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우치 츠네오의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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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시리즈 우승반지 |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 1981 |
일본시리즈 우승코치 |
1994 |
1965년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 → | 1966년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 → | 1967년 오가와 켄타로 (주니치 드래곤즈) |
1971년 수상자 없음 | → | 1972년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73년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66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신인 | ||||
수상자 없음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타케가미 시로 (산케이 아톰즈)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승리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13승 |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24승 | 니시무라 유키오 오사카 / 15승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5승 노구치 아키라 도쿄세네터즈 / 15승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4승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9승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42승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38승 | 모리 코타로 한큐군 / 30승 | 노구치 지로 타이요군 / 40승 |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34승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와카바야시 타다시 한신군 / 22승 | 시라키 기이치로 세네터즈 / 30승 | 벳쇼 타케히코 난카이 / 30승 | 카와사키 토쿠지 나카오 히로시 요미우리 / 27승 | 빅토르 스타루힌 다이에이 / 27승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사나다 쥬조 쇼치쿠 / 39승 | 스기시타 시게루 나고야 / 28승 |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33승 | 오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27승 | 스기시타 시게루 나고야 / 32승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오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30승 하세가와 료헤이 히로시마 / 30승 |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27승 |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28승 |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31승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 27승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호리모토 리츠오 요미우리 / 29승 | 곤도 히로시 주니치 / 35승 | 곤도 히로시 주니치 / 30승 |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30승 | 진 바키 한신 / 29승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25승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24승 | 오가와 켄타로 주니치 / 29승 | 에나츠 유타카 한신 / 25승 |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 22승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 25승 |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 17승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26승 | 에나츠 유타카 한신 / 24승 | 마츠모토 유키츠라 주니치 / 20승 카네시로 모토야스 히로시마 / 20승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 20승 | 이케가야 코지로 히로시마 / 20승 | 타카하시 사토시 히로시마 / 20승 | 노무라 오사무 타이요 / 17승 | 코바야시 시게루 한신 / 22승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16승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20승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20승 | 엔도 카즈히코 타이요 / 18승 | 엔도 카즈히코 타이요 / 17승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17승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18승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17승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18승 이토 아키미츠 야쿠르트 / 18승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20승 니시모토 타카시 주니치 / 20승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20승 |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 17승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17승 | 이마나카 신지 야마모토 마사 이상 주니치 / 17승 노무라 히로키 요코하마 / 17승 |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 19승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18승 | 사이토 마사키 발비노 갈베스 요미우리 / 16승 |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 18승 | 카와사키 켄지로 야쿠르트 / 17승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20승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멜빈 번치 주니치 / 14승 | 후지이 슈고 야쿠르트 / 14승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17승 케빈 호지스 야쿠르트 / 17승 | 이가와 케이 한신 / 20승 |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 17승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쿠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 15승 시모야나기 츠요시 한신 / 15승 |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 17승 | 세스 그레이싱어 야쿠르트 / 16승 | 세스 그레이싱어 요미우리 / 17승 | 요시미 카즈키 주니치 / 16승 타테야마 쇼헤이 야쿠르트 / 16승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15승 | 요시미 카즈키 주니치 / 18승 우츠미 테츠야 요미우리 / 18승 | 우츠미 테츠야 요미우리 / 15승 | 오가와 야스히로 야쿠르트 / 16승 | 랜디 메신저 한신 / 13승 야마이 다이스케 주니치 / 13승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15승 | 노무라 유스케 히로시마 / 16승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7승 | 오세라 다이치 히로시마 / 15승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5승 | 야마구치 슌 요미우리 / 15승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4승 | 아오야기 코요 한신 / 13승 쿠리 아렌 히로시마 / 13승 | 아오야기 코요 한신 / 13승 | 아즈마 카츠키 DeNA / 16승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5승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아라마키 아츠시 마이니치 / 26승 | 에토 하루야스 난카이 / 24승 | 노구치 마사아키 니시테츠 / 23승 | 카와사키 토쿠지 니시테츠 / 24승 | 타쿠와 모토지 난카이 / 26승 타나카 후미오 킨테츠 / 