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9dec><tablebgcolor=#009dec>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감독 | 81 미우라 다이스케 | |
1군 | 72 츠루오카 켄지로(오펜스 치프코치) · 74 카와다 유스케(외야수비·베이스·야수코치) · 78 신도 타츠야(벤치코치) · 79 오오하라 신지(치프 투수코치) 80 아이카와 료지(디펜스 치프·야수코치) · 94 코스기 요타(투수코치) · 97 타나카 히로야스(내야수비·베이스·야수코치) | ||
2군 | 83 쿠와하라 요시유키(2군감독·투수 코디네이터) · 73 후지타 카즈야(디펜스치프·내야수비·베이스코치) 84 우에다 요시노리(외야수비·야수·베이스코치) · 86 야기 카이(투수코치) · 88 이리키 유사쿠(투수코치·어시스턴스 투수 코디네이터) · 89 나카이 다이스케(오펜스 치프코치) | ||
1군 및 2군 | 70 카가 시게루(투수코치 보좌) · 71 무라타 슈이치(야수코치) · 75 이시이 타쿠로(야수코치) · 76 타시로 토미오(야수코치) · 77 스즈키 타카노리(야수코치) · 82 만에이 타카시(야수 코디네이터) · 85 야나기다 시게오(야수코치) · 90 오오무라 이와오(야수코치) # 츠지 토시야(야수코치)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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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우라 다이스케의 수상 경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NPB 일본시리즈 우승감독 | |||||||||||||||||||||||||||||||||||||||||||||||||||||||||||||||||||||||||||||||||||||||||||||||||||||||||
2024 |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98 |
2004 아테네 올림픽 {{{#bd5c24 동메달}}} |
2004 |
1997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미우라 다이스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5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미우라 다이스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 | 쿠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
2005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 ||||
이가와 케이 (한신 타이거스) | → | 미우라 다이스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카도쿠라 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 | 이가와 케이 (한신 타이거스)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드래곤즈) |
미우라 다이스케의 보유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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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프로야구 보유 기록 | |||||||||||||||||||||||
투수 최장 기간 연속 시즌 안타 (24년) | ||||||||||||||||||||||||
연속 시즌 최장 기간 승리투수 (23년) | ||||||||||||||||||||||||
최장 기간 연속 시즌 폭투 (16년) | ||||||||||||||||||||||||
개막전 선발투수 최다연패 (7연패 : 전패) |
미우라 다이스케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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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시타 타다히코 (1987~1991) | → | 미우라 다이스케 (1992~1997) | → | 타니구치 쿠니유키 (1998~2005) | ||||||||||||||||||||||||||||||||||||||||||||||||||||||||||||||||||||||||||||||||||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DeNA 베이스타즈]] 등번호 18번}}} | ||||||||||||||||||||||||||||||||||||||||||||||||||||||||||||||||||||||||||||||||||||||
마이크 버크백 (1996) | → | 미우라 다이스케 (1998~2016, 2019~2020) | → | 코조노 켄타 (2022~) | ||||||||||||||||||||||||||||||||||||||||||||||||||||||||||||||||||||||||||||||||||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등번호 81번}}} | ||||||||||||||||||||||||||||||||||||||||||||||||||||||||||||||||||||||||||||||||||||||
시마다 나오야 (2015) | → | 미우라 다이스케 (2021~) | → | 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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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No.81 ★ | |
<colbgcolor=#009dec><colcolor=#fff> 미우라 다이스케 三浦大輔 | Daisuke Miura | |
생년월일 | 1973년 12월 25일 ([age(1973-12-25)]세) |
나라현 카시하라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야마토타카다시립 타카다 상업 고교 (나라) |
신체 | 182cm, 80kg |
포지션 | 선발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1년 드래프트 6라운드 (전체 70번, 타이요) |
소속팀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베이스타즈-DeNA 베이스타즈 (1992~2016) |
지도자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1군 투수코치 (2014~2016[1], 2019)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2군 감독 (2020)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감독 (2021~) |
등장곡 | 투수 - RIKI - 리젠트 블루스(リーゼントブルース)[2] 타자 - 야자와 에이키치 - サイコーなRock You! |
응원가 | 요코하마 시절[3] |
SNS | 블로그[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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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1군 감독.2. 상세
선수생활 황혼기 시절 |
은퇴경기에서의 모습 |
| |
<rowcolor=#fff> 한때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이중키킹 투구폼이 잘 드러나 있는 동영상.[5] | 어느 팬이 제작한 미우라 다이스케의 은퇴 헌정영상.[6] |
Hit it! If you can.
미우라 다이스케의 선수 시절 슬로건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미우라 다이스케의 선수 시절 슬로건
상당히 임팩트있는 인상과 리젠트 헤어스타일, 팀 리더격 위치로 인해서 '하마의 반쵸(ハマの番長)'로 불리기도 하는 선수. 끝이 보이지 않던 암흑기 속에서 팀을 떠받친 약체팀의 외로운 에이스였다. 때문에 요코하마 팬들에게는 거의 신적인 대접을 받고 있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요코하마의 우승을 이끌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 되어가는 중이다.
약체인 팀의 상황과 더불어 요미우리에게 특히 약했는지라 한국야구팬들에겐 이승엽의 호구라는 이미지로 기억되기도 했다.[10]
통산성적은 535경기(488선발) 3276.0이닝[11] 172승 184패 ERA 3.60 2481탈삼진 882볼넷.
3. 선수 시절
3.1. 데뷔 직후
입단 당시만 해도 거의 잉여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을정도로 주목받지 못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1991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70번으로 6순위 지명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프로야구에서 4순위 밑의 지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나 또는 머릿수 채우기 수준의 지명이라서 당시에 미우라 다이스케가 얼마나 낮은 기대치에 있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프로 입단 첫해인 1992년에는 2군에만 머무르다가 시즌 최종전 때 처음으로 등판해서 2이닝을 던져 무실점, 피안타 0개, 탈삼진 1개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날 시합이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이름을 걸고 치르는 마지막 시합이었다.[12]
이때까지만 해도 흔해빠지고 평범한 프로 2군 투수에 불과한 대접이었고 언제 다시 1군에 올라갈지 기약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풋내기 고졸 6순위 선수가 바로 다음해이자 구단명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바뀐 93년부터 생각외로 빨리 기회를 잡았고 임시 선발로서 60.1이닝을 소화하고 1완투승까지 포함된 3승을 거두고 3.43의 준수한 방어율을 내었다. 그러나 94년에는 조금 정체가 되어서 47.2이닝에 4.34의 방어율에 그쳤다.
