |
<rowcolor=#20272c,#d3dade> 1994년 | 1995년 | 1996년 | 1997년 | 1998년 | |
카나모리 타카히로(1) (金森隆浩) | 아라키 마사히로(1) (荒木雅博) | 코야마 신이치로 (小山伸一郎) | 카와카미 켄신(3) (川上憲伸) | 후쿠도메 코스케(3) (福留孝介) | |
<rowcolor=#20272c,#d3dade> 1999년 | 2000년 | 2001년 | 2002년 | 2003년 | |
아사쿠라 켄타(1) (朝倉健太) | 나카자토 아츠시 (中里篤史) | 마에다 아키히로(1) (前田章宏) | 모리오카 료스케 (森岡良介) | 나카가와 히로키 (中川裕貴) | |
<rowcolor=#20272c,#d3dade> 2004년 | 2005년 | 2006년 | 2007년 | 2008년 | |
히구치 타츠미(3) (樋口龍美) | 히라타 료스케(4) (平田良介) | 도노우에 나오미치(2)(4) | 아카사카 카즈유키(1)(4) (赤坂和幸) | 노모토 케이(2) (野本圭) | |
요시미 카즈키(3)(5) (吉見一起) | 타나카 다이스케(3)(5) (田中大輔) | 야마우치 소마(1)(5) (山内壮馬) | |||
<rowcolor=#20272c,#d3dade> 2009년 | 2010년 | 2011년 | 2012년 | 2013년 | |
오카다 토시야(1) (岡田俊哉) | 오노 유다이 (大野雄大) | 타카하시 슈헤이(2) (高橋周平) | 후쿠타니 코지 (福谷浩司) | 스즈키 쇼타(1) (鈴木翔太) | |
<rowcolor=#20272c,#d3dade> 2014년 |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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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마루 유메토 (2) (金丸夢斗)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3595> | 주니치 드래곤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91919,#ffffff | <rowcolor=#ffffff> 1936春夏 | 1936秋 | 1937春~1937秋 | 1938春 | 1938秋 |
마키노 키요시 | 카토 토모오 | 모리이 시게루 | 마츠오 코조 | 모리이 시게루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마츠오 코조 | 무라마츠 유키오 | 모리이 시게루 | 카와무라 아키라 | 마츠오 코조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1949 | 1950 | |
모리이 시게루 | 모리이 시게루 | 마츠오 코조 | 핫토리 츠구히로 | 시미즈 히데오 | |
<rowcolor=#ffffff> 1951 | 1952 | 1953 | 1954~1955 | 1956 | |
콘도 사다오 | 오오시마 노부오 | 스기시타 시게루 | 이시카와 카츠히코 | 스기시타 시게루 | |
<rowcolor=#ffffff> 1957 | 1958 | 1959~1960 | 1961 | 1962 | |
이나 츠토무 | 나카야마 토시타케 | 이나 츠토무 | 반도 에이지 | 카키모토 미노루 | |
<rowcolor=#ffffff> 1963~1964 | 1965 | 1966 | 1967~1970 | 1971 | |
카와무라 야스히코 | 카키모토 미노루 | 야마나카 타츠미 | 오가와 겐타로 | 이토 히사토시 | |
<rowcolor=#ffffff> 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
미즈타니 히사노부 | 이나바 미츠오 | 호시노 센이치 | 마츠모토 유키츠라 | 호시노 센이치 | |
<rowcolor=#ffffff> 1977 | 1978~1979 | 1980 | 1981 | 1982~1983 | |
마츠모토 유키츠라 | 호시노 센이치 | 후지사와 키미야 | 미사와 쥰 | 코마츠 타츠오 | |
<rowcolor=#ffffff> 1984 | 1985 | 1986 | 1987 | 1988 | |
스즈키 타카마사 | 코마츠 타츠오 | 카쿠 겐지 | 스기모토 타다시 | 코마츠 타츠오 | |
<rowcolor=#ffffff> 1989 | 1990 | 1991 | 1992 | 1993~1996 | |
오노 카즈유키 | 니시모토 타카시 | 코마츠 타츠오 | 카쿠 겐지 | 이마나카 신지 | |
<rowcolor=#ffffff> 1997~1998 | 1999 | 2000 | 2001~2002 | 2003 | |
야마모토 마사 | 카와카미 켄신 | 노구치 시게키 | 야마모토 마사 | 카와카미 켄신 | |
<rowcolor=#ffffff> 2004 | 2005~2008 | 2009 | 2010 | 2011 | |
야마모토 마사 | 카와카미 켄신 | 아사오 타쿠야 | 요시미 카즈키 | 막시모 넬슨 | |
<rowcolor=#ffffff> 2012~2013 | 2014 | 2015 | 2016~2017 | 2018 | |
요시미 카즈키 | 카와카미 켄신 | 야마이 다이스케 | 오노 유다이 | 오가사와라 신노스케 | |
<rowcolor=#ffffff>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
카사하라 쇼타로 | 오노 유다이 | 후쿠타니 코지 | 오노 유다이 | 오가사와라 신노스케 | |
<rowcolor=#ffffff> 2024 | |||||
야나기 유야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3595><tablebgcolor=#003595> |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
{{{#!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 1936년 ~ 현재 | ||||
초대 이케다 유타카 (1936) | 2대 마스 카이치 (1937) | 3대 네모토 유키사토 (1938~1939) | 4대 코니시 토쿠로 (1940~1941) | 5대 혼다 치카요시 (1941~1942) | |
6대 마스 카이치 (1942~1943) | 7대 미야케 다이스케 (1944) | 8대 타케우치 요시카즈 (1946) | 9대 스기우라 키요시 (1946~1948) | 10대 아마치 슌이치 (1949~1951) | |
11대 츠보우치 미치노리 (1952~1953) | 12대 아마치 슌이치 (1954) ★ | 13대 노구치 아키라 (1955~1956) | 14대 아마치 슌이치 (1957~1958) | 15대 스기시타 시게루 (1959~1960) | |
16대 노닌 와타루 (1961~1962) | 17대 스기우라 키요시 (1963~1964) | 18대 니시자와 미치오 (1964~1967) | 19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8) | 20대 미즈하라 시게루 (1969~1971) | |
21대 요나미네 카나메 (1972~1977) ★ | 22대 나카 토시오 (1978~1980) | 23대 콘도 사다오 (1981~1983) ★ | 24대 야마우치 카즈히로 (1984~1986) | 25대 호시노 센이치 (1987~1991) ★ | |
26대 타카기 모리미치 (1992~1995) | 27대 호시노 센이치 (1996~2001) ★ | 28대 야마다 히사시 (2002~2003) | 29대 오치아이 히로미츠 (2004~2011) ★★★★★ | 30대 타카기 모리미치 (2012~2013) | |
31대 타니시게 모토노부 (2014~2016) | 32대 모리 시게카즈 (2017~2018) | 33대 요다 츠요시 (2019~2021) | 34대 타츠나미 카즈요시 (2022~2024) | 35대 이노우에 카즈키 (2025~) | |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fefe01> | 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1935년 ~ 현재 | ||||
초대 모리 시게오 (1936) | 2대 이시모토 슈이치 (1936~1939) ★★ | 3대 마츠키 켄지로 (1940~1941) | 4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2~1944) ★ | 5대 후지무라 후미오 (1946) | |
6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7~1949) ★ | 7대 마츠키 켄지로 (1950~1954) | 8대 키시 이치로 (1955) | 9대 후지무라 후미오 (1956~1957) | 10대 타나카 요시오 (1958~1959) | |
11대 카네다 마사야스 (1960~1961) | 12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2~1965) ★★ | 13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6) | 14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7~1968) | 15대 고토 츠구오 (1969) | |
16대 무라야마 미노루 (1970~1972) | 17대 카네다 마사야스 (1973~1974) | 18대 요시다 요시오 (1975~1977) | 19대 고토 츠구오 (1978) | 20대 돈 블레이싱게임 (1979~1980) | |
21대 나카니시 후토시 (1981) | 22대 안도 모토오 (1982~1984) | 23대 요시다 요시오 (1985~1987) ★ | 24대 무라야마 미노루 (1988~1989) | 25대 나카무라 카츠히로 (1990~1995) | |
26대 후지타 타이라 (1996) | 27대 요시다 요시오 (1997~1998) | 28대 노무라 카츠야 (1999~2001) | 29대 호시노 센이치 (2002~2003) ★ | 30대 오카다 아키노부 (2004~2008) ★ | |
31대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 32대 와다 유타카 (2011~2015) ☆ | 33대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 34대 야노 아키히로 (2019~2022) | 35대 오카다 아키노부 (2023~2024) ★ | |
36대 후지카와 큐지 (2025~) | |||||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 ★: 단일리그 우승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50><tablebordercolor=#900000><tablebgcolor=#900000>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
{{{#!wiki style="margin: 0 -10px" {{{#ffcc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 2005년 ~ 현재 | ||||
초대 타오 야스시 (2005) | 2대 노무라 카츠야 (2006~2009) | 3대 마티 브라운 (2010) | 4대 호시노 센이치 (2011~2014) ★ | 5대 오쿠보 히로모토 (2015) | |
6대 나시다 마사타카 (2016~2018) | 7대 히라이시 요스케 (2019) | 8대 미키 하지메 (2020) | 9대 이시이 카즈히사 (2021~2023) | 10대 이마에 토시아키 (2024) | |
11대 미키 하지메 (2025~) | |||||
★:일본시리즈 우승 / ★: 퍼시픽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330><table bordercolor=#1C262D> |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대 대표팀 |