26승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타쿠와 모토지 난카이 / 24승 | 미우라 마사요시 다이에이 / 29승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35승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33승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38승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오노 쇼이치 다이마이 / 33승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42승 | 쿠보 마사히로 킨테츠 / 28승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28승 | 코야마 마사아키 도쿄오리온즈 / 30승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오자키 유키오 토에이 / 27승 | 요네다 테츠야 한큐 / 25승 | 이케나가 마사아키 니시테츠 / 23승 | 미나가와 무츠오 난카이 / 31승 |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24승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나리타 후미오 롯데 / 25승 | 키타루 마사아키 롯데 / 21승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0승 카네다 토메히로 토에이 / 20승 | 나리타 후미오 롯데 / 21승 | 카네다 토메히로 롯데 / 16승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히가시오 오사무 타이헤이요클럽 / 23승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6승 |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20승 |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25승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1승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키다 이사무 닛폰햄 / 22승 | 이마이 유타로 한큐 / 19승 무라타 쵸지 롯데 / 19승 | 쿠도 미키오 닛폰햄 / 20승 |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18승 야마우치 카즈히로 난카이 / 18승 | 이마이 유타로 한큐 / 21승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사토 요시노리 한큐 / 21승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 16승 | 야마오키 유키히코 한큐 / 19승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 15승 니시자키 유키히로 마츠우라 히로아키 닛폰햄 / 15승 | 아와노 히데유키 킨테츠 / 19승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 18승 노모 히데오 킨테츠 / 18승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17승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18승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17승 노다 코지 오릭스 / 17승 | 이라부 히데키 롯데 / 15승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킵 그로스 닛폰햄 / 16승 | 킵 그로스 닛폰햄 / 17승 |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15승 코이케 히데오 킨테츠 / 15승 |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13승 타케다 카즈히로 다이에 / 13승 쿠로키 토모히로 롯데 / 13승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16승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14승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15승 | 제레미 파웰 킨테츠 / 17승 | 사이토 카즈미 다이에 / 20승 | 이와쿠마 히사시 킨테츠 / 15승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18승 | 사이토 카즈미 소프트뱅크 / 18승 | 와쿠이 히데아키 세이부 / 17승 |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21승 | 와쿠이 히데아키 세이부 / 16승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17승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17승 | D.J. 홀튼 소프트뱅크 / 19승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19승 | 셋츠 타다시 소프트뱅크 / 17승 |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24승 |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16승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15승 와쿠이 히데아키 롯데 / 15승 |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15승 | 히가시하마 나오 소프트뱅크 / 16승 키쿠치 유세이 세이부 / 16승 | 타와타 신사부로 세이부 / 16승 | 아리하라 코헤이 닛폰햄 / 15승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센가 코다이 이시카와 슈타 소프트뱅크 / 11승 와쿠이 히데아키 라쿠텐 / 11승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8승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5승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6승 | 이토 히로미 닛폰햄 / 15승 아리하라 코헤이 소프트뱅크 / 14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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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우수방어율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0.79 |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0.81 | 니시무라 유키오 오사카 / 1.48 | 니시무라 유키오 오사카 / 1.52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05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와카바야시 타다시 오사카 / 1.09 | 노구치 지로 츠바사군 / 0.93 | 노구치 지로 타이요군 / 0.88 | 하야시 야스오 아사히군 / 1.01 |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0.73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와카바야시 타다시 한신군 / 1.56 |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2.11 | 시라키 기이치로 토큐 / 1.74 | 나카오 히로시 요미우리 / 1.84 | 후지모토 히데오 요미우리 / 1.94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오오시마 노부오 쇼치쿠 / 2.03 | 마츠다 키요시 요미우리 / 2.01 | 카지오카 타다요시 오사카 / 1.71 | 오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1.85 |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 1.39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1.33 | 와타나베 쇼조 오사카 / 1.45 |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1.63 |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1.30 | 무라야마 미노루 오사카 / 1.19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 1.75 | 곤도 히로시 주니치 / 1.70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1.20 | 카키모토 미노루 주니치 / 1.70 | 진 바키 한신 / 1.89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카네다 마사이치 요미우리 / 1.84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1.39 | 곤도 마사토시 한신 / 1.40 |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 1.94 | 에나츠 유타카 한신 / 1.81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0.98 | 후지모토 카즈히로 히로시마 / 1.71 | 야스다 