3.2. 꼴찌 요코하마의 기둥
그리고 1995년, 드디어 본격적인 선발투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마의 번장이 탄생했다. 이때부터 그는 팀의 주축 투수로 발돋움했고 95년부터 2009년까지 단 한번도 100이닝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97년에는 142.1이닝을 던져 10승 3패, 승률 .769로 승률 1위를 기록[13]했고, 1998년에는 12승 7패 3.14의 활약으로 사이토 타카시, 노무라 히로키, 카와무라 타케오, 토카노 히사시 등과 함께 로테이션의 주축을 이루며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센트럴리그 우승, 1998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다.[14]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고 2002년 오른쪽 팔꿈치 뼛조각 제거수술을 받아 02~03시즌 일부를 날린 것을 제외하면 매 해 140이닝은 기본으로 먹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야구선수로서는 전성기가 조금 지났을 법도 한 나이인 32세의 2005시즌에는 214.2이닝을 소화하며 방어율왕과 탈삼진왕[15]을 동시에 획득하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으며, 그 다음 해에는 216.2이닝으로 생애 최다이닝을 소화하기도 했다.201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혹사의 영향이 온 건지 커리어 첫 100이닝 이하를 기록했다. 방어율도 7점대까지 치솟았지만, 저반발 공인구로 교체된 2011년에 어느정도 재기에 성공한 상태다. 2012년 기준으로 39세의 대 베테랑이지만 여전히 요코하마에서 가장 믿을만한 투수다.
2013년에도 여전히 팀내 1선발. 시즌 중반까지 3점대의 평균자책점으로 좋은 모습이었고, 7월 13일 주니치와의 경기에서 통산 3000이닝을 달성했다. 그러나 올스타전 이후 체력문제인지 탈탈 털리기 시작했고 8월 20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3이닝 7실점으로 털리며 4.18까지 방어율이 올라간 상태. 시즌 20경기 출장으로 7경기만 더 출장하면 통산 500번째 출장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10월 5일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 9이닝 3실점 7K 무사사구로 호투했지만 타선이 점수를 못 뽑으면서 결국 노디시전, 4시즌만의 10승 달성에 실패했다. 이 경기로 통산 500경기 출장 달성.
2013 시즌 최종 성적은 27경기(27선발) 9승 13패(1위) 175.2이닝(5위) 109탈삼진/33볼넷 181피안타(1위) 2완투 1완봉 방어율 3.94(리그 15위)로 시즌 중반에 불안함에 비해 변함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피홈런 26개로 2년 연속 리그 1위를 차지한 건 불안요소지만 40세의 선발투수 치고는 대단히 선방한 모습이다.
2014년부터는 1군 투수코치 겸임으로 뛰게 되었다.
2015년 5월 5일 야쿠르트전에서 승리투수가 되어, 23시즌 연속 승리 기록을 세웠다. 이는 쿠도 키미야스, 야마모토 마사와 타이를 이루는 일본프로야구 기록이며 우완 투수로서는 신기록이다. 시즌 최종 성적은 17경기(17선발) 6승 6패 98이닝 62탈삼진 25볼넷 103피안타 방어율 4.13.
2016년 5월 현재 2군에서 컨디션을 조율...중이나 방어율 5점대 후반으로 거하게 털리고 있다. 2군 선수 중에서도 소화 이닝은 많은 편이나 실점과 자책점이 가장 많고, 무엇보다 승리투수가 된 적이 한번도 없다. 상반기 콜업도 무리일 것이라 예상. 게다가 요코하마가 예상외로 5할 언저리에서 2~3위 싸움을 벌이면서 굳이 부진한 미우라를 콜업할 이유도 없는 상황이다.
2016년 7월 11일 주니치전에서 드디어 그의 선발 등판이 예고되었다! 일정상 요코하마가 7월 5일부터 13일까지 9연전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임시 선발이 등판하는 경우가 생겼는데, 그 일환으로 미우라가 선발로 등판하게 되었다. 참고로 요코하마는 9일 경기에서도 임시 선발인 쿠니요시가 등판했었다.
이대로 2016시즌을 마감하나 싶었는데 9월 16일 고시엔에서의 한신전에 선발 등판이 예고되었다! 에이스 야마구치 슌이 어깨통증으로 로테이션을 쉬게 되어 그 자리를 미우라가 채우게 되었다. 과연 24년 연속 승리 투수 기록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결국 4.1이닝 2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전 경기보다 훨씬 좋은 피칭 내용을 선보였지만 문제는 타선이 고작 1점만을 내버리는 바람에... 최종 스코어가 1-2로 끝났기 때문에 한 점만 더 냈으면 패전투수를 면할 수 있었지만 패전이 되었다.
2016년 9월 20일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와 베이스타즈의 98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현역 선수가 0명이 되었다. 원래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마지막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우천으로 일정이 밀리면서 29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로 연기되었다.
마지막 은퇴 경기에서는 6.1이닝 10실점 패전투수를 기록하며 결국 24년 연속 승리투수 신기록은 거두지 못하였다. 기록으로만 보면 최악의 피칭을 보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순위도 정해진 상황에서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요, 요코하마의 팬들은 미우라의 피칭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고 또 은퇴를 슬퍼했다. 타석에서도 안타를 때려냈고, 119구 8탈삼진 투혼에 마지막 타자 유헤이[16]를 삼구삼진으로 돌려 세우며[17]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며 하마의 영원한 번장 미우라 다이스케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4. 지도자 시절
2018년 10월 23일, 현역시절 몸담았었던 요코하마의 코치로 돌아왔다. 팀의 또다른 OB인 타시로 토미오 전 2군(쇼난 시렉스)감독과 함께 코치로 왔으며 보직은 각각 1군 투수코치, 1군 타격코치로 내정 될 듯 보인다. 미우라는 플레잉코치 경험은 있지만 완전한 지도자로 활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9 시즌까지 1군 투수코치를 지내다 2020시즌부터는 2군 감독으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알렉스 라미레스 감독이 물러난 다음 차기 1군 감독으로 앉히려는 물밑작업인 셈. 그리고 라미레스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정되면서 차기 감독 1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4.1.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감독
예상대로 1군 감독 승격이 확정되었다. 프랜차이즈 투수 출신으로 45년만이라고 한다. 17일에 감독 승격이 정식 발표되었고 계약기간은 2년이다. 등번호는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18번에서 숫자를 뒤집은 81번을 사용한다.취임 첫 시즌 개막전부터 8경기에서 2무 6패를 기록하며 그야말로 액땜을 제대로 하는 중.