{{{#!wiki style="color:#1C262D; 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2000 시드니 올림픽 | 2003 아테네 올림픽 예선 | 2004 아테네 올림픽 | 2006 WBC | 2007 베이징 올림픽 예선 |
오오다가키 고우즈우 2000 | 나카하타 키요시 2003 | 2004 | 오 사다하루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6 ]] | 호시노 센이치 [[김경문호/2007| 2007 ]] | ||
2008 베이징 올림픽 | 2009 WBC | 2013 WBC | 2015 프리미어 12 | 2017 WBC | |
호시노 센이치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2008 ]] | 하라 다쓰노리 2009 | 야마모토 코지 2009 | 고쿠보 히로키 2015 | 2017 | ||
2017 APBC | 2019 프리미어 12 | 2020 도쿄 올림픽 | 2023 WBC | 2023 APBC | |
이나바 아츠노리 2017 | 2019 | 2020 | 쿠리야마 히데키 2023 | 이바타 히로카즈 2023 |
1973년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74년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 → | 1975년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74년 센트럴 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 ||||
타이틀 제정 | → |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 → | 스즈키 타카마사 (주니치 드래곤즈) |
1975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 ||||
마츠모토 유키츠라 (주니치 드래곤즈) | → |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 → | 카토 하지메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colbgcolor=#900000>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No.77 | |
호시노 센이치 星野 仙一 / Senichi Hoshino | |
<colcolor=#ffffff> 출생 | 1947년 1월 22일 |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 |
사망 | 2018년 1월 4일 (향년 70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8년 드래프트 1순위 (주니치) |
소속팀 | 주니치 드래곤즈 (1969~1982) |
지도자 |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투수코치 (1981~1982)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1987~1991, 1996~2001)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02~2003)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7~2008)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11~2014) |
프런트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GM (2015~2017)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감독.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구단 부회장을 역임했다.특유의 지고는 못 사는 불같은 성격으로 '투장', '열혈남' 등의 별명으로 불리웠다.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후로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장을 자처하여 온갖 에피소드를 쏟아냈으며, 끝끝내 꿈도 희망도 없어보이던 땅에서 언더독 신화를 일구어낸 인간승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의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은사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한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안티 요미우리의 화신이 되다
오카야마현립 구라시키 상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고3때 주고쿠 지역예선 결승전에서 패하는 등 코시엔 대회와는 인연을 맺기 못했다.고교 졸업 후 메이지대학에 진학하여 1학년 때부터 에이스로 활약하며 호세이대학의 타부치 코이치, 야마모토 코지, 토미타 마사루[1] 트리오 등과 함께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로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번번이 호세이대학의 벽에 가로막혀 대학 시절에도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다.
그리고 대졸 시즌인 1968년 드래프트가 다가왔는데, 이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하 요미우리)가 만약 친구인 타부치 코이치의 지명(교섭권 획득)에 실패할 경우 자신을 1순위로 지명하기로 약속했으나 막상 드래프트 당일에 타부치를 한신 타이거스에게 빼앗긴 요미우리는 약속을 깨고 호시노가 아닌 1950년생인 시마노 오사무(島野修)라는 고교생 투수를 지명한다.
당시 요미우리는 강력한 투수진을 갖춘 팀이었기 때문에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은 타선 보강을 위해 1순위로 타부치 코이치를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한신 타이거스가 먼저 타부치를 지명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고,[2] 이에 "즉시 전력감보다는 소질이 있는 유망주를 뽑자"고 하여 시마노를 지명한 것이었다. 사실 시마노는 호시노와는 달리 코시엔에 2번이나 진출했을 뿐더러 코시엔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친 만큼, 요미우리가 그를 지명한 데는 갑자기 뭔 이상한 생각이 든 게 아닌 나름 이유가 있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호시노와의 약속을 깨버린 건 엄연한 사실이었고, 호시노는 자신이 요미우리에 지명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자 "호시(星)랑 시마(島)를 틀린 거 아냐?!"라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이 때부터 요미우리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과 함께 철저한 안티 요미우리의 길을 걷게 된다.[3]
여담으로 호시노 대신 요미우리에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시마노는 부상 등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채 통산 1승 4패의 성적을 끝으로 1976년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트레이드되었고, 1군에서 다시 등판하는 일 없이 1978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이렇게 실패한 투수로 커리어가 끝날 수도 있었지만, 1981년 구단 마스코트 '브레이비' 의 슈트 액터 역할을 맡게 되며 유명 마스코트로 인기를 끌게 되었고, 구단이 오릭스에 매각되면서 마스코트가 네피로 바뛴 뒤에도 계속해서 슈트 액터를 맡아 1998년을 끝으로 그만둘 때까지 1175시합 출장 기록이라는 쾌거를 달성하며 지금도 다른 구단의 마스코트 연기자들이 "시마노 씨의 네피처럼 되고 싶다"라고 할 정도로 마스코트 연기자로써 현역 시절보다 훨씬 많은 인기와 명성을 누렸다. 슈트 액터를 그만둔 이후에도 2004년까지 계속해서 구단 직원으로 일했으나 병으로 퇴직하게 되었고, 6년 뒤인 2010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60세.[4]
2.2. 주니치의 에이스 시절
현역 시절의 호시노 센이치 |
데뷔 첫 해부터 주니치의 주전 투수로 자리잡은 호시노는 선발 투수와 중무리 투수를 오가며 맹활약했고, 1974년엔 49경기 17선발, 188이닝 133탈삼진, 15승 9패 10세이브 ERA 2.87의 맹활약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의 20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 달성에 공헌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0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고[5]해냈고, 센트럴리그 최초의 세이브왕과 사와무라상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6] 일본시리즈에서는 롯데 오리온즈에게 2승 4패로 패배하며 우승을 내줘야 했지만[7][8] 워낙 10년 연속 우승 저지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 이 해의 우승은 현재도 주니치의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그 후로도 주니치의 간판 투수로 활약했으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전성기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부활,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갑작스런 대두 등이 겹치며 전성기 때 우승과는 다시 인연이 없었고, 1982년에 본인의 노쇠화와 콘도 사다오 감독과의 불화가 겹치며 등판기회가 크게 줄어들며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여담으로 호시노의 현역 마지막 해인 1982년에 주니치는 전반기 이후 1위를 독주하던 요미우리를 치열하게 추격한 끝에 시즌 막판에 순위를 역전시키고 마지막 우승 찬스를 얻게 되었는데,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와의 최종전에서 이기거나 비기면 주니치가 우승, 패배하면 요미우리가 우승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최종전에서 에이스 코마츠 타츠오의 완봉 행진과 야자와 켄이치, 오시마 야스노리, 켄 마카의 맹타로 타이요를 8:0으로 대파하며 주니치가 8년 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일본시리즈에서 호시노는 등판하지 않았고, 팀은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2승 4패로 패해 또 다시 시리즈 제패에 실패했다.통산 성적은 146승 121패 34세이브, 평균자책점 3.60, 1225탈삼진.