타케시 야쿠르트 / 2.08 | 야스다 타케시 야쿠르트 / 2.02 | 세키모토 시토시 요미우리 / 2.28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아니야 소하치 한신 / 1.91 | 스즈키 타카마사 주니치 / 2.98 | 니우라 히사오 요미우리 / 2.32 | 니우라 히사오 요미우리 / 2.81 |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 2.39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마츠오카 히로무 야쿠르트 / 2.35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2.29 | 사이토 아키오 타이요 / 2.07 | 후쿠마 오사무 한신 / 2.62 | 코바야시 세이지 히로시마 / 2.20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2.65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2.43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 2.17 |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 1.70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1.62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2.17 |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 2.44 | 나리타 코키 타이요 / 2.05 |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 2.05 | 카쿠 겐지 주니치 / 2.45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테리 브로스 야쿠르트 / 2.33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2.36 |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 2.85 |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 2.34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2.09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이시이 카즈히사 야쿠르트 / 2.61 |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 2.46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 2.22 | 이가와 케이 한신 / 2.80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2.60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미우라 다이스케 요코하마 / 2.52 | 쿠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 1.85 | 타카하시 히사노리 요미우리 / 2.75 | 이시카와 마사노리 야쿠르트 / 2.68 | 천웨이인 주니치 / 1.54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2.21 | 요시미 카즈키 주니치 / 1.65 |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1.53 |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2.10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2.33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크리스 존슨 히로시마 / 1.85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2.01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59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2.14 | 오노 유다이 주니치 / 2.58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오노 유다이 주니치 / 1.82 | 야나기 유야 주니치 / 2.20 | 아오야기 코요 한신 / 2.05 | 무라카미 쇼키 한신 / 1.75 | 타카하시 히로토 주니치 / 1.38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아라마키 아츠시 마이니치 / 2.06 | 유키 스스무(1) 난카이 / 2.08 | 유키 스스무 난카이 / 1.91 | 카와사키 토쿠지 니시테츠 / 1.98 | 타쿠와 모토지 난카이 / 1.58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나카가와 타카시 마이니치 / 2.08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06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37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42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1.40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오노 쇼이치 다이마이 / 1.98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69 | 쿠보타 오사무 토에이 / 2.12 | 쿠보 마사히로 킨테츠 / 2.36 | 츠마시마 요시로 도쿄 오리온즈 / 2.15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미우라 키요히로 난카이 / 1.57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79 |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 1.75 | 미나가와 무츠오 난카이 / 1.61 | 키타루 마사아키 롯데 / 1.72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사토 미치오 난카이 / 2.05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37 | 세이 토시히코 킨테츠 / 2.36 | 요네다 테츠야 한큐 / 2.47 | 사토 미치오 난카이 / 1.91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무라타 쵸지 롯데 / 2.20 | 무라타 쵸지 롯데 / 1.82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28 |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2.02 | 야마구치 테츠지 킨테츠 / 2.49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키다 이사무 닛폰햄 / 2.28 | 오카베 노리아키 닛폰햄 / 2.70 | 타카하시 사토시 닛폰햄 / 1.84 |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2.92 | 이마이 유타로 한큐 / 2.93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2.76 | 사토 요시노리 한큐 / 2.83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2.41 | 코노 히로후미 닛폰햄 / 2.38 | 무라타 쵸지 롯데 / 2.50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2.91 | 와타나베 토미오 세이부 / 2.35 | 아카호리 모토유키 킨테츠 / 1.80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2.06 | 신타니 히로시 세이부 / 2.91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이라부 히데키 롯데 / 2.53 | 이라부 히데키 롯데 / 2.40 | 코미야마 사토루 롯데 / 2.49 | 카네무라 사토루 닛폰햄 / 2.73 | 쿠도 키미야스 다이에 / 2.38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에비스 노부유키 오릭스 / 3.27 | 네이선 민치 롯데 / 3.26 | 카네다 마사히코 오릭스 / 2.50 | 사이토 카즈미 다이에 / 2.83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2.83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2.90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2.11 | 사이토 카즈미 소프트뱅크 / 1.75 | 나루세 요시히사 롯데 / 1.82 |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1.87 | 다르빗슈 유 닛폰햄 / 1.73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다르빗슈 유 닛폰햄 / 1.78 |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1.27 | 요시카와 미츠오 닛폰햄 / 1.71 |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1.27 |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1.98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2.24 | 이시카와 아유무 롯데 / 2.16 | 키쿠치 유세이 세이부 / 1.97 | 키시 타카유키 라쿠텐 / 2.72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95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센가 코다이 소프트뱅크 / 2.16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39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68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21 | 리반 모이넬로 소프트뱅크 / 1.88 | |
