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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8:33:32

호리우치 츠네오

호리우치 츠네오의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221815><tablebgcolor=#221815>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F49C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1934년 ~ 현재
초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파일:일본 국기.svg
(1936~1942)
2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파일:일본 국기.svg
(1943)
3대
나카가미 히데오
파일:일본 국기.svg
(1944~1946)
4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파일:일본 국기.svg
(1946~1947)
5대
미하라 오사무
파일:일본 국기.svg
(1947~1949)
6대
미즈하라 시게루
파일:일본 국기.svg
(1950~1960)
7대
카와카미 테츠하루
파일:일본 국기.svg
(1961~1974)
8대
나가시마 시게오
파일:일본 국기.svg
(1975~1980)
9대
후지타 모토시
파일:일본 국기.svg
(1981~1983)
10대
오 사다하루
파일:대만 국기.svg
(1984~1988)
11대
후지타 모토시
파일:일본 국기.svg
(1989~1992)
12대
나가시마 시게오
파일:일본 국기.svg
(1993~2001)
13대
하라 타츠노리
파일:일본 국기.svg
(2002~2003)
14대
호리우치 츠네오
파일:일본 국기.svg
(2004~2005)
15대
하라 타츠노리
파일:일본 국기.svg
(2006~2015)
16대
타카하시 요시노부
파일:일본 국기.svg
(2016~2018)
17대
하라 타츠노리
파일:일본 국기.svg
(2019~2023)
18대
아베 신노스케
파일:일본 국기.svg
(2024~)
:일본 시리즈 우승 / ☆: 일본 시리즈 준우승 / : 일본 시리즈(1950년) 이전 단일 리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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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480><tablebordercolor=#221815><tablebgcolor=#221815>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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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49C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49C00 {{{#!folding [ 쇼와 시대 ]
{{{#555555,#aaaaaa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호리우치 츠네오 야마시타 츠카사(1) 츠치타 마코토 타카다 시게루 시마노 오사무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코사카 토시히코 유구치 토시히코 요코야마 타다오 나카이 야스유키 코바야시 히데카즈(5)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사다오카 쇼지 시노즈카 카즈노리 후지시로 카즈유키 야마쿠라 카즈히로 불참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하야시 야스히로(1) 하라 다쓰노리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1) 미즈노 카츠히토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우에다 카즈아키(1) 쿠와타 마스미 키다 마사오(1) 하시모토 키요시 요시다 쇼지(1)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49C00 {{{#!folding [ 헤이세이 시대 ]
{{{#555555,#aaaaaa
1989년 ~ 201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오오모리 타케시 모토키 다이스케 타니구치 코이치(1) 마쓰이 히데키 미노 카츠히로(2)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카와하라 준이치(2) 하라 슌스케(1) 이리키 유사쿠(2) 타카하시 요시노부(2) 우에하라 고지(2)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타카하시 히사노리(2) 아베 신노스케(2) 사나다 히로키(1) 기사누키 히로시(2)
쿠보 유야(2)
우츠미 테츠야(2)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노마구치 타카히코(2)
미키 히토시(2)
츠지우치 타카노부(3)
후쿠다 사토시(2)(4)
사카모토 하야토(1)(3)
카네토 노리히토(2)(4)
후지무라 다이스케(1)(3)
무라타 토오루(1)(4)
오오타 타이시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초노 히사요시 사와무라 히로카즈 마츠모토 류야(1) 스가노 토모유키 고바야시 세이지(1)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오카모토 카즈마 사쿠라이 토시키 요시카와 나오키(1) 쿠와하라 타쿠야(1) 타카하시 유우키(1)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49C00 {{{#!folding [ 레이와 시대 ]
{{{#555555,#aaaaaa
2019년 ~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홋타 켄신(1) 헤이나이 류타(1) 오타 타이세이(1) 아사노 쇼고(3) 니시다테 유우히
(西舘勇陽)
}}}}}}}}}}}} ||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3) 고교생 드래프트, (4)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5) 지명 후 미입단: 현재는 1973년도 코바야시 히데카즈가 유일하다.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91919,#ffffff
<rowcolor=#f49c00> 1936春夏~1937秋 1938春 1938秋 1939 1940~1941
사와무라 에이지 빅토르 스타루힌 마에카와 하치로 카와카미 테츠하루 빅토르 스타루힌
<rowcolor=#f49c00> 1942 1943 1944 1946 1947~1948
히로세 슈이치 빅토르 스타루힌 후지모토 히데오 콘도 사다오 카와사키 토쿠지
<rowcolor=#f49c00> 1949 1950 1951 1952 1953
타다 후쿠조 후지모토 히데오 벳쇼 타케히코 후지모토 히데오 벳쇼 타케히코
<rowcolor=#f49c00> 1954 1955~1956 1957 1958 1959~1960
오오토모 타쿠미 벳쇼 타케히코 오오토모 타쿠미 후지타 모토시 이토 요시아키
<rowcolor=#f49c00> 1961 1962 1963 1964 1965~1966
나카무라 미노루 죠노우치 쿠니오 이토 요시아키 타카하시 아키라 카네다 마사이치
<rowcolor=#f49c00> 1967 1968~1969 1970 1971 1972~1973
죠노우치 쿠니오 카네다 마사이치 타카하시 카즈미 와타나베 히데타케 호리우치 츠네오
<rowcolor=#f49c00> 1974 1975~1978 1979 1980 1981
타카하시 카즈미 호리우치 츠네오 니우라 히사오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타카시
<rowcolor=#f49c00> 1982 1983 1984 1985 1986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타카시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타카시 에가와 스구루
<rowcolor=#f49c00> 1987 1988~1989 1990 1991~1992 1993~1997
니시모토 타카시 쿠와타 마스미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
<rowcolor=#f49c00> 1998 1999 2000~2006 2007 2008
쿠와타 마스미 발비노 갈베스 우에하라 코지 우츠미 테츠야 타카하시 히사노리
<rowcolor=#f49c00> 2009 2010 2011 2012 2013
세스 그레이싱어 우츠미 테츠야 토노 슌 우츠미 테츠야 미야구니 료스케
<rowcolor=#f49c00> 2014~2016 2017 2018~2022 2023 2024
스가노 토모유키 마일스 마이콜라스 스가노 토모유키 타일러 비디 토고 쇼세이
}}}}}}}}}}}} ||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81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일본시리즈
우승코치
1994