불과 14시즌(1969~1982)밖에 뛰지 못했고, 시즌 당 평균 승수도 10.6승에 불과하였으나 거인전에서만 무려 35승 31패를 챙기며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던 요미우리의 천적으로 군림했다. 신인시절에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부상 이후 변화구를 주로 던지며 기교파 투수로 변모했고, 선발 투수와 구원 투수를 겸업하며 포지션에 관계없이 등판하면서 거둔 성적이라서 드러난 성적에 비해 훨씬 더 팀 공헌도는 높았다고 평가된다.
2.3. 감독으로 콩라인
이후 1986년 시즌 종료 후, 39세의 젊은 나이로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이로서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태어난 감독이 되었다.(2번째는 동년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한 아리토 미치요.)
1988년 시즌엔 7월 9일 이후 무려 50승 15패 3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역전우승을 차지하였으나 또다시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무너졌다.[9] 결국 숙원의 우승을 달성하지 못한 채 1991년에 일신상의 사유[10]로 감독직을 사임했고 감독 자리는 선배이자 주니치의 또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다카기 모리미치에게 넘긴다.
4년간 해설자 생활을 하다가 1996년 다시 주니치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 시기에 선동렬, 이종범, 이상훈을 영입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 되기도 했다. 1999년 또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나, 일본시리즈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1승 4패로 무너져 또다시 준우승을 차지[11][12] 하였다. 그 후 2001년 성적 부진과 수뇌부와의 불화로 감독직을 야마다 히사시[13]에게 내주고 이듬해인 2002년에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맡게 된다. 호시노 센이치가 없는 주니치는 2007년에 기어코 53년간의 한을 풀고 일본제일을 이룩하게 된다.
2.4. 한신으로 가서도 콩라인
2002년 당시 1987년 이래로 665662[14]446656666이라는 비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리그 밑바닥을 찍
2001년 시즌이 끝나고 부임한 호시노 감독은 이마오카 마코토, 세키모토 켄타로, 카타오카 아츠시, 후지모토 아츠시 등을 등용하며, 그 해 B클래스(리그 4~6위권) 탈출에 실패했지만 센트럴 리그 4위를 기록하며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노무라 카츠야의
이 해 한신이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며 18년만의 우승 가능성이 비치기 시작하자 미디어들이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한신과 호시노 감독을 따라 다녔고, 팬들이 1승 1패에 일희일비하는 낙차가 매우 컸다. 특히 리그 우승 매직넘버가 켜진 이후로는 팬들과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미디어들의 조급증이 극에 달해서 매일매일의 승패에 따라 간사이지역 전체의 분위기가 거의 조울증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꽤 여유있게 우승을 차지한 편[19] 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전체가 우승을 확정짓기까지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철권으로 소문났고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를 혐오하는[20] 호시노조차도 고혈압을 견디지 못해서 경기 도중에 자리를 떠서 응급조치를 받았으며, 우승이 결정된 후에 이어진 우승감독 인터뷰에서 아나운서가 소감을 물었을 때 첫마디도 "아~ 신도캇타(힘들었네)[21]"였을까. 이러한 점이 일본시리즈 패배와 시즌 후 호시노의 사임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3년 센트럴리그 우승 확정 후 헹가레를 받는 호시노[22] |
2.5. 한신 감독 사퇴 이후
한신 타이거즈의 시니어디렉터(SD)라는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애매모호한 직함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중의 행보를 살펴보면 답이 없던 한신 타이거즈를 다시 일으켜세워 전국구 인기팀으로 탈바꿈시킨 전임 감독 경력을 활용해 카리스마형 경영자의 롤모델 기믹으로 여기저기 강연회 돌아다니면서 강연료 챙기는 게 주업이었던 것 같다.2.6. 베이징 올림픽
이 시기야말로 호시노의 생애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악연 최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24] 한신 타이거스의 시니어 디렉터라는 애매한 직책에서 강연회 알바를 뛰는 외에도 간간이 NHK에서 야구 해설가대한민국과의 본선 경기에서 이와세 히토키가 불질을 하는 바람에 3:5로 패배해 삐걱대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쿠바와의 경기를 피하려고 미국에게 지기 위해 일부러 승부치기[25]까지 끌고 가서 끝끝내 져주기 게임을 실행하여 4강에서
일본시리즈 우승 경력이 없는 지도자답게 단기전에서의 직관력과 통찰력, 유연성 있는 운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는데 그 면모가 베이징 올림픽에서 드러났다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정작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한국 대표팀의 김경문 감독도 한국시리즈 우승 경력이 없는 감독인 게 함정.[26] 아무튼 이 일로 안티가 엄청나게 생겼으며, 오죽하면 일본위키에 그를 일본명인 星野仙一 로 검색하면 연관어로 호시노 센이치 재일(星野仙一 在日)이 나왔을 정도였다.[27]
올림픽 이후 자기 후원회인 코센카이(虎仙会)에서의 강연 내용이 시사주간지 FLASH를 통해 공개되었는데, 애꿎은 심판과 올림픽 조직위원회, 공인구, 한국의 징병제 탓을 했다.[28]
여담으로 가네다 마사이치는 호시노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호시노가 우에하라 고지를 1주일 안에 살려낼 수 있다고 하고 올림픽에서 이기겠다고 하면서 광고에 많이 출연하는 행보를 보이자 "이름이 우선하여 초일류 감독처럼 보여도, 호시노는 대감독이 아니다"라면서 호시노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남긴 말이 "말해서는 안 될 걸 말하면 신은 이기게 해주지 않는다".