4.1.1. 2021년
외국인 선수 없이 치른 시범경기를 11위로 마치고 개막을 맞이했지만 현재까지의 행보는 그저 눈물밖에 나오지 않고 있다. 요미우리와의 개막 첫 경기에선 꾸역꾸역 따라잡은 경기를 9회 말에 끝내기를 맞고 허무하게 내주더니 2차전에선 10점을 내주며 박살났고 결국 요미우리와의 첫 3연전을 2패 1무로 시작했다.여기에 뒤이은 야쿠르트와의 홈 개막전마저도 그야말로 처참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무너졌는데 1차전에선 4:1로 앞서던 경기를 불펜진의 방화로 역전패한 것에 이어 2차전도 무난히 패배, 3차전은 11점이나 내며 5점차로 앞서나가던 경기를 또 불펜의 방화로 리드를 뺏기고 비겼다. 이후에 치러진 히로시마와의 3연전 첫 경기도 무기력하게 0:4 영봉패.
아직까지는 현역 시절부터 끝까지 남아준 프랜차이즈 스타였다는 점과 보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선수들을 계속 내보내는 구단의 문제, 이제서야 팀에 외국인 선수들이 합류한 점, 나름대로 합리적인 작전과 선수기용을 하는데도 선수들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점[18] 등을 이유로 비난의 화살은 본인보다 프런트 쪽에 쏟아지며 나름의 동정표를 받고 있긴 하지만 빠른 시일내에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언제 팬심이 돌아설지 모르는 상황이다.
4월 4일 히로시마전에서 드디어 감격의 첫 승을 거두긴 했지만 팀 성적은 좀체 나아지질 않는 와중에 13일, 한 팬이 계속된 부진을 참지 못하고 미우라의 딸에게 DM으로 직접 불만을 표출하는 일이 벌어졌다.[19] 당연히 팬들의 반응은 '왜 상관도 없는 가족한테까지 그러느냐'는 반응.
그리고 선발이 약해진 탓에 불펜이 너무 자주 등판한다는 점은 문제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선 4월 16일 경기에서 해설을 맡았던 사사키 카즈히로가 이날 5명을 계투진을 투입한 미우라의 계투 운용을 지적하였는데 시즌 초반부터 불펜 투수들이 자주 등판한 탓에 등판 횟수가 많았으니 1명 내지 2명의 투수로 멀티 이닝이나 그 이상을 맡겨서 나머지 불펜 투수들에게 휴식을 줬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으며 덧붙여 미우라는 투수 출신이라면 다시 한번 기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력 우승 가능성이 소멸한 5월 14일에는 색깔이 있는 야구를 했으면 한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무려 10연패를 당하고 승률이 1할대까지 추락하며[20] 그나마 좋게 봐 주던 여론마저 돌아서기 시작했고 서서히 비난 여론이 커지는 데 이어 전임 감독 알렉스 라미레즈 재평가 여론까지 나오고 있다. 그나마 23일 한신전을 이기며 연패 탈출엔 성공했지만 독보적인 리그 최하위는 계속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5월 14일 히로시마 원정 경기에서 패배하며 1989년 이래 32년 만에 불과 42시합을 소화한 시점에서 자력 우승 가능성이 소멸하고 말았다. 자력 우승 가능성이 소멸된 이틀 뒤인 5월 16일 경기에서는 16안타 4사사구를 얻어내고도 3득점에 그치는 졸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했고 당연히 팬들은 폭발했다. 특히 찬스는 있는 대로 다 말아먹으면서도 4번으로 계속 출전하는 사노의 타순을 변경하지 않는 것에 많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상황에서 교류전에 돌입하게 되었는데 이미 팀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치르는 교류전이라 2015년의 3승 1무 14패를 넘어서는 역대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9승 3무 6패의 호성적으로 마무리하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성공했다. 3~4월에 너무 많이 진 탓에 순위는 여전히 하위권이지만 5월 이후부턴 반타작 정도는 하는 모습.
하지만 워낙 초반에 깎아먹은게 많다보니 결국 전반기를 꼴찌로 마감하게 되었다. 진작에 양극화 내지 스플릿 리그처럼 된 세리그에서 B클래스 스플릿인 4~6위권에서 나름 분전하였지만 시즌 막판에 연패를 거듭하며 분위기가 꺾이고 말았고 끝내 10월 26일 마지막 홈경기에서 야쿠르트에게 1:5로 패하며 리그 최하위를 확정한 것은 물론 야쿠르트에게 홈에서 리그 우승을 허용하는 굴욕을 맛보고 말았다.
시즌 종료 후 순위는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구단은 연임을 결정했다. 팀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도 하고 감독 데뷔 시즌인데다 시즌 중후반부터는 압도적인 최하위였던 팀을 어느 정도 끌어올렸기에 1년 더 믿어보기로 한 것.
4.1.2. 2022년
전년도의 처참한 시즌 출발과는 달리 이번에는 시즌 초반부터 빠르게 첫 승을 올리며 준수한 시즌 초반을 보냈다. 그러나 시즌 초 선수단을 덮친 코로나 사태 탓에 한동안 정상 전력으로 경기를 치르지 못하며 하위권으로 떨어졌다.올해는 유독 히로시마만 만나면 맥을 못 추는 탓에 번번히 위로 올라갈 찬스를 놓치고 있다. 그나마 주니치를 호구 잡은 덕에 최하위 추락의 염려는 거의 없어진 상황. 교류전을 정확히 5할로 마치고 6월까지 어떻게 버텨낸 이후 돌입한 7월부터는 매서운 상승세를 보이면서 승패마진을 거의 지워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 기세로 오랜만에 전반기를 A클래스+5할 이상으로 마치는 듯 싶었으나 전반기 마지막 시리즈인 한신과의 고시엔 3연전을 모두 패하며 전반기를 4위+5할 미만으로 마쳤다.
그러다가 후반기에 갑자기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후반기 초반에는 5할 언저리를 유지하며 중위권 싸움을 펼치고 있었는데 승수를 점점 쌓아가더니 단독 2위를 달성했고, 순위는 확정되지 않았 시점에서 최소 A클래스를 확보하며 22시즌 슬로건 대로 어느정도 반격에 성공했다. 비록 작년과 마찬가지로 야쿠르트의 리그 우승을 결정지으면서 헹가레를 또다시 구경하게 되는 치욕을 당했지만 경기 전 요미우리가 주니치에 패배하며 리그 2위를 확정지었다.
그러나 2위를 확정 지은 이후에도 주전들에게 휴식을 제공하지 않고 잔여경기임에도 빡빡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러한 경직된 운영은 결국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그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3차전을 허무하게 내 주면서 시리즈 스코어 1:2로 비참하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4.1.3. 2023년
시즌 전 선발 자원이었던 사카모토 유야와 가미차타니 다이가를 중간계투로 기용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여기에 팀의 주포인 사노 케이타를 1번으로 기용할 방침을 나타냈다.교류전 우승을 달성하고 직후에 진행된 한신 3연전을 쓸어담으며 1위를 재탈환 할 때까진 크게 말이 나오지 않았으나 6월 막바지부터 팀이 서서히 추락하자 그간 묵인하고 있던 문제점들이 수면 밖으로 올라오기 시작. 7월 이후로는 미우라에 대한 비판이 트위터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나 커뮤니티 등지에서 본격화되었고 8월에는 간신히 유지하던 3위 자리마저도 요미우리에 빼앗기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여론이 매우 나빠졌다.
