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누가사 사치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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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79 | 1980 | 1984 |
1984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 ||||
1983년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1985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
1976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 ||||
1975년 오시타 쓰요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 44도루 | → |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카프) 31도루 | → | 1977년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34도루 |
1984년 센트럴리그 최다 타점 | ||||
1983년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103타점 | → |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02타점 | → | 1985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134타점 |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27번}}} | ||||
나가오 다쓰오 (1964) | → | 키누가사 사치오 (1965-1974) | → | 요네야마 데쓰오 (1975) |
{{{#ccac00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3번}}} | ||||
미키 맥과이어 (1973-1974) | → | 키누가사 사치오 (1975-1987) | → | 영구 결번 |
<colbgcolor=#ff0000> 히로시마 도요 카프 No.3 | |
<colcolor=#ffffff> 키누가사 사치오 衣笠祥雄 | Sachio Kinugasa | |
생년월일 | 1947년 1월 18일 |
사망 | 2018년 4월 23일 (향년 71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
포지션 | 1루수, 3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신체조건 | 175cm, 73kg |
프로입단 | 1965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65-1987) |
지도자 | 히로시마 도요 카프 플레잉 코치 (1984-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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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였다.뉴욕 양키스의 루 게릭이 수립한 전 세계 프로야구 최장기간인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경신[1]한 철인이었다.
2. 학창 시절
1947년 미군 흑인 사병이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혈아로 태어났다.중학교 시절 유도에 관심이 많았으나 학교에 유도부가 없어 대신 야구부에 들어갔다고 한다. 교토의 야구 명문 헤이안 고교[2]에 입학하여 포수로 활동하면서 고시엔 대회에도 출전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다.
3. 프로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5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천만 엔이란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3]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28번을 달았는데, 그 당시 인기 애니메이션 철인 28호를 본떠 키누가사에겐 철인이란 별명이 붙었고 이후 키누가사는 후술할 연속경기 출장 기록으로 진짜 철인이 되었다.
입단 초기에 시라이시 카츠미 감독의 지시로 포수에서 내야수로 전향했지만, 처음 3년 동안 1군 경기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한 채 2군에 머무르며 언제 모가지를 당할지 전전긍긍하며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입단 4년차 시즌인 1968년, 히로시마의 감독으로 취임한 네모토 리쿠오가 던진 "키누가사라는 선수는 어떤 선수인가? 그 이미지를 네가 만들어 보라"는 말에 감명받고 "항상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지만, 한번 맞았다 하면 크게 날아가는 풀 스윙 히터가 키누가사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실력을 쌓으면서 이해 시즌부터 히로시마의 주전 1루수로 활약하기 시작하며 1군에 정착하였다. 그때부터 키누가사하면 풀 스윙 이란 이미지가 따라붙으며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1975년부터는 등번호를 28번에서 후에 영구 결번이 되는 3번으로 바꿨고, 히로시마의 신임 감독으로 온 조 루츠[4]의 지시로 키누가사의 주 포지션은 3루수로 변경 되었으며[5] 타선에서는 4번이던 야마모토 코지의 뒤를 받치는 5번 타자로 맹활약하면서 그 해 히로시마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센트럴리그를 제패하고,[6] 이후로도 카프가 기록한 3회의 일본시리즈 우승(1979~1980년, 1984년)에 큰 힘을 보탰다.
특히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4대 3으로 박빙의 리드를 지키던 9회말에 히로시마의 마무리 투수이자 절친인 에나츠 유타카가 킨테츠 버팔로즈 타선에 안타와 포수 송구실책, 도루 등을 허용하며 무사 2, 3루의 위기에 빠지면서 고바 타케시 감독이 투수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에 에나츠가 불만을 표시하자, 1루수였던 키누가사는 마운드로 올라가 에나츠에게 "네 기분은 나도 잘 안다. 지금 네가 마운드에서 내려간다면 나도 같이 나가 줄 수는 있어. 하지만 이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녀석이 너 말고 누가 있냐? 타자한테만 집중하고 힘내자!"라고 충언을 건넸고, 친구의 말에 각성한 에나츠는 결국 킨테츠에게 한 점도 내주지 않은 채 이른바 에나츠의 21구를 선보이며 카프의 첫 일본 제일을 일궈낸 장면은 최고의 에피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87년 6월 13일, 루 게릭을 뛰어넘는 2,131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고 주니치의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축하 꽃다발을 받는 키누가사.[7] 당시 카프 감독이던 아난 준로의 뒷모습도 보인다.