(1) 당해 수치상 방어율 1위는 같은 팀 소속의 핫토리 타케오(服部武夫, 155이닝 2.03)였으나, 당해 한정으로 최우수방어율 타이틀 대상을 소속 구단의 시합수+60이닝 이상을 소화한 선수로 규정하여 규정상 소화 이닝에 미달한 탓에(164이닝, 당해 난카이의 시합 수인 104시합에 60이닝 추가) 198.1이닝을 던진 유키가 대신 타이틀을 수상했다. |
}}}}}}}}}}}} ||
1966~1967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 ||||
야마나카 타츠미 (주니치 드래곤즈)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시마다 겐타로 (타이요 훼일즈) |
1972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 (MVP) |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72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투수 | ||||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훼일즈)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74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투수 | ||||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72~1978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다이아몬드 글러브 | ||||
상 제정 | → | 2013~2022 호리우치 츠네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1979~1985 니시모토 타카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72년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 ||||
1970~1971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훼일즈)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73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74년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 ||||
1973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75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72~1973년 일본시리즈 MVP | ||||
스에츠구 토시미츠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히로타 스미오 (롯데 오리온즈) |
1970~1973년 일본시리즈 최우수 투수 | ||||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
}}} ||
호리우치 츠네오 堀内恒夫 | Tsuneo Horiuchi | |
생년월일 | 1948년 1월 16일 ([age(1948-01-16)]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야마나시현 코후시 |
학력 | 코후시립 코후 상업고등학교 |
투타 | 우투우타 |
포지션 | 투수 |
프로입단 | 1965년 드래프트 1위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6~1983)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1984~1985, 1993~1997)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1998)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4~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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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및 정치인. 현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 위원장2. 학창시절
야마나시현 코후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우동 만드는 기계에 오른손 검지가 1cm 정도 잘리는 부상을 입었는데, 사고로 변형된 검지를 역으로 활용하여 현역 시절 엄청난 낙폭의 드롭커브를 개발하여 주무기로 활용했다.[1] 고후 상고 1학년 때인 1963년부터 에이스 자리를 꿰차고 그해 하계 코시엔 예선대회에서 우승하며 꿈에도 그리던 고시엔 구장의 흙을 밟아보는 꿈을 이루나 싶었는데, 하필 이 해 대회가 기념대회로 개최되어 각 현당 1개교로 출장권이 늘어나면서[2] 48개 학교가 참가하는 바람에 한신 고시엔 구장만으로는 경기 운영이 어려워 한큐 브레이브스의 홈구장이던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까지 포함하여 분산 개최되었다. 이때 호리우치가 소속된 코후 상고는 니시노미야 조에 편입되는 바람에 3차전까지 이겨 8강에 진출해야 고시엔 구장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 3차전에서 이해 우승팀 메이세이 고교에게 11대 0으로 대패하며 결국 한신 코시엔 구장 그라운드를 밟지 못한 채 고교생활을 마무리지어야 했다.참고로 이 에피소드는 아래에 따로 설명하지만 거인의 별 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3. 프로 시절
196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하여 그 해 16승 2패, 평균자책점 1.39의 성적으로 신인왕과 사와무라상을 동시에 석권하며 일약 3대 괴동[3]으로 도약하며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일본시리즈 V9를 견인하기도 했다. 이 해에 데뷔 후 1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릭 밴덴헐크가 2016년 시즌 14연승으로 갱신할 때까지 타이기록도 용납치 않았던 기록이었다.
1972년에는 26승[4]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데뷔 이후 1978년까지 13년 연속 두자리 승수를 챙기며 18시즌 동안 개인통산 203승 139패 6세이브, 탈삼진 1865개,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했다.
실력은 좋지만 입이 너무 가벼워서 구설수에 자주 오르기도 했는데, 팀 선배인 오 사다하루나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대든다거나, 데뷔 첫 등판에서 긴장감을 줄인답시고 연습 투구때 대 선배이자 명포수인 모리 마사아키를 앞에 두고 공을 일부러 백 네트에 던졌다는 등등의 얘깃거리가 수두룩 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프로도 별거 아니다라는 말. 기숙사 생활 시절, 폐문시간 파기의 상습범으로서 알려져 있고 사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목욕탕 창문으로부터 들어갔다든가, 빠져나가기 위해 사다리를 구매했다던가, 기다리고 있던 팀 선배 오 사다하루에게 걸려 맞았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팀에서는 폐문시간을 한 번 어기면 8만엔, 2번째는 16만엔으로 회를 거듭할 때 마다 벌금이 배가 되는 징벌을 내리고 있었는데, 호리우치의 매월 실수령액은 30만엔 전후였기 때문에, 한동안 급료 봉투에 마이너스 6만엔으로 쓴 종이가 들어가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본인은 노력없이 재능 만으로 선수 생활을 해왔다고 당당히 말할 정도였다.
다만 이게 빈말은 아닌게 실제로 호리우치의 성적을 보면 데뷔 초창기가 오히려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걸 알수있다. 커리어 중반기(20대 중반) 이후로는 사실 이름값에 비해 영 모자란 활약을 보여줬고 30줄 넘어가는 순간 급격하게 하락세가 와서 명구회 가입조건인 200승도 간신히 채웠다.[5] 연도별 성적 추이만 놓고 보자면 정말 특별한 노력 없이 신인시절 엄청난 성적을 거둔 재능만으로 선수생활을 유지했다는 말이 과언은 아닌듯 싶다.[6]
거기에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경기에 나오며 당시 요미우리 수뇌진들과 OB들이 뭐 저딴놈이 다 있냐고 디스했지만 데뷔하자 마자 요미우리를 대표하는 간판투수로 자리 잡으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호리우치가 현역이던 시절의 요미우리는 더 엄격해서 복장부터 FM으로 철저히 지켜야 했는데[7] 그걸 대놓고 어긴 선수 1호가 바로 호리우치 였다.