파일:NPB 로고.svg 일본 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수상자
1965년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1966년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1967년
오가와 켄타로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NPB 로고.svg 일본 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수상자
1971년
수상자 없음
1972년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3년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66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신인
수상자 없음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케가미 시로
(산케이 아톰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66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카네다 마사이치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곤도 마사토시
(한신 타이거스)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66~1967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야마나카 타츠미
(주니치 드래곤즈)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마다 겐타로
(타이요 훼일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2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1970-1971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훼일즈)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에나츠 유타카
(한신 타이거스)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2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 (MVP)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2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투수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훼일즈)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4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투수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2~1978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다이아몬드 글러브
상 제정 2013~2022
호리우치 츠네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9~1985
니시모토 타카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2년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1970~1971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훼일즈)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3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4년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1973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5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2~1973년 일본시리즈 MVP
스에츠구 토시미츠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히로타 스미오
(롯데 오리온즈)

1970~1973년 일본시리즈 최우수 투수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 ||
파일:external/stat.ameba.jp/10070723967_s.jpg
호리우치 츠네오
堀内恒夫 | Tsuneo Horiuchi
생년월일 1948년 1월 16일 ([age(1948-01-16)]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야마나시현 코후시
학력 코후시립 코후 상업고등학교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투수
프로입단 1965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6~1983)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1984~1985, 1993~1997)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1998)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4~2005)

1. 개요2. 학창시절3. 프로 시절4. 현역 은퇴 이후5. 에피소드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및 정치인. 현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 위원장

2. 학창시절

야마나시현 코후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우동 만드는 기계에 오른손 검지가 1cm 정도 잘리는 부상을 입었는데, 사고로 변형된 검지를 역으로 활용하여 현역 시절 엄청난 낙폭의 드롭커브를 개발하여 주무기로 활용했다.[1] 고후 상고 1학년 때인 1963년부터 에이스 자리를 꿰차고 그해 하계 코시엔 예선대회에서 우승하며 꿈에도 그리던 고시엔 구장의 흙을 밟아보는 꿈을 이루나 싶었는데, 하필 이 해 대회가 기념대회로 개최되어 각 현당 1개교로 출장권이 늘어나면서[2] 48개 학교가 참가하는 바람에 한신 고시엔 구장만으로는 경기 운영이 어려워 한큐 브레이브스의 홈구장이던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까지 포함하여 분산 개최되었다. 이때 호리우치가 소속된 코후 상고는 니시노미야 조에 편입되는 바람에 3차전까지 이겨 8강에 진출해야 고시엔 구장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 3차전에서 이해 우승팀 메이세이 고교에게 11대 0으로 대패하며 결국 한신 코시엔 구장 그라운드를 밟지 못한 채 고교생활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는 아래에 따로 설명하지만 거인의 별 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3. 프로 시절