하락세를 달렸을 때 욕먹은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 너무나도 정형화된 벤치의 경기 운영과 투타 지론
정석적인 운영 자체는 나쁠것이 없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다 제 꾀에 넘어가는 사례도 있으니 이러한 위험 부담이 적은 경기 운영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미우라 체제에서는 그 정도가 심한 편으로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정석적인 운영만을 고집하다 이겨야 할 경기를 놓치는 사태가 생기고 있으며 상대 벤치의 전략에 유연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임기응변에 취약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불펜 운용으로, 시즌 초 7회 에스코바 -> 8회 이세 -> 9회 야마사키로 이어지는 필승조 라인을 고집하다 에스코바가 10점대가 넘어가는 부진을 겪고 있음에도 그를 감싸며 기회를 주다 5월 5월 어린이날 경기를 내 주는 참사를 겪고 만다.[21] 여기서 끝이 아니라 5월 이후 부진한 야마사키를 전반기까지 마무리로 고집하다 여러차례 이길 경기를 말아먹었다. 결국 전반기 막바지 3위로 추락하고 나서야 마무리 자리에서 야마사키를 내렸다. 후반기부터는 이세가 계속해서 난타를 당하고 불안감을 노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최근 성적이나 컨디션 등을 고려하면서 불펜 자원을 적절히 활용해야 함에도 리드 중엔 무조건 필승조가 나서야한다는 고정 관념을 타파하는 사례는 필승조가 연투로 인해 휴식을 취하는 경우 외에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타선 운용도 별반 차이가 없는데 상대 선발이 좌완이면 무조건 우타자 도배, 상대 선발이 사이드/언더면 무조건 좌타자 도배가 일상이다. 심지어 좌우놀이에 심취한 나머지 팀 내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인 미야자키를 스타팅에서 제외해버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까지 자행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팀 타격 사이클이 가라앉던지 말던지 초구 일변도 타격에 적극적인 스윙을 강조한 타격 지론을 팀 타선이 나락으로 가 버린지 1개월도 더 된 지금까지도 고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볼질로 자멸하는 투수를 상대로도 차분하지 못하고 냅다 배트를 휘둘러서 범타로 알아서 죽어주는, 실로 상대 입장에선 고마운 상황을 마구 만들어주고 있다. 상황이 어떻던 배트로 공을 맞춰야만 득점이 난다는 일념 하나로 어렵게 만든 득점권 기회를 무모한 적극성으로 수도 없이 걷어찼고 그 결과는 7월 팀 OPS 최하위에 6월 17일 이후 두 자릿수 득점 없음, 6월 18일 이후 6득점 이상 경기 없음이라는 처참한 결과로 돌아왔다.
- 엉망인 선수 관리
올 시즌 미우라 체제에서 가장 의문점이 많은 선수 기용법은 두말할 필요 없이 미야자키의 기용법이다. 시즌 초반 4할이 넘는 타율로 팀 타선을 이끌던 미야자키를 별다른 이유없이 스타팅 라인업에서 제외하는 사례가 유독 많이 보였는데 제외 될 때마다 명쾌한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아 답답함을 유발했다. 일단 미우라 감독이 간접적으로 밝힌 이유는 시즌이 긴 만큼 관리를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기용법은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는데 4월 이후 미야자키의 월간 타율은 서서히 떨어지다 7월에는 .214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들쭉날쭉한 기용 때문에 타격감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아 페이스가 떨어진 것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미야자키가 옆구리 부상을 입은 날에 온전한 휴식을 주지 않고 교체 출전에 수비까지 시킨 것. 시즌이 길다고 관리가 필요하다면서 부상을 입은 선수에게 휴식을 주지 않고 수비까지 시키며 본인이 시즌 초 인터뷰에서 밝힌 사유와 모순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거기다 풀타임 출전이 처음인 세키네에게 휴식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출전시키다 체력 및 집중력 저하로 3할 타율도 무너지고 전반기 막바지에 치명적인 낙구 실책을 범하게 만들었으며 23시즌 들어 컨택과 파워를 모두 잃고 커리어 로우를 쓰는 사노를 그저 팀의 주장이자 간판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휴식이나 재조정 없이 기용하며 시즌 성적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22] 붙박이 4번으로 계속 출전중인 마키 역시 제대로 된 휴식 없이 경기를 뛰는 중이라 피로 누적이 우려된다.
미우라 감독이 정말 선수단의 체력을 관리하고자 했으면 1, 2군 자원을 폭넓게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어야 했지만 아래에 후술할 특정 선수 편애와 홀대로 인해 주전 자리가 없는 포지션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이 골고루 휴식을 부여받지 못하는 결과만 낳았다. 미야자키만 과도하게 챙기다 다른 선수들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며 더욱 웃긴 것은 그렇게 공들여 관리한 미야자키도 시즌 중에 부상을 당했다.
- 특정 선수 편애와 홀대
지난해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지명한 하야시는 주공수에서 모두 함량 미달의 기량을 보이고 있음에도 미우라 감독은 자신의 양아들로 삼고 많은 기회를 부여했다. 단 72타석만에 찍은 WAR가 -0.9인 선수를 좋답시고 계속 1군에서 써먹은게 미우라 감독이다. 그러다 드디어 하야시는 말소가 되었는데 성적 부진이 아닌 부상으로 인한 말소였다. 그러니까 부상만 아니었으면 1군에 붙어있었을텐데 부상이라 경기를 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1군에서 말소시킨 것.
시즌 초에는 쿠스모토에 대한 편애도 심했다. 오오타라는 검증된 외야 자원이 있지만 항상 쿠스모토가 먼저 미우라의 선택을 받았다. 결국 쿠스모토는 선발로 출전한 경기에서의 성적 부진이 장기화되자 대타요원이 메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우라의 영원한 1옵션으로 총애를 듬뿍 받고 있다.