4. 현역 은퇴 이후
1983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으며, 그 이후 요미우리 투수코치, 수석코치와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2004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했다.2004년 키요하라 카즈히로, 터피 로즈, 에토 아키라, 아베 신노스케, 니오카 토모히로, 타카하시 요시노부, 로베르토 페타지니, 코쿠보 히로키등 리그를 지배하던 강타자들을 수집한 핵타선을 구축하며 그해 NPB 통산 최다인 259개의 팀 홈런을 기록했지만 정작 팀 성적은 지난 해의 하라와 동일한 3위에 그쳤고, 다음해인 2005년엔 구단 역대 시즌 최다패인 80패를 기록하며 5위로 추락하는 등 최악의 성적만 남긴 채 2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위에서도 언급됐듯 팀의 파괴력 자체만 놓고보면 역대 최강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공격력에 몰빵한 나머지 주루, 수비 구성 등의 다른 요소가 너무도 부족했다. 당장 역대 최고인 259홈런을 친 2004년엔 정반대로 역대 최저인 25도루에 그쳤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만큼 준수한 1루수비를 보여주던 페타지니를 키요하라와 병용한답시고 1루나 좌익이 아닌 우익수로 기용하거나 타카하시 요시노부와 터피 로즈를 동시에 기용하기 위해 우익수로도 수비 잘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던 로즈를 어거지로 중견수에 놓는 등 공격력을 살린답시고 수비 구성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이 외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005년 시즌 유니폼, 검은색 유니폼 등으로 1975년 팀 창단 최초 꼴찌와 더불어 구단에 매우 치욕적인 흑역사를 만들어 낸 감독. 참고로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 유일하게 통산승률이 5할 미만인 감독이며(133승 144패) 양대리그 시대 이래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적이 없는 유일한 감독인 데다가 타카하시 요시노부[8]와 함께 일본시리즈 우승은 커녕 센트럴리그 우승 경력도 없는 유이한 감독이다. 재임기간이 2년밖에 안 된 점과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2007년부터 시작된 걸 감안해도 너무나 초라한 기록. 여기에 재임기간 2년 동안 팀 방어율이 2004년 4.50, 2005년 4.80로 치솟는 등 투수진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는데, 사실상 호리우치 체제의 2년 동안 그 막강한 공격력에도 불구하고 팀이 전혀 반등하지 못했던 큰 원인이며 당시가 래빗볼 시대로 불리는 극악의 타고투저였음을 반영해도 전혀 좋지 않은 기록이다.
인기도 더럽게 없어서 안 그래도 하락하던 요미우리 경기의 중계 시청률이 호리우치의 재임하는 동안 곤두박질을 쳐서 일본 프로야구 위기론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감독 시절 자체가 흑역사. 2003년 시즌 하라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둔데다 호시노의 한신 타이거스가 시즌 개막 초부터 치고 나가면서 18년 만의 우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본 스포츠 매체의 관심이 한신에 집중된 덕분에 요미우리의 인기하락과 TV중계 시청률이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를 가져오자, 그다지 나쁜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련의 부진의 책임을 전부 하라에게 뒤집어 씌워서 감독직에서 나가게 만든 것이 화근. 결국 뚜렷한 비전도 없이 일단 덮어놓고 부진의 책임을 감독에게 전가하여 잘라놓고 보니 마땅히 준비된 후임 감독도 없던 터라 급하게 감독으로서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호리우치[9]에게 일단 감독을 맡기고 본 순간부터 이 흑역사는 예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리우치의 역량 자체도 문제였으나 근본적으로는 책임 회피를 위한 프런트의 삽질+구시대적 순혈주의를 고집한 악습이 구단의 성적은 물론 이미지까지 깎아내리게 만든 참사.
이처럼 팀 구성 자체가 중구난방으로 짜여 혼란스럽다 보니 팀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많아서 당시 선수단의 리더격이던 키요하라 카즈히로와의 불화는 말할 것도 없고 터피 로즈도 코칭스탭과의 불화를 일으켜 두 사람 모두 호리우치의 퇴임과 동시에 불명예스럽게 퇴단하게 되는 등 팀의 분위기 자체가 박살나 버렸다. 결국 호리우치 체제에서 감독과 프런트가 벌인 삽질은 2006년 하라 타츠노리가 재취임하여 겨우겨우 수습했다. 호리우치의 감독 시절 업적이라고는 단지 우츠미 테츠야, 카메이 요시유키 등의 신진 선수들에게 성장할 기회를 준 정도뿐인 셈이다.