2.7. 폐허의 땅에서 우승기를 들어올리다
올림픽에서의 실패 이후 두 번 다시 감독직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2011년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라쿠텐의 의도는 한신이 노무라-호시노 라인으로 개막장이던 팀을 기적적으로 부활시켜서 초인기 강팀으로 탈바꿈시켰으니 노무라 다음에
어쨌거나 라쿠텐 부임 첫 해에는 토호쿠 대지진 등의 여파로 정상적인 팀 운영이 힘들었던 상황이라[30] 5위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부임 2년차인 2012년 시즌 후반기부터 팀이 서서히 정비되기 시작하더니 승수를 쌓으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을 사정권에 놓기도 했다. 결국은 전반기의 성적이 영향을 미쳐서 4위에 머물러 가을야구를 실패했지만 라쿠텐 구단 창단 이후 두번째로 승률 5할로 이끌었다. 투수 출신 감독 최초의 1000승 달성은 덤.
2.7.1. 2013년
2013년 평생의 숙적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이기고 생애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 헹가래를 받는 호시노 |
그 여세를 몰아서 초반부터 선전을 거듭하면서 상위권에서 놀더니 7월 이후에는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8월에 들어와서는 2위 그룹과 3~5게임 차이의 선두를 유지하면서 여유 있게 순항한 끝에 9월 26일 팀의 첫 정규리그우승을 개막 22연승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세운 다나카 마사히로을 위시해 이끌었다.그리고 이어진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라쿠텐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다만 11월 2일 경기 선발인 다나카 마사히로를 9회까지 160개를 던지게 하고 그 다음날 9회말에 또 마무리를 시킨 것으로 해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너무 혹사시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다만 메이저리그와 메이저리그식의 투수운용이 상식으로 자리잡힌 한국에서 비판이 더 많았고, 여전히 에이스는 완투가 미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일본에서는 생각보다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어차피 다나카 본인도 일본에서의 마지막 투구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경기는 미련 안 남게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던지겠다는 자세를 견지했고[31] 정작 일본에서는 국내에서의 마지막 등판에서 팀의 우승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미화되었다. 물론 투구수 과다와 관련된 기사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대"라면서 미국에서의 걱정스러운 반응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다만 확실히 이 상황을 깐 일본야구인이 있는데 바로 다르빗슈 유. SNS를 통해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며 대차게 까내렸다. 전적으로 선수생명을 걱정하는 멘트였다. 메이저리거 선수 신분으로 미국에서 깐 거니까 미국의 반응일지도..[32]
어쨌거나 11월 3일 7차전에서 3:0으로 승리하여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함에 따라 콩라인에서 탈출하였다. 드디어 감독생활 27년, 프로야구 입문 44년 만에 일본제일이라는 평생의 목표를 실현하였다. 게다가 시리즈 상대도 그렇게 타도를 외쳤던 교진. 참으로 인간승리가 아닐수 없다.[33]
우승이 목표였던 주니치나 한신 시절과는 달리 효율적 경영을 목표로 하는 라쿠텐에서는 콩라인만 해 줘도 영구 결번 시켜줄 판에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우승까지 시켜줬으니 영구 결번에 레전드 감독 자리는 예약일 듯.
그러나 2013 아시아 시리즈 2라운드에서 대만의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에게 4:1로 패하면서 아시아 시리즈 최초로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일본팀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게다가 삼성도 호주 우승팀인 캔버라에게 덜미를 잡혀 결승이 무산되면서 이승엽과의 재대결이 무산은 덤.
2.7.2. 2014년
시즌 초반부터 요추추간판탈출증 이라는 일종의 허리디스크를 앓으면서 5월 26일자로 경기에서 빠지고 수술을 받고 요양을 가게 되었다. 당분간은 사토 요시노리 투수코치, 오쿠보 히로모토 2군 감독이 대신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다. 사실 디스크는 라쿠텐 감독을 맡기 시작했던 2011년도부터 앓고 있었다고 하며 지난해 요미우리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진통제를 먹고 출장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걷기도 힘든 상태라 올스타전 감독직을 맡는것은 불발됐다.다나카 마사히로의 부상에 대해 인터뷰를 하였다. 그리고 이 인터뷰 내용에 대해 혹사 의혹으로 논란이 상당했다.
결국 라쿠텐은 최하위로 추락하는 치욕을 당했고, 호시노는 성적부진의 책임으로 시즌 종료 후 사임을 발표하였다. 이후 10월 7일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은퇴식을 거행하며 라쿠텐에서 퇴단을 하게 되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전부터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었고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프로팀 감독을 맡기는 어렵게 되었다.
2.8. 라쿠텐 구단 GM이 되다
라쿠텐 감독 퇴임 이후 한신 시절처럼 시니어 어드바이저(SA)라는 명예직으로 활동하다가 2015년 9월 구단 부회장에 취임하며 사실상의 GM 역할을 맡게 되었다. 취임 후 신임 감독으로 나시다 마사타카 前 긴테츠, 닛폰햄 감독을 영입하고, 레다메스 리즈와 이마에 토시아키를 영입해 선발투수와 클린업 트리오의 한 축을 보강하는 데 성공했다.한가지 희망적인 게 있다면 드래프트 1순위 지명에서 센다이 출신의 히라사와 타이가를 롯데와의 경합 끝에 놓치고 대신 지명한 나이지리아계 혼혈 오코에 루이가 기존의 일본 프로야구계의 상식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성장 스피드를 보여주고 있고[36], 3순위로 뽑은 대졸 모기 에이고로가 일찌감치 유격수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2015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신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강력한 신인왕 후보가 되고 있는 등 신인 농사는 굉장히 잘 지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2016년 당장은 아니더라도 팀의 에이스인 노리모토만 큰 부상없이 건재하다면 진짜로 다음해, 다다음해에는 기대를 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2017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결정되었으며 헌액식은 나고야 돔에서 열린 올스타전 1차전에 이뤄졌다. 그 해 세이부에서 FA를 선언한 키시 타카유키를 잡는데 성공하면서 전력 강화에 성공했다. 오릭스와의 개막 3연전 스윕을 시작으로 올스타전까지 라쿠텐이 하루(7월 8일)을 제외하고 1위를 유지하면서 호시노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그러나 8월 중순 이후 팀이 무섭게 내리막길을 타면서 DTD를 시전. 다만 그렇게 DTD를 해도 4년만의 포스트시즌에 성공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2위 세이부를 업셋하고 시즌 94승의 우승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두는 등 팀을 재건하는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다.
2.9. 투장, 돌아오지 않는 별이 되다
이후로는 건강문제로 구단 운영에서 한 발짝 물러난 상태로 요양과 야구 보급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2018년 1월 4일에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췌장암.현지에서는 불과 2달 전 본인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축하하는 모임[37]까지만 해도 행사에도 출석해서 암 환자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건재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갑작스러운 부고에 상당히 충격이 큰 듯 하다. 그 때의 모습은 말기 암 투병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항암치료로 초췌해진 모습이나 복부에 복수가 차 있는 모습 등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갑작스러운 부고에 놀란 모습들.[38]
또한 사망 소식이 알려진 것은 이틀 가량 지난 1월 6일 새벽이었고, 이로 인하여 이 날 오하요 닛폰 등의 아침 뉴스에서야 사망 소식이 보도가 되었다.
구단 발표에 의하면 임종 직전까지도 "(며칠 뒤에 있을) 코칭스탭 회의에는 나갈 수나 있으려나"라면서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 앞으로의 팀 운영을 걱정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일평생을 오직 야구 하나에 정열을 바쳤던 호시노다운 마지막 한마디.
이후 라쿠텐 구단은 호시노를 추모함과 동시에 그 동안의 공적을 기려 라쿠텐 감독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77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 팬 넘버로 영구 결번시킨 10번을 뺀다면 사실상 라쿠텐의 첫 영구 결번이며,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감독으로써 영구 결번이 제정된 인물이 되었다.