그에 반해 오오타는 지난해부터 갖은 홀대를 받더니 올 시즌에도 변함이 없는 모습이다. 잠깐 써먹다가 못 치니까 벤치에 짱박아두더니 제대로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뒤늦은 2군행 지시로 재조정을 시켜 다시 1군으로 올렸는데 8월 타율이 5할일 정도로 뜨거운 타격감을 과시하고 있다. 미우라 감독도 모처럼 오오타를 믿고 스타팅으로 써 주었고 오오타도 그에 화답하는 식으로 좋은 그림이 그려지나 싶었지만 이렇게 맹타를 휘두르는 와중에도 경기 도중 교체가 너무 잦다. 심지어는 1경기 3안타를 치던 와중에 대주자로 교체되기도 했다.[23]
그렇지만 요미우리도 이제는 고질병이 된 허약한 불펜진, 지나치게 홈런에만 의존하는 타선 문제 때문에 요코하마를 제치고 3위에 올라가본들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4위로 돌아가고 있어서 9월 시점에도 3위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시즌 향방을 결정지을 9월 말 요미우리와의 3연전에서 2승 1패를 거뒀는데 이긴 2경기를 모두 1:0 승리로 장식한데다 25일에 보여준 극한의 이닝 쪼개기 신공이 대성공을 하였고 29일 한신전에서도 이닝 쪼개기로 무사 만루 위기를 넘기고 우여곡절 끝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 짓자 다시 우호적인 반응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클라이맥스 확정도 아닌데 소화시합 하듯이 경기를 치르냐며 까이던 27일 야쿠르트전 같은 졸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에 이어 2023년에도 A클래스에 팀을 안착시키면서 팀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으로는 역사상 최초로 2년 연속으로 팀을 A클래스에 올려놓은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2년 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음에도 그놈의 단기전 운영은 오히려 퇴보해버려서 1승이라도 거둔 지난해보다 더 답이없는 경기 운영으로 2패 광탈을 당해 시즌 전체 일정을 마감했다. 현장에 돌아온 지 5년차가 된 감독이 현장 경험 하나 없는 1년차 초보 감독 아라이 타카히로에게 단기전 운영으로 완패한 것이다. 이번 시리즈 패배로 7년째 2위를 괴롭히던 2위 잔혹사도 끝내버린 것은 덤.
4.1.4. 2024년
여전히 달라진 게 없는 모습으로 팬들의 속을 썩였지만 하필 이 해에 센트럴 리그가 요코하마를 포함해 총 4팀이 우승경쟁권에서 싸우고 있는 혼전 양상이라 전반기까지는 어떻게 성적을 유지하며 버텼다.그러나 후반기가 시작되자 귀신같이 추락하기 시작. 전반기 막바지에 당한 2연패를 포함해 총 9연패를 당하면서 순식간에 우승경쟁권에서 B클래스로 떨어졌다. 어떻게든 연패를 끊기 위해 여러가지 계책을 통해 탈출구를 찾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팀은 나락으로 빠졌다.
그나마 9월에 승수를 쌓으면서 5할 승률을 회복하고 다시 A클래스 경쟁에 뛰어 들었지만 이건 9월 들어 역사에 남을 대추락을 하는 히로시마 덕분에 이렇게 된 영향이 더 크다. 9월 26일에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방치야구로 경기를 던져버리며[24] 참패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항상 인터뷰에서 입이 닳도록 전력을 다하겠다는 말만 반복하였지만 정작 감독 본인이 전력을 다하기는 커녕 게임이 기우는 것을 방관하다 경기를 내 주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여전히 발전 없는 운영을 펼쳤지만 어마어마한 기세로 승패마진을 까먹은 히로시마가 말 그대로 니가가라 CS를 시전한 덕에 10월 2일 경기를 패했음에도 3위 클린치 넘버가 지워지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타선 폭발로 한신 타이거스를 2연패로 누르고 감독 경력 처음으로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을 달성했다.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센트럴리그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만나서 빈타에 빠진 타선 속에서 3연승 직후 2연패에 6차전에서도 선제점을 허용하는 등 우여곡절과 위기를 겪었으나 후반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감독 경력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파이널 5차전에서 퀵후크와 주루 작전에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2년 간의 삽질에서 본인도 느낀 바가 있었는지 기본적인 선발 구성 외엔 경기에 크게 개입하지 않아 과거 포스트시즌에서 보여준 형편없던 지휘가 개선되며 평가가 좋아진 것도 의의.
일본시리즈 제패 직후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는 미우라 |
5.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평균 140km/h 초반, 최고 148km/h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정통파 투수였지만 나이를 먹은 이후로는 평균 137km/h, 최고구속이 145km/h 정도로 줄어들고 빠른 공 외에 컷패스트볼, 슬라이더, 포크볼, 슈트, 슬로커브 등 다양한 구종과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기교파 투수로 변화했다. 통산 9이닝당 볼넷이 2.42개에 불과할 정도로 뛰어난 제구력을 가지고 있으며, 90km/h 안팎의 슬로 커브를 통한 완급조절능력이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단, 이러한 투구 스타일 때문에 피안타, 피홈런은 항상 많은 편이었다.[25]타자친화 구장인 요코하마 스타디움 + 빈약한 베이스타즈의 팀 전력 + 래빗볼로 인한 타고투저 시기에 최전성기를 보냈다는 점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뛰어가면서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다. 다승이나 평균자책점 등의 클래식한 스탯에선 투수의 순수 실력보다는 팀의 도움이 어느 정도 반영되기에 자연스레 누적 기록이 다른 레전드 투수들보다 낮아 저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지만 세이버 스탯으로 보면 미우라가 너무나도 과소평가가 됐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어느 일본의 세이버메트리션이 통산 WAR을 계산해보니 미우라는 강팀에 소속돼 최전성기에 활약한 헤이세이 시대의 여러 대투수들을 제친 것은 물론, 심지어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스즈키 케이시, 야마다 히사시, 에나츠 유타카, 무라타 쵸지 등등의 대선배들 정도[26]만이 미우라를 앞선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平成の大投手 三浦大輔[27] 뛰어난 투수들은 많았지만 이들이 부상으로 일찍 은퇴하거나, 큰 부진을 겪고 재기하지 못하거나, 아예 스스로의 기량을 시험하러 메이저리그로 떠나기도 한 반면 미우라는 정말 오랫동안 꾸준히 일본에서 활약해온 덕분이다.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 투구 동작에 이중 키킹이 있었으나 2005년 이후 이중 키킹이 금지되면서 투구 동작을 바꿔야 했다. 이는 이와쿠마 히사시도 마찬가지.