그래도 불명예스러운 감독 시절과는 별개로 현역 시절의 성적은 어찌됐든 V9의 에이스답게 뛰어났기 때문에 2008년 일본야구전당에 입성하였다.
2010년 7월, 참의원 선거 유세중이던 호리우치.
이후 니혼TV 해설가로 활동하던 중, 2010년 7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유민주당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정계 진출을 노렸는데, 개표 결과 비례대표 13위로 아깝게 낙선했다가[10][11] 2013년 7월 31일 자유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이던 나카무라 히로히코의 사망으로 의원직을 승계하는 방식으로 2013년 8월 6일 정계 입문에 성공하여 감격의 의원 취임 선서를 할 수 있었다. 잔여임기 승계이므로 2016년 7월 25일까지 임기 보장.
이후 2016년 6월 22일, 참의원 재선 도전을 선언했으나# 꽤 큰 차이로 낙선했다. 참의원 임기 종료 후엔 또다시 해설가/평론가로 활동 중.[12]
5. 에피소드
- 거인의 별에서는 휴마의 입단테스트 상대로 첫 등장. 자기는 못가봤던 코시엔에 나간 휴마에게 열폭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인다. 작중에서는 휴마와 함께 거인의 원투펀치로 활약하지만 작품의 특성상 그리 많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거인의 별 후반부가 연재되던 시기에는 이미 전성기가 지났으며, 현실에서도 에이스의 자리를 에가와에게 물려준 상황이었던 것도 영향이 있었다.
- 은퇴 경기에서 홈런을 날린 호리우치
투수로서도 대단한 업적을 쌓았지만 만약 타자를 했더라도 매년 30홈런 이상을 기대했을 만큼 타격 또한 대단했던 선수이다. 투수로써 한 경기 3홈런 기록까지 있을 정도다.
1967년 10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홈 경기 때 선발 등판하여 경기 후반까지 무려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정작 호리우치 본인은 덕아웃에서 "지금 노히트 노런 이라고 시끄러운데 그거 혹시 내 얘기인가?" 라고 묻자[13] 동료들이 어이 없다는 듯 "너야 너! 네가 지금 노히트 노런 중이라고!"라고 핀잔을 줬다. 그러자 호리우치는 "아 나였구나. 사실 노히트 노런 말고 다른 것에 신경이 쓰여서..."라고 했는데 그 날이 바로 호리우치가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날 이었다. 2, 4, 6회말에 전부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때린 호리우치는 당시까지 오 사다하루 이외엔 유래가 없는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을 노리고[14] 7회말 4번째 타석에 들어섰는데, 결과는 중견수 앞 안타. 투수임에도 4타수 4안타라는 말도 안되는 맹타를 기록했지만 정작 4연타석 홈런에 실패한 호리우치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된거 노히트 노런이나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완투하여(이미 스코어도 11-0으로 크게 이기고 있었다) 결국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고 한다.
1973년 난카이 호크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선 2차전 7회말 무사 만루에서 구원 등판해 5이닝 무자책 승리투수가 됐는데 연장 11회초에 1사 2루에서 결승 적시타를 기록했으며 이틀 뒤인 3차전에선 선발 등판하여 2실점 완투승에 3회말 솔로 홈런, 6회말 투런 홈런을 날렸다. 이 또한 일본시리즈에서 투수가 한 경기에 멀티홈런을 기록한 유일한 사례. 결국 3경기 등판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91에 타율도 0.429(7타수 3안타 2홈런) 4타점으로 2년 연속 일본시리즈 MVP를 획득했다.
뿐만 아니라 은퇴경기에서도 8회 초에 3점 앞선 상황에서 등판해 8회 말 타석에서 홈런을 치고 2이닝을 막아 세이브를 기록하는 진기록까지 달성했다.
호리우치의 현역 시절 타격 성적은 1010타석 174안타 21홈런 82타점 타율 .172로 투수임을 감안하면 매우 준수한 성적. 무엇보다 통산 20개의 홈런을 치려면 매년마다 최소 한두개 정도는 때려줘야 하는데 이는 피칭에 집중해야 할 투수 입장에서는 거의 불가능이나 다름없다.
- 현역시절 꼴통짓만 골라서 했던데다[15] 선배들에게 대든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몰래 외박을 나가다 오 사다하루 에게 강펀치를 맞고 기절한 적도 있었다. 그에 대한 복수였는지 오 사다하루의 은퇴식 때 배팅볼을 던졌는데 예의상 홈런을 맞아줘야 하는 타이밍에서 143km짜리 고속구와 드롭볼로 삼진을 시켜버리고 실실 웃었고 그 다음에 서로 타석과 마운드를 바꿔서 오 사다하루가 피칭을 했는데 그걸 통타해서 홈런을 쳐버리고는 베이스를 돌면서 오 사다하루에게 썩소를 날렸다. 일본 토크프로에도 개그 요소로 쓰였을 정도로 나름 재밌는 일화다.