3.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87 | 주니치 드래곤즈 | 130 | 68 | 51 | 11 | 리그 2위 | - |
1988 | 130 | 79 | 46 | 5 | 리그 1위 | JS 패배 | |
1989 | 130 | 68 | 59 | 3 | 리그 3위 | - | |
1990 | 131 | 62 | 68 | 1 | 리그 4위 | - | |
1991 | 131 | 71 | 59 | 1 | 리그 2위 | - | |
1996 | 130 | 72 | 58 | 0 | 리그 2위 | - | |
1997 | 136 | 59 | 76 | 1 | 리그 6위 | - | |
1998 | 136 | 75 | 60 | 1 | 리그 2위 | - | |
1999 | 135 | 81 | 54 | 0 | 리그 1위 | JS 패배 | |
2000 | 132 | 69 | 63 | 0 | 리그 2위 | - | |
2001 | 140 | 62 | 74 | 4 | 리그 5위 | - | |
통산 | 1461 | 766 | 668 | 27 | 0.534 | ||
<rowcolor=#000000>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02 | 한신 타이거스 | 140 | 66 | 70 | 4 | 리그 4위 | - |
2003 | 140 | 87 | 51 | 2 | 리그 1위 | JS 패배 | |
통산 | 280 | 153 | 121 | 6 | 0.558 | ||
<rowcolor=#ffcc00>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1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144 | 66 | 71 | 7 | 리그 5위 | - |
2012 | 144 | 67 | 67 | 10 | 리그 4위 | - | |
2013 | 144 | 82 | 59 | 3 | 리그 1위 | JS 우승 | |
2014 | 104 | 47 | 57 | 0 | 리그 6위[39] | - | |
통산 | 536 | 262 | 254 | 20 | 0.508 | ||
총계 | 2277 | 1181 | 1043 | 53 | 0.531 |
4. 기타
- 안티 거인의 선봉장 이미지가 강하지만, 나가시마 시게오나 오 사다하루 같은 거인 OB들과는 친하게 지냈다. 또한 학창 시절부터 선수 시절까지 한번도 같은 팀에서 뛴 적 없이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야마모토 코지, 다부치 고이치 등과도 대학과 프로 입단 동기로서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유명한 교우관계였다. 이러한 친목질은 호시노에게 "그라운드에서는 철저하게 승부하지만 사생활에서는 경기장에서의 일은 잊어버리고 라이벌과의 친교를 두둑히 하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상남자"의 이미지를 가져다 줬다. 친목질로 형성한 일본 프로야구 내의 인맥과 이미지는 호시노가 일본프로야구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법이었다.
- 한신의 감독으로 가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주니치의 얼굴이자 상징같은 존재였으나, 2001년 감독직 사퇴시에 구단과 모종의 알력이 있었던 듯 하다. 주니치 감독 자리를 물러날 때 호시노의 반응이 "내가 평생을 선수, OB, 감독으로서 이 팀을 위해 분골쇄신을 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대접하냐?"라는 서운한 반응을 보였다. 한신의 감독직 제안을 받았을 당시, 그래도 주니치의 상징이라는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으나 나가시마 시게오의 전화를 받고 수락을 결심했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당시 "센짱(호시노의 애칭), 뭘 고민하고 있나? 요새는 쿄진-한신 전을 전통의 일전[40]이라고 부르는 게 옛말이 되고 있다네. 자이언츠를 보라고, 열심히 하고 있잖은가" 하며 한신을 라이벌로 부활시켜 야구계를 부흥케 하자며 독려했다.[41] 한편 주니치 측에서도 호시노의 한신 감독 취임에 "팀의 간판으로서 그렇게 섭섭하게 대우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30년 가까이 정든 팀을 뿌리치고 그렇게 간단하게 다른 팀 감독자리에 앉을 수 있냐."라는 식의 반응이었고 고인이 된 지금까지도 주니치 구단이 호시노를 보는 시각은 상당히 냉담하다.[42]
- 선수들에게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고 가차없는 폭력까지 행사하는 카리스마형 감독이지만 막강한 기업가, 부자들이 많기로 소문난 자신의 후원회가 마련한 외제차 등을 수훈선수들에게 선물하는 등 채찍과 당근을 잘 배합하는 지도자였다. 참고로 말하면, 선수들을 때리더라도 그 다음날 그 선수의 출장기회를 보장해주고[43], 유부남 선수는 가족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때리지 않는 등 폭력에도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철권 감독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따르는 선수들이 꽤 많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카무라 다케시 포수(전 KIA 타이거즈 코치). 코 모양이 변했다고 하며, 현재도 야큐잇칸 등 유튜브 채널에서 구타 관련 썰을 풀기도 한다.
-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했던 듯 하다. 아무래도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이 섞여 있으면 선수들 사이에서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던 듯. 그래서 호시노가 감독으로 취임하면 기존의 고참급 선수들을 중심으로 방출 내지는 트레이드의 소용돌이가 한번 지나가고는 했다. 그리고 팀의 중심이 될 고참급 선수들은 오치아이 히로미츠나 가네모토 도모아키 등 자신이 지휘하지 않았던 타 팀에서 영입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가장 비근한 예로는 라쿠텐에 감독으로 취임하자 마자 최고참급이자 중심타자인 야마사키 타케시를 방출한 것. 야마사키는 주니치 감독시절의 제자로 개인적으로는 둘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하지는 않지만 호시노 본인이 팀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44] 그리고 팀을 이끌어갈 고참의 자리는 메이저리그에서 방출당한 마쓰이 가즈오와 이와무라 아키노리 등의 영입으로 채웠다.
- 한신 시절 주전 유격수였던 후지모토 아츠시가 유난히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벤치에서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뒤통수 맞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고. 한 카리스마 한다는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쫄게 만들 정도로 그 성질머리가 대단했다.[45]
근데 어차피 기요하라는 진짜 센 놈한테는 꼼짝도 못하는 게 현실.하지만 2003년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 후지모토가 결승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팀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데 이 때 인터뷰에서 후지모토에게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감독에게 무슨 지시를 들었냐'라는 질문에 '부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와라! 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등 위에서 기술한대로 때로는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줄 줄도 아는 감독이기도 했다.
- 초창기 주니치 감독 시절 요미우리와 벤치 클리어링이 잦았는데 호시노 감독의 성향상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때 오 사다하루 감독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이면서 '너님 나랑 맞짱깔거삼?'하고 도발하기도 했고 오 사다하루 감독이 그 기세에 위축된 모습을 보여서 요미우리 팬들은 실망&요미우리 안티팬들은 호시노 킹왕짱 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실상은 요미우리의 용병 워렌 크로마티가 빈볼을 맞자 주니치 투수인 미야시타를 주먹으로 가격했고 벤치클리어링 과정에서 호시노가 오 사다하루에게 주먹을 내밀며 "주먹으로 가격하는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어필한 것 뿐이라고. 비록 안티 거인으로 유명한 호시노이지만 선배격인 인물들에게는 굉장히 예의바르다고 한다.[46] 그 덕에 일본야구계의 마당발로 통하기도 하고...