5.1. 비운의 에이스
타자 친화구장인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홈으로 했음에도 통산 평균자책점이 3.60으로 준수하고 2009년까지 변함없이 훌륭한 피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산 승수가 겨우 172승일 정도로 실력에 비해 승운이 너무나도 없는 통산승수를 기록하고 있다. 150승보다 150패를 먼저 기록했으며 승률도 5할을 못 넘겼는데(172승 184패, 승률 .482) 이것은 전통적으로 약했던 팀전력 때문이다.그러나 미우라 다이스케가 워낙 구단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팀이 재정, 성적, 인기 모두 나락에서 허덕이는 와중에도 이적하지 않고 버텼던 선수였기 때문에[29] 요코하마 팬들에게만큼은 독보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선수이다. 과거의 주축 선수들이 차례차례 은퇴하고 새롭게 팀을 떠받치던 우치카와 세이이치나 무라타 슈이치 같은 우수한 선수들도 FA로 다 떠나가는 요코하마에서 거의 유일한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할 수 있는데, 은퇴 시점에선 야구계에서도 유일했던 1998년 우승멤버[30]이자 팀에서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시대를 맛본 마지막 선수였다. 그래서 적어도 7~8년 뒤에 가장 강력한 요코하마 감독 후보 1순위로 불리기도 했고 실제로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1군 감독이 되었다.
6.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WAR |
1992 | 타이요 | 1 | 0 | 0 | 0 | - | 2 | 0.00 | 0 | 0 | 0 | 0 | 1 | 0.000 | - | 0.1 |
1993 | 요코하마 | 15 | 3 | 3 | 0 | - | 60⅓ | 3.43 | 60 | 4 | 21 | 2 | 61 | 1.343 | 108 | 1.2 |
1994 | 17 | 2 | 2 | 0 | - | 47⅔ | 4.34 | 61 | 2 | 25 | 0 | 35 | 1.804 | 87 | 0.6 | |
1995 | 25 | 8 | 8 | 0 | - | 147⅔ | 3.90 | 131 | 17 | 52 | 4 | 107 | 1.239 | 105 | 1.9 | |
1996 | 34 | 5 | 10 | 0 | - | 131⅓ | 4.93 | 151 | 17 | 55 | 1 | 101 | 1.569 | 88 | 1.6 | |
1997 | 26 | 10 | 3 | 0 | - | 142⅓ | 3.35 | 113 | 9 | 51 | 3 | 129 | 1.152 | 122 | 3.4 | |
1998 | 25 | 12 | 7 | 0 | - | 158⅔ | 3.18 | 138 | 12 | 60 | 3 | 119 | 1.248 | 118 | 1.8 | |
1999 | 30 | 9 | 10 | 0 | - | 175 | 4.27 | 174 | 22 | 51 | 2 | 133 | 1.286 | 98 | 2.2 | |
2000 | 24 | 11 | 6 | 0 | - | 164⅔ | 3.22 | 154 | 22 | 32 | 3 | 122 | 1.130 | 128 | 1.9 | |
2001 | 26 | 11 | 6 | 0 | - | 168⅔ | 2.88 | 137 | 14 | 53 | 2 | 135 | 1.126 | 139 | 3.6 | |
2002 | 19 | 4 | 10 | 0 | - | 119⅔ | 3.23 | 108 | 12 | 28 | 2 | 100 | 1.136 | 119 | 1.9 | |
2003 | 15 | 5 | 5 | 0 | - | 101⅓ | 4.09 | 94 | 18 | 21 | 5 | 82 | 1.135 | 110 | 1.0 | |
2004 | 22 | 6 | 8 | 0 | - | 144 | 4.25 | 158 | 17 | 33 | 5 | 135 | 1.326 | 109 | 2.9 | |
2005 | 28 | 12 | 9 | 0 | 0 | 214⅔ | 2.52 | 168 | 20 | 52 | 4 | 177 | 1.025 | 172 | 4.3 | |
2006 | 30 | 8 | 12 | 0 | 0 | 216⅔ | 3.44 | 227 | 19 | 44 | 5 | 160 | 1.251 | 114 | 3.9 | |
2007 | 28 | 11 | 13 | 0 | 0 | 185⅓ | 3.06 | 184 | 15 | 51 | 7 | 159 | 1.268 | 133 | 3.7 | |
2008 | 21 | 7 | 10 | 0 | 0 | 144 | 3.56 | 137 | 22 | 29 | 4 | 111 | 1.153 | 106 | 1.2 | |
2009 | 28 | 11 | 11 | 0 | 0 | 195⅓ | 3.32 | 175 | 28 | 37 | 4 | 138 | 1.085 | 118 | 2.3 | |
2010 | 16 | 3 | 8 | 0 | 0 | 79⅔ | 7.23 | 108 | 12 | 23 | 4 | 58 | 1.644 | 63 | 1.0 | |
2011 | 18 | 5 | 6 | 0 | 0 | 111⅓ | 2.91 | 96 | 9 | 31 | 7 | 74 | 1.141 | 115 | 0.7 | |
2012 | DeNA | 25 | 9 | 9 | 0 | 0 | 182⅔ | 2.86 | 160 | 15 | 48 | 3 | 107 | 1.139 | 110 | 1.7 |
2013 | 27 | 9 | 13 | 0 | 0 | 175⅔ | 3.94 | 181 | 26 | 33 | 1 | 109 | 1.218 | 100 | 1.5 | |
2014 | 15 | 5 | 6 | 0 | 0 | 94⅔ | 3.04 | 99 | 14 | 23 | 4 | 55 | 1.289 | 137 | 0.2 | |
2015 | 17 | 6 | 6 | 0 | 0 | 98 | 4.13 | 103 | 9 | 25 | 1 | 62 | 1.306 | 85 | 0.8 | |
2016 | 3 | 0 | 3 | 0 | 0 | 14⅔ | 11.05 | 29 | 3 | 4 | 0 | 14 | 2.250 | 36 | 0.2 | |
NPB 통산 (25시즌) | 535 | 172 | 184 | 0 | 0 | 3276 | 3.60 | 3146 | 358 | 882 | 76 | 2481 | 1.230 | 111 | 44.2 |
7. 기타
화보를 참 간지나게 찍는걸로 유명하기도 한데 이때 찍은 리젠트 머리가 반응이 좋아서 그때부터 하마의 번장이란 별명이 붙었다. 젊은 시절에는 경기 중에도 왁스만 안 발랐다뿐이지 이 스타일을 유지했고, 비시즌일때도 항상 이런 머리를 한다. 등장곡의 이름도 '리젠트 블루스'[31]이며, 동명의 경주마를 소유한 마주이기도 하다. 이 헤어스타일은 고시엔도 나가지 못한, 무명의 하위 지명 고졸신인으로서 돋보이기 위해 시작한 것도 있고, 본인 스스로가 옛날 일본의 락스타였던 야자와 에이키치를 존경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니폼에 새긴 'D. MIURA'라는 네이밍도 야자와에게서 따온 것이라고. 은퇴한 지금도 방송출연이나 공식행사 참석 등 때는 저 헤어스타일을 한다. 다만 일상생활에서까지 저렇게 머리카락에 힘주고 있지는 않은데 평범한 머리스타일일 때는 그냥 덩치 좀 큰 평범남같은 인상이다.