- 현역 시절 적어도 경기 중에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던 호리우치는 대부분의 우완 투수들이 힘들어하는 3루 측으로 치우친 번트 또는 땅볼 수비를 훌륭하게 잘 처리했다. 상당히 많은 투수들이 땅볼 또는 번트 수비에 약점을 보이는 것을 생각한다면 과연 야잘잘.[16] 하지만 그는 신인 시절 3루와 투수 사이로 느리게 흐르는 땅볼 만큼은 잡으러 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팀 선배이자 레전드 3루수였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그 위치는 3루수인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공을 잡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 타격 못지않게 뛰어난 3루 수비로 유명했고 거기에 자부심을 느낀 나가시마였기 때문에 그런 엄명을 내린 것인데, 어이가 없어진 호리우치는 "아니 그러면 선배가 못잡을 것 같으면 어떡합니까?"하고 항의했으나 나가시마는 "그럴 땐 내가 "잡아!"라고 소리칠테니 그 때는 네가 잡으면 된다"라며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상또라이 기질이 다분한 호리우치였지만 연배가 한참 차이나는데다 같은 상또라이 계열 선배인 나가시마를 거스를 수 없었던 호리우치는 충실히 선배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 나름대로 시대를 풍미한 명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이렇다보니 후배들에게 그다지 대접받지 못한다. 코치 시절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경기 도중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는데 그 때 호리우치가 헬멧으로 상대선수를 가격하다가 오히려 상대팀 코치도 아니고 후배 선수였던 카나모리 에이지[17]한테 입안을 쥐어뜯기는 일생일대의 굴욕을 겪었다.[18] 감독 시절에는 팀의 간판 선수인 키요하라 카즈히로에게 대놓고 디스를 당하거나 하이파이브까지 씹히는 굴욕까지 맛보았다.
- 날라리 이미지가 강하고 본인도 재능만으로 야구했다는 드립을 치기도 했지만, 실제로 야구에 관해서는 매우 성실했다고 한다. 등판 이후 자신의 투구 결과를 세세하게 분석해 노트에 작성했다고 하며, 선발 등판 전날임에도 잠들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투구폼을 가다듬고 경기 전이나 캠프 회의에서 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 트러블메이커 이미지와 달리 똥군기와는 담을 쌓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야구부의 똥군기를 혐오해 축구부 활동을 했고, 고3때 야구부 주장에 취임한 뒤에는 상급생이 하급생을 이유없이 구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일본 고교야구계(와 이 악습을 그대로 이어받아버린 한국 고교야구계)가 2000년대 전까지 똥군기, 폭력으로 악명높았던 걸 생각하면 이 점에 관해선 오히려 시대를 앞서 나간 개념인이었다.[19] 또한 현대야구에서도 내야수 마스다 다이키[20]가 투수로 등판했을 때 이하라 하루키 등 다른 요미우리 선수, 코치 OB들은 극대노하며 꼰대스러운 의견을 내놓았지만 호리우치는 OB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다르빗슈 유, 우에하라 코지 등 젊은 선수 및 야구팬들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언급하여 열린 사고를 보여주기도 했다.
- 자서전을 냈는데 그 제목이 "나는 악동이다."였다.