파일:external/www.horisan18.com/history10.jpg
196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하여 그 해 16승 2패, 평균자책점 1.39의 성적으로 신인왕과 사와무라상을 동시에 석권하며 일약 3대 괴동[3]으로 도약하며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일본시리즈 V9를 견인하기도 했다. 이 해에 데뷔 후 1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릭 밴덴헐크가 2016년 시즌 14연승으로 갱신할 때까지 타이기록도 용납치 않았던 기록이었다.

1972년에는 26승[4]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데뷔 이후 1978년까지 13년 연속 두자리 승수를 챙기며 18시즌 동안 개인통산 203승 139패 6세이브, 탈삼진 1865개, 평균자책 3.27을 기록했다.

실력은 좋지만 입이 너무 가벼워서 구설수에 자주 오르기도 했는데, 팀 선배인 오 사다하루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대든다거나, 데뷔 첫 등판에서 긴장감을 줄인답시고 연습 투구때 대 선배이자 명포수모리 마사아키를 앞에 두고 공을 일부러 백 네트에 던졌다는 등등의 얘깃거리가 수두룩 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프로도 별거 아니다라는 말. 기숙사 생활 시절, 폐문시간 파기의 상습범으로서 알려져 있고 사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목욕탕 창문으로부터 들어갔다든가, 빠져나가기 위해 사다리를 구매했다던가, 기다리고 있던 팀 선배 오 사다하루에게 걸려 맞았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팀에서는 폐문시간을 한 번 어기면 8만엔, 2번째는 16만엔으로 회를 거듭할 때 마다 벌금이 배가 되는 징벌을 내리고 있었는데, 호리우치의 매월 실수령액은 30만엔 전후였기 때문에, 한동안 급료 봉투에 마이너스 6만엔으로 쓴 종이가 들어가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본인은 노력없이 재능 만으로 선수 생활을 해왔다고 당당히 말할 정도였다.

다만 이게 빈말은 아닌게 실제로 호리우치의 성적을 보면 데뷔 초창기가 오히려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걸 알수있다. 커리어 중반기(20대 중반) 이후로는 사실 이름값에 비해 영 모자란 활약을 보여줬고 30줄 넘어가는 순간 급격하게 하락세가 와서 명구회 가입조건인 200승도 간신히 채웠다.[5] 연도별 성적 추이만 놓고 보자면 정말 특별한 노력 없이 신인시절 엄청난 성적을 거둔 재능만으로 선수생활을 유지했다는 말이 과언은 아닌듯 싶다.

파일:external/mainichi.jp/022.jpg

거기에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경기에 나오는 통에 당시 요미우리 수뇌진들과 OB들이 뭐 저딴놈이 다 있냐고 디스했지만 데뷔하자 마자 요미우리를 대표하는 간판투수로 자리 잡으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호리우치가 현역이던 시절의 요미우리는 더 엄격해서 복장부터 FM으로 철저히 지켜야 했는데[6] 그걸 대놓고 어긴 선수 1호가 바로 호리우치 였다.

4. 현역 은퇴 이후

1983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으며, 그 이후 친정팀 코치와 야구 해설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2004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4년 키요하라 카즈히로, 터피 로즈, 에토 아키라, 아베 신노스케, 니오카 토모히로, 타카하시 요시노부, 로베르토 페타지니, 코쿠보 히로키등 리그를 지배하던 강타자들을 수집한 핵타선을 구축하며 그해 NPB 통산 최다인 259개의 팀 홈런을 기록했지만 정작 팀 성적은 전해 하라와 동일한 3위에 그쳤고, 다음해인 2005년엔 구단 역대 시즌 최다패인 80패를 적립하며 5위로 추락하는 등 최악의 성적만 남긴 채 2년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위에서도 언급됐듯 팀의 파괴력 자체만 놓고보면 역대 최강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공격력에 몰빵한 나머지 수비 구성 등의 다른 요소가 너무도 부족했다. 당장 역대 최고인 259홈런을 친 2004년엔 정반대로 역대 최저인 25도루에 그쳤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만큼 준수한 1루수비를 보여주던 페타지니를 키요하라와 병용한답시고 1루나 좌익이 아닌 우익수로 기용하거나 타카하시 요시노부터피 로즈를 동시에 기용하기 위해 우익수로도 수비 잘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던 로즈를 어거지로 중견수에 놓는 등 다소 이해하기 힘든 수비 구성을 보여줬다.