- 선동열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선동열이 주니치에 입단했을 때 일본 적응을 많이 도와주었다. 물론 이름값같은 걸로 봐주는 게 전혀 없는 호시노답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욕 한바가지 얹은꾸지람도 아끼지 않긴 했지만. 선수에게 폭력을 쓰는 옛날 스타일 감독에게도 외국인을 때리는 건 좀 어려운 일이었던 듯 하다. 선동열의 경우엔 말로 혼나거나, 혹은 선동열이 뭔가 먹고 있으면 그 옆에 일본인 선수를 데려와서 줘패거나(...) 했다고. 그 선수한테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분명 자기도 들으라고 하는 얘기였다나.체하겠다은퇴 후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교류를 하였다. 선동열의 감독 스타일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47]
- 이상훈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선동열이 은퇴하고 이상훈을 중심으로 불펜진을 구상하던 무렵, 이상훈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이 타이밍이 예술이었다. 주니치가 센트럴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다음날 한국 신문에 1면으로 소식이 나갔던 것. 정확히 말하면 우승 확정 뒤 신나게 밖에서 술을 푸고 호텔 들어와서 한국 기자들을 풀어 미국행을 선언했던 것이다. 주니치 구단 입장에선 양 리그의 우승팀이 맞붙는 일본시리즈 준비를 시작하는 날에 사단이 났으니 민폐도 어지간히 민폐였고, 결국 그 해 주니치는 소프트뱅크에게 일본시리즈를 내주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호시노 감독은 '남자라면 더 넓은 곳에서 도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오오 상남자 오오. 여담으로 호시노는 이상훈을 사무손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건 이상훈의 별명 삼손을 일본 발음으로 한 것이다. 애초에 등록명이 '삼손 리'였다. 지금도 일본 야구 올드팬에게 말할 때는 삼손 리라고 해야 누군지 안다.[48]
- 구대성과도 잠깐 인연이 있었다. 2회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한 구대성에게 팔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투구가 읽힌다고 귀띔해줬다고 한다.
- 이종범과는 상성이 서로 맞지 않았다. 이종범은 김응룡 감독 하에서 활동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능력을 맘껏 발휘하는 자율야구에 익숙하고 이를 선호했는데, 호시노는 감독의 지시대로 선수단이 움직이도록 하는 관리야구형 감독이었기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종범은 호타준족+허슬 플레이라는 호시노 감독이 선호하는 야수의 특성을 갖고 있었기에 호시노 감독은 물리적 구타까지 동원해가며 어떻게든 써먹어보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으며,[49] 의도와 달리 부상, 부진과 함께 이종범의 플레이를 위축시키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50] 이로 인한 갈등이 꽤 유명했기에 당시 일본야구 팬덤 내에서도 이종범이 오릭스의 오기 아키라와 같이 선수 개성을 존중하는 스타일인 감독 밑에서 뛰었으면 좀더 성적이 좋지 않았을까라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 폭력 감독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기부천사 성향이 있다고 한다. 매년 고향에 있는 복지시설들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고, 선수들에게 "인생의 1%는 자원봉사에 투자하라"고 조언할 정도라고 한다. 호시노의 이러한 성향은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낸 것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51] 실제로 라쿠텐 감독 취임 첫 해 시즌 시작도 하기 전에 도호쿠 대지진으로 도호쿠 지역이 쑥대밭이 되자 2년 가까이 시즌을 치르는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선수들을 대동하고 피해지를 방문해서 이재민들을 위로, 격려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 위에 적혀있듯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평생의 적으로 여기고 요미우리 전에 나왔다 하면 말그대로 투지에 불타오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는데, 투수코치 겸임 중이었던 1981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연속 경기 득점 기록 저지[53]에 나섰으나 팀 동료 유격수 우노 마사루의
헤딩슛실책으로 기록 저지에 실패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글러브를 홈 플레이트 근처에서 내팽개친 영상이 유명하다. 우노 마사루 항목 참조.[54] 당시 선수들은 우노가 호시노에게 죽도록 맞을까봐 다들 기겁한 상황에 벌벌 떨었는데 경기 끝나고 숙소에 오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호시노는 우노의 안면에 장렬한 죽방을 날려주었다고 한다.(...) 정작 그경기에서 결국 완투승을 달성했는데 결승타점은 우노 마사루의 투런포였다. 나중에 우노 마사루가 썰을 유튜브에 풀었는데 고개를 전혀 못들 정도로 너무 기가 죽어있는 상태였다가 호시노가 우노를 보자마자 '멍청한 자식. 기운 좀 차려'라며 죽빵을 날리고선 오히려 위로해줬다고(...)
- 한신 감독 시절 당시 한신의 에이스이자 희대의 돌아이로 유명했던 이가와 게이는 "연승 중에는 머리를 깎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가 그만 12연승을 하는 바람에 3개월 동안 머리를 안 깎아서 삼손 리도 울고갈 장발이 되었다.[55] 그래서 호시노가 머리 깎고 오라고 호통쳤더니 1cm, 팬이 머리 깎으라고 이발비를 줬을때 2cm를 깎고 왔다. 결국 빡친 호시노는 이가와를 죽도록 팼다.
- 생전 술은 잘 하지 못했으나, 앨범 사진도 담배를 들고 있는 사진이었을 정도로 담배를 엄청나게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3년 우승 다큐멘터리에서는 경기가 패배로 끝나고 히로시마시의 모 고깃집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고기를 먹는 장면이 나왔는데, 타부치 코이치도 담배 끊으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끊지 못했다.
5. 관련 문서
[1] 난카이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즈,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1969년부터 1982년까지 14년간 외야수로 뛰었다. 현역 시절 친구였던 호시노, 타부치, 야마모토만큼의 커리어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통산 1000안타 등 나름의 족적을 남겼고 은퇴 후 경비회사를 창업해 연매출 1억엔에 직원이 100명에 달할 정도로 사업가로 대성했고 탤런트로도 활동했다. 2015년 5월 28일 폐암으로 사망.[2] 1968년 드래프트 당시엔 드래프트에서 중복 지명이 나왔을 시 경합으로 뽑는 제도가 없었다.(드래프트가 처음으로 열린 해인 1965~66년엔 경합 제도가 존재했었으나 이후 폐지, 1978년에 다시 도입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지명 순서가 먼저인 구단이 원하는 선수를 뽑아버리면 그 선수를 뒷순서에 있는 구단이 뽑을 수가 없었다.[3] 참고로 호시노는 어릴 적 요미우리의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었지만, 호시노가 드래프트에 참가하기 전 후지타 타이라가 메이지대학 진학을 철회하고 한신 입단으로 선회한 일 때문에 호시노의 모교인 메이지대학과 한신 타이거스가 험악한 관계가 된 탓에 만약 드래프트에서 한신이 호시노를 지명하면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로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졸 당시엔 한신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요미우리 지명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 통수로 돌아온 것. 뒷날인 2002년에야 한신 감독에 취임해 늦게나마 연을 맺게 되었다.[4] 이 해를 끝으로 오릭스 버팔로즈는 시마노를 기리는 의미(+계속되는 성적 저하로 인한 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마스코트 변경을 발표해 네피는 2010년 시즌 종료 후 마스코트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 뒤를 버팔로 불, 버팔로 벨이 이어받았다.