마주로서 대표마는 리젠트 록(リーゼントロック)이다. 중상 승리 경험은 없지만 게시판에 꾸준히 입상한 덕에 총상금이 1억 6천만엔에 달한다. 2014년 스프링 스테이크스 5착, 2019년 사가 기념 2착. G1 경주 출주 성적은 2018년 도쿄대상전 8착.
미우라가 셀카를 찍을 때는 항상 같은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데 이 구도를 이른바 '반쵸 프레임'이라고 한다. 왼 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자신은 화면 한 쪽 구석에 있고 남은 공간에 배경이나 같이 찍는 사람이 나오도록 하는 것인데... 구석에 얼굴만 달랑 튀어나와 있는 게 꼭 합성 같지만 진짜다. 이런 재밌는 점 때문에 인터넷에선 네티즌들이 재미로 합성하기도 하고... 미우라의 블로그에는 진짜 반쵸 프레임의 사진들이 잔뜩 있다.
2012년 4월 12일에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열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3회전 시합에서 4-0으로 승리, 거의 3년 만에 완봉승을 거두었다.2012.4.12 야쿠르트 대 DeNA 3회전 미우라 완봉 (일본어)[32]
에이스임인만큼 개막전 선발 투수로 7경기[33]나 등판하였으나 모두 패하는 바람에 끝내 개막전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했으며 개막전 7연패는 일본프로야구 기록이다. 다만 개막 카드의 2, 3차전에선 6차례 선발 등판해서 모두 승리투수가 되었던 정반대의 기록도 가지고 있다.
2015년 시즌이 끝나고 야마모토 마사, 사이토 다카시등의 최고령 투수들이
프로레슬링 매니아이며 1990년대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투혼삼총사 중 한명인 파괴왕 하시모토 신야와 친분이 두텁기도 했다.[35]
팬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하다. 일일이 팬들과 사진을 찍고,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모두 읽고 사인해서 다시 보낸다고 한다. 일부 팬들이 받은 선수의 사인을 인터넷에 올려 판다는 소식에도 “가치가 없어질 만큼 팬들에게 사인을 많이 해주면 된다”라고 말할 정도.
2016년 12월 31일 가키노츠카이 웃으면 안되는 씨리즈에 출연해서 술래잡기 벌칙에 걸린 엔도의 엉덩이에 직구를 꽂아넣었다.(...)
자신의 블로그에 자주 글을 쓴다. 거의 매일 업로드 한다고 봐도 될 정도. 자신의 일상이 담긴 사진을 올리며 짤막하게 글을 쓰는데, 문장으로 글을 쓰지 않고 한 단어씩 쓴다... 글의 내용은 예를 들어 '오늘도... 맑음!'같이 글을 상당히 짤막하게 쓴다. 그리고 항상 글의 맨 마지막에는 'ヨ・ロ・シ・ク!!(요로시크!)'라는 특유의 멘트를 반드시 남긴다. 현재는 시즌 중이라 시즌이 시작될 때 결의를 다지는 글을 가끔씩 올리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블로그 활동을 중단한 상태지만 과거에 업로드한 글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개설한 이후로는 블로그보단 인스타 쪽에 게시물을 투고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TBS 일요극장 99.9 ~형사 전문 변호사~ 시즌 2에 깜짝 출연했었다. '요코하마의 팬이자 미우라 다이스케의 광팬인 미우라 다이스케와 정말 똑같이 생긴 주유소 직원'으로 나온다. 끝내기 홈런을 보고 좋아했다는 말을 해서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주는 나름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 비록 분량은 50초 가량이지만... 미우라 다이스케와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의 모습과, 끝에 키무라 후미노가 '미우라 다이스케가 누구죠?'라고 물어보는 장면이 웃음 포인트. 참고로 그 당시 경기 상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였고, 홈런을 친 타자는 작품 배경인 2010년 당시 요코하마에서 뛰었던 용병타자 터멜 슬레지. 고증오류를 찾자면, 2010년이면 DeNA에 베이스타즈가 인수되기 전인데, DeNA 베이스타즈의 마스코트인 DB 스타맨 인형과 2016년 유니폼을 입은 미우라 다이스케를 볼 수 있다.
가족관계로는 1995년 고교 선배였던 일반인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장녀 나기사는 경마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산케이스포츠의 경마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장남 레오토는 고교때까지 선수로 뛰었으나, 졸업 때 드래프트 지명이나 대학의 입학 추천을 받지 못해 프로선수가 되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래도 대학은 야구부가 있는 타마가와 대학으로 진학해 야구를 계속 해 왔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야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참고로 동생은 연극무대를 주로 활동하며 각종 드라마, 영화에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배우 미우라 츠요시로 동생도 대학 중퇴 전까지 야구를 했던 경력이 있다.
자신의 주변 73년생 동기들이 매우 화려한 편인데 그 유명한 스즈키 이치로와도 동기이며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나카무라 노리히로, 마쓰나카 노부히코, 이시이 가즈히사 등 쟁쟁한 선수들과 동년배이다.