그 후 키누가사는 야마모토 코지 등과 함께 빨간 헬멧군단의 주포로 꾸준히 플레이했고 1976년 도루왕, 1984년 타점왕을 차지 하였으며 시즌 최다안타 기록 1회, 최우수선수(MVP) 1회, 베스트 나인 3회를 수상하는 등 히로시마의 주축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키누가사가 자랑할 만한 기록 중 하나가 바로 2,215경기 연속 출장기록[8][9]이며 이는 1970년 10월 1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부터[10] 1987년 10월 22일 시즌 최종전이자 그의 현역 은퇴 경기(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전)까지 18시즌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통산 2,500안타, 500홈런의 기록도 달성하였다.
야마모토 코지 - 키누가사 사치오의 4-5번 콤비는 YK포로 불리며 통산 86회의 백투백 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역대 최고의 클린업 멤버로 손꼽히는 오 사다하루 - 나가시마 시게오 콤비의 ON포(통산 106회)에 이어 통산 2위의 기록이다.
1987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23시즌 동안 2,543안타, 타율 0.270, 504홈런, 1,448타점, 266도루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500홈런-200도루는 장훈, 야마모토 코지와 함께 일본프로야구에서 단 3명만이 갖고 있는 진기한 기록이다. 통산 2,500안타 이상으로 범위를 좁힌다면 2,339안타를 기록한 야마모토를 제외하고 장훈과 키누가사 2명 뿐이다. 이 해 키누가사는 제 6호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프로 통산 몸에 맞는 공 161개로 역대 3위를 기록했지만 아무리 큰 부상을 입을 위험한 사구(死球)를 맞더라도 투수에게 화를 내거나 마운드로 뛰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괜찮다, 아프지 않아" 라면서 상대 투수를 안심시킬 정도로 신사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표되는 사례로 1979년 8월 1일, 카프와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의 경기 때 상대 투수 니시모토 다카시의 공이 키누가사의 왼쪽 어깨를 강타하는 바람에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음에도, 키누가사는 사과하러 다가온 니시모토에게 "지금은 위험하다. 괜히 다치지 말고 벤치로 들어가라"며 도리어 그를 감싸 준 것이다. 그날 시합은 키누가사의 사구 전 까지 7대 1로 거인이 앞서고 있었지만, 니시모토가 키누가사를 사구로 쓰러뜨린 죄책감 탓이었는지 이후 페이스가 무너지면서 대량 실점 하는 바람에 8대 8 무승부로 끝나면서 니시모토의 승리는 날아갔는데, 경기 후 니시모토가 사구로 좌측 견갑골이 부러진 키누가사에게 전화로 "(사구로)다치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자 키누가사는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라. 그것보다 오늘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놓쳤으니, 네 손해가 크다"라면서 니시모토를 위로해 줬고, 니시모토는 키누가사 씨는 그릇이 정말 큰 인물이다 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키누가사는 다음 날 경기에 골절상에도 불구하고 대타로 나와 에가와 스구루가 던진 공 세개를 전부 크게 헛 스윙 하여 삼진으로 돌아섰는데, 경기 후 인터뷰 때 "첫 번째 공은 팬들을 위해서, 두 번째 공은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세 번째 공은 니시모토에게 내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휘둘렀다"라고 밝히면서 야구계에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11]
4. 은퇴 이후
2017년 WBC 일본 대표팀의 평가전 경기를 해설하는 키누가사.
(좌측부터 키누가사 사치오-마키하라 히로미-캐스터 닛타 에쓰오)
지도자 생활과는 연이 없었으며[12], TBS 테레비의 해설가[13], 아사히 신문의 평론가로 일했었다. 한편으로 TBS 라디오에서 음악방송의 MC를 맡거나 닛폰 테레비의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 하기도 했다.