[5] 당시 요미우리는 1965-73시즌까지 9년 연속으로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야구 역사상 다시 나오기 힘들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으며 이 시기를 일명 V9이라 부른다. 10년 연속 우승이 좌절된 1974년 시즌 종료 후 V9의 감독인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사임함과 동시에 오 사다하루와 함께 V9시대의 주축 거포로 활약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은퇴하고 감독으로 전임하게 되며 전설의 V9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6] 세이브가 엄청 적어서 저 성적으로 어떻게 수상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당시의 마무리 투수를 비롯한 구원투수들은 요즘처럼 1이닝만 던지는 게 아니라 만약 선발이 완투를 하지 못한 채 강판되면 그 남은 이닝을 책임지기 위해 2~3이닝씩 던지는 중무리 투수에 가까웠기 때문에 세이브가 성립될 상황에서 등판할 경우가 적어서 그만큼 현대의 전문 마무리에 비해 세이브 수가 현저히 적었다.[7] 여담으로 당시 롯데 오리온즈 감독은 일본프로야구 유일의 400승을 달성한 전설적인 대투수 카네다 마사이치였는데, 하필 카네다가 통산 400승을 달성할 당시 상대가 주니치 드래곤즈였고 그 경기의 패전 투수가 바로 호시노였다.[8] 패배가 결정된 6차전에서 7회부터 구원등판했다가 연장 10회에서 3루 희생타 - 2루타를 연달아 얻어맞고 결승점을 내줬고, 이것이 그대로 결승점이 되며 팀의 시리즈 패퇴를 확정시킨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9] 참고로 이 때의 세이부 감독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 모리 마사아키였다. 덤으로 이 해 세이부는 10.19 때 긴테츠 버팔로즈가 1승 1무로 머물러 간신히 우승을 차지했다.[10] 본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아내의 백혈병 발병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호시노의 아내는 투병 끝에 1997년 1월경에 세상을 떠났다.[11] 참고로 이때 감독은.. 뭐 말이 더 필요한가? 역시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OB이자 영구 결번 No. 1 왕정치. 이쯤되면 운명이다[12] 이 해 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인 5차전이.. 또 주니치의 홈구장인 나고야 돔에서 개최되었다(...) 거기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는 승리한 2차전, 다이에의 우승이 결정된 5차전을 제외한 나머지 1, 3, 4차전에서 전부 영봉패로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고, 5차전에선 1회말 1점을 먼저 얻으며 잘 나가나 싶더니 3회초 6실점이나 하면서 대역전 당했고 이후 3점을 더 얻으며 반격에 나섰으나 결국 패배했다(...) 여담으로 이 해 일본시리즈는 사상 최초로 돔구장에서만 시리즈 전 경기가 열린 시리즈였다.[13] 위에 나오듯이 한큐 브레이브스(現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던 투수로 프로 통산 284승을 기록, 언더핸드 투수 중에서는 NPB 통산 최다승 투수이다. 원래대로라면 한큐 브레이브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오릭스에서 감독직을 맡을 가능성이 컸지만, 오릭스가 한큐 색깔 지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이라... 어쨌든 호시노와의 인연으로 투수코치를 하고 있어서 감독 후보로는 물망에도 오르지 않았는데 본인도 갑작스럽게 감독을 맡은 듯. 즉 호시노의 사임에는 구단과의 알력이 작용했으며 이 때문에 감독 교체도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야마다는 성적부진으로 2003년 시즌 도중 해임당하고 말았다(...)[14] 1992년 당시 성적. 사실 이것도 그 해 세리그 우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우승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성적은 69승 1무 61패로 우승팀 치고는 그리 좋은 성적도 아니었고 1위와 최하위 주니치간의 게임차가 9.0게임밖에 나지 않았다.(당시 주니치 성적은 60승 70패) 1위 야쿠르트와 4위 히로시마와는 3.0경기차였고 히로시마조차도 66승64패의 성적으로 우승을 노릴 정도로 대 난전이었다. 이 해 한신 타이거스도 67승 2무 63패로 2위팀 치고는 승률이 높은 편도 아니었다. 그나마 그 2위도 요미우리하고 공동 2위였다.[15] 이때 감독도 오 사다하루. 이 항목을 정독해왔다면 알겠지만 호시노가 감독으로서 일본시리즈에 올랐다 하면 상대팀 감독이 죄다 교진 출신이었다.(...)[16] 7차전 상대팀의 선발 투수는 와다 츠요시였고 한신에 8안타를 맞았으나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팀을 일본제일로 이끌었다. 와다는 그 해 퍼시픽리그 신인왕에 만장일치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17] 다만, 암흑기를 끝내는 18년만의 리그 우승의 임팩트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인지, 호시노는 이 공로로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한다. 리그 우승만으로 쇼리키상을 수상한 감독은 1979년 킨테츠를 파리그 우승으로 이끈 니시모토 유키오 이후 두 번째. 마침 이 해 일본시리즈도 굉장한 명승부였다.[18] 즉, 2009년 한국시리즈처럼 전부 홈팀이 승리한 시리즈였다.[19] 사실 여유있게 우승을 차지한 정도도 아니고, 적어도 세리그에선 압도적으로 강한 전력을 과시하며 우승했다. 당장 저 매직넘버도 전반기도 다 안 지난 7월 8일(49, 당시 세리그 최단)에 켜졌고, 우승 확정도 9월 15일에 했으며, 최종 승률 .630(2위 주니치와 14.5경기차)으로 우승했다. 다만 8월에 죽음의 원정을 다니면서 그 기간에 4승 11패를 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는데, 그래봐야 고시엔에 돌아오자마자 도로 승률을 회복, 한때 17.5경기차까지 벌어졌던 승차가 14.5경기차 정도로 줄어든 정도에 그쳤으니 뭐...[20] 불과 사망 한달 반 전에 본인의 명예의 전당 입성을 축하하는 공식 행사에 나왔는데 아무도 그의 병세를 눈치채지 못했고, 사망 3주일 전에 나고야 지역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본인의 주니치 시절을 회고하는 무려 한시간짜리 대담 프로그램을 소화할 정도였다. 참고로 이 때 진행자는 호시노의 주니치 감독 시절 중계방송을 주로 담당했던 고참 아나운서 쿠노 마코토[56]로, 호시노와의 교분도 무려 40년 가까이 되는 사람이었는데도 병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평소보다 약간 수척해 보인다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70대에 접어들어 다들 나이가 들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정도. 호시노는 혼자 있을 때는 몰라도 사나이라면 남들 앞에서는 무조건 강한 모습을 보여야 된다는 것이 평생의 신조였던 사람이었다.[21] '신도캇타'는 힘들다를 의미하는 사투리 '신도이'의 과거형이다[22] 이 헹가래는 12년간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던 한 여성 팬의 소원('호시노 감독의 헹가래를 보고 싶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23] 마침 23년 한신의 감독 또한 05년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오카다였다.[24]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 선수들 중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고작 3명인데, 이승엽, 우에하라 고지, 아베 신노스케가 다였고 우에하라 고지는 2군 시절 룸메이트인 이승엽과 투타에서 같이 삽을 푸고 있어서 그랬는지 출전조차 못하고 대표팀 은퇴 선언을 해버렸다.[25] 베이징 올림픽 야구부터 도입된 제도이다. 11회에 처음부터 주자를 1, 2루에 두고 진행하는 방식으로, 일본 아마야구의 규칙에서 유래했다. 자세한 방식은 승부치기 문서 참조.[26] 김경문 감독은 두산 베어스를 이끌고 한국시리즈까지는 잘 이끌어갔으나 2005년과 2007년 두 번 연속으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덤으로 올림픽이 열린 2008년에도 한국시리즈까지 갔지만 또 준우승했다. 다만 김경문의 연이은 준우승은 단기전 운영 능력 부재보다는 정규시즌의 선수단(특히 투수진) 혹사 여파가 포스트시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평이 많다. 하지만 13년 후에 이것을 돌아보면 호시노는 결국 우승을 하고 타계했고, 김경문은 끝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지 못하고 2021년 본모습을 드러내고 만다.