8. 관련 문서
[1] 선수 겸임.[2]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2019년에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경기 전 이 노래를 라이브로 부른 적도 있다. 그리고 미우라는 곡명과 동명인 말의 마주이기도 하다. 특히 미우라는 타케우치의 러브 머신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3] ゴーゴーレッツゴー 跳ねろマウンド三振奪取 決まってるぜ リーゼント 勝利だ三浦(고 고 렛츠고 올라라 마운드에 삼진탈취 정해졌어 리젠트 승리다 미우라)[4] 비시즌에만 운영하고 시즌이 시작되면 블로그를 하지 않는다.[5] 요코하마의 마지막 우승시즌인 1998년 8월 15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메이지진구 구장 원정경기. 참고로 선두타자가 후루타 아츠야이다.[6] 배경음악은 그의 등장곡 '리젠트 블루스'[7] 실제로 요코하마 DeNA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없기로 유명한 팀이다.[8] 거기다가 지도자 경력 역시도 베이스타즈에서만 쌓고 있기에 진정한 의미의 원클럽맨으로 볼 수 있다.[9] 2018년부터 그 규정은 철회 되었다.[10] 요미우리전 통산 승패가 13승 39패로 매우 부진했다. 감독 취임 이후에도 상대전적 열세를 기록하며 여전히 요미우리에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2022년에 13승 11패 1무로 상대전적 우세를 기록하기도 했고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경기마다 요미우리의 발목을 잡으면서 호구 이미지를 나름 희석시켰다. 반면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는 꽤나 잘 던졌는데 대 한신전 통산 승패는 46승 32패. 이 때문에 선수생활 말년까지도 표적등판을 할 만큼 한신전에 자주 나왔다. 괜히 FA때 한신이 미우라를 데려오려고 했던것이 아니다. 간사이 출신에 한신 킬러로 유명했으니.[11] 1990년대 데뷔한 일본프로야구 투수로서는 최다 이닝 소화. 단 타 리그 성적까지 합산하면 구로다 히로키가 NPB 2012.2이닝+MLB 1319.0이닝으로 3340.2이닝을 던져 조금 더 앞선다.[12] 이날 시합은 또한 훼일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투수였던 엔도 카즈히코의 은퇴시합이었다.[13] 당시 센트럴리그는 1973~2012년까지 최고승률 타이틀을 시상하진 않았으나 이와는 별개로 양대리그 모두 연간 승률이 1위 투수에 대해 시즌별로 기록을 남겼다. 단 센트럴리그는 규정이닝에 도달한 선수, 퍼시픽리그는 13승 이상을 기록한 선수로 집계 범위 기준이 각각 달랐다.[14] 이는 타이요 훼일즈가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본거지를 옮긴 이래 첫 우승이기도 했다.[15] 탈삼진 타이틀은 같은 팀의 카도쿠라 켄과 동시 수상.[16] 등록명 유헤이. 풀네임은 타카이 유헤이.[17] 이날 감독 알렉스 라미레즈는 미우라를 최대한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6회초 3실점을 허용하고 이닝을 마친 상황에서 다음 회 요코하마 공격에 투수 타석이 있었기에 팬들은 여기서 대타를 내리라고 예상했으나 라미레즈 감독은 그대로 미우라를 타자로 출전시켜서 마지막 타석에 들어서게 해줬고, 7회초에는 정말 교체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또 미우라를 마운드로 올려보내 한 타자를 더 상대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유헤이를 삼구삼진으로 마무리함으로써 미우라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해준 것.[18] 현재까지는 미우라가 의도한대로 기용된 선수들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기는 하다. 그러나 개막 이후 계속해서 난조를 보인 이시다 켄타를 무리하게 리드 상황에서 기용하다 2경기를 날려먹고 뒤늦게 기용법을 바꾼것은 명백한 미우라의 실책이라 감독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19] '당신의 아버지 때문에 팀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괴롭다. 정말 밉다.'는 내용인데 웃긴 것은 할 말 다 해놓고 사과하는걸로 마무리가 된다... 과격한 표현이나 심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미우라의 딸은 해당 DM을 받은 뒤 DM을 닫아버렸다. 참고로 미우라의 딸 나기사는 경마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사회인이다. 트위터도 대부분 경마에 관련된 내용인데 여기서 그런 DM을 받은 것.[20] 그 와중에 4월 22일 주니치전 패전으로 3승 17패 4무를 기록하며 무려 1979년 세이부 라이온즈 이래 42년 만에 개막 24시합에서 고작 3승에 그치는 막장 기록까지 세우고 말았다.[21] 초중반부터 터진 타선의 힘으로 9:4까지 이기고 있었으나 에스코바와 야마사키의 방화로 9:10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22] 결국 8월 6일 경기에서 사노는 7회말에 대타 쿠스모토로 교체되었다.[23] 일본야구를 이전부터 보던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오오타는 데뷔 전부터 5툴 플레이어 재목으로 꼽힐만큼 신체 능력이 좋은 선수다. 나이가 좀 있다해도 순수 주력도 좋고 주루 센스도 준수한데 그런 선수를 대주자로 교체한 것이다.[24] 초반부터 6점을 잃으며 어렵게 시작했으나 타선이 4점을 만회하여 4회초 돌입 시점에서 6:4로 2점차 추격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카미챠타니가 아웃 하나를 못 잡고 고전하는 와중에도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4회와 5회에 3실점씩을 더 추가하며 12:4로 패배했다. 이날 이후 이틀간 일정이 없어 투수 자원을 쏟아부을 여력이 충분했고 4위 히로시마에 불과 1.5게임차 앞선 상황이라 총력전을 펼치지 않은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 많았다.[25] 2005년 교류전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거포 알렉스 카브레라에 인보이스 세이부 돔의 환기구를 맞추는 추정 비거리 180m의 홈런을 맞기도 했고, 2015년에는 야나기타 유키에게 요코하마 스타디움 전광판을 직격하는 홈런을 맞는 등 임팩트 있는 홈런들을 꽤 맞았다.[26] 정확히 위의 투수들의 데뷔가 1960년대인 것은 맞으나 전성기의 시작은 1970년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27] 다만 이 세이버메트리션의 WAR 계산은 요코하마 스타디움의 구장 보정을 상당히 크게 계산해서 아래 위키에 인용된 npb data의 WAR보다 약 20 정도 많다.[28] 12승 9패 214.2이닝 ERA 2.52 177 탈삼진 52사사구 10완투 2완봉. 승수와 완투 기록을 보면 거의 완투를 해야 이길 수 있었다는 것과 다름없는 성적이다.[29] 사실 2008년에 미우라가 FA를 선언했고 이때 한신 타이거스가 영입을 시도했지만, 구단과 팬들의 열성적인 만류로 결국 잔류를 선언했다. 이 일이 본인에게나 구단에게나 나름대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보니 그의 은퇴를 기념하며 구단에서 그의 선수생활을 회고하는 영상을 만들었을 때와 스포츠뉴스 보도에서도 빠지지 않고 언급됐다.[30] 2015년 기준으로 당시 요코하마 선수들 중 현역으로 남아있는 선수는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 타니시게 모토노부,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사이토 타카시가 있었다. 하지만 2명 모두 2015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하면서 미우라가 마지막 현역 우승멤버가 되었다.[31] 유비트 소서에 수록되었다.[32] 또 이 시합은 2012년 시즌 개막 이래, 다시 말해서 DeNA 베이스타즈가 출범한 이래 팀이 처음으로 연승을 거둔 시합이다.(...)[33] 1999, 2002, 2004~2007, 2009. 참고로 2010년에도 개막전 선발투수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스프링캠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인 탓에 스티븐 랜돌프로 변경되었고 이후 은퇴할 때까지 개막전 선발로 다시 낙점되지 못했다. 여담으로 그 2009년의 개막전마저 요코하마는 3:7로 한신에게 지고 말았다(...)[34] 여담으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스즈키 이치로가 일본프로야구에 복귀할 경우 바로 최고령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데뷔는 1992년에 같이 했지만 이치로의 생일이 더 빠르기 때문. 결론적으로 은퇴도 미우라가 먼저 하게 되었다.[35] 하시모토가 2005년 7월 11일 사망 후 2일 뒤인 13일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었고 이 날 인터뷰에서 하늘에 있는 하시모토에게 승리를 바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