히로시마 카프 시절 팀메이트였던 에나츠 유타카와는 생전에 동료이자 친구로 막역하게 지냈다. 특히 에나츠가 각성제 소지 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되자 에나츠의 난카이 호크스 시절 스승인 노무라 카츠야와 에나츠의 또 다른 친구이자 당시 국회의원이던 에모토 타케노리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에나츠 구명 운동을 벌인 바 있다. 덕분에 에나츠는 1995년 4월 가석방으로 풀려나며 야구계에 복귀했고, 당시 에나츠는 "나의 석방을 위해 힘써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만약 내가 형무소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죽은 목숨이었을 지도 모른다" 라면서 키누가사를 포함하여 그를 도와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2016년 8월 11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투수 미우라 다이스케가 키누가사의 23시즌 연속 안타 기록을 24시즌 연속으로 경신하는 장면을 중계했고, 캐스터가 키누가사와 비교하여 이 기록을 설명하자 키누가사는 "예끼 캐스터 양반, 그래도 안타 수 차이가 얼만데 이러시오? ㅋㅋㅋ" 라고 맞받아치며 팬들의 꿀잼을 유도했다. 참고로 미우라의 통산 안타 수는 123개였다.
5. 사망
사망 나흘 전이던 2018년 4월 19일의 해설. 이전 목소리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해설가와 방송 출연 등 지속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여 왔지만, 2018년 초부터 목소리가 변하는 등 심상치 않은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해 4월 19일 요코하마 대 요미우리 경기 실황의 해설을 맡은 키누가사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건강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야구 팬들이 키누가사의 건강을 걱정하몄고 경기 시작 전 그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알아챈 TBS 프로듀서가 "(해설을)바꿔 드릴까요?" 라고 물었지만 키누가사는 강한 의지를 보이며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래도 키누가사 단독으로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프로듀서가 경기 직전에 요미우리 전담 해설가인 마키하라 히로미를 긴급히 호출하여 더블 해설로 편성하면서 무사히 중계를 마칠 수 있었다.
당일 목소리 상태는 안 좋았지만 키누가사는 평소대로 밝은 어조와 함께 웃어가면서 해설했고,[14] 키누가사의 사무소 측에서도 감기라고 해명하면서 팬들도 일단 안심했었다.
그러나 키누가사는 약 2~3년 전부터 대장암(상행결장암)으로 투병 중이었고, 이 사실을 팬들에게 숨긴 채 활동을 이어가다 결국 악화된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2018년 4월 23일 도쿄도 소재 병원에서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 해 1월 4일 췌장암으로 타계한 호시노 센이치에 이어 1970년대를 풍미했던 명 선수가 한 명 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히로시마 시절 동료이자 죽마고우인 에나츠 유타카는 누구보다도 슬퍼하였고, "키누가사는 정말 좋은 친구였고, 내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면서 "나도 곧 따라 갈테니, 키누가사와 저승에서 야구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한 연속경기 출장 세계기록 보유자인 칼 립켄 주니어도 "매우 슬프다. 그를 멋진 남자, 멋진 친구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고인의 가족과 일본의 야구 팬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라는 키누가사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현역 시절 팀 메이트인 야마모토 코지도 생전의 키누가사를 "키누가사가 몸에 공을 맞고 부상을 입은 장면을 자주 봐 왔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멀쩡하게 그라운드에서 계속 뛰면서 마음껏 풀 스윙 했다. 아무리 아파도 입도 뻥긋하지 않고 플레이 해준 것에 한솥밥을 먹은 동료로서 정말로 고맙다는 말밖에는 해줄 게 없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어찌 보면 생전 대인배스러운 면모는, 흑인 혼혈로서 폐쇄적인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키누가사와 재키 로빈슨과 비교하는 사례는 별로 없어 보이는데, 이미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외국인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유가족으로는 아들인 키누가사 도모아키가 있다.
6. 여담
* 최태원이 2002년 SK 와이번스 시절 1000 경기 연속 출장을 돌파하자 대형 사인볼과 사인지에 자필 사인을 해서 축하해 준 적이 있다.
- 생전에 육식과 와인을 몹시 좋아했고 편식이 꽤나 심했다고 한다. 특히 와인은 너무 많이 마셔서 의사에게 그만 마시라는 권고를 받을 정도였다고.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은퇴 후 후배 선수인 시모야나기 츠요시[15]와 술자리를 가졌을 때 시모야나기가 키누가사의 편식을 걱정하여 '야채를 안 먹어도 괜찮은 겁니까?'라고 묻자 "야채는 소가 먹는다"라고 일축했다는 재밌는 일화가 있다.