[27] 그리고 4년 뒤에는 또 다른 구기 종목에서 똑같은 사태가 벌어졌다.[28] 징병제 이야기가 왜 나왔냐면 한국은 병역면제가 걸려있기에 누구보다도 동기부여가 강한 반면 일본은 그런 게 없어서 근성이 없다는 것. 이를 비하적 뉘앙스가 담긴 말인 헤이와보케(平和ボケ)로 표현했다. 이는 분명히 일본의 우경화 및 근성론과 엮어서 생각하면 문제가 있는 부분이고, 이와 별개로 호시노의 야구팀 운영 근성론과 철권 통치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자주 나온다.[29] 어쨌거나 호시노가 감독자리에 앉고나서 그 성질머리를 배겨내지를 못했는지 감독 취임 조건이었는지 과거보단 조금 지름의 폭을 넓히기는 했다. 노무라가 감독할 때 그렇게 좀 하지?[30] 당장 연고지인 미야기는 개박살났고 거기다가 홈구장인 미야기 구장마저도 파손. 결국 먼 동네 인기없는 친구들의 제2홈구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써야 했다..[31] 시리즈 후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다나카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호시노가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마운드 운용을 했다고 한다. 어째 신시내티의 빵감독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32] 설령 다르빗슈 유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을 공개석상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야구인은 일본에서는 소수파이다. 그나마 다르빗슈는 이란인 아버지를 둔 입장에서 다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느정도 스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발언에 영향력이 생긴 이후로는 다른 일반적인 일본 야구인들과는 약간 다른 주장을 해오고 있으며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이러한 점도 일반적인 일본 야구인과는 약간 다른 점. 물론 토종 일본 야구인 중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긴 있다. 바로 기요하라 카즈히로와 KK콤비를 이룬 일본 야구 내에서도 괴짜, 이단아 취급을 받는 구와타 마스미(전 요미우리)이다. 근데 구와타도 일본프로야구에서만 선수 생활을 한 게 아니라 선수 생활 말기에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뛰면서 미국 야구를 경험한 선수이긴 하다.[33] 이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교진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자 성골인 보살동님 하라 다쓰노리, 공교롭게도 호시노가 한신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2003년에 하라 역시 요미우리의 감독이었고 결국 그해 시즌이 끝난 뒤 둘 다 감독에서 물러났다[34] 왕정치, 모리 마사아키, 히로오카 타츠로, 김경홍, 이승엽 등.[35] 나시다가 감독을 맡은 팀들은 전부 2년차에 리그 우승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근데 문제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했지. 또한 라쿠텐 항목에 나온 감독들의 사이클을 보면 무능한 감독이 1년을 말아먹은 뒤에 유능한 감독이 취임해서 3년차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징크스가 있다. 내년에 안 되더라도 다음 해에 희망을 가지자.[36] 스프링 캠프 때 까지는 천부적인 툴은 좋지만 타격자세에 문제가 많아 교정하려면 1~2년 정도는 걸리며 주전으로 정착하려면 3년 후쯤이나 돼야 할 것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불과 3개월만에 타격폼을 교정하고 고졸임에도 1군 클래스로 손색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또한 인터뷰 스킬도 좋고 상당히 모범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장차 구단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후보로서 기대가 큰 상황. 허나 여자친구와 여행을 간 게 신문에 보도되어 잠시 뉴스에 나기도 했다. 그리고 오코에는 프로 4년차가 되도록 주전을 먹지 못하며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다행인 건 히라사와도 거기서 거기라..[37] 2017년 11월 28일에 열렸으니 사망 시점까지 1달 반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38] 라쿠텐 구단에 의하면 2016년 7월에 급성췌장염으로 병원에 갔다가 췌장암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업무 수행에 지장은 없는 상태였으나 2017년 12월 말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한다.[39] 시즌 중 허리디스크로 요양[40] 이 전통의 일전은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요미우리, 한신 측에서 브랜드화하여 마케팅에 활용 중이다.[41] 나가시마도 어릴때 호시노처럼 한신 팬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팬심을 개입시켜서 한신팬으로 자란 호시노에게 한신 감독직을 권유한 것. 마쓰이 히데키 교진행 설득이 의외로 쉬웠던것도 그런 이유.[42] 호시노의 서거 이후, 시범경기 때 열릴 추모시합 이외에도 호시노를 기리는 추모의 모임을 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라쿠텐 이글스가 도쿄에서, 한신 타이거스가 오사카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정작 호시노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나고야의 주니치 드래곤즈는 다른 때도 아니고 스프링 캠프 때 추모예정을 가지는 것 이외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심지어 평생의 라이벌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구단 차원에서 추도문을 보내고 애도를 표했고 당시 요미우리 고문인 하라보살이 3일내내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다.그러고선 16억엔 먹튀를 데려오자며 안간힘을 쓰는 데에 온힘을 다함과 더불어 구단 레전드를 설마하니 데려갈 곳이 있겠나며 보호선수 명단에서 뺐다가 FA 보상선수로 뺏길 뻔하는 등의 막장행보를 보이고 있다. 진짜 지금의 NPB에 이것들만큼 적폐라는 말이 어울리는 놈들이 없다.[43] 이게 2008 베이징 올림픽 목메달의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됐다. 준결승에서 결정적 실책을 저지른 G.G.사토더러 명예를 회복하라고 다음날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그대로 선발 좌익수로 출전시켜줬지만 그 경기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주니치 감독 시절에도 우노 마사루가 실책할 때마다 아구창을 줄기차게 털었음에도 주전 보장은 제대로 해줬다.[44] 그래도 야마사키는 방출통보받고 퇴단회견때 라쿠텐과 호시노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고향팀이자 가장 오래 몸담은 주니치로 복귀해서 2년더 뛰고 은퇴했다.[45] 한신 감독 시절 요미우리와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는데 기요하라가 나서려는 찰나에 호시노가 뒷덜미를 잡고 "이미 끝났어 이 바보야!!(終わっとるんじゃこのボケ!)" 라고 외치며 기요하라를 끌어내버렸다. 기요하라조차 호시노 앞에서는 아무말도 못하고 데꿀멍했을 정도다.[46] 마찬가지로 하라보살도 호시노에게 깍듯하다.[47] 대표적인 게 감독 부임 후 팀의 프랜차이즈 고참 선수를 정리하고, 이적생 출신 중견 선수로 그 자리를 메꾼 것.[48] 그런데 하필 일본의 유명 게이잡지 이름이 삼손이라서 상당히 껄끄럽다.[49] 이종범은 자신이 타이거즈의 최고참이 되자 해태시절부터 지독하기로 유명했던 타이거즈 팀 내의 구타문화를 없애버렸을 정도로 구타에 거부감이 있었다.[50] 국내 복귀 이후 이종범은 주니치 시절이 어지간히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호시노를 만나는 꿈을 꿀 때마다 경기가 안 풀리는 징크스가 생긴 듯하다. 2003년, 2010년[51] 실제로 호시노의 성씨는 어머니의 성씨를 이어받은 것으로, 여동생 2명은 아버지의 성씨였던 마사다(正田)를 이어받았다.[52] 1001을 일본어로 읽으면 '센이치'가 된다.[53] 당시 에이스이자 절친이었던 고마쓰 다쓰오와 내기를 했다고 한다. 결국 고마츠가 무실점 완봉에 성공했는데 이때도 우노 마사루가 결승홈런을 쳤다.[54] 한신 버전으로는 시모야나기 츠요시도 있다.[55] 삼손 리(이상훈)은 주니치 시절 호시노 밑에서 야구를 했다. 다만 이상훈과 다르게 이가와는 머리 관리를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