[1] 다섯살 때 사고로 절단된 왼손 검지로 낙폭 큰 커브를 고안한 곤도 마사토시의 경우와 오버랩 된다. 미국의 모데카이 브라운과도 비슷한 경우.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본 TV 방송이 잡혀 알음알음 시청할 수 있던 곳이 부산이었는데 그 지역 출신인 최동원이 일본야구 중계를 보면서 호리우치의 커브를 배워 주무기로 썼다고 한다.[2] 당시엔 도도부현별 1개교가 아닌 각 지역을 간토, 호쿠리쿠, 시코쿠 등의 지구로 구분하여 지구별 1개교로 출장권을 주었다. 이후 1978년부터 코시엔 출장권을 현재의 도도부현 예선대회 우승팀(도쿄/홋카이도는 지역을 나눠서 2개 부여)에게 주는 도도부현별 1개교 체제로 변경되었다.[3] 怪童, 일본프로야구에서 아주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신인에게 붙여주는 별명. 초대 괴동은 니시데츠의 강타자였던 나카니시 후토시 였고, 도에이의 강속구 투수였던 오자키 유키오가 2대 괴동이었다. 호리우치가 3대를 잇고 그 다음 4대가 마쓰자카 다이스케 였다.[4] 24선발승으로 그 해 유일하게 20선발승 이상 기록[5] 마지막 두 자릿 수 승리를 거둔 게 30세되던 1978년에 거둔 12승 이었다. 그 이후엔 엄청나게 추락해서 1983년 은퇴 때까지 5년간 9승밖에 못 거뒀다. 참고로 200승 달성 경기인 1980년 6월 2일의 VS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 때는 강우콜드로 승리투수가 되었다.[6] 물론 실제로는 철저하게 기록과 투구폼 등을 분석하고 연구해가면서 밤을 샐 정도로 노력했다고 한다. 성실성이 다른 명 선수들에 비해 떨어진 편은 맞지만 최소한의 할 것은 다 했다.[7] 원정경기 이동 시 등 경기장 밖에서 단체로 행동할 때엔 무조건 정장 차림이 원칙이다.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정장차림을 고수한다.[8] 그나마 프런트의 문제가 더 컸다 외엔 특별한 동정 여론조차 없는 호리우치와는 달리 이쪽은 여러 가지로 참작할 사정이 많아서 성적과는 별개로 팬들에게서 동정 의견이 많다.[9] 이게 왜 그런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항목 참조. 전임 하라의 경우에는 나가시마의 퇴임 3년 전에 해설자로 활동하던 하라를 수석코치로 영입해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다. 그런데 이 하라와의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 수석코치를 그만둔 게 호리우치. 결국 거인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하라를 버렸더니 정작 맡길 사람이 없어서 자기들이 함량미달 판정을 내린 호리우치를 재활용한 셈이다.[10] 12위 까지 당선권 이었다.[11] 그런데 호리우치는 이후 TV에 출연하여 "나는 머리 따위는 숙이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숙이는 머리는 가진 적 없다"란 말을 했다(...)[12] 같은 해 9월 10일 요미우리의 대 히로시마 도쿄돔 홈경기에서 팀이 6-4 역전패로 카프의 25년 만의 리그 우승을 헌납하는 걸 현장에서 해설로 지켜보았다.[13] 야구의 암묵적인 룰을 보면 알겠지만 투수가 노히터 혹은 퍼펙트 게임을 하고 있으면 동료들은 그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지어 경기에 집중 할 수 있도록 그 선수에게 접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훗날 호리우치가 코치를 맡던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가 마키하라 히로미의 퍼펙트 게임 당시 이 불문율을 지키려고 선수들에게 퍼펙트게임 이야기를 하지 말자고 했다가 본인까지 불러서 얘기하는 바람에 오히려 본의 아니게 불문율을 어긴 황당한 해프닝을 일으켰다.[14] 4연타석 홈런 자체는 3회 달성되었지만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은 오 사다하루가 유일했다. 또한 투수의 3연타석 홈런 기록은 2024년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기록이다.[15] 위에서 언급했듯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등판하거나 진중한 분위기의 훈련때 엉덩이춤으로 몸을 풀거나 심심하면 건방진 망언을 뱉는다던가 신인왕을 차지하고 나서 붓글씨로 나 20승 투수야 하고 자랑하는 문구를 쓰기도 했다.[16] 맨손으로 캐칭해서 1루에 던지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애초에 베어핸드 캐치는 야수들도 위험한 플레이고 하물며 손을 보석같이 대해야 하는 투수에게 베어핸드 캐치를 하라고 하면 그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17] 1980년대 중반 세이부의 주전 외야수로 1985년에 골든글러브, 베스트나인을 수상했다. 이후 한신-야쿠르트에서 준주전급~백업 외야수로 뛰었으며 은퇴 후 세이부 등에서 타격 코치로써 와다 카즈히로, 알렉스 카브레라 등의 강타자들을 육성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18] 참고로 사진엔 안 나오지만 저때 유니폼이 찢어지고 안경까지 벗겨지는 몰골이 되었는데, 그 안경은 난리통에 결국 박살나 버렸다.[19] 다만 이 사람 일화를 보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게 남을 괴롭히거나 난잡한 생활을 해서 욕을 먹은 것이 아니라, 선배들 앞에서도 제멋대로 굴고 조직생활에 적응을 못 하며 할 생각조차 안 해서 욕을 먹은 스타일이었다. 즉 눈치없이 자기 감정에 솔직한 마이페이스 스타일의 성격이라는 것인데 이런 성격의 인물은 애초에 인싸와는 거리가 멀며, 군기를 잡거나 일진짓을 하는 경우도 드물다. 이런 성격이 운동선수가 아니라 책만 보면 보통 너드가 되며, 오히려 군기의 희생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20] 요미우리 내야수 출신으로 독립리그를 거처 입단했다. 현재는 대주자 요원으로 많이 나온다. 2020년 한신과 경기도중 초반부터 경기가 기울어져 중반부터 투수로 등판해 1이닝 1볼넷으로 투수 데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