- 연속 출장 기록 등 성실한 모습으로 유명했던 선수였지만 데뷔 초창기 땐 날라리 기질이 심했다고 한다. 야구선수를 꿈꾼 이유부터가 '부자가 되어서 차도 좋은 걸로 뽑고, 예쁜 여자랑 결혼하고 싶다'였다고 하며(...) 실제로 프로 데뷔 직후에 받은 고액의 계약금으로 외제차를 구매하여 타고 다니다 사고를 여러 번 쳐서 운전면허를 박탈당하고 담당 스카우터였던 키니와 사토시[16]로부터 "혼혈인 네가 (야구 외의) 다른 길을 가긴 힘들다. 너에게서 야구를 빼면 뭐가 남는단 말이냐!"라는 질책을 들었을 정도로 신인 시절엔 야구보단 놀기를 더 좋아하던 게으른 선수였다.
그런 키누가사가 개심하여 야구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당시 히로시마 인근의 이와쿠니시에 주일미군 기지가 있었고 키누가사는 차를 몰고 자주 그곳에 놀러가서 기지에 주둔하던 미군들과 놀고먹으며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처럼 기지에 놀러가서 신나게 시간을 보내던 중 친하게 지내던 병사 한 명이 "내일 베트남으로 간다"고 키누가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고, 이 작별 인사에 충격을 받은 키누가사는 그 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면서 프로 선수로써 좋아하던 야구를 하게 되었음에도 노는 데에만 몰두한 것에 큰 부끄러움을 느껴 이후 진지하게 야구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7. 연도별 기록
통산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점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65 | 広 島 | 28 | 46 | 2 | 3 | 7 | 1 | 0 | 1 | 0 | 0 | 4 | .159 | .178 | .250 | .428 |
1966 | 32 | 40 | 2 | 3 | 5 | 3 | 1 | 0 | 1 | 4 | 9 | .147 | .275 | .294 | .569 | |
1967 | 28 | 52 | 5 | 6 | 12 | 2 | 0 | 2 | 1 | 3 | 13 | .250 | .308 | .417 | .724 | |
1968 | 127 | 463 | 58 | 52 | 109 | 19 | 2 | 21 | 11 | 54 | 76 | .276 | .377 | .494 | .872 | |
1969 | 126 | 485 | 46 | 43 | 107 | 12 | 0 | 15 | 32 | 40 | 73 | .250 | .330 | .383 | .713 | |
1970 | 126 | 459 | 57 | 44 | 102 | 10 | 3 | 19 | 13 | 42 | 81 | .251 | .333 | .431 | .764 | |
1971 | 130 | 543 | 82 | 72 | 131 | 18 | 2 | 27 | 12 | 64 | 71 | .285 | .390 | .509 | .898 | |
1972 | 130 | 565 | 99 | 67 | 147 | 18 | 1 | 29 | 12 | 49 | 77 | .295 | .372 | .510 | .882 | |
1973 | 130 | 529 | 53 | 52 | 94 | 12 | 1 | 19 | 6 | 65 | 73 | .207 | .310 | .363 | .674 | |
1974 | 130 | 529 | 86 | 72 | 119 | 10 | 1 | 32 | 7 | 48 | 78 | .253 | .330 | .482 | .811 | |
1975 | 130 | 532 | 71 | 66 | 132 | 22 | 1 | 21 | 18 | 44 | 61 | .276 | .343 | .457 | .800 | |
1976 | 130 | 569 | 69 | 82 | 156 | 26 | 2 | 26 | 31 | 31 | 84 | .299 | .350 | .506 | .856 | |
1977 | 130 | 582 | 67 | 88 | 136 | 22 | 2 | 25 | 28 | 53 | 81 | .265 | .340 | .461 | .801 | |
1978 | 130 | 547 | 87 | 81 | 123 | 18 | 1 | 30 | 9 | 69 | 83 | .267 | .375 | .505 | .881 | |
1979 | 130 | 478 | 57 | 82 | 114 | 21 | 2 | 20 | 15 | 55 | 72 | .278 | .376 | .485 | .861 | |
1980 | 130 | 549 | 85 | 79 | 144 | 20 | 0 | 31 | 16 | 42 | 89 | .294 | .362 | .526 | .888 | |
1981 | 130 | 553 | 72 | 82 | 134 | 23 | 2 | 30 | 7 | 40 | 83 | .271 | .335 | .507 | .842 | |
1982 | 130 | 551 | 74 | 74 | 135 | 22 | 0 | 29 | 12 | 44 | 89 | .280 | .352 | .505 | .857 | |
1983 | 130 | 557 | 84 | 86 | 145 | 25 | 1 | 27 | 8 | 49 | 89 | .292 | .361 | .510 | .871 | |
1984 | 130 | 542 | 102 | 79 | 161 | 25 | 1 | 31 | 11 | 34 | 83 | .329 | .378 | .573 | .952 | |
1985 | 130 | 540 | 83 | 77 | 140 | 16 | 0 | 28 | 10 | 46 | 77 | .292 | .354 | .500 | .854 | |
1986 | 130 | 520 | 59 | 42 | 98 | 11 | 0 | 24 | 4 | 32 | 80 | .205 | .266 | .379 | .645 | |
1987 | 130 | 403 | 48 | 40 | 92 | 17 | 0 | 17 | 2 | 23 | 61 | .249 | .297 | .432 | .730 | |
NPB 통산 (23시즌) | 2677 | 10634 | 1448 | 1372 | 2543 | 373 | 23 | 504 | 266 | 931 | 1587 | .270 | .345 | .476 | .820 |
- 볼드체는 리그 1위.