이 외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005년 시즌 유니폼, 검정색 유니폼 등으로 1975년 팀 창단 최초 꼴찌와 더불어 구단에 매우 치욕적인 흑역사를 만들어 낸 감독. 참고로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 유일하게 통산승률이 5할 미만인 감독이며(133승 144패) 양대리그 시대 이래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적이 없는 유일한 감독인 데다가 (타카하시 요시노부를 제외하면) 일본시리즈 우승은 커녕 센트럴리그 우승 경력도 없는 유일한 감독이다. 재임기간이 2년밖에 안 된 점과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2007년부터 시작된 걸 감안해도 너무나 초라한 기록. 게다가 투수 출신이면서 재임기간 2년간 팀 방어율이 2004년 4.50, 2005년 4.80로 치솟는 등 투수진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당시가 래빗볼 시대로 불리는 극악의 타고투저였음을 반영해도 전혀 좋지 않은 기록이다.

인기도 더럽게 없어서 안 그래도 하락하던 요미우리의 야구 중계의 시청률이 이 감독이 재임하는 동안 곤두박질을 쳐서 일본 프로야구 위기론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감독시절 자체가 흑역사. 2003년 시즌 하라가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둔데다 호시노의 한신 타이거스가 시즌 개막 초부터 치고 나가면서 18년만의 우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본 스포츠 매체의 관심이 한신에 집중. 이 때문에 요미우리의 인기하락과 요미우리의 TV중계의 시청률이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를 가져오자, 그다지 나쁜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련의 부진의 책임을 전부 하라에게 뒤집어 씌워서 아무 생각없이 덮어놓고 자른 게 화근. 결국 뚜렷한 비전도 없이 일단 덮어놓고 부진의 책임을 감독에게 전가하여 잘라놓고 보니, 마땅히 준비된 후계 감독도 없고 급하게 생각해 낸 후보가 이 호리우치 선생 되시겠다. 감독으로서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호리우치[7]에게 일단 감독을 맡기고 본 순간부터 이 흑역사는 예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책임 회피를 위한 프런트의 삽질+구시대적 순혈주의를 고집한 악습이 불러온 참사라면 참사라고 하겠다.

이러한 준비되지 않은 팀 수뇌부의 상황으로 인해 팀내적으로도 문제가 많아서 당시 팀리더격이던 키요하라 카즈히로와의 불화는 말할 것도 없고 터피 로즈도 코칭스탭과의 불화로 불명예스럽게 팀에서 나오게 되는등 여러모로 개판오분전인 상황이었다. 로즈는 요미우리에서 퇴단하고 2년뒤 오릭스 버팔로즈에 다시 입단하여 코너 외야, 지명타자 자리에서 리그 최고의 홈런타자로서의 면모를 다시 되찾았다. 결국 호리우치가 해놓은 삽질은 2006년 하라 타츠노리가 재취임하여 겨우겨우 수습했다.[8] 그가 요미우리 감독하면서 한 업적이라고는 단지 우츠미 테츠야를 키운 거 밖에 없을 지경. 호리우치 시절 말미에는 카메이 요시유키 등의 신진 선수들의 활약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B클래스 추락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계속 언급한 대로 그의 품성은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실력은 뛰어났기 때문에 2008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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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참의원 선거 유세중이던 호리우치.

이후 닛폰 테레비 해설가로 활동하던 중, 2010년 7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유민주당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정계 진출을 노렸는데, 개표 결과 비례대표 13위로 아깝게 낙선했다.[9] 그러고는 TV에 출연하여 "나는 머리 따위는 숙이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숙이는 머리는 가진 적 없다" 라고 나불대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7월 31일 자유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이던 나카무라 히로히코의 사망으로 의원직을 승계하면서 2013년 8월 6일 정계에 입문, 감격의 의원 취임 선서를 할 수 있었다. 잔여임기 승계이므로 2016년 7월 25일까지 임기 보장.

2016년 6월 22일, 참의원 재선 도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꽤 큰 차이로 낙선했다. 이후엔 또다시 해설가/평론가로 활동 중.

그리고 9월 1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히로시마 도요 카프도쿄돔 2연전 1차전 때 해설로 참여해 팀이 6-4 역전패로 깨지면서 카프의 25년 만의 리그 우승을 헌납하는 걸 보았다.