[1] 1987년 6월 13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2,131경기로 경신했다. 이 기록은 차후 칼 립켄 주니어가 2,632경기 연속 출장으로 최고 기록을 바꾸었다.[2] 히로시마 출신 장훈이 전학을 원했고, 교토가 고향이던 김성근도 지원했던 학교였다. 두산 베어스 감독을 지낸 송일수의 모교이기도 하다.[3] 당시 히로시마는 지원받을 모기업도 없는 시민구단 이었다.[4] 일본 야구사상 최초의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그 해 15경기 만에 감독을 사퇴했다. 하지만 루츠는 붉은 카프의 이미지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며, 루츠가 떠난 이후 감독을 맡은 고바 타케시가 카프의 진정한 전성기를 일궈냈다는 점을 보자면, 오히려 루츠의 중도 하차가 카프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5] 이 포지션 변경은 당시 신입 외국인 선수로 들어온 게일 홉킨스를 주전 1루수로 기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홉킨스는 3번 타자, 키누가사는 5번 타자로서 4번 타자 야마모토 코지와 함께 클린업 트리오로써 맹활약하며 팀의 첫 우승에 공헌했기에 서로 윈윈한 결정이 되었다. 특히 홉킨스는 우승이 결정된 1975년 10월 1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3점 홈런을 날리며 현재까지도 카프 역사상 명 장면으로 종종 회고되고 있다.[6] 일본시리즈에선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2무 4패로 무너지면서 한큐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선물했다.[7] 일반적으로 NPB의 기록을 크게 평가하지 않는 (특히 오 사다하루의 통산 홈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에서도 키누가사의 연속 출장 기록과 후쿠모토 유타카의 도루 기록은 인정하고 있다.[8] 키누가사의 기록은 1996년 6월 14일 칼 립켄 주니어에 의해 경신되면서 일본 기록으로 내려앉았다. 립켄 주니어의 최종 연속출장 기록은 2,632경기.[9] 참고로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1,766경기로 키누가사에 이어 NPB 연속 출장 2위 기록 보유자 이지만 연속 경기 무교체 출장(1492경기)과 연속 이닝 출장(13686이닝)의 세계 기록을 갖고 있다.[10] 연속출장 기록은 앞에 적힌 10월 19일 시합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해 카프의 시즌 최종전은 10월 25일의 대 한신 타이거스 전이었다.[11] 키누가사가 한마디 덧붙이길, "그래도 역시 에가와의 공이 빠르기는 했다".[12] 여담으로 이러한 경력과는 상관없이, 게임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2010의 야마가사 코치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13] TBS는 과거 모기업 이었다는 인연 때문인지 요코하마 DeNA의 경기 실황을 중계하기 때문에 주로 DeNA 경기를 해설했다. 도쿄 대첩 당시 키누가사가 사사키 가즈히로, 나카하타 키요시와 함께 일본측 해설위원을 맡았다[14] 이 날 캐스터로 경기를 중계한 TBS의 도사키 다카히로 아나운서는 그의 마지막 해설을 "키누가사 씨의 목소리가 경기 전 미팅부터 심상치 않아 걱정했지만, 일단 경기가 시작되니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더라. 이 일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새삼 깨달았다"라고 밝혔다.[15] 다이에, 닛폰햄, 한신, 라쿠텐 4팀에서 뛴 저니맨 투수로 2005년에 다승왕을 수상하는 등 2000년대 한신의 중흥기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선수였다.[16] 키누가사 외에도 야마모토 코지, 카와구치 카즈히사, 타카하시 요시히코 등 카프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스타 선수들을 다수 발굴한 스카우터로 당시 야구계에서 스카우터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