5.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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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섯살 때 사고로 절단된 왼손 검지로 낙폭 큰 커브를 고안한 곤도 마사토시의 경우와 오버랩 된다. 미국의 모데카이 브라운과도 비슷한 경우.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본 TV 방송이 잡혀 알음알음 시청할 수 있던 곳이 부산이었는데 그 지역 출신인 최동원이 일본야구 중계를 보면서 호리우치의 커브를 배워 주무기로 썼다고 한다.[2] 당시엔 도도부현별 1개교가 아닌 각 지역을 간토, 호쿠리쿠, 시코쿠 등의 지구로 구분하여 지구별 1개교로 출장권을 주었다. 이후 1978년부터 코시엔 출장권을 현재의 도도부현 예선대회 우승팀(도쿄/홋카이도는 지역을 나눠서 2개 부여)에게 주는 도도부현별 1개교 체제로 변경되었다.[3] 怪童, 일본프로야구에서 아주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신인에게 붙여주는 별명. 초대 괴동은 니시데츠의 강타자였던 나카니시 후토시 였고, 도에이의 강속구 투수였던 오자키 유키오가 2대 괴동이었다. 호리우치가 3대를 잇고 그 다음 4대가 마쓰자카 다이스케 였다.[4] 24선발승으로 그 해 유일하게 20선발승 이상 기록[5] 마지막 두 자릿 수 승리를 거둔 게 만 30세되던 1978년에 거둔 12승 이었다. 그 이후엔 엄청나게 추락해서 1983년 은퇴 때까지 5년간 9승밖에 못 거뒀다. 참고로 200승 달성 경기인 1980년 6월 2일의 VS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 때는 강우콜드로 승리투수가 되었다.[6] 원정경기 이동 시 등 경기장 밖에서 단체로 행동할 때엔 무조건 정장 차림이 원칙이다.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정장차림을 고수한다.[7] 이게 왜 그런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항목 참조. 전임 하라의 경우에는 나가시마의 퇴임 3년 전에 해설자로 활동하던 하라를 수석코치로 영입해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다. 그런데 이 하라와의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 수석코치를 그만둔 게 호리우치. 결국 거인은 믿는 하라에게 발등이 찍히자 자기들이 함량미달 판정을 내린 호리우치를 재활용한 셈이다.[8] 복귀첫해에는 핵타선빨로 1위로 질주중이었으나 고쿠보 히로키타카하시 요시노부가 드르렁하는바람에 아베 신노스케의 최악의 부진속에 이승엽이 혼자서 견제받아가며 팀타선을 혼자서 이끄는 바람에 꼴찌할뻔 했다.[9] 12위 까지 당선권 이었다.[10] 야구의 암묵적인 룰을 보면 알겠지만 투수가 노히터 혹은 퍼펙트 게임을 하고 있으면 동료들은 그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지어 경기에 집중 할 수 있도록 그 선수에게 접촉조차 하지 않는다.[11] 4연타석 홈런 자체는 3회 달성되었지만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은 오 사다하루가 유일했다. 또한 투수의 3연타석 홈런 기록은 2019년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기록이다.[12] 위에서 언급했듯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등판 한다던가 진중한 분위기의 훈련때 엉덩이춤으로 몸을 푼다던가 심심하면 건방진 망언을 뱉는다던가 신인왕을 차지하고 나서 붓글씨로 나 20승 투수야 하고 자랑하는 문구를 썼다던가...[13] 맨손으로 캐칭해서 1루에 던지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애초에 베어핸드 캐치는 야수들도 위험한 플레이고 하물며 손을 보석같이 대해야 하는 투수에게 베어핸드 캐치를 하라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미친 짓이다.[14] 참고로 사진엔 안 나오지만 저때 유니폼이 찢어지고 안경까지 벗겨지는 희대의 굴욕도 당했다. 안경은 다행히 신인 시절의 마쓰이 히데키가 주운 덕에 난리통에 무사했다는 후일담이 있다..라고 적혀있었으나 마쓰이가 주웠을 땐 이미 개발살난 후였다. 참고로 카나모리는 세이부-한신-야쿠르트를 거쳐가며 준주전급 외야수로 현역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 세이부 등에서 타격 코치를 역임하여 와다 카즈히로, 알렉스 카브레라 등의 강타자들을 육성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15] 요미우리 내야수 출신으로 독립리그를 거처 입단했다. 현재는 대주자 요원으로 많이 나온다. 2020년 한신과 경기도중 초반부터 경기가 기울어져 중반부터 투수로 등판해 1이닝 1볼넷으로 투수 데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